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4–16장 · 죽음과 부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빌라도는 왕이냐고 물었고, 군인들은 왕에게 인사하는 흉내를 냈으며, 십자가 위에는 왕이라는 죄목이 붙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마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진심으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왕에게는 공통된 조건이 있었습니다. 왕이라면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이라면 적을 굴복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이라면 적어도 십자가에서 내려올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마가는 독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한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이야기를 이끕니다. 동시에 그 죽음이 얼마나 참혹한 패배처럼 보였는지도 조금도 감추지 않습니다.

이 두 사실을 함께 읽어야 마가복음 15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915장 본문 읽기 →

왕이라는 질문 앞에서 침묵하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15:1–5 본문 →

이른 아침,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전날 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찬송받으실 분의 아들이냐는 질문을 받으셨습니다(14:61). 이제 로마 총독 앞에서 그 질문은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체와 하나님에 대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총독에게 왕이라는 칭호는 정치적 의미를 가집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유대 땅에서 누군가 왕을 자처한다면 제국의 통치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궁금해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에게 물었다. 「네가 바로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가 그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그것은 네가 하는 말이다.」마가복음 15:2 · 본디새김

그리스어로는 ‘네가 말한다’입니다. 빌라도가 질문에 사용한 ‘네가’라는 강조형 대명사를 예수님께서 그대로 되돌려 주십니다. 이 대답은 단순한 긍정도, 명백한 부정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이라는 말을 무조건 거부하지 않으시지만, 빌라도가 이해하는 왕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으십니다.

마가복음 앞부분을 읽은 독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사실을 짐작할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1:15),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45).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다가오는 다윗의 나라를 찬양하기도 했습니다(11:10).

그러나 빌라도가 상상하는 왕은 그런 왕이 아닙니다.

이어서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 일을 들어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빌라도는 다시 대답을 요구합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침묵은 이사야 53: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고난받는 종은 학대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원래부터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 장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정체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14:62). 이제는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거나 고발자들의 주장을 논박하지 않으십니다.

말해야 할 것을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마가는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내적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에 빌라도가 놀랐다는 사실만 전합니다.

겉으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점차 빌라도야말로 예수님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본문은 포로기 이스라엘의 고난과 회복이라는 문맥 안에서 읽혀야 하지만, 마가는 예수님의 침묵을 통해 그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직접적인 인용이 아니라 서술을 통한 주제적 연결입니다.

누구를 놓아줄 것인가 — 바라바와 예수님

마가복음 15:6–15 본문 →

빌라도는 명절마다 사람들이 청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곤 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관행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제시합니다. 다만 이것이 로마 제국 전역에서 시행된 공식 제도였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별도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마가가 전하는 당시의 관행으로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그 자리에 바라바라는 죄수가 있습니다.

그는 폭동에 연루된 사람들과 함께 갇혀 있었습니다. 그 폭동에서는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마가는 바라바 개인이 직접 살인을 저질렀는지까지 특정하지는 않지만, 그가 폭력적인 반란 사건과 관련하여 구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인물은 우연히 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앞에서 제기된 왕의 문제를 한층 선명하게 만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군중은 폭동과 관련된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합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으면 묘한 대비가 생깁니다. 한 사람은 정치적 폭력과 연루되어 갇혀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정치적 왕이라는 혐의를 받지만 지금까지 묘사된 행적은 가르침과 치유와 섬김이었습니다.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께서 왜 넘겨지셨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이 시기하여 그를 넘긴 줄 알았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5:10 · 본디새김

그런데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따라 판결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군중에게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대제사장들이 군중을 부추기자 다시 묻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하랴?」마가복음 15:12 · 본디새김

예수님을 처형할 권한을 가진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군중에게 묻고 있습니다. 군중은 두 차례에 걸쳐 십자가 처형을 요구합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했느냐?」 그들은 더욱 거세게 소리쳤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마가복음 15:14 · 본디새김

그러나 마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죄를 묻던 재판이, 마지막에는 군중의 요구를 얼마나 만족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어 버립니다.

마가는 판결의 동기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빌라도는 무리의 비위를 맞추려고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채찍질한 뒤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겼다.마가복음 15:15 · 본디새김

이 한 문장은 빌라도의 책임을 흐리지 않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넘겼고 군중이 처형을 요구했지만, 채찍질과 십자가 처형을 명령할 권한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그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마가가 지목하는 것은 구체적인 지도자들과 그들이 부추긴 군중, 그리고 처형을 결정한 로마 권력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이시며, 뒤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여자들 역시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라바는 풀려나고 예수님께서는 넘겨지십니다.

이 교환은 마가복음 10:45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롭게 떠올리게 합니다. 인자는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라바의 석방 자체가 그 말씀의 직접적인 성취라고 마가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풀려나는 죄수와 죽음으로 넘겨지시는 예수님의 대비는 예수님의 사역이 가진 대속의 의미를 구체적인 장면 속에서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자리를 대신하듯 처형장으로 향하십니다. 마가는 바라바가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오직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조롱으로 거행된 왕의 즉위식

마가복음 15:16–20 본문 →

빌라도의 판결이 끝나자 군인들은 예수님을 총독 관저 안으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 온 부대를 불러 모읍니다.

이들이 하는 행동은 일정한 순서를 갖고 있습니다.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왕에게 인사하고, 무릎을 꿇어 절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왕을 높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의 권위를 흉내 내어 무너뜨리는 조롱입니다. 자주색 옷은 왕실의 복식을 연상시키고, 관은 왕권의 표지가 되며, 무릎 꿇는 행위는 신하의 예법을 흉내 냅니다.

그에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왕이시여, 만세.」마가복음 15:18 · 본디새김

이들의 행동이 더욱 잔인한 것은 경의를 표하는 동작과 폭행이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으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머리를 갈대로 때리고 침을 뱉습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형식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가능한 한 낮은 자리로 떨어뜨립니다.

마가가 이 장면을 묘사하는 방식에는 놀라운 절제가 있습니다. 그는 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길게 설명하거나 예수님의 감정을 상상해 적지 않습니다. 군인들이 한 행동만을 기록합니다. 독자는 그 동작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스스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전체를 읽어 온 독자에게 이 장면은 단순한 조롱을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을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제시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큰 사람이 되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10:43–4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권위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군인들은 힘없는 왕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롱하는 바로 그 모습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왕권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시어 자신을 지키시는 대신, 타인이 가하는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자신이 걸어오신 길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마가는 고통 자체가 거룩하다거나, 폭력을 참고 당하는 일이 언제나 옳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들의 폭행은 명백한 모욕이며, 예수님의 고난은 그 폭력이 정당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왕으로 살아오셨으며, 그 길을 어디까지 걸어가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군인들은 조롱을 마친 뒤 자주색 옷을 벗기고 예수님의 원래 옷을 다시 입힙니다. 그들에게 왕의 의식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펼쳐 보이는 왕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만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인사와 환영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로마 세계의 통치자를 환호하는 언어를 흉내 내는 조롱으로 쓰입니다.

오른쪽과 왼쪽 — 영광의 자리가 드러나다

마가복음 15:21–27 본문 →

예수님께서 처형장으로 가시는 길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등장합니다.

그는 들에서 오는 길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그를 붙잡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마가는 시몬의 마음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기꺼이 도왔다는 말도 없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가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사실만 전합니다. 시몬의 행동을 곧바로 이상적인 제자의 헌신으로 묘사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앞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8:34의 내용)

그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름도 낯선 사람이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에 도착하십니다. 마가는 그 이름의 뜻을 「해골의 자리」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몰약을 섞은 포도주를 주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고통을 덜기 위한 음료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마가는 제공자의 의도도,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이유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누가 무엇을 가질지 제비를 뽑아 그의 옷을 나누었다.마가복음 15:24 · 본디새김

십자가 처형의 고통에 관한 상세한 묘사는 없습니다. 못이 어느 곳에 박혔는지, 예수님의 몸이 어떤 상태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가는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군인들의 행동을 기록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고통과 그 아래에서 옷을 나누어 갖는 사람들의 일상이 한 문장 안에 놓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순간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처형을 마치며 얻는 물건이 관심사입니다.

이 장면은 시편 22:18과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십자가 위에는 죄목이 적힙니다. 「유대인의 왕.」 군인들의 조롱이 이제 공식적인 처형 명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와 함께 강도 둘을, 하나는 그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십자가에 못 박았다.마가복음 15:27 · 본디새김

이 위치를 읽을 때 마가복음 10장이 떠오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에게 예수님의 영광 가운데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10:37).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는지, 자신이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상상했던 영광은 높은 자리에 앉아 왕의 권세를 나누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양옆에 있는 사람들은 왕의 신하가 아니라 함께 처형당하는 죄수들입니다. 마가는 두 장면이 연결된다고 직접 해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위치 표현이 되풀이되는 것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마가는 이제 그 자리를 보여줍니다. 십자가 한가운데 계신 예수님께서는 왕좌에 앉은 승리자가 아니십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을 당하시는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너진 자리가 아니라, 그 가르침의 의미가 끝까지 드러나는 자리로 읽힙니다.

조금 더 깊이

10:40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실 때 사용하시는 ‘왼쪽’의 그리스어 표현이 15:27에도 나타납니다. 또 마가가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는 것도 특이합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이 장면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정보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이 마가의 독자들에게 알려진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여기 등장하는 루포가 로마서 16:13의 루포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골고다라는 명칭이 실제로 어떤 지형이나 사건에서 생겨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본래 시편 22편에서 의로운 고난자는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자신의 옷을 나누어 갖는 적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마가는 시편을 명시적으로 인용하지 않지만, 옷을 나누고 제비를 뽑는 두 동작을 통해 그 시편의 장면을 재현합니다.

「남들은 구원했으면서」 — 조롱하는 이들이 던진 가장 깊은 질문

마가복음 15:29–32 본문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사람들이 모욕하기 시작합니다.

지나가는 이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를 모욕하고 말했다. 「아하, 성소를 헐고 사흘 만에 세운다는 이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을 구원하여라.」마가복음 15:29–30 · 본디새김

이 말은 앞서 예수님을 심문할 때 등장했던 성소에 관한 증언을 떠올리게 합니다(14:58). 당시 증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소를 헐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그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그 증언을 예수님의 확정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 아래에서는 그 논란이 더욱 단순한 조롱으로 바뀝니다. 성소를 다시 세울 수 있다면서 자기 몸 하나 구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조롱은 더욱 날카롭습니다.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마찬가지로 조롱하며 서로 말했다. 「남들은 구원했으면서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마가복음 15:31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조롱의 전제로 삼습니다.

마가복음 앞부분에는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으며, 회당장의 죽은 딸을 일으키셨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도우셨다는 사실 자체보다 예수님께서 이제 자신을 돕지 못하신다는 사실이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구원할 능력이 있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35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 시험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신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가가 지금까지 보여준 예수님의 길, 곧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길은 그 자리에서 중단됩니다.

물론 마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지만 일부러 내려오지 않으셨다고 여기서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해석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여러 차례 예고하시고 그 의미를 밝히셨던 앞선 말씀들(8:31, 9:31, 10:33–45)을 함께 읽을 때 도출됩니다.

대제사장들은 마지막 조건을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야 한다. 우리가 보고 믿도록 말이다.」 그와 함께 못 박힌 이들도 그를 모욕했다.마가복음 15:32 · 본디새김

그들은 믿음을 위해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구하는 증거는 정확히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가르치신 길을 버리시는 행동입니다.

이 장면은 마가복음 8:11–12와도 연결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능력을 증명하시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모습을 보는 것일까요?

마가는 곧 전혀 다른 대답을 보여줍니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시는 아들

마가복음 15:33–37 본문 →

여섯째 시가 되자 온 땅에 어둠이 내려 아홉째 시까지 이어집니다. 날이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어둠이 찾아옵니다.

마가는 어둠의 자연적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독자는 이 장면에서 구약 예언서가 사용했던 심판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홉째 시에 예수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마가복음 15:34 · 본디새김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유일한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승리의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고백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을 버리셨는지 묻는 절규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1을 인용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너무 빨리 위로의 말로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이 질문을 하십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가능하다면 이 잔을 자신에게서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4:36). 그리고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듯한 깊은 고통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을 부르십니다.

탄식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가장 깊은 고통을 내놓는 말입니다.

그런데 곁에 있던 몇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달려가 해면에 신 포도주를 흠뻑 적셔 갈대에 붙여 그에게 마시게 하며 말했다. 「두어라. 엘리야가 그를 내리러 오는지 보자.」마가복음 15:36 · 본디새김

이 장면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마지막 순간의 극적인 구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마가는 마지막 외침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그 말을 알지 못한 채 예수님의 죽음을 마주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의 일반적인 낮 시간 계산으로 여섯째 시는 정오 무렵, 아홉째 시는 오후 세 시 무렵입니다. 아모스 8:9에서 여호와야훼는 심판의 날에 한낮의 해가 지고 밝은 대낮이 어두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문맥은 이스라엘의 불의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마가의 어둠이 아모스의 예언을 직접 성취한다고 본문이 명시하지는 않지만, 한낮의 어둠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는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서는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느끼셨는지 세부적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 한마디를 근거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존재론적으로 끊어졌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을 넘어섭니다. 마가는 그러한 신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시편 22편은 고난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탄식시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끼며,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조롱받고, 죽음 가까이에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합니다. 시편은 그 고통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고백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모든 민족이 여호와야훼를 경배하게 될 것을 바라봅니다(시 22:24–28).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첫 구절을 인용하심으로써 그 후반부의 구원까지 암시하신 것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한편으로 시편 전체를 아는 독자는 첫 구절을 듣는 순간 탄식에서 찬양으로 나아가는 시편의 흐름을 함께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가는 앞서 옷을 나누는 장면을 통해 이미 시편 22편과 예수님의 죽음을 연결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가가 직접 기록한 예수님의 말씀은 시편의 첫 구절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편의 후반부를 낭송하셨다거나, 그 순간 이미 구원을 확신하고 계셨다고 마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읽기는 서로 배척될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전체가 담고 있는 희망을 기억하면서도 예수님의 부르짖음에 담긴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곁에 있던 이들은 예수님의 「엘로이」라는 외침을 「엘리야」와 연결한 것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잘못 알아들었는지, 조롱하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찢어진 휘장과 백부장의 고백

마가복음 15:38–39 본문 →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직후, 마가는 뜻밖의 장소로 시선을 옮깁니다. 골고다에서 성소로 장면이 바뀝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마가복음 15:38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짧지만 마가복음 전체의 흐름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마가복음 1:10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찢어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순간에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집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백부장이 말합니다.

그의 맞은편에 서 있던 백부장이 그가 이렇게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말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마가복음 15:39 · 본디새김

두 장면에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찢다’, ‘갈라지다’라는 뜻입니다. 세례 장면에서는 하늘이 찢어지고, 십자가 장면에서는 휘장이 찢어집니다.

이 언어적 대응은 마가복음의 중요한 문학적 구조를 이룹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의 정체가 선포되고, 죽음의 순간에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다시 그 정체에 관한 선언이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반복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휘장이 찢어진 사건 자체의 의미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새롭게 열리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고, 기존 성전 질서에 대한 심판의 표지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과 백부장의 고백은 나란히 기록되어 있지만, 마가는 백부장이 휘장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본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모습입니다.

이 문장은 마가복음의 시작부터 이어져 온 정체성의 문제를 다시 불러옵니다. 세례 때에는 하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1:11). 더러운 영들도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았습니다(3:11, 5:7). 변화산에서는 다시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9:7). 그러나 인간의 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이 긍정적인 선언으로 나오는 것은 이 장면이 처음입니다.

어떤 해석은 이 말을 마가복음의 결정적인 신앙고백으로 읽습니다. 다른 해석은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특별한 신적 성격을 인정했더라도, 그것이 완성된 기독론적 고백은 아닐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정확히 어디까지 이해했는지와 별개로, 마가가 이 말을 배치한 위치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입니다.

이것은 앞서 종교 지도자들이 제시한 조건과 정면으로 대비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면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은 예수님께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숨을 거두셨을 때 인간의 입에서 나옵니다.

마가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능력 있는 아들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통과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휘장에 관한 두 해석은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하는 방식이 새롭게 열리는 것과 기존 성전 질서가 종말을 향한다는 의미는 함께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가가 휘장의 위치나 사건의 뜻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 이상 어느 하나만을 유일한 의미라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휘장이 성소 입구에 있는 바깥 휘장인지, 지성소를 구분하는 안쪽 휘장인지도 논의됩니다. 이 구별에 따라 사건의 상징적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안쪽 휘장이라면 하나님 임재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과 관련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6:31–34에서는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고, 레위기 16장에서는 대제사장이 정해진 속죄 의식에 따라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사건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새롭게 열리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3–14와 10:19–22는 후대의 신약적 신학 전개 안에서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반면 마가복음 자체의 문맥을 강조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셨습니다(13:2). 성전은 앞서 예수님께서 권위에 도전하신 장소였고, 예수님에 대한 재판에서도 성소에 관한 주장이 핵심 쟁점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은 기존 성전 질서에 대한 심판, 혹은 그 질서가 결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표지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그리스어 표현에는 관사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법적 특징과 로마인의 종교적 배경을 고려하면, 백부장이 예수님의 정체를 기독교 신앙의 충만한 의미로 이해했는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는 여자들과 무덤을 찾은 사람

마가복음 15:40–47 본문 →

백부장의 고백 뒤에 마가는 조용히 또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여자들도 멀찍이서 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막달라 사람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살로메가 있었다.마가복음 15:40 · 본디새김

이들은 단순히 처형장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마가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함께 올라온 여자들이 더 많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예수님 공동체의 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은 열두 제자의 부르심과 활동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들이 갈릴리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고 섬겼는지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거의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자 제자들이 십자가 장면에서 보이지 않는 동안, 여자들은 멀리서나마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마가는 그들의 마음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이 표현은 뒤에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등장합니다.

그는 존경받는 공회 의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몸을 요청합니다.

여기서 요셉의 신분은 독자를 놀라게 합니다. 마가복음 15장은 온 공회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다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회에 속한 사람이 이제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나섭니다.

그가 앞선 공회의 모든 결정에 찬성했는지는 마가가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마가는 공회라는 집단만으로 그 안에 속한 모든 개인의 태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셉에게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1:15). 그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 이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요청합니다.

여기에는 설명되지 않은 긴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를 선포하신 분은 지금 죽어 계십니다.

요셉은 이 상황에서 무슨 신학적 결론을 내렸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갑니다. 「용기를 내어」라는 표현은 그 행동이 가볍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로마에 의해 처형된 사람의 몸을 요청하는 일은 정치적·사회적 위험을 동반할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이미 죽으셨다는 말에 놀랍니다. 그리고 백부장을 불러 죽음을 확인합니다. 조금 전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던 그 군인은 이제 총독에게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해 주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확인입니다. 마가는 둘을 같은 인물의 역할 안에 놓습니다.

요셉은 아마포를 사서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리고 감쌉니다. 그리고 바위에 파인 무덤에 모신 뒤 돌을 굴려 입구를 막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셨고, 실제로 장사되셨습니다.

마가는 그 사실을 서둘러 지나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요구하고, 죽음을 확인하고, 아마포를 구입하고, 몸을 내려 감싸고, 무덤에 모시고, 돌을 굴려 놓는 과정이 차례로 기록됩니다. 이 모든 행동은 하나의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잠시 의식을 잃은 상태나 상징적 사건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행동에는 그 이상의 의미도 있습니다. 앞서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제 요셉은 아마포를 사서 예수님의 몸을 감쌉니다. 앞에서는 군인들이 예수님의 몸을 처형의 대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은 그 몸을 장사 지내야 할 사람의 몸으로 대합니다.

그의 행동이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도 예수님을 함부로 버려두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마가는 마지막으로 다시 여자들을 등장시킵니다.

막달라 사람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가 어디에 놓였는지 보고 있었다.마가복음 15:47 · 본디새김

십자가에서 멀찍이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 무덤이 어디인지 보고 있습니다.

마가는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마가복음 15:1–47 본문 →

세상의 권력은 흔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자신의 뜻에 복종시킬 수 있는가로 측정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깊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실 수 있는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렇다고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그저 참고 견디라고 요구할 근거로 십자가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은 타인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원칙이 아니며, 예수님의 죽음은 억압받는 사람을 더 억압하기 위한 모범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요구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자신이 말씀하신 사랑과 섬김의 길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점점 조용해집니다.

군중의 고함도, 병사들의 조롱도, 재판장의 질문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의 몸을 아마포로 감싸 바위 무덤에 모십니다. 무덤 입구에는 돌이 굴려지고, 두 여자는 예수님께서 어디에 놓이셨는지 바라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왕이라는 말이 반복되었던 하루가 이렇게 끝납니다.

왕의 자리를 둘러싼 환호도 없고, 왕권을 증명하는 승리의 행렬도 없습니다.

다만 죽으신 예수님께서 놓이신 무덤과, 그 자리를 끝까지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가는 독자가 그 무덤 앞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