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3–17장 · 마지막 식사와 작별
포도나무에 머물며 세상으로 뻗는 가지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시고, 제자들을 가지라고 부르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듯이 제자들도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뜻밖의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다. 또 너희에게 일을 맡겼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남게 하려는 것이다」(16절).
처음에는 머물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가라고 하십니다.
머물러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는데, 가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서로 반대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거듭 말씀하신 직후,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며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이 미움을 불러올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왜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이 장에는 서로 대조되는 두 관계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반면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했으며 제자들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말씀은 「나는 참된 포도나무이고,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는 선언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시면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기 전에 그들의 삶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먼저 알려 주십니다.
그들의 생명은 그들이 맺는 열매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머무는 포도나무에서 비롯됩니다.
참된 포도나무라는 말씀에 담긴 이스라엘의 오랜 이야기
「나는 참된 포도나무이고,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복음 15: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단순한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된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필 포도나무일까요?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이미지였습니다. 시편 80:8–11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가져와 다른 민족들을 물리치고 심으셨다고 노래합니다. 그 포도나무는 이집트에서 구출되어 약속의 땅에 자리 잡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시편의 뒤쪽에서는 울타리가 무너지고 들짐승들이 나무를 해치는 모습을 탄식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심으신 포도나무를 다시 돌보아 주시기를 간청합니다(시 80:12–19). 이사야 5:1–7에서 하나님께서는 좋은 땅에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지만, 기대했던 정의와 의로움 대신 피 흘림과 고통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나왔습니다. 예레미야 2:21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심은 좋은 포도나무가 낯선 포도나무처럼 변해 버렸다고 탄식하십니다.
이 본문들의 관심은 이스라엘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심고 돌보셨지만, 그들이 언약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참된 포도나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해 기대하셨던 열매가 이제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맺힐 것이라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포도나무에 담겼던 하나님의 기대와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농부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홀로 자라시며 가지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나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에는 그 나무를 돌보시는 아버지의 활동이 함께 있습니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아버지께서 떼어 내신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이 손질하신다.」요한복음 15:2 · 두루새김
아버지는 두 종류의 가지를 서로 다르게 다루십니다. 원문에서 「떼어 내신다」(αἴρω)와 「깨끗이 손질하신다」(καθαίρω)는 서로 다른 어근에서 온 단어들이지만 소리가 겹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소리의 단어들을 나란히 놓아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르게 다루어지는지 강조하십니다.
여기에는 해석상의 갈림도 있습니다. 「떼어 내신다」로 옮긴 아이로는 문맥에 따라 들어 올리다, 가져가다, 제거하다 등의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열매 없는 가지를 잘라 없애는 행동으로 읽는 견해는 6절에서 가지가 밖에 버려지고 불에 던져지는 장면을 근거로 삼습니다. 처진 가지를 들어 올려 다시 열매 맺도록 돌보는 행동으로 읽는 견해는 이 낱말의 뜻과 농부가 가지를 돌보는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다만 6절까지 함께 읽으면 제거한다는 해석에 더 직접적인 문맥상의 근거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열매 맺는 가지도 그대로 두시지 않고,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손질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도 계속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가져와 신자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실패가 하나님께서 더 많은 성과를 얻기 위해 주시는 가지치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포도나무를 돌보는 농부의 일을 말씀할 뿐,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해졌다.」요한복음 15:3 · 두루새김
3절의 「깨끗해졌다」(καθαρός)는 원문에서 2절의 「깨끗이 손질하신다」와 어근이 같습니다. 농부가 가지를 깨끗이 손질하신다는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깨끗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많은 열매를 맺었으므로 깨끗해졌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열매가 깨끗해진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을 깨끗하게 하셨고, 이제 그들은 그분 안에 머물면서 열매를 맺도록 부름받습니다.
열매를 만들어 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물러라는 말씀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물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물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요한복음 15:4 · 두루새김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열매를 많이 맺으라고 명령하시기보다 자신 안에 머물라고 하실까요?
가지는 자기 힘으로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나무에서 공급받는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열매는 실제로 가지에 맺히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명은 가지 자체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자신의 관계가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서로 사랑하며 세상 앞에서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제자들의 독립적인 능력에 맡기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께서 그들 안에 머무시는 관계가 모든 활동의 바탕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5: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가지들의 무능력을 먼저 꾸짖지 않으십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은 가지의 도덕적인 결함이 아니라 가지라는 존재의 본래 성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떠나서도 노력하면 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분과 떨어져서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다만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일상생활의 어떤 행동이나 선행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무제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뜻하시는 열매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머무르다」는 공간적으로 한곳에 머무는 일뿐 아니라 어떤 관계나 상태가 이어지는 것도 표현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함께 머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14:23), 이제 제자들에게 자신 안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표현을 막연한 신비적 경험으로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7절에서는 자신의 말이 제자들 안에 머무는 것을 말씀하시고, 9–10절에서는 자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과 명령을 지키는 일을 연결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그분이 보여 주신 사랑을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많이 맺어야 자신의 가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 안에 머무는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는 예수님께 속하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생명을 공급받는 관계가 낳는 결과입니다.
물론 이 사실이 열매 없는 삶에 대한 경고를 지우지는 않습니다.
「누구든지 내 안에 머물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사람들은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운다.」요한복음 15:6 · 두루새김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말라 버리고,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결국 불에 던져집니다. 말라 버린 가지가 불에 던져지는 모습은 심판의 의미를 지닌 경고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또 구원받았던 사람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인지를 두고는 해석이 갈립니다. 실제로 예수님께 속했다가 그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에 대한 경고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반면 겉으로는 예수님께 속한 것처럼 보였지만 참된 생명의 관계에 있지 않았던 사람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구원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판단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경고하시는지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떠난 채로 그분이 주시는 생명을 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구해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요한복음 15:7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떠나서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머물고 자신의 말이 그들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기도에 대한 단순한 성공 공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머무는 사람의 바람 자체가 그분의 뜻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고 내 제자가 되는 것, 바로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셨다.」요한복음 15:8 · 두루새김
열매의 궁극적인 목적은 가지가 얼마나 훌륭한지 증명하는 데 있지 않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농부이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며, 제자들은 가지입니다. 가지들이 맺는 열매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분은 그들을 돌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 이미지가 실제로 어떤 삶을 가리키는지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그 설명의 첫 단어가 사랑입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장면은 에스겔 15:1–8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목재가 유용한 물건을 만드는 데 쓰이기 어렵고, 불에 타 버린 포도나무는 더욱 쓸모가 없다고 말씀하시며, 언약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던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설명하십니다. 또 13장에서 유다가 제자들의 식탁을 떠난 장면은 이 경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학적 배경이 되지만, 6절이 유다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포도나무에서 흐르는 생명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복음 15:9 · 두루새김
앞에서는 가지가 나무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에 머무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시는 관계와 연결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그 아들이 제자들을 사랑하시며, 제자들은 그 사랑 안에 머물도록 부름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은 제자들이 노력으로 얻어 내야 할 대상에 앞서,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입니다.
「너희가 내 명령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명령을 지켜 왔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과 같다.」요한복음 15:10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순종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자신도 아버지의 명령을 지켜 오셨으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명령을 지키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순종은 사랑을 얻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 계속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유로운 사랑보다 의무적인 복종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론적인 답 대신 그 말씀을 하신 목적을 밝히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너희 기쁨이 가득 차게 하려고 이 말을 너희에게 했다.」요한복음 15:11 · 두루새김
머무는 일과 명령을 지키는 일에 관한 모든 말씀의 목적이 기쁨입니다. 여기서도 출발점은 제자들의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계십니다. 가까운 제자가 자신을 배신했고, 다른 제자들도 곧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이 기쁨은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풀리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예수님의 삶과 연결된 기쁨입니다. 고통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누리게 될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움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미움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사랑과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이 앞으로 마주할 세상의 반응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자신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는 이유
「내 명령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요한복음 15:1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13장에서 주신 새 명령과 같지만, 포도나무 비유 뒤에 놓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가지들에게 스스로 좋은 열매를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그 사랑 안에 머물면서 서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1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사랑을 설명하시면서 감정의 깊이나 말의 아름다움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목숨을 내놓는 행동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명령하는 대로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요한복음 15:14 · 두루새김
명령을 주시는 분과 명령을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제자들이 모든 면에서 동등한 관계가 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명령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을 노예가 아니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나는 더는 너희를 노예라고 부르지 않는다. 노예는 자기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모두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5:15 · 두루새김
여기서 친구와 노예를 구별하는 기준은 지식입니다. 노예는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친구에게는 자신의 뜻과 계획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과 자신이 행하시는 일을 제자들에게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로 남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앞의 대화만 보아도 그들은 여전히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친구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신뢰하며 아버지의 뜻을 알려 주시는 관계 안으로 초대하시고, 자신의 일에 참여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다. 또 너희에게 일을 맡겼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남게 하려는 것이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 아버지께서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5:16 · 두루새김
이 말씀을 구원받을 사람이 영원 전에 어떻게 결정되었는가에 관한 논쟁의 구절로만 읽으면, 바로 앞의 친구라는 말씀과 뒤의 열매에 관한 목적을 놓치기 쉽습니다.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내고 자격을 인정받아 친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지들이 자신 안에 머물러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제 제자들이 가서 열매를 맺도록 일을 맡기셨다고 하십니다. 머묾과 감은 서로 반대되는 행동이 아닙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머물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을 위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매」는 무엇일까요? 16절의 「가서」라는 표현과 마지막 절의 증언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일도 열매의 의미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의 흐름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된 열매는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을 명령을 지키는 것과 연결하셨고, 그 명령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따라서 열매를 숫자로 측정되는 교회의 성장이나 전도 성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제자들의 관계와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열매가 남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이 명령들을 너희에게 주는 것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5:17 · 두루새김
12절에서 이미 하신 말씀입니다. 첫 번째 명령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방식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명령은 그들이 예수님께 선택받았고, 친구로 불렸으며, 가서 남는 열매를 맺도록 일을 맡았다는 말씀 뒤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맡았는지 설명하신 뒤, 그 모든 것을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 안에 다시 모으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뀝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뒤에 세상의 미움이 등장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해 왔다는 것을 알아라.」요한복음 15:18 · 두루새김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고,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왜 미움을 받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제자들의 잘못이나 부족함에서 찾지 않으시고, 자신이 먼저 미움을 받으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언제나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신 세상(3:16)이 있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며 예수님께 적대적인 세상이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후자, 곧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께 맞서는 인간 세계의 모습이 중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모든 비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그리스도인을 미워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자체에도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세상은 자기 사람인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냈다. 그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요한복음 15:1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제자들을 뽑으셨다고 하셨고, 이제는 그들을 세상에서 뽑아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고, 앞으로 그 세상에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속한 분은 예수님이시고, 삶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구별은 세상을 피하거나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해라. 『노예는 자기 주인보다 높지 않다.』 그들이 나를 박해했다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 내 말을 지켰다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복음 15:20 · 두루새김
이 문장을 앞부분만 읽으면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오직 미움만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말이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함께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말씀에도 같은 종류의 반응이 나타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사람들에게 반대받는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올바르게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잘못이나 무례함, 불의한 행동 때문에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비판까지 모두 예수님을 위한 박해라고 주장한다면 본문의 의미를 왜곡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움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고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한다는 이유로 받는 반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이 모든 일을 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5:2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는 미움을,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문제와 연결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적대적인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성경을 연구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알아보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오셨고 아버지의 일을 행하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신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드러내시는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오지도 않고 그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다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죄를 변명할 수 없다.」요한복음 15:2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아무런 죄도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이미 세상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했습니다. 이 문맥에서 문제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셨는데도 예수님을 거절한 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거절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다른 누구도 하지 않은 일들을 했다. 내가 그 일들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나와 내 아버지를 보고도 미워했다.」요한복음 15:2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말씀뿐 아니라 자신이 행하신 일들을 증거로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표징들은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누구신지 보여 주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일을 보고도 예수님과 아버지를 거절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미움에는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미워했다』라는 말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5:25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시편 35:19과 시편 69:4의 탄식과 연결됩니다. 두 시편은 부당한 적대와 고난을 겪는 시인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의 생애만을 상세하게 예언한 본문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탄식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과 연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까닭 없이」라는 표현을 그들에게 아무런 심리적·정치적 동기도 없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기들의 권위와 지위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예수님께 대한 적대와 박해를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미움이 정당한 근거를 지니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미움을 말씀하시면서도 그 미움에 보복하라거나, 적대적인 사람들을 똑같이 미워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바로 다음 절에서 새로운 분을 소개하십니다.
진리의 영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35편에서 시인은 부당한 원수들이 자신을 향해 악의를 품고 기뻐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시편 69편에서도 시인은 까닭 없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탄식합니다.
미움으로 맞서지 않고 진리를 증언하게 하시는 분
「너희를 도와주실 분을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분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시다. 그분이 오시면 나에 관해 증언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5:26 · 두루새김
이 장은 포도나무로 시작했지만 성령의 증언으로 끝납니다.
세상의 미움은 예수님과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바로 그 상황 속에서 진리의 영이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실 것입니다. 「너희를 도와주실 분」(παράκλητος)으로 옮긴 말은 변호자나 대변자, 돕는 분을 가리킬 수 있는 단어인데, 이 문맥에서는 특별히 증언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이것을 법정의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제자들을 박해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밝히고 예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이라는 표현은 후대에 성령께서 영원히 누구에게서 나오시는지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본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5장의 직접적인 문맥은 성령의 영원한 존재 방식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 성령을 보내실 것이며 그 성령께서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너희도 나에 관해 증언한다.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어 왔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5:27 · 두루새김
성령께서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십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에 관해 증언합니다.
그러나 두 증언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으로서 증언하십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을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에 증언합니다. 그들이 전할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라, 자신들이 함께했던 예수님에 관한 증언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이미 증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문장으로도, 앞으로 증언하라는 명령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4:26에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신다고 하셨고, 15:26에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두 말씀 모두 성령의 오심을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에 연결하지만, 여기서 성령께서 영원히 누구에게서 나오시는지를 어디까지 짐작할 수 있는지는 신학적 견해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 27절의 「증언한다」에 쓰인 마르튀레이테는 형태상 직설법과 명령법이 같습니다. 직설법으로 읽으면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어 온 증인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뒤따르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어 왔기 때문이다」라는 이유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명령법으로 읽으면 앞으로 그들이 맡아야 할 증언의 사명이 강조되며, 이 가능성도 문법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머물며 세상으로 뻗는 가지
이 마지막 말씀을 읽고 나면 처음의 포도나무가 새롭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 안에 머물라고 하셨지만, 그 머묾은 세상과 관계를 끊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가지들은 나무에 붙어 생명을 공급받고, 농부의 손질을 받으며, 가서 남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을 품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한 세상의 미움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받은 명령은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들이 받은 사명은 자신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절에서 제자들은 이제 세상 앞에 서게 될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일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 닥칠 미움과 박해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홀로 내보내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누구를 증언할 것인지 분명히 말씀하시고, 그 증언의 시작이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오실 진리의 영께 있다는 사실도 알려 주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