요한복음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눈을 뜬 사람과 눈을 감은 사람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자,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웃들은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그 사람 아닌가?」 하고 웅성거립니다. 그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해도 사람들은 계속 확인하려 합니다. 그를 조사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그의 눈이 어떻게 열렸는지 거듭 묻지만, 설명을 들을수록 그를 고쳐 주신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오셨다는 가능성은 더욱 강하게 거부합니다.
반면 눈을 뜬 사람은 처음에 예수님의 이름만 알았고, 어디 계신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질문과 논쟁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 「주님,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엎드려 절합니다.
눈을 뜬 사람은 점점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처음부터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점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은 바로 이 역전을 따라 전개됩니다.
처음에는 누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눈멀게 태어났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끝에서는 자신들이 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죄가 남아 있다는 예수님의 선언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눈먼 사람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판단하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눈멂을 말씀하십니다.
그 사이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예수님은 고통의 원인을 따지는 데 머무르지 않으시고 한 사람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공동체에서 내쫓기자 다시 찾아오셔서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십니다. 8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9장은 그 선언이 한 사람의 삶에서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면서, 빛 앞에 선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는지도 드러냅니다.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제자들이 바라본 사람과 예수님이 보신 사람
이야기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는 지나가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았다.요한복음 9:1 · 본디새김
이 장의 출발점에서 먼저 보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본문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구걸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를 보자마자 한 가지 질문을 꺼냅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다. 「랍비, 누가 죄를 지었기에 이 사람이 눈먼 채로 태어났습니까? 이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복음 9:2 · 본디새김
제자들이 궁금해한 것은 그의 현재 처지도, 그가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도 아닙니다. 그가 왜 그런 상태로 태어났는지, 그 원인이 누구의 죄에 있는지입니다.
구약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적인 고난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만, 모든 고난을 특정한 죄에 대한 벌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질문은 당시의 모든 유대인이 반드시 공유했던 단일한 교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 안에서도 계속 논의되어 온 문제를 한 사람의 상황에 적용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두 가지 가능성만 제시합니다. 본인의 죄이거나 부모의 죄입니다. 그들은 고난이 반드시 누군가의 잘못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가능성을 모두 거부하십니다.
예수가 대답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부모가 지었기 때문도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9:3 · 본디새김
제자들은 과거의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드러날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의 과거에서 잘못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행하실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를 눈멀게 태어나도록 하셨다는 뜻일까?
여기에는 반드시 짚어야 할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읽기는 3절을 하나의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그 사람이 눈멀게 태어난 일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원래 그리스어 사본에는 오늘날과 같은 문장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읽기도 가능합니다. 3절의 「도리어 하나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를 4절의 「낮 동안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와 이어 읽으면, 예수님은 그가 왜 눈멀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숨겨진 목적을 밝히시기보다 지금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두 읽기의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첫 번째 읽기에서는 고난의 발생과 하나님의 목적이 연결됩니다. 두 번째 읽기에서는 고난의 발생 원인은 설명되지 않고, 그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해야 한다는 요청이 강조됩니다. 어느 읽기가 원문의 의도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에서 모두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제시한 죄의 원인론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가지고 어떤 사람의 장애나 질병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 때문에 의도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모든 장애가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한 사람의 고통 앞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낮 동안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온다.」요한복음 9:4 · 본디새김
예수님은 ‘우리’라고 말씀하시며 함께하는 제자들까지 하나님의 일에 포함하십니다. 바로 이어질 치유는 예수님이 직접 행하시지만, 제자들도 하나님의 일과 무관한 관찰자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낮과 밤은 햇빛이 있는 시간과 없는 시간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사역의 시기와 그 사역을 가로막는 어둠을 함께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위기의 시간이 그 배경에 있을 수 있지만, 이 구절은 그 시간을 명시적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이 일해야 할 때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복음 9:5 · 본디새김
이제 빛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선언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바로 눈앞에 태어날 때부터 빛을 볼 수 없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0:5에는 조상의 죄가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은 그의 고난을 죄에 대한 심판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마지막에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자신에 관하여 옳게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욥기 42:7). 에스겔 18:1–4, 20은 자녀가 부모의 죄책을 그대로 떠맡는다는 생각을 반박하며 각 사람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또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눈멀었는데 본인이 태어나기 전에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이 남습니다. 이를 태어나기 전의 죄에 관한 관념이나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과 연결하는 해석들이 있지만, 제자들이 정확히 어떤 이론을 염두에 두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보냄을 받은 분이 보냄을 받은 못으로 보내시다
왜 침과 진흙을 사용하셨을까?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고 땅에 침을 뱉으십니다. 그리고 침으로 진흙을 만들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십니다. 말씀만으로 사람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 왜 굳이 침과 진흙을 사용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고대에는 침에 치료 효과가 있다고 여기는 관습이 있었고, 마가복음 7:33과 8:23에서도 예수님이 치유 과정에서 침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침이나 진흙 자체에 의학적인 능력이 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해석은 진흙을 여호와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창세기 2:7과 연결하여, 이 행동을 새로운 창조의 상징으로 읽습니다. 눈을 뜨게 하는 일이 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일이기에 의미 있는 연결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은 창세기 2:7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므로, 창조와의 연결은 가능한 유형론적 해석이지 본문이 명시한 설명은 아닙니다.
이야기 속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이 진흙을 바르신 뒤 하신 명령입니다.
그에게 말했다.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어라.」 (실로암은 옮기면 「보냄을 받은 이」이다.) 그래서 그가 가서 씻고 눈이 보이는 채로 돌아왔다.요한복음 9:7 · 본디새김
요한은 직접 지명의 뜻을 설명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반복해서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보내심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시고, 8장에서도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계속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한 사람을 ‘보냄을 받은 이’라는 뜻을 지닌 곳으로 보내십니다.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이 한 사람을 보내시고,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서 씻은 뒤 눈을 뜹니다. 실로암이라는 지명이 예수님의 ‘보내심’이라는 주제와 연결된다는 해석은 요한복음의 문맥에 잘 어울립니다. 다만 실로암이라는 이름이 곧 예수님을 직접 상징한다고까지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갔습니다.
씻었습니다.
그리고 보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그가 어떻게 실로암까지 갔는지, 누가 길을 안내했는지, 어떤 기대를 품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기록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사람의 행동, 그리고 그 결과입니다.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예수라는 사람」으로만 알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갔고 눈을 떴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뜬 뒤에도 예수님을 직접 알아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실로암에서 씻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이 곁에 계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기까지 길고 불편한 과정을 겪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실로암은 실제로 예루살렘에 있던 물 공급 시설과 연결된 장소입니다. 2004년 예루살렘 다윗성 남쪽에서 계단식 대형 못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제2성전 시대의 실로암 못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다만 정확히 어느 시설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실로암인지는 논쟁이 남아 있습니다. 또 눈을 여는 일은 구약의 약속과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이사야 35:5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실 때 눈먼 사람들의 눈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며, 그 원래 문맥은 광야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기쁨 가운데 돌아오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사야 42:6–7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종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시고, 눈먼 사람들의 눈을 열며 갇힌 사람들을 어둠에서 이끌어 내게 하십니다. 시편 146:8도 여호와야훼께서 눈먼 사람들의 눈을 여신다고 노래하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함께 드러냅니다. 이 구절들은 요한복음 9장에서 직접 인용되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직후 눈먼 사람의 눈을 여시는 사건과 분명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께 기대했던 생명의 회복과 구원이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눈을 뜨자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다
「내가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돌아오자 이웃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이웃 사람들과 전에 거지였던 그를 보던 이들이 말했다.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그 사람 아닌가?」요한복음 9:8 · 본디새김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다」 했고 다른 이들은 「아니다. 그와 닮은 사람이다」 했다. 그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이다」 했다.요한복음 9:9 · 본디새김
눈을 뜬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사람들은 눈먼 채 구걸하던 모습으로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볼 수 있게 되자 자신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맞지 않아, 그가 정말 같은 사람인지 의심합니다.
그들은 그 사람을 오랫동안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알고 있던 중요한 정보 하나가 달라지자 그가 누구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과 나란히 놓였는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에 근거해 판단합니다. 그런데 눈앞의 현실은 그 판단을 다시 살펴보라고 요구합니다.
「알고 있지 않다」
사람들이 「어떻게 네 눈이 열렸느냐?」 하고 묻자,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에게 『실로암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고 보게 되었다.」요한복음 9:11 · 본디새김
그는 예수님을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아직 메시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자신이 경험한 일만 말합니다. 진흙을 바르셨고, 씻으라고 말씀하셨고, 그대로 했더니 눈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가 말했다. 「알고 있지 않다.」요한복음 9:12 · 본디새김
그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별합니다. 눈이 어떻게 열렸는지는 설명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누구신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할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와 대조됩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에 관해 무엇을 아는지 반복해서 주장하지만, 이 사람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보게 됩니다.
이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다’와 ‘모른다’, ‘본다’와 ‘보지 못한다’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독자의 판단을 흔듭니다.
조금 더 깊이
「내가 그 사람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에고 에이미로,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표현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적 정체성의 선언이 아니라, 본인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밝히는 평범한 대답입니다. 요한복음 8:58에서 예수님의 「나는 있다」가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은 단순히 두 단어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하신다는 문맥과 그에 대한 반응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표현이라고 해서 언제나 같은 신학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므로, 단어가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기적의 사실보다 기적의 날짜가 문제가 되다
안식일에 진흙을 개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뜬 사람을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려갑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때까지 밝히지 않았던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가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연 날은 안식일이었다.요한복음 9:14 · 본디새김
이 설명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꿉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지만, 이제는 그 일이 안식일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논쟁의 중심으로 들어옵니다. 요한은 「진흙을 개어」라는 행동을 특별히 언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흙을 만드시고 치료 행위를 하셨다는 점을 안식일 위반으로 문제 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악의를 가진 사람들로만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이 말했다.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표징을 행할 수 있는가?」 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다.요한복음 9:16 · 본디새김
두 집단 모두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합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쪽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갈등은 엄격한 사람들과 관대한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논쟁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뒤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볼 수 없었는데 이제 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언자입니다」
그들은 다시 눈을 뜬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눈먼 사람에게 다시 말했다. 「그가 그대의 눈을 열었으니 그대는 그를 두고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가 말했다. 「예언자입니다.」요한복음 9:17 · 본디새김
처음에는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는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이 변화는 누군가에게서 신학적인 설명을 배워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여신 분이 평범한 사람일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 나왔습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보내셔서 그분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분이라는 인식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편안한 배움의 과정이 아닙니다. 그는 점점 더 거센 심문을 받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후대에 편찬된 《미슈나》의 안식일 규정에는 ‘반죽하다’ 또는 ‘개다’에 해당하는 작업이 금지된 노동의 한 종류로 분류되어 있습니다(미슈나, 샤밧 7:2). 진흙을 만드는 행위도 그런 노동의 범주와 연결될 수 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생명이 위급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료를 시행하는 일이 안식일에 허용되는지에 대해서도 유대교 안에서 규정과 논의가 발전했습니다. 다만 미슈나는 예수님 시대보다 후대에 편집된 문헌이므로, 그 세부 규정을 예수님 당시의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확히 동일하게 적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도 아들을 지켜 주지 못하는 자리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가 태어날 때부터 눈멀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모를 부릅니다.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여러분의 아들입니까? 여러분 말로는 눈먼 채로 태어났다는데, 그러면 지금 어떻게 봅니까?」요한복음 9:19 · 본디새김
정말 여러분의 아들입니까? 정말 눈먼 채로 태어났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 볼 수 있습니까? 부모는 처음 두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의 부모가 대답하여 말했다.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이며 눈먼 채로 태어났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요한복음 9:20 · 본디새김
그가 이전부터 볼 수 있었는데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는 식의 설명은 이 증언과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세 번째 질문에는 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보는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 그의 눈을 열었는지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성년이니 자기 일은 스스로 말할 것입니다.」요한복음 9:21 · 본디새김
그들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실만 인정합니다. 그러나 누가 그를 고쳤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의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회당 공동체에서 쫓아내기로 유대 사람들이 이미 뜻을 모아 둔 터였다.요한복음 9:22 · 본디새김
회당은 일정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건물만이 아니라 유대 공동체의 종교적·사회적 삶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예배와 공동체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예수님 당시 모든 회당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일률적으로 추방하는 제도를 갖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 안에서 분명한 것은 부모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아들의 상태가 달라진 것을 알지만, 그 대답이 자신들의 공동체적 지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어디까지 말할지 조심합니다.
그렇다고 이 부모를 쉽게 비겁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들의 구체적인 생활이나 아들을 대하는 마음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위험을 느꼈고,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아들이 직접 대답하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눈을 뜬 사람은 다시 혼자 질문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 섭니다. 눈을 뜨게 된 사건은 그에게 기쁨만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권위자들 앞에서 계속 설명하고 대답해야 하는 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과정에서 그의 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회당의 조직과 권위가 달랐으므로, 구체적으로 어떤 제재와 사회적 결과가 뒤따랐는지 모든 경우를 동일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이 구절이 예수님 당시의 특정한 회당 제재를 기록한 것인지, 요한복음이 기록될 무렵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공동체 갈등을 이야기 속에 반영한 것인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습니다. 9:22가 복음서 기록 당시의 회당 추방 경험을 반영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고, 안식일을 둘러싼 갈등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배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요구
사람들은 눈멀었던 사람을 두 번째로 부릅니다.
그래서 그들이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복음 9:24 · 본디새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를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유로 이해하면 이 장면의 긴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7:19에서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여호와야훼께 영광을 돌리고 사실대로 고백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와 함께 놓이면, 조사하는 사람들이 이미 결론을 내려 놓고 그 결론을 인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이해할 여지가 큽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일하셨을 가능성은 이미 배제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진흙을 개시고 사람을 고치셨다는 이유로 내린 판단을 확정된 지식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눈을 뜬 사람의 대답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가 죄인인지는 알고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눈멀어 있었는데 지금은 본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9:25 · 본디새김
그는 예수님의 모든 행동을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안식일 논쟁을 해결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확실히 아는 것을 말합니다.
눈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봅니다.
개인적인 경험만으로 어떤 사람의 정체와 모든 신학적 주장을 자동으로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사람들은 부모의 증언으로도 확인된 눈앞의 증거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이미 내린 결론을 지키기 위해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진실을 향한 태도는 많은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데서가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구별하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 「어떻게 그대의 눈을 열었습니까?」 하고 묻자, 이번에는 그도 더는 조심스럽게 답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했는데 여러분이 듣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 합니까? 설마 여러분도 그의 제자가 되려는 것입니까?」요한복음 9:27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계속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묻고 있습니다. 이 반어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다음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제자와 예수님의 제자
그들이 그를 모욕하며 말했다. 「너는 그 사람의 제자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요한복음 9:28 · 본디새김
처음에는 눈먼 사람이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조사했지만, 이제는 누구의 제자인가 하는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고 있지 않다.」요한복음 9:29 · 본디새김
다시 ‘안다’와 ‘모른다’가 등장합니다. 모세에 대한 그들의 지식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근거로, 지금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는 일은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 5:45–47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글을 참으로 믿었다면 예수님도 믿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눈을 뜬 사람이 그 문제를 직접 제기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바로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내 눈을 열었습니다.」요한복음 9:30 · 본디새김
그는 이제 조사하는 사람들의 논리 자체를 검토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을 열어 주신 분이 어디서 오셨는지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라고 되받습니다.
논쟁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말을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말을 들으십니다.」요한복음 9:31 · 본디새김
이것은 예수님이나 서술자가 선언한 신학적 원칙이 아니라, 눈을 뜬 사람이 논증 가운데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죄인이 드리는 기도를 어떤 경우에도 듣지 않으신다는 보편적인 교리로 만들면 곤란합니다. 구약에도 시편 51편처럼 죄인이 회개하며 여호와야훼께 부르짖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의 논증은 그보다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죄인이 어떻게 태어날 때부터 눈멀었던 사람의 눈을 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복음 9:33 · 본디새김
처음에는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다음에는 「예언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뒤에서 그는 여전히 사람의 아들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너는 온통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
그들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너는 온통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 그런 네가 우리를 가르치느냐?」 그리고 그를 밖으로 내쫓았다.요한복음 9:34 · 본디새김
이 말은 2절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이 사람이 눈먼 채로 태어났습니까?」를 다시 불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그의 눈멂을 특정한 죄로 설명하려는 생각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조사하는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뜬 뒤에도 여전히 그를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그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을 그들은 확인했고, 부모도 그가 눈먼 채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평가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의 몸은 달라졌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밖으로 내쫓습니다. 이 행동이 그 자리에서의 축출을 가리키는지, 회당 공동체로부터의 배제까지 포함하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22절에서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문제를 명시했기 때문에, 이 장면을 그 위협이 실제로 나타나는 사건으로 이해할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자신을 심문하던 사람들에게서 배척당합니다.
처음에 그는 거지로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고쳐 주신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증인이 되었고, 바로 그 증언 때문에 배척받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쫓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찾아내시다
치유받은 사람을 왜 다시 찾아오셨을까?
35절은 짧지만 이 장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구절입니다.
예수는 그들이 그를 밖으로 내쫓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내어 말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요한복음 9:3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찾아오시는 때는 그가 눈을 뜬 직후도, 예언자라고 말했을 때도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셨다고 주장한 뒤, 결국 내쫓겼을 때입니다. 그를 심문하던 사람들은 더는 그와 대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겪은 일을 설명하라고 요구하지도, 사람들이 왜 그를 내쫓았는지 따져 묻지도 않으십니다. 믿음의 문제를 직접 제기하십니다.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을 열어 주셨고, 이제는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심으로써 그가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눈을 뜨는 일과 예수님을 믿는 일은 같은 사건이 아닙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그를 믿으려고 묻습니다.」요한복음 9:36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예수님을 거부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믿기 위해 알고 싶다는 질문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따지던 사람들의 질문에는 자신들의 판단을 지키려는 태도가 드러났습니다. 반면 이 사람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기 위해 묻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그리고 너와 말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다.」요한복음 9:37 · 본디새김
그는 예수님께서 진흙을 바르셨을 때도, 실로암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도 예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눈을 뜬 뒤에는 여러 사람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을 보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그분이시라고 알려 주십니다.
여기서 눈이 보인다는 사실과 사람을 알아본다는 사실이 구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이제 그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도 알려 주십니다.
그가 말했다. 「주님, 믿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엎드려 절했다.요한복음 9:38 · 본디새김
처음에 그 사람은 예수님을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가 처음부터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보셨고, 그의 눈을 열어 주셨으며, 마침내 다시 찾아오셔서 자신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고백으로 장을 끝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사본에는 35절이 ‘하나님의 아들’로 되어 있지만, 파피루스 66·75와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중요한 초기 사본들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읽기를 지지합니다. 다니엘 7:13–14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권세를 받아 모든 민족과 나라와 언어의 사람들이 그를 섬기는 환상이 등장하고, 요한복음 3:14와 8:28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는 일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호칭은 ‘나도 한 사람의 인간이다’라는 말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와 사명을 지니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요한복음 전체의 계시와 연결됩니다. 또 ‘절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는 몸을 굽혀 존경을 표현하는 행위부터 종교적 예배까지 폭넓게 사용되므로, 단어 자체만으로 그 사람이 예수님의 신적 본성에 관한 완성된 교리를 고백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참되게 예배하는 일을 말씀하셨기에, 이 장면을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예배의 사건으로, 또는 요한복음 4:23의 참된 예배라는 주제와 연결해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해석을 반드시 유일한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본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된다
예수가 말했다. 「나는 심판을 위해 이 세상에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되고 보는 이들은 눈멀게 되도록 말이다.」요한복음 9:3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한 사람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눈을 뜨는 것과 눈멀게 되는 것을 심판의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17은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말씀이 모순되는 것일까요? 3:19–21에서는 빛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여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빛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의 반응을 드러내는 사건이 됩니다.
요한복음 9장은 그 구분을 실제 사건 속에서 보여 줍니다. 눈먼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점점 알아 가다가 믿음을 고백합니다.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하나님과 율법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지식으로 예수님의 일을 판단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이 열리는 일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보지 못하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심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임의로 눈멀게 만드시는 일이라기보다, 생명의 빛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상태가 드러나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미래의 심판과 아무 관계 없는 심리적 깨달음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미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권한을 받으셨다고 말했고(5:22–29), 9장은 그 심판이 예수님의 오심 앞에서 이미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너희가 눈멀었다면 죄를 지니지 않았을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이 이 말을 듣고 그에게 말했다. 「설마 우리도 눈먼 사람입니까?」요한복음 9:40 · 본디새김
이 질문에는 불쾌함과 반발이 담겨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누가 죄인이고 누가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눈멀었다면 죄를 지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본다』고 말하니 너희 죄가 남는다.」요한복음 9:41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은 죄가 없다거나, 앞을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눈멂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가리킵니다.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배울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지 자체가 언제나 죄를 면제한다는 일반 원칙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거부하면서도 올바르게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지적하십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눈멀었던 사람의 상태에서 죄를 찾았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판단을 거부하셨습니다. 이제 죄의 문제는 눈먼 채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이 본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일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9장의 가장 깊은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씀은 이사야 6:9–10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이사야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백성의 모습을 전하며, 본래 문맥에서 이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거부하는 유다 백성에게 임할 심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12:39–41에서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을 설명합니다. 9장의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역설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반복되는 계시와 심판의 문제에 속합니다.
누가 정말 보고 있는가
요한복음 9장의 끝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을 두 번 만나십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그의 눈을 열어 주셨고, 그가 질문과 압력과 추방을 겪은 뒤 두 번째 만남에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 이상을 알지 못했지만 그 사실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경험의 의미를 밝혀 주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종교 지도자들의 허락이나 인정과 상관없이 이미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판단해야 하는 자리에 놓였습니다.
제자들은 눈먼 사람의 상태가 누구의 죄 때문인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그 원인을 묻게 되지만, 그 질문은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이 밝히지 않은 죄나 숨겨진 잘못을 추측하여 고난의 원인으로 삼는 것은 제자들이 던졌던 질문의 한계를 되풀이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판단의 대상으로 남겨 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눈멀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로암에 가서 씻었고, 눈을 떴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내쫓았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찾아오셨고, 그는 「주님, 믿습니다」 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처음부터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었고, 누가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눈먼 사람을 바라보며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눈먼 사람의 죄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들이 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그들 앞에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설마 우리도 눈먼 사람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가 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