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4–16장 · 죽음과 부활

부활 소식 앞의 두려움과 침묵

마가복음 16장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처음 선포됩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기뻐하며 노래하지 않습니다. 무덤에서 달아납니다.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오래된 사본들이 전하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으로 시작했습니다(1:1). 그러나 그 이야기의 끝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침묵합니다.

왜 마가는 이렇게 끝나는 이야기를 남겼을까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은 단순히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사건이 아닙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의 질서가 뒤집히는 소식입니다.

마가는 부활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행복한 결말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행동이 인간의 예상과 이해를 얼마나 넘어서는지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1016장 본문 읽기 →

향료를 사서 무덤으로 간 여성들 — 죽음을 돌보려는 마지막 행동

마가복음 16:1–2 본문 →

십자가와 무덤을 지켜본 사람들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의 시신에 바르러 가려고 향료를 샀습니다.마가복음 16:1 · 두루새김

이 이름들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15:40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멀리서 바라보던 여자들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셨을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15:41). 15:47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어디에 묻히셨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들은 십자가 처형과 장례의 마지막 장면에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 묻히셨는지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이제 그 시신을 돌보려고 찾아갑니다.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것을 기대하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향료를 가지고 갑니다. 시신에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장례에서는 향료와 향유를 사용하여 죽은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고 시신을 돌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미 준비된 장례, 그러나 알지 못하는 사람들

여기에는 앞선 베다니의 향유 사건과 연결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14:8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여자가 자신의 몸에 향유를 부은 일을 장례를 미리 준비한 행동으로 풀이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여자들이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가고 있습니다.

베다니의 여자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무덤을 찾는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향료를 바르려고 합니다.

두 행동 모두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깁니다.

이제 무덤에 도착한 여자들은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바를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준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아주 이른 아침, 해가 뜬 뒤에

한 주의 첫날 아주 이른 아침, 여자들은 무덤으로 갔습니다. 해는 이미 떠 있었습니다.마가복음 16:2 · 두루새김

마가는 구체적인 시각을 정밀하게 기록하려 하기보다, 여자들이 안식일이 지난 뒤 가능한 이른 시점에 무덤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전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무덤에 모셔졌습니다(15:42-46). 그리고 이제 안식일이 지나 「한 주의 첫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독자는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신 부활 예고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여전히 시신을 돌보려는 목적으로 무덤으로 가고 있습니다.

독자가 알고 있는 약속과 여자들이 예상하는 현실 사이에 간격이 생깁니다. 그 간격이 곧 놀라운 발견의 자리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아주 이른 아침」과 「해는 이미 떠 있었습니다」라는 두 표현 사이에는 시간상 약간의 긴장이 있습니다. 아주 이른 아침이라는 말이 아직 어두울 때를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해가 이미 떠 있다는 표현은 해가 떠오른 뒤의 시점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진술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해가 막 떠오른 이른 아침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돌을 굴려 내 줄까 — 인간의 질문보다 먼저 일어난 일

마가복음 16:3–4 본문 →

여성들이 걱정한 것은 돌이었다

무덤으로 가는 길에 여자들은 서로 묻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 입구의 돌을 굴려 치워 줄까?」마가복음 16:3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무덤의 입구에는 큰 돌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았다고 마가는 이미 기록했습니다(15:46). 그들은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바르려 하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돌을 치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 장면의 긴장은 거창한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실제적인 어려움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다음 절은 그 질문을 예상 밖의 방식으로 끝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돌이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보니 그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마가복음 16:4 · 두루새김

마가는 누가 그 돌을 굴렸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이 돌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돌이 옮겨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장면이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결과만 제시됩니다.

여자들은 돌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곧 발견하게 될 사실은 돌보다 훨씬 큽니다. 무덤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무덤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몸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여자들은 열린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 — 다시 살아나신 분은 누구인가

마가복음 16:5–6 본문 →

흰옷을 입은 젊은이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 흰 긴 옷을 입은 젊은이가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마가복음 16:5 · 두루새김

마가는 그를 천사라고 직접 부르지 않습니다. 「젊은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그가 그저 우연히 무덤에 앉아 있던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선언하고 제자들에게 전해야 할 말씀을 맡깁니다. 마가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무덤 안의 젊은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젊은이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젊은이가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찾고 있군요. 그는 살아났어요. 여기에는 없어요. 그를 놓았던 자리를 보세요.」마가복음 16:6 · 두루새김

부활하신 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다

젊은이는 예수님을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고, 그런 다음 「그는 살아났어요」라고 말합니다. 젊은이는 이제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과는 다른 존재가 나타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활이 십자가의 사건을 지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을 읽어 온 독자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처참하게 죽으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림받으셨고, 조롱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께서 잘못된 길을 걸으셨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죽음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고난받고 죽임당한 뒤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8:31, 9:31, 10:34). 제자들은 그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은 십자가에서 중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어 있는 자리가 말해 주는 것과 말해 주지 않는 것

여자들이 찾아온 무덤에는 예수님의 몸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직접 확인하도록 제시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비어 있는 무덤만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결론이 저절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신이 없는 이유에 관해서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 역시 빈자리만 보여 주고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그 자리가 왜 비어 있는지 설명하는 말씀, 「그는 살아났어요」가 함께 주어집니다.

빈 무덤은 그 선언을 눈앞의 현실과 연결하는 장소이며, 젊은이의 말은 그 빈자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이제 무덤이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이 선포됩니다.

마가복음은 여기서 부활이 일어나는 순간을 직접 그리지 않습니다. 돌이 움직이는 장면도, 예수님의 몸이 살아나는 과정도,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시는 모습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들려줍니다.

이제 그 소식은 무덤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는 여자들에게 다음 행동을 명령합니다.

조금 더 깊이

흰옷은 마가복음 안에서 변화산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옷은 세상 어떤 사람이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빛났다고 그려집니다(9:3). 그러나 두 장면에 흰옷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젊은이를 변화산의 예수님이나 특정 천사와 같은 존재로 볼 수는 없습니다. 「몹시 놀랐습니다」(ἐκθαμβέομαι)에 해당하는 동사를 마가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심한 고통과 충격을 겪으시는 장면에도 사용했습니다(14:33). 겟세마네에서는 다가오는 고난이 예수님을 압도했고, 무덤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 여자들을 압도합니다. 두 장면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 앞에서 깊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원문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σταυρόω)은 완료 수동 분사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겪으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밝히는 말입니다. 「살아났어요」에 해당하는 말은 에게르테(ἐγείρω)라는 수동형 동사인데, 이 수동형은 예수님께서 일으켜지셨다는 뜻과 다시 살아나셨다는 자동사 뜻을 모두 지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는 해석은 초기 기독교의 부활 선포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도행전 2:24와 로마서 10:9에서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말합니다. 다만 마가복음 16:6의 문장 자체에는 누가 그 일을 했는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또 이 선언은 마가복음 12:10-11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버림받은 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 중요한 돌이 되었다는 시편 118편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거절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거절이 하나님의 마지막 행동을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 실패한 사람들을 다시 부르는 말씀

마가복음 16:7 본문 →

누구에게 먼저 전하라는 것인가

「이제 가서 예수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전하세요. 『예수는 여러분보다 앞서 갈릴리로 가요. 예수가 전에 여러분에게 말한 대로, 여러분은 거기서 예수를 볼 거예요.』」마가복음 16: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부활 소식이 단지 죽음을 이겼다는 선언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전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왜 베드로의 이름을 따로 부를까요?

베드로는 이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만 말해도 그가 포함됩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굳이 그의 이름을 덧붙입니다.

마가복음을 따라 읽어 온 독자라면 그 이름에서 바로 앞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던 밤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닭이 두 번째로 울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무너져 울었습니다(14:72).

그 뒤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마가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활 소식이 전해지는 자리에서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제자인가

「제자들과 베드로」라는 표현을 두고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제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되었다는 해석입니다. 그는 여러 장면에서 제자들을 대표하여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실패한 일을 특별히 고려한 말씀이라는 해석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해석은 서로 하나만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려야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다만 이 말씀만으로 베드로의 회복 과정이 모두 끝났다고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16:7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직접 만나 용서하시는 장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부활 소식을 들을 사람들 가운데서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미리 하셨던 약속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난 뒤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4: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직후에 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도망치거나 부인한 뒤에 새롭게 마련된 약속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의 실패를 아시면서 말씀하신 약속입니다.

부활의 첫 소식은 실패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 실패한 제자들에게도 전해져야 할 약속으로 등장합니다.

왜 하필 갈릴리인가

젊은이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갈릴리로 가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처음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1:14-15). 갈릴리 바닷가에서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1:16-20). 제자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가까이서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리에서 그들을 만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이전 상태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있었고, 제자들의 도망과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처음 따라나섰던 지역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보다 앞서」라는 표현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먼저 찾아와 자신을 발견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가십니다.

마가의 이야기는 갈릴리에서 시작해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다시 갈릴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마가는 오래된 사본들이 전하는 결말에서 「여러분은 거기서 예수를 볼 거예요」라는 그 만남을 직접 보여 주지 않습니다. 독자에게는 약속이 주어지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서술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음 절의 침묵을 더욱 놀랍게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여러분보다 앞서」라는 말씀은 목자와 양의 관계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목자가 맞으면 양들이 흩어진다는 스가랴 13:7의 말씀으로 설명하셨습니다(14:27). 그런데 이제 흩어진 제자들보다 앞서 갈릴리로 가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흩어진 양들을 다시 모으는 목자의 행동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16:7 자체가 목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으므로, 이것은 앞선 성경 인용과 연결한 문학적·신학적 해석입니다.

「두려워서」 — 부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침묵하다

마가복음 16:8 본문 →

명령받은 사람들은 왜 말하지 않았는가

여자들은 무덤 밖으로 나와 달아났습니다. 떨림과 놀라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마가복음 16:8 · 두루새김

이 장면은 독자가 기대했을 법한 결말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나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들을 성급하게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마가는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이라고 생각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젊은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밝히는 원인은 두려움입니다.

무덤 안에는 있어야 할 시신이 없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젊은이가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실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던 현실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을 마주했습니다.

그러한 사건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입니다.

두려움은 불신앙의 증거인가

마가복음에서 두려움은 반드시 믿음이 없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을 때 제자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물었습니다(4:41). 예수님께서 오랫동안 피가 흐르는 병을 앓던 여자를 고쳐 주셨을 때 그 여자는 두려워하며 떨면서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5:33). 변화산에서도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9:6).

이 장면들에서 두려움은 단순히 하나님을 거부하는 감정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마주할 때 나타나는 반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6:8에는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여자들은 두려워할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전달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반응을 전적으로 경건하고 모범적인 두려움으로만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해석이 갈립니다. 한 읽기는 여자들의 두려움과 침묵을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 앞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갈등으로 읽으며, 그들이 증언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무게를 둡니다. 반면 다른 읽기는 그 침묵을 곧바로 실패라고 보아서는 안 되며, 부활이라는 놀라운 일을 마주한 데 어울리는 반응이자 일시적인 침묵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두 관점은 각기 본문의 중요한 특징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생 침묵했는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했는지는 1-8절에 쓰인 말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다른 복음서의 이야기를 가져와 곧바로 빈자리를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자체가 독자에게 남겨 두는 침묵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 단어가 「때문이다」라는 낯선 결말

마가복음 16:8의 마지막 그리스어는 가르(γάρ)입니다. 「왜냐하면」 또는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접속사입니다. 두루새김에서는 마지막 문장의 「두려워서」가 이 말이 나타내는 이유를 담고 있습니다.

책 전체가 이 접속사로 끝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마가는 여자들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끝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환호도 아닙니다. 무덤에서 달아난 여자들의 두려움입니다.

이 결말은 일부러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라면, 그 소식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독자는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소식은 누구에게서 시작되었습니까?

인간의 담대함에서 시작되었습니까?

아니면 인간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에도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동에서 시작되었습니까?

마가는 여자들이 두려워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부활을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고 선포했기 때문에 부활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부활의 소식은 그들의 반응보다 앞서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여자들이 끝까지 침묵했다고 이해하면 부활 소식이 어떻게 전해졌는가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마가복음이 일부러 그 문제를 독자에게 남겨 둔 것인지, 아니면 원래 더 긴 결말이 있었지만 전해지는 과정에서 사라졌는지는 다음에 살펴볼 사본에 관한 논쟁입니다.

그러나 16:8에서 끝나는 이야기를 그대로 읽을 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복음서는 부활을 선포하지만, 부활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꾸미지 않습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침묵까지 기록합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멈춥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에서는 이 접속사가 설명하는 문장의 앞이 아니라 뒤쪽에 놓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불완전한 문장이 남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가복음에는 왜 세 가지 결말이 전해지는가

마가복음 16:8 본문 →

16:8에서 끝나는 사본과 그 뒤를 이어 주는 사본들

마가복음 16장은 본문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사본의 역사를 반드시 살펴야 하는 드문 장입니다. 문제는 단순히 몇 낱말의 번역이 다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가 어디에서 끝나는가가 달라집니다.

마가복음 사본들에는 16:8 뒤에 두 종류의 결말이 전해집니다. 첫 번째는 여자들이 명령받은 모든 것을 베드로와 그 일행에게 간략히 알렸다는 말로 시작하는 짧은 결말입니다. 두 번째는 16:9-20의 긴 결말입니다.

4세기의 중요한 그리스어 사본인 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마가복음을 16:8에서 끝냅니다. 반면 많은 후대 사본에는 16:9-20이 들어 있습니다. 일부 사본에는 짧은 결말이 있고, 일부에는 짧은 결말과 긴 결말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긴 결말이 널리 전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그것이 아주 늦은 시기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2세기 후반의 교부는 마가복음의 끝부분을 언급하며 오늘날 16:19에 해당하는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왜 긴 결말을 마가가 처음 쓴 본문에 속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까요? 사본의 연대뿐 아니라 문체와 이야기의 연결 방식도 이유가 됩니다.

16:8까지의 마가복음은 여자들이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16:9는 앞 문장을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대신,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살아나셨으며 누구에게 먼저 나타나셨는지를 새롭게 설명합니다. 이미 여러 번 등장했던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 소개하는 인물처럼 설명됩니다. 사용하는 낱말과 문장 연결 방식에서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런 이유로 긴 결말이 마가의 본래 글 뒤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본 증거와 문체를 근거로 긴 결말이 원래 본문에 속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따라서 긴 결말이 후대에 덧붙여졌다는 판단은 강한 근거를 가진 다수 견해이지만, 유일한 해석은 아닙니다.

긴 결말이 마가가 직접 쓴 글이 아니라면, 원래 마가복음은 16:8에서 끝났을까요? 그 문제는 별개입니다. 한쪽에서는 마가가 의도적으로 두려움과 침묵의 장면에서 이야기를 끝냈다고 봅니다. 다른 쪽에서는 원래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기록한 부분이 있었지만 초기 전승 과정에서 사라졌다고 봅니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실제 저자의 의도였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 남아 있는 사본의 증거와 마가복음의 문학적 특징을 고려할 때 16:8을 원래 결말로 보는 해석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짧은 결말은 무엇을 해결하는가

짧은 결말의 첫 문장은 앞선 이야기의 가장 큰 긴장을 해결합니다. 16:8에서는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짧은 결말에서는 명령받은 것을 베드로와 그 일행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그들을 통해 동쪽에서 서쪽까지 영원한 구원에 관한 소식을 퍼뜨리셨다고 기록합니다. 짧은 결말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들 앞에 직접 나타나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대신 침묵으로 끝난 이야기가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간결하게 알려 줍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16:8의 낯선 결말이 지닌 문학적 효과는 달라집니다. 16:8에서 멈추면 독자는 무덤에서 달아난 여자들의 두려움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전달 명령을 마주합니다. 짧은 결말까지 읽으면 그 명령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두 결말은 독자에게 서로 다른 여운을 남깁니다.

긴 결말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16:9-20의 긴 결말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십니다. 이어 두 사람에게 나타나시고, 마지막에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이 믿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고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뒤, 하늘에 올라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십니다.

마지막에는 제자들이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기록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신약 문헌에 나타나는 부활 전승들과 여러 부분에서 연결됩니다.

긴 결말은 오래된 교회 전승의 일부로 진지하게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이를 근거로 마가가 처음부터 16:8 이후의 모든 장면을 직접 기록했다고 전제해서는 안 됩니다.

두 층위를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는 마가복음 1:1-16:8이 이루는 이야기의 흐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가 전해 온 확장된 결말의 내용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면 긴 결말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원래 이야기의 독특한 문학적 긴장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제자들과 거듭 나타나시는 예수님 — 긴 결말의 증언

마가복음 16:9–14 본문 →

부활의 소식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긴 결말은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한 주의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마리아는 전에 예수께서 귀신 일곱을 쫓아내 주신 여자였습니다.마가복음 16:9 · 두루새김

마가복음 1:1-16:8에는 귀신 일곱에 관한 정보가 없지만, 누가복음 8:2에는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따라서 긴 결말의 이 부분은 누가복음에 보존된 전승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관심은 마리아가 무엇을 보았는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중요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 계시며 마리아가 그분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마가복음 16:11 · 두루새김

첫 번째 결말의 긴장은 증언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한다는 데 있습니다. 긴 결말의 긴장은 증언을 듣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같은 문제를 반복하며 진행됩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도 믿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24:13-35의 엠마오 길 이야기와 비슷한 특징을 지닙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는 흐름이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긴 결말은 그 장소가 엠마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두 기록을 같은 사건의 요약이라고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본문 자체가 같은 사건이라고 분명히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셔도 제자들이 쉽게 믿지 않는다는 점은 마가복음 전체에서 나타났던 제자들의 이해 부족과도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긴 결말에서도 부활의 소식이 전해지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신다

나중에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고 마음이 굳어 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살아나신 자기를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가복음 16:14 · 두루새김

여기서 「마음이 굳어 있다」는 표현은 마가복음 앞부분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6:52, 8:17).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고도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긴 결말에서도 제자들은 부활의 증언을 듣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으십니다. 바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제자들은 완벽하게 이해한 다음에야 예수님께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했고, 두려워했고,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 긴 결말이 그리는 교회의 사명

마가복음 16:15–18 본문 →

복음은 어디까지 전해져야 하는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라.」마가복음 16:15 · 두루새김

이 말씀은 긴 결말의 중심적인 명령입니다. 마가복음 13:10에서 예수님은 복음이 먼저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긴 결말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온 세상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두루새김이 「모든 사람」으로 옮긴 자리는 원문에서 「모든 피조물」이라는 말로 복음을 전할 범위를 매우 넓게 나타냅니다. 바로 앞의 「온 세상」과 연결하여 복음이 두루 전해져야 한다는 뜻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은 특정 지역이나 한 민족에게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긴 결말이 전하라고 명령하는 복음의 중심에도 바로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믿음과 세례, 구원과 유죄 판결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마가복음 16:16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믿음과 세례, 구원의 관계를 논의할 때 자주 인용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분은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믿음과 세례가 초기 기독교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유죄 판결을 받는다는 결론까지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기독교 전통마다 성례의 의미와 필요성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더욱이 이 구절은 긴 결말에 속하므로, 구원과 세례에 관한 교리를 정리할 때에는 로마서 6:3-4, 갈라디아서 3:26-27, 사도행전 2:38 등 다른 신약 본문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문맥에서 우선 분명한 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과 응답이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표징은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가

이어지는 말씀에는 특별한 표징들이 등장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이 따를 것이다.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로 말할 것이다.」마가복음 16:17 · 두루새김

귀신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로 말하며, 아픈 사람들을 고치는 행동은 사도행전의 여러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귀신을 쫓아내는 권위를 주셨다는 마가복음 6:7의 기록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은 더욱 특이합니다.

「그들은 뱀을 집어 들 것이다. 독을 마시더라도 그것이 그들을 결코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을 것이고, 그 사람들은 나을 것이다.」마가복음 16:18 · 두루새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독사를 일부러 만지거나 독을 마셔야 한다는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표현은 표징이 따를 것이라는 선언이지, 믿는 사람들에게 위험한 행동을 일부러 하라는 지시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28:3-6에서는 바울이 우연히 독사에게 물렸지만 해를 입지 않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위험을 일부러 만들어 하나님의 보호를 시험하는 행동과 다릅니다. 더구나 마가복음 16:9-20이 원래 본문에 속하는지에 관해 사본 연구에서 중요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을 근거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독과 뱀으로부터 언제나 몸을 보호받는다고 단정하거나 위험한 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화하기 어렵습니다.

이야기에서 표징의 목적을 이해하려면 마지막 절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20절은 예수님께서 뒤따르는 표징을 통해 제자들이 전한 말씀이 참됨을 확실히 보여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즉, 표징은 그 자체가 신앙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복음의 말씀과 그 소식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역할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긴 결말이 강조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단지 인간의 말솜씨나 설득력만에 의존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에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이야기의 바탕에 놓여 있습니다.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예수님과 곳곳으로 나간 제자들

마가복음 16:19–20 본문 →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신다

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을 마치신 뒤 하늘로 들려 올라가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마가복음 16:19 · 두루새김

이 장면은 구약의 두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는 열왕기하 2:11에서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사건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편 110:1에서 왕의 모습을 지닌 인물이 여호와야훼의 오른편에 앉는 장면입니다.

하나님 오른쪽에 앉는다는 표현은 마가복음의 앞선 장면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14:62). 그때 예수님은 붙잡혀 심문받으시는 사람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으로 판단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셨던 권위가 이제 이야기의 결말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른쪽에 앉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공간의 위치를 설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왕의 권한과 권위를 나타내는 성경적 언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높임받으셨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떠나신 분이 함께 일하신다

그런데 긴 결말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뒤따르는 표징을 통해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됨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마가복음 16:20 · 두루새김

처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곳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서 긴 결말은 16:8에서 멈추는 이야기와 매우 다른 형태로 끝납니다. 16:8에서는 여자들이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16:20에서는 제자들이 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전합니다.

짧은 결말과 긴 결말이 모두 침묵 이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제시한다는 점은, 후대에 결말을 덧붙인 사람들의 정확한 의도를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6:8의 침묵이 복음서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는 데서 생겨나는 긴장을 두 결말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풀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 차이를 알고 읽는 것은 성경 본문을 약화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결말이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확신보다 먼저 일어난다

마가복음 16:1–20 본문 →

마가복음 16장은 신앙을 인간의 강한 확신으로만 설명하려는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덤으로 가면서 기대했던 것은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소식을 듣고도 두려워했지만, 그들의 두려움이 예수님의 부활을 취소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무덤에서 달아났지만, 그들이 들은 말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큰 돌은 굴려져 있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은 더 이상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