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말씀을 소개하는 머리말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
요한복음 1장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긴장이 있습니다.
18절은 「하나님을 일찍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14절에서는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요한은 이 질문을 추상적인 신학 논증으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를 한 사람에게 데려갑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증언하는 요한,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그분이 머무시는 곳을 묻는 두 제자, 형제를 찾아 달려가는 안드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의심하는 나다나엘을 차례로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은 인간이 하늘에 올라가 그분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의 세계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을 소개한 뒤, 그 이야기를 한적한 곳에서 이루어진 만남으로 옮겨 갑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께 「랍비, 어디에 머무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어디에 머무시는지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와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이 초대가 요한복음 1장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말씀이 누구신지 알려 주고, 뒷부분에서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는 독자는, 아직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더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냈다고 기뻐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기 전부터 그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태초에 이미 계셨던 분
창조 이야기와 닮았지만, 시작점이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익숙한 말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은 하나님이었다.요한복음 1:1 · 본디새김
창세기 1장 1절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곧바로 그 첫 문장을 떠올릴 것입니다. 창세기도 「태초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이 태초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태초에 이미 말씀이 계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요한은 말씀이 계셨다고 할 때 ‘있었다’를, 만물이 생겨났다고 할 때는 ‘생겨났다’ 또는 ‘되었다’를 뜻하는 다른 동사를 씁니다.
창조된 것들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태초에 이미 계셨습니다.
이어서 요한은 그 말씀을 창조의 주체와 연결합니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해 생겨났고, 그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것은요한복음 1:3 · 본디새김
말씀은 창조된 세계의 한 부분이 아니십니다. 창조된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누구십니까?
요한은 1절에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와 「말씀은 하나님이었다」를 나란히 놓습니다. 두 문장 가운데 어느 하나만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말씀 사이에 구별이 있음을 보여 주고, 말씀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은 그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 곁에 있는 피조물이나 사자가 아니심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후대 신학이 발전시킨 삼위일체 논의와 연결되는 본문이지만, 요한이 여기서 그 교리의 모든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이 우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분의 탄생이나 공적 활동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빛은 어둠이 사라진 다음에 비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빛을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창조를 가능하게 하신 말씀 자체가 생명과 빛의 근원으로 등장하십니다.
그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친다. 어둠은 그 빛을 붙잡지 못했다.요한복음 1:5 · 본디새김
빛은 어둠이 제거된 깨끗한 공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비칩니다.
빛이 ‘비친다’는 현재형으로, 어둠이 ‘붙잡지 못했다’는 과거형으로 서술되어, 빛의 지속적인 활동과 어둠이 그것을 제압하지 못한 사실이 나란히 놓입니다. ‘붙잡다’에는 제압한다는 뜻과 깨닫는다는 뜻이 모두 있어, 어둠이 빛을 제압하지 못했다는 읽기와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두 해석은 강조점이 다르지만,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어둠이 빛 앞에서 실패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제 독자는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생명의 빛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신다면, 사람들은 마땅히 그 빛을 알아보지 않을까요?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1절 마지막 문장의 그리스어는 테오스 엔 호 로고스로, ‘하나님’에 관사가 없고 문장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일반적인 술어 명사의 어순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고, 말씀과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 구별을 유지하면서 말씀의 신적 본성을 나타낸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다만 관사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말씀을 하나님보다 낮은 존재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 문장의 「하나님과 함께」와 뒤 문장의 「하나님이었다」를 함께 읽어야 합니다. 5절의 ‘붙잡다’로 번역된 카탈람바노에는 붙잡거나 제압한다는 뜻과 이해하거나 깨닫는다는 뜻이 모두 있으며, ‘붙잡지 못했다’는 해석은 요한복음 12장 35절에서 어둠이 사람을 덮치는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자신이 만드신 세계에 오셨지만, 세계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갑자기 요한이라는 사람이 등장할까요?
우주적인 이야기 한가운데서 문체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에게서 보내진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요한복음 1:6 · 본디새김
태초와 창조, 생명과 빛을 이야기하던 본문이 갑자기 한 사람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말씀은 태초에 이미 계셨고, 요한은 역사 속에 나타난 사람입니다. 말씀은 빛이시지만, 요한은 그 빛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선을 긋습니다.
그는 그 빛이 아니었다. 다만 빛에 관해 증언하러 왔다.요한복음 1:8 · 본디새김
요한의 역할은 자신에게 시선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뒤에서 실제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요한의 제자 둘이 예수님을 따라 떠나자, 요한은 그들을 붙잡지 않습니다.
그런데 빛에 대한 증언이 왜 필요할까요? 빛이 오셨다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요한은 인간의 기대와 달리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줍니다.
세상이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역설
그는 세상에 있었고 세상은 그를 통해 생겨났는데,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요한복음 1:10 · 본디새김
이 문장에는 ‘세상’이 세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말씀이 계시는 장소, 두 번째는 말씀을 통해 생겨난 창조 세계, 세 번째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 세계를 포함합니다. 같은 단어가 반복되지만, 마지막에는 비극적인 관계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세상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는 이 관계가 더욱 가까워집니다.
그는 자기에게 속한 곳으로 왔는데, 자기 사람들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복음 1:11 · 본디새김
원문은 ‘자기에게 속한 곳’과 ‘자기 사람들’에 ‘자기 자신의’라는 같은 형용사의 다른 형태를 씁니다. 먼저 장소나 영역을 가리키는 표현이, 이어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이제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마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거부의 문제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대목에서 특정 집단만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10절에서 이미 온 세상의 인식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11절의 거부를 이후 등장하는 유대인 전체에게 일괄적으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따르는 주요 인물들 역시 유대인입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의 세계에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은, 그분의 오심이 단순한 정보 전달 이상의 사건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그래서 12절에서는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는 자기를 받아들인 이들, 곧 자기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한을 주었다.요한복음 1:12 · 본디새김
자기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분이 이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자녀’라는 표현은 단순히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피에서나 육의 뜻에서나 남자의 뜻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요한복음 1:13 · 본디새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가족에 속하고, 혈통과 출생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피’, ‘육의 뜻’, ‘남자의 뜻’을 차례로 부정하며 인간의 자연적 출생과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새로운 출생을 구별합니다.
여기서 믿음과 하나님의 행동을 서로 경쟁시키면 본문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12절은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13절은 그 결과로 주어지는 자녀의 신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은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요한복음은 뒤에 나오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이 문제를 더욱 깊이 다룹니다(3:1–8). 그러나 이미 1장에서 기초를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은 단지 인간의 이해력이 좋아지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사건입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 원문에서 ‘피’가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은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것이 혈통이나 생식의 어떤 구체적인 측면을 가리키는지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자연적 출생과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출생을 구별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장막을 치셨습니다
‘육이 되었다’는 말이 왜 중요할까요?
요한복음 1장의 중심을 이루는 문장입니다.
말씀이 육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살았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아버지에게서 온 하나뿐인 이에게 걸맞은 영광이었다.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가득했다.요한복음 1:14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의 열세 절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읽게 만듭니다. 태초에 계셨던 분,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 생명의 빛이신 분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단순히 ‘사람이 되었다’고 쓰지 않고 ‘육이 되었다’고 씁니다. ‘육’ 또는 ‘살’로 옮기는 이 낱말은 인간의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존재를 가리키며, 문맥에 따라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육을 곧 죄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장은 말씀이 죄인이 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인간의 삶을 멀리서 관찰하시거나 인간처럼 보이는 외형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존재 조건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장막을 치고 살았다’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원문의 동사는 장막을 뜻하는 낱말과 관련되며, 구약의 광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가 보았던 영광과 제자들이 본 영광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40장 34–35절에서는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찹니다. 모세조차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임재는 압도적이었습니다.
두 본문 사이의 연결은 직접적인 인용이라기보다는 언어와 주제가 겹치는 정경적 연결입니다. 요한이 그 배경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분을 장막 자체와 단순하게 동일시하는 문장은 아닙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을 채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증인들은 인간이 되신 말씀 안에서 그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특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드러나던 이야기에서, 이제 한 인물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8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33:20). 그리고 34장 6절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자비롭고 은혜로운 성품을 선포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도 영광을 보았다는 말 바로 뒤에 은혜와 진리가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의 히브리어 표현은 일반적으로 ‘인애와 성실’,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함’ 등으로 이해됩니다. 요한복음의 ‘은혜와 진리’가 그 표현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어떤 분인지 밝히신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깊이 연결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하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영광은 단순히 인간을 압도하는 광채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앞으로 보여 줄 예수님의 영광도, 그분이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일과 그들을 대하시는 방식과 아버지에 관해 하시는 말씀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은혜가 아니었을까요?
16–17절에는 해석상 조심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가 은혜 뒤에 또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겨났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16–17 · 본디새김
이 구절을 읽으면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은혜가 대립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기 전에 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구약의 이야기에서 율법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만들어낸 짐이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은혜 뒤에 또 은혜’의 그리스어는 카린 안티(ἀντί) 카리토스이고, 가운데 있는 안티는 흔히 ‘대신에’, ‘그 자리를 이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해석은 두 방향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은혜가 다른 은혜의 자리를 이어받는다는 해석으로,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은혜에 이어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은혜가 왔다는 흐름이 강조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충만함에서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선물로 읽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모세와 예수님께서 이어서 등장하시므로 첫 번째 읽기는 중요한 문맥적 근거를 가집니다. 그러나 16절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엄격히 두 시기로 구분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읽기 모두에서 요한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특별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고 증언합니다.
모세가 잘못된 것을 전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바로잡으러 오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더욱 온전히 알리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한 하나님을 알려 주신 분
머리말은 다음 문장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을 일찍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에 있는 하나뿐인 하나님, 그분이 하나님을 알려 주었다.요한복음 1:18 · 본디새김
‘알려 주었다’는 풀어 설명하거나 상세히 밝혀 준다는 뜻으로, 성경을 ‘주해한다’고 할 때의 주해 개념과도 관련되는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은 같은 절 앞부분이 말하는, 아무도 본 적 없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머리말의 결론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알아낼 수 없는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 전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을 알려 주시는 계시이십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를 만나시고, 어떻게 말씀하시고, 무엇을 하시는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해집니다.
이제 머리말이 끝나고 실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독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 사람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릅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하나뿐인 하나님’은 중요한 사본상의 갈림이 있는 표현입니다. 일부 고대 사본은 ‘하나뿐인 하나님’에 해당하는 표현을, 다른 사본들은 ‘하나뿐인 아들’에 해당하는 표현을 전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아버지와 특별하고 유일한 관계에 계신 분이 하나님을 계시하신다는 중심 의미는 유지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묻지 않은 것을 먼저 대답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요한에게 찾아와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요한의 첫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는 고백했고 부인하지 않았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했다.요한복음 1:20 · 본디새김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지 의식한 듯 먼저 부인합니다. 이어서 엘리야냐고, ‘그 예언자’냐고 묻자 모두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이 질문들은 당시 이스라엘이 품고 있던 여러 기대와 관련됩니다. 말라기 4장 5절에는 여호와야훼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신명기 18장 15절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시는 구원자와 왕에 대한 기대와 연결됩니다.
이 기대들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마다 이해하는 방식도 달랐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기회를 얻었지만, 사람들의 기대를 자신에게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답답해하며 「당신은 자신을 두고 무엇이라 말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어떤 위대한 인물의 이름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그대로다.」요한복음 1:23 · 본디새김
이 말은 이사야서 40장 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본래 문맥에서 이 선포는 포로 생활 가운데 있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을 알리는 이야기의 일부이고, 광야에 길을 마련하라는 외침은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오신다는 소식과 연결됩니다. 요한은 그 말씀을 자신의 사명에 적용하면서도, 자신을 예언의 성취를 소유한 인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소리’입니다.
소리는 자기 자신을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설명하면서도 결국 다른 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미 너희 가운데 서 계십니다
사람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무슨 권한으로 세례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요한의 대답은 자신이 가진 권한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서 있는데,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요한복음 1:26 · 본디새김
1장 10절에서는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서 계시는데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이 가까이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말합니다. 당시 신발을 벗기거나 발을 돌보는 일은 종의 낮은 섬김과 관련된 일이었고, 요한은 그보다도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한 겸손의 모범으로만 읽으면 부족합니다. 요한에게는 분명한 자기 이해가 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아직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의 사명은 자신보다 큰 분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실 때 완성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왜 하필 어린양일까요?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모습을 보고 외칩니다.
다음 날 요한은 예수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보아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요한복음 1:29 · 본디새김
태초부터 계신 말씀, 생명, 빛, 아버지에게서 오신 하나뿐인 분에 이어, 이제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이라고 불리십니다. 말씀이나 빛은 예수님의 신적 정체와 계시의 역할을 드러냅니다. 어린양은 그분이 세상의 죄와 어떤 관계를 맺으시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구약에서 어린양을 떠올리게 하는 본문은 여럿 있지만,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요한의 표현을 전부 설명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보다 요한이 어린양의 역할을 어떻게 설명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간다.’
‘지고 가다’에 해당하는 아이로(αἴρω)는 들어 올리거나 짊어지는 의미와, 들어내어 제거한다는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다는 의미와, 그 죄를 제거하신다는 의미가 함께 가능합니다. 두 의미는 서로 연결될 수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며, ‘지고 가는’이라는 번역은 양쪽 가능성을 함께 담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스라엘의 죄만이 아니라 ‘세상의 죄’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세상’은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지만 그 말씀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계였습니다. 이제 어린양의 사명 역시 그 세상을 향합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세상을 향해, 예수님께서 죄를 지고 가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아직 요한복음 1장은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 이야기까지 따라가면서 그 의미를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방향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도 깊이 관련되어 계십니다.
요한도 처음부터 그분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31절에서 「나도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3절에서 다시 말합니다.
「나도 그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영이 내려와 누구 위에 머무는 것을 네가 보거든, 바로 그가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는 이다.』」요한복음 1:33 · 본디새김
요한은 예수님에 관해 그토록 분명하게 증언하면서도 자신이 처음부터 그분을 알았던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요한은 증언하여 말했다. 「나는 영이 하늘에서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영이 그분 위에 머물렀다.」요한복음 1:32 · 본디새김
여기서 중요한 말은 ‘머물렀다’입니다. 영이 잠깐 내려왔다가 사라졌다고 하지 않고, 예수님 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활동과 특별하게 연결된 분이시라는 증언입니다.
또한 요한이 하는 일과 예수님께서 하실 일 사이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예수님을 드러내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34절에는 본문 자체의 차이도 있습니다.
「나는 보았다. 그리고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다.」요한복음 1:34 · 본디새김
일부 사본에는 ‘하나님의 아들’ 대신 ‘하나님이 고르신 분’이라는 읽기가 있고, 두 읽기 모두 중요한 고대 사본의 지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직접 드러내고, ‘하나님이 고르신 분’은 하나님의 선택과 사명에 초점을 둡니다. 두 표현은 강조점이 다르지만,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예수님의 특별한 신분과 사명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 자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원래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본 것과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바탕으로 증언합니다.
그는 빛을 만들어낸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드러난 빛을 다른 사람에게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어린양을 떠올리게 하는 구약 본문으로는, 유월절 어린양이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과 연결되는 출애굽기 12장, 고난받는 종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묘사되고 다른 이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는 이사야서 53장,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제물로 바칠 어린양을 마련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창세기 22장 8절이 거론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호칭 자체는 특정 구약 구절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여러 희생 제사와 구원 이야기들이 겹쳐 들릴 수 있는 표현입니다. 영이 머무는 장면은 여호와야훼의 영이 다윗의 후손으로 묘사되는 인물 위에 머무는 이사야서 11장 2절,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에게 영을 주셨다는 42장 1절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던지시는 질문
다음 날 요한은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눈여겨보고 다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자 요한의 제자 둘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자기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을 따라가는 상황인데도, 본문은 요한이 그들을 붙잡았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돌아서십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처음 직접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가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했다. 「무엇을 찾느냐?」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랍비, 어디에 머무십니까?」(「랍비」는 번역하면 「선생님」이다.)요한복음 1:3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부터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가르침을 전하시지도 않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이 질문을 요한복음 전체의 출발점으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님이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찾아오고(3:1–2),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과 대화하며(4:7 이하), 많은 사람은 먹을 것을 얻고 예수님을 다시 찾습니다(6:24–26).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두 제자도 아직 예수님의 신적 정체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선생님의 거처에서 가르침을 듣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본문은 그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머무십니까?’의 ‘머무르다’는 바로 앞 32절에서 성령이 예수님 위에 ‘머물렀다’고 할 때 쓰인 낱말이고, 39절에서 제자들이 그날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다’고 할 때 다시 나옵니다. 14절에서는 말씀이 인간 가운데 장막을 치고 사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오셨고, 이제 인간들이 그분이 계시는 곳으로 초대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와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서 그가 머무는 곳을 보았고, 그날 그와 함께 머물렀다. 열째 시쯤이었다.요한복음 1:39 · 본디새김
‘와라’는 명령형이지만 ‘보게 될 것이다’는 미래형입니다. 오면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놀라울 만큼 평범합니다.
어느 날, 어느 시각,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요한은 이 만남을 추상적으로 서술하지 않습니다.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 육이 되셨다는 이야기가 여기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오셨다는 것은, 실제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공간에서 한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찾아갑니다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안드레입니다. 그는 곧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갑니다.
그는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내어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메시아를 찾아냈다.」(「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다.)요한복음 1:41 · 본디새김
앞서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문 뒤, 안드레는 이제 자신이 찾던 분을 ‘찾아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다른 사람을 찾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안드레는 형제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그는 시몬을 예수에게 데려갔다. 예수가 그를 눈여겨보고 말했다. 「너는 바로 요한의 아들 시몬이다. 너는 게바라고 불릴 것이다.」(「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다.)요한복음 1:4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시고, 앞으로 그가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 말씀하십니다. 시몬이 왜 그 이름을 받을 만큼 특별한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그의 신앙과 행동을 뒤에서 더 보여 주며, 21장 15–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1장의 이름 부여는 이미 완성된 인물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앞으로 펼쳐질 관계와 삶을 내다보게 하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몬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셨고, 아직 시몬 자신도 모르는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이 대조는 다음 장면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머무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메노입니다. 이 문장들이 전부 동일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며, 제자들의 질문은 우선 예수님의 실제 거처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15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실 때(15:4), 이 낱말은 같은 장소에 있다는 의미를 넘어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킵니다. 1장의 소박한 질문이 뒤에 나오는 주제를 미리 들려주는 셈입니다. ‘열째 시’는 낮 시간을 해 뜰 때부터 계산하는 방식이라면 대략 오후 네 시 무렵입니다. 그 시간이 특별한 신학적 상징을 담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본문은 그런 뜻을 밝히지 않습니다. 게바는 아람어로 바위와 관련된 이름이고, 그리스어로 옮긴 이름이 베드로입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찾아냈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먼저 찾아내시는 예수님
다음 날 이야기는 갈릴리로 향합니다.
다음 날 예수는 갈릴리로 떠나고자 했다. 그리고 빌립을 찾아내어 그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라.」요한복음 1:43 · 본디새김
이번에는 앞 장면과 순서가 다릅니다. 안드레는 메시아를 찾아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내십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뒤 나다나엘을 찾아가 안드레와 매우 비슷한 말을 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내어 그에게 말했다. 「모세가 율법에 적었고 예언자들도 적은 그분을 우리가 찾아냈다. 그분은 요셉의 아들이며 나사렛 사람인 예수다.」요한복음 1:45 · 본디새김
빌립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가리킨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며 나사렛 사람인 예수’라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일상적인 방식으로 소개합니다. 틀렸다고 단순히 지울 수 있는 표현은 아니지만, 요한이 앞서 소개한 예수님의 정체를 충분히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인물들을 그리는 방식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이해한 만큼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들의 고백은 진실한 발견이지만, 그 발견이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나다나엘이 등장합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빌립이 그에게 말했다. 「와서 보아라.」요한복음 1:46 · 본디새김
나다나엘은 나사렛 출신이라는 정보 때문에 빌립의 주장을 의심합니다. 구약의 약속을 성취할 분이 어째서 나사렛에서 오신다는 말입니까? 그의 질문에는 그런 의문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과 길게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의 「와서 보아라」는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초대하신 말씀과 닮아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와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라고 미래의 발견을 약속하셨고, 빌립은 두 동사를 모두 명령형으로 말합니다.
빌립은 예수님께 받은 초대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고 있습니다. 자신의 설명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먼저 알아보십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먼저 그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그를 두고 말했다. 「보아라, 이 사람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속임이 없다.」요한복음 1:47 · 본디새김
나사렛 출신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의심했던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속임이 없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람은 야곱이고,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래서 ‘속임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표현은 야곱의 이야기를 의식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예수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너를 내가 보았다.」요한복음 1:48 · 본디새김
본문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무 아래서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그분에 관해 판단했습니다. 나사렛 출신이라는 정보만으로 예수님의 가치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를 보셨습니다.
이 대조가 장면의 중심입니다.
나다나엘은 고백으로 응답합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대답했다. 「랍비, 당신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요한복음 1:49 · 본디새김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사렛을 문제 삼던 사람이 이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고, 안드레는 메시아를 찾아냈다고 했고, 빌립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각 사람의 고백은 예수님의 다른 측면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고백을 받으신 뒤, 나다나엘에게 아직 더 큰 것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나사렛은 당시 널리 알려진 정치적·종교적 중심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46절 한 문장만으로 당시 모든 사람이 나사렛을 멸시했다거나, 나사렛을 비하하는 속담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27장 35절에서 이삭은 야곱이 속임으로 축복을 가져갔다고 말하는데, 그리스어 구약이 그 ‘속임’에 쓴 돌로스는 47절에서 예수님께서 쓰신 ‘속임’과 같은 단어입니다. 요한은 이 연결을 직접 설명하지 않으며, 단어의 일치만으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야곱을 언급하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 마지막의 천사들이 야곱의 꿈과 가깝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가능성은 더 무게를 얻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다나엘이 기도하고 있었다거나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내립니다
나다나엘이 본 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합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너를 내가 보았다고 말했기 때문에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50 · 본디새김
나다나엘은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믿음은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호칭을 알아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호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께서 앞으로 하시는 일을 통해 더욱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의 고백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그가 보고 믿게 된 사건이 앞으로 보게 될 것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더 큰 일’을 설명하시는 방식이 뜻밖입니다.
그에게 말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51 · 본디새김
어디서 본 듯한 장면 아닙니까?
야곱의 꿈이 다시 나타납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길을 떠납니다. 밤이 되어 길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데, 땅과 하늘을 잇는 통로가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로 오르내립니다(창세기 28:12). 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어디로 가든 지키시며,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듣습니다(28:13–15).
잠에서 깬 야곱은 자신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여호와야훼께서 그곳에 계셨다고 놀라서 말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의 꿈에서는 천사들이 하늘과 땅 사이의 통로를 오르내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사들이 오르내린다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겹치므로, 요한은 이를 통해 예수님을 야곱의 꿈에서 나타난 하늘과 땅의 만남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창세기의 사다리와 문자 그대로 동일시한다거나, 천사들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을 밟고 오르내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이 요구하는 해석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중심이시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잠들었던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이 자신을 통해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왜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셨을까요?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호칭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인간이시라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1장의 독자가 지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의 고백보다 더 큰 계시를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나다나엘 한 사람에게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51절에서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보게 될 것이다’라고 복수형을 쓰십니다. 한 사람과 나누던 대화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더 넓은 약속으로 확대됩니다.
요한복음 1장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
요한복음 1장은 다양한 인물들이 예수님께 붙이는 이름들로 가득합니다. 말씀, 빛,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사람의 아들. 그러나 나다나엘에게 더 큰 일이 남은 것은 그의 고백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백이 가리키는 예수님의 실체가 그가 지금 이해한 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아가는 이야기의 출발점은 언제나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할 때, 말씀은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본 적 없을 때, 말씀은 육이 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령이 머무는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셔서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찾기 전에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내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이야기가 먼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높은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육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앞으로 걸어가시는 길을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길을 아직 다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첫 장이 끝날 무렵, 제자들은 예수님을 발견했다고 기뻐하지만 그분에 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막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 앞에서 다시 조금 전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셔서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어디에 머무시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와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그날 열째 시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보았고, 그날 그분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