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빵을 주신 분이 빵이 되시다

남자만 오천 명쯤 되는 무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만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끝에 이르면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빵을 먹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나갑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뒤로 물러가고 더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고, 나중에는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떠납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예수님께서 빵을 더 이상 주실 수 없게 된 것도, 예수님의 능력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처음보다 훨씬 큰 선물을 약속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입니다.

문제는 그 빵이 무엇인가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그 빵이라고 말씀하셨고, 더 나아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육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원했던 것보다 훨씬 큰 약속을 들었지만, 그 약속을 받아들이기는 오히려 어려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원하는 일과 예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은 같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6장의 중심에 놓인 긴장입니다.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6장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 줍니다. 믿음이 가장 어려워지는 순간이 반드시 기적이 부족한 순간은 아닙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너무나 분명하게 밝히실 때, 사람들이 물러서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빵을 먹습니다(1–15절). 이어서 바다 위에서 예수님의 정체가 제자들에게 드러납니다(16–21절). 그다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무리에게 참된 빵이 무엇인지 설명하십니다(22–40절). 그러나 말씀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의 반발도 커집니다(41–59절). 마침내 많은 제자가 떠나고, 열둘에게도 같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60–71절).

빵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결국 한 질문에 도달합니다.

예수님께서 더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실 때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읽는 시간 41분소단락 106장 본문 읽기 →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은 빵

요한복음 6:1–15 본문 →

예수님께서는 왜 빌립에게 빵을 어디서 사야 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많은 무리가 따라옵니다. 요한은 그들이 「그가 병든 이들에게 행하던 표징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2절). 무리는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앉으시자, 요한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유대 사람들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다.요한복음 6:4 · 본디새김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일을 기억하는 명절입니다(출애굽기 12장). 그 해방 이후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났고, 먹을 것이 부족해졌을 때 여호와야훼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출애굽기 16장).

이제 유월절이 가까워지는 때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아오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이 이야기의 중심이 됩니다. 요한은 아직 모세나 만나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월절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독자가 이 사건을 이스라엘의 광야 이야기와 함께 생각하도록 준비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는 눈을 들어 많은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빌립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이 먹도록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야 하겠느냐?」요한복음 6:5 · 본디새김

이 질문에 빌립은 매우 현실적인 답을 합니다.

빌립이 그에게 대답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이 사람들이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기에는 모자랍니다.」요한복음 6:7 · 본디새김

이백 데나리온은 상당한 금액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도 이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기조차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때 안드레가 한 아이를 발견합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요한복음 6:9 · 본디새김

빌립은 필요한 돈을 계산했고, 안드레는 현재 가지고 있는 음식을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무리의 수와 사용 가능한 자원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독자에게 이미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빌립을 시험하려고 이 말을 했다. 예수 자신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6 · 본디새김

이 한 문장 때문에 독자는 제자들과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실지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빵집의 위치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부족함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드러내고 계십니다. 사람의 수에 비해 음식과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빌립의 판단 자체는 정확했습니다.

다만 빌립이 계산에 포함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질문을 하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가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

요한은 단순히 빵 다섯 개라고 하지 않고 ‘보리빵 다섯 개’라고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이 표현은 구약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하 4:42–44에서 한 사람이 보리빵 스무 개와 곡식을 예언자 엘리사에게 가져옵니다. 엘리사가 그것을 백 명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자, 사환은 어떻게 이 음식으로 백 명을 먹일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하고, 실제로 사람들이 먹고 남습니다.

양이 부족한 보리빵,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주라는 요구, 도저히 충분하지 않다는 반응, 그리고 먹고도 남는 결말이 겹칩니다. 요한복음이 열왕기하를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보리빵이라는 구체적인 소재까지 겹친다는 점에서 뚜렷한 문학적·주제적 연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엘리사와 같은 또 다른 예언자로 등장하시는 것일까요? 처음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야기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 단지 빵을 늘려 주시는 예언자가 아니라, 자신이 생명을 주는 빵이시라는 사실까지 드러냅니다.

엘리사의 이야기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말씀대로 음식이 충분해집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빵을 들고 감사하신 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무리에게 필요한 빵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나누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만큼 주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앉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고, 남자들의 수가 오천 명쯤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하신 뒤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물고기도 마찬가지로 주십니다.

빌립은 많은 돈이 있어도 사람들이 「조금씩이라도」 받기에는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7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 주셨습니다(11절).

부족함을 예상했던 계산이 풍성함의 경험으로 뒤집힌 것입니다.

각자 한 입씩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음식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식사가 끝나자 또 하나의 명령을 하십니다.

그들이 배부르자 그가 자기 제자들에게 말했다. 「하나도 없어지지 않게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복음 6:1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풍성하게 주시면서도 남은 것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제자들이 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다섯 개의 보리빵으로 시작한 식사가 수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뒤에 나올 말씀과 연결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의 ‘없어지다’와 39절의 ‘잃다’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에서 왔습니다. 이 반복이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같은 장 안에서 풍성하게 주시고 아무것도 잃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란히 놓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빵 한 조각도 없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나중에는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잃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떠나시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가 행한 표징을 보고 말했다. 「이분이 참으로 세상에 오시는 그 예언자다.」요한복음 6:14 · 본디새김

‘그 예언자’는 신명기 18:15–18에서 모세가 말한, 자신과 같은 예언자에 대한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많은 사람이 빵을 먹었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인식한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곧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주제는 요한복음 후반부에서도 중요하게 나타납니다(18:33–37).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어떤 방식으로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묻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먹이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아보았지만, 예수님의 왕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다시 홀로 산으로 물러갔다.요한복음 6:15 · 본디새김

오천 명을 먹이신 직후에 예수님께서는 더 큰 군중을 조직하거나 그들의 환호를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이 기적이 드러내려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권력을 차지할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어떤 생명을 주러 오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질문의 답을 아직 듣지 못한 채, 사람들은 빵을 먹었던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데나리온은 당시 일용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화폐 단위입니다(마태복음 20:2). 따라서 이백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의 약 이백 일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화폐 가치로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습니다. 또 요한이 세고 있는 대상은 남자들이므로, 전체 인원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열두 광주리의 열둘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이 있고, 유월절과 광야의 배경을 고려하면 그러한 상징적 연결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열두 광주리가 열두 지파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다 위에서 들린 말씀

요한복음 6:16–21 본문 →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바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바닷가로 내려가 배에 오릅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짧은 항해 장면에 세 가지 상황을 차례로 기록합니다.

이미 어둠이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제자들에게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거센 바람이 불어 바다가 거칠어지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둠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둠을 곧바로 제자들의 불신앙이나 죄의 상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실제 저녁과 거친 바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한참을 노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 배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도나 바람을 향해 먼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복음 6:20 · 본디새김

사람들이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했던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환호 속에서 왕좌에 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어둡고 거친 바다 위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십니다.

「나다」는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이 장면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보도록 돕는 말 이상의 울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바다는 종종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힘을 나타내며, 여호와야훼께서 바다를 다스리시는 모습은 그분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를 배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리고 곧 배가 그들이 가려던 땅에 닿았다.요한복음 6:21 · 본디새김

배가 곧 닿은 일을 또 하나의 초자연적인 이동으로 읽기도 하고, 예수님을 만난 뒤 항해가 신속히 끝났다는 서술로 읽기도 합니다. 요한은 그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의 무게는 예수님께서 누구신가 하는 질문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빵을 주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고, 제자들은 바다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두 집단 모두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을 경험했지만, 그 권능이 보여 주는 정체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를 직접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제자들은 스물다섯에서 서른 스타디온쯤 노를 저어 갔습니다. 한 스타디온을 약 185미터로 보면 대략 4.6–5.6킬로미터입니다. 「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나다’, ‘바로 나다’라는 뜻으로 충분히 쓰일 수 있으므로, 이 표현이 나올 때마다 반드시 하나님 이름의 직접적인 선언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욥기 9:8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높은 물결을 밟으시는 분이라고 묘사하고, 시편 77:19도 여호와야훼의 길이 바다에 있고 그분의 발자취가 큰 물 가운데 있다고 노래합니다. 요한복음이 이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장면과 뚜렷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표징을 보았지만 표징이 가리키는 것은 보지 못하다

요한복음 6:22–29 본문 →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왜 책망을 들었을까요?

다음 날, 무리는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요한은 제자들만 배를 타고 떠났다는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 배에 타지 않으셨다는 사실, 디베랴에서 다른 배들이 왔다는 사실까지 자세히 기록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바다 건너편에 가 계신지 이해하지 못해,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찾아내자마자 「랍비,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하고 묻습니다(25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언제 오셨는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들이 왜 자신을 찾고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26 · 본디새김

사람들은 분명 표징을 보았습니다. 14절에서도 그들이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불렀습니다. 모순일까요?

표징은 놀라운 사건 자체이면서, 동시에 그 사건을 통해 다른 무엇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길가의 이정표의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서 그 이정표가 안내하는 곳에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빵이 많아지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지만, 그 사건이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알려 주는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표징이 제공한 혜택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표징이 가리키는 예수님의 정체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전날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을 먹이셨으니, 문제는 빵을 먹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빵을 주신 예수님에게서 더 큰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없어지는 양식과 남아 있는 양식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해라. 그것을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바로 그에게 도장을 찍으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27 · 본디새김

이 말씀을 ‘먹고살기 위해 일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사람들의 배고픔을 실제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음식이 필요한 삶과 음식이 필요 없는 삶이 아니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다음 날 다시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곧바로 그것을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양식은 결국 선물로 주어집니다.

무리는 이 말씀에서 ‘일하다’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의 일들을 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복음 6:28 · 본디새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떤 행동들을 실천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답을 하십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하나님의 일은 그분이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복음 6:29 · 본디새김

그들이 물은 것은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답하신 것은 ‘일’입니다. 원문에서도 복수형에서 단수형으로 바뀝니다.

무리는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여러 가지 일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보다 근본적인 하나의 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믿음을 또 하나의 종교적 업적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양식을 자신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구원의 대가라기보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응답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태도와도 달리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기준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이 지금도 빵을 주신다

요한복음 6:30–35 본문 →

방금 빵을 먹고도 다시 표징을 요구하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무슨 표징을 행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요한복음 6:30 · 본디새김

그들은 바로 전날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더 결정적인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요한이 이 질문을 앞의 기적 바로 뒤에 배치했다는 점에서 독자는 그들이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아직 보지 못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구약의 이야기로 뒷받침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는 대로입니다. 『그분이 그들에게 하늘에서 온 빵을 주어 먹게 하셨다.』」요한복음 6:31 · 본디새김

이 인용은 출애굽기 16:4와 시편 78:24 등에서 나타나는 만나의 전통을 반영합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빵의 기적을 모세 시대의 만나와 비교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모세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계속 만나를 먹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빵은 하루의 식사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모세 시대에 필적하는 일을 보여 주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요구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 비교의 전제를 바꿉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하늘에서 온 빵을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도리어 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하늘에서 온 참된 빵을 주신다.」요한복음 6:32 · 본디새김

첫째, 만나를 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이스라엘을 인도한 지도자였지만, 만나 자체의 근원은 여호와야훼였습니다.

둘째, 시제가 다릅니다. 앞에서는 모세가 빵을 ‘주었다’는 과거의 일을 말하지만, 뒤에서는 아버지가 참된 빵을 ‘주신다’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빵을 주신 일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참된 빵을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33 · 본디새김

만나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먹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빵은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선물의 범위도, 그 선물이 이루는 일도 더 커졌습니다.

그런데 무리는 여전히 그 빵을 어떤 음식으로 이해하는 듯합니다. 「주님, 그 빵을 우리에게 늘 주십시오」(34절). 한 번 먹고 다시 구해야 하는 빵이 아니라, 언제나 받을 수 있는 빵을 원합니다.

그 요청에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6:3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주실 빵은 어떤 새로운 종류의 음식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 빵을 먹는 것은 ‘나에게 오는 것’과 ‘나를 믿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두 표현은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이라는 두 표현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빵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별한 음식을 원한다면 그 음식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시라면, 이제 문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혜택만 받아들이면서 예수님 자신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결코 밖으로 내쫓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6:36–40 본문 →

믿음의 이야기에서 먼저 등장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밝히신 뒤, 「너희가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36절).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표징도 경험했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는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다음에 나오는 것은 불신앙을 향한 위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오는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주시는 것은 다 나에게 올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결코 밖으로 내쫓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6:37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주시는 일과,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일입니다.

앞부분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대상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표현은 중성 단수 형태로, 전체를 하나로 묶어 가리킵니다. 그런데 뒷부분에서는 ‘나에게 오는 사람’이라는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바뀝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전체를 말씀하다가, 이제 예수님에게 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에게 하시는 약속은 단순히 친절하게 맞이하신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절하거나 버리지 않겠다는 강한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할 때는 물러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내쫓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겉으로 보면 서로 반대되는 행동처럼 보일 수 있지만 차이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뜻대로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할 때, 예수님께서는 물러나셨습니다. 반면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서의 예수님을 신뢰하며 나아오는 사람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내어 주시지 않지만, 자신에게 오는 사람에게는 생명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 「내 뜻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8절). 예수님의 삶을 움직이는 중심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뜻은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이것이다. 그분이 나에게 주신 모든 것 가운데서 내가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것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한복음 6:39 · 본디새김

여기에는 현재와 미래가 함께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께 오는 사람을 내쫓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날에는 그 사람을 다시 살리십니다. 구원은 단지 인간이 예수님을 얼마나 단단히 붙잡고 있는가에만 달려 있는 사건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신실한 보호가 그 바탕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은 인간의 믿음도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이 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내가 마지막 날에 그 사람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복음 6:40 · 본디새김

37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람들을, 40절에서는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들을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두 가지 모두를 말합니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일은 아버지의 뜻과 행위 안에 있고, 동시에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 약속됩니다.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이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기독교 신학 안에서 여러 방식으로 설명되어 왔고, 요한복음 6장도 그 논의에서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러나 그 논쟁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직접 강조하시는 것은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내쫓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다음 날에도 먹을 수 있는 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은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다

요한복음 6:41–51 본문 →

「우리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말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는데, 지금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는가?」요한복음 6:42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도, 부모도, 인간적인 출신과 관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니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앎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자라셨는지 알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요한은 그들의 반응을 ‘투덜거렸다’는 동사로 묘사합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16장에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도 그 장면에 관련 동사가 사용됩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은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원망했고, 여호와야훼께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빵을 충분히 주셨는데도 사람들이 원망합니다.

처음에는 빵이 없어서 원망했습니다.

이제는 참된 빵이 자신들 앞에 있는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해 투덜거립니다.

여기서 ‘유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이 대화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문제 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문맥으로 읽어야 합니다. 앞서 빵을 먹었던 무리 역시 대부분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민족 전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계시 앞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반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배운 사람은 예수님께 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그를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복음 6:44 · 본디새김

‘이끌다’는 끌어당기거나 이끄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로, 사람을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강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어떻게 역사하는가에 관한 논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습니다. 어떤 해석은 아버지의 이끄심이 반드시 효과를 이루는 은혜라고 이해하고, 다른 해석은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혜가 사람에게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한 동사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응답 사이의 모든 신학적 문제를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곧바로 덧붙이시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예언자들의 글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나에게 온다.」요한복음 6:4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54:13을 인용하십니다. 이사야 54장은 고난을 겪고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던 시온에게 회복을 약속하며, 그 자녀들이 여호와야훼께 가르침을 받으며 평안을 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문맥에서 이 말씀은 무너진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세워지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약속을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과 연결하십니다.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무관한 종교적 지식을 많이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으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에게 나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는 인간적인 부모에 관한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고, 아버지께서 가르치시는 일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요한복음 6:46 · 본디새김

아버지께 배우는 사람이 된다고 해서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아버지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를 직접 보신 분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예수님이시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리실 수 있습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요한복음 6:47 · 본디새김

그리고 이어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48절). 두 문장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고, 그 믿음의 대상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요한복음 6:49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만나가 쓸모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실제 공급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나가 주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이 누구든지 먹고 죽지 않게 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다.」요한복음 6:50 · 본디새김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육체적 죽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믿는 사람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육체적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에 이르는 생명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내 육이다.」요한복음 6:51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께 오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줄 빵이 ‘내 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순간부터 대화의 분위기가 더욱 날카롭게 바뀝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내 육이다」

요한복음 6:52–59 본문 →

예수님은 왜 자신의 육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을까?

51절은 요한복음 6장의 전환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그 빵이 자신의 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은 사람의 실제적인 육체와 인간적인 존재를 가리킬 수 있는 말로, 말씀이 육이 되셨다는 요한복음 1:14의 선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단지 하늘의 가르침을 전달하러 오신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제 인간의 육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제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육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실제 인간적 생명과 분리된 가르침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줄 빵」이라는 표현은 앞으로 일어날 자기 내어 줌을 향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양들을 위해 내어놓으시는 목자로 묘사되며(10:11, 15),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육을 주신다는 말씀도 그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서로 다투며 말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육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는가?」요한복음 6:52 · 본디새김

그들의 질문은 단순히 이해력이 부족해서 나온 반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육을 먹는다는 말도 충격적인데, 이어 피를 마시라는 말씀까지 나옵니다. 레위기 17:10–14는 피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표현을 거두거나 약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의 육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다.」요한복음 6:53 · 본디새김
「내 육을 씹어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복음 6:54 · 본디새김

53절의 ‘먹다’가 54절부터는 ‘씹어 먹다’로 바뀌고, 요한은 이 대목에서 먹는 행위를 거듭 말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그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사람이 배고프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이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6:35). 이제는 자신의 육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고 말씀하십니다(6:54).

40절과 54절에는 더욱 뚜렷한 평행이 있습니다. 40절에서는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이, 54절에서는 예수님의 육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며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납니다. 약속되는 결과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먹고 마신다는 표현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에 참여한다는 의미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먹고 마신다’는 표현을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는 육에 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옳은 말씀을 하신다고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빵을 멀리서 바라보거나 빵에 관해 정확히 안다고 해서 배가 부르지는 않습니다. 먹어야 합니다. 음식은 먹는 사람에게 들어가 그 생명을 유지하는 데 참여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밖에서 도움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믿는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내 육을 씹어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안에 머문다.」요한복음 6:56 · 본디새김

이제 초점이 영원한 생명의 소유에서 서로 안에 머무는 관계로 옮겨갑니다. 예수님에게서 어떤 능력이나 혜택을 받아 자신의 삶에 더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처럼, 나를 씹어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요한복음 6:57 · 본디새김

예수님은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서 보내심을 받으셨고 아버지 때문에 사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삽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영원한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아들을 통해 믿는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생명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육과 피를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십니다(55절).

이 말씀은 성찬을 가리키는가?

예수님의 육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기독교 역사에서 성찬과 깊이 연결되어 이해되어 왔습니다. 해석은 크게 세 갈래입니다. 성찬의 의미를 드러내는 본문으로 읽는 해석, 성찬 의식 자체보다 예수님의 죽음과 그 생명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중심이 있다고 보는 해석, 그리고 성찬과의 연결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미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생명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넓혀 이해하는 해석입니다. 이 차이는 교회가 성찬을 어떻게 이해하고 행하는가와 이어지기에, 가볍게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중심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을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내어 주겠다고 말씀하시고, 그 육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며 예수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어떤 성찬 이해를 취하든, 이 구절을 예수님 자신과 분리된 종교적 의식의 효력만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주시는 것은 어떤 의식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입니다.

이 말씀은 듣는 사람들에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어려움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터져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54절의 ‘씹어 먹다’는 트로고입니다. 본래 씹거나 우적우적 먹는 동작을 생생하게 나타낼 수 있지만, 코이네 그리스어에서는 일반적인 ‘먹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단어만으로 예수님이 반드시 더 노골적인 육체적 섭취를 강조하셨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단어의 변화를 해석에 얼마나 반영해야 하는지에는 견해가 갈립니다. 성찬 해석과 관련해, 예수님의 몸과 피를 가리키는 표현은 마태복음 26:26–28, 마가복음 14:22–24, 누가복음 22:19–20의 마지막 만찬과 고린도전서 11:23–26의 성찬 전승을 떠올리게 하며, 특히 가톨릭과 정교회 전통에서는 성찬을 통한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친교라는 관점이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믿음의 수용을 중심으로 보는 해석은 앞에서 ‘먹는 것’과 ‘믿는 것’이 같은 생명의 약속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이 해석들 안에서 성찬은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신 일을 기억하고 예수님과의 관계에 참여하는 신앙의 중요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 유월절이 가까웠다는 4절의 설명도 여기서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유월절에는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를 통해 심판을 피하고 이집트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억했고(출애굽기 12장), 요한복음은 이미 1:29에서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6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직접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유월절과 자기 내어 줌의 관계는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신학적 연결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사건들을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예언으로만 바꾸는 일도 아닙니다. 만나는 실제로 광야의 이스라엘을 먹인 하나님의 공급이었고, 유월절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역사 속에서 자신을 알려 주신 하나님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생명을 주신다고 증언합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

요한복음 6:60–66 본문 →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 받아들이기 싫은 것일까?

요한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듣고 말했다. 「이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누가 이 말을 들을 수 있는가?」요한복음 6:60 · 본디새김

‘받아들이기 힘들다’로 옮긴 말은 딱딱하거나 거칠고 혹독한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내용이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만이 아니라, 듣기에 거북하고 받아들이기에 가혹한 말씀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가장 크게 걸려 넘어졌는지는 본문이 하나로 특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주장, 자신의 육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표현, 자신을 믿는 일이 곧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하시는 권위, 또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을 「그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라고 부릅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듣고 함께하는 삶에 참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다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가 더욱 분명해질수록,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오히려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투덜거린다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이 말이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느냐?」 하고 물으신 뒤(61절), 뜻밖의 질문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면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너희가 본다면?」요한복음 6:62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뒤의 결론이 생략된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일까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높아지심과 연결되므로, 앞으로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귀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질문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 믿게 되겠느냐’는 의미인지, ‘그 일은 너희에게 더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의미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질문의 결론이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고 생명이다.」요한복음 6:63 · 본디새김

앞에서는 예수님의 육이 참된 양식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십니다. 앞의 말씀을 부정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말씀이 육이 되셨다고 선언했고(1:14), 방금 예수님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육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6:51). 63절을 예수님의 실제 육체가 무가치하다는 뜻으로 읽으면 앞뒤 문맥과 충돌합니다.

이 대목에서 ‘육’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과 한계 안에서 이해하고 판단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6에서도 육에서 난 것과 영에서 난 것이 대비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단지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말고, 생명을 주시는 영의 역사 안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실제로 육체를 지니셨다는 사실이나 예수님의 자기 내어 줌을 단지 비유라고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영과 물질의 선악을 비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만으로는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하신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는 일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의 틀에 새로운 내용을 더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해가 도전받고, 기대하던 예수님의 모습이 바뀌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제자에게 그 변화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또 자신을 넘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다고 설명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아버지에게서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복음 6:65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이끄신다는 44절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믿음은 인간의 지적 능력만으로 판단하는 일이 아니며, 아버지의 역사 없이는 누구도 예수님께 올 수 없습니다.

이 일로 그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뒤로 물러가고 더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복음 6:66 · 본디새김

그들은 단지 마음속으로 의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떠났습니다. 2절에서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66절에서는 많은 제자가 더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셨습니다. 요한은 그들이 떠난 이유를 예수님의 설명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떠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자신의 말씀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원하는 빵을 다시 주겠다고 약속하며 돌아오라고 설득하지도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으셨는가로 예수님의 사역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요한복음 6:67–71 본문 →

베드로는 왜 ‘어디로’가 아니라 ‘누구에게’라고 대답했을까?

많은 제자가 떠난 뒤 예수님은 열둘에게 물으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열둘에게 말했다. 「너희도 떠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한복음 6:67 · 본디새김

원문에서는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질문 형태가 사용됩니다. 예수님이 열둘도 떠나기를 바라신다기보다, 그들이 계속 함께하려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전날에는 남자만 오천 명쯤 되는 무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이제 열둘만을 향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대답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을 가지고 계십니다.」요한복음 6:68 · 본디새김

베드로는 처음부터 ‘우리는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하지 않습니다. 다른 질문으로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어디로’라고 묻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라고 묻습니다.

무리는 빵을 원했고, 사람들은 표징을 요구했으며, 많은 제자는 예수님이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떠났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른 곳에서 더 좋은 빵이나 더 설득력 있는 표징을 찾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고 누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예수님 자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알게 되었습니다.」요한복음 6:69 · 본디새김

무리는 예수님을 ‘그 예언자’라고 부르고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께 속한 특별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어 보내심을 받으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나중에야 이해하는 경우도 보여 줍니다(2:22; 12:16). 베드로의 믿음은 모든 의문이 사라진 상태라기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신뢰하는 고백입니다.

많은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멈췄습니다. 베드로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붙잡습니다.

그러나 열둘 모두가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의 고백으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요한복음 6장은 아름다운 승리의 장면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렇게 끝내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내가 너희 열둘을 고르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은 마귀다.」요한복음 6:70 · 본디새김
그는 시몬 이스가리옷의 아들 유다를 두고 말한 것이었다. 열둘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장차 예수를 넘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71 · 본디새김

많은 사람이 떠났고 열둘은 남았습니다. 그런데 남아 있는 열둘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넘길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열둘의 공동체가 모두 동일한 믿음과 충성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요한은 유다가 왜 그런 길을 가게 되는지 이 자리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유다가 이미 예수님을 넘기는 일을 실행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장차’ 그 일을 하게 될 사람이라고 독자에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 그가 「열둘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라다닌다는 사실과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것은 언제나 동일하지 않습니다. 열둘이라는 특별한 공동체에 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믿음의 참됨을 자동으로 보증하지도 않습니다.

이 장은 누가 참으로 믿는 사람인지 명단으로 답하지 않고, 믿음이 무엇을 붙드는지를 보여 줍니다. 빵을 먹었던 경험도, 놀라운 표징도, 예수님을 왕으로 삼을 수 있다는 기대도 아닌,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고백했지만, 요한은 그 고백이 들린 바로 그 자리에 유다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이 장은 쉽게 안심할 수 있는 결말을 주지 않습니다.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 남은 한마디

요한복음 6:1–71 본문 →

요한복음 6장은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장면에서 시작해,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인지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생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육을 내어 주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사람들이 걸려 넘어진 것은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이 빵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은 보았지만, 예수님 자신이 그 빵이라는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더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실 때, 믿음은 무엇일까요? 베드로도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무조건 이해했다고 가장하는 태도가 아니라,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찾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 자신을 필요로 합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지만, 더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함께 남아 있는 열둘 사이에도 이미 서로 다른 마음이 있고, 예수님은 그것까지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오천 명이 먹고 남은 열두 광주리만큼 눈에 보이는 기적은 아닙니다. 거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모습처럼 놀라운 광경도 아닙니다.

빵을 먹었던 수많은 사람의 환호가 사라진 자리에서, 예수님 앞에는 열둘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직 베드로의 고백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을 가지고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