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예수님을 판단하는 사람들
예루살렘의 장막절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성전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고, 무리 가운데서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갈릴리 출신이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님에 대해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결정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정식으로 배우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가르치실 수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이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편에 서 있든 자신의 지식과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올바르게 판단하여라」(2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판단할 만큼 충분히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작 알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율법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정작 율법이 요구하는 공정한 판단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장은 인간의 잘못된 판단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서 오셨는지, 왜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지 밝히십니다. 특히 장막절 마지막 날, 예수님은 성전에서 「누구든지 목마르면 내게 와서 마셔라」(37절) 하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를 따지고 있지만, 예수님은 예수님께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두 움직임이 요한복음 7장을 이끌어 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정해 놓으려 하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으로 알아보도록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세요」
예수님의 형제들은 무엇을 원했을까?
이야기는 갈릴리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방에서 다니려 하지 않으십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유대 사람들」은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앞 장에서부터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려 했던 적대적인 세력을 가리킵니다(5:16–18).
그때 장막절이 가까워집니다.
장막절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순례 명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레위기 23:33–43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일곱 날 동안 초막에서 지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뒤 광야에서 살게 하셨던 일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또한 장막절은 농사의 수확을 기뻐하는 명절이기도 했습니다(신명기 16:13–15). 이렇게 큰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예수님의 형제들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합니다.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제자들도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도록 이곳을 떠나 유대 지방으로 가세요.」요한복음 7:3 · 두루새김
「자신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싶어 하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런 일을 하신다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세요.」요한복음 7:4 · 두루새김
형제들의 말에는 일종의 현실적인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예루살렘에서 그 능력을 보여 주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공개적인 인정과 영향력을 얻으려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조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조언 바로 뒤에 뜻밖의 설명을 붙입니다.
예수의 형제들조차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7:5 · 두루새김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능력을 보여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믿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형제들의 제안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에 주목하지만, 예수님은 누구에게서 보내심을 받으셨으며 누구의 뜻에 따라 일하시는가를 중심에 두십니다.
예수께서 형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너희에게는 어느 때든 괜찮다.」요한복음 7:6 · 두루새김
예수님의 때와 형제들의 때
여기서 「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단순히 시계로 재는 시간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기에 알맞은 시기나 정해진 기회를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형제들은 장막절이 다가온 지금이 좋은 기회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차이는 7절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그러나 나를 미워한다. 세상이 하는 일이 악하다고 내가 증언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7 · 두루새김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세상 앞에서 예수님을 드러내시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세상의 인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이 하는 일이 악하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에 미움을 받으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3:16), 동시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거부하는 질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환영을 얻으려고 그 악한 일을 눈감아 주거나 예수님의 증언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 주시기 좋은 시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분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너희는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라. 나는 이번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지 않는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8 · 두루새김
그런데 10절에서는 형제들이 올라간 뒤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예수님은 형제들이 권한 방식으로 올라가지 않으십니다. 형제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형제들이 먼저 올라간 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의 눈을 피해」 올라가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거부하신 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이라는 장소라기보다 형제들이 제안한 방식과 시기였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해석이 8절의 표현에 남아 있는 긴장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과 뒤이은 행동을 그대로 나란히 기록합니다.
이 장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의 요구에 따라 예수님을 드러내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형제들이 정한 때에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으셨지만, 명절이 진행되는 동안 예수님은 스스로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남의 눈을 피해 오신 분이 이제 성전 한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에는 사본 차이가 있습니다. 부정 표현이 「않는다」인 사본들도 있고, 「아직 아니다」인 사본들도 있습니다. 「아직 올라가지 않는다」로 읽으면 10절과의 긴장이 줄어들고, 「올라가지 않는다」로 읽으면 앞뒤의 차이를 설명해야 합니다. 더 어려운 읽기인 「올라가지 않는다」를 원래 읽기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나는 이번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지 않는다」로 옮겼습니다.
배우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성경을 아는가
성전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예루살렘에서는 이미 유대 사람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지?」 하며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무리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두고 여러 의견이 오갑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거리낌 없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논쟁의 중심에 계시지만, 정작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절이 이미 반쯤 지났을 때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올라가 가르치십니다.
형제들이 요구했던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놀랍니다.
유대 사람들이 놀라며 말했습니다.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성경을 이렇게 잘 알지?」요한복음 7:15 · 두루새김
원문에서 「글을 안다」는 표현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다는 의미로 한정하기 어렵기에,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성경을 이렇게 잘 알지?」로 옮겼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인정받는 정규 학문적 훈련을 거치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성경을 가르치실 수 있는지 놀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에는 전해 내려온 가르침과 스승의 권위가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자격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 가르침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다.」요한복음 7:16 · 두루새김
지식의 양이나 해석 기술을 내세우는 대답이 아니라, 가르침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밝히는 대답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배웠기에 이런 것을 아는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내가 스스로 하는 말인지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7:17 · 두루새김
예수님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보는 문제를 단순히 지적인 능력이나 학력의 문제로만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의지의 문제를 함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천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참으로 알고 행하려는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가르침을 판단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려는 사람과, 이미 정해 놓은 자신의 입장을 지키려는 사람은 같은 말씀을 듣고도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과 연구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지식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영광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자신을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참되고, 그에게는 옳지 않은 데가 없다.」요한복음 7:18 · 두루새김
여기서 처음의 형제들과 나눈 대화가 다시 떠오릅니다. 형제들은 예수님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정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과시하시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의 뜻을 진실하게 드러내시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판단하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문제 삼으십니다. 모세의 율법입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수군거림」으로 옮긴 원문은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리거나 불평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장면에도 사용되고,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투덜거린 것과도 이어집니다. 다만 7장에서는 좋게 보는 평가와 적대적인 평가가 함께 오갑니다. 또 15절의 놀람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글을 읽고 쓰지 못하셨다거나 어떤 교육도 받지 않으셨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온전히 낫게 하는 것이 잘못인가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할까?
예수님은 갑자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십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가운데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요한복음 7:19 · 두루새김
성전에서 가르침의 권위를 논하던 대화가 죽이려는 의도에 관한 문제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율법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정작 율법의 뜻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을 당시 유대인 모두가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넓혀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판단을 향한 논쟁 속 발언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율법이 요구하는 올바른 판단을 저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귀신이 들렸습니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합니까?」요한복음 7:20 · 두루새김
1절에서 독자는 이미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리 전체가 일부러 거짓말한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모든 상황을 똑같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 수 있고, 실제로 25절에서는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 몇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소문을 놓고 다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가 된 사건으로 돌아가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했는데 너희는 모두 놀란다.」요한복음 7:21 · 두루새김
이 「한 가지 일」은 앞서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5:1–18). 하지만 이번에 예수님은 율법 자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할례는 허용하면서 온몸을 낫게 하는 일에는 분노하다
「너희가 놀라는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이다. 모세는 너희에게 할례를 정해 주었다. 사실 할례는 모세가 아니라 조상들에게서 시작되었다. 너희는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한다.」요한복음 7:22 · 두루새김
할례는 이스라엘의 언약을 나타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창세기 17:9–14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할례를 명하시고,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레위기 12:3).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이 날이 안식일과 겹치면 안식일에도 할례를 시행할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너희는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한다. 그러면서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낫게 했다고 내게 화를 내느냐?」요한복음 7:23 · 두루새김
할례는 몸의 한 부분에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온몸을 낫게」 하셨습니다. 언약의 표징을 몸에 행하는 일이 안식일에도 허용된다면, 오랫동안 병들었던 한 사람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일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예외 규정 하나를 더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인정하고 있는 율법의 적용 방식을 근거로 율법이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지 묻고 계십니다. 안식일과 할례는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이며, 예수님은 어느 하나를 무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올바르게 판단하여라.」요한복음 7:2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요한복음 7장 전체를 읽는 기준이 됩니다.
안식일에 깔자리를 들고 걸었다는 사실만 볼 것이 아니라, 왜 그 사람이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는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오셨다는 사실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실제로 보내신 분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틀리지 않더라도, 그 사실만으로 내린 결론은 틀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을 무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을 더 깊이 살펴 올바르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근거로 다시 판단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에서 「온」에 해당하는 원문의 말은 낫게 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가 아니라 사람을 꾸미는 형용사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사실보다, 한 사람 전체가 건강하게 되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
알고 있는 출신과 알지 못하는 기원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 몇이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 아니야?」 하며 놀라워합니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계시는데 아무도 막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도자들이 혹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지만, 곧 스스로 그 가능성을 부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 그리스도가 오실 때는 어디서 오셨는지 아무도 모를 텐데.」요한복음 7:27 · 두루새김
이것은 이 장면에 등장한 일부 사람들의 판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실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다가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복음 7:28 · 두루새김
첫 부분을 반어적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너희가 정말 나를 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읽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인간적인 출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되, 그 앎이 예수님께서 참으로 누구에게서 오셨는지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이해합니다. 어느 쪽이든 이어지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이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29 · 두루새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이신지 알고 있지만,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판단에서 빠져 있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를 아는 것과, 예수님께서 누구에게서 오셨는지를 아는 것은 다릅니다.
붙잡으려 하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다
사람들은 예수를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7:30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앞서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하신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6절)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등장시키려 했고, 반대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자신의 계획대로 예수님의 길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30절의 「때」는 원문에서 6절과 다른 호라(ὥρα), 곧 「시각」이나 「시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과 영광을 받으실 때를 향해 발전합니다(12:23; 17:1). 예수님께는 이루셔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완성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리 가운데서는 다른 반응도 나타납니다.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며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신다 해도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행하시겠어?」요한복음 7:31 · 두루새김
이들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에 대한 판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징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다만 표징을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밝히시는 예수님의 정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이 종교 지도자들의 귀에 들어가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경비병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오히려 예수님의 떠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조금 더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복음 7:33 · 두루새김
「너희는 나를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복음 7:34 · 두루새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 흩어져 사는 유대 사람들에게 가시거나, 그리스 사람들을 가르치시려는 것은 아닌지 추측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목적지는 「나를 보내신 분」, 곧 아버지이십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를 지리적인 출신으로 판단했고,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지리적인 이동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을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아는 세계 안에서 그 말씀을 해석하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이 무엇을 받게 될 것인지 밝히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왕을 기다리는 전통이 있었고, 모세와 같은 예언자나 마지막 때에 나타날 구원자를 기다리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27절의 주장을 당시 모든 유대인이 공유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35절의 그리스 사람들에 관한 추측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훗날 요한복음 12:20–21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리스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7장의 사람들은 그런 미래를 내다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장막절 마지막 날에 들린 외침
물을 기념하는 명절에 생명의 물을 약속하시다
요한복음 7장은 장막절이라는 배경 없이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장막절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수확을 마친 뒤 하나님의 공급을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이 절기에는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와 성전 제단에 붓는 의식도 있었고, 이 의식은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되어 이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장차 하나님이 백성을 회복하실 때 풍성한 물과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예언의 약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절기의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명절의 마지막 날은 큰 축제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날 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면 내게 와서 마셔라.」요한복음 7:37 · 두루새김
예수님은 사람들이 물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장소를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초청했던 목마른 사람들
예수님의 외침은 이사야 55:1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목마른 사람들을 물로 초청하며,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먹고 마시라고 부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흐름 속에서 주어진 이 초청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인간이 값을 치러 얻어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55:1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으시지만, 그 초청의 방향을 예수님께로 모으십니다. 이사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생명의 물로 초청하시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람들을 예수님께 초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물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들이 받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장막절 동안 형제들은 믿지 않았고,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지도자들은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특정한 집단이나 자격을 갖춘 사람만을 부르지 않으시고, 목마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초청이 사람들의 분열을 없애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에 나아가는 길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 와서 마시는 것입니다.
샘이 아니라 강줄기를 이루어 흘러나온다
「성경에서 말한 대로, 나를 믿는 사람의 속에서 살아 있는 물이 강줄기를 이루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복음 7:38 · 두루새김
목마른 사람이 물 한 잔을 받아 마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속에서 물이 강줄기를 이루어 흘러나옵니다. 원문에서는 하나의 강이 아니라 여러 강을 말하며, 생명의 물이 흘러넘치는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물이 누구의 속에서 흘러나오는지는 읽기가 갈립니다. 원래 그리스어 사본에는 오늘날의 문장부호가 없었으므로, 어디서 문장을 끊는지가 해석에 영향을 줍니다. 두루새김처럼 문장을 나누면 물은 「나를 믿는 사람의 속」에서 흘러나옵니다. 반면 「나를 믿는 사람」을 앞의 「마셔라」에 연결하면,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은 예수님 자신이 됩니다.
어느 읽기가 더 적절한지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해석 모두 생명의 물이 예수님에게서 오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두루새김이 택한 첫 번째 읽기에서는, 생명의 물을 받은 사람이 자기만 생명을 누리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는 의미가 더 강조됩니다. 이것을 모든 신자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전달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뜻으로 넓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물로 그려집니다.
「성령께서 아직 주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은 독자가 이 물의 의미를 추측에만 맡겨 두지 않도록 직접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켰습니다. 그때는 성령께서 아직 주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7:3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살아 있는 물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37–38절의 말씀을 단지 마음의 위로나 정신적 만족을 약속하는 말로 줄여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영입니다.
원문의 마지막 표현은 매우 낯섭니다. 원문에서는 영이 아직 있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성령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1:2와 이사야 63:10–11에서 하나님의 영은 이미 일하고 계셨고, 요한복음 1:32–33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두루새김은 이 뜻을 「성령께서 아직 주어지지 않으셨습니다」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요한은 그 선물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일을 포함하는 구원의 사건과 깊이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2:23–24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설명하십니다.
명절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장차 어디로 가실지,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사람들이 무엇을 받게 될지를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무리는 더욱 크게 갈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물 붓기 의식은 후대에 편찬된 유대교 문헌인 《미슈나》의 수카 4: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금으로 만든 그릇에 물을 담아 가져왔고, 성전에서는 나팔 소리가 울렸으며, 제단에는 물과 포도주를 붓는 의식이 행해졌습니다. 미슈나는 예수님 시대보다 후대에 편찬되었으므로 모든 세부 사항이 예수님 당시에도 똑같이 행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의식이 예수님 시대의 성전 예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라는 점은 널리 인정됩니다. 「마지막 날」이 장막절의 일곱째 날인지, 거룩한 모임을 갖는 여덟째 날(레위기 23:34–36)인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물 붓기 의식은 일반적으로 일곱째 날까지 행해졌다고 이해되지만, 제2성전기 문헌의 「큰 날」이라는 표현을 바탕으로 여덟째 날로 보는 해석도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순간에 의식이 진행 중이었다고 묘사하는 것은 본문이 알려 주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38절의 첫 번째 읽기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이 마시는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오르는 샘이 될 것이라는 요한복음 4:14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두 번째 읽기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오는 요한복음 19:34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또 「성경에서 말한 대로」에 해당하는 문장이 그대로 나오는 구약 구절은 없으므로, 구약의 여러 약속에 나타나는 생명의 물이라는 주제가 모여 있다고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에스겔 47:1–12에서는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흘러나온 물이 점점 깊어져 강이 되고, 그 물이 흐르는 곳에서 생명이 회복됩니다. 스가랴 14:8은 살아 있는 물이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올 것을 말하고, 14:16–19에서는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장막절을 지킵니다. 이사야 44:3은 목마른 땅에 물을 주시는 일과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는 일을 나란히 약속합니다. 7:38이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회복과 생명의 약속들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메시아의 출신을 논쟁하다
예언자인가, 그리스도인가?
무리 가운데 이 말을 들은 어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분이 정말 그 예언자야.」요한복음 7:40 · 두루새김
여기서 「그 예언자」는 모세가 말한 자신과 같은 예언자에 대한 약속(신명기 18:15–18)과 연결됩니다. 요한복음은 이미 1장에서 사람들의 기대 속에 「그 예언자」와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1:20–25). 이 두 기대가 언제나 엄격하게 나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마지막 때에 오실 어떤 인물로 이해해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나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분이 그리스도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나오시겠어?」요한복음 7:41 · 두루새김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문제 삼으며 성경을 근거로 말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요한복음 7:42 · 두루새김
이 사람들이 아무런 성경적 근거 없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성경에 나타나는 다윗의 후손과 베들레헴의 약속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 예수님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가 하는 점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를 따로 설명하여 논쟁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의 판단이 놓치고 있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계속 남겨 둡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누구신지 알아보는 일이 지역에 관한 정보만으로 충분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의 독자는 이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1:1, 14). 그런데 성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느 지역 출신이신지 논쟁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갈라지다
이렇게 예수 때문에 무리의 의견이 갈라졌습니다.요한복음 7:43 · 두루새김
「의견이 갈라졌습니다」(σχίσμα)로 옮긴 원문은 분열이나 갈라짐을 나타내며, 단순히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라고 믿고, 다른 사람들은 출신 때문에 그 가능성을 거부합니다. 몇몇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단순히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행하신 일들도 알고 있고, 성경의 약속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이 그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알게 될 것이라는 17절의 말씀이 다시 떠오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그 정보 앞에서 어떤 자세로 판단하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이제 그 문제가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가장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뒤를 이을 왕조에 관한 약속을 주셨고, 이 약속은 후대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구원자에 대한 기대와 연결되었습니다. 미가 5:2에서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이 나올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다른 복음서인 마태복음 2:1과 누가복음 2:4–7은 예수님의 출생을 베들레헴과 연결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으러 갔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돌아오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데려오지 못한 채 돌아옵니다. 지도자들이 「왜 그 사람을 데려오지 않았느냐?」 하고 묻습니다.
경비병들이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요한복음 7:46 · 두루새김
경비병들은 기적을 보고 놀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보호했기 때문에 붙잡지 못했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붙잡으러 보내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 붙잡지 않은 채 돌아왔습니다.
형제들은 예수님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능력을 뽐내지 않고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그 말씀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경비병들까지 붙잡아 둡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억지로 설득하거나 권력으로 굴복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보고를 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너희까지 속아 넘어갔느냐?」요한복음 7:47 · 두루새김
그들은 경비병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물어보지 않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확인하지 않습니다. 대신 경비병들의 판단을 조롱합니다.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그를 믿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느냐?」요한복음 7:48 · 두루새김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된가 하는 문제를 판단하면서, 지도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권위 있는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모르는 저 무리는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복음 7:49 · 두루새김
그들은 자신들을 율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자리에 놓고, 예수님께 좋은 반응을 보이는 무리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로 단정합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예수님은 이미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셨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올바르게 판단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왜 율법을 근거로 반박했을까?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며 유대 사람들의 지도자였습니다(3:1). 전에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했던 그가, 지금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 한가운데 있습니다. 지도자나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느냐고 묻던 바로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나서서 질문합니다.
「우리 율법이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보지도 않은 채 그 사람을 심판하나?」요한복음 7:51 · 두루새김
니고데모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가 실제로 하는 일은 더 구체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직접 듣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심판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율법의 공정한 판단이라는 원칙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24절에서 하신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올바르게 판단하여라」라는 말씀과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의식적으로 인용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올바른 판단의 원칙이 이제 지도자들의 모임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경비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와 그 말씀이 지금까지 들었던 것과 다르다고 보고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 내용을 확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적어도 판단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살펴보아라」 — 그러나 무엇을 살펴보았는가?
그들이 니고데모에게 대답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이냐? 살펴보아라.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요한복음 7:52 · 두루새김
니고데모는 율법에 따른 공정한 절차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니고데모에게도 갈릴리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주장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상대방을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반응입니다.
그들은 니고데모에게 성경을 살펴보라고 말하면서, 정작 니고데모가 제기한 율법의 공정한 판단이라는 문제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의 출신에 관한 지식으로 예수님을 판단했고, 이제는 니고데모의 질문에도 출신 지역을 언급하며 대답합니다. 그들이 붙들고 있는 기준이 실제로 얼마나 한결같이 적용되고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요한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냅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종교 지도자들이 그의 말을 다시 살펴보았는지, 경비병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요한은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니고데모가 기댄 율법의 원칙은 신명기에 나옵니다. 신명기 1:16–17은 재판하는 사람들이 당사자들의 말을 듣고 올바르게 판단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신명기 17:4는 심각한 범죄의 보고를 들었을 때 자세히 조사하고 확인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또 열왕기하 14:25에 따르면 예언자 요나는 가드헤벨 출신인데, 가드헤벨은 후대에 갈릴리로 불리게 되는 지역, 나사렛 근처에 있던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52절의 말을 어떤 예언자도 갈릴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절대적인 주장으로 이해한다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장차 올 특별한 예언자에 한정된 주장으로 이해하려는 해석도 있어, 단순한 역사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으로 이 논쟁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끝으로 본문의 경계입니다. 일부 성경에는 7:53–8:11에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이 대목은 파피루스 66·75와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주요 초기 그리스어 사본에 없고 다른 위치에 실린 사본도 있어, 원래 요한복음에 속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탕 본문 역시 이 대목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7:52가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에 남은 두 목소리
요한복음 7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둘러싼 판단의 이야기입니다. 이 장의 끝에 이르면 그 판단들이 하나의 공통된 문제를 드러냅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만, 자신의 판단이 정말 옳은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실을 무시하는 일도, 이미 가진 정보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도 아닙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시 살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한계 앞에서 예수님은 예수님께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마지막 두 장면을 나란히 놓아 보면 대조가 나타납니다. 명절의 마지막 날, 큰 축제일에 예수님께서는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면 내게 와서 마셔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니고데모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이냐?」 하고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목마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갈릴리라는 출신을 근거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예수님께 호의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마저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니고데모가 서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고, 다만 그 사람의 말을 먼저 듣지도 않은 채 심판하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올바르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셨고, 니고데모는 그 판단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 요한복음 7장은 끝납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붙잡으려 했던 예수님은 아직 붙잡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명절 마지막 날 성전에서 울려 퍼졌던 「누구든지 목마르면 내게 와서 마셔라」라는 초청도 아직 이야기 속에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