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8–20장 · 죽음과 부활
「마리아야」, 죽음을 넘어 들려온 목소리
빈 무덤을 발견한 마리아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울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무덤 안에는 천사들이 앉아 있습니다.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니 예수님도 서 계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을 거셔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단 한마디를 듣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랍부니」라고 대답합니다. 그제야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미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천사들도 보았습니다. 심지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이 질문은 요한복음 20장 전체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됩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제자들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도마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아직 자신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장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보고 믿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단순히 증거가 부족한 사람이 충분한 증거를 얻게 되는 과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자신들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도마는 자기의 의심을 정확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과정은 다르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알아보게 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마리아에게는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세상으로 나가라고 하시며, 이 복음서를 읽게 될 사람들에게는 보지 않고도 믿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빈 무덤을 보고도 알지 못하다
안식일 다음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남아 있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으로 와서 돌이 무덤에서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요한복음 20:1 · 본디새김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 가까이에 있는 동산의 새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안식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안식일이 지나고 첫날이 되자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옵니다.
요한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떠올렸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달려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가 사랑하던 다른 제자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고, 그를 어디에 두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요한복음 20:2 · 본디새김
그녀에게 빈 무덤은 희망의 증거가 아니라 또 하나의 상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픈 일인데, 이제 예수님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는 곧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둘이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앞서 달려 무덤에 먼저 이르렀다.요한복음 20:4 · 본디새김
먼저 도착한 제자는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뒤따라온 베드로는 곧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을 베드로와 다른 제자 사이의 서열이나 영적 우월성을 나타내는 이야기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 더 빨리 달렸는지만으로 어느 제자가 더 훌륭하다는 결론을 내릴 근거는 없습니다. 요한은 두 사람이 무덤을 직접 확인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며, 특별히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그 제자를 따라오던 시몬 베드로도 와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눈여겨보았다.요한복음 20:6 · 본디새김
예수의 머리에 있던 수건이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자리에 말려 있는 것도 눈여겨보았다.요한복음 20:7 · 본디새김
무덤에는 예수님의 몸이 없습니다. 하지만 장례에 사용했던 아마포와 수건은 남아 있습니다. 앞 장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몸을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동였습니다(19:40).
누군가 시신을 가져갔다면 왜 천들을 남겨 두었을까요? 더구나 머리에 있던 수건은 다른 천들과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은 단순한 시신 도난이라는 설명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건이 놓인 모양만으로 무덤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재구성할 수는 없고, 그 수건을 예수님께서 직접 정돈하셨다는 이야기도 본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가 마침내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무덤에 먼저 온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요한복음 20:8 · 본디새김
무엇을 믿었을까요? 요한은 목적어를 밝히지 않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그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믿다’가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많고, 이야기의 흐름도 부활을 향한다는 점이 근거가 됩니다. 두 번째 해석은 마리아가 전한 말, 곧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제자들이 성경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해석에서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성경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싹텄다고 보고, 두 번째 해석에서는 아직 부활을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의 인식이 강조됩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9절의 설명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복음 20:9 · 본디새김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이해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무덤을 보았습니다.
아마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과 성경이 말씀해 온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직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요한은 그들이 돌아가며 무엇을 말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리아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복수형으로 말합니다. 요한은 1절에서 마리아만 언급했지만, 다른 복음서들은 여러 여인이 무덤을 찾았다고 기록합니다(마태복음 28:1; 마가복음 16:1; 누가복음 24:10). 그러나 요한복음 20:1–2만으로 동행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몇 명이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이 장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경험에 초점을 맞춥니다. 9절의 「성경 말씀」에 관해서는, 시편 16:10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이가 썩음을 보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사도행전 2:25–32에서 베드로가 이 시편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합니다. 이사야 53:10–12에서 고난받는 종이 죽음의 고난 이후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결과를 보게 된다는 내용도 정경적 배경으로 읽혀 왔습니다. 다만 9절은 특정한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므로, 요한이 정확히 어느 한 구절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 눈앞에 계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돌아간 뒤에도 마리아는 무덤 곁에 남아 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바로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요한복음 20:11 · 본디새김
독자는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알고 읽지만, 마리아는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울음을 부활의 기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앙의 표시라고 단순히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사랑하고 따랐던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이제 예수님의 몸마저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몸이 놓여 있던 곳에 흰옷을 입은 천사 둘이 하나는 머리맡에, 하나는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요한복음 20:12 · 본디새김
천사들은 예수님의 몸이 놓였던 자리의 양쪽 끝에 앉아, 비어 있는 자리에서 마리아를 맞이합니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했다. 「여인이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 여자가 그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나는 그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합니다.」요한복음 20:13 · 본디새김
마리아는 천사를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고, 이제는 「나는 그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녀의 관심은 여전히 예수님의 몸이 어디에 있는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리아는 뒤를 돌아봅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아서서 예수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마리아는 그가 예수인 줄 알지 못했다.요한복음 20:14 · 본디새김
마리아는 자신이 그토록 찾던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아보지 못합니다.
외모가 달라졌거나, 슬픔에 잠겨 있었거나, 아직 어두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반드시 이전과 전혀 다른 외형을 가졌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을 거십니다.
예수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여인이여, 어찌하여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그 여자는 예수가 동산지기라고 여기고 그에게 말했다. 「주님, 당신이 그를 옮겼으면 어디에 두었는지 나에게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를 가져가겠습니다.」요한복음 20:15 · 본디새김
첫 번째 질문은 천사들의 질문과 같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은 요한복음의 앞부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던 첫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고(1:38), 자신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에게는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18:4, 7).
같은 질문이지만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체포하러 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으로 나서셨습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찾는 것은 살아 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죽으신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녀는 그 사람이 어디에 두었는지만 알려 주면 자신이 가져오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마리아의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 헤매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그녀를 찾아오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몸을 어디에 두었는지 묻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녀 앞에 서 계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을 가져가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무덤에 누워 계신 분이 아닙니다.
동산지기라는 오해가 이 장면에서 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단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두 천사를 출애굽기 25:18–22의 속죄소 양쪽에 있는 그룹들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천사들을 그룹이라고 부르지 않고, 속죄소를 직접 언급하지도 않으므로 그 연결을 본문의 확정적인 의미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동산지기라는 오해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이 동산에 있다고 기록했습니다(19:41). 이 장면을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연결하여 예수님을 새로운 창조의 시작과 관련된 분으로 읽는 해석이 있고, 요한복음이 창조의 언어로 시작하며 뒤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의미 있는 주제적 연결이 됩니다. 그러나 본문이 예수님을 실제로 동산지기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리아의 오해입니다.
「마리아야」 — 이름을 부르시는 목소리
예수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마리아야.」 그 여자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그에게 말했다. 「랍부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요한복음 20:1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긴 설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살아나셨다고 선언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곧바로 알아봅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10장의 좋은 목자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목자가 자신의 양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3–4). 그리고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10:27).
이제 그 말씀이 한 사람의 경험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자 알아봅니다.
요한은 마리아가 그 순간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과정을 세세하게 분석하지 않으므로, 이 장면을 익숙한 음색을 들었다는 심리적 설명으로만 축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 알아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이름으로 부르심으로써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그 사건은 자신이 알고 따랐던 예수님께서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만남으로 다가옵니다.
죽으신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마리아의 대답 「랍부니」는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추상적인 종교적 진리로만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던 예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나를 붙잡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에게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해라. 『나는 내 아버지이자 너희 아버지께, 내 하나님이자 너희 하나님께 올라간다.』」요한복음 20:17 · 본디새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너무 거룩해서 사람이 만질 수 없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로 이 장의 뒷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해 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27절).
이 구절의 읽기는 몇 갈래로 나뉩니다. 이전과 같은 관계가 계속되지 않는다는 데 무게를 두는 읽기,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으셨다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는 읽기, 붙잡고 머물기보다 가서 전하라는 명령을 중요하게 보는 읽기입니다. 이 읽기들은 서로 관련될 수 있으며,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예수님과의 재회가 예수님을 이전처럼 곁에 붙잡아 두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도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표현을 모든 제자의 잘못이 이미 어떤 절차를 통해 용서되었다는 선언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 아버지’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를 구별하면서도 한 분 아버지 안에 함께 놓으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버지에게서 오셨고, 아버지를 드러내셨으며,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하신 아들로 소개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도 그 아버지를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 안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아들 되심과 제자들의 자녀 됨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와 「너희」를 구별하는 표현은 오히려 관계의 차이도 보존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며, 이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는 1:12의 선언과도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소식을 누구에게 맡기실까요? 바로 조금 전까지 무덤 곁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처음에 제자들에게 달려가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고, 그를 어디에 두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다시 제자들에게 갑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보았다」 하고, 또 예수가 마리아에게 이 말을 했다고 알렸다.요한복음 20:18 · 본디새김
처음에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말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를 만났는지 말합니다.
두 소식 사이에서 마리아가 한 일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활의 증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한 사람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증언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나를 붙잡지 마라」의 원문은 부정 명령으로, ‘나를 만지지 마라’라고도 옮길 수 있지만 문맥에 따라 이미 붙잡고 있는 행동을 그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 명령법이라는 형태만으로 마리아가 이미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장면에서는 「나를 붙잡지 마라」라는 번역이 자연스럽습니다. 세 읽기의 근거를 보면, 첫째는 마리아가 다시 만난 예수님을 놓치고 싶지 않아 붙잡으려 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이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무게를 둡니다. 둘째는 부활과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일이 구별되며,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셋째는 곧바로 이어지는 명령, 곧 제자들에게 가서 소식을 전하라는 말씀을 중요하게 봅니다.
닫힌 문 안으로 오신 예수님 — 평화와 새로운 사명
그날 곧 안식일 다음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있던 곳의 문이 유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닫혀 있었는데, 예수가 와서 그들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복음 20:19 · 본디새김
아침에는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저녁에는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습니다.
여기서 「유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유대인을 두려워했다는 의미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 자신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문맥상 예수님을 처형하도록 압박했던 지도자들과 그들에게 속한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어떻게 그곳에 들어오셨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로 부활하신 몸의 물리적 구조나 이동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하시는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평화의 인사입니다.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평화의 인사와 연결되지만, 이 장면에서는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요한복음 14:27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자신의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시며, 마음이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두려워하는 제자들 가운데 오셔서 평화를 말씀하십니다.
이 평화는 제자들의 두려움이 근거 없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체포되셔서 죽임당하셨고, 제자들에게 적대적인 환경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출발점입니다.
이 말을 하고 그들에게 자기 두 손과 옆구리를 보였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요한복음 20:20 · 본디새김
손과 옆구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입으신 상처와 연결되는 자리입니다. 요한은 앞 장에서 병사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기록했습니다(19:34). 그러므로 부활하신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은 부활을 단순히 예수님의 정신이나 가르침이 제자들 사이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로 축소할 수 없게 합니다. 요한이 기록하는 부활은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시고, 자신의 몸을 보여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지만 십자가에서 겪으신 일을 없었던 일처럼 지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표지가 됩니다. 예수님은 앞서 자신의 기쁨이 제자들 안에 가득하기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셨는데(15:11; 17:13), 이제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기쁨의 장면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들에게 다시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듯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복음 20:21 · 본디새김
처음에는 두려워하는 제자들 앞에 서셔서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평화의 인사는 제자들을 보내시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제자들이 안전한 방 안에 영원히 머물 수 있도록 하는 평화가 아니라,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평화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세상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내심의 근거는 제자들의 능력이나 용기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던 것처럼, 이제 제자들도 예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일한 의미에서 세상의 구원자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독특한 아들이시며, 자신의 죽음으로 맡겨진 일을 이루셨습니다. 제자들은 같은 구속 사건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증언하도록 보내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명만 주시지 않습니다.
이 말을 하고 숨을 불어넣은 뒤 그들에게 말했다. 「거룩한 영을 받아라.」요한복음 20:22 · 본디새김
창세기 2:7에서 여호와야훼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러자 사람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어 구약성경은 그 장면에 여기의 ‘숨을 불어넣다’와 같은 동사 형태를 씁니다.
처음 창조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주셨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사명을 위한 영을 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다시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는 행동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해석 문제가 생깁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는데, 요한복음 20장에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요한이 실제 성령 수여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이 경우 요한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과는 다른 시점과 방식으로 성령의 선물을 서술하고 있는 셈이며, 이를 흔히 ‘요한복음의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 행동이 앞으로 이루어질 성령 강림을 미리 보여 주는 상징적 행위라는 해석입니다. 어느 해석이 가장 적절한지는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요한복음 20장 자체가 강조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성령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들의 사명은 스스로 만들어 낸 능력으로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과 영에 의지하는 일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 용서하면 그 죄가 그들에게 용서되어 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 붙들어 두면 그 죄가 붙들려 있다.」요한복음 20:2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용서하다’와 ‘붙들어 두다’가 서로 대조되고, 결과를 나타내는 동사는 용서되거나 붙들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이 구절을 사도들에게 주어진 죄의 용서 권한과 그 권한이 교회의 직무 안에서 이어지는 근거로 중요하게 이해합니다. 개신교의 여러 전통에서는 제자들과 교회가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와 심판을 권위 있게 증언하거나 선언하는 사명에 무게를 둡니다. 각 전통 안에도 더 세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은 이 권한이 독립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죄의 용서와 죄를 붙들어 두는 권한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권한은 예수님의 보내심과 성령의 선물에서 떼어 놓고 이해할 수 없으며, 제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정죄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을 얻었다는 뜻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내신 사람들로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증언하신 진리를 세상에 알리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3:17–18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는 데 있지 않고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는 데 있다고 하시면서도,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 아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전해지는 생명에는 실제적인 구원의 약속이 있으며,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에는 심각한 결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명을 맡기시는 사람들은 바로 조금 전까지 문을 닫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실패를 이유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은 과거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와 성령입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숨을 불어넣다’는 그리스어 구약성경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장면과 같은 동사 형태입니다. 성경에서 ‘숨’, ‘바람’, ‘영’은 서로 깊이 연결된 개념이며,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에도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활동이 나타납니다. 에스겔 37장은 본래 포로 생활로 소망을 잃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다시 생명을 주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이며, 요한복음이 이 본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주제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성령 수여를 두고는 성령의 선물이 서로 다른 사역을 위해 단계적으로 주어졌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23절의 ‘용서되어 있다’와 ‘붙들려 있다’는 완료형으로 읽으며 그 상태가 성립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완료형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반드시 제자들의 행위보다 시간상 먼저 일어났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조건문 안에서는 결과로 성립하는 상태를 강조하는 용법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지 않으면 결코 믿지 않겠다」 — 도마가 요구한 것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날 저녁,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열둘 가운데 하나인 도마, 곧 디디모라 불리는 이는 예수가 왔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요한복음 20:24 · 본디새김
디디모(Δίδυμος)는 그리스어로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도마의 쌍둥이 형제나 자매가 누구였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 이름을 근거로 도마의 성격을 설명하거나 그가 모든 신자의 ‘쌍둥이’라는 상징을 의도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그의 손에서 못 자국을 보고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그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으면 결코 믿지 않겠다.」요한복음 20:25 · 본디새김
제자들의 말은 마리아가 전했던 「내가 주님을 보았다」와 같습니다. 마리아의 증언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도마는 그저 살아 있는 사람을 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바로 그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하겠다는 것입니다.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가 필요합니다.
도마를 단순히 의심이 많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만 평가하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다른 제자들도 처음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직접 나타나셨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도마의 요구에는 다른 제자들이 이미 경험한 것을 자신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믿었지만, 도마는 그들의 증언을 들은 사람이며 그 증언만으로는 믿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는 단순히 의심의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전하는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뒤에서 예수님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이유와 직접 연결됩니다.
여드레가 지납니다.
여드레 뒤에 그의 제자들이 다시 안에 있었고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닫혀 있었는데 예수가 와서 가운데 서서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복음 20:26 · 본디새김
당시 유대식으로 날짜를 포함하여 세면 여드레 뒤는 약 일주일 뒤에 해당합니다. 이번에도 문은 닫혀 있지만, 이제 도마도 함께 있습니다. 요한은 도마가 그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그가 했던 요구를 그대로 되돌려 주십니다.
그다음에 도마에게 말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내밀고 내 두 손을 보아라. 또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믿지 않는 이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어라.」요한복음 20:27 · 본디새김
예수님은 도마가 무엇을 요구했는지 알고 계십니다.
손가락을 내밀어 보라고 하십니다.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도마가 실제로 예수님의 상처를 만졌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도마는 곧바로 「내 주님이고 내 하나님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도마가 실제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었다고 묘사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서는 일이 됩니다.
어쩌면 이 침묵 자체가 장면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도마는 직접 확인할 조건을 내걸었고, 예수님은 그 조건을 알고 계셨으며 확인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기록한 도마의 최종 반응은 확인 행위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왜 의심했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믿지 않는 이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어라」는 요구는 의심스러운 사실 하나를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믿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도마의 대답이 그 의미를 드러냅니다.
「내 주님이고 내 하나님입니다」 — 요한복음의 가장 높은 고백
도마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내 주님이고 내 하나님입니다.」요한복음 20:28 · 본디새김
이 고백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요한복음은 첫머리에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말씀은 하나님이었다」고 선언했습니다(1:1). 그 뒤 독자는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말씀을 들었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장면까지 보았습니다.
요한은 도마가 이 말을 예수님께 했다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놀라서 하나님을 향해 감탄사를 외쳤을 뿐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맥에 잘 맞지 않습니다. 도마의 말은 예수님을 향한 고백입니다.
요한복음 1:1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독자에게 설명하는 서술자의 선언입니다. 반면 20:28은 예수님을 만난 제자가 직접 하는 고백입니다.
처음에는 서술자가 말했습니다.
이제는 제자가 말합니다.
그리고 도마는 「내」 주님, 「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올바른 교리를 추상적으로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 앞에 계신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자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물론 이 표현에 개인적인 감정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에서 가장 직접적인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백은 예수님이 앞서 「내 하나님이자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17절)과 충돌할까요? 예수님은 아버지를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시고, 도마는 예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서는 둘 중 하나를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도 유지하고, 아들이 지니신 신적 정체성도 증언합니다. 이 두 진술을 후대의 삼위일체 신학으로 체계화할 수는 있지만, 본문 자체에서는 우선 예수님이 아버지와 구별되는 분이시면서도 하나님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된 분으로 고백되신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마의 고백 다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 장의 방향을 다시 바꿉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었느냐? 보지 않고도 믿은 이들은 복이 있다.」요한복음 20:29 · 본디새김
예수님은 도마의 고백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도마가 믿음에 이른 과정을 인정하시면서, 앞으로 다른 방식으로 믿게 될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확인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믿는 태도를 칭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은 지금까지 빈 무덤을 본 제자, 목소리를 듣고 알아본 마리아, 손과 옆구리를 본 제자들, 증언을 듣고도 직접 확인하기를 요구했던 도마를 세심하게 기록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은 아무런 증언도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전하는 증언을 통해 가능한 믿음입니다.
여기서 요한복음의 독자는 새로운 위치에 놓입니다. 독자는 마리아처럼 동산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고, 닫힌 문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며, 도마처럼 손과 옆구리를 확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으며,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게 되었는지 전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예수님은 그 증언을 통해 믿는 사람들의 믿음도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직접 보았던 제자들의 경험은 특별한 증언의 토대가 되지만, 후대의 믿음이 그보다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그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요한은 책을 쓴 이유를 밝힙니다.
「이것들은 여러분이 믿도록 적혀 있다」 — 보지 못한 사람에게 주어진 증언
예수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적혀 있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했다.요한복음 20:30 · 본디새김
그렇다면 왜 어떤 일들은 기록하고 다른 일들은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요한은 곧바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것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믿도록, 또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가지도록 적혀 있다.요한복음 20:31 · 본디새김
요한은 자신이 모든 사건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연대기를 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믿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두 목적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인물에 대한 역사적 판단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는다는 1:12, 아들을 믿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3:16의 목적을 요한은 책의 끝에서 다시 밝힙니다.
31절의 「믿도록」은 사본에 따라 현재형과 부정과거형으로 전해지며, 앞의 것은 믿음 안에 머무는 데, 뒤의 것은 믿음에 이르는 데 무게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 요한이 분명히 밝힌 목적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독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앞에서는 보고 믿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기록된 것을 읽고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난 뒤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제자들은 도마에게 자신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도마에게 하신 「보지 않고도 믿은 이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여기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얻습니다. 보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이 전해 준 증언을 통해 믿으며, 요한복음은 바로 그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책은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기록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
조금 더 깊이
「믿도록」(πιστεύω)에 해당하는 동사는 사본에 따라 현재 가정법과 부정과거 가정법으로 전해집니다. 현재형을 따르면 믿음이 계속되는 데 초점을 두어 이미 믿는 사람들이 믿음 안에 머물도록 쓰였다는 해석에 무게가 실릴 수 있고, 부정과거형을 따르면 믿음에 이르는 사건에 초점을 두어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게 하려는 목적이 강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형이 반드시 기존 신자만을, 부정과거형이 반드시 불신자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어 시제 형태의 차이만으로 책의 독자층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부 사본은 현재 가정법을 전하지만, 두 읽기 모두 주요 사본의 지지를 받습니다.
죽음 이후에 시작된 새로운 관계
부활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끝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이전처럼 붙잡아 두지 못하고, 제자들은 방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으며, 예수님은 도마에게서 시선을 돌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의 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의 바탕에는 예수님의 먼저 찾아오시는 행동이 놓여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닫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도마는 자신이 정한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사람들이 스스로 충분한 확신을 만들어 낸 결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들을 부르시며, 말씀하시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모든 의심이 자동으로 해결된다거나, 누구에게나 마리아나 도마와 동일한 경험이 주어진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요한은 그런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경험을 직접 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증언을 남깁니다. 뒤에 21장이 이어지지만, 20:30–31은 앞서 기록된 모든 표징과 증언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알려 줍니다.
처음부터 요한이 전하려 했던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의 목록이 아니었습니다.
그 놀라운 일들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2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닫힌 문 안의 제자들 가운데 서십니다.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그때 도마가 「내 주님이고 내 하나님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 고백을 들으신 뒤 아직 자신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말씀하시고, 요한은 그 말씀을 들을 수 없었던 독자들을 위해 이 이야기들을 기록했다고 밝힙니다.
그 고백이 담긴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아직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은 이들은 복이 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