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21장 · 바닷가에서 다시 만남
다시 부르시는 예수님
밤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이 아침에 뭍으로 돌아옵니다. 바닷가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습니다. 빵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하셔서 물고기 백쉰세 마리를 잡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물고기를 가져오기 전부터 바닷가에는 이미 생선과 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침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제자들이 자기 일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야기는 훨씬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왜 세 번이나 물으실까요?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하시기 때문일까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던 잘못을 공개적으로 확인시키시려는 것일까요?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양들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에게 예수님의 양들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21:19). 이것은 베드로가 처음 제자가 되었을 때 들었던 부르심과 닮아 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가,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에게 다시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실패한 제자가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를 보여 주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은 제자의 결심이 아닙니다. 실패한 제자를 찾아오시고, 먹이시고, 다시 맡기시며, 끝까지 따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입니다.
빈 그물과 바닷가에 서 계신 분
이 일들 뒤에 예수가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자기를 드러냈다. 이렇게 드러냈다.요한복음 21:1 · 본디새김
요한은 첫 문장부터 이 장의 성격을 밝힙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선언한 다음, 어떻게 드러내셨는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따라서 독자는 이제 바닷가에 나타나실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제자들보다 먼저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 속 제자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이 차이가 첫 장면의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입니다(6:1).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에게 빵과 생선을 먹이셨던 곳도 이 바다 근처였고(6:1–13), 여러 제자는 본래 이 호수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왜 이곳으로 돌아왔는지 요한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디모라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출신인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요한복음 21:2 · 본디새김
모두 일곱 사람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베드로가 먼저 움직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간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도 그대와 함께 간다.」 그들이 나가 배에 올랐다.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요한복음 21:3 · 본디새김
이 행동을 두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포기하고 과거의 직업으로 돌아갔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베드로가 제자직을 버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생계를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지 못한 채 익숙한 일을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 장에서 이미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고기를 잡으러 갔다는 사실만으로 사명을 포기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요한이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그날 밤의 결과입니다. 일곱 사람이 함께 배에 올랐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미 아침이 되었을 때 예수가 바닷가에 섰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인 줄 알지 못했다.요한복음 21:4 · 본디새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 앞에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20:14). 요한은 이번에도 왜 알아보지 못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곁들일 생선을 좀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 그들이 그에게 대답했다. 「없습니다.」요한복음 21:5 · 본디새김
‘얘들아’는 제자들을 향한 일상적이고 친근한 부름입니다. 원문의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형태여서,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가 문장의 결을 잘 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시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러면 고기를 잡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던졌다. 그리고 물고기가 많아 더는 그물을 끌 수 없었다.요한복음 21:6 · 본디새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지자 예상하지 못한 풍성한 결과를 얻습니다. 제자들의 일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얻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제 어업에서 목양으로 이어집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디베랴는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까닭은 아침의 어스름이나 배와 해변 사이의 거리 때문일 수 있지만, 본문은 그 이유를 확정하지 않습니다. ‘얘들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어린아이들이나 친근하게 부르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고기잡이는 누가복음 5:1–11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도 베드로는 밤새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자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다만 누가복음은 공생애 초기에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고 요한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장면이어서, 요한이 그 사건을 의도적으로 되풀이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을 것이라고 하셨지만,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양을 먹이고 돌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이시다」 — 알아보는 제자와 뛰어드는 제자
그래서 예수가 사랑하던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했다. 「주님이시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 벗고 있었으므로 겉옷을 둘러 동여맨 뒤 바다로 몸을 던졌다.요한복음 21:7 · 본디새김
사랑받던 제자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알려 줍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먼저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바다로 뛰어듭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먼저 알아봅니다.
다른 사람은 그 말을 듣자마자 행동합니다.
요한은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제자인지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랑받던 제자의 알아봄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인 줄 몰랐을 것이고, 베드로의 즉각적인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그의 반응을 보여 줍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가기 위해 옷을 갖춰 입고 물에 뛰어듭니다. 왜 굳이 그랬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에 단정하게 나아가려는 행동이었을 수 있지만, 확정적인 의도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배가 뭍에 닿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반면 다른 제자들은 배에 남아 물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옵니다. 그들은 뭍에서 약 90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먼저 가고 싶어 바다로 뛰어들고, 나머지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책임지고 뭍으로 돌아옵니다.
이 모습은 앞서 베드로가 보였던 행동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고(13:37),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에는 칼을 뽑았습니다(18:10). 그러나 대제사장의 뜰에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18:17, 25, 27).
이제 그는 다시 예수님을 향해 서둘러 나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 그 사랑에 관해 직접 물으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서둘러 나아가는 것과, 예수님께서 맡기시는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열정을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열정이 향해야 할 방향을 새롭게 정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아침을 먹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 이미 준비된 식탁과 백쉰세 마리 물고기
그래서 그들이 뭍에 내렸을 때 숯불이 피워져 있고 그 위에 생선이 있고 빵도 있는 것을 보았다.요한복음 21:9 · 본디새김
‘숯불’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두 번, 둘 다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첫 번째는 18:18,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에서 숯불을 쬐며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대답했던 장면입니다. 두 번째가 바로 이곳,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신 바닷가입니다.
한 숯불 곁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다른 숯불 곁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요한은 베드로가 숯불 냄새를 맡고 그날 밤을 떠올렸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같은 단어가 매우 다른 순간에 등장하는 두 장면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는 베드로가 노예들과 경비병들 곁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지만, 바닷가의 숯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음식을 주시는 자리입니다.
실패했던 장소와 다시 부름받는 장소가 같은 이미지로 이어집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방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너라.」요한복음 21:10 · 본디새김
본문은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식탁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수고로 얻은 것을 보탭니다. 그 물고기조차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도움이 없어서 아침을 준비하지 못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를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주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자신의 것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 점은 뒤에서 베드로에게 맡겨질 사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일에 제자들이 참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 큰 물고기 백쉰세 마리가 가득 든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렇게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요한복음 21:11 · 본디새김
백쉰세 마리.
이 숫자의 의미를 두고 오래전부터 여러 해석이 제시되었지만, 요한은 왜 백쉰세 마리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잡은 물고기를 세어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요한이 분명히 강조하는 것은 다른 사실입니다.
물고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 아무도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감히 캐묻지 못했다. 주님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21:12 · 본디새김
이미 예수님인 줄 알고 있다면 왜 굳이 누구인지 묻지 못했다고 기록할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앞에서 함부로 질문하지 못합니다. 정확히 무엇이 그들을 주저하게 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예수가 와서 빵을 집어 들어 그들에게 주었다. 생선도 마찬가지로 주었다.요한복음 21:13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집어 감사드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며, 생선도 그렇게 하셨습니다(6:11). 6장에서는 수많은 무리의 배고픔을 채우셨고, 21장에서는 밤새 수고한 제자들에게 아침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자기 제자들의 아침 식사도 돌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다시 만나자마자 세 번의 부인을 따져 묻지 않으십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음식을 주십니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베드로에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숯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숯불 곁에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숯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안트라키아입니다. 153에 관해 어떤 해석은 당시 알려진 물고기의 모든 종류를 나타내어 복음이 모든 민족을 품는다는 뜻으로 읽지만, 고대인들이 정확히 153종의 물고기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은 독립적인 역사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153이 1부터 17까지 모든 자연수를 더한 값, 곧 17번째 삼각수라는 데서 17에 율법과 은혜 등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산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요한이 바로 그 의미를 의도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찢어지지 않은 그물을 교회가 많은 사람을 품으면서도 하나 됨을 유지하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21장 자체는 그것을 교회의 일치라고 직접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넓은 신학적 문맥에서 읽는 해석입니다. 이 식사를 성찬의 상징으로 읽는 견해도 있지만, 요한은 여기서 성찬의 제정이나 특별한 의식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6장의 표징과의 연결에 먼저 주목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세 번의 질문
그래서 그들이 아침을 먹었을 때 예수가 시몬 베드로에게 말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다. 「예,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당신이 알고 계십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내 어린양들을 먹여라.」요한복음 21:1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를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1:42에서 안드레가 시몬을 데려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시고 앞으로 게바, 곧 베드로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실패했기 때문에 ‘반석’이라는 이름을 빼앗겼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첫 만남과 마지막 만남에 같은 호칭이 등장합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고, 이제는 그가 무엇을 했는지 모두 아시는 가운데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들’은 누구일까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 배와 그물 같은 이전 생업보다 더 사랑하느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문맥에서는 첫 번째 해석이 특히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걸려 넘어져도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막 14:29),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장담했습니다(요 13:37).
그런데 실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겸손해졌다는 확정적인 심리 묘사로 만들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대답에는 비교하는 주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을 예수님의 아심에 맡깁니다.
예전에는 ‘내가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알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자기 양들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양들’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어린양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맡겨지는 사람들은 베드로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들이고, 베드로는 그 양들을 맡아 먹이는 사람으로 부름받습니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두 번째로 다시 말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다. 「예,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당신이 알고 계십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내 양들을 목자로서 돌보아라.」요한복음 21:16 · 본디새김
이번에는 ‘이들보다 더’라는 비교가 사라집니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말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가 세 번째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했으므로 슬퍼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당신이 아십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내 양들을 먹여라.」요한복음 21:17 · 본디새김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 번 그의 사랑을 물으십니다.
요한은 ‘세 번 부인했으므로 세 번 물으셨다’라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같은 제자에게 세 번 반복되는 질문은 18장의 세 번의 부인을 떠올리게 하고, 두 장면이 모두 숯불 곁에서 일어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그 연결은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화를 세 번 부인한 죄를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갚는 절차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질문하시면서 세 번 모두 일을 맡기십니다. 사랑을 확인하시는 일과 사명을 맡기시는 일이 함께 일어납니다.
세 번의 질문에서 ‘사랑하다’라는 동사가 바뀌는데, 이를 높은 사랑과 낮은 사랑의 차이로 읽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두 단어를 그렇게 엄격하게 구분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본문이 확실히 강조하는 것은 세 번의 질문과 세 번의 위임입니다. 「내 어린양들을 먹여라」, 「내 양들을 목자로서 돌보아라」, 「내 양들을 먹여라」.
이 명령에는 요한복음 10장의 좋은 목자 이야기가 깊이 연결됩니다. 좋은 목자는 양들을 알고, 이름으로 부르며,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10:3, 11, 14–15). 베드로가 따라야 할 목자의 모습은 양들을 자기 소유로 삼아 이용하는 목자가 아니라, 양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그들을 보호하며 자기 자신보다 양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목자입니다.
세 번째 대답에서 베드로는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자신의 사랑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대신 예수님의 아심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실패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양들을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용서한다’라는 문장을 직접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의 자리에서 다시 양들을 돌보는 제자의 자리로 세우십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사랑을 세 번 말했으므로 이제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부르심 안에서 다시 맡겨진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양들을 돌보라는 명령 뒤에, 베드로 자신의 삶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도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그리스어 표현은 아가파스 메 플레온 투톤이며, 마지막의 투톤(이들/이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첫 번째 읽기를 따르면 이 질문은 ‘너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로 풀어 쓸 수 있지만, 이것은 본문의 가능한 의미를 풀어 쓴 것입니다. 사랑의 동사는 첫 두 질문에서 예수님께서 아가파오를, 베드로는 필레오를 쓰고, 세 번째에는 예수님께서도 필레오를 쓰십니다. 아가파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높은 사랑, 필레오는 인간적인 낮은 사랑이라고 보아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신다고 읽는 해석은 감동적일 수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두 동사는 겹치는 의미로 쓰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시는 데 3:35는 아가파오를, 5:20은 필레오를 쓰고, 나사로를 가리킬 때도 두 동사가 쓰입니다(11:3, 5). 다만 동사의 교체를 의도적인 문학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어린양’과 ‘양’, ‘먹이다’와 ‘목자로서 돌보다’도 교차하므로, 사랑의 동사 하나의 교체에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먹이다’는 먹을 것을 공급하는 행동에, ‘목자로서 돌보다’는 보살피고 이끄는 더 넓은 책임에 초점을 둘 수 있지만, 완전히 분리된 직무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목자 이미지는 에스겔 34장과도 이어집니다. 거기서 여호와야훼께서는 자기 자신만 먹고 약한 양, 병든 양, 잃어버린 양을 돌보지 않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시고, 친히 자기 양들을 찾고 먹이시며(겔 34:11–16) 자신의 종 다윗을 목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34:23). 이 말씀은 본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한 심판과 포로 된 백성의 회복을 다루며, 요한복음 21장은 이를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 사랑의 고백 뒤에 놓인 길
「아멘,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띠를 매고 원하던 곳으로 다녔다. 그런데 늙으면 네 두 손을 뻗을 것이고 다른 이가 너에게 띠를 매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복음 21:18 · 본디새김
이 말은 단순히 사람이 늙으면 자유를 잃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뜻일까요? 요한은 곧바로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는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지를 가리켜 이 말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하고 그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라.」요한복음 21:19 · 본디새김
이것은 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네 두 손을 뻗을 것이고」라는 표현은 십자가 처형을 연상시키며,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순교, 더 구체적으로 십자가형을 예고하셨다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요한은 베드로가 그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때가 왔다고 하시며 아버지가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자신도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17:1). 그러나 예수님과 베드로의 죽음을 완전히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일을 다시 이루는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끝까지 신실하게 살아간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죽음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낭만적으로 꾸미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고통을 좋아하게 된다거나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13장의 베드로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13:36)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목숨을 내놓겠다고 장담했지만(13:37), 실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실패를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앞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자신의 길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얼마나 빨리 달려갈 수 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길이 자신의 뜻과 다를 때에도 따라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고백 뒤에 놓인 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 곧바로 다른 사람을 바라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의 십자가형에서는 팔을 벌려 가로대에 묶거나 고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베드로가 실제로 어디에서, 언제, 어떤 자세로 처형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렸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교회 전승에 속하며, 21:18–19 자체만으로 그 구체적인 방식까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 다른 제자의 길을 묻는 베드로
베드로가 돌아서서 예수가 사랑하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 제자는 저녁 자리에서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 「주님, 당신을 넘기는 이가 누구입니까?」 하고 말한 사람이다.요한복음 21:20 · 본디새김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는 이 제자에게 눈짓하여 예수님을 넘길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13:23–25). 그때는 베드로가 그 제자를 통해 질문을 전했습니다. 여기서는 베드로가 그 제자를 바라보고 직접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에게 말했다. 「주님,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요한복음 21:21 · 본디새김
자신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의 미래가 궁금해졌습니다. 그 제자도 고난받게 될지 걱정했을 수도 있고, 자기 운명과 비교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베드로의 마음을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질문을 반드시 질투나 경쟁심의 표현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기를 바란다 해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복음 21:2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가 재림 때까지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바란다 해도’라는 가정일 뿐, 다른 제자의 미래를 확정적으로 밝히지 않으십니다. 다른 제자에게 어떤 길이 주어지는지 알지 못해도, 베드로에게 맡겨진 길은 분명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바로 다음 절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그 제자가 죽지 않는다는 이 말이 형제들에게 퍼졌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그 제자가 죽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기를 바란다 해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한 것이었다.요한복음 21:23 · 본디새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어떻게 오해했는지 직접 설명하고 바로잡습니다. 사람들이 가정문을 확정적인 예언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과, 사람들이 그 말씀에서 이끌어 낸 결론은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와 그 제자의 생존 문제가 초기 공동체 안에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제자가 죽었거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소문을 바로잡을 필요가 생겼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23절은 그 제자가 이미 죽었다고 직접 말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베드로는 앞서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사랑받던 제자는 주님을 먼저 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베드로에게는 사명과 죽음에 관한 말씀이 주어지지만, 사랑받던 제자의 미래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두 제자의 우열을 가리는 이야기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절에서 그 제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이 일들을 두고 증언하는 그 제자다」 — 두 제자, 두 가지 증언
이 사람이 이 일들을 두고 증언하는 그 제자이며 이 일들을 적은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복음 21:24 · 본디새김
여기서 이야기는 갑자기 서술자의 목소리로 바뀝니다.
대화를 전해 온 사람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이며, 그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증언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우리’가 등장합니다.
전통적으로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책으로 전해져 왔지만, 본문은 사랑받던 제자를 명시적으로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21:24는 그 제자가 증언과 기록에 관여했다고 말하지만, 어떤 편집 과정을 거쳐 지금의 복음서가 되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크게 두 방향의 해석이 제시됩니다. 하나는 사랑받던 제자가 자신의 증언을 기록했고, 그 증언을 아는 공동체나 동료들이 마지막 부분에서 그 신뢰성을 확인해 주었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본적인 기록과 마지막 장의 편집 과정에 차이가 있었으며, 21장이 후대의 편집 과정에서 덧붙여졌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해석입니다.
이 문제는 앞 장과의 관계에서도 제기됩니다. 20:31의 「이것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믿도록, 또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가지도록 적혀 있다」는 하나의 결말처럼 읽혀서, 21장을 처음부터 계획된 맺음말로 보는 해석과 본래의 결말 뒤에 붙은 부록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순히 한쪽으로 결론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21장은 이른 시기의 사본들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며, 주요 그리스어 사본 전승에서 20장으로 끝나는 별도의 완전한 요한복음 형태가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21장이 하는 역할은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장이 믿고 생명을 얻도록 이 복음서가 기록되었다고 말했다면, 21장은 그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사명과 미래를 보여 줍니다. 베드로에게는 양들을 돌보는 사명이, 사랑받던 제자에게는 증언하는 역할이 연결됩니다. 두 사람이 각각 교회의 지도력과 복음서의 증언을 대표한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은 목양만, 다른 사람은 증언만 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고, 각 사람에게 나타나는 길이 다를 뿐입니다. 21장의 마지막 부분은 누구의 권위가 더 높은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제자들을 통해 증언과 돌봄의 사역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가 행한 다른 일이 많이 있다. 그 일들이 하나하나 적힌다면, 그렇게 적히는 책들을 세상조차 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복음 21:25 · 본디새김
이 마지막 문장은 문학적인 과장법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많으며, 이 복음서가 그 모든 일을 빠짐없이 담은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4절의 ‘우리’가 25절에서 ‘나’로 바뀝니다. 두 말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지, 같은 저자가 수사적으로 표현을 바꾼 것인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책이 불완전해서 믿는 데 필요한 무언가를 반드시 다른 기록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록된 것은 독자가 믿고 생명을 얻도록 충분한 증언으로 제시되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다 담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죽는 방식, 사랑받던 제자의 수명, 백쉰세 마리의 상징, 마지막 문장을 적은 사람에 관한 질문은 연구할 가치가 있지만, 요한복음은 그 모든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독자의 관심을 예수님께로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증언하는’(마르튀론)은 현재분사, ‘적은’(그랍사스)은 부정과거분사입니다. 기록하는 행위는 이미 이루어졌고 증언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제시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재분사는 그를 증언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기능도 하므로, 그 제자가 이 글을 읽는 시점에도 반드시 살아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패한 제자를 다시 부르시는 분
실패한 제자를 다시 부르시는 분, 그것이 이 장이 보여 주는 예수님입니다. 왜 세 번이나 물으셨을까요? 세 번의 질문은 세 번의 부인을 떠올리게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실패를 확인시키시려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없었던 일처럼 취급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실패가 베드로의 마지막 모습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세 번 모두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내놓겠다던 베드로의 옛 장담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부르시는 길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그 양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확장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예수님의 뜻에 따라 돌보는 일입니다. 다만 이 장면을 모든 실패가 아무런 책임도 없이 사라진다는 일반적인 약속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의 회복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그 모든 것은 제자들의 결심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알아보기도 전에 바닷가에 계셨습니다. 그물을 어디에 던질지 말씀하셨고, 숯불을 피우고 아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실패했던 제자에게 자신의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이제 그 식탁의 대화가 끝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뒤를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의 미래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 않으시고,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