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8–20장 · 죽음과 부활
보아라, 너희 왕이다
왕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습니다. 몸에는 자주색 겉옷이 걸쳐져 있지만, 그것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기 위한 옷이 아닙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면서 뺨을 때립니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 세우고 「보아라, 이 사람이다」(5절) 하고 말합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보아라, 너희 왕이다」(14절) 하고 선언합니다.
두 선언 사이에서 예수님은 더욱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십니다. 왕이라 불리지만 왕으로 대접받지 못하시고, 처벌할 만한 죄가 없다는 선언을 들으시지만 풀려나지 못하십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이 붙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읽어 온 독자에게는 이 광경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36).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이 조롱하며 붙여 주는 왕의 표식들은 무엇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요한은 예수님의 고통을 자세히 묘사하는 데 많은 지면을 쓰지 않습니다. 채찍질, 가시관, 십자가 처형이 놀라울 만큼 간결하게 기록됩니다. 대신 누가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는지,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무엇을 이루셨다고 선언하시는지를 세심하게 전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지 않기 위해 왕의 모습을 흉내 냅니다. 그러나 요한은 바로 그 장면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를 드러냅니다.
이 모든 장면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무엇을 했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으시는 동안 예수님 자신은 무엇을 하시는가입니다.
「보아라, 이 사람이다」 — 왕을 조롱하는 사람들
그때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게 했습니다.요한복음 19:1 · 두루새김
앞 장의 마지막에서 사람들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로마의 채찍질은 가벼운 징계가 아니라 몸을 심하게 다치게 할 수 있는 폭력적인 형벌이었습니다. 다만 요한은 그 방법이나 횟수, 상처의 상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이미 예수님에게서 처벌할 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18:38). 그런데 왜 채찍질을 명령할까요? 어느 정도 처벌한 모습을 보여 고발자들을 만족시키고 십자가형까지는 가지 않으려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뒤에서 다시 죄를 찾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4, 6절).
그러나 본문은 빌라도의 정확한 의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죄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을 폭력에 넘긴다는 모순입니다.
빌라도는 무죄를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 판단에 맞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병사들은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겉옷을 입혔습니다.요한복음 19:2 · 두루새김
왕에게는 왕관과 왕의 옷이 어울립니다. 병사들은 그 두 가지를 갖추어 주지만, 왕관은 가시나무로 만들었고 자주색 겉옷은 왕을 흉내 내는 도구가 됩니다. 자주색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높은 신분과 왕권을 떠올리게 하는 색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거듭 다가와 「유대인의 왕아, 만세!」 하며 뺨을 때렸습니다.요한복음 19:3 · 두루새김
말로는 존경을 표현하면서 행동으로는 모욕합니다. 그들의 의도는 조롱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병사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생겨났다고 선언했습니다. 병사들은 가짜 왕을 만들어 조롱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왕관은 예수님에게 왕권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왕관을 씌우기 전부터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가시관이 왕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장식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시관은 분명히 고통과 모욕의 도구입니다. 요한의 역설은 그 모욕이 사라지거나 아름답게 변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 모욕을 받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으로 나와 「나는 이 사람을 처벌할 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4절) 하고 말한 뒤,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 내보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시관을 쓰고 자주색 겉옷을 입은 채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보아라, 이 사람이다.」요한복음 19:5 · 두루새김
원문은 동사도 없는 짧은 선언으로, 직역하면 「보라, 그 사람」에 가깝습니다. 빌라도는 상처 입은 예수님을 보여 주며 더는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니 놓아 달라고 호소했을 수도 있고, 왕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초라해졌는지 보여 주며 조롱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의 속마음을 확정해 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사셨다고 선언했습니다(1:14). 그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신 채 사람들 앞에 서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인간의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계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사하는 폭력과 모욕을 실제로 겪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하는지 지켜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보아라, 이 사람이다」를 창조나 참된 인간의 모습에 대한 신학적 상징으로 읽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요한이 그 연결을 뚜렷이 밝히지는 않습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 권한을 가진 사람의 두려움
대제사장들과 경비병들은 예수를 보고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못 박으십시오!」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직접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라. 나는 이 사람을 처벌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겠다.」요한복음 19:6 · 두루새김
유대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저희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에 따르면 이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내세웠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9:7 · 두루새김
여기서 고발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앞 장에서 빌라도가 물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냐는 정치적 문제였습니다. 이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내세우신다는 이유를 듭니다. 이 고발은 처음이 아닙니다. 5:18과 10:33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신다며 신성모독을 문제 삼았습니다.
레위기 24:16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에 대한 사형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밝히신 일이 실제로 그 율법을 어기는지는 고발자들의 주장과 구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아들로 증언해 왔으므로, 갈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모독하셨느냐, 아니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느냐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했습니다.요한복음 19:8 · 두루새김
요한은 그가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로마 사회에도 신들이 사람의 일에 끼어든다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종교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을 수 있고,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 자체가 두려움을 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요한복음 19:9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반복되어 온 물음입니다. 사람들은 나사렛이나 갈릴리라는 출신을 문제 삼았고(7:27, 41–42),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에서 오셨고 어디로 가시는지 아시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8:14). 눈먼 채 태어났다가 보게 된 사람도 예수님의 출신을 모른다는 종교 지도자들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9:29–30).
이제 그 질문을 로마 총독이 던집니다. 빌라도가 신적인 기원을 묻는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들어 온 독자에게 이 질문은 출신지 확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빌라도에게 자신의 나라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셨습니다(18:36–37). 자신이 누구이신지 전혀 밝히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실 뿐입니다.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내게 대답하지 않느냐? 내게는 너를 놓아줄 권한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요한복음 19:10 · 두루새김
빌라도의 말은 현실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문제 삼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네게 주지 않았다면 너는 나를 어찌할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긴 사람의 죄가 더 크다.」요한복음 19:11 · 두루새김
「위에서」라는 말은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곧 사람이 위에서 태어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3:3)에도 등장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새로운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위에서」는 빌라도의 권한이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절대적인 권한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그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일까요?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그 해석을 막습니다. 누군가에게 더 큰 죄가 있다는 것은 빌라도에게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빌라도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권한으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이 사람을 놓아주시면 총독은 황제의 친구가 아닙니다. 자신을 왕이라고 내세우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를 거스릅니다.」요한복음 19:12 · 두루새김
고발자들은 이제 종교적 고발보다 더 강력한 압박을 가합니다. 「황제의 친구」는 황제와의 관계나 정치적 충성심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놓아주면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겠다는 압박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놓아주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조금 전 그는 생사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권한을 어떤 판단에 따라 사용할 것인지는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나를 네게 넘긴 사람」이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예수님을 넘긴 유다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예수님을 총독에게 넘긴 대제사장 가야바 또는 그가 대표하는 종교 지도자들로 읽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사야 53:7에서 고난받는 종이 입을 열지 않는 모습과 주제적으로 이어 볼 수 있지만, 요한이 여기서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황제의 친구」가 공식 명예 칭호로 쓰인 경우도 있었지만, 이 구절에서 반드시 그 법적 지위를 뜻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에게는 황제 말고 다른 왕이 없습니다」 — 뒤바뀐 충성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돌을 깐 곳’, 히브리 말로는 가바다라고 부르는 곳에서 재판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요한복음 19:13 · 두루새김
이곳은 공식적인 판결이 내려지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원문의 동사 에카티센(καθίζω)은 「빌라도가 앉았다」로도, 「빌라도가 예수님을 앉혔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읽기는 재판하는 자리의 용도와 문장의 일반적인 흐름에 맞아 자연스럽고, 둘째 읽기도 문법적으로 가능하여 빌라도가 왕을 흉내 내는 조롱을 완성하는 장면, 나아가 요한이 예수님의 참된 왕권을 드러내려 한 장면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날은 유월절 준비일이었고, 낮 열두 시쯤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보아라, 너희 왕이다.」요한복음 19:14 · 두루새김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이라는 시간 안에 놓습니다. 뒤에서 뼈가 꺾이지 않는 장면까지 읽으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앞에서는 「보아라,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던 빌라도가, 이번에는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외쳤습니다. 「없애 버리십시오! 없애 버리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이냐?」 대제사장들이 대답했습니다. 「저희에게는 황제 말고 다른 왕이 없습니다.」요한복음 19:15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왕이십니다. 사무엘상 8:7에서 이스라엘이 인간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은 다윗 왕조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는 약속도 전하므로, 인간 왕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이유로 예수님을 고발해 놓고, 정작 로마 황제를 자신들의 유일한 왕이라고 선언합니다. 정치적 압박을 위한 발언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모든 신앙을 버렸다고까지 주장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는 역설은 매우 강합니다.
이 장면을 모든 유대 사람의 신앙에 대한 판단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15절은 대제사장들의 대답이며, 이야기의 갈등은 예수님을 고발하는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특정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결국 무엇에 의지하게 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율법을 내세웠지만 황제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고,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했지만 정치적 압박 앞에서 물러납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움직였던 사람들이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넘겨받았습니다.요한복음 19:16 · 두루새김
요한은 빌라도가 옳은 판결을 내렸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의 반복된 무죄 선언과 최종 행동 사이의 모순을 독자가 똑똑히 보게 합니다.
처벌할 만한 죄가 없다는 판단은 있었지만, 그 판단을 지키는 판결은 없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원문의 「여섯째 시」를 일반적인 유대식 시간 계산에 따라 「낮 열두 시쯤」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5:25는 예수님께서 셋째 시, 곧 오전 9시 무렵에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기록합니다. 요한이 자정부터 계산하는 로마식 방식을 써서 여섯째 시가 오전 6시를 뜻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요한복음이 일관되게 그 방식을 쓴다는 증거가 충분한지는 논쟁적이어서 두 복음서의 시각 차이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유월절 날짜에 대해서도 앞 장에서 살펴본 차이가 이어집니다.
십자가 위에 기록된 왕의 이름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골터’라고 부르는 곳으로 나가셨습니다. 히브리 말로는 골고다라고 하는 곳입니다.요한복음 19:17 · 두루새김
다른 복음서(마태복음 27:32, 마가복음 15:21, 누가복음 23:26)에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요한은 그 일을 기록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시는 예수님에 집중합니다. 두 기록이 반드시 모순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지셨다가 나중에 시몬이 대신 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요한 본문은 그 경과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병사들은 그곳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다른 두 사람도 함께 못 박았는데, 예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한 사람씩 달았습니다.요한복음 19:18 · 두루새김
못 박는 장면은 한 문장으로 끝납니다. 고통의 세부 묘사 대신, 세 개의 십자가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빌라도는 팻말을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거기에는 「나사렛 사람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9:19 · 두루새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시 가까이에 있어서 많은 유대 사람이 이 팻말을 읽었습니다. 팻말은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쓰여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9:20 · 두루새김
히브리어는 유대 사람들의 언어적·종교적 세계와, 라틴어는 로마 통치와 연결되고, 그리스어는 동부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였습니다. 죄목을 알리려던 팻말이 여러 언어로 사람들에게 읽힙니다. 빌라도가 의도하지 않았을 의미가 생깁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조롱하는 글이 예수님의 왕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글이 됩니다.
유대 사람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마십시오. 이 사람이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말했다고 쓰십시오.」요한복음 19:21 · 두루새김
「유대인의 왕」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왕이시라는 선언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말했다고 쓰면 예수님의 주장일 뿐이 됩니다. 대제사장들은 이 차이를 분명히 하려 합니다.
빌라도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쓴 것은 그대로 두겠다.」요한복음 19:22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 압박에 밀리던 빌라도가 이번에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믿었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더 양보하지 않으려 했거나 대제사장들을 조롱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넘긴 총독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적은 글만큼은 지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땅에서 들어 올려지실 때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이끄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요한은 그것이 죽음의 방식을 가리킨다고 설명했습니다(12:32–33). 십자가는 사람을 가장 수치스럽게 낮추는 처형 도구였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지시는 자리입니다. 고통 자체가 영광스럽다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길이 그 수치스러운 죽음을 통과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요한은 시선을 십자가 아래로 옮깁니다.
옷을 나누는 병사들과 새로운 가족이 되는 사람들
병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 예수의 겉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한 몫씩 가졌습니다. 속옷도 가져갔는데, 그 옷은 천을 이어 꿰맨 자리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째로 짠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19:23 · 두루새김
십자가형은 처형당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수치스럽게 만드는 형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고 계시던 옷은 이제 병사들의 몫이 됩니다. 통째로 짠 속옷은 찢으면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제비를 뽑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이 옷은 찢지 말고 누가 가질지 제비를 뽑자.」 이는 「그들이 내 겉옷을 서로 나누고 내 옷을 놓고 제비를 뽑았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이렇게 했습니다.요한복음 19:24 · 두루새김
요한이 인용한 시편 22:18은 극심한 고난을 겪는 의인의 탄식입니다. 시인은 버림받은 듯한 고통과 조롱을 호소하며 자기 옷마저 남들이 나누는 처지를 말하지만, 시편은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확신과 찬양하는 공동체로 이어집니다. 요한은 이 시편이 처음부터 병사들의 행동만을 예언하려고 쓰였다고 말하지 않고, 고난받는 의인의 언어가 예수님의 수난에서 이루어졌다고 이해합니다.
요한은 시편의 두 부분을 병사들의 두 행동에 대응시킵니다. 겉옷은 나누고, 속옷은 제비를 뽑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자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9:25 · 두루새김
병사들이 옷을 나누는 동안,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 온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머니와 곁에 서 있는 자기가 사랑하시던 제자를 보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보세요.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이에요.」요한복음 19:26 · 두루새김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이분이 네 어머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예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요한복음 19:27 · 두루새김
가장 직접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를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으로 보아 왔지만, 이 장에서 확인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2:1–12). 그때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2:4). 이제 예수님의 때가 왔고, 어머니가 다시 등장합니다. 가나에서는 첫 표징이 일어났고, 여기서는 죽음 가운데 어머니와 제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세워집니다.
병사들이 예수님에게서 빼앗아 각자의 소유를 늘리는 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계를 주십니다.
어머니에게는 아들을, 제자에게는 어머니를 주십니다.
여기에서 교회의 새로운 가족 관계가 시작되는 상징을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상징으로만 읽으면 가장 직접적인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예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라는 기록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만드신 관계는 실제적인 돌봄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시는 분으로 소개되십니다(1:29). 그러나 그 사명을 이루시는 가운데서도 자기 곁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십니다.
예수님에게 세상을 향한 구원과 눈앞의 사람을 향한 돌봄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의 여인들이 세 사람인지 네 사람인지는 원문의 연결 방식에 따라 갈립니다. 「어머니의 자매」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를 같은 사람으로 읽으면 세 사람, 별개로 읽으면 네 사람이며,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두루새김은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부르시는 말을 「어머니」로 옮겼습니다. 직역인 「여인이여」는 오늘날 한국어에서 차갑게 들릴 수 있지만, 당시의 그리스어 표현은 무례한 호칭이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가나에서도 같은 호칭이 쓰였는데, 이 대응은 의미 있는 문학적 연결로 읽을 수 있으나 요한이 그 이유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 목마르신 분의 마지막 선언
그 뒤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성경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놀랍도록 평범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고(4:13–14), 목마른 사람은 자신에게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던 분입니다(7:37–39). 그 생명의 물을 주시겠다던 예수님 자신이 목마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역설이 예수님의 실제 목마름을 상징으로 없애 버려서는 안 됩니다.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몸에게 심한 갈증은 실제 고통입니다. 처음부터 요한이 강조해 온 것처럼(1:14),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직접 겪으셨습니다.
요한은 이 말씀을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과 연결합니다. 시편 69:21은 고난받는 시인이 목마를 때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말하고, 시편 22:15도 극심한 갈증에 가까운 고통을 묘사합니다. 이어지는 신 포도주 장면 때문에 시편 69편과의 연결이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요한이 장과 절을 밝히지 않으므로 한 구절만 확정적으로 지목하기는 어렵습니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스펀지에 신 포도주를 흠뻑 적신 뒤 우슬초라는 식물의 줄기에 매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댔습니다.요한복음 19:29 · 두루새김
우슬초는 첫 유월절 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를 적셔 문 양쪽 기둥과 위쪽 가로대에 바른 도구입니다(출애굽기 12:22). 요한은 출애굽기를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유월절 준비일이라는 배경과 우슬초가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과 유월절 어린양 사이의 연결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받아 마신 뒤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숨을 거두셨습니다.요한복음 19:30 · 두루새김
원문은 테텔레스타이(τελέω)입니다. 완료형으로, 어떤 일이 끝났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이루어진 결과가 그대로 이어지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자신의 음식이라고 하셨고(4:34), 아버지께서 이루도록 주신 일들이 자신을 증언한다고 하셨으며(5:36),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온전하게 이루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다고 기도하셨습니다(17:4). 「다 이루어졌다」는 처형이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일이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선언입니다.
28절부터 이 짧은 대목에는 「이루어짐」이 거듭 나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시고, 「성경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목마르다 하시고,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생명이 꺼져 가는 과정만이 아니라 아버지께 받으신 일을 끝까지 이루시는 과정으로 서술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다거나 실제 죽음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사명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두루새김은 마지막을 「숨을 거두셨습니다」로 옮겼지만, 원문은 「영을 넘기셨다」입니다. 여기의 「넘기다」(παραδίδωμι)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는 행동에 거듭 쓰인 동사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넘기고, 종교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넘기고,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깁니다(19:16).
그런데 마지막에는 예수님 자신이 영을 넘기십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권한이 있다고 하신 말씀(10:18)과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시지만, 요한은 그 사건을 다른 사람들의 행동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맡으신 일을 완성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 포도주는 당시 사람들이 마시던 시큼한 포도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반드시 독이나 마취제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우슬초가 스펀지를 들어 올리기에 알맞은 길이였는지 등은 논의가 있으므로, 식물의 정확한 형태를 단정하기보다 유월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영을 넘겼다」는 일반적으로 죽음을 가리키지만,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영광과 성령의 선물을 연결해 왔기 때문에(7:39) 성령을 주시는 일에 대한 암시를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만 19:30은 영을 누구에게 넘기셨는지 밝히지 않으므로, 이 장면에서 제자들이 곧바로 성령을 받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꺾이지 않은 뼈, 찔린 옆구리 — 죽음을 증언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다음 날인 안식일은 특별히 큰 날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그들을 내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남아 있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19:31 · 두루새김
다리를 부러뜨리는 조치는 처형당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쓰일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21:22–23은 나무에 달린 사람의 시신을 밤새 두지 말고 그날 장사 지내라고 명령하는데, 본래 처형된 시신을 나무에 다는 상황을 다루지만 십자가 처형 이후의 시신 처리와도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 안식일은 유월절 명절과 겹치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병사들은 두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습니다(33절).
그 대신 병사 하나가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요한복음 19:34 · 두루새김
피와 물을 예수님의 실제 죽음을 확인해 주는 몸의 현상으로 보는 해석이 있고, 세례와 성찬의 상징으로 읽는 해석, 물과 성령과 생명이 이어지는 요한복음의 흐름에서 성령의 선물을 떠올리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피와 물이 나온 의학적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만으로 죽음의 과정을 진단할 수는 없습니다. 또 요한은 「피는 성찬, 물은 세례」라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 해석은 뒤에 형성된 교회의 세례와 성찬 이해와 연결한 신학적 읽기로, 본문이 직접 말하는 내용과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이 장면을 그렇게 중요하게 다룰까요?
이 일을 본 사람이 증언했고, 그 증언은 참됩니다. 그는 자신이 참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믿게 하려고 증언한 것입니다.요한복음 19:35 · 두루새김
요한은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고 독자에게 직접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겉으로 그렇게 보인 일이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목마르셨고, 이제 참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바라는 것은 죽음의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고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했고(1:7), 아버지께서 아들을 증언하셨듯이(5:37), 이제 십자가의 사건을 본 사람이 증언합니다. 이 증언자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앞에 나온 사랑하시던 제자와 연결할 수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이 일들은 「그의 뼈는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일어났습니다.요한복음 19:36 · 두루새김
이 표현은 두 가지 구약 배경과 연결됩니다. 먼저 출애굽기 12:46과 민수기 9:12에는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본래 유월절 식사에 관한 명령이지 메시아의 십자가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은 아니지만, 요한은 유월절 준비일, 우슬초, 그리고 이제 꺾이지 않은 뼈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과 긴밀히 연결해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한 말씀(1:29)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또 시편 34:20에는 하나님께서 의인의 모든 뼈를 지키셔서 하나도 꺾이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뼈는 꺾이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피하신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편의 보호 약속을 몸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뜻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또 다른 성경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요한복음 19:37 · 두루새김
스가랴 12:10의 본래 문맥은 예루살렘과 다윗 집안에 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시고, 사람들이 찔린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이나 맏아들을 잃은 사람처럼 깊이 슬퍼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찌르는 행위만이 아니라 깊은 슬픔과 회복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보아라,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지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이제 성경은 그들이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사람을 바라보더라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보는 것과 눈으로만 보는 것은 다릅니다.
요한이 피와 물의 장면을 증언하며 믿음을 요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밤에 찾아왔던 사람, 이제 예수님의 몸을 거두다
요한복음 19장의 마지막에는 뜻밖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요셉은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대 사람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는 와서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습니다.요한복음 19:38 · 두루새김
요셉은 드러내 놓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유대 사람이라는 민족 전체라기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었던 종교적·사회적 권력이었을 것입니다. 9:22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회당에서 내쫓기로 한 결정이 등장합니다.
살아 계실 때에는 제자라는 사실을 숨겼던 그가, 이제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로마 총독에게 요청합니다.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이 훨씬 공개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전에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왔습니다. 그는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료를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습니다.요한복음 19:39 · 두루새김
3장에서 니고데모는 밤에 와서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으로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위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7:50–51에서는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심판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고 물었지만, 그때에도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은 굳이 「전에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이라는 말로 독자가 그 첫 등장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가 가져온 향료는 약 33킬로그램에 이르는 많은 양입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많은 향료를 가져옵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빼앗는 모습을, 여기서는 예수님께 드리는 모습을 봅니다.
요한은 니고데모의 신앙고백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그가 향료를 가지고 왔고,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냈다고 기록합니다.
처음에는 밤에 질문하러 왔던 사람이, 이제 죽으신 예수님을 장사 지내기 위해 옵니다.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유대 사람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습니다.요한복음 19:40 · 두루새김
장례가 관습에 따라 치러졌다는 기록은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로 끝까지 진행되었음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었고, 그 동산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9:41 · 두루새김
18장은 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19장은 또 다른 동산에서 끝납니다.
두 동산이 같은 장소는 아닙니다. 18장의 동산은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고, 19장의 동산은 처형 장소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첫 동산에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을 붙잡아 가는 사람들이, 마지막 동산에서는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두 동산이 짝을 이루어 예수님의 체포와 장례를 하나의 이야기로 감쌉니다.
안식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무덤도 가까이 있었기에, 그들은 거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둡니다(42절).
조금 더 깊이
「백 리트라」는 로마 파운드 한 단위를 약 327그램으로 계산하면 약 32.7킬로그램입니다. 고대의 왕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을 장사 지낼 때 많은 향료가 쓰인 사례가 있어, 이 양이 왕에게 어울리는 장례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것이 왕의 장례라고 직접 말하지 않으므로, 앞에서 반복된 왕권의 주제와 향료의 양을 연결한 문학적·신학적 해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두 동산을 통해 창세기의 에덴동산이나 새로운 창조를 암시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19장 자체는 그 연결을 밝히지 않습니다.
왕의 영광은 어디에서 드러났는가
같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전혀 다른 반응들이 나타났습니다. 병사들은 조롱하며 옷을 나누었고,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했다면서도 넘겼으며, 대제사장들은 황제를 유일한 왕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곁에는 어머니와 사랑하시던 제자가 서 있었고, 죽으신 뒤에는 요셉과 니고데모가 시신을 거두었습니다.
그 모든 일을 겪으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이기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빌라도에게 권한이 어디에서 오는지 말씀하시고, 어머니와 제자를 서로에게 맡기시고, 「다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요한은 채찍질과 모욕, 목마름과 실제 죽음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모든 힘을 잃은 패배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하며 붙여 준 왕의 표식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를 드러냈습니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왕이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으시는 왕입니다.
요한은 마지막에 두 사람의 조용한 행동을 기록합니다. 요셉이 시신을 가져가고, 니고데모가 향료를 가져와,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포로 감쌉니다. 그들은 십자가 가까이에 있는 동산으로 가서,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둡니다.
예수님을 왕이라고 조롱하던 목소리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9장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가시관도, 재판하는 자리도, 십자가 위의 팻말도 아닙니다.
동산에 있는 새 무덤과, 그곳에 예수님의 시신을 둔 사람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