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생명을 주시는 분 앞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병을 앓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연못가에 누워 있었지만, 물에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뒤처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낫고 싶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의 끝에 이르면 예수님은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 하지 않는다.」
원문에서는 이 두 문장에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그리스어 텔로(θέλω), 곧 ‘원하다’라는 말입니다. 두루새김은 앞에서는 「낫고 싶으냐?」로, 뒤에서는 「나에게 오려 하지 않는다」로 옮겼습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에게 낫기를 원하는지 물으시고, 뒤에서는 성경을 샅샅이 살피는 사람들이 정작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몸을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걷습니다. 반면 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움직일 수 있고, 성전을 드나들며, 성경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 앞에 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한 장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이 병든 사람을 완전한 믿음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고, 고침받은 뒤의 행동도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깁니다. 요한은 그 사람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합니다.
이 장은 한 사람이 고침받는 일로 시작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까? 왜 안식일에도 일하십니까? 아버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계십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어째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됩니까?
처음의 치유는 긴 설교를 시작하기 위한 계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뒤에서 말씀하실 모든 것을 눈앞에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서른여덟 해 동안 기다린 사람
「저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가신 곳은 양 문이라는 성문 곁의 베드자다 연못으로, 「기둥으로 지붕을 받친 통로」가 다섯 개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본문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건축물이 아니라 그곳에 누워 있는 사람들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팔다리가 오그라든 사람들에게 연못은 특별한 기대가 걸린 장소였습니다. 7절에서 병든 사람은 물이 출렁일 때 들어가려고 했지만 매번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물의 움직임에 낫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서른여덟 해 동안 병을 앓아 온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이 밝히는 것은 그가 오랜 세월 병을 앓았다는 사실이지, 그 세월 내내 연못가에 누워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물으십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가 이미 오랫동안 병을 앓아 왔다는 것을 알고 물으셨습니다. 「낫고 싶으냐?」요한복음 5:6 · 두루새김
얼핏 이상한 질문입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은 사람이 당연히 낫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의 대답을 들어 보면 이 질문이 왜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병든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일 때 저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요한복음 5:7 · 두루새김
그는 ‘예, 낫고 싶습니다’라고 직접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낫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 사람의 말에는 절박함과 함께, 그가 낫는 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에게 낫는 길은 물에 들어가는 것이고, 문제는 그 물에 도달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도움은 자신을 물에 넣어 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가 누워 있던 깔개를 들고 걸어라.」요한복음 5:8 · 두루새김
예수님은 그를 연못으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물이 출렁이기를 기다리지도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도록 도와주시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직접 말씀하시고, 그 사람이 곧 낫습니다.
그가 바랐던 것은 물에 들어가도록 도와줄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도록 그를 고치십니다.
깔개를 들라는 말씀은 왜 필요했을까?
예수님은 단순히 일어나 걸으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일어나 네가 누워 있던 깔개를 들고 걸어라」라는 명령은 일어나는 것, 깔개를 드는 것, 걷는 것, 세 가지 동작을 포함합니다.
오랫동안 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난다는 것만으로도 고침받았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깔개까지 들게 하십니다. 그 깔개는 지금까지 그 사람의 몸을 받쳐 주던 물건이지만, 이제는 그가 깔개를 들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기 깔개를 들고 걸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요한복음 5:9 · 두루새김
병이 나았다는 기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한이 덧붙인 짧은 문장으로 이야기에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갈등의 중심에는 병이 아니라 깔개가 놓입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은 이 명절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유월절이나 다른 절기로 짐작하는 견해들이 있지만 확정할 수 없습니다. 고고학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 북쪽에서 두 개의 수조가 가운데 둑으로 나뉜 연못 유적이 조사되었는데, 바깥의 네 통로와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통로를 생각하면 통로가 다섯 개라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못의 이름에는 베드자다와 베데스다 등 사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또 일부 오래된 성경 번역에는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는 설명(4절과 3절 뒷부분)이 들어 있지만, 이 부분은 중요한 초기 그리스어 사본들에 없어 현대 비평본문에서는 원래의 요한복음에 속하지 않는 후대의 설명으로 판단해 제외합니다. 7절에 등장하는 물의 움직임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려고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였는지는 이 본문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고침받은 사람보다 깔개에 주목하다
사람들이 먼저 물은 것은 ‘누가 고쳤는가’가 아니었다
유대 사람들이 나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에요. 깔개를 들고 다니면 안 돼요.」요한복음 5:10 · 두루새김
여기서 「유대 사람들」은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이 사건에서 안식일 규정을 문제 삼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과 고침받은 사람 모두 유대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표현을 유대인 전체에 대한 부정적 판단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깔개를 드는 일을 문제 삼은 데에는 나름의 성경적 배경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8–11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고 쉬신 날을 기억하며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날이고, 신명기 5:12–15에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기억하고 종과 나그네까지 쉬게 해야 한다는 뜻이 강조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쉼을 공동체 전체가 누리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또 예레미야 17:21–22에는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가거나 집에서 짐을 내오는 일을 금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장사와 연결되지만, 이후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에서는 물건을 옮기는 행동 자체를 더 폭넓게 다루게 됩니다. 사해문서의 다마스쿠스 문서에서도 안식일에 물건을 옮기는 것을 제한한 사례가 확인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예수님은 사랑을 가르치셨고 유대 사람들은 쓸데없는 규칙에 집착했다’는 식으로만 설명하면 당시 갈등의 깊이를 놓치게 됩니다. 그들에게 안식일 규정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신앙적 확신 때문에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를 낫게 해 주신 분이 『네 깔개를 들고 걸어라』라고 하셨어요.」요한복음 5:11 · 두루새김
그들이 물었습니다. 「『들고 걸어라』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예요?」요한복음 5:12 · 두루새김
그들은 누가 낫게 해 주었는지 묻지 않고, 「들고 걸어라」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고침받은 사람에게는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이 깔개를 들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질문하는 사람들은 그 말에서 병을 고치는 능력보다 규정을 어긴 책임을 찾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깔개를 들 수 있게 된 것이 기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깔개를 들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대목이 던지는 질문은 안식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잘못이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을 참되게 이해한다면, 오랜 세월 고통받던 사람이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성전에서 다시 만난 사람
고침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납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그를 만나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네가 나았다.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복음 5:14 · 두루새김
예수님은 왜 병을 고쳐 주신 뒤에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실까요? 한 견해는 과거의 죄와 질병 사이에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그 죄가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9:1–3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를 본인이나 부모의 특정한 죄로 설명하려는 생각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거부하십니다.
다른 견해는 여기서 말하는 죄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과 연결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몸의 치유를 받은 사람에게 더 근본적인 생명의 문제를 일깨우신다는 것이며, 실제로 5장의 뒷부분은 믿지 않는 것과 심판의 문제를 다룹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은 몸이 나은 것만으로 이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더 나쁜 일」이 더 심한 질병을 가리키는지 마지막 심판을 가리키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예수님은 고침받은 뒤의 삶도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행동은 독자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사람은 유대 사람들에게 가서 자신을 낫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알립니다. 이 행동을 예수님을 배신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의 이름을 단순히 알려 준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이 사람의 마음속 동기도, 그가 이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치유 이야기는 감사와 찬양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박해로 이어집니다.
이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박해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5:16 · 두루새김
「이런 일」이라는 표현은 문제가 한 번 일어난 우연한 사건만이 아니었음을 암시합니다. 안식일에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활동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왜 그 일을 하시는지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다. 나도 일한다」
예수님은 왜 안식일 논쟁을 더 크게 만드셨을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다.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17 · 두루새김
안식일 논쟁에서 기대할 법한 대답은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은 선한 일이므로 안식일에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마태복음 12:11–12; 마가복음 3:4).
그런데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다른 차원의 근거를 제시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3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유대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의 안식과 그분께서 세계를 계속 유지하고 돌보신다는 사실은 함께 생각되어야 했습니다. 안식일에도 사람은 태어나고 생명은 유지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아버지의 일과 직접 연결하십니다.
이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더욱 애썼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신 데다,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내세우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5:18 · 두루새김
이것은 그저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말하는 정도의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문제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아들은 아버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아들도 그대로 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5:19 · 두루새김
방금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내세우신다는 비난을 받으셨는데, 이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못하시며 스스로 일할 능력이 없는 존재라고 설명하시는 것일까요?
그렇게만 읽으면 19절의 뒷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첫 번째 문장은 아들이 아버지와 떨어져 따로 행동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두 번째 문장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아들이 참여하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경쟁하는 또 다른 신적 존재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보통의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거나 하나님의 일을 일부 맡아 하시는 데 머무르지도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하십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예수님은 사랑으로 설명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자신이 하시는 일을 모두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놀라도록 이보다 더 큰 일들도 아들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요한복음 5:20 · 두루새김
여기에는 감추고 경쟁하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보여 주실 더 큰 일들이 무엇인지 곧 밝혀집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과 심판하는 일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요한복음 5:21 · 두루새김
이제 예수님은 병든 사람 하나가 건강을 되찾은 사건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로 나아가십니다.
구약에서 생명을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신명기 32:39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죽이고 살린다고 선언하시고, 열왕기하 5:7에서 이스라엘 왕은 나아만을 고쳐 달라는 요구를 받고 자신이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이냐고 되묻습니다. 에스겔 37:1–14의 마른 뼈 환상은 포로 생활 속에서 소망을 잃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바탕 위에서 아들도 살리신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더욱 놀랍게 들립니다.
더욱이 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19절에서는 아버지와 떨어져 따로 행동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지만, 이 둘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아들은 자기 뜻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뜻이 아버지의 뜻과 갈라져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요한복음 5:22 · 두루새김
생명을 주는 권한뿐 아니라 심판하는 권한도 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이유가 23절에서 밝혀집니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존중하는 것처럼 아들도 존중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존중하지 않는다.」요한복음 5:23 · 두루새김
하나님을 참되게 존중하면서 그분께서 보내신 아들을 거부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5장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신 것이 옳은지 묻는 논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질문은 ‘예수님께서 누구신가’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신 일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행하시고 생명과 심판의 권한을 받으신 아들의 관계가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 가 있다
영원한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심판을 받지 않으며,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요한복음 5:24 · 두루새김
예수님은 믿는 사람이 언젠가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현재형이고,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μεταβαίνω)는 원문에서 과거에 일어난 이동의 결과가 현재에도 이어진다는 뜻을 나타내는 완료형 동사입니다.
믿는 사람은 미래의 약속만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몸으로 죽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28–29절에서 예수님은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 장차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믿는 사람에게 지금 이미 새로운 생명의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또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일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믿는 일과 연결됩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인간의 구원에 적용한 모습입니다.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복음 5:25 · 두루새김
「때가 온다」는 미래를 가리키는데, 곧바로 「지금이 바로 그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해석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명을 얻는 것으로 보며, 「지금이 바로 그때다」라는 표현과 24절의 지금 누리는 생명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다른 해석은 예수님께서 실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능력을 이미 펼치고 계시다는 측면을 강조하며,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일으키시는 사건이 그 능력을 구체적으로 보여 줄 것입니다. 어느 해석이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같고, 28절에서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장차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말씀과 때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통해 일어납니다. 병든 사람에게 「일어나 네가 누워 있던 깔개를 들고 걸어라」 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앞의 치유가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눈앞에 보여 주었다면, 지금의 말씀은 그 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럴 수 있으실까요? 26절이 그 근거를 밝힙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에게도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5:26 · 두루새김
사람은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음식과 물을 얻으며,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관계 안에서 생명을 자기 안에 가지고 계십니다. 생명을 전달할 능력을 잠시 맡겨 주셨다는 말보다 깊습니다.
이 표현은 기독교 신학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한 관계를 드러내는 말씀으로도, 사람이 되어 오신 아들에게 주어진 구원 사역의 권한을 강조하는 말씀으로도 읽혀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분명한 것은 생명이 아버지께 속한 것처럼 아들에게도 속하며, 아버지와 아들은 생명을 주는 일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훌륭한 가르침을 배우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자기 안에 가지고 계신 분의 목소리를 듣는 일입니다.
지금의 생명과 장차 있을 부활
「또 아들에게 심판할 권한을 주셨다. 그가 인자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5:27 · 두루새김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다니엘 7:13–14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은 환상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 앞에 나아가고,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며, 모든 민족과 나라와 언어의 사람들이 그를 섬기는 장면을 봅니다. 요한복음 5:27은 다니엘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권세와 인자, 심판이라는 주제는 분명한 연결을 이룹니다.
「이 말을 듣고 놀라지 마라.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오기 때문이다.」요한복음 5:28 · 두루새김
「그들은 무덤에서 나올 것이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복음 5:29 · 두루새김
여기서는 25절과 달리 「지금이 바로 그때다」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장차 올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은 지금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부활에 관한 하나님의 마지막 일은 아직 미래에 놓여 있습니다. 현재의 생명이 미래의 부활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고, 미래의 부활도 현재의 생명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으로 줄이지 않습니다.
다니엘 12:2에서는 땅의 티끌 가운데 자는 사람들이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에, 어떤 이들은 수치와 영원한 부끄러움에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극심한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정의를 세우신다는 소망입니다. 요한복음 5:28–29는 그 소망과 매우 가깝지만, 부활을 일으키는 목소리가 바로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라고 선언합니다.
29절의 행동에 관한 말씀은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구원받는다’는 틀로 바꾸면, 바로 앞에서 말씀을 듣고 아버지를 믿는 사람이 생명을 가진다고 하신 문맥을 놓칩니다. 반대로 행동은 믿음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29절의 의미를 약하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요한복음 3:19–21에서도 빛을 향해 오는 것과 악한 일을 하는 것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요한에게 믿음은 인간의 실제 삶과 무관하게 마음속으로만 동의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과 행동을 서로 경쟁하는 두 구원의 방법으로 소개하지 않으시면서, 마지막 심판에서 인간이 행한 일이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 듣는 대로 심판하며,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5:30 · 두루새김
19절의 말씀이 다시 나타나지만, 이번에는 심판과 연결됩니다. 아들의 심판이 올바른 것은 아들이 자기 뜻을 앞세워 혼자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 심판할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판단을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아들의 심판 안에서 아버지의 올바른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말 그런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조금 더 깊이
다니엘 7장의 원래 문맥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환상은 짐승들로 상징되는 폭력적인 제국들의 권세와 대비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백성에게 나라를 주시는 흐름 속에 등장합니다(다니엘 7:18, 27). 또 요한복음의 그리스어에는 이곳의 「인자」에 해당하는 말에 정관사가 없어서, 이를 마지막 때와 관련된 특별한 칭호로 읽는 견해와 예수님의 인간됨에 무게를 두는 견해가 있습니다. 문맥 전체에서는 다니엘 7장과의 연관이 중요한 해석 가능성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들
「나를 두고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
「내가 나 자신을 두고 증언한다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않다.」요한복음 5:31 · 두루새김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참되지 않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이해하면 요한복음 8:14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증언은 참되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명기 19:15에는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사건을 확정하지 않고 두세 증인의 증언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참되지 않다」는 거짓말이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이의 증언 없이 자기 주장만으로는 충분히 증명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8:14는 예수님이 어디서 오셔서 어디로 가시는지 아시기 때문에 자신의 증언이 참되다고 하는, 다른 논쟁의 맥락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세례자 요한을 언급하십니다.
「너희는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고, 요한은 진리를 증언했다.」요한복음 5:33 · 두루새김
예루살렘에서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 그가 누구인지 물었던 일은 이미 1:19–2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사람의 증언에 의지하지 않는다. 다만 너희가 구원받게 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다.」요한복음 5:34 · 두루새김
예수님께 요한의 증언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듣는 사람들이 이미 접했던 증언을 되짚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잠시 그 빛 속에서 크게 기뻐하기를 원했다.」요한복음 5:35 · 두루새김
요한은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비추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등불은 스스로 빛의 근원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8에서 이미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며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빛 속에서 「잠시」 기뻐하기를 원했다는 점입니다. 등불이 비추는 동안 기뻐하는 것과, 그 등불이 가리키는 분에게 나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끝까지 이루라고 맡기신 일들, 곧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바로 그 증언이다.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한다.」요한복음 5:36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앞의 치유 사건을 다시 보게 합니다. 베드자다 연못에서 한 사람이 일어난 것은 단지 놀라운 사건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이 생명을 주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은 증언이지만, 그 증언을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말씀을 지니지 못하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두고 증언하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도,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요한복음 5:37 · 두루새김
아버지의 증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증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혹은 예수님이 하신 일 전체를 아버지께서 참되다고 확인해 주신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증언을 단 하나의 사건으로 밝히지 않지만, 바로 앞의 아버지가 맡기신 일들과 뒤에 나올 성경의 증언이 자연스러운 문맥을 이룹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는 말씀을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혀 들은 적이 없다는 주장으로 넓혀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 4:12에서는 이스라엘이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은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그분의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분이 보내신 나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요한복음 5:38 · 두루새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말씀이 자기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근거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머물러 있지 않다고 판단하십니다.
성경을 샅샅이 살피면서도 생명을 놓치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너희는 성경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여 성경을 샅샅이 살핀다. 그 성경이 바로 나를 두고 증언한다.」요한복음 5:39 · 두루새김
예수님은 성경 연구 자체를 비판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성경이 자신을 두고 증언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경을 연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성경이 가리키는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 하지 않는다.」요한복음 5:40 · 두루새김
그들은 성경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생명을 주시는 분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수고가 결국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성경의 문장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일에서 멈추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알아 가고 있습니까?
다만 이것이 구약의 모든 구절을 원래 문맥과 무관하게 예수님에 관한 암호로 바꾸라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 본문들은 각기 역사적 상황과 글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그 본래 의미를 존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동시에 요한복음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에 도달했다고 증언합니다. 구약이 처음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 충분히 이해할수록, 요한이 예수님을 그 역사와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도 더욱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문제를 성경 해석의 실패로만 설명하지 않으시고, 더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의 방향을 드러내십니다.
「나는 사람들이 주는 영광을 받지 않는다.」요한복음 5:41 · 두루새김
「하지만 너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요한복음 5:42 · 두루새김
42절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원문에서 소유격으로 되어 있어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 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과 이 글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읽었는데, 이어지는 43–44절에서 누구의 이름으로 온 사람을 받아들이며 누구에게서 영광을 구하는지가 문제가 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다른 읽기의 가능성까지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단순한 지식 부족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알며, 신앙에 관한 논쟁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추구하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너희는 서로에게서 영광을 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복음 5:44 · 두루새김
여기서 예수님은 그들이 왜 믿기 어려운지를 드러내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종교적 지위와 명성을 유지하며, 공동체 안에서 높이 평가받으려는 마음이 신앙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당시 지도자들의 허영심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오랫동안 옳다고 인정받아 온 해석을 바꾼다는 것은 때로 지식 하나를 수정하는 문제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겨 온 판단,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평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인정까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보는 능력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의지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지만,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요한복음 5:43 · 두루새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권위와 뜻에 따라 보내심을 받으셨다는 뜻이고, 자기 이름으로 오는 사람은 자신을 내세우며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하셨고, 자신이 하시는 일은 아버지가 맡기신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고발하는 사람이 되다
「내가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고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다.」요한복음 5:45 · 두루새김
예수님을 비판하던 사람들은 스스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희망을 걸어 온 바로 그 모세가 오히려 그들을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모세를 믿고 있었다면 지금 나도 믿고 있을 것이다. 모세가 나에 대해 기록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5:46 · 두루새김
모세가 예수님에 대해 기록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구약에서 한 가지 중요한 본문은 신명기 18:15–18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야훼께서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하며, 그 예언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전합니다. 원래는 모세 이후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언적 권위가 이어질 것이라는 약속인데, 요한복음은 그러한 모세의 전통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요한복음 1:45에서 빌립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46이 정확히 신명기 18장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의 글 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약속과 율법,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일 등이 예수님을 증언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3:14는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사건을 예수님과 연결했습니다.
그들이 참으로 모세의 글을 믿었다면 그 글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일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모세의 글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고발하게 됩니다.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요한복음 5:47 · 두루새김
「모세의 글」과 「내 말」이 함께 놓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글을 버리고 자신의 말씀만 믿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증언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일이 결국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5장은 끝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는지, 반박했는지, 침묵했는지 이 장은 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39절의 「샅샅이 살핀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에라우나테는 직설법과 명령법의 형태가 같습니다. 명령으로 읽으면 예수님이 성경을 살펴 자신에 대한 증언을 발견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이 되고, 진술로 읽으면 이미 성경을 열심히 살피면서도 예수님에게 오지 않는 사람들의 모순을 지적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두 해석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하지만, 진술로 읽으면 바로 뒤의 40절과 날카롭게 연결되며, 이러한 문맥을 근거로 진술형을 지지하는 주석 전통도 있습니다.
치유를 받은 사람과 생명을 거부하는 사람들
베드자다 연못에 누워 있던 사람은 자신의 몸이 낫지 못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물이 출렁이는 때를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먼저 내려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그를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를 일으킨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세의 글을 알고, 성경을 샅샅이 살피며, 무엇이 안식일을 올바르게 지키는 일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식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일과 예수님을 믿는 일이 동일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지키려는 열심 때문에, 자신이 지키려는 그 말씀의 참뜻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묶는 중심에는 예수님이 아버지와 어떤 관계에 계신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과 하나님의 쉼을 기억하고, 종살이하던 사람들에게도 쉼을 보장하는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 안식일에 오랫동안 누워 있던 사람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안식일의 의미를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명을 주는 일이 안식일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드러내시는 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식일 규정을 둘러싼 모든 역사적 논쟁을 간단히 해결하는 설명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생명을 주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며 아들도 그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왜 이토록 길게 설명하고 계신 것일까요? 34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구원받게 하려고」입니다. 심판할 권한을 가지신 아들이시지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이 안식일에 일을 하셔도 되는지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이 하나님을 모독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자신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분에게 오려 하지 않습니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사람을 보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바라보십니다. 한 사람에게는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셨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얻으러 자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사람은 이제 자신의 깔개를 들고 걸어갑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성경을 샅샅이 살피던 사람들 앞에는 여전히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더 많은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 앞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분을 알아보라는 부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