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4–16장 · 죽음과 부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빌라도는 왕이냐고 물었고, 군인들은 왕에게 인사하는 흉내를 냈으며, 십자가 위에는 왕이라는 죄목이 붙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마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진심으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왕에게는 공통된 조건이 있었습니다. 왕이라면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이라면 적을 굴복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이라면 적어도 십자가에서 내려올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마가는 독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한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이야기를 이끕니다. 동시에 그 죽음이 얼마나 참혹한 패배처럼 보였는지도 조금도 감추지 않습니다.
이 두 사실을 함께 읽어야 마가복음 15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왕이라는 질문 앞에서 침묵하시는 예수님
날이 밝자 곧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율법학자들, 곧 온 의회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전날 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찬송받으실 분의 아들이냐는 질문을 받으셨습니다(14:61). 이제 로마 총독 앞에서 그 질문은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마가복음 15:2 · 두루새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주장하시는지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총독에게 왕이라는 칭호는 정치적 의미를 가집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유대 땅에서 누군가 왕을 자처한다면 제국의 통치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이 대답은 단순한 긍정도, 명백한 부정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이라는 말을 무조건 거부하지 않으시지만, 빌라도가 이해하는 왕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으십니다.
마가복음 앞부분을 읽은 독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사실을 짐작할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1:15),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45).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다가오는 다윗의 나라를 찬양하기도 했습니다(11:10).
그러나 빌라도가 상상하는 왕은 그런 왕이 아닙니다.
이어서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발하고, 빌라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느냐?」 하고 다시 대답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앞 장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정체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14:62). 이제는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거나 고발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으십니다. 말해야 할 것을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마가는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속마음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에 빌라도가 놀랐다는 사실만 전합니다.
겉으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점차 빌라도야말로 예수님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가 행사하는 재판권은 곧 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네가 그렇게 말한다」의 원문에서는 빌라도가 질문에 사용한 ‘네가’라는 강조형 대명사를 예수님께서 그대로 되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사야 53:7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고난받는 종은 학대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사야 본문은 포로기 이스라엘의 고난과 회복이라는 흐름 안에서 읽혀야 하지만, 마가는 직접적인 인용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같은 주제를 연결합니다.
누구를 놓아줄 것인가 — 바라바와 예수님
빌라도는 명절마다 사람들이 요청하는 죄수 한 사람을 풀어 주곤 했습니다.
그 자리에 바라바라는 죄수가 있습니다.
그는 반란자들과 함께 갇혀 있었습니다. 마가는 바라바 개인이 직접 사람을 죽였는지까지 밝히지는 않지만, 그가 폭력적인 반란 사건과 관련하여 갇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인물은 우연히 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앞에서 제기된 왕의 문제를 한층 선명하게 만듭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으면 묘한 대비가 생깁니다. 한 사람은 정치적 폭력에 연루되어 갇혀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정치적 왕이라는 혐의를 받지만 지금까지 그려진 행적은 가르침과 치유와 섬김이었습니다.
빌라도 자신도 예수님께서 왜 넘겨지셨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시기 때문에 예수를 넘겼다는 것을 빌라도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15:10 · 두루새김
그런데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따라 판결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무리에게 예수님을 풀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묻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부추기자 다시 묻습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마가복음 15:12 · 두루새김
예수님을 처형할 권한을 가진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무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무리는 두 차례에 걸쳐 십자가 처형을 요구합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했다고 그러느냐?」 그러나 무리는 더욱 크게 외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마가복음 15:14 · 두루새김
마가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죄를 묻던 재판이, 마지막에는 무리의 요구를 얼마나 만족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어 버립니다.
빌라도는 무리를 만족시키려고 바라바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뒤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마가복음 15:15 · 두루새김
이 한 문장은 빌라도의 책임을 흐리지 않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넘겼고 무리가 처형을 요구했지만, 채찍질과 십자가 처형을 명령할 권한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그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마가가 지목하는 것은 구체적인 지도자들과 그들이 부추긴 무리, 그리고 처형을 결정한 로마 권력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이시며, 뒤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여자들 역시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라바가 풀려나고 예수님께서 넘겨지시는 이 교환은 마가복음 10:45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새롭게 떠올리게 합니다. 인자는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라바가 풀려난 일 자체가 그 말씀의 직접적인 성취라고 마가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풀려나는 죄수와 죽음으로 넘겨지시는 예수님의 대비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의미를 구체적인 장면 속에서 생각하게 합니다.
마가는 바라바가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오직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조금 더 깊이
명절에 죄수를 풀어 주는 일이 로마 제국 전역에서 시행된 공식 제도였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별도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마가가 전하는 당시의 관행으로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조롱으로 거행된 왕의 즉위식
빌라도의 판결이 끝나자 군인들은 예수님을 총독이 머무는 건물의 안뜰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온 부대의 군인들을 불러 모읍니다.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왕에게 인사하고, 무릎을 꿇어 절합니다.
겉으로는 왕을 높이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의 권위를 흉내 내어 무너뜨리는 조롱입니다. 자주색 옷은 왕실의 옷차림을 떠올리게 하고, 관은 왕권의 표시가 되며, 무릎 꿇는 행위는 신하의 예법을 흉내 냅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여, 만세!」 하며 예수께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마가복음 15:18 · 두루새김
그들은 무릎을 꿇으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머리를 갈대로 때리고 침을 뱉습니다.
마가는 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길게 설명하거나 예수님의 감정을 상상해 적지 않습니다. 군인들이 한 행동만을 기록합니다. 독자는 그 동작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스스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전체를 읽어 온 독자에게 이 장면은 단순한 조롱을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을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제시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큰 사람이 되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10:43–4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권위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군인들은 힘없는 왕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롱하는 바로 그 모습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왕권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시어 자신을 지키시는 대신, 다른 사람이 가하는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자신이 걸어오신 길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마가는 고통 자체가 거룩하다거나, 폭력을 참고 당하는 일이 언제나 옳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들의 폭행은 명백한 모욕이며, 예수님의 고난은 그 폭력이 정당해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그저 참고 견디라고 요구할 근거로 십자가를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은 다른 사람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원칙이 아니며, 예수님의 죽음은 억압받는 사람을 더 억압하기 위한 모범이 아닙니다.
군인들은 조롱을 마친 뒤 자주색 옷을 벗기고 예수님의 원래 옷을 다시 입힙니다. 그들에게 왕의 의식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펼쳐 보이는 왕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만세」(χαίρω)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인사와 환영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로마 세계의 통치자를 환호하는 말을 흉내 내는 조롱으로 쓰입니다.
오른쪽과 왼쪽 — 영광의 자리가 드러나다
예수님께서 처형장으로 가시는 길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등장합니다.
그는 시골에서 오다가 그곳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마가는 시몬의 마음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기꺼이 도왔다는 말도 없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8:34)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름도 낯선 사람이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집니다. 시몬이 스스로 제자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지만, 독자에게는 앞서 들었던 십자가의 말씀이 눈앞의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골고다에 도착하십니다. 마가는 그 이름의 뜻을 「해골터」라고 설명합니다.
군인들은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지만, 예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고통을 덜기 위한 음료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마가는 주는 사람들의 의도도,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이유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놀랄 만큼 간결한 문장이 나옵니다.
군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누가 무엇을 가질지 제비를 뽑아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마가복음 15:24 · 두루새김
못이 어느 곳에 박혔는지, 예수님의 몸이 어떤 상태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고통과 그 아래에서 옷을 나누어 갖는 사람들의 일상이 한 문장 안에 놓입니다.
이 장면은 시편 22:18과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본래 시편에서 의롭게 살면서도 고난받는 사람은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자신의 옷을 나누어 갖는 적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마가는 시편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옷을 나누고 제비를 뽑는 두 동작을 통해 그 시편의 장면을 다시 보여줍니다.
예수의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마가복음 15:26 · 두루새김
군인들의 조롱이 이제 공식적인 처형 명분으로 바뀌었습니다.
군인들은 강도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의 오른쪽에, 다른 한 사람은 왼쪽에 달았습니다.마가복음 15:27 · 두루새김
이 위치를 읽을 때 마가복음 10장이 떠오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예수님의 영광 가운데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10:37).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는지, 자신이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물으셨고, 그들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상상했던 영광은 높은 자리에 앉아 왕의 권세를 나누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양옆에 있는 사람들은 왕의 신하가 아니라 함께 처형당하는 죄수들입니다. 마가는 두 장면이 연결된다고 직접 해설하지 않지만,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위치 표현이 되풀이됩니다.
십자가 한가운데 계신 예수님께서는 왕좌에 앉은 승리자가 아니십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처형을 당하시는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너진 자리가 아니라, 그 가르침의 의미가 끝까지 드러나는 자리로 읽힙니다.
「남들은 구했으면서」 — 조롱하는 이들이 던진 가장 깊은 질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사람들이 모욕하기 시작합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했습니다. 「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 자야!」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을 구해 보아라!」마가복음 15:29–30 · 두루새김
이 말은 앞서 예수님을 심문할 때 등장했던 성전에 관한 증언을 떠올리게 합니다(14:58). 당시 증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그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아래에서는 그 논란이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다면서 자기 몸 하나 구하지 못하느냐는 더욱 단순한 조롱으로 바뀝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조롱은 더욱 날카롭습니다.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예수를 조롱하며 서로 말했습니다. 「남들은 구했으면서 자기는 구할 수 없군.」마가복음 15:31 · 두루새김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셨다는 사실을 조롱의 전제로 삼습니다. 마가복음 앞부분에는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으며, 회당장의 죽은 딸을 일으키셨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구할 능력이 있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35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구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 시험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신다면 사람들은 예수님께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가가 지금까지 보여준 예수님의 길, 곧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길은 그 자리에서 중단됩니다.
「그리스도, 이스라엘의 왕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지. 우리가 보고 믿게 말이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도 예수를 욕했습니다.마가복음 15:32 · 두루새김
이 장면은 마가복음 8:11–12와도 연결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요구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능력을 증명하시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모습을 보는 것일까요?
마가는 곧 전혀 다른 대답을 보여줍니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시는 아들
정오가 되자 온 땅에 어둠이 내려 오후 세 시쯤까지 계속됩니다.
날이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어둠이 찾아옵니다. 마가는 어둠의 자연적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후 세 시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오후 세 시쯤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마가복음 15:34 · 두루새김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유일한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승리의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고백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을 버리셨는지 묻는 절규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1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22편은 고난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탄식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첫 구절을 인용하심으로써 시편 후반부의 구원까지 암시하신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너무 빨리 위로의 말로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가능하다면 이 잔을 자신에게서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4:36). 이제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듯한 깊은 고통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을 부르십니다.
탄식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가장 깊은 고통을 내놓는 말입니다.
그런데 곁에 있던 몇 사람은 예수님의 「엘로이」라는 외침을 「엘리야」와 연결하여 엘리야를 부른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신 포도주에 흠뻑 적신 스펀지를 갈대에 달아 마시게 하면서 「엘리야가 와서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 주는지 봐요」 하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내려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엘리야가 와서 내려 주는지를 보자고 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마지막 순간의 극적인 구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십니다.
마가는 마지막 외침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그 말을 알지 못한 채 예수님의 죽음을 마주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이 시간은 여섯째 시와 아홉째 시로 표현되는데, 당시의 일반적인 낮 시간 계산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풀어 옮긴 것입니다. 한낮의 어둠은 구약 예언서가 사용했던 심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모스 8:9에서 하나님은 심판의 날에 한낮의 해가 지고 밝은 대낮이 어두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문맥은 이스라엘의 불의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마가의 어둠이 아모스의 예언을 직접 성취한다고 본문이 밝히지는 않지만, 이 이미지는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서는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시편 22편은 고통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이 고난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고백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을 바라봅니다(시 22:24–28). 한편으로 시편 전체를 아는 독자는 첫 구절을 듣는 순간 탄식에서 찬양으로 나아가는 시편의 흐름을 함께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가는 앞서 옷을 나누는 장면을 통해 이미 시편 22편과 예수님의 죽음을 연결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가가 직접 기록한 예수님의 말씀은 시편의 첫 구절뿐입니다. 두 읽기는 서로 배척될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전체가 담고 있는 희망을 기억하면서도 예수님의 부르짖음에 담긴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2편 첫 구절에 관해서도, 예수님께서 시편의 후반부를 낭송하셨다거나 그 순간 이미 구원을 확신하고 계셨다고 마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느끼셨는지 세부적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 한마디를 근거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그 존재 자체에서 끊어졌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을 넘어섭니다. 마가는 그러한 신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실제로 잘못 알아들었는지, 조롱하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찢어진 휘장과 백부장의 고백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직후, 마가는 골고다에서 성전으로 장면을 옮깁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져 두 조각이 되었습니다.마가복음 15:38 · 두루새김
마가복음 1:10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찢어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원문에서 두 장면에는 ‘찢다’, ‘갈라지다’라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의 정체가 선포되고, 죽음의 순간에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며 다시 그 정체에 관한 선언이 나옵니다.
휘장이 찢어진 사건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새롭게 열린다는 읽기와, 기존 성전 질서에 대한 심판의 표시라는 읽기가 있습니다.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과 백부장의 고백은 나란히 기록되어 있지만, 마가는 백부장이 휘장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본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모습입니다.
예수 맞은편에 서 있던 로마군 장교인 백부장은 예수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마가복음 15:39 · 두루새김
세례 때에는 하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1:11). 더러운 영들도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았습니다(3:11, 5:7). 변화산에서는 다시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9:7). 그러나 인간의 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이 긍정적인 선언으로 나오는 것은 이 장면이 처음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성경을 연구한 율법학자도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제자도 아닙니다. 로마의 처형 현장에 서 있던 백부장입니다.
어떤 해석은 이 말을 마가복음의 결정적인 신앙고백으로 읽습니다. 다른 해석은 백부장이 예수님께 특별히 신적인 면이 있음을 인정했더라도,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온전히 이해한 고백은 아닐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정확히 어디까지 이해했는지와 별개로, 마가가 이 말을 배치한 위치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입니다.
마가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능력 있는 아들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통과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휘장이 찢어진 사건 자체의 의미는 하나로 확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두 해석은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지만, 마가가 휘장의 위치나 사건의 뜻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 이상 어느 하나만을 유일한 의미라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휘장이 성전 건물 입구에 있는 바깥 휘장인지,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를 구분하는 안쪽 휘장인지도 논의됩니다. 안쪽 휘장이라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과 관련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6:31–34에서는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고, 레위기 16장에서는 대제사장이 정해진 속죄 의식에 따라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히브리서 9:3–14와 10:19–22는 이후 신약의 신학적 설명 안에서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풀어 줍니다. 반면 마가복음 자체의 문맥을 강조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셨고(13:2) 재판에서도 성전에 관한 주장이 핵심 쟁점으로 등장했으므로,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은 기존 성전 질서가 결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표시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말은 그리스어로 휘오스 테우 엔,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다’인데, 여기에는 관사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법적 특징과 로마인의 종교적 배경을 고려하면, 백부장이 예수님의 정체를 기독교 신앙이 담고 있는 충분한 의미로 이해했는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는 여자들과 무덤을 찾은 사람
백부장의 고백 뒤에 마가는 조용히 또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멀리서 지켜보던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습니다.마가복음 15:40 · 두루새김
이들은 단순히 처형장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마가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함께 올라온 여자들이 더 많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마가복음은 열두 제자의 부르심과 활동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들이 갈릴리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고 섬겼는지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거의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자 제자들이 십자가 장면에서 보이지 않는 동안, 여자들은 멀리서나마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마가는 그들의 마음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멀리서 지켜보는 일이 제자로서 충분한 행동이었다고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등장합니다.
그는 존경받는 의회 의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청합니다. 마가복음 15장은 온 의회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다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회에 속한 사람이 이제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나섭니다.
그가 앞선 의회의 모든 결정에 찬성했는지는 마가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마가는 의회라는 집단만으로 그 안에 속한 모든 개인의 태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1:15). 그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 이제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요청합니다. 그 나라를 선포하신 분은 지금 죽어 계십니다.
요셉이 이 상황에서 무슨 신학적 결론을 내렸는지 마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갑니다. 로마에 의해 처형된 사람의 시신을 요청하는 일은 정치적·사회적 위험을 동반할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벌써 죽으셨다는 말에 놀랍니다. 그리고 백부장을 불러 죽음을 확인합니다. 조금 전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던 그 군인은 이제 총독에게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해 주는 사람이 됩니다.
요셉은 고운 베 천을 사서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고 감쌉니다. 그리고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시신을 놓은 뒤 돌을 굴려 입구를 막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잠시 의식을 잃은 상태나 상징적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이제 장례를 치러야 하는 죽은 사람의 몸입니다.
앞에서는 군인들이 예수님의 몸을 처형의 대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은 그 몸을 장사 지내야 할 사람의 몸으로 대합니다.
그리고 마가는 마지막으로 다시 여자들을 등장시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이 어디에 놓이는지 지켜보았습니다.마가복음 15:47 · 두루새김
십자가에서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놓이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가는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도 밝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요구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자신이 말씀하신 사랑과 섬김의 길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점점 조용해집니다.
무리의 고함도, 군인들의 조롱도, 재판장의 질문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고운 베 천으로 감싸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놓습니다. 무덤 입구에는 돌이 굴려지고, 두 여자는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놓이는지 지켜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왕이라는 말이 반복되었던 하루가 이렇게 끝납니다.
왕의 자리를 둘러싼 환호도 없고, 왕권을 증명하는 승리의 행렬도 없습니다.
다만 죽으신 예수님께서 놓이신 무덤과, 그 자리를 끝까지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가는 독자가 그 무덤 앞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