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지금까지 남겨 둔 좋은 포도주
요한복음 2장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장면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갈릴리의 어느 결혼 잔치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께서는 물을 좋은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사람들은 잔치를 계속 즐기고, 잔치를 맡은 사람은 신랑을 불러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다며 놀라워합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양과 소를 몰아내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동전을 쏟으시고 탁자를 뒤엎으십니다.
한곳에서는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고, 다른 곳에서는 이미 있는 것들을 치워 버리십니다.
가나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만, 잔치를 맡은 사람조차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모릅니다. 반면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그분에게 이런 일을 하실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두 장면 모두에서 요한이 사용하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표징입니다.
가나의 일은 「첫 표징」이라 불리고(2:11), 성전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표징으로」 자격을 보여 주겠느냐고 묻습니다(2:18). 그리고 장 마지막에서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믿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2:24)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고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 질문을 품고 2장을 읽으면, 요한이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뿐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을 본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 일을 보고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첫 표징은 왜 결혼 잔치에서 일어났을까요?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서 결혼 잔치가 열렸습니다. 예수의 어머니도 그곳에 있었습니다.요한복음 2:1 · 두루새김
1장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 뒤에 처음 등장하는 장소가 결혼 잔치입니다. 어쩌면 독자는 예수님께서 성전이나 회당에서 놀라운 가르침을 시작하시리라고 예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등장하십니다.
「사흘째 되던 날」은 1장 후반의 「다음 날」 흐름을 이어받는 표현입니다. 이 날짜에 상징을 읽는 해석도 있지만, 요한은 그 뜻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상의 기쁨이 있는 자리에 초대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결혼 잔치는 가족과 친척, 이웃이 함께 기뻐하고 음식을 나누는 공동체의 행사였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은 잔치의 즐거움을 이어가는 데 큰 어려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복음 2:3 · 두루새김
어머니는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해결해 달라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부족한 형편을 알려 줍니다. 도움을 기대하는 말로 들리지만, 어머니가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까지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왜 원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어머니, 왜 저를 이 일에 끌어들이시나요? 제 때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요한복음 2:4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여성을 부르는 호칭 귀나이(γυνή)가 쓰였습니다. 이를 오늘날 한국어로 「여인이여」라고 옮기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어 두루새김은 「어머니」로 옮겼습니다. 이 단어 자체는 모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도(4:21), 십자가에서 어머니를 부르실 때도(19:26) 같은 호칭을 쓰십니다.
「왜 저를 이 일에 끌어들이시나요?」는 자신과 상대방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 셈어식 관용 표현입니다. 문맥에 따라 강한 거절이 될 수도 있고, 일정한 거리를 두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하신 것일까요? 하나는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개입을 거절하셨고, 그 뒤에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하셨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기대하는 방식이나 시점에 선을 그으신 것이지, 잔치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 자체를 거절하신 것은 아니라는 읽기입니다. 이어지는 행동을 보면 두 번째가 자연스럽지만, 본문은 예수님께서 왜 행동하기로 하셨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거리를 두시는 이유, 곧 「제 때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때」는 그분의 죽음과 영광,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사건과 깊이 연결됩니다. 가나의 이 한마디만으로 그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요한은 독자가 이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한 가정의 필요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그분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사건이 됩니다. 그 일은 어머니의 요청이나 사람들의 기대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사명과 때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어머니는 뜻밖에도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말했습니다. 「그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해라.」요한복음 2:5 · 두루새김
거리를 두시는 대답을 들었는데도, 어머니는 논쟁하거나 설득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예수님의 뜻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상황을 열어 둡니다.
무엇을 하실지는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제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일꾼들과, 잔치에 놓인 여섯 개의 돌 물항아리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사흘째 되던 날」을 1장의 날짜들과 합하여 창조의 일곱 날에 맞추어 읽는 해석이 있고, 뒤에 나오는 「사흘 만에 일으켜 세우겠다」는 말씀과 연결하여 부활을 암시한다고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날짜의 상징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신학적 상징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귀나이 자체는 무례한 말이 아니지만,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가족 호칭과 거리가 있습니다. 「때」에 대해서는 7장 30절과 8장 20절(때가 오지 않아 아무도 그분을 붙잡지 못함), 12장 23절(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옴), 13장 1절(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이름)을 함께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물항아리 여섯과 좋은 포도주
왜 요한은 물항아리의 재질과 크기를 알려 줄까요?
그곳에는 유대 사람들의 정결 의식에 쓰는 돌 물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에 물이 여든 리터에서 백스무 리터쯤 들어가는 크기였습니다.요한복음 2:6 · 두루새김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는 이야기만 전달하려면, 물항아리가 있었다고만 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항아리가 여섯 개였다는 것, 돌로 만들어졌다는 것, 정결 의식에 사용하는 항아리였다는 것을 자세히 알려 줍니다. 여섯 개를 합하면 수백 리터를 담을 수 있는 큰 항아리들이었습니다.
이 항아리들은 포도주를 보관하는 항아리가 아닙니다. 유대 사람들의 정결 의식에 사용하는 물항아리입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의 종교생활에는 깨끗함과 부정함을 구별하는 다양한 규정과 관습이 있었고(마가복음 7:3–4), 정결 규정 아래에서 돌그릇은 흙으로 빚은 그릇과 다르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항아리들을 사용하십니다.
왜 하필 정결 의식의 항아리였을까요? 한쪽에서는 씻는 데 쓰던 물이 잔치의 포도주가 되었다는 변화를 근거로, 예수님께서 기존의 정결 제도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신다는 상징으로 읽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본문이 정결 의식을 폐지하셨다고도, 항아리들을 부정하다고 선언하셨다고도 말하지 않으므로 그런 해석이 지나치게 앞서간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아리를 깨뜨리거나 치우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 항아리들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정결은 쓸모없어졌고 기독교의 은혜가 그것을 대신했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정결 의식을 위해 마련된 물항아리가 첫 표징에 사용된 일은, 뒤이은 성전 이야기와 함께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과 어떤 관계를 맺으시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을 아무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하시자, 그들은 항아리를 가득 채웁니다. 「이제 떠서 잔치를 맡은 사람에게 가져다주어라」 하시자, 그대로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이 나옵니다.
잔치를 맡은 사람은 포도주로 바뀐 물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몰랐지만, 물을 떠 온 일꾼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잔치를 맡은 사람이 신랑을 불러요한복음 2:9 · 두루새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순간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물항아리에 손을 대셨다는 말도, 특별한 기도나 선언을 하셨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물을 채우라는 말씀과 떠서 가져다주라는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잔치를 맡은 사람이 맛본 것은 포도주입니다.
요한은 기적의 과정을 묘사하는 대신, 그 결과와 그 결과를 알게 된 사람들을 보여 줍니다. 잔치를 맡은 사람은 좋은 포도주와 덜 좋은 포도주를 구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는 모릅니다. 반면 품질을 평가하거나 잔치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지 않은 일꾼들은, 포도주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잔치를 맡은 사람은 무엇이 좋은 포도주인지 알지만, 일꾼들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압니다.
일꾼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까지 이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중요한 정보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분명합니다. 요한복음은 종종 이렇게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 정작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특별한 지위가 없는 사람이 결정적인 사건의 증인이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왜 가장 좋은 포도주가 마지막에 나왔을까요?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아요. 손님들이 취하면 그때 덜 좋은 것을 내놓아요. 그런데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셨네요.」요한복음 2:10 · 두루새김
이 사람은 자신이 무슨 일을 목격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평소의 잔치 관습과 다르다는 사실에 놀랄 뿐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그 포도주가 신랑이 따로 남겨 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자신도 모르게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요한은 이 말을 단순한 칭찬으로 남겨 두지만, 독자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기쁨이 주어졌다는 의미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좋은 포도주가 풍성하게 공급되는 결혼 잔치는 구약에서 그려지는 구원의 기쁨과 주제상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시거나 병든 사람을 고치시는 대신, 이번에는 잔치가 계속될 수 있도록 포도주를 마련하십니다. 삶의 가장 절박한 위기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는 자리의 필요에도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일을 특별한 이름으로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은 각 항아리에 두세 메트레테스(한 메트레테스는 약 40리터)가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여섯 개를 합하면 약 480리터에서 720리터입니다. 다만 요한은 포도주로 변한 양을 따로 재지 않으므로, 이 용량을 곧 포도주의 정확한 양으로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사야서 25장 6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위해 베푸시는 풍성한 잔치를, 아모스서 9장 13절은 산에서 단 포도주가 흘러내릴 만큼의 회복을 그립니다. 풍성한 음식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복과 기쁨을 표현하는 이미지였습니다. 요한복음 2장은 이 예언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특정 문구를 이루기 위해 이 일을 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기적이 아니라 표징
예수께서는 갈릴리 가나에서 이 첫 표징을 행하여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믿었습니다.요한복음 2:11 · 두루새김
이 문장은 가나의 사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열쇠입니다.
「표징」은 어떤 사실이나 의미를 가리키는 표지라는 뜻을 지닙니다. 기적이라는 말이 놀라운 사건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면, 표징이라는 말은 그 사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묻게 합니다. 그러므로 가나에서 중요한 것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능력 자체만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1장 14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오셨고, 그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제 첫 표징을 통해 그 영광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영광은 군중 앞의 선언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고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잔치의 부족함이 조용히 채워지고, 그 일을 알게 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표징은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냈고, 제자들은 그분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2장 마지막에서는 같은 구조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많은 사람이 표징을 보고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장면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셔서 며칠만 머무십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이제 결혼 잔치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마라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발견하신 것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때 많은 순례자가 예루살렘에 모였고, 성전은 제사를 드리고 예물을 바치는 이스라엘 종교적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이 제물로 쓸 짐승을 직접 데려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종류의 돈이 쓰였기에 성전세를 낼 돈으로 바꾸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는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들이 모두 부정직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그 광경을 보시고 격렬하게 행동하십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 또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동전을 쏟아 버리고 탁자를 뒤엎으셨습니다.요한복음 2:15 · 두루새김
가나에서는 잔치를 맡은 사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예수님의 행동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짐승들이 몰려 나가고, 동전들이 쏟아지고, 탁자가 뒤엎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고 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휘두르셨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폭행하셨다고 쓰지 않습니다. 기록된 행동은 짐승을 몰아내시고, 동전을 쏟으시고, 탁자를 뒤엎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마라.」요한복음 2:16 · 두루새김
본문에는 상인들이 지나치게 비싼 값을 받았거나 불공정한 기준을 적용했다는 구체적인 고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문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 범위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장사의 부적절한 위치와 방식에 대한 비판일 수 있고, 더 넓게는 성전 제도 전체가 제 역할을 잃고 있다는 예언자적 경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제사 제도를 폐지하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 나가는 설명이지만, 단순한 시장 정리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도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본래 의미를 자신의 권위로 다시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시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장소를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십니다. 경건한 순례자의 입장에서 불만을 제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대해 특별한 관계와 권위를 가진 분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곧바로 사람들의 반발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자들이 한 가지 말씀을 기억해 냅니다.
제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을 떠올렸습니다. 「주님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삼킬 것입니다.」요한복음 2:17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시편 69편 9절입니다. 시편 69편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 때문에 고난을 겪고 적대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시편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정 때문에 수치를 당했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의로운 사람의 고난을 노래한 이 말씀을 떠올립니다.
요한복음은 이 말씀을 「삼킬 것입니다」라는 미래형으로 전합니다. 시편에서 이미 겪은 고난을 말하던 표현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내다보는 듯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곧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예측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독자는 아버지의 집을 위한 열정이 앞으로 고난과 연결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오히려 그분에게 새로운 질문과 반발을 불러옵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에서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 사람까지 포함하는지, 양과 소를 가리키는지는 문법적으로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두루새김은 「양과 소를 모두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로 옮겼습니다. 17절의 경우 그리스어 구약 시편 69편에서는 열정이 자신을 「삼켰다」고 과거형으로 표현되지만, 요한복음은 미래형을 사용합니다.
이 성소를 허물어라
그들은 왜 표징을 요구했을까요?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실 자격이 있다는 것을 어떤 표징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시겠습니까?」요한복음 2:18 · 두루새김
이것은 기적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시고 아버지의 집이라고 선언하실 권한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가나에서 표징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드러내는 일이었지만,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은 권한을 확인하기 위해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뜻밖의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소를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일으켜 세우겠다.」요한복음 2:19 · 두루새김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종교적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건물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유대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이 성소를 짓는 데 마흔여섯 해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사흘 만에 일으켜 세우시겠습니까?」요한복음 2:20 · 두루새김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 대왕이 기원전 20년 무렵부터 크게 다시 짓고 넓힌 성전이었고, 그 공사는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마흔여섯 해」는 성전 건설 사업이 시작된 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지은 거대한 성소를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은 불가능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독자에게 그들이 알지 못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소는 자기 몸이었습니다.요한복음 2:21 · 두루새김
이것이 요한복음 2장에서 가장 중요한 해석의 전환입니다.
성전 건물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성전」(14–15절)은 뜰과 딸린 공간을 포함하는 성전 구역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19절의 「성소」는 나오스로, 특별히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의미와 연결되는 자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구역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신 뒤, 그 성소가 자기 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시는 장소라는 그 핵심 의미가 이제 예수님 자신과 연결됩니다. 1장에서 말씀이 인간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선언이 있었다면, 2장에서는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몸이 성소로 설명됩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성전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 성전의 의미를 어떻게 새롭게 드러내시는지 보여 줍니다.
「허물어라」는 명령이 정말 성전을 파괴하라는 뜻일까요?
「이 성소를 허물어라」는 명령형이지만, 요한이 곧바로 예수님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이라고 설명하므로 성전 파괴를 실제로 명령하신 것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해석은 이를 너희가 이것을 무너뜨려 보아도 나는 다시 일으킬 것이라는 예언자적 도전으로 읽고, 그렇게 읽으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내다보는 말씀이 됩니다. 다른 해석은 성전이 무너질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시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어느 쪽이든 해석의 중심은 요한의 설명이며, 22절이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가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요한복음 2:22 · 두루새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행동을 보았으며,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그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되다고 해서 듣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뜻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일 사이에는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의 기억
17절에서 제자들은 성전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시편 말씀을 떠올립니다. 2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이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첫 번째에서는 성경 말씀이 지금 보고 있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게 하고, 두 번째에서는 나중에 일어난 부활이 이전에 들었던 말씀을 이해하게 합니다.
성경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의 예언과 나중의 사건을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본문이 본래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인지 이해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그 말씀 사이의 관계를 살피는 일입니다. 이 장면에서 신앙은 이미 가진 답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따라가면서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헤롯의 성전은 주요 성소가 세워진 뒤에도 성전 구역을 넓히고 정비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공사를 시작한 해와 이 문장의 시점을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연대 추정이 달라지므로, 이 숫자만으로 사건이 일어난 해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과 「성소」를 가리키는 두 원어가 완전히 별개의 대상은 아니지만, 이 문맥에서는 구별이 중요합니다. 17절의 「떠올렸습니다」와 22절의 「기억했습니다」는 원문에서 같은 동사입니다. 또 마태복음 21장 12–17절, 마가복음 11장 15–19절, 누가복음 19장 45–48절에서는 성전 사건이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과 연결되지만, 요한복음은 이를 앞부분에 놓습니다. 실제로 비슷한 사건이 두 번 있었다는 해석과, 같은 사건을 요한이 신학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앞에 배치했다는 해석이 있으며, 복음서 본문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요한복음 안에서는 첫 표징 바로 뒤에 성전 사건을 두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까지 새롭게 드러내시는 분이며 그 중심에 죽음과 부활이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놀라운 두 문장
예수께서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예수가 행하시는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습니다.요한복음 2:23 · 두루새김
이 문장만 읽으면 예수님의 사역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해 누군가가 증언해 줄 필요도 없었습니다. 예수 자신께서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2:24–25 · 두루새김
두루새김은 23절에서 「믿었습니다」, 24절에서 「맡기지 않으셨습니다」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두 자리에 같은 동사 피스튜오(πιστεύω)가 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믿고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은 같은 동사로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를 뒤집어, 사람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응답 사이에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표징을 보고 믿는 믿음은 잘못된 것일까요?
많은 해설은 이 사람들의 믿음이 겉에만 머물렀거나 불완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다는 설명이 그 근거입니다.
그러나 표징을 보고 믿는 것은 모두 가짜 믿음이라고 결론을 내리면 안 됩니다. 바로 앞의 가나에서도 제자들은 표징을 보고 믿었고, 요한복음 20장 30–31절은 표징들이 독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 표징을 통해 예수님을 얼마나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들이 진실하지 못했는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믿음을 가졌는지 본문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을 전부 거짓으로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겉으로 드러난 반응만으로 그들의 믿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1장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2장에서는 이 사실이 더 넓게 설명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아시고,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아십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잘 읽는 통찰력 있는 선생님이라는 뜻을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만 사람을 이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을 점차 알아가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만나시는 인간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다음 장으로 이어집니다. 3장은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3:1)로 시작하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을 근거로 그분을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님이라고 말합니다(3:2).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 찾아온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2장 마지막의 말씀은 사람들의 믿음을 무조건 불신하라는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을 알고 계시며 그 앎을 바탕으로 그들을 만나신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사건은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가
결혼 잔치와 성전 사건을 함께 놓고 보면, 처음에 서로 달라 보였던 두 장면이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한쪽에는 정결 의식에 쓰는 물항아리가, 다른 쪽에는 제사와 예배의 중심인 성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셔서, 항아리에서 잔치의 포도주가 나오게 하시고 성전에서 자신의 몸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두 사건 모두 「제 때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라는 말씀과 「사흘 만에 일으켜 세우겠다」는 말씀을 통해, 아직 오지 않은 예수님의 때를 향해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표징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가리킵니다. 하지만 표징을 보았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님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포도주의 맛을 알고도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성전의 건축 역사를 알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표징을 보고 믿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보는가와 무엇을 이해하는가 사이의 간격은 더 많은 표징으로 메워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부활 뒤에야 성전에서 들은 말씀을 깨달았듯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계속 따라가며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갈 때 메워집니다.
요한은 이처럼 깊은 의미를 지닌 첫 표징의 현장을 아주 소박하게 그립니다.
갈릴리의 결혼 잔치입니다. 일꾼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커다란 돌 물항아리에 물을 채웁니다. 예수님께서 떠서 가져다주라고 하시자, 그들은 잔치를 맡은 사람에게 가져다줍니다.
잔치를 맡은 사람이 맛봅니다.
좋은 포도주입니다.
그는 신랑을 불러 놀라워하며 말합니다. 「그런데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셨네요.」 그는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물을 떠 온 일꾼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