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위에서 오는 생명

요한복음 3장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고, 다른 사람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는 것을 지켜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이자 유대 사람들의 지도자이며, 하나님에 관해 가르치는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바로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도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두 번째 사람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자 제자들은 걱정하지만, 요한은 오히려 자신의 기쁨이 가득 채워졌다며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알아보려고 찾아왔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자리가 작아지는 것을 보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기뻐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한 사람은 믿음이 좋고 다른 사람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진지하게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표징을 부정하지도 않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셨다는 사실까지 인정합니다. 그의 문제는 무관심이나 적대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태어나야 한다.’

하나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셨다는 사실까지 인정하는 사람에게 왜 다시 태어나는 일이 필요할까요?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요?

요한복음 3장은 이 질문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이 인간에게 어떤 생명을 가져오는지 보여 줍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읽는 시간 32분소단락 93장 본문 읽기 →

밤에 찾아온 선생

요한복음 3:1–3 본문 →

니고데모는 왜 밤에 찾아왔을까요?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다. 유대 사람들의 지도자였다. 그가 밤에 예수에게 와서 말했다. 「랍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님인 줄 알고 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지 않으면 선생님이 행하시는 이런 표징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3:1–2 · 본디새김

요한은 니고데모를 소개하면서 그의 이름과 소속, 지위를 모두 알려 줍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연구하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던 유대교의 흐름이었습니다. 또 ‘유대 사람들의 지도자’라는 표현은 그가 유대 사회에서 상당한 권위와 책임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보여 주며,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의 의회인 산헤드린과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사람이 갈릴리에서 오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하필 밤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낮의 분주함을 피해 조용히 대화할 시간을 얻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니고데모를 처음부터 비겁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판단입니다.

다만 빛과 어둠을 중요한 이미지로 사용하는 이 복음서에서 밤이라는 배경은 단순한 시간 정보 이상의 울림을 가집니다. 이 장 후반부에서 다룰,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문제를 미리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가 밤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장면에서 확실한 것은 그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예수님께 직접 질문할 만큼 관심을 가지고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존중하는 말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표징들을 인정하고, 그 표징들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님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첫머리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입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어떤 집단의 판단을 말하는 듯하지만,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니고데모가 자신의 지식에 확신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평가를 칭찬하지도, 직접 반박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아멘,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복음 3:3 · 본디새김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판단한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판단이 옳으냐 그르냐를 논하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말씀하십니다. 표징을 본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바로 앞 장 마지막에서 많은 사람이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상황을 구체적인 대화로 보여 주는 첫 인물입니다. 그가 본 것이 거짓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더 많이 공부하거나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출생이 아니라 위에서 오는 출생

요한복음 3:4–9 본문 →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엉뚱하게 알아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위에서’에 해당하는 단어는 아노텐(ἄνωθεν)입니다. 이 단어에는 ‘위에서’라는 공간적 의미와 ‘다시’ 또는 ‘새로’라는 의미가 함께 있는데, 한국어로는 두 의미를 하나의 단어에 자연스럽게 담기 어렵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위에서’로 옮겨져 있지만, 니고데모는 이 말을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니고데모가 그에게 말했다.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자기 어머니 배 속에 두 번째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요한복음 3:4 · 본디새김

인간의 경험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어머니의 몸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그는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출생의 개념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생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의 출생을 한 번 더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미 이스라엘의 지도자이고 선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지위와 지식이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근본적인 조건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자격을 쌓아 올라가서 얻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나라를 보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물과 영으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가 대답했다. 「아멘,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영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복음 3:5 · 본디새김

물과 영으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이 구절은 오래전부터 크게 세 갈래로 읽혀 왔습니다. 물을 세례와 연결하는 해석, 물을 자연적인 출생과 연결하는 해석, 물과 영을 함께 하나님의 정결하게 하심과 새롭게 하심으로 읽는 해석입니다. 세 번째 해석은 6–8절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출생을 계속 설명하신다는 점과 잘 맞지만, 이 장 후반에서도 세례가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세례와의 연결을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여기서 특정한 세례 절차를 설명하신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이 장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육으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태어난 것은 영입니다

「육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영이다.」요한복음 3:6 · 본디새김

이 문장을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육’은 인간의 자연적인 출생과 존재 조건을 가리킵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출생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자신의 출생과 지식, 종교적 위치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 『너희는 위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을 놀랍게 여기지 마라.」요한복음 3:7 · 본디새김

‘너에게’는 단수이지만, ‘너희는’은 복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니고데모 한 사람을 넘어, 그가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선생들과 지도자들, 더 넓게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요?

「바람은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영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다 그러하다.」요한복음 3:8 · 본디새김

여기에는 말놀이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프뉴마(πνεῦμα)는 바람, 숨, 영을 가리킬 수 있어서, 이 절의 앞부분에서는 바람을 뜻하고 마지막에서는 영을 뜻합니다. 한국어에서는 두 낱말로 나뉘지만, 원문에서는 같은 단어 덕분에 바람에 관한 설명이 성령에 관한 설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흔히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영향은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특별히 말씀하시는 것은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바람의 소리를 듣고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바람의 움직임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성령에게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의 새로운 생명은 사람의 계획이나 통제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 출생을 무질서하거나 임의적인 사건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 생명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요한복음 3:9 · 본디새김

처음에는 늙은 사람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이제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질문은 조금 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물을 세례와 연결하는 해석은 초기 기독교의 세례가 물과 성령, 새로운 생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며, 세례를 통해 새로운 삶에 들어간다는 교회의 전통에서 중요하게 읽혀 왔습니다. 물을 자연적인 출생과 연결하는 해석에서는 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자연적 출생이고, 영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출생입니다. 세 번째 해석은 에스겔서 36장 25–27절에서 배경을 찾습니다. 포로 생활과 불순종으로 무너진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겠다는 이 약속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백성을 깨끗한 물로 정결하게 하시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을 주시며, 27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그들 속에 두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져야 했습니다. 깨끗하게 하시는 분도, 새로운 마음을 주시는 분도, 자신의 영을 그들 안에 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의 ‘물과 영’을 이 배경과 연결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정결과 내적 갱신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도 모르는 것

요한복음 3:10–13 본문 →

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책망하셨을까요?

예수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너는 바로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도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3:10 · 본디새김

예수님의 말씀에는 분명한 질책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니고데모가 위에서 태어나는 일을 이미 알고 있어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고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에스겔서 36장 25–27절에 이미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1–34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자신의 법을 백성의 마음에 새기겠다고 말씀하시며, 이사야서 44장 3절에서는 메마른 땅에 물을 붓는 이미지와 함께 하나님의 영을 후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 나옵니다. 이런 본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외적인 지위나 혈통으로만 설명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내면을 새롭게 하시는 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출생은 구약과 무관하게 갑자기 등장한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회복과 새로움의 이야기 속에 놓여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약속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지만, 지금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생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무지를 드러내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아멘,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런데 너희는 우리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복음 3:11 · 본디새김

니고데모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우리’와 ‘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의 근거는 다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판단했고, 예수님께서는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우리’가 정확히 누구를 포함하는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증인들을 함께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고, 증언의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만 뒤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증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밝히려 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적이 없다.」요한복음 3:13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에녹(창세기 5:24)이나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열왕기하 2:11)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누군가가 하늘로 옮겨졌다는 사건 자체를 논하는 문맥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일을 누가 알고 증언할 수 있는지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13절의 중심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사람의 아들이야말로 하늘의 일을 알려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데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땅에 있는 표징을 보고 하나님에 관해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려면, 그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행동을 알려 주시기 위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구약의 사건을 꺼내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든 것처럼

요한복음 3:14–15 본문 →

왜 예수님께서는 놋뱀 이야기를 꺼내셨을까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든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요한복음 3:14 · 본디새김

새로운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왜 광야의 뱀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민수기 21장 4–9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길을 가다가 지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싫어하고, 자신들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고 불평합니다. 그때 독사들이 백성 가운데 나타나 사람들을 물고,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백성은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께서 모세에게 주신 해결 방법이 특이합니다.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뱀에게 물린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면 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높이 들었고,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살아났습니다.

놋뱀 자체에 마법적인 치유 능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명하시고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지 못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법을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여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리시는 일을 통해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옛 사건이 지닌 구조와 의미가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유형론적인 연결입니다.

다만 놋뱀의 재료나 모양, 그것을 만든 과정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어떤 속성을 상징한다고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이 강조하는 연결은 높이 들린 존재를 바라보는 것과 생명을 얻는 일 사이에 있습니다.

‘높이 들린다’는 말에 담긴 두 가지 의미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동사는 휩소오(ὑψόω)입니다. 이 동사는 실제로 무엇을 위로 들어 올린다는 의미와, 누군가를 높이거나 영광스럽게 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8장 28절과 12장 32–33절에서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리시는 일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되고, 특히 12장 33절에서 서술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죽게 되실지를 가리켜 말씀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3장의 ‘높이 들려야 한다’는 말씀 역시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일을 내다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낮아지고 버림받으시는 일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그 일이 예수님의 영광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을 피하는 방식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소를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셨고, 서술자는 그 성소가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고 설명했습니다. 두 말씀은 서로 다른 이미지로 예수님의 죽음과 그 너머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생명은 언제 시작될까요?

「그것은 믿는 사람이 다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3:15 · 본디새김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죽은 뒤에 끝없이 살아가는 시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이며, 믿는 사람에게 이미 주어지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36절은 아들을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고 현재형으로 말합니다.

물론 요한복음은 장차 있을 부활도 말합니다(5:28–29; 6:39–40). 그러므로 현재의 생명과 미래의 부활을 서로 대립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3장에서 강조되는 것은 생명의 시작이 미래로만 미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리시는 일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주어집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3:16–21 본문 →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으로 드러났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여 하나뿐인 아들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를 믿는 사람이 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3:16 · 본디새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지나치기 쉬운 단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어 후토스(οὕτως)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문맥에 따라 정도를 강조하는 의미도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방식에 주목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뿐인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감정의 크기로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랑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났는지를 알려 주는 문장입니다. 앞에서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리셔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제 그 일이 왜 일어나는지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세상을 사랑하셨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아름다운 자연이나 지구 전체를 가리키는 중립적인 표현으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세상을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묘사했고, 3장 19절에서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보다 어둠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세상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주어진 보상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구원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과는 멸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은 아들이 세상을 심판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통해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3:17 · 본디새김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면, 왜 곧이어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받은 상태라고 말할까요?

심판은 빛이 왔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심판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받은 상태다.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3:18 · 본디새김

요한은 심판을 오직 먼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심판의 현실이 ‘이미’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심판이란 빛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3:19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빛을 보내지 않으셔서 사람들이 어둠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습니다. 문제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빛을 향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빛이 오면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므로, 자신의 행동을 감추고 싶은 사람은 빛을 미워하고 그 빛으로 나아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설명하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의 내면을 우리가 단정하거나, 특정한 사람이 반드시 악행을 감추기 위해 예수님을 거부한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빛과 어둠이라는 신학적 대조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보일 수 있는 근본적인 반응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설명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도 아직 이해하지 못했을 뿐, 빛을 의도적으로 미워한 것은 아닙니다.

빛으로 나아오는 사람은 무엇을 드러낼까요?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해졌다는 것이 드러나도록 빛으로 나아온다.요한복음 3:21 · 본디새김

우리는 진리를 주로 알고 이해하고 믿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진리를 ‘행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신실함이 삶의 행동과 연결되는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진리 안에서 산다는 것은 옳은 주장을 많이 알고 있다는 뜻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간다는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빛으로 나아오는 사람은 자신의 선함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해졌다는 것이 드러나게 합니다. 새로운 출생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듯, 진리를 행하는 삶도 그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나아온다는 것은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드러나는 것을 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기서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끝납니다. 본문은 니고데모가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즉시 믿었는지, 계속 의심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질문을 가지고 찾아왔던 이스라엘의 선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세례자 요한에게로 옮겨 갑니다.

모두가 그에게 갑니다

요한복음 3:22–26 본문 →

두 사람이 동시에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이 일들이 있은 뒤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유대 지방으로 갔다. 예수는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며 세례를 주었다.요한복음 3:22 · 본디새김

그런데 요한도 여전히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이에 있는 애논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거기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고 있었다.요한복음 3:23 · 본디새김

두 사역이 일정 기간 겹쳐 진행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아직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나 두 사역이 나란히 진행되는 상황은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정결에 관한 논쟁이 경쟁의 문제로 바뀝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 쪽에서 어떤 유대 사람과 정결 의식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요한복음 3:25 · 본디새김

물로 씻는 행위는 유대인의 종교생활에서 정결을 나타내는 중요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하는 세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정결을 둘러싼 질문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요한은 논쟁 자체보다 그 뒤에 제자들이 보인 반응에 관심을 둡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와서 그에게 말했다. 「랍비, 요단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있던 이, 선생님이 그를 두고 증언하신 그 사람 말입니다. 보십시오, 그가 세례를 주고 있고 모두가 그에게 갑니다.」요한복음 3:26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있던 이’, ‘선생님이 그를 두고 증언하신 그 사람’이라고 가리킨 뒤, 마지막에 문제를 꺼냅니다. ‘모두가 그에게 갑니다’는 실제로 모든 사람이 요한을 떠났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는 현상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먼저 세례를 주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왔으며, 그는 예수님에 관해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갑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이 밀려나는 것처럼 느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놓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스승이 처음부터 무엇을 위해 보내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장 14절에서는 요한이 붙잡힌 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시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요한복음은 그보다 앞선 시기의 활동을 보여 주며, 예수님의 사역과 세례자 요한의 사역이 어느 시점에 서로 겹쳤음을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를 주셨는지에 관해서는 4장 2절이 실제로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례를 주었다고 밝히므로, 3장의 표현은 예수님께서 주도하시는 사역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5절의 논쟁이 어떤 정결 예식이 더 옳으냐는 문제였는지,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 사이의 차이를 다투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왜 기뻐할까요?

요한복음 3:27–30 본문 →

하늘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말했다. 「사람은 하늘에서 그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단 하나도 받을 수 없다.」요한복음 3:27 · 본디새김

이 말은 자신의 사역이 줄어드는 상황을 운명처럼 체념하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은 자신이 세례를 주고 사람들을 준비시킨 일도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명이고, 예수님께서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맞이하시게 되는 일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고 이해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았느냐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이루었느냐입니다.

「내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보다 앞서 보내진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을 너희 자신이 나를 위해 증언한다.」요한복음 3:28 · 본디새김

요한의 제자들은 이미 그 말을 들었지만, 정작 그 말이 이루어지는 상황 앞에서는 당황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가르침을 주기보다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처음부터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은 그의 사역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목적을 이루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부를 빼앗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부를 가진 이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곁에 서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신랑의 목소리 때문에 기쁨으로 기뻐한다. 그러니 나의 이 기쁨이 가득 채워졌다.」요한복음 3:29 · 본디새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라고 합니다. 혼인 잔치의 중심은 신랑과 신부이고, 신랑의 친구는 잔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돕고 신랑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기쁜 순간은 자신이 신랑보다 주목받는 순간이 아니라,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고 기뻐하는 순간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런 신랑의 자리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간다는 소식이 그에게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기쁨으로 기뻐한다’

요한의 말에는 기쁨을 뜻하는 명사와 기뻐한다는 동사가 함께 쓰인 반복이 있습니다. 한국어에서는 중복된 표현처럼 들리지만, 원문에서는 기쁨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이 기쁨이 가득 채워졌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사역이 줄어들고 있다고 걱정하는 바로 그 상황에서, 요한은 자기 기쁨이 완성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기쁨은 자신이 중심에 서는 데서 오지 않고, 자신이 가리키던 예수님께서 중심에 서시는 데서 옵니다.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복음 3:3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겸손의 교훈으로 인용됩니다. 하지만 본래 문맥에서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언제나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처세법이 아니라, 요한과 예수님의 사명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앞서 준비하고 증언하도록 보내진 사람이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 자신의 역할은 달라져야 합니다. ‘커져야 한다’와 ‘작아져야 한다’는 인기나 영향력의 크기를 비교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두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요한에게 자신의 자리가 작아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랑 비유는 구약의 이미지와 주제적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호세아서 2장 19–20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자신의 신부로 맞이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이사야서 62장 5절에서도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기뻐하신다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이 본문들에서 혼인 관계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드러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요한은 신부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신부를 어떤 특정 집단과 곧바로 동일시하거나 혼인 절차의 세부 사항까지 신학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에서 오는 이는 모든 것 위에 있다

요한복음 3:31–36 본문 →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다시 들립니다

위에서 오는 이는 모든 것 위에 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서 말한다. 하늘에서 오는 이는 모든 것 위에 있다.요한복음 3:3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위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위에서 오시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 위에 계시다고 설명합니다. 두 곳에서 같은 단어 아노텐이 사용되지만, 앞에서는 인간이 어디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야 하는지를, 이제는 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를 설명합니다.

니고데모도, 세례자 요한도 땅에서 태어나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계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받으신 진리를 전하시는 선생 정도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오셨으며, 하나님에 관해 직접 알고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31절부터는 누가 말하는지에 관해 해석이 갈립니다. 어떤 번역과 해석은 36절까지 계속 세례자 요한의 말로 보고, 요한이 자신의 사명이 줄어드는 이유를 설명한 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보다 크시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읽습니다. 다른 해석은 30절에서 요한의 말이 끝나고 31절부터 복음서 서술자가 설명을 이어간다고 보며, 31–36절의 어휘와 문체가 16–21절과 닮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복음서 전체의 신학적 서술과 가깝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원문 사본에는 오늘날과 같은 따옴표가 없으므로, 어디에서 발화가 끝나는지는 해석자의 판단이 필요합니다.

이 본문에서는 30절에서 요한의 말이 끝나고 31절부터 서술자의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이 선택을 따르면 3장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뒤에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관한 설명이, 요한과 제자들의 대화 뒤에 위에서 오신 아들의 권위와 생명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는 구성이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을 하십니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데 아무도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복음 3:3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본 것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셨고, 이제 서술자도 예수님께서 보시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언급되므로, ‘아무도’는 모든 개인이 예외 없이 거절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거부를 강하게 표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증언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이 참되다고 도장을 찍은 것이다.요한복음 3:33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인장은 문서나 물건이 진짜임을 확인하거나 소유와 권한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님이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확증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이는 하나님의 말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영을 되로 재어서 주지 않으니 말이다.요한복음 3:3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독립적으로 만들어 전달하시는 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인정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영을 되로 재어서 주지 않는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영을 ‘측량하여’ 또는 ‘분량을 정하여’ 주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이 특별히 예수님께 성령이 한정 없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하나님의 영을 주시는 행동 자체가 인간의 분량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지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증언과 사역이 성령의 충만함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1장에서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려와 머물렀다고 증언한 것과도 이어지며, 예수님께서 단지 여러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겼다.요한복음 3:35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여 아들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파견하여 중요한 일을 시키신 것 이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훌륭한 선생님의 가르침에 동의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과 구원을 맡기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어떤 관계일까요?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그러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머문다.요한복음 3:36 · 본디새김

왜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ἀπειθέω)’이라고 했을까요? 여기 쓰인 동사는 어떤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뜻뿐 아니라, 설득을 거부하거나 따르기를 거절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반대편에 놓인 것은 지식의 부족만이 아니라 아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태도까지 포함합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순종이라는 행동을 통해서만 인정받는다고 단순화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요한은 이 장에서 영원한 생명이 인간의 공로로 주어진다고 말하지 않고,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오며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지적 동의도 아닙니다. 아들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마지막 문장의 무게도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머문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은 아들의 증언을 거부하는 문제가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는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과 그것을 거부하는 인간의 현실 사이에 있는 심각한 긴장을 드러냅니다.

‘진노가 머문다’는 현재형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는 말이 현재형이듯, 그 생명에서 벗어난 상태 역시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현재의 현실로 서술됩니다.

신랑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

요한복음 3:1–36 본문 →

요한복음 3장은 하나님에 관해 많이 아는 선생과,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증인을 나란히 세웁니다. 니고데모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생명은 그의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출생과 종교적 지식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여 아들을 주시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리시어, 그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떠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그 일이 자신의 실패가 아님을 이해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인간의 지식이나 지위, 영향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같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위에서 오는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대화의 끝에서 더 이상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날 밤 무엇을 깨달았는지 요한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이야기는 다른 장소로 옮겨 갑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가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스승에게 달려와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에게 혼인 잔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신랑이 있고, 그 곁에 신랑의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기다립니다. 마침내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친구는 자신이 주목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않고 그 목소리 때문에 기뻐합니다. 요한은 「나의 이 기쁨이 가득 채워졌다」고 말하고,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자리를 말합니다.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사람들은 계속 예수님께로 가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붙잡지 않습니다. 그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기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