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신 분

요한복음 8장은 놀라운 역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빛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자유롭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자유롭다며 반발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이미 죽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고 선언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던지려고 돌을 듭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증언이 참된지를 논쟁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기에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시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은 반복해서 한 가지 사실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알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까?

요한복음 8장은 이 불편한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이 장의 논쟁은 크게 세 방향으로 깊어집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시며 아버지께서 자신의 증인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12–30절). 이어서 진정한 자유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십니다(31–47절). 마지막에는 자신의 말씀과 죽음,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48–59절). 사람들은 예수님을 점점 더 강하게 거부하지만, 요한은 바로 그 논쟁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밝혀 나갑니다.

읽는 시간 35분소단락 88장 본문 읽기 →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 8:12–20 본문 →

빛을 기념하는 성전에서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시다

예수께서 다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결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복음 8:12 · 두루새김

이 선언은 앞 장에서 계속된 장막절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장막절에는 성전에서 특별한 조명 의식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바치는 돈을 모으는 곳」에서 이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기록합니다(8:20).

사람들은 성전의 등불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함께 계심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중요한 배경은 구약성경 자체에 있습니다. 출애굽기 13:21–2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밤에는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빛은 이스라엘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주며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드러냈습니다.

또 시편 27:1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빛과 구원으로 고백합니다. 이사야 49:6에서는 하나님의 종이 민족들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도록 하겠다는 약속이 나타납니다. 이 약속의 본래 문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 회복을 넘어 민족들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빛의 표현을 예수님에게 집중시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주신 빛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른길을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빛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빛이십니다.

빛을 보는 것과 빛을 따르는 것은 다르다

예수님은 자신을 한 번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따르는」이라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 제자의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기둥은 멀리서 바라보며 감상하는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 빛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움직여야 했습니다.

빛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 빛을 따라 걷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요한복음 1:4에서도 생명과 빛은 함께 나타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8:12에서 빛은 생명과 분리된 지적인 깨달음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에 참여하며 예수님의 인도 아래 걷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빛의 약속을 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선언을 증언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문제 삼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 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 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증언은 참되지 않습니다.」요한복음 8:13 · 두루새김

이 반응에는 율법의 배경이 있습니다. 신명기 19:15에는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사건을 확정하지 않고 둘 이상의 증인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 증언하더라도 내 증언은 참되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요한복음 8:1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5:31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증언만으로는 참되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것과 모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5장에서는 자기 증언만을 근거로 삼는 법적 판단의 문제를 다루며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들이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사실을 밝히셨고, 8장에서는 예수님 자신의 증언이 그 자체로 참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서 오셨고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7장의 논쟁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오셨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곳과 가시는 곳은 모두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로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한다.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요한복음 8:15 · 두루새김

「사람의 기준으로」는 사람이 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건과 기준만으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교육 배경, 사회적인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보만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더라도 내 심판은 참되다」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처럼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는 일을 하지 않으시지만, 판단과 심판의 권한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 자신에 관해 증언하는 사람은 나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해 증언하신다.」요한복음 8:18 · 두루새김

예수님은 두 증인에 관한 율법을 다시 언급하십니다. 혼자서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가 함께 증언하십니다.

그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도 모르고 내 아버지도 모른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요한복음 8:19 · 두루새김

이 문장이 12절에서 시작된 논쟁의 결론입니다.

처음의 질문은 예수님의 증언이 인정받을 만한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깊은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바치는 돈을 모으는 곳에서 가르치며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8:20 · 두루새김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판단하려 하지만, 아직 그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후대에 엮어진 기록에 따르면, 장막절에 성전의 여인들의 뜰에 커다란 금 등잔대들이 세워졌고, 제사장들의 낡은 옷으로 만든 심지에 불을 붙였으며, 그 빛이 예루살렘의 뜰들을 비출 정도였다고 묘사합니다. 이 기록은 예수님 시대 이후에 엮어졌으므로 모든 세부 사항을 그대로 예수님 당시의 광경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장막절과 빛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입니다. 8:20의 「성전에 바치는 돈을 모으는 곳」은 일반적으로 여인들의 뜰과 연결되는 장소로 이해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순간 실제로 등불이 켜져 있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로 그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요한복음 8:21–30 본문 →

예수님이 떠나시면 왜 찾아낼 수 없을까?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떠난다. 너희는 나를 찾겠지만, 너희 죄를 지닌 채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복음 8:21 · 두루새김

듣는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운 말씀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라고 하는 걸 보니, 설마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건가?」요한복음 8:22 · 두루새김

이 말은 단순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비꼬는 말로 이해될 여지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떠남을 죽음이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복음 8:23 · 두루새김

이것을 사람의 몸이나 물질세계가 본래 악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하며(3:16), 말씀이 실제로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고 선언합니다(1:14). 여기서 문제는 그 사람이 무엇에 속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오셨지만, 대화 상대들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을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들이 속한 세상의 판단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죄를 지닌 채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바로 그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죄를 지닌 채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24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죄가 마치 사람이 머무는 자리처럼 표현됩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일반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지 않으면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경고를 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내가 바로 그」의 원문은 에고 에이미입니다. 직역하면 「나는 ~이다」 또는 「내가 그다」라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에 해당하는 술어가 따로 붙어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4:26에서는 여자가 바로 앞에서 메시아를 말했으므로 이 표현이 그 메시아를 뜻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8:24에서는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그렇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만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표현 자체는 더 열린 의미를 지닙니다. 이사야 43:10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을 알고 믿으며 자신이 바로 그분임을 깨닫게 하려는 뜻을 밝히시는데, 이 구절의 그리스어 번역에는 요한복음 8:24와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다만 두 단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쓰이는 자리마다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28절과 마지막 58절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그 의미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그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너희에게 말을 하고 있느냐?」요한복음 8:25 · 두루새김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아버지가 자신을 보내셨다고 설명하셨고, 자신이 위에서 오셨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묻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관해 하시는 주장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요한복음에서 문법적으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두루새김처럼 답답함과 책망을 담은 물음으로 읽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온 그대로다」라는 대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그다음 말씀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분에게서 들은 것을 세상에 말씀하십니다(8:26).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너희가 인자를 들어 올리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인자를 들어 올리면, 그때 내가 바로 그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8:28 · 두루새김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이 크게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가 논쟁의 중심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들어 올려지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들어 올리면」은 실제로 높이 들어 올리는 행위를 가리킬 수도 있고, 높은 지위에 올리거나 영광스럽게 하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3:14와 12:32–33에서처럼, 이 표현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하여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인자를 들어 올리는 일이 오히려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부정하려는 행위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그들 모두가 회개하고 믿게 된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드러난 예수님께 각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이 절이 밝히지 않습니다. 인자가 들어 올려지시는 사건은 단순히 사람의 폭력에 희생되시는 사건으로만 묘사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하시며 아버지에게서 오셨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언제나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므로, 그분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요한복음 8:29 · 두루새김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고 결국 죽이려고 하겠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으신 채 혼자 계신 존재가 아니라고 밝히십니다. 요한은 바로 이 말씀을 하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8:30).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믿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된 제자가 무엇인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21절의 죄가 단수형으로 쓰이지만, 24절에서는 「죄들」에 해당하는 복수형이 쓰입니다. 두루새김은 두 자리 모두 「죄를 지닌 채」로 옮겼습니다. 하나의 지배적인 죄의 상태와 구체적인 죄들을 구별하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요한은 이 수의 차이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43:10의 본래 문맥은 하나님께서 우상들과 구별되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25절은 원문의 낱말들을 어떻게 연결하고 문장을 어디서 끊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며, 「무엇보다 먼저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이라는 식으로 이어지는 문장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고대 주석가들 사이에서도 이 구절의 해석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들어 올리면」과 관련하여, 3:14에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인자도 들리셔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12:32–33에서는 이야기를 전하는 이가 그 말씀이 예수님께서 어떤 죽음을 맞이하실지 가리킨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31–36 본문 →

믿었다는 사람들에게 왜 자유를 약속하실까?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물면 너희는 참으로 내 제자다.」요한복음 8:31 · 두루새김

예수님은 이미 자신을 믿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시작과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을 구별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머물면」은 어떤 곳에 계속 남아 있거나 지속적으로 머문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믿는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표현으로 발전하여, 나중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다시 나타납니다(15:4–7). 참된 제자라는 것은 처음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반응한 순간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 계속 머무는 관계입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3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문맥에서 떨어뜨려 놓으면 원래 의미와 다른 방향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흔히 지적 탐구나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격언으로 사용하지만,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단순한 정보나 일반적인 지식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진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과 깊이 연결됩니다. 1:17은 진리가 예수님을 통해 왔다고 말하고, 14:6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8:32의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면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진리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왜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까? 바로 다음 대화가 그 뜻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 누구의 노예도 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누구의 노예도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까?」요한복음 8:33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했고,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 지역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누구의 노예도 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는 신앙적·사회적 자부심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논쟁 속에서 나온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정확히 어느 의미를 강조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염두에 두었든, 예수님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죄의 노예다.」요한복음 8:3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노예 상태는 이집트나 로마의 정치적 지배가 아니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 매여 살아가는 것을 자유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원하는 것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노예는 집안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은 영원히 머문다.」요한복음 8:35 · 두루새김

노예는 집안에서 생활하며 일할 수 있지만, 아들과 같은 방식으로 가족의 지위와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아들은 그 집안에 속한 사람으로서 지속적인 지위를 가집니다. 노예가 스스로 자유를 선언한다고 해서 곧 자유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자유롭게 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요한복음 8:36 · 두루새김

32절에서는 진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셨고, 36절에서는 아들이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진리가 누구를 통해 사람에게 주어지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 자유는 단순히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상태가 아니라,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관계에서 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대화는 더욱 거칠어집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자유를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다시 물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과 아브라함의 자녀

요한복음 8:37–42 본문 →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왜 서로 다른 말을 하는가?

31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3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줄은 나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자리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37 · 두루새김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까, 죽이려는 사람들입니까? 첫째 읽기는 31절에서 믿었다는 사람들의 믿음이 아직 충분히 깊지 않았으며,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그 믿음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이해합니다. 둘째 읽기는 대화가 이어지면서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 다시 대화의 중심으로 들어왔다고 이해합니다. 요한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 대화 상대가 바뀌는 과정을 항상 뚜렷하게 표시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의 흐름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하든 본문이 강조하는 문제는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자신의 말이 그들 안에 「자리 잡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이 자신들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도록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곁에서 보신 것을 말씀하시고,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대로 행동한다고 하십니다(8:38). 「너희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요한복음 8:39 · 두루새김

37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셨고, 39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표현 모두 후손 관계를 나타낼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 예수님은 혈통상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아브라함에게 어울리는 행동을 하는 자녀라는 사실을 구별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는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전한 나를 죽이려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요한복음 8:40 · 두루새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에 응답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2:1–4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길을 떠나고, 창세기 15:6에서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면,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논증은 혈통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혈통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음행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가 한 일을 한다.」 그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음행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요한복음 8:41 · 두루새김

이 표현도 해석이 갈립니다. 한 해석은 자신들이 부정한 출생이나 다른 신앙과의 섞임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정당하게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말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우리는」이라는 강조가 예수님과의 대조를 암시하므로, 예수님의 출생을 겨냥한 은근한 모욕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말의 의도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들이 예수님의 출생을 직접적으로 비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이제 아브라함을 넘어 하나님 자신을 아버지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주장도 행동을 통해 판단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이 보내셔서 왔다.」요한복음 8:42 · 두루새김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실제로 누구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매우 충격적인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37절의 「후손」은 원문에서 「씨」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본문들의 본래 문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과 미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응답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 점은 바울이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과 믿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바울의 논증과 요한복음의 논쟁을 완전히 동일한 신학적 설명으로 합쳐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중심에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

요한복음 8:43–47 본문 →

예수님은 왜 마귀를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을까?

「너희는 왜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내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43 · 두루새김

처음 읽으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참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반박할 만큼 뜻을 파악하고 있지만, 그 말씀을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인 마귀에게 속해 있고, 너희 아버지가 바라는 일을 하려 한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편에 서 있지 않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마귀는 거짓말을 할 때 자기 속에서 나온 말을 한다. 그는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4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요한복음 전체에서도 가장 거칠고 충격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구절은 유대인 전체를 악마의 자손으로 규정하고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박해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8장의 흐름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혈통 자체가 악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유대 사람이시며,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동을 예수님은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편에 서 있지 않은」 마귀의 성격과 연결하십니다. 거짓과 살인은 서로 관계없는 두 가지 악행이 아니라, 진리를 거부하고 왜곡하는 것이 생명을 해치는 행동과 이어진다는 점에서 함께 나타납니다.

자신이 누구의 자녀인지에 대한 주장은, 실제로 누구의 뜻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유대 민족 전체의 본성이 어떻다는 평가로 읽는 것은 본문이 펼치는 논증을 벗어납니다. 또한 이 말씀을 다른 민족이나 종교 집단을 악마로 몰아가는 근거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요한복음의 논쟁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특정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요한복음 8:45 · 두루새김

우리는 보통 거짓을 말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사람에게 언제나 반가운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고, 명예와 지위를 내려놓게 하며, 오랫동안 옳다고 생각해 온 믿음을 다시 살펴보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죄의 노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확신을 흔듭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내가 죄를 지었다고 증명할 수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왜 나를 믿지 않느냐?」요한복음 8:46 · 두루새김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자신의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근거가 무엇인지, 자신이 죄를 지으셨다는 증거가 무엇인지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의 죄를 증명하는 장면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음 장면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를 들어 반박하는 대신, 예수님의 정체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거짓과 살인의 연결을 떠올리게 하는 본문은 창세기 3장입니다.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여자에게 말하고,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이 경고하신 죽음의 현실에 들어갑니다. 또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는 죄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8:44가 이 두 사건 가운데 하나만을 직접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처음부터 살인자」와 「거짓말쟁이」라는 표현은 창세기의 죄와 죽음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말씀

요한복음 8:48–55 본문 →

「당신이 사마리아 사람이고 귀신이 들렸다고」

유대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사마리아 사람이고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우리 말이 맞지 않습니까?」요한복음 8:48 · 두루새김

이 말에는 두 가지 공격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종교적·역사적 갈등이 있었으므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호칭은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장면을 기억하면, 이 비난은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판단을 다시 돌아보게 만듭니다.

다른 공격은 예수님께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악한 영에게서 나온 말로 규정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귀신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 아버지를 높이는데 너희는 나를 모욕한다.」요한복음 8:49 · 두루새김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직접 답하지 않으십니다. 요한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논쟁의 중심을 어디에 두시는지는 분명합니다. 아버지를 높이는 문제입니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내 영광을 구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계신다.」요한복음 8:50 · 두루새김

예수님은 모욕에 맞서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얻으려 하지 않으십니다. 영광을 구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앞뒤 말씀의 흐름에서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50절 자체는 그분이 누구신지 뚜렷하게 이름 붙이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8:51 · 두루새김

31절에서는 예수님의 말 안에 머무는 사람이 참된 제자라고 말씀하셨고, 51절에서는 예수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잠시 듣고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계속 간직하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약속하는 것은 더 나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입니다.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어떻게 죽음을 보지 않을까?

유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귀신이 들렸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요한복음 8:52 · 두루새김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뜻일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요한복음 8장의 논쟁은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가장 깊은 단계에 들어갑니다.

먼저 죽음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의 몸이 죽는 일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요한복음 5:28–29에서 예수님은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자신의 음성을 듣고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6:39–40에서도 믿는 사람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은 죽음이 그 사람의 마지막 운명이 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여전히 몸의 죽음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설마 당신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합니까?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내세웁니까?」요한복음 8:53 · 두루새김

마지막 질문은 25절의 「당신은 누구입니까?」와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묻는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누구라고 내세우시는지 따지는 질문입니다. 두 질문 사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위에서 오셨고, 아버지가 보내셨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시며,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내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는 그분을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한다.」요한복음 8:54 · 두루새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누구라고 내세우시는지 묻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신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요한복음 8:55 · 두루새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께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의견이나 짐작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누구에게서 보내심을 받으셨는지에 관해 직접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모르신다고 말씀하신다면 오히려 거짓말쟁이가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자신의 관계를 밝히십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

요한복음 8:56–59 본문 →

아브라함은 어떻게 예수님의 날을 보았을까?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볼 것이라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날을 보고 기뻐했다.」요한복음 8:56 · 두루새김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아의 시대를 바라보았다는 읽기, 창세기 18장의 하나님의 방문이나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보여 주셨다는 전통과 연결하는 읽기, 아브라함이 환상이나 계시 가운데 예수님의 날을 실제로 보았다는 읽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아브라함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의 날을 보았는지 밝히지 않으므로, 그가 실제로 예수님의 생애를 미리 보았다고 확정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약속하실 수 있느냐고 물으며 아브라함을 예수님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아브라함 자신이 자신의 날을 기대하고 기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정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유대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습니까?」요한복음 8:57 · 두루새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바꾸어 되묻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날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직접 보셨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이의 시간적 거리를 문제 삼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이 장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태어났고, 예수님은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요한복음 8:58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생겨나다」(γίνομαι)라는 뜻의 동사가 사용되고, 예수님 자신에게는 「있다」(εἰμί)라는 현재형 동사가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아브라함보다 내가 먼저 태어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아브라함의 출생이라는 역사적 사건보다 앞선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1장의 서두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하고, 1:3은 모든 것이 그 말씀을 통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가 처음에 알려 준 예수님의 정체를, 이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있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 현재형은 예수님의 존재가 아브라함의 역사적 시작에 매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형 하나만으로 시간과 영원에 관한 완전한 철학적·신학적 가르침을 모두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문법적으로 확실한 것은 「생겨나다」와 「있다」가 의도적으로 대조된다는 점이며, 그 대조는 요한복음이 처음부터 소개해 온, 예수님께서 먼저 계셨다는 사실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가?

예수님의 「나는 있다」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밝히신 말씀과 연결될까요? 출애굽기 3:14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이 하신 대답의 그리스어 번역에는 요한복음 8:58과 같은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또 이사야 43:10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백성이 그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요한복음 8:24와 8:28에서도 예수님은 같은 표현을 사용하시며 자신이 누구신지를 믿고 알게 되는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8장의 「내가 바로 그」와 「나는 있다」를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말씀과 연결하는 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 사용하신 말과 깊이 연결된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께 던지려고 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숨기고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요한복음 8:59 · 두루새김

그들은 돌을 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오래되셨다는 기이한 주장으로만 듣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와 충돌한다고 판단했고, 돌을 들어 예수님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에 맞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몸을 숨기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조금 더 깊이

56절과 관련하여,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창세기 17장에서는 후손과 언약의 약속이 다시 주어지며, 창세기 22:15–18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강조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 개인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이스라엘을 통해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미칠 것이라는 더 큰 앞날을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14의 히브리어 대답은 「나는 나다」, 「나는 있는 자다」, 「나는 내가 될 자다」 등으로 번역되며, 동사가 나타내는 시간과 앞뒤 말씀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번역과 해석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그 뒤에 「있는 분」이라는 표현이 더 붙어 있으므로 두 문장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학술적으로는 출애굽기 3:14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해석과, 이사야 40–55장에 반복되는 하나님의 자기 선언을 더 직접적인 배경으로 보는 해석이 모두 제시되므로, 8:58을 구약의 어떤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이라고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돌을 든 행동은 예수님의 선언을 하나님을 심각하게 모독하는 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레위기 24:16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에 대한 돌로 치는 형벌이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들이 정확히 어떤 법 조항을 적용한다고 생각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재판 절차가 진행되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빛으로 오신 분이 성전에서 나가십니다

요한복음 8:12–59 본문 →

이 장의 약속들은 서로 연결됩니다. 빛은 사람을 어둠 속에서 벗어나게 하고, 진리는 사람을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약속합니다. 그 모든 약속의 중심에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예수님 자신이 계십니다.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이 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성경에 관한 지식이나 신앙의 혈통과 전통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와 나눌 수 없습니다. 진리가 그 확신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바치는 돈을 모으는 곳에서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 앞에서 돌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이 회개하거나 자신의 판단을 다시 검토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빛이라고 선언하신 분은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