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물을 청하시고 생명을 주시다
요한복음 4장은 뜻밖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길을 걸으시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앉으셔서 한 여자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지자 상황이 뒤집힙니다. 물을 달라고 하시던 분이 오히려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한 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고, 마시는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오르는 물입니다.
이 장에는 또 하나의 뜻밖의 장면이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경계하던 사마리아의 한 성읍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기록이 없는데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맞아들인 갈릴리에서는 「너희는 표징과 놀라운 일을 보지 않으면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4:48)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믿었고, 갈릴리 사람들은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더 제대로 알아본 것일까요?
이 질문은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죽어 가는 아들을 고쳐 달라고 찾아온 한 아버지가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물과 음식과 생명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그보다 깊은 차원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물가에서는 물을 구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 가고, 성읍에서는 그 여자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사이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이야기하다가 자신들이 보지 못한 추수를 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 아버지가 아직 보지 못한 일을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믿고 길을 떠납니다.
모든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을 주시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사마리아를 지나가야 했다
경쟁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전혀 다른 만남으로 향하다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만들고 세례를 주신다는 소문에서 시작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들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아시자, 예수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그 사이에 서술자는 자신의 설명을 중간에 바로잡습니다.
다만 세례를 준 것은 예수 자신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었다 —요한복음 4:2 · 본디새김
요한복음 3:22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셨다고 기록했지만, 여기서는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한 사람들이 제자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제자들의 활동을 하나로 말할 수도 있지만, 서술자는 그 차이를 독자가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앞 장에서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는 것을 두고 경쟁심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3:30). 그런데 이제 예수님과 요한의 활동을 비교하는 소문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시는 정확한 동기를 본문이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두 사역이 사람들의 비교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독자가 이런 종교적 경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때, 이야기는 갑자기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로 방향을 바꿉니다.
그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야 했다.요한복음 4:4 · 본디새김
왜 ‘지나가야’ 했을까요?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 있었지만, 요단강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4:4를 단순한 여행 경로의 설명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셔야 할 일이 사마리아에 있었다는 암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두 해석을 문법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 길이 얼마나 중요한 길이었는지는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가라는 성읍 근처, 야곱의 샘에 도착하십니다. 요한은 이곳을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과 연결합니다. 단순히 위치를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도 이스라엘 조상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 배경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샘 곁에 앉으십니다.
거기에 야곱의 샘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길을 걷느라 지쳐서 그 샘 곁에 그대로 앉았다. 여섯째 시쯤이었다.요한복음 4:6 · 본디새김
여섯째 시는 일반적인 유대식 시간 계산으로 정오 무렵입니다. 더운 시간에 물을 길으러 왔다는 이유로 여자가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고 명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이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먼 길을 걸으셨고, 지치셨고, 물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생겨났다고 소개된 그 말씀이(1:1–3, 14), 지금은 다른 사람이 길어 주는 물을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이 장의 첫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분이 목마른 사람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옵니다.
사마리아 출신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예수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나에게 마실 것을 다오.」요한복음 4:7 · 본디새김
여자는 놀랍니다. 왜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갈등은 단순히 서로 다른 지역 사람들 사이의 감정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두 공동체는 모두 이스라엘의 신앙적 유산을 주장했지만, 특히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중심 장소를 놓고 대립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을 거룩한 중심지로 여겼고,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했습니다. 그리심산에는 실제로 성전이 있었으며, 그 유적도 확인됩니다.
9절의 설명인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물건을 함께 쓰지 않기 때문이다」는 이러한 경계를 보여 줍니다. 여자의 질문이 보여 주는 놀라움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익숙하게 지켜 온 경계를 넘어, 그 경계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해야 했다’는 그리스어로 ‘필요했다’는 뜻도 지닌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필요성이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3:14에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9절의 「함께 쓰지 않는다」(συγχράομαι)에 해당하는 원문의 동사는 함께 사용한다는 뜻과 교제하거나 어울린다는 뜻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정확히 어떤 물건을 공유하지 않았는지, 또는 얼마나 광범위하게 교제를 피했다는 뜻인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보다 더 큰 선물
물을 달라고 하시던 사람이 물을 주겠다고 하시다
여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상 밖의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 여자에게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나에게 마실 것을 다오』 하고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더라면, 네가 그에게 청했을 것이고 그가 너에게 살아 있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요한복음 4:1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진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면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여자는 아직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자의 반응은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여자가 그에게 말했다. 「주님, 당신은 두레박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물은 깊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살아 있는 물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요한복음 4:11 · 본디새김
‘살아 있는 물’은 일상적으로 흐르는 물, 특히 샘에서 솟거나 흐르는 물을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고여 있는 물과 대비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이 말을 실제 물로 이해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을 꺼냅니다.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크지는 않겠지요? 그가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 자신도 그 아들들도 가축도 이 우물에서 마셨습니다.」요한복음 4:12 · 본디새김
우물은 단순한 물 공급원이 아닙니다. 여자는 그곳을 자신들과 야곱을 이어 주는 유산으로 이해합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해 온 우물보다 더 나은 물이 있다는 말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직접 ‘그렇다’고 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두 종류의 물이 갖는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 여자에게 말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요한복음 4:13 · 본디새김
「그러나 내가 줄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내가 줄 물이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아오를 것이다.」요한복음 4:14 · 본디새김
야곱의 우물은 사람들이 찾아가서 물을 길어야 하는 곳입니다. 아무리 좋은 우물이라도 사람은 다시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마시는 사람 안에서 샘이 됩니다.
밖에 있던 생명의 공급원이 그 사람 안에서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육체적 갈증과 구별되는 생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죽은 다음에 누리는 끝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미 3:36은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시작되는 생명이며,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은 나중에 이 물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7:37–39에서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이 자신에게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시고, 서술자는 그 말씀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 해설을 4장의 물과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성령을 통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우물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에게 말했다. 「주님, 이 물을 나에게 주십시오.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에 오지도 않도록 말입니다.」요한복음 4:15 · 본디새김
여자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주시려는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물을 달라고 청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여자입니다.
대화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가 예수님께 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물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드러나고 계십니다.
하지만 여자가 그 선물의 의미를 알아 가려면 먼저 자신의 삶을 알고 계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약속을 구약의 언어와 나란히 놓으면 뜻이 더 선명해집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부르시며, 백성이 그 근원을 버리고 물을 저장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본문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다른 의지처를 찾은 죄를 고발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이 예레미야의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참된 생명의 근원이라는 구약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물을 주신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네가 한 이 말은 참되다」
예수님은 왜 갑자기 남편을 부르라고 하셨을까?
여자가 살아 있는 물을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라. 그리고 이리로 오너라.」요한복음 4:16 · 본디새김
왜 물 이야기에서 남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일까요? 이 장면은 흔히 여자의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기 위한 대화로 설명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개인사를 알고 계셨다는 것은 본문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여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남편이 없다』고 옳게 말했다.」요한복음 4:1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여자의 대답을 인정하시고,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네게 있는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한 이 말은 참되다.」요한복음 4:1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남편이 다섯 있었다는 것과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남편은 아니라는 사실까지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다섯 번의 결혼이 어떻게 끝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다섯 번 이혼했을 수도 있고, 남편들과 사별했을 수도 있으며, 여러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남편이 아닌 사람과 어떤 상황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는 여자를 방탕한 사람으로 보는 읽기, 여러 차례 사별하거나 버림받은 사람으로 보는 읽기, 다섯 남편을 사마리아의 혼합된 종교 역사의 상징으로 보는 읽기로 갈립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본문이 여자의 도덕적 책임이나 공동체에서의 배척을 명시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스스로 밝히지 않은 과거를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사용해 여자를 모욕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여자의 말이 참되다고 인정하십니다.
이 대화는 여자를 공개적으로 정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자는 눈앞의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자가 그에게 말했다. 「주님, 보아하니 당신은 예언자입니다.」요한복음 4:19 · 본디새김
앞에서는 야곱보다 큰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제는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삶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여자에게 예수님을 새롭게 알아보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대화는 더 깊은 문제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전통적으로 여자를 방탕한 사람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당시의 혼인 제도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여 여러 차례 사별하거나 버림받았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다섯 남편을 열왕기하 17:24–31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의 외래 집단들과 그 신들의 상징으로 읽습니다. 사마리아의 혼합된 종교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요한복음은 다섯 남편과 다섯 집단의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어지는 장면은 한 여자의 실제 삶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따라서 상징적 읽기가 가능하더라도 그것을 확정된 의미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나야 하는가
오래된 종교적 갈등에 대한 예상 밖의 대답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하게 된 여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중요한 종교적 문제를 꺼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절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절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요한복음 4:20 · 본디새김
이 말을 불편한 개인사에서 벗어나려는 화제 전환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본문은 여자가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아본 직후에 이 질문을 한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시는 예수님께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예배 문제를 묻는 것도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여자가 말한 ‘이 산’은 그리심산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자신들의 신앙적 토대로 삼았고, 그리심산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중요한 장소로 여겼습니다. 신명기 11:29와 27:12에는 그리심산이 이스라엘의 축복 선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면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당한 예배의 중심으로 이해했습니다. 신명기 12장의 ‘여호와야훼께서 택하실 곳’이라는 전통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과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여자의 질문은 단순히 예배당의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참된 이스라엘의 신앙을 이어받았습니까?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 예배받으십니까?
이 오래된 갈등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예상 밖의 답을 하십니다.
예수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여인이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에게 절하는 곳이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닐 때가 온다.」요한복음 4:21 · 본디새김
여자는 두 장소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예배가 특정 성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을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21절의 「너희가」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 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원문에서 ‘절하다’라는 동사는 복수형입니다. 대답의 대상이 여자의 개인적인 예배를 넘어 그녀가 속한 공동체 전체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두 공동체의 신앙적 차이가 처음부터 무의미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에 절하고 우리는 알고 있는 것에 절한다. 구원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요한복음 4:2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예배 장소를 둘러싼 대립을 넘어서는 새로운 때를 선언하시지만, 구원의 역사가 아무런 특정한 뿌리 없이 시작된 것처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구원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역사 속에서 나옵니다. 유대 사람이신 예수님 자신도 바로 그 역사 안에서 오셨습니다.
따라서 21절과 22절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22절은 구원이 역사 속에서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말하고, 21절은 그 구원이 이제 어디까지 열리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출발점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구원의 경계선으로 남지도 않습니다.
「때가 온다. 지금이 그때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절하는 참된 이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에게 절할 때가 온다. 지금이 그때다. 아버지가 자기에게 그렇게 절하는 이들을 찾기 때문이다.」요한복음 4:23 · 본디새김
앞으로 일어날 일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기다리던 변화는 막연한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그 변화가 지금 예수님과 나누고 있는 대화 속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을 인간의 내면적·영적 태도로 읽는 견해와 하나님의 성령을 중심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진리’ 역시 예배자의 진실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참된 계시와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전체의 흐름을 고려하면 이를 단순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예배’로만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3:5–8에서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7은 진리가 예수님을 통해 왔다고 말하며, 나중에 예수님 자신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14:6).
이러한 연결을 고려하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참되게 알려지는 새로운 예배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예배의 형식이나 공동체의 모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핵심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특정한 산이나 성전의 소유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3절은 여기에 「아버지가 자기에게 그렇게 절하는 이들을 찾기 때문이다」를 덧붙입니다. 앞에서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올바른 장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방향이 뒤집힙니다.
사람이 어디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묻는 동안,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셨고, 우물가에 앉으셨으며, 한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그 여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장소를 묻고 있지만, 독자는 이미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는 분을 통해 그 여자에게 다가오셨음을 보고 있습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여자는 메시아에 관한 자신의 기대를 말합니다.
여자가 그에게 말했다. 「그리스도라 불리는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가 오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입니다.」요한복음 4:25 · 본디새김
여자가 말하는 메시아는 무엇보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여자가 알지 못했던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자의 과거를 아시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문제를 밝히시며, 새로운 때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요한복음 4:26 · 본디새김
여자가 먼 미래의 메시아를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만남을 가리키십니다.
그토록 오래 기다리던 분이 지금 우물가에서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는 상대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자도 아닙니다. 사마리아 출신의 한 여자입니다.
앞 장의 니고데모는 유대 사람들의 지도자였으며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3:1–2). 반면 이 여자는 낮에 물을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이 여자는 처음에는 우물의 물만 생각했지만 마침내 메시아에 대한 선언을 직접 듣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은 종교적 지위나 이미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마리아인의 메시아 기대는 유대인의 기대와 반드시 같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후대 사마리아 문헌에는 신명기 18:15–18의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약속과 연결되는 ‘타헤브’에 대한 기대가 나옵니다. 그 인물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참된 신앙을 회복시킬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26절의 「내가 그다」는 원문에서 에고 에이미입니다. 직역하면 ‘나는 ~이다’라는 표현으로, 앞에서 언급된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이 문맥상 채워집니다. 이 표현은 요한복음의 다른 자리에서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과 연결되어 더욱 깊은 의미를 갖지만, 여기서는 우선 여자가 기다린 메시아가 바로 지금 자신과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물동이를 놓고 시작된 추수
한 여자의 말이 성읍을 움직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 바로 그때 제자들이 돌아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고 계신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물동이를 그대로 두고 성읍으로 돌아갑니다.
「와서 내가 한 일을 모두 나에게 말한 사람을 보아라. 혹시 이분이 그리스도일까?」요한복음 4:29 · 본디새김
처음에 물을 길으러 왔던 여자가 물동이를 남겨 두고 떠나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읽힐 만합니다. 본문은 단지 물동이를 그대로 두고 성읍으로 갔다고 말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물을 길어 가는 일이 급했던 여자가 이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는 일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모든 것을 확실하게 이해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직접 와서 확인해 보라고 권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6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했던 「와서 보아라」라는 초청과 닮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라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증언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한 일을 모두」 말하셨다는 사실, 곧 자신의 과거를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39절에서 요한은 이 말을 분명하게 ‘증언’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그 여자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었는지 본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실제로 성읍에서 나와 예수님께 향했다는 것은 기록합니다.
이렇게 한 사람과의 대화가 한 성읍의 움직임으로 이어집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생각하고, 예수님은 추수를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랍비, 잡수십시오」 하고 예수님께 음식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것을 가지고 있다.」요한복음 4:32 · 본디새김
제자들은 누군가 예수님께 음식을 가져다드렸는지 궁금해합니다. 이 장면은 조금 전 여자가 ‘살아 있는 물’을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여자는 실제로 마시는 물을 생각했고, 제자들은 실제로 먹는 음식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경우 모두 일상적인 필요에서 출발하여 그것보다 깊은 차원의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 먹을 것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복음 4:34 · 본디새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육체적 음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전 길을 걸으시느라 지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움직이는 더 근본적인 목적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지금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 일은 사마리아 여자와 이야기하시고,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시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종교적 목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눈앞에서 만나시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일이 그 사역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넉 달이 더 있어야 추수 때가 온다』고 말하지 않느냐?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희어져 거둘 때가 되었다.」요한복음 4:35 · 본디새김
여기서 추수는 농사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키는 그림으로 바뀝니다. 농부는 씨를 뿌린 다음 수확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 눈을 들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앞 30절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읍에서 나와 예수님께 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독자는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보라고 하실 때, 제자들이 성읍에서 나오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본문이 두 장면을 직접 연결한다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배치는 그러한 읽기를 가능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성읍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성읍에서는 지금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나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러 다녀온 곳이 예수님께는 이미 추수할 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라고 너희를 보냈다. 다른 이들이 수고했고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자리에 들어갔다.」요한복음 4:38 · 본디새김
여기서 ‘다른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들, 세례자 요한,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의 사역에 참여한 사람들 등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반드시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서는 누군가 시작한 일에 다른 사람이 참여하고, 한 사람이 수고한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경쟁의 논리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거두는 이는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 뿌리는 이와 거두는 이가 함께 기뻐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4:36 · 본디새김
이 장은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 수가 비교되는 소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기쁨을 이야기하십니다.
누가 더 많은 사람을 모았는지가 아니라, 누가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제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마리아의 성읍에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듣고」
한 사람의 증언에서 온 성읍의 믿음으로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온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그 성읍의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그를 믿었다. 「내가 한 일을 모두 그가 나에게 말했다」고 증언한 그 여자의 말 때문이었다.요한복음 4:39 · 본디새김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과 함께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고, 예수님께서는 이틀을 그곳에서 지내십니다. 처음에는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하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 사람이신 예수님께 자기들과 함께 머물러 달라고 요청합니다.
처음에는 한 모금의 물을 나누는 일조차 경계의 문제가 되었지만, 이제는 함께 머무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요한은 믿음이 깊어지는 과정을 아주 짧은 두 문장으로 보여 줍니다.
39절에서는 여자의 말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41절에서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제는 그대가 한 이야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인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4:42 · 본디새김
이것은 여자의 증언이 쓸모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증언이 자기 역할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이 이제는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증언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의 구원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구원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요한복음 4장의 신학적 절정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구원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구원의 근원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갈등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오지만, 유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때 ‘세상’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에 얼굴이 생깁니다.
그 얼굴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자와,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찾아온 사마리아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게 되는 과정에서 어떤 기적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장면을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보지 않고 말씀을 믿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곧 믿는 것일까?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머무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예수 자신이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중을 지니지 못한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4:44 · 본디새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로 다음 절에서는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였다고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갈릴리에 이르렀을 때 갈릴리 사람들이 그를 맞아들였다. 그가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도 명절에 참여하러 갔던 것이다.요한복음 4:45 · 본디새김
고향에서 존중받지 못하신다고 말하면서, 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구절은 오래전부터 해석이 갈린 자리입니다.
한 해석은 ‘고향’을 갈릴리가 아닌 유대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흐름 속에서 읽으면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다른 해석은 ‘고향’을 갈릴리로 이해하되,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인 이유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기 때문에 환영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환영했지만, 예수님을 참으로 존중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해석은 모두 문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본문만으로 논쟁을 완전히 끝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인 이유를 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특별히 설명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2:23–25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
표징을 보고 나타나는 반응과 예수님 자신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차이가 이제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납니다.
죽어 가는 아들을 둔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리 가나로 가십니다. 요한은 그곳이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곳이라고 상기시킵니다. 그때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곧 죽을 지경으로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남자는 왕의 신하입니다. 어느 정도 지위와 권한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가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지위가 아닙니다.
아들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가버나움으로 내려와 아들을 고쳐 달라고 거듭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너희는 표징과 놀라운 일을 보지 않으면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4:4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보다’와 ‘믿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모두 복수형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눈앞의 신하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비난이라기보다,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겨냥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논쟁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간청합니다.
왕의 신하가 그에게 말했다. 「주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요한복음 4:49 · 본디새김
남자는 지금 예수님의 권능에 관한 신학적 설명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 가는 아이를 살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직접 자기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려가지 않으십니다.
대신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그 사람은 예수가 자기에게 한 말을 믿고 길을 떠났다.요한복음 4:50 · 본디새김
남자는 아직 아들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들의 몸이 회복되는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신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한마디 말씀뿐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와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만 가지고 돌아갑니다.
말씀이 먼저 있었고, 확인은 나중에 왔다
아버지가 내려가는 길에 그의 노예들이 마중 나옵니다. 요한은 50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씀과 노예들의 보고에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가 이미 내려가고 있을 때 그의 노예들이 그를 만나 주인의 아이가 살아 있다고 말했다.요한복음 4:51 · 본디새김
아버지가 아이가 나아진 시각을 묻자, 노예들은 「어제 일곱째 시에 열이 그를 떠났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는 그 시각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때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요한은 아버지가 처음 믿었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시간의 일치로 확인해 줍니다.
믿음이 확인보다 먼저 왔습니다.
50절에서 이미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53절에서는 말씀과 치유가 일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 자신과 온 집이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같은 사람이 두 번 믿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음의 믿음이 거짓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신뢰하여 행동으로 옮긴 믿음입니다. 두 번째는 그 말씀의 권능을 실제로 확인한 뒤 자신뿐 아니라 온 집이 함께 믿게 된 사건입니다. 말씀을 믿고 떠나는 개인의 행동이, 예수님의 권능을 확인하고 함께 믿는 가족의 반응으로 확대됩니다.
이 변화는 사마리아 이야기와 평행을 이룹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가,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갔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누군가에게서 들은 소식으로 시작해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 대한 신뢰로 나아갑니다.
다만 그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성읍에서 나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는 직접 만나러 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결과를 보지 못한 채 떠나는 길입니다.
그러나 두 길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요한은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유대에서 갈릴리로 와서 행한 두 번째 표징이다.요한복음 4:54 · 본디새김
요한은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표징(2:11)과 이번 사건을 연결하여 독자가 두 장면을 나란히 읽도록 합니다. 첫 번째 표징에서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고, 두 번째 표징에서는 죽어 가던 아이가 회복되었습니다. 둘 모두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내지만, 이번 사건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그곳에 가지 않으시고도 말씀으로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54절의 ‘두 번째’는 가나의 첫 번째 표징과 연결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23에 이미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여러 표징이 언급되므로, 예수님께서 어디에서든 행하신 기적이 오직 두 번뿐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장의 여러 인물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알아 갑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야곱보다 크신 분인지 묻고, 예언자로 알아본 다음, 메시아에 관한 선언을 듣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찾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뒤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왕의 신하는 직접 내려오시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이 얼마나 작은 부분이었는지 깨닫고, 예수님을 점점 더 깊이 신뢰하게 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생각하지 못한 선물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보지 못한 추수를 보게 하시며, 아버지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아들을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현실에서 대화를 시작하시되, 그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 주십니다. 그렇게 요한복음 4장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동시에, 표징을 보고 맞아들이는 것을 넘어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가나에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는 길을 떠올려 봅시다. 한 아버지가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는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함께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한마디 말씀입니다. 아직 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내려가는 도중에 마중 나온 노예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전하는 소식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과 같습니다.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우물가에서 물을 청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 멀리 떨어진 집의 아이가 살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