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예수님을 판단하는 사람들

예루살렘의 장막절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성전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고, 무리 가운데서는 예수님의 정체를 놓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선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무리를 홀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갈릴리 출신이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님에 대해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결정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드러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정식으로 배우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가르치실 수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겉모습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라. 도리어 의롭게 판단해라」(2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판단할 만큼 충분히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작 알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율법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정작 율법이 요구하는 공정한 판단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장은 인간의 잘못된 판단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서 오셨는지, 그리고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지 밝히십니다. 장막절 마지막 날, 예수님은 성전에서 「누구든지 목마르면 나에게 와서 마셔라」(37절) 하고 외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규정하려 하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으로 알아보도록 예수님께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두 움직임이 요한복음 7장을 이끌어 갑니다.

읽는 시간 35분소단락 87장 본문 읽기 →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라」

요한복음 7:1–10 본문 →

예수님의 형제들은 무엇을 원했을까?

이야기는 갈릴리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에서 다니려 하지 않으십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유대 사람들’은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앞 장에서부터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려 했던 적대적인 세력을 가리킵니다(5:16–18).

그때 장막절이 가까워집니다. 레위기 23:33–43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일곱 날 동안 초막에서 지내면서, 여호와야훼께서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신 뒤 광야에서 거하게 하셨던 일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장막절은 농사의 수확을 기뻐하는 명절이기도 했고(신명기 16:13–15),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하여,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도록 유대로 가라고 말합니다.

「숨어서 무슨 일을 하면서 자신은 거리낌 없이 드러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한다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라.」요한복음 7: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정말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예루살렘에서 그 능력을 보여 주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공개적인 인정과 영향력을 얻으려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조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조언 바로 뒤에 뜻밖의 설명을 붙입니다.

그의 형제들조차 그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능력을 보여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믿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형제들의 제안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구에게서 보내심을 받으셨으며 누구의 뜻에 따라 일하시는가를 중심에 두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 때는 아직 와 있지 않다. 그러나 너희 때는 늘 마련되어 있다.」요한복음 7:6 · 본디새김

예수님의 때와 형제들의 때

형제들은 장막절이 다가왔으니 지금이 자신을 드러낼 좋은 기회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이 생각하는 적절한 시기와 예수님께서 따르시는 시기가 다른 것입니다.

그 차이는 7절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내가 세상이 하는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7 · 본디새김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세상 앞에서 예수님을 드러내시면 사람들이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세상의 인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이 하는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에 미움을 받으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3:16), 동시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거부하는 질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환영을 얻으려고 그 악한 일을 묵인하거나 증언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 주시기 좋은 시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분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너희는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라. 나는 이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지 않는다. 내 때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8 · 본디새김

그런데 10절에서는 형제들이 올라간 뒤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원문에도 이 문제와 관련된 사본 차이가 있습니다. 8절의 부정 표현이 ‘않는다’(우크)인 사본들이 있고, ‘아직 아니다’(우포)인 사본들도 있습니다. ‘아직 올라가지 않는다’로 읽으면 10절과의 긴장이 줄어들고, ‘올라가지 않는다’로 읽으면 앞뒤의 차이를 설명해야 합니다. 더 어려운 읽기인 ‘올라가지 않는다’를 원래 읽기로 보는 견해가 있고, 이 본문도 이 읽기를 따릅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예수님은 형제들이 권한 방식으로 올라가지 않으십니다. 형제들이 먼저 올라간 뒤, 「드러내 놓고 간 것이 아니라 숨어서 가듯이」 올라가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거부하신 것은 예루살렘이라는 장소라기보다 형제들이 제안한 방식과 시기였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해석이 8절의 표현에 남아 있는 긴장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과 뒤이은 행동을 그대로 나란히 기록합니다.

형제들이 정한 때에는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으셨지만, 명절이 진행되는 동안 예수님은 스스로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숨어서 오신 분이 이제 성전 한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카이로스입니다. 단순히 시계로 측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기에 적합한 시기나 정해진 기회를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배우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성경을 아는가

요한복음 7:11–18 본문 →

성전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예루살렘에서는 이미 유대 사람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며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무리 가운데서는 수군거림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무리를 홀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거리낌 없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논쟁의 중심에 계시지만, 정작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절이 이미 반쯤 지났을 때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올라가 가르치십니다.

형제들이 요구했던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놀라며 말했다. 「이 사람이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알고 있는가?」요한복음 7:15 · 본디새김

여기서 ‘글을 안다’는 표현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다는 의미로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성경과 종교적 문헌에 관한 학식, 그것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능력이 문제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문맹이셨다거나 어떤 교육도 받지 않으셨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인정받는 정규 학문적 훈련을 거치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성경을 가르치실 수 있는지 놀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에는 전승과 스승의 권위가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자격을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복음 7:16 · 본디새김

지식의 양이나 해석 기술을 내세우는 대답이 아니라, 가르침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대답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배웠기에 이런 것을 아는가’라고 묻고,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분에게서 온 가르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면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7:17 · 본디새김

예수님은 가르침을 분별하는 문제를 단순히 지적인 능력이나 학력의 문제로만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의지의 문제를 함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천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어떤 가르침을 판단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려는 사람과, 이미 정해 놓은 자신의 입장을 지키려는 사람은 같은 말씀을 듣고도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과 연구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지식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기준을 한 가지 더 제시하십니다.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영광을 구한다. 그러나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참되고 그 안에 불의가 없다.」요한복음 7:18 · 본디새김

형제들은 예수님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정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과시하시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의 뜻을 진실하게 드러내시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판단하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문제 삼으십니다. 모세의 율법입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수군거림’(공귀스모스)은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리거나 불평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장면에도 사용되고,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투덜거린 것과도 이어집니다. 그러나 7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며, 호의적인 평가와 적대적인 평가가 함께 오갑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온전히 낫게 하는 것이 잘못인가

요한복음 7:19–24 본문 →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할까?

예수님은 갑자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십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가운데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죽이려 하느냐?」요한복음 7:19 · 본디새김

가르침의 권위를 논하던 대화가 살해 의도에 관한 문제로 바뀝니다. 그러나 별개의 주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율법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정작 율법의 뜻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을 당시 유대인 모두가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판단을 향한 논쟁적 발언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운 판단을 저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리가 대답했다. 「당신은 귀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합니까?」요한복음 7:20 · 본디새김

1절에서 독자는 이미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리 전체가 일부러 거짓말한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모든 상황을 똑같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 수 있고, 실제로 25절에서는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 몇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말합니다. 요한은 같은 장소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보와 판단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소문을 놓고 다투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가 된 사건으로 돌아가십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했는데 너희는 이 일 때문에 다 놀란다.」요한복음 7:21 · 본디새김

이 ‘한 가지 일’은 앞서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5:1–18). 이번에는 안식일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신다는 설명보다, 율법 자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할례는 허용하면서 온몸을 낫게 하는 일에는 분노하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다. 할례는 모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너희는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한다.」요한복음 7:22 · 본디새김

창세기 17:9–14에서 여호와야훼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십니다.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레위기 12:3). 그날이 안식일과 겹치면,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정해진 날에 행해야 하는 할례를 안식일에도 시행할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관행을 논증의 출발점으로 삼으십니다.

「모세의 율법이 깨지지 않도록 사람이 안식일에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낫게 했다고 해서 너희가 나에게 성을 내느냐?」요한복음 7:23 · 본디새김

할례는 몸의 한 부분에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온몸을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예외 규정 하나를 더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인정하고 있는 율법의 적용 방식을 근거로, 언약의 표징을 몸에 행하는 일이 안식일에도 허용된다면 오랫동안 병들었던 한 사람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일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는 율법이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가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안식일과 할례는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이며, 예수님은 어느 하나를 무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여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겉모습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라. 도리어 의롭게 판단해라.」요한복음 7:2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요한복음 7장 전체를 읽는 기준이 됩니다.

안식일에 깔자리를 들고 걸었다는 사실만 볼 것이 아니라, 왜 그 사람이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는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오셨다는 사실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실제로 보내신 분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틀리지 않더라도, 그 사실만으로 내린 결론은 틀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을 무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사실을 더 깊고 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근거로 다시 판단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에서 ‘온’이라는 뜻의 홀론은 낫게 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가 아니라 사람을 꾸미는 형용사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사실보다, 한 사람 전체가 건강하게 되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안다」

요한복음 7:25–36 본문 →

알고 있는 출신과 알지 못하는 기원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 몇이 예수님을 보고 「그들이 죽이려 하는 이가 이 사람 아닌가?」 하고 놀라워합니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계시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도자들이 혹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다가, 곧 스스로 그 가능성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올 때에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요한복음 7:27 · 본디새김

당시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왕을 기다리는 전통이 있었고, 모세와 같은 예언자나 종말에 나타날 구원자를 기다리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을 당시 모든 유대인이 공유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 장면에 등장한 일부 사람들의 판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실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외치십니다.

그러자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치며 외쳐 말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복음 7:28 · 본디새김

첫 부분을 반어적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너희가 정말 나를 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읽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인간적인 출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되, 그 앎이 예수님의 참된 기원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이해합니다.

어느 쪽이든 이어지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이 나를 보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29 · 본디새김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판단에서 빠져 있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를 아는 것과, 예수님께서 누구에게서 오셨는지를 아는 것은 다릅니다.

붙잡으려 하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30 · 본디새김

이 문장은 6절에서 예수님께서 형제들에게 하신 「내 때는 아직 와 있지 않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등장시키려 했고, 반대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자신의 계획대로 예수님의 길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가 사람들의 기대나 적대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는 이루셔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완성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리 가운데서는 다른 반응도 나타납니다.

무리 가운데 많은 이가 그를 믿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올 때에 설마 이 사람이 행한 표징보다 더 많은 표징을 행하겠는가?」요한복음 7:31 · 본디새김

이들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에 대한 판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징은 실제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므로, 이것을 곧바로 잘못된 믿음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표징을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밝히시는 예수님의 정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반응이 종교 지도자들의 귀에 들어가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경비병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예수님의 떠남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말했다. 「내가 조금 더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복음 7:33 · 본디새김
「너희는 나를 찾겠지만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복음 7:34 · 본디새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유대 사람들에게 가시거나, 그리스 사람들을 가르치시려는 것은 아닌지 추측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방금 33절에서 목적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를 지리적인 출신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지리적인 이동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오심도, 떠나심도 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가르치러 가실 것인지 묻는 말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훗날 요한복음 12:20–21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리스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7장의 사람들은 그런 미래를 내다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자신들이 아는 세계 안에서 다른 가능성을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가 하는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 오는 사람들이 무엇을 받게 될 것인지 밝히십니다.

조금 더 깊이

30절의 ‘때’는 원문에서 6절의 카이로스와 다른 호라, 곧 ‘시각’이나 ‘시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과 영광을 받으실 때를 향해 발전합니다(12:23; 17:1).

장막절 마지막 날에 들린 외침

요한복음 7:37–39 본문 →

물을 기념하는 명절에 생명의 물을 약속하시다

요한복음 7장은 장막절이라는 배경 없이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장막절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여호와야훼의 은혜를 기억하고, 수확을 마친 뒤 하나님의 공급을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이 절기에는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와 성전 제단에 붓는 의식도 있었고, 이 의식은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되어 이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물을 공급하신 일을 기억했고, 장차 하나님이 백성을 회복하실 때 풍성한 물과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예언의 약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절기의 마지막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치십니다.

명절의 마지막 날 곧 그 큰 날에 예수가 서서 외쳐 말했다. 「누구든지 목마르면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복음 7:37 · 본디새김

예수님은 사람들이 물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장소를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사야가 초청했던 목마른 사람들

예수님의 외침은 이사야 55:1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목마른 사람들을 물로 초청하며,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먹고 마시라고 부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문맥 속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관계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인간이 값을 치러 얻어야 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55:1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목마른 사람을 물로 초청한다는 표현은 명백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이사야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백성을 생명의 물로 초청하시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람들을 예수님께 초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주시는 물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신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들이 받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초청에는 「누구든지」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형제들은 믿지 않았고,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지도자들은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특정한 집단이나 신앙적 자격을 갖춘 사람만을 부르지 않으시고, 목마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초청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분열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에 나아가는 길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 와서 마시는 것입니다.

샘이 아니라 강들이 흘러나온다

「나를 믿는 사람은 — 성경이 말한 대로 — 그의 배에서 살아 있는 물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복음 7:38 · 본디새김

목마른 사람이 물 한 잔을 받아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안에서 강들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은 단수의 강이 아니라 복수의 강들을 말씀하십니다. 흘러넘치는 풍성함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그’는 누구일까요? 원래 그리스어 사본에는 오늘날의 문장부호가 없었으므로, 어느 곳에서 문장을 끊는지가 해석에 영향을 줍니다.

본문처럼 문장을 나누면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와서 마시고 믿는 사람이 생명의 물을 받아, 그 사람 안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이 마시는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오르는 샘이 될 것이라는 요한복음 4:14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사람은’을 앞의 ‘마셔라’에 연결하여 문장을 다르게 나누면,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을 예수님 자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성령의 생명이 흘러나와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해석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오는 장면(19:34)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어느 읽기가 더 적절한지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해석 모두 생명의 물이 예수님에게서 오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만 이 본문이 택한 첫 번째 읽기에서는 생명의 물을 받은 사람이 자기만 생명을 누리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는 의미가 더 강조됩니다. 이것을 곧바로 모든 신자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전달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물로 그려집니다.

「성경이 말한 대로」 — 어느 성경인가?

믿는 사람의 배에서 살아 있는 물의 강들이 흘러나온다는 문장이 구약에 그대로 나오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한 절의 직접 인용보다, 구약의 여러 약속에 나타나는 생명의 물이라는 주제가 모여 있다고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 예루살렘에서 살아 있는 물이 흘러나온다는 스가랴 14:8, 목마른 땅에 물을 주시는 일과 영을 부어 주시는 일을 나란히 약속하는 이사야 44:3처럼, 물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회복, 성령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7:38이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나님의 회복과 생명의 약속들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독자가 이 물의 의미를 추측에만 맡겨 두지 않도록 직접 설명을 덧붙입니다.

「영이 아직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39절은 이 장의 신학적 중심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는 자기를 믿은 이들이 받게 될 영에 대해 이 말을 했다. 예수가 아직 영광을 받지 않아 영이 아직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7:39 · 본디새김

서술자는 살아 있는 물이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므로 37–38절의 말씀을 단지 마음의 위로나 정신적 만족을 약속하는 말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표현은 매우 낯섭니다. 성령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1:2에는 하나님의 영이 등장하고, 이사야 63:10–11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1:32–33). 39절이 말하는 것은 성령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앞으로 받게 될 성령의 선물입니다.

요한은 그 선물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표현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찬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일을 포함하는 구원 사건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2:23–24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령의 생명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약속의 새로운 성취는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명절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 논쟁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장차 어디로 가실지,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사람들이 무엇을 받게 될지를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무리는 더욱 크게 갈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물 붓기 의식은 후대에 편찬된 유대교 문헌인 《미슈나》의 수카 4: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금으로 만든 그릇에 물을 담아 가져왔고, 성전에서는 나팔 소리가 울렸으며, 제단에는 물과 포도주를 붓는 의식이 행해졌습니다. 미슈나는 예수님 시대보다 후대에 편찬되었으므로 모든 세부 사항이 예수님 당시에도 동일하게 시행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의식이 예수님 시대의 성전 예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라는 점은 널리 인정됩니다. 37절의 ‘마지막 큰 날’이 장막절의 일곱째 날인지, 거룩한 모임을 갖는 여덟째 날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레위기 23:34–36은 장막절을 일곱 날의 절기로 설명하면서 여덟째 날에 별도의 거룩한 모임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물 붓기 의식은 일반적으로 일곱째 날까지 행해졌다고 이해되지만, 제2성전기 문헌의 ‘큰 날’이라는 표현을 바탕으로 여덟째 날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순간에 물 붓기 의식이 실제로 진행 중이었다고 묘사하는 것은 본문이 알려 주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38절의 배경이 되는 본문 가운데 에스겔 47:1–12에서 예언자는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흘러나온 물이 발목에서 점점 깊어져 헤엄치지 않고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되고, 그 물이 흐르는 곳에서 생명이 회복되며 강가에 열매 맺는 나무들이 자라는 환상을 봅니다. 포로 생활로 무너진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성전과 땅의 회복이라는 약속의 일부입니다. 스가랴 14:16–19에서는 살아남은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왕이신 여호와야훼께 예배하며 장막절을 지키는 장면이 이어지므로, 장막절과 살아 있는 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시대라는 주제가 스가랴 14장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메시아의 출신을 논쟁하다

요한복음 7:40–44 본문 →

예언자인가, 그리스도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논쟁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무리 가운데서 이 말을 들은 이들이 말했다. 「이 사람은 참으로 그 예언자다.」요한복음 7:40 · 본디새김
다른 이들은 「이 사람은 그리스도다」 했다. 어떤 이들은 「설마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오겠는가?」 했다.요한복음 7:41 · 본디새김

‘그 예언자’는 모세가 말한 자신과 같은 예언자에 대한 약속(신명기 18:15–18)과 연결됩니다. 요한복음은 이미 1장에서 사람들의 기대 속에 ‘그 예언자’와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모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1:20–25). 이 두 기대가 언제나 엄격하게 분리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종말론적 인물로 이해해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나뉘고 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근거로 예수님의 출신을 문제 삼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에서 나오고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온다고 하지 않았는가?」요한복음 7:42 · 본디새김

사무엘하 7:12–16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윗에게 그의 뒤를 이을 왕조에 관한 약속을 주셨고, 이 약속은 후대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구원자에 대한 기대와 연결되었습니다. 미가 5:2에서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아무런 성경적 근거 없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 예수님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가 하는 점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1과 누가복음 2:4–7은 예수님의 출생을 베들레헴과 연결하지만, 요한복음 7장은 그 정보를 제시하여 논쟁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들의 판단이 놓치고 있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남겨 둡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오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지명이 맞느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참된 정체를 알아보는 일이 지리적인 정보만으로 충분한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독자는 이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육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1:1, 14). 그래서 성전의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갈라지다

그래서 무리가 그 때문에 갈라졌다.요한복음 7:43 · 본디새김

여기서 ‘갈라졌다’는 분열을 나타내는 말로, 단순히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는 정도를 넘어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라고 믿고, 다른 사람들은 출신 때문에 그 가능성을 거부합니다. 몇몇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지만, 아무도 예수님께 손을 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밝히실수록 사람들의 반응은 갈라집니다. 그 이유를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도 알고, 성경의 약속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결론에 이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알게 될 것이라는 17절의 말씀이 다시 떠오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만이 아니라, 그 정보 앞에서 어떤 자세로 판단하고 있는지도 드러냅니다.

이제 그 문제가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가장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제껏 아무도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7:45–52 본문 →

예수님을 붙잡으러 갔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돌아오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데려오지 못한 채 돌아옵니다. 지도자들이 「어찌하여 그를 데려오지 않았느냐?」 하고 묻습니다.

경비병들이 대답했다. 「이제껏 아무도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요한복음 7:46 · 본디새김

경비병들은 기적을 보고 놀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보호했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경비병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붙잡으러 보냄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 체포하지 않은 채 돌아온 것은 분명합니다. 형제들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능력을 과시하지 않고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그 말씀이 경비병들까지 멈추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너희도 홀린 것이냐?」 하고 경비병들을 조롱합니다. 경비병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그를 믿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느냐?」요한복음 7:48 · 본디새김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된가 하는 문제를, 지도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권위 있는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복음 7:49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을 율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자리에 놓고, 예수님께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무리를 무지한 사람들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예수님은 이미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겉모습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왜 율법을 근거로 반박했을까?

그들 가운데 하나이고 전에 예수에게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했다.요한복음 7:50 · 본디새김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며 유대 사람들의 지도자로(3:1), 전에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했던 사람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조금 전 지도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느냐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질문합니다.

「우리 율법이 먼저 그 사람에게서 듣고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기도 전에 그 사람을 심판합니까?」요한복음 7:51 · 본디새김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고 고백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니고데모가 완전한 신앙고백을 했다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실제로 하는 일은 더 구체적입니다. 직접 듣고 확인하기도 전에 심판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신명기 1:16–17에서는 재판하는 사람들이 당사자들의 말을 듣고 의롭게 판단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신명기 17:4도 심각한 범죄의 보고를 들었을 때 자세히 조사하고 확인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율법의 원칙에 비추어 예수님에 대한 판단이 정당한지 묻습니다.

여기서 24절의 「겉모습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라. 도리어 의롭게 판단해라」와 연결이 생깁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의식적으로 인용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두 말씀은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의로운 판단의 원칙이 이제 지도자들의 모임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경비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와 그 말씀이 다르다고 보고합니다. 니고데모는 판단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두 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도 예수님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한 가지 문제를 드러냅니다.

「살펴보고 확인하십시오」 — 그러나 무엇을 살펴보았는가?

그들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입니까? 살펴보고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십시오.」요한복음 7:52 · 본디새김

니고데모는 율법에 따른 공정한 절차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그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니고데모에게도 갈릴리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논증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상대방을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과 충돌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예언자 요나는 갈릴리 지역의 가드헤벨 출신입니다(열왕기하 14:25). 이 말을 역사상 어떤 예언자도 갈릴리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절대적인 주장으로 이해한다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장차 올 특별한 예언자에 한정된 주장으로 이해하려는 해석도 있어, 단순한 역사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으로 이 논쟁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본문의 흐름에서 더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성경을 살펴보라고 하면서 정작 니고데모가 제기한 율법의 공정한 판단이라는 문제에는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의 출신으로 예수님을 판단했고, 이제는 니고데모의 질문에도 출신 지역을 언급하며 대답합니다.

요한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냅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종교 지도자들이 그의 말을 다시 검토했는지, 경비병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 결말은 의도적인지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강한 역설을 남깁니다. 성경을 살펴보라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이 판단하는 사람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율법이 요구하는 공정한 판단을 외면하고, 자신들을 무지한 무리와 구별하던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실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가드헤벨은 후대에 갈릴리로 불리게 되는 지역, 나사렛 근처에 있던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의 경계도 짚어 둡니다. 일부 성경에는 7:53–8:11에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이 대목은 파피루스 66·75와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주요 초기 그리스어 사본에 없고 다른 위치에 수록된 사본도 있어, 원래 요한복음에 속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탕 본문 역시 이 대목을 본문에 포함하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7:52가 마지막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7:1–52 본문 →

요한복음 7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둘러싼 판단의 이야기입니다. 그 판단들은 하나의 공통된 문제를 드러냅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만, 자신의 판단이 정말 옳은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실을 무시하고 아무런 근거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정보를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정보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도 아닙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시 살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한계 앞에서 예수님은 예수님께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마지막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두 목소리가 들립니다. 명절의 마지막 큰 날에 예수님은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면 나에게 와서 마셔라」 하고 외치십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니고데모에게 「당신도 갈릴리 사람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한쪽에서는 목마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오라고 하시고, 다른 한쪽에서는 갈릴리라는 출신을 근거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예수님께 호의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마저 의심합니다.

그 사이에 니고데모가 서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다만 먼저 듣고 알아보지도 않은 채 심판하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지도자들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그 장면에서 요한복음 7장은 끝납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붙잡으려 했던 예수님은 아직 붙잡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명절 마지막 날 성전에서 울려 퍼졌던 예수님의 초청, 「누구든지 목마르면 나에게 와서 마셔라」는 아직 이야기 속에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