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말씀을 소개하는 머리말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
요한복음 1장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긴장이 있습니다.
18절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14절에서는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요한은 이 질문을 추상적인 신학 논증으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를 한 사람에게 데려갑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증언하는 요한,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그분이 머무시는 곳을 묻는 두 제자, 형제를 찾아 달려가는 안드레, 나사렛에서 좋은 게 나올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는 나다나엘을 차례로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은 인간이 하늘에 올라가 그분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의 세계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을 소개한 뒤, 이야기를 한적한 곳에서 이루어진 만남으로 옮겨 갑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께 「랍비, 어디에 머무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어디에 머무시는지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와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이 초대가 요한복음 1장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말씀이 누구신지 알려 주고, 뒷부분에서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는 독자는, 아직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냈다고 기뻐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기 전부터 그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태초에 이미 계셨던 분
창조 이야기와 닮았지만, 시작점이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익숙한 말로 시작합니다.
처음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은 하나님이었습니다.요한복음 1:1 · 두루새김
창세기 1장 1절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곧바로 그 첫 문장을 떠올릴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처음에」(ἀρχή)는 원문에서 창세기의 첫머리와 같은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하고, 요한복음은 그 처음에 이미 말씀이 계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요한은 말씀이 계셨다고 할 때 「있었다」(εἰμί)라는 동사를 쓰고,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할 때는 「생겨났다」(γίνομαι) 또는 「되었다」라는 동사를 씁니다.
창조된 것들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처음에 이미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생겨난 것은요한복음 1:3 · 두루새김
말씀은 창조된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십니다. 창조된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누구십니까?
요한은 1절에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와 「말씀은 하나님이었습니다」를 나란히 놓습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말씀 사이에 구별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은 그 말씀이 하나님 곁에 있는 피조물이나 사자가 아니심을 보여 줍니다. 두 문장 가운데 어느 하나만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의 원문에서 「하나님」(θεός)에는 관사가 없고 문장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관사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말씀을 하나님보다 낮은 존재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 문장의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와 뒤 문장의 「하나님이었습니다」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후대 신학이 발전시킨 삼위일체 논의와 연결되는 본문이지만, 요한이 여기서 그 교리의 모든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이 우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분의 탄생이나 사람들 앞에서 활동하신 때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빛은 어둠이 사라진 다음에 비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빛을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창조를 가능하게 하신 말씀 자체가 생명과 빛의 근원으로 등장하십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습니다. 어둠은 그 빛을 이기지 못했습니다.요한복음 1:5 · 두루새김
빛은 어둠이 제거된 깨끗한 공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비칩니다.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는 현재형으로, 어둠이 「이기지 못했습니다」는 과거형으로 서술되어, 빛이 계속 비추는 것과 어둠이 그것을 이기지 못한 사실을 나란히 놓습니다.
「이기지 못했습니다」로 옮긴 원문의 동사 카탈람바노(καταλαμβάνω)에는 붙잡거나 제압한다는 뜻과 이해하거나 깨닫는다는 뜻이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는 읽기와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은 이기지 못했다는 뜻을 따르는데, 이 읽기는 요한복음 12장 35절에서 어둠이 사람을 덮치는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어둠이 빛 앞에서 실패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생명의 빛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신다면, 사람들은 마땅히 그 빛을 알아보지 않을까요?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이 만드신 세계에 오셨지만, 세계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갑자기 요한이라는 사람이 등장할까요?
우주적인 이야기 한가운데서 글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요한복음 1:6 · 두루새김
처음과 창조, 생명과 빛을 이야기하던 본문이 갑자기 한 사람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말씀은 처음에 이미 계셨고, 요한은 역사 속에 나타난 사람입니다. 말씀은 빛이시지만, 요한은 그 빛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요한 자신이 그 빛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빛에 대해 증언하러 온 사람이었습니다.요한복음 1:8 · 두루새김
요한의 역할은 자신에게 시선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뒤에서 실제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요한의 제자 둘이 예수님을 따라 떠나자, 요한은 그들을 붙잡지 않습니다.
그런데 빛이 오셨다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 빛에 대한 증언이 필요할까요?
세상이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역설
그분은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통해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요한복음 1:10 · 두루새김
이 문장에는 「세상」이 세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말씀이 계시는 장소, 두 번째는 말씀을 통해 생겨난 창조 세계, 세 번째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 세계를 포함합니다.
세상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분은 자기에게 속한 곳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1:11 · 두루새김
원문은 「자기에게 속한 곳」과 「자기 백성」에 같은 낱말 「자기 자신의」(ἴδιος)의 다른 형태를 씁니다. 먼저 장소나 영역을 가리키는 표현이 나오고, 이어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이제는 자기 백성마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거부의 문제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대목에서 특정 집단만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10절에서 이미 온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11절의 거부를 이후 등장하는 유대 사람들 전체에게 한꺼번에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따르는 주요 인물들 역시 유대 사람들입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의 세계에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은, 그분의 오심이 단순한 정보 전달 이상의 사건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그래서 12절에서는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들, 곧 자신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리를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12 · 두루새김
자기 백성에게 거절당한 분이 이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자녀」라는 표현은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핏줄이나 몸의 욕구나 남자의 뜻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습니다.요한복음 1:13 · 두루새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가족에 속하고, 핏줄과 출생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핏줄」, 「몸의 욕구」, 「남자의 뜻」을 차례로 부정하며, 인간의 자연적인 출생과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새로운 출생을 구별합니다.
여기서 믿음과 하나님의 행동을 서로 경쟁시키면 본문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12절은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13절은 그 결과로 주어지는 자녀의 신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뒤에 나오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이 문제를 더욱 깊이 다룹니다(3:1–8).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은 단지 인간의 이해력이 좋아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사건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핏줄」로 옮긴 원문의 말은 「피」가 복수형으로 쓰인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것이 혈통이나 생식의 어떤 구체적인 측면을 가리키는지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막을 치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라는 말이 왜 중요할까요?
요한복음 1장의 중심을 이루는 문장입니다.
말씀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하나뿐인 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분께는 은혜와 진리가 가득했습니다.요한복음 1:14 · 두루새김
처음에 계셨던 분,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 생명의 빛이신 분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원문에서 요한은 「육이 되었다」고 쓰는데, 「육」(σάρξ)은 인간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존재를 가리키기에 두루새김은 이를 「사람이 되셔서」로 옮겼습니다. 이 말은 문맥에 따라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육을 곧 죄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장은 말씀이 죄인이 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인간의 삶을 멀리서 관찰하시거나 인간처럼 보이는 겉모습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존재 조건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σκηνόω)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장막을 치고 살았다」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의 광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가 보았던 영광과 제자들이 본 영광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40장 34–35절에서는 구름이 회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차, 모세조차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을 채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증인들은 인간이 되신 말씀 안에서 그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이 특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드러나던 이야기에서, 이제 한 인물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8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33:20). 그리고 34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비롭고 은혜로운 성품을 선포하십니다. 그 히브리어에는 「인애와 성실」,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함」으로 이해되는 표현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의 「은혜와 진리」가 그 표현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어떤 분인지 밝히신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깊이 연결됩니다. 영광은 단순히 인간을 압도하는 광채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일, 그들을 대하시는 방식, 아버지에 관해 하시는 말씀을 통해 그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은혜가 아니었을까요?
우리 모두 그분의 풍성함에서 은혜에 이어 또 은혜를 받았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요한복음 1:16–17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읽으면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은혜가 대립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야기에서 율법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만들어 낸 짐이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에게 주신 것이므로,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은혜에 이어 또 은혜」의 가운데 낱말은 흔히 「대신에」, 「그 자리를 이어」라는 뜻을 지녀, 해석이 두 방향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은혜에 이어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은혜가 왔다는 읽기로, 17절에서 모세와 예수님께서 이어서 등장하신다는 점이 근거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풍성함에서 은혜가 끊이지 않고 계속 주어진다는 읽기입니다. 16절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엄격히 두 시기로 구분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세가 잘못된 것을 전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바로잡으러 오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더욱 온전히 알리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한 하나님을 알려 주신 분
머리말은 다음 문장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습니다. 아버지 품에 계신 하나뿐인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하나님을 알려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18 · 두루새김
「알려 주셨습니다」(ἐξηγέομαι)로 옮긴 원문의 말은 풀어 설명하거나 자세히 밝혀 준다는 뜻으로, 우리가 성경을 「주해한다」고 할 때의 주해 개념과도 관련됩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은 아무도 본 적 없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머리말의 결론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알아낼 수 없는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데도, 증인들은 아버지 품에 계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 전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하나님을 드러내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누구를 만나시고, 어떻게 말씀하시고, 무엇을 하시는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해집니다.
이제 머리말이 끝나고 실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독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지만, 이야기 속 사람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릅니다.
조금 더 깊이
장막을 치고 머문다는 원문의 동사는 장막을 뜻하는 낱말과 관련됩니다. 성막 이야기와의 연결은 직접적인 인용이라기보다 성경 안에서 말과 주제가 겹치는 연결이며, 요한이 그 배경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분을 장막 자체와 단순하게 같은 것으로 보는 문장은 아닙니다. 18절의 「하나뿐인 하나님」에는 사본상의 갈림이 있어, 일부 고대 사본은 「하나뿐인 하나님」을, 다른 사본들은 「하나뿐인 아들」을 전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아버지와 특별하고 유일한 관계에 계신 분이 하나님을 드러내 알려 주신다는 중심 의미는 유지됩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묻지 않은 것을 먼저 대답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요한에게 찾아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요한은 숨김없이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요한복음 1:20 · 두루새김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지 의식한 듯 먼저 부인합니다. 이어서 엘리야냐고, 「그 예언자」냐고 묻자 역시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이 질문들은 당시 이스라엘이 품고 있던 여러 기대와 관련됩니다. 말라기 4장 5절에는 하나님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신명기 18장 15절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시는 구원자와 왕에 대한 기대와 연결됩니다. 이 기대들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마다 이해하는 방식도 달랐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기회를 얻었지만, 사람들의 기대를 자신에게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답답해하며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자신을 어떤 위대한 인물의 이름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라고 외치는 소리입니다.」요한복음 1:23 · 두루새김
이사야서 40장 3절의 본래 흐름에서 이 선포는 포로 생활 가운데 있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을 알리는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광야에 길을 마련하라는 외침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오신다는 소식과 연결됩니다. 요한은 그 말씀을 자신의 사명에 적용하면서도, 자신을 예언의 성취를 소유한 인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소리」입니다.
소리는 자기 자신을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설명하면서도 결국 다른 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미 너희 가운데 서 계십니다
사람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무슨 권한으로 세례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모르는 분이 서 계십니다.」요한복음 1:26 · 두루새김
앞에서 보았던 역설이 되풀이됩니다. 1장 10절에서는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서 계시는데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이 가까이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말합니다. 당시 신발을 벗기거나 발을 돌보는 일은 종의 낮은 섬김과 관련된 일이었고, 요한은 그보다도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모범만이 아닙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아직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의 사명은 자신보다 큰 분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실 때 완성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왜 하필 어린양일까요?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모습을 보고 외칩니다.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아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복음 1:29 · 두루새김
말씀, 생명, 빛,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하나뿐인 아들에 이어, 이제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이라고 불리십니다. 말씀이나 빛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어린양은 그분이 세상의 죄와 어떤 관계를 맺으시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이 호칭에는 여러 희생 제사와 구원 이야기들이 겹쳐 들립니다.
「없애시는」으로 옮긴 원문의 아이로(αἴρω)는 들어 올리거나 짊어진다는 뜻과, 들어내어 없앤다는 뜻을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다는 강조와, 그 죄를 없애신다는 강조가 모두 가능합니다. 두루새김은 「없애시는」으로 옮겨 죄를 없애신다는 의미를 앞에 드러내지만, 원문의 말에는 짊어지신다는 의미도 함께 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스라엘의 죄만을 말하지 않고 「세상의 죄」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세상」은 말씀을 통해 생겨났지만 그 말씀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계였습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그 세상을 향해,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아직 요한복음 1장은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 이야기까지 따라가면서 그 의미를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도 깊이 관련되어 계십니다.
요한도 처음부터 그분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다음 말은 조금 의외입니다.
「나도 그분을 알지 못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그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내기 위해서였다.」요한복음 1:31 · 두루새김
요한은 예수님에 관해 그토록 분명하게 증언하면서도 처음부터 그분을 알았던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요한은 또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하늘에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다. 성령께서는 그분 위에 머무셨다.」요한복음 1:32 · 두루새김
요한을 보내신 분은 33절에서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 머무는 것을 네가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잠깐 내려오셨다가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위에 머무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활동과 특별하게 연결된 분이시라는 증언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어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다.」요한복음 1:34 · 두루새김
요한은 자신이 원래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본 것과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바탕으로 증언합니다.
그는 빛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드러난 빛을 다른 사람에게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어린양을 떠올리게 하는 본문은 여럿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과 연결되고, 이사야서 53장 7절에서는 고난받는 종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묘사되며 53장 전체에서 그 종이 다른 이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집니다. 창세기 22장 8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제물로 바칠 어린양을 마련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배경으로 거론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요한의 표현을 전부 설명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호칭 자체는 특정 구약 구절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또 이사야서 11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다윗의 후손으로 묘사되는 인물 위에 머물고, 42장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에게 영을 주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요한의 증언은 이런 기대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34절에는 본문 차이도 있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하나님의 아들」 대신 「하나님이 고르신 분」이라는 읽기가 있고, 두 읽기 모두 중요한 고대 사본의 지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하나님이 고르신 분」은 하나님의 선택과 사명을 강조하지만, 요한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을 통해 예수님의 특별한 신분과 사명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 자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던지시는 질문
다음 날 요한은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다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자 요한의 제자 둘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자기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을 따라가는데도, 본문은 요한이 그들을 붙잡았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처음 직접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랍비, 어디에 머무십니까?」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요한복음 1:3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부터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가르침을 전하시지도 않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찾으면서 예수님께 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님이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찾아오고(3:1–2),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과 대화하며(4:7 이하), 많은 사람은 먹을 것을 얻고 예수님을 다시 찾습니다(6:24–26).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두 제자는 아직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정확히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박한 질문 「어디에 머무십니까?」의 「머무르다」(μένω)는, 32절에서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머무셨다」고 할 때 쓰인 낱말이고, 39절에서 제자들이 그날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습니다」에도 다시 쓰입니다.
14절에서는 말씀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그분이 머무시는 곳을 묻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오셨고, 이제 인간들이 그분이 계시는 곳으로 초대받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와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가서 예수께서 머무시는 곳을 보았고, 그날 예수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습니다.요한복음 1:39 · 두루새김
원문에서 「와라」(ἔρχομαι)는 명령형이지만 「보게 될 것이다」(ὁράω)는 미래형입니다. 오면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놀라울 만큼 평범합니다. 「오후 네 시쯤」은 원문의 「열째 시」(δέκατος)를, 낮 시간을 해 뜰 때부터 계산하는 방식에 따라 풀어 옮긴 것입니다. 어느 날, 어느 시각,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처음에 계셨던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이야기가 여기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얻습니다. 실제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공간에서 한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찾아갑니다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찾았어.」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요한복음 1:4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머문 뒤, 안드레는 자신이 찾던 분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만 예수님을 알고 만족하지 않고, 형제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께 데려갔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다. 너는 게바라고 불릴 것이다.」 게바를 그리스어로 옮기면 베드로입니다.요한복음 1:4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시고, 앞으로 그가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 말씀하십니다. 게바는 아람어로 바위와 관련된 이름이고, 그리스어로 옮긴 이름이 베드로입니다. 시몬이 왜 그 이름을 받을 만큼 특별한 사람인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습니다. 21장 15–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1장에서 이름을 주시는 말씀은 완성된 인물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앞으로 펼쳐질 관계와 삶을 내다보게 하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찾았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드레가 데려온 시몬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셨고, 아직 시몬 자신도 모르는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이 대조는 다음 장면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머무르다」는 요한복음을 계속 읽으면 훨씬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1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시는데(15:4), 그때 머문다는 것은 잠시 같은 장소에 있다는 의미를 넘어 예수님과 계속 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만 1장의 질문은 우선 예수님께서 실제로 머무시는 곳을 묻는 질문입니다. 또 「오후 네 시쯤」이라는 시간이 신앙적으로 특별한 뜻을 담은 상징이라고 설명하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본문은 그런 뜻을 밝히지 않습니다.
나사렛에서 좋은 게 나올 수 있겠어?
「찾았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먼저 찾아내시는 예수님
다음 날 이야기는 갈릴리로 향합니다.
다음 날,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습니다. 빌립을 만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요한복음 1:43 · 두루새김
이번에는 앞 장면과 순서가 다릅니다. 안드레는 메시아를 찾았다고 말했지만, 빌립에게는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와 부르십니다. 원문에서는 여기서도 찾는다는 말이 쓰이는데, 두루새김은 예수님께서 빌립을 「만나」 말씀하셨다고 옮겼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찾았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사람 예수야.」요한복음 1:45 · 두루새김
빌립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가리킨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계신 말씀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빌립은 그분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출신이라는 일상적인 방식으로 소개합니다. 틀렸다고 지울 수 있는 표현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충분히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이해한 만큼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들의 고백은 진실한 발견이지만, 그 발견이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다나엘이 물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좋은 게 나올 수 있겠어?」 빌립이 말했습니다. 「와서 봐.」요한복음 1:46 · 두루새김
나사렛은 당시 널리 알려진 정치적·종교적 중심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한 문장만으로 당시 모든 사람이 나사렛을 멸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다나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정보 때문에 빌립의 주장을 의심한다는 사실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과 길게 논쟁하지 않습니다. 「와서 봐」는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초대하신 말씀과 닮아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와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라고 미래의 발견을 약속하셨고, 빌립의 「와서 봐」는 두 동사가 모두 명령형입니다. 빌립은 예수님께 받은 초대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며,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먼저 알아보십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먼저 그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속임수가 없다.」요한복음 1:47 · 두루새김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게 나오겠느냐고 의심했던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속임수가 없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람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아 냈고, 창세기 27장 35절에서 이삭은 야곱이 속임수로 축복을 가져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참된 이스라엘 사람」과 「속임수가 없다」는 말씀이 야곱의 이야기를 의식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복음 1:48 · 두루새김
본문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무 아래서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 출신이라는 정보만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그분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신을 알아보기 전에 이미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했습니다. 「랍비,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요한복음 1:49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나사렛을 문제 삼던 사람이 이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고, 안드레는 메시아를 찾았다고 했으며, 빌립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각 사람의 고백은 예수님의 서로 다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고백을 받으신 뒤, 나다나엘에게 아직 더 큰 것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구약은 창세기 27장 35절의 야곱의 속임수에 47절에서 예수님께서 쓰신 「속임수」와 같은 낱말을 씁니다. 다만 요한은 이 연결을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낱말이 같다는 것만으로 예수님께서 일부러 야곱을 언급하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천사들이 야곱의 꿈과 가깝게 연결된다는 점이 이 가능성을 더해 줍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다나엘이 기도하거나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다는 해석도 있지만, 본문이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내립니다
나다나엘이 본 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너를 보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믿느냐? 너는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50 · 두루새김
나다나엘은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믿음은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호칭을 알아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호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께서 앞으로 하시는 일을 통해 더욱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의 고백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가 보고 믿게 된 사건이 앞으로 보게 될 것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51 · 두루새김
어디서 본 듯한 장면 아닙니까?
야곱의 꿈이 다시 나타납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길을 떠났습니다. 밤이 되어 길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데, 땅과 하늘을 잇는 통로가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로 오르내립니다(창세기 28:12). 야곱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가 어디로 가든 지키시며,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듣습니다(28:13–15).
잠에서 깬 야곱은 자신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다고 놀라서 말하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의 꿈에서는 천사들이 하늘과 땅 사이의 통로를 오르내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이 인자 위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사들이 오르내린다는 구체적인 모습이 겹치므로, 요한은 예수님을 야곱의 꿈에서 나타난 하늘과 땅의 만남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창세기의 사다리와 문자 그대로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본문이 요구하는 해석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중심이시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잠들었던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이 자신을 통해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왜 「인자」라고 하셨을까요?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십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지만, 예수님께서 인간이시라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서 7장 13–14절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인자라는 호칭은 이런 하늘의 권위와 연결되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요한복음은 뒤에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 그분의 죽음과 영광을 연결합니다(3:14; 8:28; 12:23–34). 그러나 1장의 독자가 지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의 고백보다 더 큰 드러남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나다나엘 한 사람에게 「너는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51절에서는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이라고 복수형을 쓰십니다. 한 사람과 나누던 대화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앞으로 보게 될 것에 대한 더 넓은 약속으로 확대됩니다.
요한복음 1장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께 붙여지는 이름들로 가득합니다. 말씀, 빛,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인자.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가는 이야기의 출발점은 언제나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할 때 말씀은 그들 가운데 오셨고,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 없을 때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요한이 알아보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표징을 보여 주셨고, 빌립이 찾기 전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으며, 나다나엘이 만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이미 그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이야기가 먼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높은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말씀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앞으로 걸어가시는 길을 보아야 합니다.
첫 장이 끝날 무렵, 제자들은 예수님을 발견했다고 기뻐하지만 그분에 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막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 앞에서 다시 조금 전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셔서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시고, 그들은 어디에 머무시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와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그날 오후 네 시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보았고, 그날 그분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