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8–20장 · 죽음과 부활

보아라, 너희 왕이다

왕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습니다. 몸에는 자주색 겉옷이 걸쳐져 있지만, 그것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기 위한 옷이 아닙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면서 뺨을 때립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 세우고 「보아라, 이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잠시 후 빌라도는 다시 「보아라, 너희 왕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두 선언 사이에서 예수님은 더욱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십니다. 왕이라 불리지만 왕으로 대접받지 못하시고, 죄목이 없다는 선언을 들으시지만 풀려나지 못하십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이 붙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읽어 온 독자에게는 이 광경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36).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이 조롱하며 붙여 주는 왕의 표식들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요한은 이 장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자세히 묘사하는 데 많은 지면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채찍질, 가시관, 십자가 처형이 간결하게 기록됩니다. 대신 누가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는지,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무엇을 이루셨다고 선언하시는지를 세심하게 전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기 위해 왕의 모습을 흉내 냅니다. 그러나 요한은 바로 그 장면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를 드러냅니다.

19장은 빌라도의 재판장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와 무덤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고발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가지만, 예수님은 그곳에서도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날 무렵, 예수님을 드러내 놓고 따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러 나섭니다.

이 모든 장면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무엇을 했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으시는 동안 예수님 자신은 무엇을 하시는가입니다.

읽는 시간 34분소단락 919장 본문 읽기 →

「보아라, 이 사람이다」 — 왕을 조롱하는 사람들

요한복음 19:1–5 본문 →

그때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 채찍질했다.요한복음 19:1 · 본디새김

앞 장의 마지막에서 사람들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합니다. 로마의 채찍질은 가벼운 징계가 아니라 심각한 신체적 손상을 입힐 수 있는 폭력적인 형벌이었지만, 요한은 그 방법이나 횟수, 상처의 상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이미 예수님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18:38). 그런데 왜 채찍질을 명령할까요? 예수님을 어느 정도 처벌한 모습을 보여 주어 고발자들을 만족시키고, 십자가형까지는 가지 않으려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뒤에서 다시 예수님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4, 6절).

그러나 본문은 빌라도의 정확한 의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죄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을 폭력에 넘긴다는 모순입니다.

빌라도는 무죄를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 판단에 맞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병사들은 채찍질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병사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겉옷을 입혔다.요한복음 19:2 · 본디새김

왕에게는 왕관과 왕의 옷이 어울립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에게 그 두 가지를 갖추어 줍니다. 하지만 왕관은 가시로 만들었고,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높은 신분과 왕권을 연상시키던 자주색 겉옷은 왕을 흉내 내는 도구가 됩니다.

그에게 거듭 다가와 「만세, 유대인의 왕이여」 하고는 뺨을 때리곤 했다.요한복음 19:3 · 본디새김

그들은 왕에게 인사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존경을 표현하면서 행동으로는 모욕합니다. 그들의 의도는 조롱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병사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생겨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18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사들은 가짜 왕을 만들어 조롱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왕관은 예수님에게 왕권을 부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왕관을 씌우기 전부터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가시관이 왕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장식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시관은 분명히 고통과 모욕의 도구입니다. 요한의 역설은 그 모욕이 사라지거나 아름답게 변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 모욕을 받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밖으로 나가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그를 데리고 나온다고 말합니다(4절). 그리고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자주색 겉옷을 입은 채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했다. 「보아라, 이 사람이다.」요한복음 19:5 · 본디새김

원문은 동사도 없는 짧은 선언으로, 직역하면 ‘보라, 그 사람’에 가깝습니다. 빌라도가 동정에 호소하려 했는지 조롱하려 했는지, 본문은 그의 속마음을 확정해 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1:14). 그런데 이제 그분이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신 채 사람들 앞에 서 계십니다. 장면이 던지는 질문은 선명합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어떤 대우를 받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계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행사하는 폭력과 모욕을 실제로 겪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보라고 말합니다. 독자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하는지 지켜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빌라도의 의도로는 두 가능성이 거론됩니다. 상처 입으신 예수님을 보여 주면서 더는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시니 놓아 달라고 호소했을 수 있고, 반대로 왕이라고 주장하시는 분이 얼마나 초라한 모습이 되셨는지 보여 주며 조롱했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의도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이 선언을 창조나 참된 인간의 모습에 대한 특별한 신학적 상징으로 읽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요한이 그 연결을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 권한을 가진 사람의 두려움

요한복음 19:6–12 본문 →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그를 보자 소리쳤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 못 박아라.」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직접 그를 데려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 나는 그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9:6 · 본디새김

빌라도는 또다시 무죄를 선언하지만, 고발자들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했다. 「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있고, 그 율법에 따르면 그는 죽어야 합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내세웠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9:7 · 본디새김

여기서 고발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앞 장에서 빌라도가 물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냐는 정치적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하신다는 이유를 내세웁니다. 이 고발은 처음이 아닙니다. 5:18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신다고 여겼고, 10:33에서도 신성모독을 문제 삼았습니다.

레위기 24:16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에 대한 사형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실제로 그 율법을 위반하는지는 고발자들의 주장과 구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아들이시라고 증언해 왔으므로, 갈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모독하셨느냐, 아니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느냐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 두려워했다.요한복음 19:8 · 본디새김

요한은 그가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로마 사회에도 신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종교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을 수 있고,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 자체가 두려움을 키웠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은 그의 다음 질문입니다.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 예수에게 말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예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요한복음 19:9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반복되어 온 물음입니다. 사람들은 나사렛이나 갈릴리라는 지리적 출신을 문제 삼았지만(7:27, 41–42), 예수님은 자신의 출신을 단순한 지리적 정보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8:14에서는 자신은 어디에서 오셨고 어디로 가시는지 아시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고, 9장에서 눈먼 채 태어났다가 보게 된 사람도 예수님의 출신을 알지 못한다는 종교 지도자들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9:29–30).

이제 그 질문을 로마 총독이 던집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신적 기원을 묻는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들은 독자에게 이 질문은 단순한 출신지 확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침묵을 이사야 53:7에서 고난 가운데 입을 열지 않는 종의 모습과 주제적으로 연결할 수 있지만, 요한복음이 여기서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자체에서 보면, 예수님은 이미 빌라도에게 자신의 나라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셨습니다(18:36–37). 이제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실 뿐입니다.

침묵에 직면한 빌라도는 자신의 권한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그에게 말했다. 「내게는 말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놓아줄 권한을 가지고 있고 너를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19:10 · 본디새김

빌라도의 말은 현실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권한의 근원을 문제 삼으십니다.

예수가 그에게 대답했다. 「위에서 너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너는 나를 어찌할 권한을 하나도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나를 너에게 넘긴 사람에게는 더 큰 죄가 있다.」요한복음 19:11 · 본디새김

‘위에서’라는 말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도 등장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위에서’ 태어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3:3). 니고데모는 그것을 다시 태어나는 일로 이해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새로운 생명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여기서도 ‘위에서’는 빌라도의 권한이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절대적인 권한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그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씀일까요?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그 해석을 막습니다. 누군가에게 더 큰 죄가 있다는 것은 빌라도에게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를 너에게 넘긴 사람」이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리지만(유다, 또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종교 지도부), 본문은 그 이름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권한으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놓아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외쳐 말했다. 「이 사람을 놓아주면 당신은 황제의 벗이 아닙니다. 자기를 왕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다 황제를 거스릅니다.」요한복음 19:12 · 본디새김

고발자들은 이제 종교적 고발보다 더 강력한 압박을 가합니다. ‘황제의 벗’은 로마 사회에서 황제와의 관계나 정치적 충성심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놓아주면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겠다는 압박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놓아주면 자신의 정치적 지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조금 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자신이 생사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권한을 어떤 판단에 따라 사용할 것인지는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나를 너에게 넘긴 사람」으로는 예수님을 넘긴 유다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긴 대제사장 가야바 또는 그가 대표하는 종교 지도부를 가리킨다는 읽기가 더 자연스럽습니다. ‘황제의 벗’은 공식적인 명예 칭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구절에서 반드시 특정 칭호의 법적 지위를 뜻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황제 말고 다른 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뒤바뀐 충성

요한복음 19:13–16 본문 →

그래서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밖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리토스트로톤이라 불리고 히브리 말로는 가바다라 불리는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다.요한복음 19:13 · 본디새김

이곳은 공식적인 판결이 내려지는 자리입니다. 원문의 동사 에카티센(καθίζω)은 ‘빌라도가 앉았다’로도, ‘빌라도가 예수님을 앉혔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앞의 읽기에서는 빌라도가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판결하고, 뒤의 읽기에서는 예수님을 재판석에 앉혀 왕을 흉내 내는 조롱을 완성합니다.

유월절 준비일이었고 여섯째 시쯤이었다. 그리고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했다. 「보아라, 너희 왕이다.」요한복음 19:14 · 본디새김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이라는 시간 안에 놓습니다. 뒤에서 뼈가 꺾이지 않는 장면까지 읽으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앞에서는 「보아라,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그들이 외쳤다. 「없애라. 없애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을까?」 대제사장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황제 말고 다른 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요한복음 19:15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의 왕이십니다. 사무엘상 8:7에서 이스라엘이 인간 왕을 요구했을 때,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그 뒤에 다윗 왕조를 가졌고, 인간 왕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이유로 예수님을 고발해 놓고, 정작 로마 황제를 자신들의 유일한 왕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의 말은 정치적 압박을 위한 발언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왕권에 대한 모든 신앙을 버렸다고까지 주장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로마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모든 유대인의 신앙에 대한 판단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15절은 대제사장들의 대답이며, 이야기의 갈등은 예수님을 고발하는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특정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결국 무엇에 의지하게 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율법을 내세웠지만,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 황제에 대한 충성을 선언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했지만, 정치적 지위를 지키려는 압박 앞에서 물러납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움직였던 사람들이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그때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그들에게 넘겼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를 넘겨받았다.요한복음 19:16 · 본디새김

재판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빌라도가 옳은 판결을 내렸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죄목이 없다는 판단은 있었지만, 그 판단을 지키는 판결은 없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에카티센은 공식적인 재판석의 용도와 문장의 일반적인 흐름을 고려하면 빌라도 자신이 앉았다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다른 읽기도 문법적으로 가능하며, 요한이 예수님의 참된 왕권을 드러내기 위해 그 장면을 의도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14절의 여섯째 시는 일반적인 유대식 계산으로 정오 무렵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5:25는 예수님께서 셋째 시, 곧 오전 9시 무렵에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기록합니다. 일부 해석은 요한이 자정부터 계산하는 로마식 방식을 사용하여 여섯째 시가 오전 6시를 뜻한다고 주장하지만, 요한복음이 일관되게 그 방식을 쓴다는 증거가 충분한지는 논쟁적이므로 두 복음서의 시각 차이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유월절 날짜에 대해서도 앞 장에서 살펴본 차이가 이어집니다.

십자가 위에 기록된 왕의 이름

요한복음 19:17–22 본문 →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골터라 불리고 히브리 말로는 골고다라 불리는 곳으로 나갔다.요한복음 19:17 · 본디새김

마태복음 27:32와 마가복음 15:21, 누가복음 23:26에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은 그 일을 기록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정작 십자가에 못 박는 장면은 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거기서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른 두 사람을 이쪽에 하나 저쪽에 하나 못 박고 예수를 가운데 두었다.요한복음 19:18 · 본디새김

고통의 세부 묘사가 없습니다. 대신 처형장의 세 십자가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 팻말 하나가 붙습니다.

빌라도가 팻말을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사렛 사람 예수, 유대인의 왕.」요한복음 19:19 · 본디새김

죄목을 적은 표지는 처형당하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 처벌받는지 알리는 기능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팻말을 단순한 죄목 표지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 가운데 많은 이가 이 팻말을 읽었다. 예수가 못 박힌 곳이 도시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브리 말과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적혀 있었다.요한복음 19:20 · 본디새김

히브리 말은 당시 유대인의 언어적·종교적 세계와 연결되고, 라틴어는 로마 통치의 언어이며, 그리스어는 동부 지중해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던 공용어였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조롱하는 글이 여러 언어로 읽히며 예수님의 왕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글이 됩니다. 빌라도가 의도하지 않았을 의미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이 문구를 그대로 두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했다.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저 사람이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말했다고 쓰십시오.」요한복음 19:21 · 본디새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면 예수님께서 실제로 왕이시라는 선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 ‘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라고 쓰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장하신 내용일 뿐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뜻밖에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빌라도가 대답했다. 「내가 쓴 것은 내가 썼다.」요한복음 19:22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예수님의 처형 문제에서 압박에 밀렸던 그가, 팻말의 문구를 바꾸라는 요청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더 이상 양보하지 않으려는 태도였을 수도 있고, 그들을 조롱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이야기 안에서는 또 하나의 역설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넘긴 총독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적은 글만큼은 지우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요한복음 12:32–33의 말씀도 겹쳐 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땅에서 들어 올려지실 때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이끄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요한은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가장 수치스럽게 낮추는 처형 도구였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고통 자체가 영광스러워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길이 그 십자가를 통과하기에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지시는 자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요한은 시선을 십자가 아래로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의 기록과 공관복음의 시몬 이야기가 반드시 모순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십자가를 지셨다가 나중에 시몬이 대신 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본문 자체는 그런 경과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옷을 나누는 병사들과 새로운 가족이 되는 사람들

요한복음 19:23–27 본문 →

그래서 병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겉옷들을 가져다 병사마다 한 몫씩, 네 몫으로 나누었다. 속옷도 가져갔다. 속옷은 솔기 없이 위에서부터 통째로 짠 것이었다.요한복음 19:23 · 본디새김

십자가형은 죽이는 형벌일 뿐 아니라 처형당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수치스럽게 만드는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고 계시던 옷은 이제 병사들의 몫이 됩니다. 한 장으로 짜인 속옷은 찢으면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 말했다. 「그 속옷을 찢지 말고 누구 것이 될지 제비를 뽑자.」 성경이 이루어지기 위한 일이었다. 「그들이 내 겉옷들을 서로 나누었고 내 옷을 두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이렇게 했다.요한복음 19:24 · 본디새김

시편 22:18입니다. 시편 22편은 극심한 고난을 겪는 의인의 탄식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듯한 고통을 호소하고, 조롱과 폭력에 시달리며, 자기 옷마저 다른 사람들이 나누는 처지에 놓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편은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확신과, 그분을 찬양하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요한은 이 시편이 처음부터 병사들의 행동만을 예언하기 위해 쓰였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고난받는 의인의 언어가 예수님의 수난에서 이루어졌다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시편의 두 부분을 병사들의 두 행동에 대응시킵니다. 겉옷들은 나누고, 속옷은 제비를 뽑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 그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자매, 글로바의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요한복음 19:25 · 본디새김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동안,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 온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어머니와 곁에 서 있는, 자기가 사랑하던 제자를 보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여인이여, 보십시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복음 19:26 · 본디새김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했다. 「보아라, 네 어머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예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맞아들였다.요한복음 19:27 · 본디새김

가장 직접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를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과 동일시해 왔지만, 이 장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2:1–12). 그때에도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인이여’라고 부르셨고, 자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2:4). 이제 예수님의 때가 왔고, 어머니가 다시 등장합니다. 가나에서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첫 표징이 일어났고,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으시는 가운데 어머니와 제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세워집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자기들끼리 나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머니와 제자를 서로에게 맡기십니다.

어머니에게는 아들을, 제자에게는 어머니를 주십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새로운 가족 관계가 시작되는 상징을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다는 요한복음의 더 큰 주제와 연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오직 교회의 상징으로만 읽으면 가장 직접적인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자기 어머니를 돌보도록 하시고, 그 제자는 그때부터 그분을 자기 집에 맞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만드신 관계는 실제적인 돌봄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시는 분으로 소개되십니다(1:29). 그러나 그 거대한 사명을 이루시는 가운데서도 자기 곁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십니다.

예수님에게 세상을 향한 구원과 눈앞의 사람을 향한 돌봄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여인들이 세 사람인지 네 사람인지는 원문의 연결 방식에 따라 해석이 갈립니다. ‘어머니의 자매’와 ‘글로바의 마리아’를 같은 사람으로 읽으면 세 사람이고, 별개의 사람으로 읽으면 네 사람입니다.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여인이여’라는 호칭은 오늘날 한국어에서는 다소 차갑게 들릴 수 있지만, 당시의 그리스어 표현을 무례한 호칭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가나 장면과의 대응은 의미 있는 문학적 연결로 읽을 수 있지만, 요한이 왜 같은 호칭을 사용했는지 모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 이루어졌다」 — 목마르신 분의 마지막 선언

요한복음 19:28–30 본문 →

이 뒤에 예수는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진 줄 알고, 성경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하려고 말했다.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 · 본디새김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4:13–14). 7장에서는 목마른 사람은 자신에게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고, 요한은 그 말씀을 성령과 연결하여 설명했습니다(7:37, 39).

그런데 이제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이 목마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역설이 예수님의 실제 목마름을 상징으로 없애 버려서는 안 됩니다.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심한 갈증은 실제로 겪을 수 있는 고통입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참으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습니다(1:14).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직접 겪으셨습니다.

요한은 이 말씀이 성경의 성취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시편 69:21은 고난받는 시인이 목마를 때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말하고, 시편 22:15도 극심한 갈증에 가까운 고통을 묘사합니다. 이어지는 신 포도주 장면 때문에 시편 69편과의 연결이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요한이 장과 절을 밝히지 않으므로 하나의 구절만을 확정적으로 지목하기는 어렵습니다.

신 포도주가 가득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이에 그들이 신 포도주를 가득 머금은 스펀지를 우슬초에 매어 그의 입에 갖다 댔다.요한복음 19:29 · 본디새김

신 포도주는 당시 사람들이 마시던 시큼한 포도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우슬초에 매었다고 기록합니다. 첫 유월절 밤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슬초 묶음에 어린양의 피를 적셔 문설주와 문인방에 발랐습니다(출 12:22). 요한이 출애굽기 12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유월절 준비일이라는 배경과 우슬초가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과 유월절 어린양 사이의 연결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신 포도주를 받아 마시고 말했다. 「다 이루어졌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영을 넘겼다.요한복음 19:30 · 본디새김

원문의 동사는 완료형으로, 어떤 일이 끝났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이루어진 결과가 성립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진 것일까요? 4:34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시는 것이 자신의 음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36에서는 아버지께서 이루도록 주신 일들이 자신을 증언한다고 하셨고, 17:4에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온전하게 이루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처형이 끝났다는 말만으로는 이 선언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일이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선언입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진 줄 알고 계셨고, 성경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도록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뒤 「다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짧은 대목에 ‘이루어짐’에 관한 표현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생명이 꺼져 가는 과정으로만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께 받으신 일을 끝까지 이루시는 과정으로 서술합니다.

30절의 ‘넘겼다(παραδίδωμι)’는 동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는 행동을 가리킬 때 반복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넘기고, 종교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넘기고, 19:16에서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에 예수님 자신이 영을 넘기십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0:18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권한이 있다고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사건을 다른 사람들의 행동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내놓으시는 분이라는 사실도 함께 보여 줍니다.

이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맡으신 일을 완성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우슬초가 스펀지를 들어 올리기에 적합한 길이를 지녔는지 등의 문제는 논의가 있습니다. 특정 식물의 정확한 형태를 단정하기보다, 요한이 기록한 우슬초가 유월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신 포도주 장면을 반드시 독이나 마취제를 먹이는 행동으로 볼 이유도 없습니다. ‘영을 넘겼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가리키지만,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영광과 성령의 선물을 연결해 왔기 때문에(7:39) 성령을 주시는 일에 대한 암시를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만 19:30은 영을 누구에게 넘기셨는지 명시하지 않으므로, 이 장면에서 제자들이 곧바로 성령을 받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꺾이지 않은 뼈, 찔린 옆구리 — 죽음을 증언하는 사람

요한복음 19:31–37 본문 →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날은 준비일이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몸이 안식일에 십자가에 남아 있지 않도록, 그들의 다리가 꺾이고 몸이 내려지기를 빌라도에게 청했다. 그 안식일은 큰 날이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9:31 · 본디새김

다리를 꺾는 조치는 처형당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21:22–23은 나무에 달린 사람의 시신을 밤새 그대로 두지 말고 그날 장사 지내라고 명령합니다. 더욱이 그 안식일은 유월절 명절과 겹치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병사들은 두 사람의 다리를 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와서는 다른 판단을 내립니다.

예수에게 와서는 그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그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요한복음 19:33 · 본디새김
그러나 병사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곧 피와 물이 나왔다.요한복음 19:34 · 본디새김

피와 물은 예수님의 실제 죽음을 확인해 주는 신체적 현상으로, 세례와 성찬의 상징으로, 또는 성령의 선물을 떠올리게 하는 표지로 읽혀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피와 물이 나온 의학적 원인을 설명하지 않고, ‘피는 성찬을 뜻하고 물은 세례를 뜻한다’라고 직접 말하지도 않습니다. 성례로 읽는 해석은 뒤에 형성된 교회의 성례 이해와 연결할 수 있는 신학적 읽기이지만, 본문의 직접적인 진술과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이 장면을 그렇게 중요하게 다룰까요? 바로 다음 절에 답이 있습니다.

본 사람이 증언해 두었고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가 참말을 하는 줄 알고 있다. 이는 여러분도 믿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9:35 · 본디새김

요한은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고 독자에게 직접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외양이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목마르셨고, 이제 참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바라는 것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했고(1:7),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께서 자신을 증언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5:37). 이제 십자가의 사건을 본 사람이 증언합니다. 그를 앞에 등장한 사랑받는 제자와 연결할 수 있지만, 이 구절 자체만으로 그의 신원을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이루어지도록 이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뼈는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19:36 · 본디새김

출애굽기 12:46과 민수기 9:12에는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원래 이 규정은 유월절 식사에 관한 명령이지, 그 자체가 장차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릴 것이라는 직접적인 예언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과 긴밀히 연결해 왔습니다. 죽으신 날은 유월절 준비일이고, 신 포도주 장면에는 우슬초가 등장하며, 이제 뼈가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여기에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한 말씀(1:29)까지 겹치면,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과 연결하는 해석은 상당한 근거를 얻습니다.

시편 34:20에도 하나님께서 의인의 모든 뼈를 지키셔서 하나도 꺾이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뼈는 꺾이지 않았어도 예수님께서 죽음을 피하신 것은 아닙니다. 시편의 보호 약속을 단순히 신체적 고통을 겪지 않게 된다는 의미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성경 구절이 말한다. 「그들이 찌른 이를 볼 것이다.」요한복음 19:37 · 본디새김

스가랴 12:10의 본래 문맥은 예루살렘과 다윗 집안에 관한 예언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시고, 사람들이 찔린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이나 맏아들을 잃은 사람처럼 깊이 애통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찌르는 행위만이 아니라, 찔린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애통과 회복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보여 주면서 「보아라,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지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이제 성경은 찔린 이를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사람을 바라보더라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보는 것과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유월절 규정과 시편 34편은 뼈가 꺾이지 않는다는 인용의 출처 후보이고, 스가랴의 말씀도 직접 인용됩니다. 이 연결들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지만, 모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성경이 증언해 온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밤에 찾아왔던 사람, 이제 예수님의 몸을 거두다

요한복음 19:38–42 본문 →

요한복음 19장의 마지막에는 뜻밖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몸을 가져가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는 유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남몰래 예수의 제자로 지내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했다. 그래서 그가 와서 예수의 몸을 가져갔다.요한복음 19:38 · 본디새김

요셉은 드러내 놓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유대인이라는 민족 전체라기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었던 종교적·사회적 권력이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9:22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회당 공동체에서 내쫓기로 한 결정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제자라는 사실을 숨겼던 그가, 이제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몸을 거두기 위해 로마 총독에게 요청합니다. 그가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이 훨씬 공개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료를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요한복음 19:39 · 본디새김

요한은 독자가 니고데모의 첫 등장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3장에서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위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7:50–51에서는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심판하는 것이 율법에 맞는지 질문했지만, 그때에도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는다고 고백한 것은 아닙니다.

백 리트라는 로마식 무게 단위로 약 32.7킬로그램,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일부 해석은 이 양이 왕에게 어울리는 장례를 암시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요한이 왕의 장례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읽기는 앞에서 반복된 왕권의 주제와 향료의 양을 연결한 문학적·신학적 해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왕이라고 조롱하던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몸을 위해 많은 향료를 가져옵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빼앗는 모습을 보았다면, 여기서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는 모습을 봅니다.

요한은 니고데모의 신앙고백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때 예수님의 정체성과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그가 향료를 가지고 왔고,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몸을 장사 지냈다고 기록합니다.

처음에는 밤에 질문하러 왔던 사람이, 이제 죽으신 예수님을 장사 지내기 위해 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의 몸을 가져다 유대 사람들이 장사 지내는 관례대로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동였다.요한복음 19:40 · 본디새김

장례가 당시의 관례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로 끝까지 진행되었음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에 동산이 있었고 그 동산에 아직 아무도 안치된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요한복음 19:41 · 본디새김

18장은 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19장은 또 다른 동산에서 끝납니다. 18장의 동산은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고 19장의 동산은 처형 장소 가까이에 있어 같은 장소는 아니지만, 이야기가 동산에서 시작하여 동산에서 끝난다는 사실은 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대응을 이룹니다.

첫 동산에서는 예수님을 붙잡아 가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 채 붙잡히셨습니다. 마지막 동산에서는 예수님의 몸을 장사 지내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죽으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치되십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이 지키는 준비일인 데다 무덤이 가까웠으므로 거기에 예수를 안치했다.요한복음 19:42 · 본디새김

안식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가까이에 새 무덤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백 리트라는 로마 파운드 한 단위를 약 327그램으로 계산한 값이며, 고대의 왕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을 장사 지낼 때 많은 향료가 사용된 사례들이 있습니다. 두 동산을 통해 요한복음이 창세기의 에덴동산이나 새로운 창조를 의도적으로 암시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19장 자체는 그 연결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두 동산의 대응이 예수님의 체포와 장례를 하나의 이야기로 감싸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의 영광은 어디에서 드러났는가

요한복음 19:1–42 본문 →

같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전혀 다른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조롱하고, 빌라도는 무죄를 선언하면서도 십자가에 넘기며, 대제사장들은 황제를 유일한 왕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곁에는 어머니와 사랑받던 제자가 서 있고, 죽으신 뒤에는 요셉과 니고데모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권한의 근원을 말씀하시고, 어머니와 제자를 서로에게 맡기시며, 「다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를 고통이 없는 승리의 장면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찍질을 당하셨고, 모욕을 받으셨고, 목마르셨고,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사건들을 예수님께서 모든 힘을 잃고 패배하신 결과로도 묘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세상에서 비롯되지 않은 예수님의 왕권은 사람들의 조롱과 거부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조롱하며 붙여 준 가시관과 자주색 겉옷, 십자가 위의 팻말이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를 드러냅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시는 왕이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으시는 왕,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시는 왕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왕입니다.

그런데 이 장은 「다 이루어졌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가져가고, 니고데모가 향료를 가져옵니다. 두 사람은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아마포로 동이고, 십자가 가까이에 있는 동산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안치합니다. 예수님을 왕이라고 조롱하던 목소리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9장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가시관도, 재판석도, 십자가 위의 팻말도 아닙니다.

동산에 있는 새 무덤과, 그곳에 예수님의 몸을 안치한 사람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