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3–17장 · 마지막 식사와 작별

떠나시는 분이 약속하시는 머물 곳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장이 끝날 무렵에는 전혀 다른 약속이 들립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의 집에 자리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머물 것이다」라고,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머무시겠다고 하십니다.

누가 누구에게 가는 것일까요?

이 두 약속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의 중심에는 단순히 어떤 장소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는 곳에 제자들도 함께 있게 되는 관계가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2절의 「머물 곳」과 23절의 「그와 함께 머물 것이다」에 같은 명사 모네(μονή)가 사용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명사는 단 두 번 등장하며, 두 번 모두 요한복음 14장에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머물다」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잃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떠남을 통해 제자들이 이전보다 더욱 깊이 하나님과 함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하시면서 자신을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선언하시고, 아버지를 보여 주시며,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야기는 도마와 빌립, 그리고 유다의 질문을 따라 전개됩니다. 도마는 길을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는지 묻습니다. 세 질문 모두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 때문에 생긴 어려움을 드러내고, 예수님께서는 각각 대답하시면서 자신의 떠남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씩 밝혀 주십니다.

바로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수탉이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무거운 선언 직후 예수님께서 하시는 첫 말씀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라」입니다.

이 장의 약속들은 충성스럽고 흔들림 없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일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곧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읽는 시간 32분소단락 914장 본문 읽기 →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다

요한복음 14:1–4 본문 →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라. 하나님을 믿어라. 나도 믿어라.」요한복음 14:1 · 두루새김

자신을 부인할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십니다. 「흔들리지 않게 해라」(ταράσσω)에 쓰인 동사는 원문에서 앞 장의 예수님 자신의 영이 뒤흔들렸다고 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습니다(13:21). 죽음과 배신을 앞두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신 분이 이제 제자들에게 흔들리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자신도 겪으신 흔들림을 제자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읽기보다는, 제자들의 마음을 지탱할 근거를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흔들리지 말라고만 명령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예수님을 신뢰하는 일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큰 혼란은 예수님께서 더 이상 자기들 곁에 계시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따랐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물어볼 수 있었고, 위험한 순간에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십니다.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에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으로 옮겨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했겠느냐?」요한복음 14: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흔히 천국에 많은 방이나 저택이 마련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각각의 제자에게 얼마나 넓고 화려한 집이 주어지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머물 곳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2:16에서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떠나셔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일을 말씀하시므로,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에 제자들이 함께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 곁으로 데려가겠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4: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자신의 곁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목적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집에 머물 곳이 많다는 말씀은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충분하다는 설명보다 깊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일로 인해 제자들이 영원히 예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할 길이 열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천국에 새로운 방을 짓거나 장식하는 일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일과 연결되며, 그 길을 통해 제자들이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정확히 어떤 과정을 가리키는지 본문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시 와서」라는 약속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일로, 마지막에 다시 오셔서 자기 사람들을 데려가시는 일로, 또는 성령을 통해 계속 함께하시는 일로 읽혀 왔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이 약속이 가까운 날의 만남인지 먼 날의 소망인지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버리기 위해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과 함께하게 하시려고 떠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도마가 되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믿어라」는 원문의 형태만으로 사실을 말하는 표현과 명령하는 표현을 구별할 수 없어서,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도 믿어라」로 읽을 수도 있고 두 동사를 모두 명령형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두 동사를 모두 「믿어라」로 옮겼습니다. 3절의 「다시 와서」에 대해서는, 이 장 전체에 예수님의 오심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표현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오신다는 모든 말씀을 한 시점의 사건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3절의 제자들을 데려가 함께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마지막 만남의 소망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읽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길을 묻는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시다

요한복음 14:5–7 본문 →

도마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복음 14:5 · 두루새김

도마의 질문은 충분히 이치에 맞습니다.

목적지를 알아야 그곳에 이르는 길도 알 수 있습니다. 도마는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확인해야 믿겠다고 말하는 제자로 등장합니다(20:25). 그러나 여기서 그의 질문을 믿음이 없다는 표현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서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6 · 두루새김

이 구절을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관한 논쟁에서만 사용하다 보면, 도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지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시면서, 그곳에 이르는 길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가는 올바른 길을 알고 계신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 자체이시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오셨고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아버지께 이르는 길을 찾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서 오신 분이 그들을 아버지께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중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기술이나 방법이 아니라, 아버지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통해 제자들에게 길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진리」와 「생명」도 길에 덧붙여진 별개의 자격이라기보다 서로를 깊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이신 까닭은 아버지를 참되게 드러내시는 분이기 때문이고, 생명이신 까닭은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생명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가 누구신지 알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며, 아버지께 나아가게 됩니다.

요한복음 1:18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에 계신 하나뿐인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고 말합니다. 14:6의 선언은 그 서두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인간이 찾아 나서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려 주시는 분이 사람들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말씀은 다른 길을 분명히 배제하는 형식을 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길 가운데 자신도 하나의 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 이르는 길로서 자신이 유일하시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을 놓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 다른 종교의 위치,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활동의 범위 등에 관한 신학적 논의가 이어져 왔지만, 이 한 구절만으로 그런 문제의 모든 세부 사항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의 직접적인 관심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제자들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잃게 되는가요? 예수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제자들이 외워 두어야 할 복잡한 경로나 가르침의 목록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시라면, 아버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다면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안다. 또 그분을 보았다.」요한복음 14:7 · 두루새김

이 절은 사본에 따라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알아 가게 된다는 약속으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아버지도 알지 못했다는 책망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든 예수님을 아는 일과 아버지를 아는 일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빌립이 반응합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에는 실제로 중요한 사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 읽기에서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는 조건과 아버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미래의 결과가 이어지며,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라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다면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로 옮겼습니다. 일부 사본의 읽기에서는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과거를 가정하는 조건으로 이해되어 책망의 성격이 강해집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시다

요한복음 14:8–11 본문 →

빌립이 말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충분합니다.」요한복음 14:8 · 두루새김

빌립의 요청에는 이해할 만한 배경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3:18에서 모세는 여호와야훼께 여호와야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선하심을 모세 앞에 지나가게 하시겠다고 하시지만,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보고 살아남을 사람은 없다고도 하십니다(출 33:19–23). 빌립의 요청도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이런 갈망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셨으니, 그 아버지를 직접 보여 주시면 충분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르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느냐?」요한복음 14: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특별한 환상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지금까지 빌립이 보아 온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십니다. 빌립은 오랫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았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동일한 한 인격이시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아버지를 계속 구별하십니다. 자신은 아버지께로 가시고, 아버지는 성령을 보내시며, 자신은 아버지께 청하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10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시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일을 하신다.」요한복음 14:10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서로 이어진 관계를 설명하는 근거로 자신의 말씀과 행동을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빌립이 아버지를 보고 싶다면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신 말씀과 행동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셨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셨을 때, 눈먼 사람의 눈을 여셨을 때,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을 때, 그 일들을 통해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났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하시는 모습에서, 죄인과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시는 행동에서 아버지의 뜻과 성품을 알아보게 됩니다.

빌립이 요구한 것은 이미 그가 경험한 것 안에 주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갈망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벗어난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보여 주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제대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이르는 중간 안내자가 아니라, 그 길의 목적이신 아버지를 자기 안에서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내 말을 믿어라. 그렇지 못하겠다면,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복음 14:11 · 두루새김

말씀을 믿기 어렵다면 지금까지 본 일들을 통해서라도 믿으라는 데에,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인내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약속을 하십니다. 제자들도 자신이 하시던 일을 할 것이며, 심지어 더 큰 일들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한다는 뜻

요한복음 14:12–14 본문 →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도 내가 하는 일들을 할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일들도 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4:1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기적의 규모를 비교한다면 무엇이 그보다 더 큰 일이 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제자들이 더 놀라운 기적을 행한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일이 제자들을 통해 더 넓은 지역과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간다는 뜻으로, 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성령의 오심 이후에 구원의 일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읽혀 왔습니다. 이 차이는 「더 큰 일」의 무게가 제자들의 능력에 놓이는지, 예수님의 일이 넓어지는 데 놓이는지를 가릅니다.

이 갈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유,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입니다. 제자들이 더 큰 일을 하게 되는 까닭은 그들이 예수님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제자들의 활동을 약화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예수님의 일을 이어 갈 수 있게 되는 계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고, 이어서 이 장에서는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이 흐름 안에서 더 큰 일들이란 기적의 규모가 커지는 것을 넘어,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더욱 널리 전해지는 일을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5:36; 10:25).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을 이끄는 역할이 제자들에게 넘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 내가 이루어 주겠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4:13 · 두루새김

제자들은 일을 하지만, 예수님께서 여전히 그 일을 이루시는 분으로 활동하십니다. 아버지께로 가셨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기도와 활동을 통해 계속 일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을 붙이면 어떤 요청이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일까요? 이 구절은 그렇게 읽기 쉽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목적을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와 분리될 수 없으므로, 이 약속을 원하는 것을 무제한으로 얻는 기도의 공식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이 구절은 구한 결과가 우리가 예상한 방식이나 시점에 언제나 나타난다고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내게 구하면 내가 이루어 주겠다.」요한복음 14:14 · 두루새김

「내게」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요청을 받으시는 분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눈에 보이는 방식의 동행은 끝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제자들을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곧 성령에 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더 큰 일들」에 대해 한 해석은 이 말씀을 더 뛰어난 기적으로 한정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땅에서 활동하실 때의 지역과 시간의 한계를 넘어 그 일이 넓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반면 다른 해석은 요한복음 자체의 문맥에서 「더 큰 일들」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14절의 「내게」는 일부 사본에 빠져 있지만, 중요한 초기 사본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또 다른 분

요한복음 14:15–21 본문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일을 이어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뒤, 사랑에 관한 말씀으로 넘어가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명령을 지킬 것이다.」요한복음 14:15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명령을 지켜라」는 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원문은 사랑한다는 조건과 명령을 지킬 것이라는 미래의 결과를 연결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은 단순한 감정이나 고백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명령을 지킨다는 말은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서로의 관계 안에서 살아 내는 일과도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새로운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너희를 도와주실 다른 분을 주실 것이다. 그분이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4:16 · 두루새김

「너희를 도와주실 다른 분」에 해당하는 단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이 단어는 곁으로 부름받아 돕는 사람, 특히 법적인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변호하거나 그 사람의 입장을 대신 말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어서, 변호자, 대변자, 돕는 분, 위로하는 분 등으로 번역되어 왔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14:16, 14:26, 15:26, 16:7에서 성령을 가리키고, 요한일서 2:1에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단순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위로자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분은 제자들 곁에서 그들을 도우시고, 진리를 알게 하시며,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다른」 분이라는 말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도우시고 이끌어 오셨으며, 이제 다른 분이 그 역할을 이어 가실 것임을 보여 줍니다. 눈에 보이게 함께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떠나시지만, 아버지께서 주실 다른 분은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분이 너희 곁에 머무시고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4:17 · 두루새김

성령께서는 제자들 곁에 계시는 분일 뿐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실 분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어 다니며 말씀을 듣고, 질문하고 배우며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사건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눈에 보이는 스승이 곁에 계시던 관계가,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과 생명이 제자들 안에 머무는 관계로 깊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진리이시라고 말씀하셨고, 이제는 아버지께서 보내실 분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관계없는 새로운 진리를 알려 주시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아버지의 진리를 제자들이 알고 그 안에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말을 모든 인간이 처음부터 성령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는 선언으로 넓혀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신 대상이기도 하고(3:16), 빛을 거절하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 세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두 번째 의미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은 예수님께서 보내실 진리의 영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곁에 머무시고 안에 계시는 관계 안에서 그분을 알게 됩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 너희에게 돌아오겠다.」요한복음 14:1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정확히 짚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께 의지하며 살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떠남은 버려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에게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오심은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일로도, 성령의 오심으로도 읽히며, 두 의미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본문이 이 가운데 정확히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떠남을 제자들과의 관계가 끝나는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요한복음 14:20 · 두루새김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자신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도 그 관계 안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그 관계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로만 남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게 되며,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계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거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완전히 동등하게 참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일은 멀리 계신 분에 관한 정보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내 명령을 간직하고 지키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받을 것이다.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요한복음 14:2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순종을 나누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 먼저 충분히 순종해서 성과를 쌓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이제 그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말씀하십니다. 다만 본문은 사랑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저절로 보장되는 관계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제자들은 상당히 위로를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가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돌아오겠다」를 부활하신 뒤의 나타나심으로 읽는 근거는, 바로 다음 절에서 세상은 예수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본다고 말씀하시고 요한복음 20장에 실제로 그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읽는 근거는 앞뒤 문맥이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두 의미를 함께 보는 해석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시고 성령을 통해 계속 함께하실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아버지의 집을 말씀하시던 분이 제자들의 집에 오시다

요한복음 14:22–24 본문 →

이번에는 이스가리옷이 아닌 유다가 질문합니다.

이스가리옷이 아닌 유다가 물었습니다. 「주님, 무슨 일이 있기에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려 하시면서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려 하십니까?」요한복음 14:22 · 두루새김

앞 장에서 이스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넘기기 위해 식탁을 떠났습니다. 이제 다른 유다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온 세상이 알아보도록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 더 확실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으실 것인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머물 것이다.」요한복음 14:23 · 두루새김

유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실 것인지 물었고, 눈에 보이는 나타남을 기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말씀을 지키는 관계 안에서 자신과 아버지께서 사람에게 오셔서 함께 머무시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2절의 「머물 곳」과 같은 명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움직임의 방향은 반대입니다.

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러 가십니다.

23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자리를 잡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은 먼 미래에 도착할 장소에 관한 약속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에 있는 제자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일도 포함합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머무시겠다고 하신 약속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25:8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만들게 하시면서 백성 가운데 머물겠다고 말씀하시고, 레위기 26:11–12에서는 자신이 머무실 곳을 백성 가운데 두고 그들 사이에서 다니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한복음 14:23은 그 약속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머무신다는 주제는 분명히 연결됩니다.

다만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머무실 곳을 마련하는 예언자나 지도자로만 등장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함께 제자들에게 오셔서 머무시는 분으로 자신을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이 주어지는 자리는 예배당이나 성전의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공동체나 예배가 필요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예수님과의 관계는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공동체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이다.」요한복음 14:24 · 두루새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은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빌립에게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고, 이제는 자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아버지와 아들이 찾아오셔서 머무십니다.

이렇게 14장의 처음에 등장했던 아버지의 집과 머물 곳의 약속이 더 넓고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께로 갈 길을 약속받을 뿐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자리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하실 것을 약속받습니다.

말씀을 잊지 않게 하시는 분, 평화를 남기시는 분

요한복음 14:25–27 본문 →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이 말씀들을 전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까지 들은 말씀을 얼마나 이해했을까요? 도마는 길을 모른다고 했고,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으며, 유다는 왜 자신들에게만 나타나려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너희를 도와주실 분,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다. 또 내가 너희에게 한 모든 말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4:26 · 두루새김

성령께서는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을 단순히 기억력이 좋아진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었고, 문제는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22에서는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뒤 제자들이 이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다고 기록하고, 12:16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일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복음서는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설명을 되풀이합니다.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는 약속은 그러한 이해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연결해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모든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자신의 생각이나 기억을 언제나 오류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넓혀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대상은 예수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성령께서 성경을 이해하도록 도우신다고 믿을 수 있지만, 그 적용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증언해야 했던 제자들에게 주어진 약속과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과 관계없는 새로운 종교적 경험의 시작도, 예수님께서 안 계신 자리를 잠시 메우는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이 제자들의 삶 안에서 이어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겨 준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나는 세상이 주는 것처럼 주지 않는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라. 두려워하지 마라.」요한복음 14:27 · 두루새김

1절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라」가 여기서 다시 들립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 때문에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면, 이제 그들은 떠나신 뒤에도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이 머무실 것이라는 약속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런 위험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곧 떠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평화를 주신다고 하시니, 이 평화가 겉으로 안전한 상태보다 깊은 것임은 문맥에서 분명합니다.

상황이 평화롭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실 분이 계시기 때문에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고통을 느끼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죽음과 배신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셨지만, 두려움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두려움이 제자들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평화를 남기십니다.

세상은 보통 위험을 없애거나 안전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위험이 다가오는 순간에 평화를 주십니다.

그 평화의 근거는 상황의 변화보다 예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평화는 히브리어 성경이 말하는 평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말은 단순히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를 넘어 온전함과 평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포함할 수 있는 풍부한 표현입니다. 다만 요한복음의 원문은 그리스어로 쓰였으므로, 히브리어 낱말의 모든 의미를 이 구절에 저절로 넣을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시다 — 떠남을 기뻐해야 하는 까닭

요한복음 14:28–31 본문 →

예수님께서는 다시 자신의 떠남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나는 떠났다가 너희에게 돌아오겠다』라고 한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할 텐데.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시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4:28 · 두루새김

왜 제자들이 예수님의 떠남을 기뻐해야 할까요? 제자들에게 그 떠남은 소중한 분을 잃는 두렵고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목적 없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이루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일로 설명하십니다. 자신이 안 계셔서 겪을 슬픔만 바라보지 말고, 아버지께로 가시는 일의 의미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시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신학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한 견해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권위와 사명을 받으시며 아버지께 순종하신다는 점을 들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본질적으로 높고 낮음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견해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상태와 아버지께서 영광 가운데 계시는 상태의 차이를 가리킨다고 보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일을 예수님께서 받으실 영광과 연결합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에서는 이 말씀을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님이신 본질에서는 동등하다는 고백과 함께 이해해 왔지만, 그 안에서도 이 표현이 정확히 어떤 관계를 설명하는지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하나라는 말씀(10:30)과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말씀을 모두 담고 있으므로, 28절의 한 표현만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과 영광이 아버지에게서 온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일은 패배나 실패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이루시는 길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지금 너희에게 말해 두었다. 일이 일어날 때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4:2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죽으시면 제자들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가셔야 할 길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리 알려 주신 것은 미래를 맞히는 능력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앞으로 겪을 사건을 믿음 안에서 이해하도록 준비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와 오래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 세상의 지배자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나를 지배할 권리가 없다.」요한복음 14:30 · 두루새김

1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배자가 밖으로 내쫓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31). 그 지배자가 이제 오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죽으시는 사건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이 「그에게는 나를 지배할 권리가 없다」로 옮긴 말은 문자 그대로는 「내 안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예수님께서 세상의 지배자에게 속해 계시거나 그 지배 아래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은 문맥에 들어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가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으실까요? 왜 위험이 가까워지는데도 자신이 가셔야 할 길을 피하지 않으실까요?

「하지만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명령하신 그대로 행한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한복음 14:31 · 두루새김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면 자신의 명령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마지못해 따르시는 분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빌립에게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세상이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행동이 향하는 곳은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신 자신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악한 세력이 예수님을 이겼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고 계시면서도 아버지의 명령대로 행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시는 이유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배우게 될 사랑은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 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지 않으시는 일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시어 그 명령대로 행하시고 자신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부르십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제자들의 관계가 사랑과 순종 안에서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30절의 「아무것도 없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배자가 예수님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뜻으로, 예수님을 지배할 권한이 없다는 뜻으로, 또는 예수님 안에 자신이 붙잡고 이용할 악한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31절의 「여기를 떠나자」에도 풀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15장부터 17장까지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이어지고, 18:1에 이르러서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셨다고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듣고 일어났지만 떠나기 전에 나머지 말씀을 들었다고 보는 해석, 자리를 떠나 길을 걸으시면서 15–17장의 말씀을 하셨다는 견해, 글의 구성과 편집 과정을 살펴 15–17장이 나중에 더해졌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관점이 있지만, 이러한 가능성을 본문 자체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요한복음 14:1–31 본문 →

요한복음 14장의 마지막 문장은 짧습니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이 짧은 명령이 이제 앞에서 하신 모든 말씀과 연결되어 들립니다.

이 모든 약속은 예수님께서 떠나셔야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아버지께로 데려가실 길을 여시려고 떠나시고, 아버지와 함께 제자들에게 오셔서 머무십니다. 가시는 약속과 오시는 약속은 서로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헤어짐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헤어짐이 있어도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아직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시고 홀로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돌아오시겠다고 하셨고, 그들 안에 머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리에서 떠날 준비를 하십니다. 제자들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들이 앞으로 무엇을 겪게 될지는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디에서 오셨고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