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

요한복음 10장은 양과 목자의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목자는 양을 보호하며, 마침내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목자의 풍경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자리를 생각하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바로 앞 장에서 한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을 뜨자,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불러 거듭 캐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했지만, 지도자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침내 그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9:3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셨습니다(9:35). 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은 시력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자리였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을 찾아 만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목자가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이름으로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3절)고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하는 일 역시 양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원문에서 9:34의 「내쫓았다」와 10:4의 「내보내면」(ἐκβάλλω)은 같은 동사, 곧 밖으로 내보내다·쫓아내다를 뜻하는 동사입니다. 물론 두 장면의 행동은 다릅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공동체에서 밀어냈고, 목자는 자기 양들을 이끌어 풀밭으로 데려갑니다.

이 연결을 의도적인 이야기의 대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양을 잘 돌보는 목자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을 참으로 돌보는 사람인가, 누가 그들을 자신의 권위 아래 가두고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이 장에는 네 장면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문과 목자에 관해 말씀하시고(1–18절),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갈라집니다(19–21절). 봉헌절의 성전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이 날카로워지고(22–39절),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자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믿습니다(40–42절).

이 흐름을 관통하는 것은 한 가지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들의 말보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서 보이는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610장 본문 읽기 →

양들을 가두는 사람이 아니라 앞서 가는 사람

요한복음 10:1–6 본문 →

예수님께서는 먼저 두 종류의 사람을 대조하십니다. 문으로 들어오는 목자와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오는 도둑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돌보기 위해 들어오지만, 도둑은 양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으려고 들어옵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이름으로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복음 10:3 · 두루새김

많은 양이 한곳에 있어도 목자는 무리 전체를 향해 막연히 소리치지 않고,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면 목자는 앞장서서 간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에 그를 따라간다.」요한복음 10:4 · 두루새김

여기에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통제보다 서로를 알아보는 관계가 그려져 있습니다. 양들이 목자를 따르는 까닭은 목자가 뒤에서 몰아붙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뒤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14절)라고 말씀하실 때, 이 관계가 더욱 깊은 의미를 얻게 됩니다.

반대로 양들은 낯선 사람에게서는 달아납니다. 목소리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눈뜬 사람은 예수님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부인하라는 지도자들의 요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낯선 목소리를 따르지 않는 양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신자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구별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은 양에게 본래 뛰어난 분별 능력이 있다는 사실보다, 목자와 양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양이 알아보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진리의 공식이 아니라 자기 목자의 목소리입니다.

6절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밝힙니다.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라고 여겼을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리시는 목자와 도둑의 구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앞 장에서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보지 못했고, 이제는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문이 되시고, 목자가 되시는 분

요한복음 10:7–13 본문 →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다시 설명하십니다. 앞에서는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목자였으니,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라고 밝히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복음 10:7 · 두루새김

그리고 11절에 이르러서야 「나는 좋은 목자다」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문이시면서 동시에 목자가 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의 모든 사물을 한 인물에 하나씩 대응시키는 완성된 이야기라기보다, 여러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역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문은 예수님을 통하여 열리는 생명의 길을, 목자는 그 길로 들어온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보시는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받고, 드나들며 풀밭을 찾을 것입니다(9절). 구원은 안전한 울타리 안에 영원히 머무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양들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뿐 아니라 살아갈 양식을 얻기 위해 풀밭으로 나갑니다.

구원은 죽음을 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양들이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도둑은 훔치고 잡아 죽이고 멸망시키려고만 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려고 왔다.」요한복음 10:10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종종 풍요로운 물질적 생활이나 성공을 약속하는 구절로 읽힙니다. 그러나 본문의 대조는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도둑은 양들에게서 생명을 빼앗고,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28절에서는 그 생명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단지 앞으로 오래 산다는 뜻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5:24). 생명을 풍성히 누린다는 것은 지금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하면서, 죽음과 멸망이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하는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8절의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요한복음은 모세가 예수님에 관하여 기록했고(5:46),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했다고 밝히므로(1:29–34), 이 말씀을 이전 시대의 모든 인물을 부정하는 말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에게서 권위를 받지 않고 스스로 목자 행세를 한 거짓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고,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여 구원에 대한 권한을 독점하려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앞의 도둑 이미지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벌어진 충돌을 근거로 삼습니다.

12절의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늑대가 나타나자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는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고 양들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달아난다.」요한복음 10:13 · 두루새김

문제는 돈 자체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 드러나는 관계입니다. 양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면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자기 안전을 먼저 선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씀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한 구약 본문은 에스겔 34장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양들을 먹이지 않고 자신들을 먹이며, 약한 양을 돌보지 않고, 병든 양을 고치지 않으며, 흩어진 양을 찾지 않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십니다(겔 34:2–6). 목자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목자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도둑과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의 모습은 이런 배경에서 훨씬 선명해집니다.

양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목자

요한복음 10:14–18 본문 →

「나는 좋은 목자다. 좋은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복음 10:11 · 두루새김

지금까지 목자는 양들을 부르고, 인도하고, 먹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다고 하십니다. 「좋은」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훌륭하고, 본받을 만하고, 그 이름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지닌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어떤 목자가 참으로 좋은 목자인지를 뒤따르는 행동이 설명합니다.

좋은 목자는 양들을 자기 생존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자기 생명을 양들의 생존을 위해 내어줍니다.

보통 양을 지키는 목자가 죽으면 양들은 늑대에게 더 쉽게 공격받고 흩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자가 죽는다는 것이 어떻게 양들을 살리는 길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한 목자의 비유로 읽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다는 말씀은 11절, 15절, 17절, 18절에 반복되며,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목자의 도리를 넘어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좋은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다.」요한복음 10:14–1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양들 사이의 앎을 설명하시면서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앎을 끌어오십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상대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시는 관계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아시는 관계를 그 앎과 연결하십니다.

양들은 목자가 관리하는 이름 없는 집단이 아닙니다. 원문의 표현은 「내게 속한 것들」(ἐμός)이라는 뜻이며, 두루새김은 그 대상을 밝혀 「내 양들」로 옮겼습니다. 이 문맥에서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은 지배보다 보호와 돌봄의 관계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친밀한 관계가 곧바로 예상 밖의 방향으로 넓어집니다.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도 내게 있다. 그 양들도 내가 데려와야 한다. 그들은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고,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복음 10:16 · 두루새김

이 양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들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요한복음 11:52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과 연결되고, 12:20–22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는 장면도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함께 고려하는 해석도 가능하므로, 다른 양들을 한 집단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우리」가 아니라 「한 양 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어에서도 「우리」(αὐλή)와 「양 떼」(ποίμνη)는 다른 단어이고, 16절에는 두 단어가 모두 나타납니다. 다른 양들이 속하지 않은 것은 현재의 「우리」이고, 그들이 함께 이루게 되는 것은 「양 떼」입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일치는 모든 양이 기존의 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곳에 있던 양들이 한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한 양 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 교회 제도의 모든 문제에 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 됨의 중심은 울타리의 형태가 아니라 목자가 누구인지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양들을 데려오시는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행위가 있습니다.

「아무도 내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 명령은 내 아버지께 받았다.」요한복음 10:18 · 두루새김

여기에는 스스로 선택하는 마음과 순종이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권한과 명령을 아버지께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 받으신 사명을 자신의 의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목숨을 얻으실 권한도 있다는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 이야기 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내다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중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에 의미를 덧붙인 것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것을 자신의 사명 안에서 설명하십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갈라집니다.

같은 말씀을 듣고도 갈라지는 사람들

요한복음 10:19–21 본문 →

19절에서 유대 사람들 사이에 다시 의견이 갈립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귀신이 들렸고 정신이 나갔어. 왜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거야?」요한복음 10:20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앞의 목자 비유와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셨는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할 말이 아니야. 귀신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어?」요한복음 10:21 · 두루새김

여기서 9장의 사건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만 따로 떼어 평가하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의 눈이 열린 사건을 근거로 판단합니다. 본문은 이들이 모두 완전한 믿음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들은 적어도 이미 일어난 일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는 단서는 바로 그분의 일입니다. 이 단서는 다음 장면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겨울의 성전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

요한복음 10:22–39 본문 →

22절에서 장면이 바뀝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는 봉헌절이 열렸습니다. 계절은 겨울이었습니다.요한복음 10:22 · 두루새김

봉헌절은 오늘날 하누카라고 부르는 유대 절기로, 기원전 2세기 안티오코스 4세 아래 더럽혀진 성전을 유다 마카베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찾아 기원전 164년에 다시 봉헌한 일을 기념합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성전을 다시 봉헌했던 일을 기념하는 때에, 예수님의 정체와 하나님께 대한 관계가 논쟁의 중심이 됩니다. 요한이 이 절기로 무엇을 드러내려 했는지 모두 확정할 수는 없지만, 장소가 성전이고 시간이 봉헌절이며 논쟁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물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를 답답하게 하겠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십시오.」요한복음 10:24 · 두루새김

「답답하게 하겠습니까?」는 가깝게 옮기면 우리 목숨을 들어 올려 둔다는 낯선 표현으로, 상대를 애태우거나 불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내놓으신다고 하신 「목숨」과 같은 단어 프쉬케가 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목숨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묻고, 예수님께서는 이미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직접적인 말장난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을 함께 읽으면 강한 대비가 생깁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했지만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에 관해 증언한다.」요한복음 10:25 · 두루새김

사람들은 명확한 선언을 요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증거가 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능력을 과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분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증언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은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신 행위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라는 말씀을 눈앞에서 보여 준 일이었습니다(9:5–7). 사람들은 기적의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그 일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정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내 양들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 양들을 알고, 그 양들은 나를 따른다.」요한복음 10:26–27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양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고, 내 양들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사람들을 주신다는 요한복음의 주제(6:37–39)가 이 말씀의 배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 구절을 놓고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믿음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다양한 신학적 설명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처음 양이 되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의 직접적인 목적은 자신을 거절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양들이 보여 주는 차이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나는 그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내 손에서 그 양들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복음 10:28 · 두루새김

앞에서는 늑대가 양들을 「낚아채고 흩어 놓는다」고 하셨습니다(12절). 같은 위험을 말하지만 결과는 달라집니다.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의 손에서는 양들이 사라질 수 있지만, 예수님의 손에서는 빼앗기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은 모든 것보다 크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 양들을 빼앗을 수 없다.」요한복음 10:29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사본에 따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것이 모든 것보다 크다고도, 양들을 주신 아버지가 모든 것보다 크시다고도 읽힙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든 예수님의 손과 아버지의 손이 나란히 등장하고, 두 경우 모두 아무도 양들을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복음 10:30 · 두루새김

이 선언은 양들의 보호에 관한 약속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두 분의 손에서 양들을 빼앗을 수 없다는 말씀 뒤에 두 분이 하나이시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하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헨(εἷς)은 중성형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이 한 인격이라는 의미로 곧장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단순히 같은 목표를 가진 두 존재라는 정도로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뒤 아버지가 자기 안에 계시고 자신이 아버지 안에 계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38절).

이 선언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시면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내세우신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33절). 요한은 그 반응을 통해 예수님의 선언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러나지 않으시고, 그들이 권위 있는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본문을 들어 되물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말했다. 너희는 신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요한복음 10:3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시편 82:6의 직접 인용입니다. 시편 82편에서 하나님께서는 약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은 존재들을 심판하시며, 그들을 「신들」이라 부르셨지만 결국 사람처럼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시 82:2–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조차 성경에서 신들이라고 불렸다면,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세상에 보내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모독이 되느냐고 물으십니다. 핵심은 자신을 시편 82편의 존재들과 같은 수준에 놓으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표현이 사용된 적이 있다면, 아버지께서 특별히 보내신 자신에게 그 표현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모독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논증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믿지 마라.」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 계속 알아 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0:37–3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주장만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하시는 일을 살펴보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하십니다. 「알고 계속 알아 가게」에는 처음 알아보는 일과 그 앎을 이어 가는 일이 함께 담겨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자신의 위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설명을 듣고도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가십니다. 이 장에서는 이미 두 번 손이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도, 아버지의 손에서도 아무도 양들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붙잡으려던 사람들의 손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지 못합니다.

앞의 약속을 그대로 반복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요한이 배치한 장면들은 분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생명을 지키는 손과 사람을 붙잡으려는 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십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낯선 표현은 목숨을 빼앗는다는 의미나 분노를 일으킨다는 의미로 해석할 가능성도 논의됩니다. 이어지는 요청으로 보아 정체를 분명히 밝히라는 답답함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원문의 의미가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29절의 사본 차이는 원문의 대명사와 형용사 형태가 달라서 생깁니다. 34절에서 인용된 시편 82편의 「신들」이 누구인지도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님에게서 권위를 맡은 인간 통치자나 재판관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시편 첫머리의 하늘 회의 장면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하늘의 신적 존재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시편 전체의 문맥에서는 후자가 중요하게 논의되지만, 두 읽기 모두 해석의 전통 속에 존재합니다. 또한 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목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뒤, 직접 자기 양들을 찾아 돌보고(겔 34:11–16) 자기 종 다윗을 한 목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겔 34:23–24). 본래 문맥에서는 흩어진 이스라엘의 회복과 올바른 통치에 관한 약속이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한 목자의 일을 하시면서 아버지와의 일치를 선언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직접 인용이 아니라 목자와 양에 관한 공통된 이미지와 약속으로 맺어지는 연결입니다.

표징이 없던 자리에서 믿음이 시작되다

요한복음 10:40–42 본문 →

요한복음 10장의 마지막은 조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요단강 건너편, 세례자 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고(1:29),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습니다(1:34).

많은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분에 관해 요한이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어.」요한복음 10:41 · 두루새김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은 표징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기억합니다. 요한의 증언이 사실이었다고 드러난 것은 그가 가리켰던 예수님을 사람들이 실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을 가리켰습니다.

성전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답변을 요구했으며, 마침내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 건너편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처음에는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양들을 이끌고 나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보고 그분께 찾아옵니다. 요한복음 10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신의 권위 아래 가두려는 지도자가 아니십니다.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고, 양들이 살아갈 길을 열어 주시며, 그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하나 되시어 그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에 머무르십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와, 오래전에 그곳에서 들었던 요한의 증언을 떠올립니다. 그때에는 표징 하나 없이 전해졌던 말이 이제 그들의 눈앞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사실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복음서 기자는 짧게 기록합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요한복음 10:42 · 두루새김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