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물을 청하시고 생명을 주시다

요한복음 4장은 뜻밖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길을 걸으시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앉으셔서 한 여자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지자 상황이 뒤집힙니다. 물을 달라고 하시던 분이 오히려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한 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고, 마시는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이 장에는 또 하나의 뜻밖의 장면이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경계하던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기록이 없는데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맞아들인 갈릴리에서는 「너희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지 않으면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믿었고, 갈릴리 사람들은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더 제대로 알아본 것일까요?

이 질문은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죽어 가는 아들을 고쳐 달라고 찾아온 한 아버지가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물과 음식과 생명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깊은 차원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물가에서는 물을 구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 가고, 마을에서는 그 여자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사이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이야기하다가 자신들이 보지 못한 추수를 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모든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을 주시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사마리아를 지나가야 했다

요한복음 4:1–9 본문 →

경쟁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전혀 다른 만남으로 향하다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얻고 세례를 주신다는 소문에서 시작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들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아시자,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방을 떠나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여기서 자신의 설명을 중간에 바로잡습니다.

실제로 세례를 준 사람들은 예수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요한복음 4:2 · 두루새김

요한복음 3:22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셨다고 기록했지만,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그 차이를 독자가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앞 장에서 세례자 요한은 경쟁심을 드러내지 않고 그분은 커져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3:30). 그런데 이제 두 사람의 활동을 비교하는 소문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그런데 독자가 이런 종교적 경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때, 이야기는 갑자기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로 방향을 바꿉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셔야 했습니다.요한복음 4:4 · 두루새김

왜 「지나가셔야」 했을까요?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요단강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도 있었으므로, 지리적으로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어 에데이(δέω)는 ‘해야 했다’, ‘필요했다’는 뜻인데,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필요성이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3:14, 인자가 들려야 한다).

그래서 4:4를 단순한 여행 경로의 설명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셔야 할 일이 사마리아에 있었다는 암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두 해석을 문법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 길이 얼마나 중요한 길이었는지는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가라는 마을 근처, 야곱의 우물에 도착하십니다. 요한은 이곳을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과 연결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도 이스라엘 조상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 배경을 마련합니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길을 걷느라 지쳐 우물가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정오쯤이었습니다.요한복음 4:6 · 두루새김

요한이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생겨났다고 소개된 그 말씀이(1:1–3, 14), 지금은 다른 사람이 길어 주는 물을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이 장의 첫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분이 목마른 사람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복음 4:7 · 두루새김

여자는 놀랍니다.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신앙적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지만, 특히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중심 장소를 놓고 대립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을,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했습니다. 9절의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물건을 함께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는 이러한 경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익숙하게 지켜 온 경계를 넘어, 그 경계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정오쯤」은 원문의 「여섯째 시」를 일반적인 유대식 시간 계산으로 옮긴 것입니다. 더운 시간에 물을 길으러 왔다는 이유로 여자가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본문은 그런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고 분명히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심산에는 실제로 성전이 있었으며 그 유적도 확인됩니다. 9절의 동사는 함께 사용한다는 뜻과 교제하거나 어울린다는 뜻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어서, 정확히 어떤 물건을 함께 쓰지 않았는지, 또는 얼마나 넓은 범위에서 어울리기를 피했다는 뜻인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보다 더 큰 선물

요한복음 4:10–15 본문 →

물을 달라고 하시던 사람이 물을 주겠다고 하시다

여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상 밖의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네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면, 네가 그에게 청했을 것이고 그는 네게 살아 있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요한복음 4:10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와 「네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진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면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물을 떠 올릴 통도 없고 우물은 깊습니다. 그러면 그 살아 있는 물을 어디서 구하십니까?」요한복음 4:11 · 두루새김

「살아 있는 물」은 일상적으로 샘에서 솟거나 흐르는 물, 곧 고여 있는 물과 대비되는 물을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자가 이 말을 실제 물로 이해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주었습니다. 그도 그의 아들들도 가축들도 이 물을 마셨습니다. 설마 선생님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말씀입니까?」요한복음 4:12 · 두루새김

여자에게 우물은 자신들과 야곱을 이어 주는 유산입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해 온 우물보다 더 나은 물이 있다는 말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직접 ‘그렇다’고 답하지 않으시고, 두 종류의 물이 갖는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요한복음 4:13 · 두루새김
「그러나 내가 줄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줄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오를 것이다.」요한복음 4:14 · 두루새김

야곱의 우물은 아무리 좋은 우물이라도 사람이 다시 찾아가서 물을 길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마시는 사람 안에서 샘이 됩니다.

밖에 있던 생명의 근원이 그 사람 안에서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몸의 갈증과 구별되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죽은 다음에 누리는 끝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미 3:36은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시작되는 생명이며,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생명입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도록 그 물을 제게 주십시오.」요한복음 4:15 · 두루새김

여자는 아직 우물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물을 달라고 청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여자입니다.

대화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그 선물의 의미를 알아 가려면 먼저 자신의 삶을 알고 계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2:13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부르시며, 백성이 그 근원을 버리고 물을 저장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이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자신이 참된 생명의 근원이라는 구약의 주제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요한복음은 나중에 이 물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7:37–39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목마른 사람을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 해설을 4장의 물과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네 말은 참말이다」

요한복음 4:16–19 본문 →

예수님은 왜 갑자기 남편을 부르라고 하셨을까?

여자가 살아 있는 물을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로 오너라.」요한복음 4:16 · 두루새김

왜 물 이야기에서 남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일까요? 이 장면은 흔히 여자의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기 위한 대화로 설명됩니다.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이 없다』라고 한 말은 맞다.」요한복음 4:17 · 두루새김
「네게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말은 참말이다.」요한복음 4:1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말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실을 아시면서도,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말이라는 사실을 먼저 확인하십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다섯 번의 결혼이 어떻게 끝났는지, 지금 남편이 아닌 사람과 어떤 상황에서 함께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의 읽기는 여자를 방탕한 사람으로 보는 전통적인 읽기, 여러 차례 남편을 잃거나 버림받았을 가능성을 보는 읽기, 다섯 남편을 사마리아의 외래 집단과 그 신들의 상징으로 보는 읽기로 갈립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이 여자가 죄를 들킨 사람인지, 상처 입은 삶을 알아봐 주신 사람인지가 달라집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여자가 스스로 밝히지 않은 과거를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사용해 여자를 모욕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여자의 말이 참말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아하니 예언자이십니다.」요한복음 4:19 · 두루새김

앞에서는 야곱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제는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삶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여자에게 예수님을 새롭게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대화는 더 깊은 문제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전통적인 읽기와 달리, 당시의 결혼 제도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는 읽기는 여자가 이혼했을 수도, 남편들과 사별했을 수도, 여러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보며, 본문이 여자의 도덕적 책임이나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상징적 읽기는 다섯 남편을 열왕기하 17:24–31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의 외래 집단들과 그 신들로 보아, 사마리아에서 여러 종교가 뒤섞였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섯 남편과 다섯 집단의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 이어지는 장면은 한 여자의 실제 삶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므로 그것을 확정된 의미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나야 하는가

요한복음 4:20–26 본문 →

오래된 종교적 갈등에 대한 예상 밖의 대답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하게 된 여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중요한 종교적 문제를 꺼냅니다.

여자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요한복음 4:20 · 두루새김

이 말을 불편한 과거 이야기에서 벗어나려고 화제를 바꾼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여자가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본 직후에 묻는 것이므로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예배 문제를 묻는 것도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여자가 말한 「이 산」은 그리심산입니다. 신명기 11:29와 27:12에는 그리심산이 이스라엘의 축복 선언과 연결되어 있고, 사마리아 공동체에는 그 산의 지위를 특별하게 이해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반면 유대 사람들에게는 신명기 12장의 ‘여호와야훼께서 택하실 곳’이라는 전통이 예루살렘 성전과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여자의 질문은 누가 참된 이스라엘의 신앙을 이어받았는가,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 예배받으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예배하지 않을 때가 온다.」요한복음 4:2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두 장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너희가」(προσκυνέω)에 해당하는 원문 동사는 복수형이어서, 대답의 대상이 여자 한 사람을 넘어 여자가 속한 공동체 전체로 넓어집니다. 그렇다고 두 공동체의 신앙적 차이가 처음부터 무의미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분께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분께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요한복음 4:22 · 두루새김

구원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역사 속에서 나옵니다. 유대 사람이신 예수님 자신도 바로 그 역사 안에서 오셨습니다. 21절은 그 구원이 이제 어디까지 열리는지를, 22절은 역사 속에서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말하므로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 출발점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구원의 경계선으로 남지도 않습니다.

「때가 온다. 바로 지금이 그때다」

「그러나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 바로 지금이 그때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에게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요한복음 4:23 · 두루새김

「때가 온다」와 「바로 지금이 그때다」가 함께 쓰인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변화가 지금 예수님과 나누고 있는 대화 속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은 사람의 내면이나 영적인 태도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성령을 중심으로 읽을 수도 있으며, 「진리」 역시 예배하는 사람의 진실함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참되게 드러내신 일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미 3:5–8에서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을 말했고, 1:17은 진리가 예수님을 통해 왔다고 말하며, 예수님 자신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14:6).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예배’를 넘어,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참되게 알려지는 새로운 예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예배의 형식이나 공동체의 모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핵심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특정한 산이나 성전을 누가 소유하느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3절의 끝, 「아버지께서는 자신에게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에서 또 한 번 뒤집힘이 일어납니다.

방향이 뒤집힙니다.

사람이 어디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묻는 동안,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셨고, 우물가에 앉으셨으며, 한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요한복음 4:25 · 두루새김

여자가 말하는 메시아는 무엇보다 「저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자의 과거를 아시고, 예배의 문제를 밝히시며, 새로운 때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다.」요한복음 4:26 · 두루새김

여자가 먼 미래의 메시아를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만남을 가리키십니다. 그토록 오래 기다리던 분이 지금 우물가에서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는 상대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도,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자도 아닌 사마리아 출신의 한 여자입니다. 앞 장의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밤에 찾아왔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했고(3:1–2), 이 여자는 낮에 물을 길으러 왔다가 처음에는 우물의 물만 생각했지만 마침내 메시아에 대한 선언을 직접 듣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은 종교적 지위나 이미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메시아 기대는 유대 사람들의 기대와 반드시 같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후대 사마리아 문헌에는 신명기 18:15–18의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약속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참된 신앙을 회복시킬 인물에 대한 기대가 나옵니다. 「내가 바로 그다」로 옮긴 원문 에고 에이미는 그대로 옮기면 ‘나는 ~이다’로, 앞에서 언급된 메시아가 문맥상 채워집니다. 이 표현은 요한복음의 다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분임을 드러내는 말과 연결되어 더욱 깊은 의미를 갖지만, 여기서는 우선 여자가 기다린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물항아리를 놓고 시작된 추수

요한복음 4:27–38 본문 →

한 여자의 말이 마을을 움직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 바로 그때 제자들이 돌아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고 계신 모습을 보고 놀라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물항아리를 두고 마을로 돌아갑니다.

「와서 제가 한 일을 모두 말해 준 사람을 보세요. 혹시 이분이 그리스도일까요?」요한복음 4:29 · 두루새김

본문은 단지 물항아리를 두고 마을로 갔다고 말할 뿐이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 그 장면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물을 길어 가는 일이 급했던 여자가 이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는 일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모든 것을 확실하게 이해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직접 와서 확인해 보라고 권합니다. 이것은 1:46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했던 「와서 보아라」라는 초청과 닮았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증언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과거를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39절에서 요한은 이 말을 분명하게 「증언」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그 여자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었는지 본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실제로 마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향했다는 것은 기록합니다.

이렇게 한 사람과의 대화가 한 마을의 움직임으로 이어집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생각하고, 예수님은 추수를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랍비, 음식을 드십시오」 하고 예수님께 음식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것이 있다.」요한복음 4:32 · 두루새김

제자들은 누군가 예수님께 음식을 가져다드렸는지 궁금해합니다. 여자가 실제로 마시는 물을 생각했듯이 제자들은 실제로 먹는 음식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경우 모두 일상적인 필요에서 출발하여 그것보다 깊은 차원의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먹을 것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끝까지 이루는 것이다.」요한복음 4:3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 길을 걸으시느라 지쳐 계셨으니, 몸에 음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움직이는 더 근본적인 목적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루는」이라는 말은 17:4와 십자가 위의 「다 이루어졌다」(19:30)로 이어집니다.

그 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지금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 일은 사마리아 여자와 이야기하시고,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시는 일입니다. 눈앞에서 만나시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일이 그 사역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너희는 『아직 넉 달이 지나야 거둘 때가 온다』라고 말하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밭의 곡식이 하얗게 익어 거둘 때가 되었다.」요한복음 4:35 · 두루새김

여기서 곡식을 거두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키는 그림으로 바뀝니다. 바로 앞 30절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마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두 장면을 직접 연결한다고 밝히지는 않지만, 많은 독자는 제자들이 눈을 들어 마을에서 나오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러 다녀온 곳이 예수님께는 이미 거둘 때가 된 밭이었습니다.

「거두는 사람은 일한 대가를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고 있다. 씨를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함께 기뻐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4:36 · 두루새김
「나는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라고 너희를 보냈다. 다른 사람들이 수고했고, 너희는 그들이 수고한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요한복음 4:38 · 두루새김

「다른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예언자들, 세례자 요한,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한 사람들 등을 연결할 수 있지만, 본문은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반드시 같은 사람은 아니며, 그 둘이 함께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장은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 수가 비교되는 소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가 더 많은 사람을 모았는지가 아니라, 누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제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마리아의 마을에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4:34의 「끝까지 이루는」과 17:4, 19:30의 표현은 그리스어 형태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맡겨진 일을 끝까지 이룬다는 주제가 한결같이 이어집니다.

「우리가 직접 듣고」

요한복음 4:39–42 본문 →

한 사람의 증언에서 온 마을의 믿음으로

그 마을의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여자가 「그분이 제가 한 일을 모두 말해 주셨어요」라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4:39 · 두루새김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과 함께 머물러 달라고 청하고, 예수님께서는 이틀을 그곳에서 지내십니다. 처음에는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 사람이신 예수님께 함께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처음에는 한 모금의 물을 나누는 일조차 경계의 문제가 되었지만, 이제는 함께 머무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39절에서는 여자의 말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믿었고, 41절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그들이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이야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에요.」요한복음 4:42 · 두루새김

여자의 증언은 쓸모없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역할을 다했습니다. 증언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가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의 구원자」라고도, 「유대 사람들의 구원자」라고도 하지 않고 「세상의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말씀하셨고, 이제 그 구원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갈등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오지만, 유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3:16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세상」은 추상적인 말이었습니다. 이제 그 말에 얼굴이 생깁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자와,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찾아온 사마리아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게 되는 과정에서 어떤 기적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장면을 읽는 열쇠가 됩니다.

보지 않고 말씀을 믿다

요한복음 4:43–54 본문 →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곧 믿는 것일까?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머무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예수 자신께서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중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4:44 · 두루새김
갈릴리에 이르자 그곳 사람들이 예수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들도 명절에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모두 보았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4:45 · 두루새김

고향에서 존중받지 못하신다고 말하면서, 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해석은 「고향」을 유대 지방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지방을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흐름 속에서 읽으면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해석은 「고향」을 갈릴리로 보되,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들을 보았기 때문에 환영했으므로 겉으로는 환영했지만 참으로 존중한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두 해석은 모두 문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본문만으로 논쟁을 완전히 끝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인 이유가 하신 일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특별히 설명합니다. 2:23–25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 믿은 사람들의 믿음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

표징을 보고 나타나는 반응과 예수님 자신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차이가 이제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납니다.

죽어 가는 아들을 둔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던 갈릴리 가나로 다시 가십니다. 요한은 2장의 첫 번째 표징과 지금의 사건을 연결합니다. 그때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 신하는 예수께서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아들이 죽어 가고 있었으므로, 내려오셔서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요한복음 4:47 · 두루새김

그가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지위가 아니라 아들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지 않으면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4:4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원문에서 「보다」(ὁράω)와 「믿다」(πιστεύω)는 모두 복수형이고 두루새김도 「너희는」이라고 옮겼습니다. 이 말씀은 눈앞의 신하 한 사람만을 향한 비난이라기보다,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겨냥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논쟁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간청합니다.

왕의 신하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요한복음 4:49 · 두루새김

남자는 예수님의 권능에 관한 신학적 설명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 가는 아이를 살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려가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그 사람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요한복음 4:50 · 두루새김

남자는 아직 아들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고, 아들이 회복되는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한마디 말씀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말씀을 믿고 길을 떠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와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께서 함께 내려오시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만 가지고 돌아갑니다.

말씀이 먼저 있었고, 확인은 나중에 왔다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노예들이 그를 만나, 아이가 살아 있다고 전했습니다.요한복음 4:51 · 두루새김

노예들의 보고는 예수님께서 하신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그는 아이가 나아진 시각을 물었습니다. 노예들이 대답했습니다.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내렸습니다.」요한복음 4:52 · 두루새김

그는 그 시각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때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요한은 아버지가 처음 믿었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시간의 일치로 확인해 줍니다.

믿음이 확인보다 먼저 왔습니다.

50절에서 이미 그 사람은 말씀을 믿고 떠났고, 53절에서는 말씀과 치유가 일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와 그의 집안 사람들 모두가 믿었습니다. 처음의 믿음이 거짓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을 믿고 떠나는 개인의 행동이, 예수님의 권능을 확인하고 함께 믿는 가족의 반응으로 넓어집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자의 말을 듣고 찾아왔다가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고,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가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갔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누군가에게서 들은 소식으로 시작해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 대한 신뢰로 나아갑니다.

다만 그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마을에서 나오고, 왕의 신하는 아직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두 길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로 돌아와 행하신 두 번째 표징이었습니다.요한복음 4:54 · 두루새김

「두 번째」는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표징(2:11)과 연결됩니다. 첫 번째 표징에서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고, 두 번째 표징에서는 죽어 가던 아이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그곳에 가지 않으시고도 말씀으로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2:23에 이미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여러 표징이 언급되므로, 「두 번째 표징」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든 행하신 기적이 오직 두 번뿐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은 가나의 두 사건을 연결하여 독자가 두 장면을 나란히 읽도록 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누구인가

요한복음 4:1–54 본문 →

생명을 주시는 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처음의 사마리아 여자와 마지막의 왕의 신하는 같은 흐름에 서 있습니다. 여자는 물을 길으러 다시 오지 않아도 되는 것을,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아들을 고쳐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오르는 물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왕의 신하에게는 직접 내려가지 않으시고도 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며(4:10), 새로운 예배의 때를 여시는 분이며(4:23),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이루시는 분이며(4:34), 말씀으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4:50).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더 제대로 알아본 것일까요? 표징을 보고 맞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신뢰한 사람들입니다. 기적 없이 말씀을 듣고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한 사마리아 사람들,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말씀만 믿고 길을 떠난 아버지입니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는 요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얼마나 작은 부분이었는지 깨닫고, 예수님을 점점 더 깊이 신뢰하게 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가나에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는 길을 한 아버지가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내려오지 않으셨고, 그가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한마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려가는 도중에 마중 나온 노예들이 전하는 소식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우물가에서 물을 청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멀리 떨어진 집의 아이가 살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