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신 분
요한복음 8장은 놀라운 역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빛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자유롭다며 반발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이미 죽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생겨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8:58)라고 선언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던지려고 돌을 집어 듭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증언이 참된지를 논쟁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기에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시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알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정작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까?
요한복음 8장은 이 불편한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이 장의 논쟁은 크게 세 방향으로 깊어집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시며 아버지께서 자신의 증인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12–30절). 이어서 진정한 자유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십니다(31–47절). 마지막에는 자신의 말씀과 죽음,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의 정체가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48–59절). 사람들은 예수님을 점점 더 강하게 거부하지만, 요한은 바로 그 논쟁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밝혀 나갑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빛을 기념하는 성전에서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시다
그래서 예수가 다시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결코 어둠 속에서 걷지 않고 도리어 생명의 빛을 지닐 것이다.」요한복음 8:12 · 본디새김
이 선언은 앞 장에서 계속된 장막절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장막절에는 성전 여인들의 뜰에 커다란 금 등잔대들을 세우고 불을 밝혔다는 기록이 있고, 8:20은 예수님께서 여인들의 뜰과 연결되는 성전 헌금소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사람들은 성전의 등불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를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중요한 배경은 구약성경 자체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13:21–22에서 여호와야훼는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을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빛은 주변을 밝히는 조명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주는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시편 27:1에서 시인은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빛과 구원으로 고백합니다. 이사야 49:6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종이 민족들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도록 하겠다는 약속이 나타나는데, 그 본래 문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 회복을 넘어 민족들에게까지 미치는 여호와야훼의 구원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빛의 언어를 예수님에게 집중시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주신 빛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도 바른길을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빛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빛이십니다. 하나님의 길을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따라가야 할 빛으로 자신을 제시하십니다.
빛을 보는 것과 빛을 따르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은 자신을 한 번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기둥은 멀리서 바라보며 감상하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 빛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움직여야 했습니다.
빛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 빛을 따라 걷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빛을 지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요한복음 1:4는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8:12의 빛은 생명과 분리된 지적인 깨달음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에 참여하며 예수님의 인도 아래 걷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빛의 약속을 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선언이 증언으로서 유효한지 문제 삼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두고 증언합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을 두고 증언합니다.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않습니다.」요한복음 8:13 · 본디새김
신명기 19:15에는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사건을 확정하지 않고 둘 이상의 증인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증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문제 삼는 것입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자신을 두고 증언하더라도 내 증언은 참되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다.」요한복음 8:1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5:31에서 자신의 증언만으로는 참되지 않다고 하셨던 것과 모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5장에서는 자기 증언만을 근거로 삼는 법적 판단의 문제를 다루며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들이 예수님을 증언한다고 밝히셨고, 8장에서는 예수님 자신의 증언이 본질적으로 참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원과 목적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7장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오셨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원과 목적지는 모두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로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너희는 육을 잣대로 삼아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요한복음 8:15 · 본디새김
「육을 잣대로 삼아」라는 표현은 몸이나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건과 기준만으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교육 배경, 사회적인 위치를 알 수 있지만, 그런 정보만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그리고 내가 심판하더라도 내 심판은 참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16 · 본디새김
두 문장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처럼 인간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시지만, 판단과 심판의 권한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 판단이 참된 것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두고 증언하는 사람이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두고 증언하신다.」요한복음 8:18 · 본디새김
예수님은 두 증인에 관한 율법을 다시 언급하시며,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가 함께 증언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가 대답했다. 「너희는 나도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나를 알고 있다면 내 아버지도 알고 있을 텐데.」요한복음 8:19 · 본디새김
이 대답이 12절에서 시작된 논쟁의 결론입니다. 처음의 질문은 예수님의 증언이 인정받을 만한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깊은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말씀이 성전 헌금소에서 이루어졌으며,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8:20)라고 덧붙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판단하려 하지만, 아직 그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장막절 조명 의식에 관한 기록은 예수님 시대 이후에 편찬된 것입니다. 그 기록은 제사장들의 낡은 옷으로 만든 심지에 불을 붙였고 그 빛이 예루살렘의 뜰들을 비출 정도였다고 묘사하지만, 모든 세부 사항을 그대로 예수님 당시의 광경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순간 실제로 등불이 켜져 있었는지도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장막절과 빛의 관계는 예수님의 선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사적 배경입니다.
「내가 그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이 떠나시면 왜 찾아낼 수 없을까?
그래서 그가 다시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떠난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찾겠지만 너희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복음 8:21 · 본디새김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하니 설마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것인가?」요한복음 8:22 · 본디새김
이 말은 단순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비꼬는 말로 이해될 여지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떠남을 죽음이나 인간적인 이동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복음 8:23 · 본디새김
아래와 위, 이 세상에 속한 것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 대비됩니다. 이것을 인간의 육체나 물질세계가 본래 악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하며(3:16), 말씀이 실제로 육이 되셨다고 선언합니다(1:14).
문제는 사람의 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에 속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오셨지만, 대화 상대들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을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들이 속한 세상의 판단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너희 죄 안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죄 안에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24 · 본디새김
여기서 죄는 마치 사람이 머무는 자리처럼 표현됩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일반적인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지 않으면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경고를 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내가 그다」의 원문은 에고 에이미입니다. 직역하면 「나는 ~이다」인데, 여기에는 「~」에 해당하는 술어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4:26에서는 여자가 바로 앞에서 메시아를 말했으므로 이 표현이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8:24에서는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그렇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내가 메시아라는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표현 자체는 더 열린 의미를 지닙니다.
이사야 43:10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알고 믿으며 자신이 바로 그분임을 깨닫게 하려는 뜻을 밝히시는데, 이 구절의 그리스어 번역에 요한복음 8:24와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사야의 본래 문맥은 여호와야훼께서 우상들과 구별되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다만 두 단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용례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28절과 58절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그 의미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도대체 내가 왜 너희에게 말하고 있느냐?」요한복음 8:25 · 본디새김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며, 아버지가 자신을 보내셨고, 자신이 위에서 오셨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묻습니다. 정보가 없어서라기보다, 예수님의 주장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요한복음에서 문법적으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답답함과 책망을 담은 물음,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온 그대로다」라는 대답, 「무엇보다 먼저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으로 이어지는 문장으로 읽기가 갈립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그다음 말씀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분에게서 들은 것을 세상에 말씀하십니다(8:26).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8:27).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야」
그래서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야 내가 그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가 나를 가르친 대로 이것을 말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8:28 · 본디새김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이 크게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가 논쟁의 중심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들어 올려지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들어 올리다」는 실제로 높이 들어 올리는 행위를 가리킬 수도 있고, 높은 지위에 올리거나 영광스럽게 하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3:14와 12:32–33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어떤 죽음을 맞이하실지를 가리키므로, 8:28도 십자가 죽음과 연결하여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부정하려는 행위가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자리가 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시는 사건은 인간의 폭력에 희생되시는 사건으로만 묘사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하시며 아버지에게서 오셨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신다. 그분이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다. 내가 늘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29 · 본디새김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고 결국 죽이려 하겠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채 혼자 계신 존재가 아니라고 밝히십니다. 요한은 바로 이 말씀을 하실 때 「많은 이가 그를 믿었다」(8:30)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믿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된 제자가 무엇인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에서는 「너희 죄」가 단수형이지만, 24절에서는 「죄들」에 해당하는 복수형이 사용됩니다. 하나의 지배적인 죄의 상태와 구체적인 죄들을 구별하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요한은 이 수의 차이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25절의 대답은 원문의 낱말들을 어떻게 연결하고 문장을 어디서 끊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며, 고대 주석가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28절의 「알게 될 것이다」가 그들 모두가 회개하고 믿게 된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각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이 절이 밝히지 않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믿었다는 사람들에게 왜 자유를 약속하실까?
그래서 예수가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물면 참으로 내 제자다.」요한복음 8:31 · 본디새김
대상은 이미 자신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게 자신의 말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시작과 참된 제자 됨을 구별하게 합니다.
「머물다」는 어떤 곳에 계속 남아 지속적으로 거한다는 뜻으로, 나중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자신 안에 머물라는 말씀으로 발전합니다(15:4–7). 참된 제자는 처음 믿는다고 반응한 순간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 계속 머무는 관계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3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흔히 지적 탐구나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격언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말 안에 머물라고 하셨고,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예수님을 통해 왔으며(1:17)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14:6). 8:32의 진리는 예수님과 분리해서 소유할 수 있는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면서 알아 가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왜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까?
「우리는 누구에게도 노예 노릇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이고 누구에게도 노예 노릇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까?」요한복음 8:33 · 본디새김
그들의 조상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했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 지역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을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는 신앙적·사회적 자부심을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논쟁 속의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어 정확히 어느 의미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염두에 두었든, 예수님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노예다.」요한복음 8:3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노예 상태는 정치적 지배가 아니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원하는 것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노예는 집안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다. 아들은 영원히 머문다.」요한복음 8:35 · 본디새김
고대 가정에서 노예는 집안에서 일할 수 있지만 아들과 같은 가족의 지위와 상속권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노예가 스스로 자유를 선언한다고 해서 자유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자유롭게 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8:36 · 본디새김
32절에서는 진리가, 36절에서는 아들이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두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진리가 누구를 통해 주어지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대화는 더욱 거칠어집니다.
아브라함의 씨와 아브라함의 자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왜 서로 다른 말을 하는가?
31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37절에서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씨인 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죽이려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자리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37 · 본디새김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첫째, 31절에서 믿었다는 사람들의 믿음이 아직 깊지 않았고,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그 한계가 드러났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청중 가운데 적대적인 사람들이 다시 대화의 중심으로 들어왔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 대화 상대가 바뀌는 과정을 항상 명시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의 흐름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본문이 강조하는 문제는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혈통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그 말씀이 자신들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도록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곁에서 보신 것을 말씀하시고,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고 하십니다(8:38).
그들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입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요한복음 8:39 · 본디새김
37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씨」, 39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두 표현 모두 후손 관계를 나타낼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 예수님은 혈통상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아브라함에게 어울리는 행동을 하는 자녀라는 사실을 구별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는 나를, 곧 하나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을 죽이려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요한복음 8:40 · 본디새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응답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2:1–4에서 그는 떠나라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따라 길을 떠났고, 15:6에서 여호와야훼를 믿었으며 여호와야훼께서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논증은 혈통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선언이 아니라, 혈통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음행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가 한 일을 한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음행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아버지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요한복음 8:41 · 본디새김
이 표현도 해석이 갈립니다. 한 해석은 자신들이 부정한 출생이나 신앙적 혼합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정당하게 하나님의 백성에 속했다는 주장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우리는」이라는 강조가 예수님과의 대조를 암시하여, 예수님의 출생을 겨냥한 모욕이 담겼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말의 의도를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예수님의 출생을 직접 비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이제 아브라함을 넘어 하나님 자신을 아버지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텐데. 내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보내셨다.」요한복음 8:42 · 본디새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말하고, 예수님은 그들이 실제로 누구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아브라함과 믿음의 관계는 바울이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에서 설명하는 것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바울의 논증과 요한복음의 논쟁을 완전히 동일한 신학적 설명으로 합쳐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중심에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왜 마귀를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을까?
「어찌하여 너희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내 말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43 · 본디새김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요한복음에서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참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이 사람들은 반박할 만큼 그 내용을 이해하고 있지만, 그 말씀을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너희는 아버지인 마귀에게 속하고 너희 아버지가 바라는 것을 하려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였고 진리 안에 서 있지 않았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는 제 속에서 나오는 말을 한다. 그가 거짓말쟁이이고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4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요한복음 전체에서도 가장 거칠고 충격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이며, 역사적으로 유대인 전체를 악마의 자손으로 규정하고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박해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혈통 자체가 악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유대 사람이시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은 그들이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행동을,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이며 진리 안에 서 있지 않은 마귀의 성격과 연결하십니다. 거짓과 살인은 서로 무관한 두 악행이 아니라, 진리를 거부하고 왜곡하는 것이 생명을 해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함께 나타납니다.
여기서 핵심은 생물학적인 혈통이 아니라 행동과 소속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씨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행하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진리를 거부하고 죽이려는 행동이 누구의 뜻과 닮아 있는지를 밝히십니다. 자신이 누구의 자녀인지에 대한 주장은, 실제로 누구의 뜻을 행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본질적 평가로 읽는 것은 본문의 논증을 벗어나며, 다른 민족이나 종교 집단을 악마화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요한복음의 논쟁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특정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요한복음 8:45 · 본디새김
우리는 보통 거짓을 말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사람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고, 명예와 지위를 내려놓게 하며, 오랫동안 옳다고 생각해 온 신념을 다시 검토하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죄의 노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확신을 흔듭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입증하느냐? 내가 진리를 말한다면 어찌하여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느냐?」요한복음 8:46 · 본디새김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근거, 자신이 죄를 지으셨다는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의 죄를 입증하는 장면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음 장면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논증으로 반박하는 대신, 예수님의 정체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거짓과 살인의 연결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여자에게 말하고,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이 경고하신 죽음의 현실에 들어갑니다. 창세기 4장에서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8:44가 이 두 사건 가운데 하나만을 직접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와 「거짓말쟁이」라는 표현은 창세기의 죄와 죽음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말씀
「당신은 사마리아 사람이고 귀신을 지니고 있다」
유대 사람들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사마리아 사람이고 귀신을 지니고 있다고 우리가 옳게 말하는 것 아닙니까?」요한복음 8:48 · 본디새김
당시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종교적·역사적 갈등이 있었으므로, 「사마리아 사람」은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호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장면을 기억하면, 이 비난은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판단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예수가 대답했다. 「나는 귀신을 지니고 있지 않다. 도리어 나는 내 아버지를 공경하는데, 너희는 나를 모욕한다.」요한복음 8:49 · 본디새김
예수님은 귀신 들렸다는 주장은 부정하시지만,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비난에는 직접 답하지 않으십니다. 요한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논쟁의 중심을 아버지를 공경하는 문제에 두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구하고 심판하시는 분이 계신다.」요한복음 8:50 · 본디새김
예수님은 모욕에 맞서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확보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영광을 구하고 심판하시는 분은 문맥상 아버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50절 자체는 그분을 명시적으로 이름 붙이지 않습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결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8:51 · 본디새김
31절의 「내 말 안에 머무는 것」과 51절의 「내 말을 지키는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말씀을 일시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계속 간직하는 관계이며, 그 관계가 약속하는 것은 더 나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입니다.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어떻게 죽음을 보지 않을까?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귀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요한복음 8:52 · 본디새김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의 육체적인 죽음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자신의 음성을 듣고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고(5:28–29), 믿는 사람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6:39–40). 여기서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은 죽음이 그 사람의 최종적인 운명이 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여전히 육체적인 죽음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은 죽었습니다. 당신이 그보다 크지는 않겠지요? 예언자들도 죽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내세웁니까?」요한복음 8:53 · 본디새김
마지막 질문은 25절의 「당신은 누구입니까?」와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묻는 질문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누구라고 주장하시는지 따지는 질문입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위에서 오셨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시며,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가 대답했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면 내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 곧 너희가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그분이다.」요한복음 8:54 · 본디새김
예수님은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까지도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을 지킨다.」요한복음 8:55 · 본디새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에게 아버지에 대한 앎은 의견이나 추론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에게서 보내심을 받으셨는지에 관한 직접적인 앎입니다. 그래서 그 앎을 부정하신다면 오히려 거짓말쟁이가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자신의 관계를 밝히십니다.
「아브라함이 생겨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예수님의 날을 보았을까?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에 크게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날을 보고 기뻐했다.」요한복음 8:5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흔듭니다. 먼 옛날의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날을 기대했고, 그날을 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한 견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의 시대를 바라보았다고 이해합니다. 다른 견해는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야훼의 방문을 경험한 사건이나,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보여 주셨다는 전통과 연결하며, 아브라함이 환상이나 계시 가운데 실제로 보았다고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아브라함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보았는지 명시하지 않으므로, 그가 예수님의 생애를 미리 보았다고 확정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근거로 예수님을 부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브라함을 자신의 날을 기대하고 기뻐한 사람으로 소개하십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습니까?」요한복음 8:57 · 본디새김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날을 보았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셨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예수님 사이의 시간적 거리를 문제 삼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이 장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생겨났고, 예수님은 계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생겨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요한복음 8:58 · 본디새김
아브라함에게는 「생겨나다」(γίνομαι)라는 동사가, 예수님 자신에게는 「있다」(εἰμί)라는 현재형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보다 나이가 많다는 주장이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가 아브라함의 출생이라는 역사적 사건보다 앞선다는 선언입니다.
요한복음 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하고, 1:3은 모든 것이 그 말씀을 통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1장에서 서술자가 알려 준 예수님의 정체를, 이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나는 있다」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밝히신 말씀과도 이어집니다. 그 배경으로는 출애굽기 3:14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해석과, 이사야 40–55장에 반복되는 하나님의 자기 선언을 더 직접적인 배경으로 보는 해석이 모두 제시됩니다. 요한복음 8:58을 구약의 어떤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이라고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 사용하신 언어와 깊이 연결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를 향해 던지려고 돌을 들었다. 그러나 예수는 몸을 숨기고 성전에서 나갔다.요한복음 8:59 · 본디새김
이 행동은 예수님의 선언을 심각한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레위기 24:16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을 돌로 치는 형벌이 규정되어 있지만, 본문은 그들이 어떤 법 조항을 적용한다고 생각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재판 절차가 진행되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그들은 이 말씀을 아브라함보다 오래되셨다는 기이한 주장으로만 듣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돌에 맞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몸을 숨기셨는지 설명하지 않고, 그저 성전에서 나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아브라함의 날에 관한 첫째 견해의 배경에는 창세기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12:3에서 여호와야훼는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17장에서 후손과 언약의 약속을 다시 주시며, 22:15–18에서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하십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 개인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이스라엘을 통해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미칠 것이라는 더 큰 전망을 담고 있습니다. 58절의 원문에서 앞부분의 「생겨나다」(기노마이)는 무엇이 생겨나거나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는 일을, 뒷부분의 「있다」(에이미)는 존재하거나 어떤 상태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현재형은 예수님의 존재가 아브라함의 역사적 시작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현재형 하나만으로 시간과 영원에 관한 완전한 형이상학적 교리를 모두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문법적으로 확실한 것은 두 동사가 의도적으로 대조된다는 점이며, 그 대조는 요한복음의 선재성과 깊이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3:14에서 여호와야훼는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라고 대답하시는데, 이는 「나는 나다」, 「나는 있는 자다」, 「나는 내가 될 자다」 등으로 번역되며 히브리어 동사의 시간적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해석이 갈립니다. 그리스어 구약성경은 이를 「에고 에이미 호 온」으로 옮기므로 8:58과 같은 표현이 들어 있지만, 뒤에 「있는 분」이 더 붙어 있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이사야 43:10에는 술어가 붙지 않은 표현이 사용되며, 요한복음 8:24와 8:28도 같은 표현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믿고 알게 되는 문제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8장의 「내가 그」와 「나는 있다」를 여호와야훼가 자신을 드러내시는 말씀과 연결하는 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빛으로 오신 분이 성전에서 나가십니다
빛으로 오신 분은 처음에 성전 헌금소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생명의 빛을 지닐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뒤로 이 장의 약속들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빛은 사람을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고, 진리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약속합니다. 그 모든 약속의 중심에는 빛이시고, 자유롭게 하시는 아들이시며, 아브라함이 생겨나기 전부터 계신 예수님 자신이 계십니다.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의 앎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인간의 종교적 지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앎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도, 신앙의 혈통과 전통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된 진리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 확신 자체를 다시 살펴보게 합니다. 그러나 그 발견의 목적은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빛이 어둠을 드러내는 것은 그 빛을 따라 걷게 하려는 것이고, 진리가 죄의 노예 상태를 드러내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의심하고,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주장하며, 마침내 예수님께서 귀신을 지니고 계시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거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이 누구신지 더욱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처음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던 분을, 이제 그들은 돌로 치려 합니다. 요한은 그들이 회개하거나 자신의 판단을 다시 검토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빛이라고 선언하신 분은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