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18–20장 · 죽음과 부활

「나다」와 「아니에요」

한밤중, 무장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찾아옵니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숨거나 달아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먼저 그들 앞으로 나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는다는 대답에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도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는 아니지요?」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아니에요.」

이 두 대답이 요한복음 18장의 가장 인상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십니다. 반면 베드로는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숨깁니다.

이 대조는 뒤에 등장하는 빌라도의 심문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할 권한을 가진 총독이지만, 예수님과 대화할수록 오히려 그 자신이 진리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드러납니다. 18장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고 심문하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동산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드러납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는 제자가 누구인지가 시험받습니다. 총독 관저에서는 예수님이 어떤 왕이신지가 밝혀집니다.

세 장면을 따라가면서 한 가지 질문이 점점 선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어떤 왕이시기에, 자신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으시면서 그들과 싸우지는 않으실까요?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718장 본문 읽기 →

무기를 들고 찾아온 사람들, 그러나 먼저 나서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8:1–6 본문 →

예수께서는 이 말을 마치신 뒤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셨습니다. 그곳에 동산이 있어 예수와 제자들은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요한복음 18:1 · 두루새김

예수님은 긴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동산으로 가십니다. 기드론은 예루살렘 동쪽, 성전이 있는 산지와 올리브산 사이의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물길로, 계절에 따라 물이 흐르기도 하고 마르기도 합니다. 요한은 동산의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마태복음 26:36과 마가복음 14:32는 이곳을 겟세마네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피신처로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자주 모이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8:2 · 두루새김

유다가 특별히 비밀스러운 장소를 알아내야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평소 제자들과 자주 모이시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곳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이 유다의 접근을 알고도 그 장소를 택하셨는지는 2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4절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닥칠 모든 일을 알고 계셨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요한은 적어도 예수님이 아무것도 모르신 채 붙잡히신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반면 유다는 혼자 오지 않습니다.

유다는 군부대,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8:3 · 두루새김

로마 군부대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보낸 경비병들, 서로 다른 권력의 사람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무기를 갖추고 옵니다.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등불과 횃불까지 기록합니다.

밤이므로 불빛이 필요한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8:12). 그런데 사람들은 그 빛을 붙잡으려고 인공적인 불빛을 들고 찾아옵니다. 요한이 이 물건들을 상징 때문에 기록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빛과 어둠이 중요한 의미를 지녀 온 이 복음서에서 이 장면은 강한 문학적 대조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더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닥칠 모든 일을 알고 앞으로 나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누구를 찾느냐?」요한복음 18:4 · 두루새김

무장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먼저 움직이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숨어 계시다가 발각되신 것도 아니고, 도망가시다가 붙잡히신 것도 아닙니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 앞으로 나서십니다. 이미 그들이 누구를 찾는지 알고 계시면서도 질문하시는 것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찾는 사람을 밝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8:5 · 두루새김

「나다」는 상대가 찾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는 자연스러운 대답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더 깊은 울림을 지니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뒤로 물러나 땅에 쓰러졌습니다.요한복음 18:6 · 두루새김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 앞에서 물러납니다.

그들은 무기를 갖고 있지만, 자신들이 찾던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곧바로 붙잡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는 사건의 첫 장면은 붙잡으러 온 사람들의 힘이 아니라, 그들 앞에 스스로 나서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예수님은 앞서 8:58에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이 존재하신다고 선언하셨고, 이 말은 이사야 43:10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시는 선언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붙잡으러 온 사람들의 대답에 대해 자신이 그 사람이라고 직접 밝히신다는 읽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연스러운 대답 안에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더 깊은 의미가 겹쳐 있다는 읽기입니다. 사람들이 땅에 쓰러지는 6절 때문에 두 번째 가능성도 중요해집니다. 다만 요한은 그들이 왜 쓰러졌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예수님의 신적 권능이 그들을 쓰러뜨렸다고 해석할 수는 있지만 본문이 그 원인을 분명하게 설명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또 「군부대」(σπεῖρα)로 옮긴 말은 로마군의 대대를 뜻할 수 있지만, 부대원 전체가 동산에 출동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12절에서 지휘관까지 언급되는 것은 이 체포에 군사적 권력이 동원되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이 사람들은 가게 두어라」 — 붙잡히시면서 제자들을 지키시는 분

요한복음 18:7–12 본문 →

사람들이 땅에 쓰러진 뒤에도 예수님은 상황을 이끄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같은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자신이 그 사람이시라고 밝히시면서, 이번에는 한 가지 요구를 덧붙이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다』 하고 말하지 않았느냐?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두어라.」요한복음 18:8 · 두루새김

예수님은 체포를 피할 방법을 찾지 않으십니다. 대신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제자들까지 붙잡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저는 아무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18:9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본래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39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받으신 사람들을 잃지 않으시고 마지막 날에 일으키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장에서는 그 약속이 당장의 위험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이 장면 하나로 제자들의 최종적인 구원이 완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요한은 체포 현장에서 제자들을 보호하시는 행동을 그 더 큰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려는 순간, 베드로가 칼을 뽑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노예를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그 노예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요한복음 18:10 · 두루새김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눈앞에서 예수님이 붙잡히시려 하고, 자신에게 칼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베드로의 정확한 속마음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칼을 사용했고, 예수님이 그것을 멈추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넣어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한복음 18:11 · 두루새김

예수님은 제자들이 싸워 자신을 구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고난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단순한 정치적 사고나 불행한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보여 주십니다.

여기서 처음에 제기한 질문의 답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싸우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명을 이루시는 방식이 칼로 자신을 지키시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는 「나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에 대해서는 「이 사람들은 가게 두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누구신지는 숨기지 않으시면서, 제자들은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0:11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좋은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선언이 이제 동산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12절은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군부대와 그 지휘관, 유대 사람들의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묶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서셨고, 제자들을 보호하셨으며, 칼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묶이신 채로 예수님은 심문받으러 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 잔은 때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몫이나 운명을 상징합니다. 특히 이사야 51:17과 예레미야 25:15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경험이 잔을 마시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요한복음 18장이 이 구약 본문들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또 마가복음 14:36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요한복음은 그 기도 대신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합니다. 두 기록 모두 고난을 아버지의 뜻과 연결하지만, 요한은 특히 예수님이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고도 그 길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앞세웁니다.

안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밖에서는 베드로가 부인하다

요한복음 18:13–27 본문 →

그들은 예수를 먼저 안나스에게 데려갔습니다. 안나스는 그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장인이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8:13 · 두루새김

예수님은 곧바로 로마 총독에게 끌려가지 않으시고, 먼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로 끌려가십니다. 공식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는데도 먼저 안나스에게 데려간 것은, 이전에 대제사장을 지낸 안나스가 공식 직위와 별개로 막강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대 사람들에게 의견을 냈던 사람이었습니다.요한복음 18:14 · 두루새김

요한복음 11:49–52에서 가야바는 로마가 개입할 위험을 염려하는 지도자들에게 이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을 희생시켜 더 큰 위험을 피하자는 정치적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발언에 당사자가 의도하지 않은 더 깊은 의미, 곧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로 백성을 위한 죽음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의 말이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드러냅니다.

가야바가 그 의미를 스스로 이해했다고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그 결정을 내린 권력자들 앞에 예수님이 묶이신 채 서 계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곧바로 심문 장면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야기를 잠시 바깥뜰로 돌립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 다른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여서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갔습니다.요한복음 18:15 · 두루새김

베드로가 두려워했을지라도, 그는 적어도 예수님이 어디로 끌려가시는지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함께 등장하는 「다른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였으므로 뜰에 들어갈 수 있었고, 베드로도 그 제자의 도움으로 들어갑니다. 이 제자를 전통적으로 요한과 연결하기도 하지만, 본문은 이름을 밝히지 않으므로 누구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뜰로 들어가자마자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습니다.

문을 지키던 여자 노예가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도 이 사람의 제자는 아니지요?」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요한복음 18:17 · 두루새김

베드로는 대제사장도, 로마 지휘관도 아닌 사람에게서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베드로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정면으로 건드립니다.

동산에서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 곧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아니에요」는 원문에서 우크 에이미, 곧 자신은 아니라고 하는 대답입니다. 앞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셨고, 여기서는 베드로가 자신이 누구의 제자인지를 부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랐고, 함께 생활했고,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는 예수님을 지키려는 듯 칼까지 휘둘렀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용감한 사람과 겁 많은 사람의 대조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칼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칼을 휘두르는 용기와 진실을 증언하는 용기가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날이 추워서 노예들과 경비병들은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8:18 · 두루새김

이 장면은 베드로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강조합니다. 5절에서 유다는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도 예수님을 붙잡아 온 경비병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왔고, 유다는 예수님을 넘겼습니다. 두 사람의 행동과 의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유다도, 베드로도 어느 순간 예수님을 적대하는 사람들 곁에 서 있다는 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불을 쬐는 동안 이야기는 안쪽으로 옮겨 갑니다.

대제사장은 예수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해 물었습니다.요한복음 18:19 · 두루새김

여기서 「대제사장」은 이야기의 순서상 안나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심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가르침,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 관해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가르침이 어떻게 전해졌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드러내 놓고 말했다. 유대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늘 가르쳤고, 몰래 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요한복음 18:20 · 두루새김

「드러내 놓고」라는 말로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은밀한 음모나 비밀 조직의 가르침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의 여러 장처럼 제자들과 따로 대화하신 일도 있었지만, 세상에 전하신 가르침의 핵심은 비밀리에 숨겨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 그들은 내가 한 말을 알고 있다.」요한복음 18:21 · 두루새김

이것은 심문에 답하지 않겠다는 단순한 거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려면 실제로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요구는 고발과 심문에서 증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에 경비병이 폭력으로 응답합니다. 곁에 서 있던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말합니다. 「대제사장께 그렇게 대답하느냐?」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잘못 말했다면 무엇이 잘못인지 증언하여라. 그러나 옳게 말했다면 왜 나를 때리느냐?」요한복음 18:23 · 두루새김

예수님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폭력을 아무 말 없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으십니다.

잘못이 있다면 증언하라고, 상대방에게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대목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미리 보여 줍니다. 예수님에게 진리는 힘 있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며, 옳고 그름은 권력자의 체면이나 경비병의 폭력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태도는 베드로의 행동과 더욱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베드로는 칼로 대항했습니다. 예수님은 증언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숨겼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공개적으로 확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안나스는 예수님을 묶인 채 가야바에게 보냅니다. 그러자 요한은 다시 베드로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예수님이 안쪽에서 심문받으시는 동안, 베드로는 여전히 바깥에서 불을 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당신도 그 사람의 제자는 아니지요?」 하고 묻고, 베드로는 다시 「아니에요」라고 부인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은 더욱 구체적입니다.

대제사장의 노예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그는 베드로가 귀를 잘라 버린 사람의 친척이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당신을 보지 않았나요?」요한복음 18:26 · 두루새김

처음에는 단순히 제자인지를 물었습니다. 이제는 베드로가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 그것도 베드로가 상처 입힌 사람의 친척이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위험을 느꼈을지는 본문에 기록되지 않지만, 상황이 앞선 질문들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위협적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다시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곧 수탉이 울었습니다.요한복음 18:27 · 두루새김

요한은 이 순간 베드로가 울었다거나 자리를 떠났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앞의 세 복음서는 베드로의 반응을 더 자세히 전하지만, 여기서는 수탉이 울었다는 말로 장면을 끝냅니다. 예수님은 앞서 베드로에게 수탉이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38). 이제 그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독자는 숯불 곁에 서 있는 베드로를 마지막으로 보게 됩니다. 그는 추위를 피하고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안쪽에서 묶인 채 심문받으시는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의 말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몸이 묶인 예수님은 자유롭게 진실을 말씀하시고, 몸이 자유로운 제자는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부인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안나스는 기원후 6년경부터 15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일했으며,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19절의 「대제사장」을 안나스로 읽는 근거는 24절에서 안나스가 예수님을 가야바에게 보냈다고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전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에게 이 호칭을 쓰는 방식과 심문의 순서를 두고는 해석상 논의가 있습니다. 또 21절에서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는 요구는 어떤 사람의 죄를 확정할 때 여러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신명기 19:15의 원칙을 떠올리게 하지만, 요한복음이 그 율법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깨끗함을 지키려는 사람들, 죽음을 요구하는 사람들

요한복음 18:28–32 본문 →

사람들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총독 관저로 데려갔습니다.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그들은 정결을 잃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으려고 관저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18:28 · 두루새김

예수님은 이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데려온 사람들은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종교 의식에서 요구하는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이방인의 거처에 들어가면 종교적으로 부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절은 유월절 날짜를 두고 앞의 세 복음서와 차이가 있어 보이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요한이 이 장면에서 만들어 내는 더 직접적인 대조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정결을 지키려고 관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 온 이유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정결 자체를 지키는 일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정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시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고발 내용도 충분히 제시하지 않은 채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면서, 동시에 종교적으로 부정해지는 일을 피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바르게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요한복음이 증언해 온 바로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독자는 그 두 행동 사이의 간극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유대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문맥을 따라 읽어야 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을 총독에게 넘긴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편에 선 고발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를 모든 유대 사람의 집단적 책임으로 확대하는 것은 본문이 보여 주는 구체적인 행위자들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자신도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빌라도가 밖으로 나와 「이 사람을 무슨 죄로 고발하느냐?」고 묻습니다. 재판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질문입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면 총독께 넘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8:30 · 두루새김

이것은 구체적인 고발 내용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넘겼다는 사실 자체를 예수님께서 죄인이시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쁜 일을 했다고 판단했으니 나쁜 일을 한 것이다」라는 주장에 가깝습니다.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데려가서 너희 율법에 따라 재판하여라.」 유대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저희에게는 누구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요한복음 18:31 · 두루새김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더욱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를 따져 묻거나 벌을 주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 일은 예수께서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으실지 가리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일어났습니다.요한복음 18:32 · 두루새김

앞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땅에서 들어 올려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요한은 그것이 예수님께서 어떤 죽음을 맞으실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했습니다(12:32–33). 들어 올려진다는 것은 십자가형을 가리키는 동시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높아지심이라는 신학적 의미도 지닙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로마 총독의 권한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의 행동을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길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보여 줍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와, 예수님의 죽음이 지니게 될 의미는 같지 않습니다.

앞서 가야바의 발언에서 보았던 역설이 다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는 분명한 모세 율법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니며, 구체적인 정결 규범은 당시의 관습과 해석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유월절 날짜의 문제는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6:17–19, 마가복음 14:12–16, 누가복음 22:7–15는 마지막 만찬을 유월절 식사와 연결하는데, 요한복음 18:28에서는 예수님이 붙잡히신 뒤 이른 아침에도 유월절 식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처럼 서술되고, 19:14도 재판이 유월절 준비일에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한 해석은 요한과 앞의 세 복음서가 날짜를 다르게 배치했으며,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 어린양과 연결하는 의미를 강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유월절 음식」을 이어지는 명절 기간의 식사까지 포함하는 말로 보아 두 기록의 시간표를 조화시킵니다. 이 구절만으로 어느 쪽이 역사적으로 정확한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31절의 대답을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사형 집행 권한이 전혀 없었다는 보편적인 법률 규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우선 로마 총독 앞에 선 고발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상황을 전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 빌라도 앞에 서신 왕

요한복음 18:33–38 본문 →

이제 18장의 가장 깊은 대화가 시작됩니다.

빌라도는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한복음 18:33 · 두루새김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주장은 단순히 종교적 칭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왕이라는 말에는 정치적 권위와 다스릴 권한이 포함될 수 있었고, 로마의 통치에 도전한다는 혐의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로마의 질서에 위협이 되는 정치적 인물이신지 확인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해 네게 한 말이냐?」요한복음 18:34 · 두루새김

「왕」이라는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말하는 왕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질서 안에서 이해되는 왕이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왕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칭호를 받아들이거나 부정하시기 전에, 빌라도가 그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드러내려 하시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내가 유대 사람이냐?」 하고 자신을 유대 사람들의 종교적 논쟁과 구별하려 하면서,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서 나왔다면, 나를 섬기는 사람들이 내가 유대 사람들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니다.」요한복음 18:3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흔히 예수님의 나라는 현실 세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순전히 영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온」의 「에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전치사(ἐκ)는 어떤 것의 출처나 근원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가 어디에 존재하느냐보다 어디에서 나왔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가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나라가 세상의 권력처럼 생겨나고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차이를 예수님 자신이 설명하십니다. 보통의 왕이라면 붙잡히지 않으려고 군사력을 동원할 것입니다. 왕을 지키는 것이 곧 왕국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독자는 동산에서 일어난 일을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칼을 뽑았을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멈추게 하셨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칼로 자신을 보호하고 적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형태의 국가 권력이나 공적 질서에 관한 완결된 정치 이론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싸우는 방식은 거부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세상의 왕들은 보통 자신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붙잡히시는 길을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이 답을 듣고도 다시 묻습니다.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왕이라고 말한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고, 바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복음 18:37 · 두루새김

빌라도의 관심은 여전히 왕이라는 칭호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문장은 빌라도의 표현을 되받는 말로도, 왕이라는 칭호를 받아들이는 말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예수님께서 곧바로 설명하시는 내용은 같습니다.

왕의 역할을 설명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군대를 거느리는 일이나 법을 만드는 일, 영토를 넓히는 일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진리를 증언하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단지 사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정확한 정보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셨고(14:6), 자신이 전하시는 말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 진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지에 관한 진리이며, 예수님의 왕권은 그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 모두 자기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지 않으시고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단지 사람이 가진 지식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하고 반응하는 어떤 현실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10장의 좋은 목자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이 자기 목소리를 듣고 자신을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27).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호하셨고, 이제 총독 앞에서는 자신이 어떤 왕이신지 밝히십니다.

좋은 목자와 참된 왕의 모습이 한 사람 안에서 연결됩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그는 이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처벌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겠다.」요한복음 18:38 · 두루새김

그 질문이 진지한 탐구였는지 냉소적으로 되묻는 말이었는지 본문은 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다음 행동은 분명합니다.

빌라도는 질문을 던진 뒤 밖으로 나갑니다.

예수님의 답을 듣지 않습니다.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의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질문을 남긴 채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이야기 속에서 그에게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듣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 밖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간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선언하는 말은 더욱 뜻밖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지만, 적어도 예수님께서 처벌받으실 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풀려나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야기는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37절의 첫 문장은 「왕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다」처럼 빌라도의 표현을 되받는 읽기와, 「네 말대로 나는 왕이다」처럼 칭호를 받아들이는 읽기로 갈립니다. 문장 자체와 대화의 문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기며, 이 구절 하나만으로 어느 해석이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또 마가복음 1:15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 나라가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께서 드러내시는 진리를 통해 이해됩니다. 38절의 「진리가 무엇이냐?」는 진지한 철학적 질문으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냉소로도 읽을 수 있지만, 본문은 빌라도의 표정이나 어조를 전하지 않으므로 어느 쪽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십시오!」 — 왕을 거부하는 선택

요한복음 18:39–40 본문 →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처벌받으실 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선언한 뒤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너희에게는 유월절에 내가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습이 있다. 그러니 너희를 위해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바라느냐?」요한복음 18:39 · 두루새김

빌라도는 예수님을 다시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조금 전 예수님과 나눈 대화의 핵심이었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나라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무엇을 위해 세상에 오셨는지 말씀하셨는데도 빌라도는 같은 칭호를 씁니다. 그의 표현에 조롱이 섞여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39절 자체는 그 의도를 분명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그들이 다시 외쳤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십시오!」 바라바는 강도였습니다.요한복음 18:40 · 두루새김

이제 18장의 마지막 대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 밝히셨고,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처벌받으실 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요한은 바라바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강도」(λῃστής)로 옮긴 말은 단순히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도둑보다는 폭력을 사용하는 강도나 무장한 도적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그가 폭력적인 범죄와 연결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나왔다면 섬기는 사람들이 싸웠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군중이 선택한 바라바는 폭력적인 범죄와 연결된 사람입니다. 이 대조를 통해 요한은 어떤 왕이 거부당하고 있는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본문은 사람들이 바라바를 선택한 구체적인 동기를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라바가 로마에 저항하는 인물이라서 그를 더 좋아했는지, 종교 지도자들의 요구에 동조했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이 장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벌받을 만한 죄가 발견되지 않은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선택했다는 결과는 분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정기적으로 죄수를 놓아주는 관습이 당시 로마 제국의 공식 제도로 얼마나 널리 시행되었는지는 독립적인 역사 자료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요한이 기록한 재판 장면 안에서 빌라도가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마가복음 15:7은 바라바가 폭동 중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과 함께 갇혀 있었다고 기록하고, 누가복음 23:19는 그가 폭동과 살인 때문에 감옥에 있었다고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요한복음은 그러한 혐의를 반복하지 않으므로, 「강도」라는 말 하나만으로 바라바의 정치적 신념이나 그가 속했던 집단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진실을 말씀하시는 것을 막지 못한 분

요한복음 18:1–40 본문 →

요한복음 18장에는 질문이 유난히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고, 문을 지키던 여자 노예는 베드로에게 제자인지를 묻고,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묻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의 지위나 권한이 그가 진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무기를 가진 사람들도, 폭력으로 대응한 대제사장 측도, 질문을 던지고 떠나간 빌라도도, 그리고 이 밤의 베드로도 진실 앞에 서지 못합니다.

이 모든 장면 가운데 예수님만은 한결같은 태도를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 숨겨 위험을 피하려 하지 않으시고, 폭력을 사용하여 위험을 없애려 하지도 않으십니다. 진리를 증언하시면서 자신이 가셔야 할 길을 받아들이십니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지 않으시지만 무력한 분으로 묘사되지 않으시고, 불의한 대우를 받으시지만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동산에서 그를 비롯한 제자들이 떠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호는 베드로가 그날 밤 충분히 강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 두려움을 가볍게 여기지도, 베드로의 부인을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실패하는 동안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요한은 진리를 증언하신다는 말씀을 장의 마지막에 놓지 않습니다. 대신 그 진리를 증언하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아니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총독 관저 밖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외칩니다.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십시오!」

바라바가 실제로 감옥 문을 나서는 장면도, 예수님께서 다시 끌려가시는 장면도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처벌할 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는 총독의 선언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군중의 외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밝히는 말씀으로 시작된 밤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는다는 외침으로 끝납니다.

요한복음 18장은 바로 그 외침 앞에서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