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2–12장 · 표적과 대화

밀알 한 알이 떨어지는 때

요한복음 12장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면들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치며 환영합니다. 그리스 사람들까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이제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퍼져 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고는, 곧이어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는다」고 하십니다.

영광의 때가 왔다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높아지시는 모습을 기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이 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왕을 맞으러 나왔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여인의 행동을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2장의 중심에 놓인 역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길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높아지시는 길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놓으시는 길입니다.

이 장은 요한복음 전체에서도 전환점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으며, 눈먼 사람의 눈을 여셨고, 마침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12장 후반에서 요한은 그 모든 표징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를 정리합니다. 13장부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는 이야기로 들어가므로, 12장은 예수님의 공개적인 활동이 마무리되고 죽음을 향한 길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자리입니다.

이 장에서 사람들은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무리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며,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본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요한은 이 차이를 여러 장면을 통해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712장 본문 읽기 →

향유로 가득 찬 집, 그리고 장례를 말씀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2:1–11 본문 →

이야기는 유월절 엿새 전, 베다니에서 시작됩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예수님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지난 장의 마지막에 놓였던 죽음의 무덤은 이제 저녁 식사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마리아는 향유를 가져옵니다. 요한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다시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가 예수님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아 있다고만 기록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무덤에 누워 있던 사람이 이제 살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실제로 생명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가장 일상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식사가 진행되는 도중 마리아가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마리아는 값비싸고 순수한 나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 예수의 발에 바르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았습니다. 집 안은 향유 냄새로 가득 찼습니다.요한복음 12:3 · 두루새김

요한은 향유의 양과 품질, 그리고 집 안에 퍼진 냄새를 자세히 기록합니다. 한 리트라는 약 327그램이고, 유다는 그것을 300데나리온, 곧 일꾼의 300일 품삯쯤에 팔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상당히 비싼 향유였습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향유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거나 몸을 아름답게 가꾸고, 죽은 사람의 장례를 준비할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바르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그녀는 값비싼 것을 내놓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낮추어 예수님의 발 앞에 있습니다.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장례에 연결되고 예수님의 행동은 제자들을 향한 섬김을 보여 주어 목적은 다르지만, 발이라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이 표현된다는 점에서 두 장면은 서로를 비춥니다.

향유는 예수님의 발에 발라졌지만, 그 냄새는 집 전체에 퍼집니다. 마리아가 한 일이 얼마나 풍성하고 분명하게 드러났는지를 독자가 느끼게 하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유다는 전혀 다른 것을 봅니다.

「왜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습니까?」요한복음 12:5 · 두루새김

유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 이치에 맞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큰돈을 사용하는 것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요한은 이 문제를 피하지 않습니다. 다만 유다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려 줍니다.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걱정한 것이 아니라, 돈통에서 돈을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이 설명을 읽고 나면 유다의 질문은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마리아에게 향유의 가치는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의 표현에 있었지만, 유다에게 그 향유는 돈으로 바꾸어 셀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다의 동기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의 가치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를 그대로 두어라. 내가 묻힐 날을 위해 이 향유를 간직하게 해라.」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2:7–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보다 종교적인 헌신이 언제나 앞선다는 뜻으로 오해되곤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의 배경에는 신명기 15:11을 떠올릴 근거가 있습니다. 그 구절은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가난하고 어려운 형제에게 손을 넓게 펼쳐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돕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도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견주시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 가운데 누가 더 가치 있는가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기회는 계속 있겠지만,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자신의 장례와 연결하십니다. 마리아는 이미 향유를 썼는데 「간직하게 해라」가 무슨 뜻인지는 해석이 갈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정확히 내다보고 장례를 준비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녀의 행동에 장례와 관련된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한쪽에는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자신의 장례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신 뒤 자신의 죽음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거기 계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유대 사람이 예수님뿐 아니라 나사로도 보려고 베다니로 몰려옵니다. 나사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대제사장들은 그 나사로마저 죽이기로 뜻을 모읍니다(10–11절).

생명의 표징을 없애기 위해 또 다른 죽음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다음 날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이해하는 배경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20:2에서 한 데나리온은 하루 일한 일꾼의 임금으로 등장하므로 300데나리온은 단순 비교로 약 300일의 품삯입니다. 실제 임금 수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 오늘날 금액으로 정확히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순수한」으로 번역된 피스티코스의 정확한 뜻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섞이지 않은 진품이라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액체 상태나 특정 종류 또는 생산된 곳을 나타낸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6절의 「빼돌리곤 했습니다」로 옮긴 동사는 본래 지거나 운반한다는 뜻이지만 가져가거나 훔친다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고, 요한이 바로 앞에서 유다를 도둑이라고 밝혔으므로 돈을 빼돌렸다는 해석이 앞뒤에 잘 들어맞습니다. 7절의 「… 간직하도록」이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지금까지 장례를 위해 향유를 간직해 왔다는 뜻, 남은 향유를 간직하게 하라는 뜻, 그녀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장례를 준비한 것이 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데, 어느 해석에도 문법과 앞뒤 내용에서 어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왕을 환영하는 사람들과 나귀를 타신 예수님

요한복음 12:12–19 본문 →

다음 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이 퍼집니다.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사람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갑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이스라엘의 왕은 복되십니다!」요한복음 12:13 · 두루새김

「호산나」는 본래 구원을 청하는 말이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예배와 찬양의 환호로도 쓰였습니다. 사람들의 외침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를 축복하는 시편 118:25–26을 바탕으로 합니다. 여기에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표현을 더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왕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이스라엘의 절기와 기쁨의 표현에 사용되었고(레 23:40), 승리를 기뻐하는 자리에도 등장합니다. 사람들의 행동에는 종교적 찬양과 민족적 기대가 함께 담겨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본문은 개개인이 어떤 정치적 기대를 가졌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찾아 그 위에 올라타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시온의 딸아. 보아라, 네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요한복음 12:15 · 두루새김

스가랴 9장에서 시온에 오는 왕은 의롭고 구원을 가져오며,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옵니다. 바로 다음 절(슥 9:10)에서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쓰는 수레와 말과 활을 없애시고, 그 왕이 여러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며 그의 다스림이 땅끝까지 미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예언 안에서 나귀를 탄 왕은 전쟁의 힘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왕입니다.

사람들은 왕이 오신다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왕이신지를 사람들의 환호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신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이 차이는 이 장의 후반부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실 승리는 군사적 힘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일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성경의 이 말이 예수를 두고 기록되었으며 사람들이 예수께 그대로 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요한복음 12:16 · 두루새김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이 처음부터 사건을 성경 구절에 맞추어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건을 겪는 순간의 이해와 그 사건을 돌아보며 얻는 이해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예언이 정확히 이루어졌다는 사실 확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예수님께서 왕으로 환영받으시는 이 순간에 나귀를 선택하셨는가 하는 것이고, 요한은 그 의미가 예수님의 영광을 통하여 밝혀진다고 말합니다.

그에 앞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너희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게 보이지? 봐,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어.」요한복음 12:19 · 두루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이스라엘 밖에서 온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과장하여 말한 「온 세상」이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넓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카베오기 상권 13:51에는 시몬이 예루살렘의 요새를 차지한 뒤 백성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기뻐한 기록이 있습니다. 또 요한이 인용한 말씀은 스가랴의 표현과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스가랴 9:9은 크게 기뻐하라고 하는데, 요한은 「두려워하지 마라」고 전합니다. 이는 이사야 40:9이나 스바냐 3:16 등의 표현을 떠올리게 하지만, 요한이 왜 이렇게 바꾸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

요한복음 12:20–26 본문 →

명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빌립에게 「저희가 예수를 뵙고 싶어요」 하고 청합니다. 명절에 예배하려고 올라온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방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유대교로 완전히 종교를 바꾼 사람들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 알리고, 두 사람은 함께 예수님께 갑니다.

요한은 그리스 사람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대답을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요한복음 12:23 · 두루새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고(2:4),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을 때도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7:30; 8:20).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때가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온 일이 왜 이 선언과 연결되는지 정확히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말했고, 이제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으며, 예수님께서는 곧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시겠다고 하십니다(32절). 그리스 사람들의 등장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이 이스라엘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어떻게 이루실지 예수님께서는 밀알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24 · 두루새김

씨앗이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기만 한다면 계속 한 알일 뿐입니다. 그러나 땅에 심겨 싹을 틔우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식물이 자라는 과정을 정확히 설명하려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모습을 간직하는 것과 새로운 생명을 낳는 것의 대조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사람들을 계속 늘리시고 그들 위에서 권력을 누리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시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일반적인 교훈이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부르심으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 들어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사건에서, 한 사람의 죽음이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오는 사건으로 이야기의 방향이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이 원리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 목숨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요한복음 12:25 · 두루새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신을 혐오하거나 자기 생명을 함부로 다루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사랑과 미움은 때로 무엇을 더 앞세우는지를 강하게 대조하는 표현으로 쓰입니다(눅 14:26). 핵심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을 무엇보다 앞서는 가치로 삼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붙드는 것처럼 보이는 선택이 오히려 생명을 잃는 길이 될 수 있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참된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위험한 선택이나 불필요한 희생을 옳다고 하는 말씀으로 넓혀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의 기준은 희생의 크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가에 있습니다.

「나를 섬기는 사람은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요한복음 12:26 · 두루새김

여기서 따름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장소로 함께 이동한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놓으시는 길에 제자들의 삶도 연결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얻는 것은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43절의 사람들과 대조됩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 「사람들이 주는 영광」을 더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환호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따르는 사람들도 그 길에 참여하도록 부르십니다.

죽음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흔들리는 마음

요한복음 12:27–33 본문 →

밀 한 알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담담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결코 평온하지만은 않습니다.

「이제 내 마음이 흔들린다.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때에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지만 저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이때에 왔습니다.」요한복음 12:27 · 두루새김

11:33에서 마리아와 조문객들의 울음을 보시고 마음이 흔들리셨을 때와 같은 동사입니다.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 서 계셨지만, 이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두렵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이때에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는 실제로 드리는 기도로도, 「그렇게 말해야겠느냐」는 반문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아무 고통 없이 맞이하신다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흔들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했고, 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요한복음 12:2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구하시는 것은 죽음의 위협을 피하시는 일도, 영웅으로 인정받으시는 일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대답은 과거와 미래를 함께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신 일들은 아버지를 드러냈고, 앞으로 걸어가실 길에서도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천둥이 쳤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천사가 예수님께 말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가 사람들을 위해 들린 것이라고 하시지만, 그 소리조차 모든 사람에게 분명하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과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가져올 결과를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지배자가 쫓겨날 것이다.」요한복음 12:31 · 두루새김

「이 세상의 지배자」는 하나님께 맞서는 악한 지배 권세를 가리키며(14:30; 16:11), 신약의 더 넓은 문맥에서는 사탄의 권세와 연결됩니다. 세상의 권력이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세상의 지배자가 쫓겨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승리는 무력이 아니라 자신이 죽임을 당하시는 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내가 땅에서 높이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요한복음 12:32 · 두루새김

「높이 들리면」으로 옮긴 그리스어 휩소오(ὑψόω)는 물리적으로 들어 올린다는 뜻과 높은 지위로 올린다는 뜻을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인자도 높이 들리셔야 한다고 말씀하셨고(3:14), 인자를 높이 든 뒤에야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신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8:28).

예수께서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게 되실지 가리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2:3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높이 들리신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죽음으로 여길 사건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영광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며, 그 결과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이끄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던 사람들의 작은 요청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 선언으로 넓어집니다.

밀 한 알이 떨어져 맺는 많은 열매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모이게 될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27절의 갈림은 구두점의 문제입니다. 두루새김의 구두점은 실제 기도로 읽는 쪽에 맞고, 이렇게 읽으면 죽음 앞에서 구원을 구하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향해 나아가시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할까?」에 이어지는 반문으로 읽으면, 자신이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고대 사본의 구두점만으로는 어느 쪽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장면은 마가복음 14:36의 겟세마네 기도를 떠올리게 하지만, 두 장면은 주제적으로 연결될 뿐 같은 사건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32절은 이사야 52:13의 종이 높이 들리고 지극히 높아진다는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해 읽을 여지가 있으나, 직접 인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모든 부류의 사람들로 이해하는 견해와 모든 사람을 향한 이끄심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모든 개인이 예외 없이 구원받는다고 결론 내릴 수 있는지는 별개의 신학적 논쟁입니다.

영원히 남아 있어야 할 왕이 왜 죽어야 하는가

요한복음 12:34–36 본문 →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무리는 혼란스러워합니다.

무리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자가 높이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이 인자는 누구입니까?」요한복음 12:34 · 두루새김

그들의 질문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7:12–16에는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굳게 세우겠다는 약속이 있고, 다니엘 7:13–14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다스릴 권한이 주어집니다. 무리가 성경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알던 약속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 사이에 긴장이 있기 때문에 생긴 혼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긴장을 곧바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빛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않도록 빛이 있는 동안 걸어라.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복음 12:35 · 두루새김

질문을 피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밝히셨습니다(8:12; 9:5). 빛이 그들 가운데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의문을 다 해결한 뒤 믿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공개적으로 활동하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그 빛을 외면하지 말라고 요청하십니다.

「너희가 빛의 자녀가 되도록, 빛이 있는 동안 빛을 믿어라.」 예수께서 이 말을 하고 떠나가 그들을 피해 몸을 숨기셨습니다.요한복음 12:36 · 두루새김

빛을 믿는 사람은 빛에 관한 지식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빛에 속한 사람, 빛의 성격을 지닌 사람이 됩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발랐고, 무리는 왕이라고 환호했으며,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환영하는 분위기나 표징을 구경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받아들이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빛이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그들 앞에서 물러나십니다.

왜 그토록 많은 표징을 보고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표징을 보았지만 믿지 않은 사람들

요한복음 12:37–43 본문 →

예수께서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는데도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12:37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요한복음 전반부 전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표징들이 언제나 믿음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은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두 번 인용합니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가 한 다음 말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전한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주님의 팔이 누구에게 드러났습니까?」요한복음 12:38 · 두루새김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종에 관한 노래의 일부입니다. 그 종은 멸시받고 고난을 겪지만, 그 고난은 다른 사람들의 죄와 치유에 연결됩니다. 종이 본래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논쟁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일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강력한 모습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하나님의 구원 방식 사이의 차이가 이 말씀을 통해 다시 드러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인용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굳게 하셨다.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서,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2:40 · 두루새김

이사야 6:10을 바탕으로 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믿지 못하도록 눈을 멀게 하셨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사야 6장에서 이 선언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해 온 백성에게 심판이 임하는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처음부터 아무런 거부 의사가 없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믿지 못하게 만드셨다는 설명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사야의 히브리어 본문은 백성의 눈을 감게 하라는 명령형이고, 칠십인역은 백성 스스로 눈을 감았다고 표현하는데, 요한복음은 누군가가 눈을 멀게 했다고 씁니다. 두루새김은 그 주체를 「그분께서」로 옮겼지만, 원문에는 주체가 명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석이 갈립니다. 전통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믿지 않은 데 대한 심판으로 완고함을 허용하거나 굳어지게 하신다고 읽고, 31절의 「이 세상의 지배자」와 연결하여 하나님께 맞서는 악한 권세가 사람들을 눈멀게 했다고 읽기도 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본문의 신학적 긴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한은 39절에서 사람들이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 42절에서는 지도자들 가운데도 많은 사람이 믿었다고 하고, 43절에서는 그들이 드러내어 말하지 않은 까닭을 사람들이 주는 영광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설명을 모든 사람이 선택의 여지 없이 믿지 않도록 예정되어 있었다는 주장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요한은 이 문제를 추상적인 논쟁으로 끝내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지도자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날까 봐 믿는다고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12:42 · 두루새김

9장에서 눈먼 사람의 부모도 같은 두려움 때문에 직접 대답하기를 피했습니다(9:22). 이 지도자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공동체에서의 지위가 충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 사람들이 주는 영광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2:43 · 두루새김

여기서 영광은 칭찬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유지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았지만, 그 믿음으로 치러야 할 대가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시는 길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길을 선택하십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두 태도 사이에는 같은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무엇을 잃는 것이 두렵습니까?

사람은 때로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는 진리를 받아들인 결과가 두려워서 침묵합니다. 요한은 이 사람들을 비웃는 데 머물지 않고, 그들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서 왜 자기 생명을 내놓으시는 길을 말씀하셨는지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한 알로 남습니다.

자기를 지키려는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반드시 참된 생명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외침 —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누구를 보는가

요한복음 12:44–50 본문 →

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기셨지만, 44절에서 다시 예수님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복음 12:44–45 · 두루새김

본문은 장소나 시간의 전환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44–50절을 예수님의 공개적인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모아 들려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 보냄, 빛, 어둠, 심판, 구원, 영원한 생명이 이 짧은 단락에 다시 모여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 자신을 믿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것과 아버지를 믿는 것이 나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외모를 보거나 기적을 목격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속에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2:46 · 두루새김

빛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따지기 위해서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비춥니다. 이 말씀이 이어지는 심판의 말씀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도 지키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2:47 · 두루새김
「나를 거부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를 심판할 것이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복음 12:4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가 곧바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말씀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빛은 어둠 속의 사람을 구해 내기 위해 비추지만, 빛이 비치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도 드러납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이 마지막 날에 사람을 심판할 만큼 결정적인 권위를 지닐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마지막 두 절에서 설명하십니다.

「내가 내 생각으로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 전해야 할지 직접 명령해 주셨다.」요한복음 12:49 · 두루새김
「나는 아버지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말한다.」요한복음 12:50 · 두루새김

이 마지막 문장은 예수님께서 순종하신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의 목적을 드러냅니다. 아버지의 명령은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2장의 모든 장면을 깊은 곳에서 하나로 묶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드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이 묻힐 날과 연결하셨고, 무리가 왕이라고 외쳤을 때 나귀를 타셨으며, 그리스 사람들이 뵙고 싶어 했을 때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기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생명을 주시는 데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그 사명이 실패한 결과가 아니라 그 사명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영광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지켜 한 알로 남으려 하지 않으시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길을 선택하십니다.

그렇게 요한복음 12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예루살렘을 가득 채웠던 무리의 환호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더 또렷하게 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말한다」고 하시며, 자신이 누구의 말씀을 전하시는지 밝히십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복음 3:17–21에서도 비슷한 긴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이지만, 빛이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일이 심판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과 심판을 서로 반대되는 두 사명으로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을 거부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 없는 선택으로 남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