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3–17장 · 마지막 식사와 작별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주님
요한복음 13장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놀라움은 그 일을 하시기 직전에 요한이 기록한 설명에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셨으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어 놓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셨습니다.요한복음 13:3–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어디서 오셨고 어디로 가시는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십니다.
왜 요한은 이 행동에 앞서 예수님의 권위와 정체를 이렇게 강조했을까요?
일반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사람의 일을 하면, 우리는 그가 자신의 지위를 잠시 내려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잊으셨거나 잠시 포기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이 맡겨졌음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발아래 두는 권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발 앞에 몸을 낮추는 권위입니다.
이 장면을 단순한 겸손의 본보기로만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요한은 그날 밤 식탁에 어떤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지도 함께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넘겨줄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신을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시면서 그들의 발을 씻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13장의 중심에 놓인 사랑입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공개적인 가르침의 무대가 사라지고,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식탁이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어떤 사랑에서 비롯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시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의 명령 바로 뒤에는 베드로의 실패를 예고하는 말씀이 놓여 있습니다.
왜 요한은 사랑의 명령 바로 다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예고를 기록했을까요? 이 질문을 품고 읽으면, 발 씻김과 배신, 새 명령과 베드로의 장담이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 — 아직 아무 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요한은 이 장을 매우 특별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유월절 명절 전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온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해 왔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한복음 13:1 · 두루새김
유월절이 다가오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왔습니다. 요한은 이 시간의 표현들을 모두 예수님의 사랑과 연결합니다. 「끝까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라는 뜻으로도, 남김없이 완전히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한은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는 중입니다. 제자들의 발도 아직 씻기지 않았고, 유다의 배신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죽음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라는 한 문장 아래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발을 씻으시는 일도, 유다에게 빵 조각을 건네시는 일도, 베드로가 자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는 일도 이 사랑의 흐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기 사람들」은 우선 그날 식탁에 함께한 제자들입니다.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그들의 자격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시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2절에서는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넘겨줄 생각을 이미 넣어 두었다고 합니다. 식탁에는 이미 배신의 가능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마귀가 배신을 준비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권위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권위를 사용하여 배신자를 공개적으로 제압하거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먼지가 많은 길을 샌들을 신고 다녔으므로 발을 씻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손님에게 물을 내주거나 노예가 발을 씻기는 관습이 있었고, 발 씻김은 대체로 낮은 지위의 사람이 하는 봉사와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그 일을 시작하십니다.
요한은 그 움직임을 천천히 기록합니다.
겉옷을 벗어 놓으십니다. 수건을 가져오십니다. 허리에 두르십니다. 대야에 물을 부으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고 수건으로 닦아 주십니다.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자신의 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조금 더 깊이
「끝까지」의 원문 에이스 텔로스는 시간적으로 마지막까지라는 뜻과 사랑의 깊이를 두고 완전히라는 뜻을 함께 품을 수 있으며, 두 의미가 반드시 서로를 밀어내지는 않습니다. 2절에서 원문은 그 마음이 문법적으로 누구의 마음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아, 마귀 자신의 마음으로 읽는 가능성도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27절에서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간다는 서술은 두루새김처럼 유다의 마음으로 읽는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식사 관습을 바탕으로 이 발 씻김을 주인과 노예의 역할을 뒤집는 행동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 겉옷을 벗으시고 나중에 다시 입으시는 모습은 목숨을 내놓고 다시 얻으신다는 말씀(10:17–18)을 떠올리게 해, 발 씻김을 죽음과 다시 살아나심을 미리 보여 주는 상징적 행동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만 동작 하나하나가 십자가와 부활의 각 단계에 정확히 맞아떨어진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반발합니다.
사랑받기를 거부하는 제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다가오시자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십니까?」요한복음 13:6 · 두루새김
「주님께서」와 「제 발」이 맞부딪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보다 높은 분이며 자신이 따라야 할 주님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 주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으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반응에는 예수님께 대한 존경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3:7 · 두루새김
베드로가 원하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을 받으실 만한 분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섬기시는 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그 권위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누릴 몫이 없다.」요한복음 13:8 · 두루새김
베드로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 예수님의 행동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높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 말이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여기서 「몫」은 어떤 것에 속한 부분이나 나누어 갖는 몫으로,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관계와 참여를 뜻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발 씻김을 거절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형식적인 규칙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17절에서 제자들도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명령에 앞서 베드로에게는 먼저 자신이 씻김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법을 배우기 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도록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시는가가 먼저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 씻김을 구원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정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그러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요한복음 13:9 · 두루새김
베드로가 갑자기 발 씻김의 깊은 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함께 누릴 몫을 잃을 수 있다는 말씀을 듣자, 가능한 한 더 많이 씻겨 달라고 요구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행동을 막으려 했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씻으셔야 할 범위를 자신이 정하려 합니다.
두 반응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베드로가 여전히 자신의 생각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판단하려 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므로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도 깨끗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요한복음 13:10 · 두루새김
목욕한 사람이라도 길을 걸으면 발은 더러워질 수 있으니, 온몸을 다시 씻을 필요는 없지만 발은 씻어야 합니다. 당시의 일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구분입니다. 그러나 「너희도 깨끗하지만」이라는 말씀에서 그 의미는 몸이 깨끗한 것을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목욕과 발 씻김은 각각 무엇을 가리킬까요? 목욕을 세례나 근본적인 죄 씻음으로, 발 씻김을 이후에 거듭 받는 죄 용서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깨끗해지는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는 해석도, 제자들의 관계를 새롭게 세우는 상징적 행동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본문의 모든 내용을 설명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뒤 흐름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예수님의 씻김은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몫에 관계하며, 예수님께서는 그 씻김을 제자들에게 먼저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 씻김은 제자들이 서로를 섬기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넘겨줄 사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발도 씻으셨을까요?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고, 그 뒤에 유다가 식탁에서 나갔다고 기록합니다. 유다가 발 씻김 전에 자리를 떠났다는 말은 없으므로,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유다 역시 씻김을 받았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장면이 따로 묘사되지는 않으므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을 아시면서도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뒤의 장면에서 더욱 날카롭게 드러납니다.
발을 씻기신 주님이 발꿈치를 드는 사람을 말씀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뒤 다시 겉옷을 입고 식사 자리에 몸을 기대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앞에서 베드로에게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제 제자들 전체에게 물으시고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선생님』, 『주님』이라고 부른다. 옳은 말이다. 내가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3:1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발을 씻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선생님이나 주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은 높은 지위를 버리고 낮은 사람이 되라는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섬기셨다는 사실 자체가 제자들의 행동을 바꾸는 근거입니다.
「주님이고 선생인 내가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복음 13:14 · 두루새김
주님과 제자의 관계는 뒤집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 안에서 섬김의 방향이 새롭게 정해집니다.
이 명령을 실제로 발을 씻어 주는 의식으로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교회 전통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발 씻김을 예배나 공동체의 의식으로 행하는 전통도 있고, 구체적인 섬김의 본보기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이해하는 전통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한쪽으로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중심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에게 하라는 데 있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다.」요한복음 13:17 · 두루새김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았고 설명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지식 자체를 복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몸을 낮추시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신 뒤, 그와 같이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야기가 갑자기 어두워집니다.
「너희 모두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뽑았는지 안다. 그러나 『내 빵을 먹는 사람이 나를 향해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요한복음 13:18 · 두루새김
시편 41:9의 인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편을 자신이 겪으시게 될 배신과 연결하십니다. 자신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먹던 사람이 자신을 넘겨줄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의 말씀을 통해 밝히시는 것입니다.
조금 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빵을 먹는 사람이 자신을 향해 발꿈치를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발이 두 장면에서 전혀 다른 행동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발 앞에 몸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배신자는 자신에게 빵을 주시는 예수님을 향해 발꿈치를 듭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지금 너희에게 말해 둔다. 그 일이 일어날 때 내가 바로 그라는 것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3:19 · 두루새김
「내가 바로 그」의 원문은 에고 에이미로, 글자 그대로는 「나는 있다」 또는 「내가 바로 그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중요한 말씀에 쓰이는 표현입니다. 나중에 유다의 배신이 일어나더라도, 제자들은 그것이 예수님께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실패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유다의 행동이 옳은 일이 되거나 그에게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배신의 악함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보내시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을 맞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아버지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0절). 배신의 예고 사이에 놓여 얼핏 뜻밖이지만, 발 씻김과 연결하면 자연스럽습니다. 제자들의 권위는 스스로 높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생기지 않고, 자신들을 보내신 예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제자들은 방금 자신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이 보여 주어야 할 권위의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41편에서 시인은 병들고 고통받는 가운데 원수들의 악의와, 자신의 빵을 먹던 친밀한 사람의 배신을 탄식합니다. 처음부터 유다라는 인물만을 직접 예언한 말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발꿈치를 들었다」는 표현은 상대를 공격하거나 적대적으로 대하는 행동을 나타내므로, 반드시 실제로 발로 걷어찼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이사야 43:10의 그리스어 본문에도 「너희가 믿도록」이라는 표현과 함께 「내가 그다」라는 선언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참 하나님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밝히시는 분임을 선언하십니다. 표현이 비슷해 두 본문 사이의 의도적인 연결을 읽는 견해가 있지만, 직접적인 인용이라고 밝혀져 있지는 않습니다.
빵을 받은 사람이 밤으로 나가다
예수님께서는 배신을 예고하신 뒤 마음이 크게 흔들리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한 뒤 마음이 크게 흔들려 증언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요한복음 13:21 · 두루새김
미리 알고 계셨다고 해서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행동을 무감각하게 바라보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배신은 예수님의 마음을 흔듭니다. 제자들은 누구인지 몰라 서로를 바라봅니다.
제자들 가운데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한 사람이 예수의 품 가까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3:23 · 두루새김
복음서는 이 자리에서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므로, 본문의 표현을 따라 사랑받던 제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합니다. 베드로는 그 제자에게 고갯짓하여 예수님께 누가 배신자인지 물어보게 합니다. 앞에서는 단호하게 반대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직접 묻지 않고 다른 제자를 통해 알아보려 합니다. 그 까닭은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랑받던 제자가 묻습니다. 「주님,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빵 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고는 빵 조각을 적신 뒤 집어 들어 시몬 이스가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3:26 · 두루새김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은 친밀하게 식탁을 함께하는 일의 일부이고, 음식을 건네는 일은 반가움과 친근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넘겨줄 사람을 알고 계시면서 그에게 직접 빵을 건네셨습니다. 조금 전 「내 빵을 먹는 사람이 나를 향해 발꿈치를 들었다」고 하신 바로 그 사람에게 빵을 주십니다.
유다가 빵 조각을 받은 뒤,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더 빨리 해라.」요한복음 13:27 · 두루새김
2절에서는 마귀가 배신할 생각을 유다의 마음에 넣어 두었다고 했고, 이제는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고 합니다. 유다의 배신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악한 세력의 활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유다의 선택과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더 빨리 해라」는 말씀도 예수님께서 악한 일을 새롭게 명령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넘겨줄 일을 진행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가 하려는 일을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 대화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유다가 명절에 필요한 것을 사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러 가는 줄 압니다. 앞 장에서 요한은 돈통을 맡은 유다가 돈을 빼돌리던 사람이었다고 밝혔지만, 제자들은 지금도 그가 공동체를 위해 일하러 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만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려는지 아십니다.
유다는 빵 조각을 받고 곧바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밤이었습니다.요한복음 13:30 · 두루새김
유다가 식탁을 떠난 때는 실제로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둠이 되풀이되어 온 방식을 생각하면 시간 설명만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8:12), 빛이 있는 동안 빛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12:35–36).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던 식탁을 떠나 밤으로 나갑니다.
이 문장을 유다의 마음속 모든 것을 설명하는 상징으로 넓힐 수는 없지만, 요한이 이 짧은 문장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유다는 빵을 받았습니다. 그 빵을 주신 분은 조금 전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식탁을 떠납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의 마음이 흔들리셨다는 같은 표현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11:33),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12:27)도 쓰였습니다. 사랑받던 제자는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과 같은 인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당시 식사는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먹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품 가까이에 기대었다는 표현은 식탁에서의 가까운 자리를 가리킵니다. 빵 조각을 건네는 일이 손님을 가장 높이 대접하는 관습이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고, 본문도 그 의미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밤이었습니다」는 원문에서 세 단어로 된 짧은 문장입니다.
배신자가 나가자 시작된 영광의 선언
유다가 나가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요한복음 13:31 · 두루새김
왜 하필 지금일까요?
유다가 나간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그의 행동은 예수님의 체포와 죽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 영광을 말씀하십니다. 앞 장에서는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아직 십자가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영광을 받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나감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어질 사건들이 결정적인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광은 배신자의 악한 행동에 있지 않고, 그 일을 겪으시면서도 맡겨진 일을 끝까지 이루시는 예수님께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폭력에 희생당하시는 사건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과 뜻을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실 때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고,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내 자녀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는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라고 말했듯이, 이제 너희에게도 같은 말을 한다.」요한복음 13:33 · 두루새김
「내 자녀들아」라는 다정한 호칭이 나오는 때는 제자들이 곧 예수님과 헤어지게 될 순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왜 자신들은 따라갈 수 없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헤어짐을 말씀하신 직후 새로운 명령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명령을 준다. 서로 사랑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요한복음 13:34 · 두루새김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 자체는 구약에도 있습니다. 레위기 19:18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새롭습니까?
가장 중요한 단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발을 씻으셨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실 것이라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새로움은 더 강한 감정에 있지 않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랑이 제자들의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기준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반드시 극단적인 희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보고, 자신을 낮추며, 자기 이익보다 상대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요한복음 13:3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제자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까요? 가르침을 얼마나 정확히 외우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으는지, 얼마나 강한 권위를 행사하는지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볍게 여기는 말씀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어떤 삶을 만들어 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시는 것은 교리의 목록만이 아니라, 예수님께 사랑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받은 제자들이 곧바로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장면이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명령은 신약성경 안에서도 이어집니다. 요한일서 3:16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으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의 명령이 단순한 친절이나 예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목숨을 내놓겠다는 제자에게 들려온 말씀
예수님께서 새 명령을 주셨을 때 베드로는 사랑에 관해 묻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으로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다.」요한복음 13:36 · 두루새김
베드로의 마음에는 제자들이 올 수 없다는 조금 전의 말씀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영원히 따라올 수 없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지금은」과 「나중에는」 사이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과 제자들이 따라가게 될 길의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왜 지금은 따라갈 수 없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요한복음 13:37 · 두루새김
허풍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베드로는 정말로 예수님과 헤어지고 싶지 않고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는 말은 「좋은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0:11)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에는 역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실 분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발 씻김 장면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먼저 가셔야 할 길을 자신도 당장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랑과 충성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그가 생각하는 사랑과 충성의 방식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과 계속 어긋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네 목숨을 내놓겠느냐? 내가 너에게 분명히 말한다. 수탉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복음 13:3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잔인할 만큼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이 말씀을 하실까요? 본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앞날을 아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아시면서도 앞에서 그의 발을 씻으셨고 지금 그에게 새 명령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이 사랑의 명령 바로 다음에 베드로의 실패를 기록한 까닭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1절에서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 「자기 사람들」은 한 사람은 배신하러 나가고, 한 사람은 목숨을 걸겠다고 장담하고도 곧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의 사랑은 그들이 얼마나 강한 결심을 할 수 있는가에서 시작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새 명령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으로 시작하며, 자신들의 약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받은 사랑을 서로에게 전하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그 장면을 끝냅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는 제자의 말이 식탁에 남아 있습니다. 그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도 남아 있습니다. 「수탉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베드로의 발은 이미 예수님께서 씻어 주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