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생명을 주시는 분이 죽음의 길로 들어가시다
요한복음 11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 하나를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그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라는 말 뒤에 곧바로 달려가셨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틀 더 머무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문에서는 이 두 문장이 「그러므로」로 이어집니다. 사랑하셨으므로 기다리셨다고 합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나 있었습니다. 두 자매는 차례로 예수님께 「주님, 여기 계셨더라면 제 형제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장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뜻을 모읍니다. 한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내신 일이 다른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이 두 역설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음이 있는 곳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그 길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곳으로 들어가시는 길이기도 합니다.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11). 이제 그 말씀이 한 사람의 죽음과 한 가족의 슬픔 앞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기록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나사로가 아닙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어떻게 행동하시는지,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가 드러나는 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은 이틀
이야기는 베다니의 한 가족을 소개하면서 시작됩니다.
나사로가 병을 앓고 있었고, 그의 자매는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요한은 이 마리아를 예수님께 향유를 바르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사건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은 다음 장인 12:3에서 비로소 등장합니다.
요한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여 마리아를 소개합니다. 그 향유 사건은 예수님의 장례 준비와 연결되므로(12:7), 이 짧은 소개에는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지금은 마리아의 남자 형제가 죽음 앞에 있지만, 다음 장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두 자매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복음 11:3 · 두루새김
이 말에는 직접적인 요청이 없습니다. 와 달라는 말도, 고쳐 달라는 말도 없습니다. 자매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나사로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어지는 행동이 더욱 뜻밖입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 있던 곳에 이틀 더 머무셨습니다.요한복음 11:5–6 · 두루새김
5절에서 사랑을 확인한 직후 6절에서 기다림을 이야기하는데, 원문에는 두 문장을 잇는 「그러므로」(οὖν)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에서는 이 연결어를 따로 옮기지 않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과 기다림을 서로 관계없는 사실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가 그 둘의 관계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신 것일까요?
본문은 기다림과 하나님의 영광을 연결하지만, 정확히 어느 시점에 나사로가 죽었는지, 예수님께서 곧바로 출발하셨다면 죽기 전에 도착하실 수 있었는지는 확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더 극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나사로의 죽음을 내버려 두셨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밝히신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소식을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날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병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1:4 · 두루새김
나사로는 실제로 죽습니다. 그러니 「죽음으로 끝날 병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병이 가져올 당장의 결과보다 그 사건이 마지막에 향할 곳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실제이지만, 죽음이 이 사건의 마지막 결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장을 끝까지 읽으면 그 영광이 단순히 놀라운 기적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건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틀 후 예수님께서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얼마 전에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쳐 죽이려 했는데, 다시 그곳으로 가십니까?」요한복음 11:8 · 두루새김
그들의 염려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앞 장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습니다(10:31, 39).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돌아가신다는 것은 단순한 병문안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낮과 밤에 관한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낮은 열두 시간이 아니냐? 낮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1:9 · 두루새김
이 말씀을 낮에 여행하시면 안전하다는 뜻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제자들이 걱정하는 위험은 어두운 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이미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이미지였습니다(8:12; 9:4–5). 이 문맥에서 낮에 걷는다는 것은 주어진 시간과 빛 가운데 자신의 길을 간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험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위험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멈추지도 않으십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잠들었으며 자신이 깨우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병든 사람이 잠들었다면 회복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들이 잘못 알아듣자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요한복음 11:14 · 두루새김
제자들은 잠을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죽음은 나사로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하는 마지막 장벽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회복을 기대하며 사용하는 「나을 것입니다」(12절)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움 사이에는 아직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차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곳에 계시지 않았던 일이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15절). 나사로의 죽음을 기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도마가 뜻밖의 말을 합니다.
그러자 쌍둥이라는 별명이 있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가서 주님과 함께 죽자.」요한복음 11:16 · 두루새김
도마는 흔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했던 제자로만 기억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시면 죽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제자들에게 함께 가자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는 죽음을 각오하는 충성과 위험 앞에서의 비관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넘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과 함께 가려고 합니다.
이처럼 이야기의 첫 부분은 두 가지 기다림으로 이루어집니다. 베다니의 가족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예수님께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리십니다. 가족은 예수님께서 오시면 죽음을 막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이 찾아온 사람에게로 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사랑하시는」과 5절의 「사랑하셨습니다」에는 서로 다른 그리스어 동사가 쓰입니다. 두 단어가 담는 뜻에는 차이가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서로 겹쳐 사용되기도 하므로 이 차이만으로 서로 다른 수준의 사랑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과 이 가족 사이의 깊은 애정입니다.
마지막 날을 믿는 사람 앞에 서 계신 부활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나 있었습니다.
요한이 굳이 나흘이라는 시간을 밝힌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선 이것은 나사로가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가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회복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뒤에서 마르다가 시신의 썩는 냄새를 염려하는 장면(39절)이 그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합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15스타디온, 대략 2.8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 사람이 두 자매를 위로하러 왔다는 설명은 이 가족의 슬픔이 집 안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이들은 뒤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직접 보게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님, 여기 계셨더라면 제 형제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1:21 · 두루새김
이 말에는 책망이 담겨 있을까요, 믿음이 담겨 있을까요? 둘 가운데 하나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는 안타까움도 생깁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었으리라고 믿기에, 지금의 상실이 더욱 쓰라립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주님께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시든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압니다.」요한복음 11:22 · 두루새김
남자 형제가 죽었지만 마르다는 「지금도」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신뢰합니다. 다만 그 신뢰가 나사로가 곧바로 다시 살아나기를 구체적으로 기대한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무덤의 돌을 치우려 하자 마르다가 썩는 냄새를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형제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다가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요한복음 11:24 · 두루새김
마르다의 대답을 믿음이 부족한 사람의 말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당시 유대교 안에 있던 중요한 부활의 소망, 곧 죽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진 올바른 믿음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 보이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다.」요한복음 11:25 · 두루새김
여기서 대화의 중심이 바뀝니다.
마르다는 부활이 언제 일어나는지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누구에게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마르다가 말한 「부활」(ἀνάστασις)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활」은 같은 그리스어 낱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말을 부정하거나 다른 주제로 바꾸지 않으시고, 마르다가 미래의 사건으로 말한 바로 그 부활을 받아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의 부활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선언이 아닙니다(5:28–29; 6:39–40).
부활은 단순히 하나님이 미래 어느 날 행하실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 부활을 이루실 분이 지금 마르다 앞에 서 계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아 있으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복음 11:26 · 두루새김
앞에서는 믿는 사람이 죽어도 살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믿는 사람도 죽는다는 것일까요, 죽지 않는다는 것일까요?
믿는 사람도 육체적인 죽음을 겪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자체가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이 생명을 최종적으로 끝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육체의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으며, 부활의 약속까지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과 마지막 날의 부활은 경쟁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한 생명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 줍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는 질문은 일반적인 부활 교리를 믿는지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 앞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바로 부활이시고 생명이시라는 사실을 믿는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곧 세상에 오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요한복음 11:27 · 두루새김
마르다는 나사로가 살아나는 일을 보기 전에 이 고백을 합니다. 남자 형제는 여전히 무덤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기대를 뛰어넘는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고백이 모든 의문을 없앤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마르다는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고백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고백 직후에 또 다른 자매를 무대 위로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나흘이라는 시간을 설명하면서 고대 유대인들이 영혼이 사흘 동안 시신 곁에 머문다고 믿었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랍비 문헌은 후대의 것이어서 요한복음 당시에도 같은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본문 자체가 나사로의 죽음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처럼 여겨졌음을 충분히 보여 줍니다. 마르다가 말하는 마지막 날의 부활은 다니엘 12:2와 같은 소망과 연결됩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 잠든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원한 생명이나 수치를 맞게 되리라는 이 말씀은, 본래 문맥에서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과 구원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입니다. 또 요한복음 5:24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듣고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은 지금 시작되지만, 미래의 부활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부활을 말씀하신 분이 눈물을 흘리시다
마르다는 돌아가 마리아를 조용히 따로 불러 「선생님이 와 계셔. 너를 부르셔.」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곧바로 일어나 예수님께 가고, 그녀를 위로하던 사람들도 따라갑니다.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울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향한 곳은 무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와서 예수를 보자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님, 여기 계셨더라면 제 형제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1:32 · 두루새김
마르다가 했던 말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은 문장입니다. 이 반복은 두 자매가 같은 상실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두 만남의 흐름은 다릅니다.
마르다와의 만남에서는 부활에 관한 대화가 이어졌고, 마르다는 대답하며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같은 말을 한 뒤,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눈물이 등장합니다.
마리아가 울고 있고, 함께 온 사람들도 울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에게서 뜻밖의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울고, 마리아와 함께 온 유대 사람들도 우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러자 속에서 크게 화가 치밀고 마음이 흔들렸습니다.요한복음 11:33 · 두루새김
이 말씀은 흔히 예수님께서 깊은 슬픔에 잠기셨다는 뜻으로만 이해됩니다. 그러나 두루새김이 「크게 화가 치밀고」라고 옮긴 원문의 엠브리마오마이(ἐμβριμάομαι)는 성내거나 분개하는 의미를 지니는 말로, 단순한 슬픔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강한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에 화가 나셨을까요?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는 현실을 향한 분노로 읽기도 하고, 우는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향한 반응으로 읽기도 합니다. 본문은 분노의 대상을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한쪽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의 고통을 무심하게 바라보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복음 11:35 · 두루새김
이 장면이 특별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깨우러 가신다고 말씀하셨고, 마르다에게는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곧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눈물을 흘리십니다.
우리는 흔히 슬픔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결과가 좋아질 것을 확실히 안다면 슬픔도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부활의 확신은 죽음 앞의 슬픔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눈물 앞에서는 그 고통을 건너뛰지 않으십니다.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이 그분을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지만, 그래서 죽음을 가볍게 여기시는 분은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말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다른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했습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나사로도 죽지 않게 하실 수는 없었을까?」요한복음 11:37 · 두루새김
이 질문은 9장의 표징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도 두 자매의 말과 같은 한계 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죽음을 막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아무도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실 분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차이가 이제 무덤 앞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33절에서 쓰인 「크게 화가 치밀고」의 낱말은 다른 문맥에서는 엄하게 다그치는 행동을 나타내기도 하며, 요한은 38절에서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가실 때 같은 단어를 다시 사용합니다. 해석은 세 갈래로 나뉩니다.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실을 향한 분노로 보는 견해, 마리아와 위로하러 온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향한 반응으로 보는 견해, 예수님 안에서 슬픔과 격렬한 마음의 흔들림이 복합적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또 33절의 「울고」와 「우는 모습」에는 울거나 슬퍼하며 곡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쓰이지만, 35절에는 「눈물을 흘리다」라는 다른 동사가 쓰여 예수님께서 실제로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다만 이 단어의 차이만으로 예수님께서 소리 없이 조용히 우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돌을 치워라 — 죽음이 끝이라고 여기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에서 화가 치민 채 무덤으로 가십니다. 무덤은 동굴이었고, 입구에는 돌이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치워라.」 죽은 나사로의 자매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썩는 냄새가 납니다.」요한복음 11:39 · 두루새김
앞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람이 바로 마르다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무덤을 열라고 하시자 현실적인 문제를 꺼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믿지만, 그 믿음이 형제가 겪은 죽음의 현실을 지워 버리지는 않습니다. 나흘이 지난 시신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는 것은 그만큼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믿음과 죽음의 현실이 서로 맞부딪히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복음 11:40 · 두루새김
이 말씀은 4절에서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을 되받습니다. 나사로의 병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된다고 하셨는데, 이제 그 영광을 보게 될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이 충분해야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알아보는 일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말을 들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요한복음 11:41 · 두루새김
아직 나사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응답받으신 것에 대해 감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을 들어 주시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둘러선 사람들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이들이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1:42 · 두루새김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나사로를 살리게 해 달라고 간청하시는 장면이 아닙니다. 소리 내어 기도하시는 것은 둘러선 사람들이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아버지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하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밖으로 나오너라!」요한복음 11:43 · 두루새김
여기에는 긴 기도도, 복잡한 의식도 없습니다. 이 짧은 부름이 지닌 힘은 뒤따르는 문장에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손과 발은 천으로 된 띠에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여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묶인 것을 풀어 주고 가게 해라.」요한복음 11:44 · 두루새김
독자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그가 죽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드러냅니다. 무덤에서 나온 사람은 병에서 회복된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살아 나왔지만 여전히 장례 때 사용한 천에 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를 묶은 천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생명을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살아난 사람을 맞이하고 그를 풀어 주는 일에는 주변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이것을 교회 안에서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사명의 비유로 넓혀 읽을 수도 있지만,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모습은 그보다 구체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가 장례용 천을 벗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죽은 사람으로 묻혔던 나사로가 이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사람들 사이에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 일은 마르다가 고백한 마지막 날의 부활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두 사건을 완전히 같게 볼 수는 없습니다. 나사로는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왔고, 요한은 그가 마지막 부활의 완성된 상태에 이르렀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부활과 생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미리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일이 이야기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위기의 시작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43절의 부름은 원문에서 글자 그대로 「이리로, 밖으로」에 가까운 짧은 두 표현이며 별도의 명령형 동사가 없습니다. 두루새김의 「밖으로 나오너라」는 이 부름을 자연스러운 한국어 명령으로 옮긴 것입니다. 44절에서도 원문은 이름 대신 「죽었던 사람」이라고 하여 그의 죽음을 다시 드러냅니다. 이 장면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말씀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26:19는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고 티끌에 누운 사람들이 깨어날 것을 말하고, 다니엘 12:2에서도 땅의 티끌 가운데 잠든 사람들이 깨어나는 일이 약속됩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도 관련이 있지만, 그 본래 의미는 바벨론 포로 생활 가운데 소망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겔 37:11–14). 따라서 에스겔의 환상을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일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다만 죽음과 같은 절망의 자리에서 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주제가 두 본문을 연결합니다.
한 사람을 살린 일 때문에 한 사람을 죽이기로 하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갈라집니다.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렸습니다.요한복음 11:45–46 · 두루새김
본문은 알리러 간 사람들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전한 소식이 종교 지도자들의 회의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표징을 이렇게 많이 일으키는데,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거야?」요한복음 11:47 · 두루새김
그들은 예수님께서 표징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표징이 실제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표징으로 인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입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가 그를 믿을 거야. 그러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터전과 민족을 빼앗아 갈 거야.」요한복음 11:48 · 두루새김
유대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지지가 커지고 그것이 정치적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질 경우, 로마가 이를 위협으로 여기고 개입할 가능성을 지도자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가족에게 그 표징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되찾은 사건이었습니다. 이를 본 많은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에게는 민족 전체에 위험을 불러올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걱정을 반드시 위선이나 개인적인 권력 욕심으로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로마의 개입에 대한 염려에는 당시의 현실적인 근거가 있었습니다. 요한이 보여 주는 문제는 그들이 위험을 염려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내놓는 결론입니다.
가야바가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편이 너희에게 이롭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하느냐?」요한복음 11:50 · 두루새김
한 사람을 희생시키면 많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의회가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신 일의 의미를 묻거나,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인지 살피는 모습은 여기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반전이 나옵니다.
요한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만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제사장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해 죽게 되실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51절). 가야바 자신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정치적 결정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말 속에서 가야바가 의도하지 않은 다른 의미, 곧 예수님께서 실제로 백성을 위해 죽으시게 된다는 뜻을 발견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의미의 「위해」가 놓여 있습니다.
가야바의 계산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민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하는 희생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설명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시는 사건입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의 죽음을 올바른 뜻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예언한 것은 아닙니다. 이 장면은 권력자의 판단이 옳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의도와 하나님의 구원 목적 사이에 놓인 극적인 차이를 보여 줍니다.
예수의 죽음은 그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요한복음 11:52 · 두루새김
가야바는 자기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두었지만, 요한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까지 내다봅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양들도 데려와 한 양 떼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16). 이제 그 모임을 이루는 길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을 죽음에서 살리셨고, 그 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바로 그 죽음이 더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모으는 길이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나사로에게 생명을 돌려주신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죽음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면 위기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은 아직 자신들이 결정한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요한은 독자가 그 차이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53절은 짧지만 무겁게 끝납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뜻을 모았습니다.요한복음 11:53 · 두루새김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나오던 날,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 더욱 분명해진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48절의 「우리의 터전」은 원문에서 장소를 뜻하는 말로, 이 문맥에서는 성전, 예루살렘, 또는 지도자들이 가진 사회적·종교적 지위를 가리킨다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성전과 예루살렘이 그들의 권위와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는 해석들입니다. 52절의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는 이미지는 구약의 회복 약속과 연결됩니다. 에스겔 37:21–22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여러 민족 가운데서 모아 한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본래는 흩어진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체적으로 누구까지 포함하는지에 관한 해석에는 차이가 있지만, 요한복음 전체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혈통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1:12–13). 이 때문에 11:52를 이스라엘을 넘어 넓어지는 구원의 전망으로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명절을 앞두고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
의회의 결정 이후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드러내 놓고 다니지 않으십니다. 광야 가까운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위험을 모르고 유대로 들어오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의 사명을 멈추지 않으시는 것과 모든 위험에 무조건 몸을 맡기시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에게 가야 할 때 유대로 가셨고, 이제는 공개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물러나십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유월절이 가까워집니다.
사람들은 명절을 앞두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의식을 치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억하는 명절입니다(출 12장). 그런 명절을 앞두고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결정이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긴장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성전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려줄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했습니다. 「너희 생각은 어때? 그가 이번 명절에는 안 오려나?」요한복음 11:56 · 두루새김
이 장에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은 남자 형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위로하러 온 많은 사람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그분이 어디 계신지 아는 사람은 알리라고 명령해 두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이 시작될 때 예수님께 전달된 소식은 한 사람이 병을 앓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이 끝날 때 전달되기를 기다리는 소식은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에 관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죽어 가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고, 마지막에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찾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과 생명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으며, 죽었던 나사로를 밖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생명은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마르다의 슬픔도, 마리아의 눈물도, 무덤의 썩는 냄새도 지워지지 않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말씀하시고, 죽었던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보여 주신 일 때문에 이제 예수님의 생명마저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장면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집니다. 유월절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서로 묻고,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지 알리는 소식을 기다립니다.
성전에는 「그가 이번 명절에는 안 오려나?」라는, 아직 대답되지 않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