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빵을 주신 분이 빵이 되시다
남자만 오천 명쯤 되는 무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만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의 끝에 이르면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빵을 먹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나갑니다.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는 예수와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66절)라고 기록합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예수님의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처음보다 훨씬 큰 선물을 약속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입니다.
문제는 그 빵이 무엇인가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그 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살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원하는 일과 예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은 같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6장의 중심에 놓인 긴장입니다.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6장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 줍니다. 믿음이 가장 어려워지는 순간이 반드시 기적이 부족한 순간은 아닙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너무나 분명하게 밝히실 때, 사람들이 물러서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빵을 먹습니다(1–15절). 이어서 바다 위에서 예수님의 정체가 제자들에게 드러납니다(16–21절). 그다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무리에게 참된 빵이 무엇인지 설명하십니다(22–40절). 그러나 말씀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의 반발도 커지고(41–59절), 마침내 많은 제자가 떠나며 열두 제자에게도 같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옵니다(60–71절).
빵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결국 한 질문에 도달합니다.
예수님께서 더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실 때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은 빵
예수님께서는 왜 빌립에게 빵을 어디서 사야 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많은 무리가 따라옵니다.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무리는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앉으십니다. 그리고 요한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유대 사람들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요한복음 6:4 · 두루새김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일을 기억하는 명절입니다(출애굽기 12장). 그 해방 이후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났고, 먹을 것이 부족해졌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출애굽기 16장). 요한은 아직 모세나 만나를 언급하지 않지만, 유월절이라는 배경은 독자가 이 사건을 광야 이야기와 함께 생각하도록 준비시킵니다.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많은 무리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고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야 하겠느냐?」요한복음 6:5 · 두루새김
빌립은 매우 현실적인 답을 합니다.
빌립이 대답했습니다. 「200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사람마다 조금씩 나누어 주기에는 모자랍니다.」요한복음 6:7 · 두루새김
이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약 이백 일 품삯에 해당하는 상당한 금액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도 조금씩 나누어 주기조차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때 안드레가 한 아이를 발견합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만한 것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요한복음 6:9 · 두루새김
빌립은 필요한 돈을 계산했고, 안드레는 가지고 있는 음식을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무리의 수와 음식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독자에게 이미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말은 빌립을 시험하려고 하신 질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무엇을 할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요한복음 6:6 · 두루새김
이 한 문장 때문에 독자는 제자들과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빵집의 위치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부족함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드러내고 계십니다. 사람의 수에 비해 음식과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빌립의 판단 자체는 정확했습니다.
다만 빌립이 계산에 포함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질문을 하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가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
요한은 단순히 빵 다섯 개라고 하지 않고 「보리빵 다섯 개」라고 밝힙니다. 이 표현은 구약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하 4:42–44에서 한 사람이 보리빵 스무 개와 곡식을 예언자 엘리사에게 가져옵니다. 엘리사는 그것을 백 명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령하고, 시중드는 사람은 어떻게 이 음식으로 백 명을 먹일 수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먹고도 남습니다.
양이 부족한 보리빵, 많은 사람에게 주라는 요구, 도저히 충분하지 않다는 반응, 그리고 먹고도 남는 결말이 겹칩니다. 요한복음이 열왕기하를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보리빵이라는 소재까지 겹친다는 점에서 단순한 우연 이상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엘리사와 같은 또 다른 예언자로 등장하시는 것일까요? 처음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야기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늘려 주시는 예언자를 넘어, 자신이 생명을 주는 빵이시라는 사실까지 드러냅니다. 엘리사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음식이 충분해지지만, 여기서는 예수님 자신이 빵을 들고 감사하신 뒤 나누어 주십니다.
조금씩 나누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만큼 주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앉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고, 남자들의 수가 오천 명쯤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하신 뒤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주십니다.
빌립은 많은 돈이 있어도 「사람마다 조금씩 나누어 주기에는」 모자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주셨습니다(11절).
부족함을 예상했던 계산이 풍성함의 경험으로 뒤집힌 것입니다.
사람들이 배불리 먹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나도 버려지지 않게 하여라.」요한복음 6:1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풍성하게 주시면서도 남은 것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제자들이 모은 조각은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다섯 개의 보리빵으로 시작한 식사가 수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뒤에 나올 말씀과 이어집니다.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잃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의 「버려지지」(ἀπόλλυμι)와 39절의 「잃지」는 원문에서 같은 동사입니다. 의도적인 문학적 연결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풍성하게 주시고 아무것도 잃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같은 장 안에 나란히 놓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빵 한 조각도 버려지지 않게 하십니다.
나중에는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잃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떠나시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실 그 예언자야.」요한복음 6:14 · 두루새김
「그 예언자」는 신명기 18:15–18에서 모세가 말한, 자신과 같은 예언자에 대한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많은 사람이 빵을 먹었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알아본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곧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주제는 요한복음 후반부에서도 중요하게 나타납니다(18:33–37).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으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먹이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아보았지만,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자신을 억지로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다시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요한복음 6:15 · 두루새김
오천 명을 먹이신 직후에 예수님께서는 더 큰 군중을 조직하거나 그들의 환호를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이 기적이 드러내려는 것은 권력을 차지할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어떤 생명을 주러 오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질문의 답을 아직 듣지 못한 채, 사람들은 빵을 먹었던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데나리온은 당시 하루씩 일하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쓰일 수 있었던 화폐 단위입니다(마태복음 20:2). 오늘날 화폐 가치로 정확히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요한이 세는 대상은 남자들이므로 전체 인원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열두 바구니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도 있고, 유월절과 광야의 배경을 고려하면 그런 연결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게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다 위에서 들린 말씀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바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바닷가로 내려가 배에 오릅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짧은 항해에 세 가지 상황을 차례로 기록합니다.
이미 어두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제자들에게 오지 않으셨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어 바다에는 큰 물결이 일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둠은 중요한 이미지이지만, 본문은 여기서 실제 저녁과 거친 바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노를 저어 한참을 갔을 때,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 배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파도나 바람을 향해 먼저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복음 6:20 · 두루새김
이 「나다」는 일상에서 「바로 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지만,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이 장면에서는 바다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 더 깊은 울림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했던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환호 속 왕좌에 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어둡고 거친 바다 위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 했습니다. 곧 배는 그들이 가려던 땅에 닿았습니다.요한복음 6:21 · 두루새김
사람들은 빵을 주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고, 제자들은 바다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두 집단 모두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지만, 그 능력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준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를 직접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제자들이 간 거리는 25~30스타디온, 대략 4.6–5.6킬로미터입니다. 「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일상 대화에서 충분히 쓰이는 말이므로 이 표현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 이름의 직접적인 선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바다는 종종 인간이 다스리기 어려운 힘을 나타내며, 욥기 9:8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높은 물결을 밟으시는 분이라고, 시편 77:19는 하나님의 길이 바다에 있다고 노래합니다. 요한복음이 이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주제에서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21절에서 배가 곧 목적지에 닿은 일은 또 하나의 초자연적인 이동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만난 뒤 항해가 빠르게 끝났다는 서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그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표징을 보았지만 표징이 가리키는 것은 보지 못하다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왜 책망을 들었을까요?
다음 날, 무리는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요한은 제자들만 배를 타고 떠났고 예수님께서는 그 배에 타지 않으셨으며, 디베랴에서 다른 배들이 왔다는 것까지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찾아낸 사람들은 「선생님,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오셨는지 대신, 그들이 왜 자신을 찾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26 · 두루새김
사람들은 분명 표징을 보았습니다. 14절에서도 그들은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표징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모순일까요?
표징은 놀라운 사건이면서, 그 사건을 통해 다른 무엇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정표의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이정표가 안내하는 곳에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표징으로 얻은 혜택은 보았지만, 표징이 가리키는 예수님의 정체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전날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을 먹이셨으니, 배고픔을 가볍게 여기신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빵을 주신 예수님에게서 더 큰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없어질 먹을 것과 남아 있는 먹을 것
「없어질 먹을 것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남아 있는 먹을 것을 위해 일하여라. 그것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에게 도장을 찍어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27 · 두루새김
이 말씀을 「먹고살기 위해 일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대조되는 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다음 날 다시 배가 고프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음식으로 채울 수 없는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먹을 것을 위해 「일하여라」라고 하시면서, 곧바로 인자가 그것을 「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먹을 것은 결국 선물로 주어집니다.
무리는 일하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복음 6:28 · 두루새김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복음 6:29 · 두루새김
두루새김은 질문과 대답 모두 「하나님의 일」(ἔργον)로 옮겼지만, 원문에서 그들이 물은 것은 여러 가지 일들이고 예수님께서 답하신 것은 하나의 일입니다. 무리는 해야 할 여러 일을 알고 싶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하나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사람이 만들어 내어 하나님께 지불하는 대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먹을 것을 자신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태도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응답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이 지금도 빵을 주신다
방금 빵을 먹고도 다시 표징을 요구하다
사람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선생님을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징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요한복음 6:30 · 두루새김
그들은 바로 전날 빵 다섯 개로 수많은 사람이 먹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더 결정적인 증거를 요구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요한이 이 질문을 기적 바로 뒤에 놓았기에 독자는 그들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아직 보지 못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성경에도 『그분이 그들에게 하늘에서 온 빵을 주어 먹게 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복음 6:31 · 두루새김
이 인용은 출애굽기 16:4와 시편 78:24 등에 나타나는 만나 이야기를 반영합니다. 모세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계속 만나를 먹었는데, 예수님께서 주신 빵은 하루의 식사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모세 시대에 견줄 만한 일을 보여 주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요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하늘에서 온 빵을 준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오는 참된 빵을 너희에게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요한복음 6:32 · 두루새김
예수님의 대답은 비교의 바탕을 두 가지에서 바꿉니다. 첫째, 만나를 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말씀을 전하고 이스라엘을 인도했지만, 만나 자체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둘째, 모세가 빵을 「준」(δίδωμι) 과거의 일과 아버지께서 참된 빵을 「주시는」 지금의 일이 원문에서도 대조됩니다. 광야의 일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참된 빵을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33 · 두루새김
만나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먹였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빵은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무리는 여전히 그것을 어떤 음식으로 이해하는 듯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늘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그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이 장의 중심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6:3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주실 빵은 새로운 종류의 음식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 빵을 먹는 것은 「내게 오는」 것과 「나를 믿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두 표현은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빵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별한 음식이라면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시라면, 이제 문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혜택만 받아들이면서 예수님 자신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내게 오는 사람을 나는 결코 내쫓지 않을 것이다」
믿음의 이야기에서 먼저 등장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밝히신 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나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위협이 아니라, 예수님께 오는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내게 올 것이다. 내게 오는 사람을 나는 결코 내쫓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6:37 · 두루새김
이 구절에는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주시는 일과,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일이 함께 있습니다. 원문에서 앞부분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대상을 하나로 묶어 가리키고(두루새김은 「주시는 사람은 모두」로 풀어 옮겼습니다), 뒷부분은 「내게 오는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전체를 말씀하시다가, 예수님께 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에게 하신 약속은 거절하거나 버리지 않겠다는 강한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뜻대로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할 때 예수님께서는 물러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서의 예수님을 신뢰하며 나아오는 사람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는 것」(38절)에 있습니다. 그 뜻은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이것이다. 그분이 내게 주신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내가 잃지 않고, 그들 모두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한복음 6:39 · 두루새김
지금은 예수님께 오는 사람을 내쫓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날에는 그 사람을 다시 살리십니다. 구원은 인간이 예수님을 얼마나 단단히 붙잡고 있는가에만 달려 있지 않고,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변함없는 보호가 그 바탕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은 인간의 믿음도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이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지막 날에 그 사람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복음 6:40 · 두루새김
37절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람들을, 40절은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먼저 이끄시는 일과 인간의 믿음을 둘 중 하나만 인정할 설명으로 만들지 않고, 두 가지 모두를 말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기독교 신학 안에서 여러 방식으로 설명되어 왔고, 이 장도 그 논의에서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직접 강조하시는 것은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내쫓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람을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다음 날에도 먹을 수 있는 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은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다
「우리가 그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 아니야? 우리가 그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데, 어떻게 지금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라고 말하는 거지?」요한복음 6:42 · 두루새김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도, 부모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씀하시니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앎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자라셨는지는 알지만, 어디에서 오셨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투덜거렸습니다」(γογγύζω)라는 동사는 출애굽기 16장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도 관련 동사가 쓰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원망했고,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빵을 충분히 주셨는데도, 참된 빵 앞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해 투덜거립니다. 광야의 이야기가 새로운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 사람들」은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이 대화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문제 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문맥으로 읽어야 합니다. 앞서 빵을 먹었던 무리 역시 대부분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민족 전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밝히시는 말씀 앞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반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배운 사람은 예수님께 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내게 오는 그 사람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복음 6:44 · 두루새김
「이끌어」(ἕλκω)에 해당하는 동사는 끌어당기거나 이끄는 행위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관한 논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습니다. 어떤 해석은 아버지의 이끄심이 반드시 효과를 이루는 은혜라고 보고, 다른 해석은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시는 은혜가 사람에게 응답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한 동사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응답 사이의 모든 신학적 문제를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덧붙이십니다.
「예언자들의 글에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내게 온다.」요한복음 6:4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 54:13은 고난을 겪은 시온에게 회복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던 시온이 회복되고, 그 자녀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으며 평안을 누리리라는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약속을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과 연결하십니다.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무관한 종교 지식을 많이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으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에게 나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는 인간적인 부모에 관한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고, 아버지께서 가르치시는 일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누군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요한복음 6:46 · 두루새김
아버지께 배우는 사람이 된다고 해서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아버지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를 보신 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이시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리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가장 바탕이 되는 약속으로 돌아오십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47–48절)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고, 그 믿음의 대상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요한복음 6:49 · 두루새김
만나는 실제로 광야의 이스라엘을 살린,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은 주지 못했습니다. 만나를 먹은 사람들도 결국 죽었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먹고 죽지 않도록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다.」요한복음 6:50 · 두루새김
「죽지 않도록」은 몸의 죽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믿는 사람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에 이르는 생명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내 살이다. 세상이 생명을 얻도록 주는 것이다.」요한복음 6:51 · 두루새김
지금까지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께 오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줄 빵이 「내 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순간부터 대화의 분위기가 더욱 날카롭게 바뀝니다.
「내가 줄 빵은 내 살이다」
예수님은 왜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을까?
51절은 요한복음 6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살」은 사람의 실제 몸과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가리킬 수 있는 말로, 요한복음 1:14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선언에 쓰인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인간의 몸을 지니셨고, 그 예수님이 세상이 생명을 얻도록 자신의 살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자신의 인간적 생명과 분리된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줄 빵」은 앞으로 자신을 내어 주실 일을 가리키며, 요한복음 후반부의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으시는 목자로도 그려집니다(10:11, 15).
여기서 유월절이라는 배경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를 통해 심판을 피하고 해방된 사건을 기억했고(출애굽기 12장), 요한복음은 이미 1:29에서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다만 6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직접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며, 이 관계는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연결입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서로 다투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지?」요한복음 6:52 · 두루새김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말도 충격적인데, 이어 피를 마시라는 말씀까지 나옵니다. 레위기 17:10–14는 피에 생명이 있다는 근거로 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듣는 사람들의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표현을 거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요한복음 6:53 · 두루새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내가 마지막 날에 그 사람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복음 6:54 · 두루새김
두루새김은 53절과 54절 모두 「먹고」(τρώγω)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54절부터 씹어 먹는 동작을 생생하게 나타낼 수 있는 다른 동사가 쓰입니다. 이 변화를 얼마나 무겁게 읽을지는 견해가 갈리지만, 요한이 먹는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그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40절에서는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이, 54절에서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납니다. 약속되는 결과가 같다는 점에서, 먹고 마신다는 표현은 예수님을 믿고 그 생명에 참여하는 일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는 뜻으로만 줄여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위해 내어 주시는 살에 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옳은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빵을 멀리서 바라보거나 빵에 관해 정확히 안다고 배가 부르지는 않습니다.
먹어야 합니다.
음식은 먹는 사람에게 들어가 그 생명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은 밖에서 도움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생명이 믿는 사람의 생명이 되게 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요한복음 6:56 · 두루새김
이제 초점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데서 서로 안에 머무는 관계로 옮겨 갑니다. 혜택을 받아 삶에 더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된 생명의 관계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복음 6:57 · 두루새김
생명은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그리고 아들을 통해 믿는 사람에게로 이어집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생명이 아니라, 그 생명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참된 먹을 것과 참된 마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찬을 가리키는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기독교 역사에서 성찬과 깊이 연결되어 이해되어 왔습니다. 해석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뉩니다. 성찬의 의미를 드러내는 본문으로 읽는 해석, 성찬 의식보다 예수님의 죽음과 그 생명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중심이 있다고 보는 해석, 그리고 성찬의 언어를 인정하면서도 그 근본 의미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생명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이 차이는 교회가 성찬을 어떻게 이해하고 지키는가와 이어지기에 가볍게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분명한 중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생명을 얻도록 자신의 살을 내어 주시고, 그것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며 예수님 안에 머뭅니다. 성찬을 어떻게 이해하든, 이 구절을 예수님 자신과 분리된 종교 의식의 효력만으로 줄여 읽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근원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듣는 사람들에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어려움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터져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살」(σάρξ)로 옮긴 원문 낱말은 사람의 몸과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함께 가리킬 수 있습니다. 54절에서 쓰인 동사는 트로고입니다. 본래 씹거나 우적우적 먹는 동작을 나타낼 수 있지만, 당시 코이네 그리스어에서는 일반적인 「먹다」로도 쓰였기 때문에 이 단어만으로 더 직접적인 육체적 섭취를 강조하셨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성찬 해석과 관련해서는, 몸과 피를 가리키는 표현이 마태복음 26:26–28, 마가복음 14:22–24, 누가복음 22:19–20의 마지막 만찬과 고린도전서 11:23–26의 성찬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 첫째 해석의 근거입니다. 특히 가톨릭과 정교회 전통에서는 성찬을 통해 예수님과 실제로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둘째 해석은 앞에서 먹는 것과 믿는 것이 같은 생명의 약속으로 연결된다는 점(40절과 54절)을 강조합니다. 셋째 해석은 6:52–58에 성찬의 언어가 쓰였지만 그 언어가 가리키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생명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성찬은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신 일을 기억하고 그 관계에 참여하는 신앙의 중요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이 장에서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주시는 것은 의식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 받아들이기 싫은 것일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누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겠어?」요한복음 6:60 · 두루새김
「받아들이기 어려워」(σκληρός)에 해당하는 원문 낱말은 딱딱하거나 거칠고 혹독한 것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복잡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듣기에 거북하고 받아들이기에 가혹한 말씀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는지 본문은 하나로 밝히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표현, 자신을 믿는 일이 곧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권위가 함께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그들을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듣던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가, 그다음에는 말씀을 두고 다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견디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분명해질수록,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오히려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체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이 말이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느냐?」라고 물으신 뒤 뜻밖의 질문을 덧붙이십니다.
「그렇다면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요한복음 6:62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이 문장 뒤에 올 결론이 생략되어 있어, 두루새김은 남겨진 물음을 「어떻게 하겠느냐?」로 풀어 옮겼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예수님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일까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일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높아지심과 연결됩니다.
다만 이 질문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 믿게 되겠느냐는 뜻인지, 그 일이 더 큰 걸림돌이 되리라는 뜻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원문이 질문의 결론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체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복음 6:63 · 두루새김
앞에서는 예수님의 살이 참된 먹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육체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원문에서 앞의 「살」과 여기의 「육체」는 같은 낱말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말씀을 부정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선언했고(1:14), 예수님은 방금 세상이 생명을 얻도록 자신의 살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6:51). 이 대목의 「육체」는 인간이 타고난 능력과 한계 안에서 이해하고 판단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6에서도 육체에서 난 것과 영에서 난 것이 대비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실제 몸을 지니셨다는 사실이나 자신을 내어 주시는 일을 단지 비유로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영과 물질 가운데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비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만으로는 생명을 만들 수 없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이 영이며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는 일은 이미 아는 지식의 틀에 새 내용을 더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앞에서 자신의 이해가 도전받고, 기대하던 예수님의 모습이 바뀌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제자에게 그 변화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는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그들이 누구인지, 또 자신을 넘겨줄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다고 설명합니다.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요한복음 6:65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이끌어 주신다는 44절의 말씀과 이어집니다. 믿음은 인간의 지적 능력만으로 판단하는 일이 아니며, 아버지의 일하심 없이는 누구도 예수님께 올 수 없습니다.
이 일로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는 예수와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6:66 · 두루새김
그들은 마음속으로 의심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떠나갔습니다. 2절에서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66절에서는 많은 제자가 더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셨습니다. 요한은 그들이 떠난 이유를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말씀하신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라고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떠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말씀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원하는 빵을 다시 주겠다며 설득하지도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으셨는가로 예수님의 사역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베드로는 왜 ‘어디로’가 아니라 「누구에게」라고 대답했을까?
많은 제자가 떠난 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설마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복음 6:67 · 두루새김
원문은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질문 형태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도 떠나기를 바라신다기보다, 그들이 계속 함께하려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전날에는 오천 명이 빵을 먹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는데, 이제 열두 제자만을 향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복음 6:68 · 두루새김
베드로는 어디로 갈지를 묻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갈지를 묻습니다.
무리는 빵을 원했고, 사람들은 표징을 요구했으며, 많은 제자는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곳에서 더 좋은 빵이나 더 설득력 있는 표징을 찾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 말고 누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은 예수님 자신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알게 되었습니다.」요한복음 6:69 · 두루새김
무리는 예수님을 「그 예언자」라고 부르고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보내신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나중에야 이해하는 경우도 보여 줍니다(2:22; 12:16). 많은 제자는 말씀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데서 멈췄지만, 베드로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붙잡습니다.
그러나 열둘 모두가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의 고백으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요한복음 6장은 아름다운 승리의 장면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렇게 끝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은 마귀다.」요한복음 6:70 · 두루새김
이 말은 시몬 이스가리옷의 아들 유다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예수를 넘겨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6:71 · 두루새김
남아 있는 열두 제자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넘겨줄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은 유다가 이미 그 일을 실행하고 있다고 하지 않고, 앞으로 그 일을 하게 될 사람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을 부정하지 않지만, 열두 제자가 모두 같은 믿음과 충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라다닌다는 사실과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것은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열두 제자라는 공동체에 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믿음의 참됨을 저절로 보증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장은 쉽게 안심할 수 있는 결말을 주지 않습니다.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 남은 한마디
요한복음 6장은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에게서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지만, 그 빵이 가리키는 더 큰 선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예수님 자신이었고, 그 생명은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 자신의 살을 내어 주시는 일과 이어져 마지막 날의 부활에까지 이릅니다. 사람들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질문 자체를 잘못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답이 기대한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있었습니다.
먹을 것과 건강과 안정을 바라는 필요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모든 의문이 풀린 상태가 아니라,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말씀하시는 분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이해했다고 가장하는 태도와는 다릅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돌아섰습니다. 표징을 보고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바라보시며 「설마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열두 바구니만큼 눈에 보이는 기적도,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모습처럼 놀라운 광경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장이 처음부터 보여 주려던 것이 그 짧은 고백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찾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 자신을 필요로 합니다.
무리는 흩어지고, 많은 제자도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남아 고백하지만, 바로 그 열두 제자 가운데 앞으로 예수님을 넘겨줄 유다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함께 남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이미 서로 다른 마음이 있고, 예수님은 그것까지 알고 계십니다.
빵을 먹었던 수많은 사람의 환호가 사라진 자리에서, 예수님 앞에는 열두 제자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직 베드로의 고백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