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지금까지 남겨 둔 좋은 포도주
요한복음 2장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장면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갈릴리의 어느 혼인 잔치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께서는 물을 좋은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사람들은 잔치를 계속 즐기고, 잔치를 맡은 이는 신랑을 불러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다며 놀라워합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양과 소를 몰아내시며, 돈 바꾸는 이들의 동전을 쏟으시고 상을 뒤집으십니다.
한곳에서는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고, 다른 곳에서는 이미 있는 것들을 치워 버리십니다.
가나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만, 잔치를 맡은 사람조차 포도주가 어디서 생겼는지 모릅니다. 반면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그분에게 무슨 권한이 있느냐는 질문까지 제기됩니다.
그런데 두 장면 모두에서 요한이 사용하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표징입니다.
가나의 일을 요한은 「표징들의 시작」이라 부르고(2:11), 성전에서는 사람들이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이십니까?」 하고 묻습니다(2:18). 그리고 장 마지막에서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믿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고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2:23–24).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 질문을 품고 2장을 읽으면, 혼인 잔치와 성전에서 벌어진 일이 단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뿐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을 본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 일을 보고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첫 표징은 왜 혼인 잔치에서 일어났을까요?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 있었고,요한복음 2:1 · 본디새김
1장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 뒤에 처음 등장하는 장소가 혼인 잔치입니다. 독자는 예수님께서 성전이나 회당에서 놀라운 가르침을 시작하시리라고 예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등장하십니다.
‘사흘째 되던 날’은 1장 후반에서 ‘다음 날’로 이어지던 흐름을 받는 말입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상의 기쁨이 있는 자리에 초대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혼인 잔치는 단순히 두 사람의 개인적인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친척, 이웃이 함께 기뻐하고 음식을 나누는 공동체의 행사였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은 잔치의 즐거움을 이어가는 데 큰 곤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가 그에게 말했다. 「그들은 포도주를 가지고 있지 않구나.」요한복음 2:3 · 본디새김
이 말은 직접적인 부탁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예수님께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고 말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해 달라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부족한 형편을 알려 줍니다. 독자는 이 말을 도움을 기대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머니가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까지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예수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여인이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2:4 · 본디새김
이 문장을 오늘날 한국어의 감각으로만 읽으면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무례하게 대하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이여’는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며, 단어 자체가 모욕적이거나 무례한 표현은 아닙니다. 다만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가족 호칭과 거리가 있습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는 셈어식 관용 표현으로, 상대방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나 관여 방식을 구별할 때 사용됩니다. 문맥에 따라 강한 거절이 될 수도 있고, 일정한 거리를 두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하신 것일까요? 하나는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개입을 거절하셨고, 그 뒤에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하셨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기대하는 방식이나 시점에 따라 행동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으신 것이지, 잔치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 자체를 거절하신 것은 아니라는 읽기입니다.
이어지는 행동을 보면 두 번째 해석이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말씀 뒤에 왜 행동하기로 하셨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거리를 두시는 이유, 곧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을 계속 읽으면 ‘때’라는 표현이 점점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7장 30절과 8장 20절에서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분을 붙잡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12장 23절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고, 13장 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문맥을 종합하면, 예수님의 ‘때’는 그분의 죽음과 영광,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사건과 깊이 연결됩니다. 가나의 장면에서 ‘내 때’가 뒤에 나올 모든 사건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고 이 말씀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요한은 독자가 이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한 가정의 필요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그분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어머니의 요청이나 사람들의 기대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사명과 때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어머니는 뜻밖에도 섬기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섬기는 이들에게 말했다. 「그가 너희에게 무엇이라 하든 그대로 해라.」요한복음 2: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거리를 두시는 대답을 하셨는데도, 어머니는 논쟁하거나 설득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예수님의 의도를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야기 속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상황을 열어 둡니다.
무엇을 하실지는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제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섬기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옮기고, 잔치에 놓인 여섯 개의 돌항아리를 소개합니다.
물항아리 여섯과 좋은 포도주
왜 요한은 물항아리의 재질과 크기를 알려 줄까요?
거기에는 유대 사람들의 정결 예법에 쓰는 돌로 된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다. 하나에 두세 메트레테스씩 들어가는 크기였다.요한복음 2:6 · 본디새김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는 이야기만 전달하려면, 물항아리가 있었다고 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항아리가 여섯 개였다는 것, 돌로 만들어졌다는 것, 정결 예법에 사용하는 항아리였다는 것을 자세히 알려 줍니다.
항아리 하나는 대략 80~120리터 크기로, 상당한 양의 물을 담을 수 있는 큰 항아리들이었습니다.
이 항아리들의 본래 목적도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포도주를 보관하는 항아리가 아니라 유대 사람들의 정결 예법에 사용하는 물항아리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종교생활에는 정결과 부정을 구별하는 다양한 규정과 관습이 있었고, 마가복음 7장 3–4절에서도 식사 전에 손을 씻고 그릇들을 씻는 관습이 언급됩니다. 정결 규정 아래에서 토기와 돌그릇은 다르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항아리들을 사용하십니다.
왜 하필 정결 예법의 항아리였을까요? 한쪽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존의 정결 제도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신다는 상징으로 읽습니다. 씻는 데 사용하던 물이 잔치의 포도주가 되었다는 변화가 그 근거입니다.
다른 쪽에서는 그런 해석이 지나치게 앞서간다고 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정결 예법을 폐지하셨다고 말하지 않으며, 항아리들을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셨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아리를 깨뜨리거나 치우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 항아리들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정결은 쓸모없어졌고 기독교의 은혜가 그것을 대신했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정결을 위해 마련된 물항아리가 예수님의 첫 표징에 사용됩니다. 이 변화는 뒤이어 등장하는 성전 이야기와 함께,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과 어떤 관계를 맺으시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을 아무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하시자 섬기는 이들이 위까지 채웁니다. 「이제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주어라」 하시자 그들이 가져갑니다.
잔치를 맡은 이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았을 때 — 그는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했고 물을 떠 온 섬기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 그가 신랑을 불러요한복음 2:9 · 본디새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순간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물항아리에 손을 대셨다는 말도, 특별한 기도나 선언을 하셨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물을 채우라는 말씀과 떠서 가져다주라는 말씀만 있습니다.
그런데 잔치를 맡은 사람이 맛본 것은 포도주입니다.
요한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지만, 그 변화가 어느 순간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기적의 과정을 묘사하는 대신, 그 결과와 그 결과를 알게 된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잔치를 맡은 사람은 포도주를 내놓는 일을 관리하며, 좋은 포도주와 덜 좋은 포도주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릅니다. 반면 물을 길어 온 섬기는 사람들은 품질을 평가하거나 잔치의 운영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지 않지만, 포도주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잔치를 맡은 사람은 무엇이 좋은 포도주인지 알지만, 섬기는 사람들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압니다.
섬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적 정체까지 이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드러나는 정보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방식으로 종종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 정작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특별한 지위가 없는 사람이 결정적인 사건의 증인이 되는 대비를 보여 줍니다. 이 대조는 곧 예루살렘의 성전 이야기에서도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왜 가장 좋은 포도주가 마지막에 나왔을까요?
그에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고 나면 덜 좋은 것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습니다.」요한복음 2:10 · 본디새김
이 사람은 자신이 무슨 일을 목격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평소의 잔치 관습과 다르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런데 독자는 그 포도주가 신랑이 따로 남겨 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잔치를 맡은 사람의 말은 자신도 모르게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요한은 이 말을 단순한 칭찬으로 남겨 두지만, 독자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기쁨이 주어졌다는 의미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좋은 포도주가 풍성하게 공급되는 혼인 잔치는 구약에서 그려지는 구원의 기쁨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시거나 병든 사람을 고치시는 대신, 이번에는 잔치가 계속될 수 있도록 포도주를 마련하십니다. 삶의 가장 절박한 위기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는 자리의 필요에도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건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즐겁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일반적인 교훈으로만 정리해서는 부족합니다.
요한은 이 일을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한 메트레테스는 대략 40리터로 계산할 수 있어, 여섯 항아리의 총용량은 약 480~720리터입니다. 정확한 용량은 항아리마다 달랐겠지만, 항아리의 전체 용량이 곧 실제로 만들어진 포도주의 양이라고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다고 기록하지만, 포도주로 변한 양을 별도로 측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포도주 이미지와 관련해서는, 이사야서 25장 6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모든 민족을 위해 풍성한 잔치를 베푸시는 미래가 그려지고, 아모스서 9장 13절에서는 회복될 때 산에서 단 포도주가 흘러내릴 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을 기대할 때 풍성한 음식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복과 기쁨을 표현하는 이미지였습니다. 다만 요한복음 2장은 이 예언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예언들의 특정 문구를 성취하기 위해 이 일을 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기적이 아니라 표징
예수는 갈릴리 가나에서 이것을 표징들의 시작으로 행하고 자기 영광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요한복음 2:11 · 본디새김
이 문장은 가나의 사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열쇠입니다.
요한은 이 일을 ‘표징’이라고 부릅니다. 표징은 어떤 사실이나 의미를 가리키는 표지라는 뜻을 지닙니다. 기적이라는 말이 놀라운 사건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면, 표징이라는 말은 그 사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묻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나에서 중요한 것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능력 자체만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요한은 그 정체를 ‘영광’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오셨고 그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했는데, 이제 첫 표징을 통해 그 영광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영광의 드러남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방식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선언하지 않으셨고,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고 알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잔치를 맡은 이는 그 일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대신 잔치의 부족함이 채워지고, 그 일을 알게 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여기서 표징과 믿음의 관계가 처음 등장합니다. 그런데 2장 마지막에서는 같은 구조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많은 사람이 표징을 보고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장면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셔서 잠시 머무십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제 혼인 잔치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마라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발견하신 것
「유대 사람들의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2:13).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이며, 많은 순례자가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에서 중심적인 장소였고, 제사와 예물 봉헌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이 제사에 사용할 짐승을 모두 직접 데려오기는 쉽지 않았으므로, 성전에서 제물을 구입하는 일에는 실제적인 필요가 있었습니다. 돈을 바꾸는 일도 마찬가지로, 여러 종류의 화폐가 유통되던 때에 성전세와 관련된 환전 수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행위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들이 모두 부정직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그 광경을 보시고 격렬하게 행동하십니다.
그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돈 바꾸는 이들의 동전을 쏟고 상을 엎었다.요한복음 2:15 · 본디새김
가나에서는 잔치를 맡은 사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짐승들이 몰려 나가고, 동전들이 쏟아지고, 상이 뒤집힙니다.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고 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휘두르셨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의 ‘모두(πᾶς)’가 사람까지 포함하는지, 양과 소를 가리키는지는 문법적으로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여기 인용된 본문은 양과 소를 몰아내신 것으로 옮겼습니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께서 돈 바꾸는 이들을 폭행하셨다고 쓰지 않습니다.
그분은 짐승을 몰아내시고, 동전을 쏟으시고, 상을 뒤집으셨습니다.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둘기 파는 이들에게 말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마라.」요한복음 2:16 · 본디새김
본문에는 상인들이 지나치게 비싼 값을 받았거나 불공정한 환율을 적용했다는 구체적인 고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문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말의 구체적인 범위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상업 활동의 부적절한 위치와 방식에 대한 비판일 수 있고, 더 넓게는 성전 제도 전체가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예언자적 경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성전 전체의 제사 제도를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폐지하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 나가는 설명입니다. 반면 이 행동이 단순한 질서 유지나 시장 정리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도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본래 의미를 자신의 권위로 다시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장소였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장소를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분은 경건한 순례자의 입장에서 불만을 제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대해 특별한 관계와 권위를 가진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때문에 곧바로 사람들의 반발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자들이 한 가지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그의 제자들은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을 기억해 냈다. 「당신의 집을 위한 열정이 나를 삼킬 것입니다.」요한복음 2:1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시편 69편 9절과 연결됩니다. 시편 69편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 때문에 고난과 적대를 겪는 사람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시편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심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하나님을 향한 비방이 자신에게 쏟아졌다고 말합니다. 원래 한 의로운 고난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말씀을,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떠올립니다.
독자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을 위해 보여 주시는 열정이 앞으로 고난과 연결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심은 언제나 환영받는 행동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오히려 그분에게 새로운 질문과 반발을 불러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구약 시편 69편에서는 열정이 자신을 ‘삼켰다’고 과거형으로 표현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삼킬 것이다’라는 미래형을 사용합니다. 시편에서 이미 겪은 고난을 말하던 표현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내다보는 듯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곧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예측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성소를 헐어라
그들은 왜 표징을 요구했을까요?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이런 일을 하시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이십니까?」요한복음 2:18 · 본디새김
이 질문을 단순히 기적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 곧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시고 아버지의 집이라고 선언하실 권한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가나에서 표징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한을 확인하기 위해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이 성소를 헐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요한복음 2:19 · 본디새김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종교적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건물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했다. 「이 성소는 마흔여섯 해가 걸려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사흘 만에 일으키겠습니까?」요한복음 2:20 · 본디새김
마흔여섯 해와 사흘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 대왕이 대규모로 재건하고 확장한 성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건설한 거대한 성소를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은 불가능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독자에게 그들이 알지 못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는 자기 몸이라는 성소를 두고 말한 것이었다.요한복음 2:21 · 본디새김
이것이 요한복음 2장에서 가장 중요한 해석의 전환입니다.
성전 건물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예수님께서는 성전 구역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신 뒤,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되는 성소를 헐면 다시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성소가 예수님의 몸이라고 설명합니다.
성전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성소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시는 장소라는 성전의 핵심 의미가 예수님 자신과 연결됩니다. 1장에서 말씀이 인간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선언이 있었다면, 2장에서는 그 말씀이 육이 되신 예수님의 몸이 성소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을 이유로 이스라엘의 성전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 성전의 의미를 어떻게 새롭게 드러내시는지, 곧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가는 중심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헐어라’는 명령이 정말 성전을 파괴하라는 뜻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명령형이지만, 이어서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곧바로 예수님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성전 파괴를 실제로 명령하신 것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부 해석은 이것을 ‘너희가 이것을 무너뜨려 보아라. 그러나 나는 다시 일으킬 것이다’라는 예언자적인 도전으로 읽으며,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내다보는 말씀이 됩니다. 또 다른 해석은 성전이 무너질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시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어느 쪽이든 해석의 중심은 예수님의 몸과 사흘 만에 일으키시는 일을 연결하는 요한의 설명이며, 22절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합니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을 때, 그의 제자들은 그가 이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고 성경 말씀을, 또 예수가 한 말을 믿었다.요한복음 2:22 · 본디새김
제자들조차도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그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참되다고 해서,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뜻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을 직접 들었지만, 어떤 말씀은 나중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비로소 이해됩니다.
두 번의 기억
17절과 22절에 모두 ‘기억해 냈다’는 표현이 나오지만, 기억의 방향이 다릅니다. 17절에서 제자들은 성경 말씀을 기억하여 지금 보고 있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려 합니다. 22절에서는 나중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전에 들었던 말씀을 이해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게 하고, 예수님의 행동과 부활이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성경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에 기록된 예언과 나중에 일어난 사건을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본문이 본래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인지 이해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그 말씀 사이의 관계를 살피는 일입니다. 이 장면에서 신앙은 이미 가진 모든 답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따라가면서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나타납니다.
성전 사건은 왜 요한복음의 앞부분에 있을까요?
마태복음 21장 12–17절, 마가복음 11장 15–19절, 누가복음 19장 45–48절에도 예수님께서 성전의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과 연결되고, 요한복음은 공적 활동이 시작되는 앞부분에 놓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유사한 사건이 두 번 있었고 요한과 공관복음서가 서로 다른 사건을 기록했다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같은 사건이었지만 요한이 그 신학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앞부분에 배치했다는 해석입니다. 두 견해 모두 설명해야 할 문제가 있으며, 복음서 본문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요한복음 안에서 이 사건이 차지하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첫 표징 뒤에 곧바로 성전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요한은 예수님께서 단지 사람들의 필요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까지 새롭게 드러내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이해의 중심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헤롯의 성전 공사는 기원전 20년 무렵 시작되었으며, 주요 성소가 세워진 뒤에도 성전 구역의 확장과 정비는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마흔여섯 해’는 성전 건물이 완성되는 데 정확히 46년이 걸렸다는 의미라기보다, 성전 건설 사업이 시작된 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건설 시작 연도의 계산과 이 문장의 시간적 기준에 따라 연대 추정에는 차이가 있어, 이 숫자만으로 사건의 연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14–15절에서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성전’은 히에론으로, 뜰과 부속 공간을 포함하는 성전 구역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19절의 ‘이 성소’는 나오스로, 특별히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되는 성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두 단어가 완전히 별개의 대상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문맥에서 구별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놀라운 두 문장
그가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는 표징들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요한복음 2:23 · 본디새김
이 문장만 읽으면 예수님의 사역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그들을 믿고 자기를 맡기지 않았다. 이는 그가 모든 사람을 알고 있었고, 사람에 대해 누가 증언할 필요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요한복음 2:24–25 · 본디새김
23절의 ‘믿었다(πιστεύω)’와 24절의 ‘믿고 자기를 맡기지 않았다’에는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믿고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은 같은 동사로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를 뒤집어,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이는 믿음과 예수님께서 자신을 맡기지 않으시는 행동 사이에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을까요?
표징을 보고 믿는 믿음은 잘못된 것일까요?
많은 해설에서는 이 사람들의 믿음이 피상적이거나 불완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본문은 그들이 표징을 보고 믿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다고 설명하므로, 그들의 믿음에 어떤 한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표징을 보고 믿는 것은 모두 가짜 믿음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면 안 됩니다. 바로 앞의 가나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믿었고,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서는 표징들이 독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그 표징을 통해 예수님을 얼마나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가나에서는 표징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냈고, 제자들은 그분을 믿었습니다. 성전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했지만, 그분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이 다른 표징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내면을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모두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는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는지 본문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을 전부 거짓으로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겉으로 드러난 반응만으로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25절의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말은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을 만나셨던 예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2장에서는 이 사실이 더 넓게,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아신다고 설명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잘 읽으시는 통찰력 있는 선생님이라는 뜻을 넘어서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람에 관하여 다른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분을 점차 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만나시는 인간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다음 장으로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3장은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3:1)로 시작하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그 근거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을 언급합니다(3:2).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 찾아온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2장 마지막의 말씀은 사람들의 믿음을 무조건 불신하라는 교훈으로 읽기보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알고 계시며 그 앎을 바탕으로 그들을 만나신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사건은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가
혼인 잔치와 성전 사건을 함께 놓고 보면, 처음에 서로 달라 보였던 두 장면이 연결됩니다. 한쪽에는 정결 예법에 사용하는 물항아리가 있고, 다른 쪽에는 제사와 예배의 중심인 성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시지만, 정결의 항아리에서 잔치의 포도주가 나오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전에서 예수님 자신의 몸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전통이 무가치해졌다는 이야기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전통이 가리키던 하나님의 복과 임재가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아야 합니다.
가나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고, 성전에서는 자신의 몸을 헐면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때를 향한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포도주의 맛을 알고도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성전의 건축 역사를 알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표징을 보고 믿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의 내면을 알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2장은 무엇을 보는가와 무엇을 이해하는가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간격은 더 많은 표징을 보는 것으로 메워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부활 뒤에야 말씀을 깨달았듯,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계속 따라가며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장은 우리의 확신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보다 그분이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가도록 이끕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처럼 깊은 의미를 지닌 첫 표징의 현장을 아주 소박하게 그립니다.
갈릴리의 혼인 잔치입니다.
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커다란 돌항아리에 물을 채웁니다. 항아리가 가득 찹니다. 예수님께서 떠서 가져가라고 하시자, 그들은 잔치를 맡은 사람에게 가져갑니다.
잔치를 맡은 사람이 맛봅니다.
좋은 포도주입니다.
그는 신랑을 불러 「당신은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습니다」 하고 놀라워합니다. 그는 그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물을 떠 온 섬기는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