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4–16장 · 죽음과 부활
모두가 떠난 밤, 예수님께서 남으신 이유
마가복음 14장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로 시작해서, 한 남자가 무너져 우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처음의 여자는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가 한 일이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의 남자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첫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밤이 끝나기도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하고 행동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실 것인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선 13장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는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14장은 그 명령이 처음으로 시험받는 밤입니다.
깨뜨린 향유병과 넘겨지는 예수님
죽이려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한 여인의 행동
이야기는 음모로 시작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이틀 앞둔 때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속임수를 써서 예수를 붙잡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마가복음 14:1 · 두루새김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억하는 명절입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명절인 무교절과 함께 지켜졌으며, 예루살렘은 이 명절에 모여드는 순례자들로 붐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없애려 합니다.
다만 그들은 백성이 소동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명절에는 행동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판단 기준이 적어도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된지 여부보다, 예수님을 없앨 때 생길 정치적 결과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마가는 그 음모를 잠시 멈추고 베다니의 한 집으로 장면을 옮깁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물며 식사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설화석고라는 돌로 만든 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안에는 아주 값비싼 순수한 나드 향유가 담겨 있었습니다. 여자는 그 병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마가복음 14:3 · 두루새김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 값어치를 계산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이 넘는 값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었잖아.」 그들은 여자를 심하게 나무랐습니다.마가복음 14:5 · 두루새김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사용되던 화폐 단위였습니다(마태복음 20:2 참조). 그러므로 삼백 데나리온이 넘는 돈은 노동자가 상당한 기간, 대략 일 년 가까이 일해서 버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나름의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 많은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그들의 말을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에게도 그 질문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정말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한 번에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계산이 놓친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를 내버려 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마가복음 14:6 · 두루새김
사람들은 여자가 무엇을 소비했는지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보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함께 있다는 말씀의 뜻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할 때 언제든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너희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다.」마가복음 14:7 · 두루새김
이 말씀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보다 예수님을 위해 종교적인 일에 돈을 쓰는 것이 언제나 더 중요하다는 원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신명기 15:11의 배경이 있습니다. 신명기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가난한 형제와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넓게 펴라고 명령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늘 있다는 말은 그들을 도울 책임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책임이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지금 이 여자가 한 일은 다시 반복할 수 없는 특별한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밝히십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내 장례를 위해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마가복음 14:8 · 두루새김
이 여자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에 관한 모든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행동에 자신이 걸어가실 길과 연결된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막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지도자들의 계획을 무너뜨리지도 않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행동을 좋은 일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이것은 결과의 크기만으로 행동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름 없는 여자가 기억되고, 이름 있는 제자가 배신한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이 여자를 기억하도록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질 것이다.」마가복음 14:9 · 두루새김
마가복음은 이 여자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마가는 이름이 아니라 행동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마가복음 14:10 · 두루새김
지도자들의 살해 음모가 먼저 등장합니다. 그다음 여자의 향유 사건이 놓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지도자들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열은 여자의 행동과 유다의 행동을 서로 비추어 보게 만듭니다.
여자는 값비싼 것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고 돈을 받기로 합니다.
여자는 사람들에게 비난받지만 예수님께 인정받습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환영받지만 예수님을 배신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그의 행동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는 신분까지 밝혀지지만, 그 신분은 그의 배신을 더욱 충격적으로 만듭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이 예수님께 충성했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행동이 오히려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에 「순수한」으로 옮겨진 표현의 정확한 어원과 의미에는 논의가 있지만, 다른 것을 섞지 않은 진품 향유라는 이해가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향유를 머리에 붓는 행동은 왕이나 특별한 인물에게 기름을 붓는 관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사무엘상 16:1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왕위에 오르시는 일보다 다가오는 죽음과 장례를 직접적인 의미로 제시하십니다. 요한복음 12:1-8에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마가복음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두 기록을 같은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는지는 별도로 복음서를 비교해야 할 문제이며,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그 여자의 이름을 반드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가는 유다가 향유 사건 때문에 배신하기로 결심했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의 정보를 가져와 그의 동기를 단정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마가가 분명하게 기록하는 것은 유다가 먼저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으며, 그들이 돈을 약속했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그 돈의 액수를 밝히지도 않습니다.
유월절 식탁에서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시는 예수님
준비된 방,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제자들
마가는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물동이를 들고 가는 남자를 따라가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들어가는 집에서 큰 위층 방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제자들이 가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준비하셨던 장면(11:1-6)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장면 모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미리 알려 주신 단서를 따라가고, 말씀하신 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지막 식사를 우연히 맞이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 자리를 마련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은 그 식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같은 그릇에 손을 대는 사람이 예수님을 넘길 것이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하나,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마가복음 14:18 · 두루새김
식사는 친밀함과 신뢰를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특히 함께 음식을 나누는 사람을 해친다는 것은 관계의 바탕을 무너뜨리는 배신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자가 누구인지 공개적으로 지목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슬퍼하며 한 사람씩 예수께 물었습니다. 「설마 저입니까?」마가복음 14:19 · 두루새김
제자들은 서로 다른 사람을 지목하며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배신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는 불안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열둘 가운데 하나, 나와 함께 같은 그릇에 음식을 적시는 사람이다.」마가복음 14:20 · 두루새김
이 대답은 배신자가 얼마나 가까운 사람인지를 강조합니다. 그는 낯선 적이 아닙니다.
「인자는 자신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을 간다. 그러나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마가복음 14:21 · 두루새김
여기에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긴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넘겨주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유다의 배신을 정당화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악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 포함된다고 해서, 그 행동을 한 사람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만으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는 일과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일이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이 걸어가실 길과 자신을 넘겨주는 사람의 책임을 동시에 선언하십니다.
빵을 떼어 주시는 분
배신의 예고가 끝난 뒤에도 식사는 계속됩니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의 기도를 하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가복음 14:22 · 두루새김
마가복음에서 빵을 떼어 사람들에게 주시는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실 때 빵을 들고 축복 기도를 하신 뒤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6:41). 사천 명을 먹이실 때에도 감사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8:6).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빵을 먹고 배불렀습니다.
앞선 식사 장면과 마지막 식사는 동일한 의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빵을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독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표현을 단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라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줄여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빵은 곧 고난받고 죽임당하실 예수님 자신의 몸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다가오는 자리에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내어 주시는 행동을 하십니다.
언약의 피 — 출애굽의 기억이 새로운 의미를 얻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잔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쏟아지는 내 피, 곧 언약의 피다.」마가복음 14:24 · 두루새김
먼저 유월절의 배경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심판하시는 밤에 그 피는 이스라엘 집을 구별하는 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유월절 양의 피에 관한 배경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표현이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곳은 출애굽기 24:8입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확증하면서 피를 뿌리고, 그것을 언약의 피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요소가 들어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쏟아지는」 피입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53:12에서는 그 종이 자기 생명을 죽음에 내어놓고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언약을 확증하는 피라는 출애굽기의 표현과, 많은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는 고난받는 종의 주제가 함께 놓여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단순한 비극으로만 설명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위한 일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에 관련된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0:45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은 식탁 위에서 더욱 구체적인 형태를 얻습니다.
예수님은 배신할 제자들에게도 잔을 주셨다
이 식사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말씀의 내용만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뒤에는 모든 제자가 믿음에서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또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하고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 잔으로 마셨습니다.마가복음 14:23 · 두루새김
유다가 식사 도중 자리를 떠났다는 서술은 없습니다.
이 식탁의 중심에는 제자들이 얼마나 충성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내어 주시는지가 놓여 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롭게 마실 그날까지 포도주를 결코 다시 마시지 않겠다.」마가복음 14:25 · 두루새김
앞서 제자들에게 고난을 예고하실 때마다 부활을 함께 말씀하셨던 것처럼, 마지막 식탁에서도 다가오는 죽음 너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가는 그날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그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보다, 곧 자신들에게 닥칠 일을 마주해야 할 때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그들은 찬송을 부른 뒤 올리브산으로 나갑니다.
식탁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위층 방이 준비된 장면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시는 예수님의 특별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미리 의논해 둔 장소와 사람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것으로 이해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마가는 그 준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같은 식탁의 배신 장면은 시편 41:9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시편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신뢰하며 함께 빵을 먹던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탄식합니다. 마가복음은 이 시편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같은 식탁에 앉은 사람의 배신이라는 주제가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기독교 전통은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성찬의 근거로 받아들여 왔지만, 빵과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교파별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과 정교회, 루터교와 개혁교회 등은 각각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방식을 다르게 이해합니다. 또 「많은 사람」은 소수의 특별한 자격을 가진 사람만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볼 근거가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의 배경에서는 많은 사람을 대표하여 그들을 위해 치르는 희생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구원의 대상과 범위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을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모두 걸려 넘어질 것이다 — 제자들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밤
목자가 맞으면 양들이 흩어진다
올리브산으로 나간 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믿음에서 걸려 넘어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겠다. 그러면 양들이 흩어질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4:27 · 두루새김
여기서 「모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한 사람의 배신만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나머지 제자들 역시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를 설명하시면서 스가랴 13:7을 인용하십니다. 스가랴서에서는 하나님의 목자가 칼에 맞고 양들이 흩어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뒤에는 공동체의 심판과 단련, 남은 사람들의 회복이라는 주제가 이어집니다(스가랴 13:8-9).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자신의 고난과 제자들의 흩어짐에 적용하십니다. 여기서 목자는 예수님 자신이며, 양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이 붙잡히시는 일과 제자들의 도망을 성경에 기록된 목자의 고난과 연결하실까요?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실패할 것을 아시지만, 그 실패를 신실한 행동이라고 칭찬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끝까지 예수님 곁에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아십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마가복음 14:28 · 두루새김
「그러나」라는 말이 결정적입니다.
여기서 갈릴리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셨던 곳입니다(1:14-20).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실패하기도 전에 다시 만날 곳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실패가 아무 문제 없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다만 제자들의 실패가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가지신 뜻의 마지막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약속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믿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믿음에서 걸려 넘어져도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마가복음 14:29 · 두루새김
여기서 베드로가 실제로 말하는 것은 단순한 충성의 고백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실패할 수 있지만 자신은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알고 계신 것보다 자신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말한다. 바로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가복음 14:30 · 두루새김
그러나 베드로는 더욱 힘주어 말했습니다. 「함께 죽어야 한다 해도 저는 결코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똑같이 말했습니다.마가복음 14:31 · 두루새김
이 고백은 거짓말을 하려는 사람의 말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실제로 그렇게 결심했을 수 있습니다. 마가는 그의 말이 처음부터 위선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진심인지 아닌지보다, 자신의 결심이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될 것이라는 확신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조금 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못합니다. 진실한 결심도 자신의 한계를 충분히 알지 못하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제 이야기는 겟세마네로 향합니다.
겟세마네 — 순종은 고통을 원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분처럼 행동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겟세마네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어라.」마가복음 14:3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조금 더 나아가십니다. 이 세 제자는 마가복음에서 특별한 사건들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사람들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었고(5:37-43),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9:2-8).
그런데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몹시 놀라고 괴로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죽을 만큼 슬프다. 여기 머물며 깨어 있어라.」마가복음 14:33–34 · 두루새김
마가는 이 모습을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강한 말로 묘사합니다. 겟세마네에서는 그 말이 예수님 자신의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때때로 순종을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이라면 고통 앞에서도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고통을 느끼지 않으시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온전히 아시고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는 데서 드러납니다.
아바, 아버지 — 친밀함과 간구가 만나는 자리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해 주십시오.」마가복음 14:36 · 두루새김
마가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르시는 아람어를 그대로 남겨 둡니다.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를 부르는 말입니다. 마가는 곧이어 그리스어 「아버지」(πατήρ)를 붙입니다.
이 표현을 어린아이만 사용하는 말이나 우리말 「아빠」와 완전히 같은 표현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이 호칭이 지닌 친밀함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낯선 심판자나 멀리 떨어진 권력자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이 부름은 단순히 감정적인 친밀함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간절히 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면 이 고난도 피하게 하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간구입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바람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이 잔은 무엇일까요?
잔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만을 가리키는가
마가복음 10:38-39에서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자신이 마시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고난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겟세마네에서 그 잔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잔을 하나님의 진노 전체를 대신 감당하는 행위로 구체화하는 것은 이사야 53장과 마가복음 10:45 등을 함께 읽는 신학적 해석에 해당합니다.
마가복음 14:36만으로 잔의 모든 의미를 한 가지 교리적 설명에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잔을 자신에게 닥칠 실제적이고 두려운 고난으로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여기서 방향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의 바람을 아버지께 말씀드린 다음,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나란히 놓으십니다.
기도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한 상태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자신의 마지막 결정권이 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제자들은 잠든다
예수께서 돌아와 보시니 세 제자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었느냐?」마가복음 14:37 · 두루새김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 깨어 있지도 못합니다.
「너희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라. 마음은 기꺼이 하려 하지만 몸은 약하다.」마가복음 14:38 · 두루새김
이 말씀을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나누어 보는 생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간절한 의지와 실제적인 약함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기도하러 가십니다. 같은 말로 기도하시고 돌아오십니다. 제자들은 다시 잠들어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또 잠들어 있었습니다. 너무 졸려 눈꺼풀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마가복음 14:40 · 두루새김
이 모습은 변화산의 경험과도 대조됩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 앞에서 두려워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9:6). 이제 겟세마네에서는 예수님의 괴로움 앞에서 잠들어 있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영광 앞에서도, 고난 앞에서도 예수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세 번째 돌아오셨을 때 달라진 것
예수께서 세 번째로 돌아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자고 쉬고 있느냐? 이제 됐다.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겨진다.」마가복음 14:41 · 두루새김
이 구절의 첫 부분은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원문에서는 이제 자고 쉬라는 허락으로 읽을 수도 있고, 여전히 자고 있는 제자들을 향한 반어적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다음에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인정하더라도 뒤따르는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41절의 「때가 왔다」는 앞서 기도하셨던 바로 그 고난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가 자신을 비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붙잡히실 위협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유다는 여전히 예수님을 넘겨주러 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일어나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사람이 가까이 왔다.」마가복음 14:4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넘겨주러 오는 사람을 피해 도망가자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가오는 일을 마주하러 일어나십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상황을 원하는 대로 바꾸어 놓은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행동으로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몹시 놀라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강한 충격이나 압도적인 놀라움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9:15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크게 놀라는 모습을, 16:5-6에서는 무덤 안에서 놀라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아바는 아람어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친근하고 직접적인 호칭이지만, 성인도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잔은 기쁨이나 복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전통에는 구약의 중요한 배경이 있습니다. 반면 본문 자체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고난과 죽음입니다. 잔이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예로, 예레미야 25:15-16에서는 민족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51:17에서도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36절의 마지막 문장에서 원문은 앞부분의 「원하다」라는 동사가 뒤에서는 생략되고, 새로운 명령도 덧붙지 않습니다. 대조의 중심은 「내가」와 아버지를 가리키는 「당신이」에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아버지의 뜻에 맡기는 이 대조를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해 주십시오」라는 말로 풀어 옮깁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처음 시몬을 부르셨고,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다고 기록했습니다(3:16). 그런데 37절에서는 그를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이름 선택에 특별한 책망이 담겨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41절 첫 부분을 두루새김은 「아직도 자고 쉬고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옮깁니다. 또한 41절의 「이제 됐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이 문맥에서 정확히 어떤 뜻을 담는지 논의가 있습니다. 충분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다른 해석들도 제시됩니다.
스승에게 입을 맞추는 배신자 — 예수님을 붙잡은 사람들
가장 친밀한 행동이 체포의 신호가 되다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와 함께 왔습니다.마가복음 14:43 · 두루새김
마가는 그를 다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고 부릅니다. 이미 독자는 유다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가는 그의 신분을 반복합니다.
유다의 배신이 충격적인 이유는 단지 그가 예수님을 적들에게 넘겨주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과 함께 먹고, 길을 걷고, 가르침을 들었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는 그들에게 미리 이렇게 신호를 정해 주었습니다.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를 붙잡아 놓치지 않게 데려가십시오.」마가복음 14:44 · 두루새김
입맞춤은 친밀함과 존경을 표현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을 붙잡기 위한 표시가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다가가 「선생님!」 하고 부릅니다.
그리고 입을 맞춥니다.
이 장면에서 말과 행동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선생님」은 스승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유다는 말로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인정하지만, 행동으로는 예수님을 적들에게 넘겨줍니다.
이 짧은 장면은 앞선 베다니의 향유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유다는 선생님이라는 말을 하며 예수님께 다가가 입을 맞춥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몸으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들이 지닌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친밀함을 나타내는 행동이 반드시 사랑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 행동이 실제로 누구를 위해 사용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칼을 휘두르는 사람과 칼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곁에 서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치고 귀를 잘라 버립니다. 마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도 칼을 사용합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행동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직접 나무라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또한 칼을 맞은 사람의 귀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붙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강도를 잡으러 나오듯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마가복음 14:48 · 두루새김
예수님의 질문은 자신이 무장한 위험인물처럼 취급받고 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내가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다.」마가복음 14:4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숨어서 무장한 세력을 모으거나 밤에 비밀스럽게 폭력을 준비하신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공개적으로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사람들은 밤에 무기를 들고 찾아와 붙잡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위험한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동 자체가 예수님을 정당하게 다룰 자신이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체포를 단순히 권력자들의 음모가 성공한 사건으로만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앞서 목자가 맞고 양들이 흩어진다는 스가랴서의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닥친 일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와 연결하여 이해하십니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예수님을 붙잡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마가복음이 보여 주는 역설은 인간의 악한 선택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모두 도망쳤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가복음 14:50 · 두루새김
이 한 문장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제자 이야기를 돌아보면 무거운 문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든 사람들을 고치는 일도 보았고, 귀신을 내쫓는 권위도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가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한 사람도 끝까지 남아 있지 않았는지 각자의 변명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베 천만 남긴 젊은이
맨몸에 고운 베 천만 두른 어떤 젊은이가 예수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 천을 버려둔 채 벌거벗고 달아났습니다.마가복음 14:51–52 · 두루새김
마가복음에만 등장하는 특이한 장면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랫동안 이 젊은이를 마가복음의 저자 자신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해석에서는 이 젊은이를 제자들의 실패를 상징하는 인물로 봅니다. 마가복음 16:5에서 무덤 안에 흰옷을 입은 젊은이가 등장한다는 점을 주목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은 이 젊은이의 정체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해석도 확정적인 사실로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주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사람마저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진 것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처음에 한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이제 한 젊은이는 도망치기 위해 몸을 가리던 천까지 내놓습니다.
무엇을 위해 가진 것을 버리는가가 다릅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흩어진 자리에 예수님만 남으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 서게 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칼을 휘두른 사람을 요한복음 18:10은 베드로라고 밝히지만, 마가복음 자체에서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48절의 「강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단순히 물건을 훔치는 사람뿐 아니라 무기를 들고 약탈하는 사람이나 폭력적인 반란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젊은이를 저자로 보는 해석은 저자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이름을 밝히지 않고 기록했다는 설명입니다. 상징으로 보는 해석에서는, 그가 붙잡히지 않기 위해 몸을 가린 천까지 버리고 달아나는 모습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 일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16:5에 주목하는 해석은 두 젊은이를 문학적으로 연결하여 실패와 회복의 이미지를 읽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결이 두 인물이 역사적으로 같은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시던 예수님이 입을 여신 순간 — 누가 누구를 심판하는가
이미 결론을 정해 놓은 심문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에게 끌려가십니다. 마가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두 모였다고 기록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의회 전체는 예수를 죽이려고 그분께 불리한 증언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마가복음 14:55 · 두루새김
보통 재판에서는 증언을 듣고 그에 따라 판단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목적이 먼저 정해져 있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증언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거짓 증언을 하지만 서로 맞지 않습니다. 마가는 증언들이 서로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복합니다.
성전이 다시 등장하다
「우리는 이 사람이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무너뜨리고, 사흘 안에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세우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마가복음 14:58 · 두루새김
이 증언에는 앞서 예수님께서 성전의 파괴를 선언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성전을 무너뜨리겠다고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증언합니다. 두 진술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건물이 무너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증인들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직접 무너뜨리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사흘 안에 다른 성전을 세우겠다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마가복음 앞부분에는 예수님께서 그런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신 장면이 없습니다. 마가는 이 증언을 거짓 증언으로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 등장하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과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구약과 유대교의 종교 언어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대조하는 표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중요한 장소지만,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건물 안에 가둘 수는 없습니다. 이 배경에서 보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건물을 짓는 일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거짓 증인들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이 그 표현의 모든 내용을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으로 인정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마가는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깁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신 뒤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거짓 증인들의 입에서 성전의 파괴와 사흘이라는 시간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지만, 독자는 그들의 말을 통해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증언에 대해 답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침묵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네가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냐?」마가복음 14:61 · 두루새김
마가는 예수님의 침묵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거짓된 증언에 일일이 답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결론을 정해 놓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무의미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침묵이 자신의 정체를 완전히 숨기기 위한 침묵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제사장이 다음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네가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냐?」라는 이 질문은 지금까지의 논쟁을 한순간에 모읍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누구십니까?
마가복음 8:29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8:30). 이제 대제사장이 같은 정체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그다」 — 피고인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다. 너희는 인자가 권능의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과 함께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마가복음 14:6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정체가 가장 분명하게 선언되는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그다」라는 대답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묻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긍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짧은 대답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두 구약 본문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자신이 누구신지 설명하십니다.
첫째는 시편 110:1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왕과 같은 인물에게 자신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다니엘서 7:13-14입니다. 그곳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과 함께 나타나 하나님 앞에서 권세와 영광과 통치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미지를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13장에서 인자가 구름 가운데 오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장면이 여기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 피고인으로 서 계십니다.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시는 인자이시며, 하늘 구름과 함께 오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현재 모습과 예수님께서 주장하시는 권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신 사람이십니다. 곁에 있던 제자들도 모두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와 영광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고난당하시는 의로운 사람이시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힘없는 피고인의 모습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과 함께 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시간적 관계를 갖는지에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옷을 찢는 대제사장과 침묵 속에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그러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증인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죽을죄를 지으셨다고 판결했습니다.마가복음 14:63–64 · 두루새김
옷을 찢는 것은 깊은 충격과 슬픔, 종교적 분노를 나타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독자는 이 판결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복음서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1:11). 변화산에서도 하늘의 음성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시라고 증언했습니다(9:7). 그런데 지금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시자 그 말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판단합니다.
마가가 이야기 전체를 통해 만들어 온 긴장이 여기서 가장 커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독자는 예수님께 죄가 있다고 판결하는 사람들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명예를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고 있습니다.
예언하라고 조롱하는 사람들
몇몇 사람은 예수께 침을 뱉고 예수의 얼굴을 가린 채 주먹으로 때리며 「예언해 보아라!」 하고 말했습니다. 하인들도 예수를 넘겨받아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마가복음 14:65 · 두루새김
이것은 예언자로서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를 조롱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아시는 분이시라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맞혀 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일이 정확히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마가는 그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동안,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증언이 서로 맞지 않는 문제는 신명기 19:15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 율법은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죄를 확정할 수 없고 둘 이상의 증언을 요구합니다. 물론 이 복음서의 재판 장면을 후대에 정리된 모든 유대 법률 규정과 직접 비교하여 당시 재판의 모든 절차가 어떤 법을 어겼는지 확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마가가 서로 맞지 않는 거짓 증언과 사형을 위한 증거 찾기를 분명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2:19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오며, 요한은 그것이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설명을 곧바로 마가복음의 증인들이 정확한 말을 전했다고 판단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66:1-2에서 하나님은 하늘을 자신의 보좌, 땅을 자신의 발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이 자신을 위해 어떤 집을 지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침묵을 이사야 53:7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 종은 학대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양으로 그려집니다. 다만 마가는 여기서 이사야서를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연결은 이야기와 신앙의 배경으로 살피는 것이 적절합니다. 「찬송받으실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원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대신 「찬송받으시는 분」이라는 경건한 표현을 씁니다. 두루새김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밝혀 옮겼습니다. 「내가 그다」의 그리스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문맥에서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자연스러운 대답이며, 두루새김은 「내가 그다」로 옮겼습니다. 이 표현이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여기서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답하는 기능이 분명하므로 이 두 단어만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선언하셨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과 함께 오는 것」의 시간적 관계에 대해, 어떤 해석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시고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내시는 일을 강조합니다. 다른 해석은 장차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는 마지막 사건까지 포함한다고 봅니다. 시편 110편에서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말을 근거로 예수님의 높아지심과 장차 있을 나타나심을 구별하여 읽는 해석이 있고, 두 사건을 구별하지 않는 해석도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정확히 어느 표현을 가장 심각한 모독으로 판단했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 때문인지,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시는 권위를 자신에게 적용하셨기 때문인지, 인자의 권세를 주장하셨기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 전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신 특별한 하나님의 권위가 문제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는 예수님이 고백하시고, 아래에서는 베드로가 부인한다
두 장면이 서로를 비추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뒤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그가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안뜰까지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14:54).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달아났지만, 이후 다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멀찍이 떨어져」 따라갑니다.
그는 예수님을 완전히 떠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과 함께 붙잡힐 위험을 기꺼이 감당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속마음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복잡한 처지를 보여 줍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서 하인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쬡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잠시 예수님의 심문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베드로에게 돌아옵니다. 마가는 두 장면을 서로 맞물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심문받으십니다.
베드로는 아래쪽 뜰에서 질문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두 사람이 동시에 어려운 상황을 겪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인정하심으로써 죽음의 위험을 받아들이시고,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를 부인함으로써 그 위험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당신도 그 사람과 함께 있었다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베드로에게 다가옵니다.
그 여종은 베드로가 불을 쬐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당신도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마가복음 14:67 · 두루새김
여기서 여종은 베드로에게 어려운 신학적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모두 동의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겠어요.」 그리고 대문 쪽 뜰로 나갔습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마가복음 14:68 · 두루새김
이 대답은 단순한 부정보다 깁니다. 그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합니다.
이전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8:29).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실 것이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해 예수님을 붙들고 항의하기도 했습니다(8:32).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것 자체를 피하려 합니다.
그리고 닭이 웁니다.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첫 번째 신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세 번의 부인, 점점 강해지는 단절
그 여종은 베드로를 보고 곁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도 그들 중 하나예요.」마가복음 14:69 · 두루새김
베드로는 다시 부인했습니다.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또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그들 중 하나예요.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잖아요.」마가복음 14:70 · 두루새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단순한 고향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에게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은 위험한 신분의 표시가 됩니다. 그가 그들 중 하나라는 증거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저주까지 하며 맹세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몰라요!」마가복음 14:71 · 두루새김
여기서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자신의 부인을 매우 강한 맹세로 뒷받침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단순히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는 수준을 넘어갑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조금 전까지 그는 예수님께 직접 말하면서 「함께 죽어야 한다 해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그 사람」이라고 부르며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 변화는 매우 아픕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세 번의 부인을 통해 베드로가 한 번 실수한 것이 아니라, 압박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 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닭이 두 번째로 울었을 때
바로 그때 닭이 두 번째로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신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마가복음 14:72 · 두루새김
여기서 마가는 베드로가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렸다고 기록합니다.
조금 전까지 베드로는 자신의 판단을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결코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밤의 끝에서 드러난 것은 누구의 말이 참되었는가입니다.
베드로의 결심은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기억하는 순간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은 단순한 좌절만이 아닙니다.
그는 웁니다.
왜 울었을까요?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무너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의 눈물 속에 어떤 감정이 얼마나 담겨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투나 행동을 통해 베드로의 출신지를 알았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어 따져 물었다고 기록합니다. 또 베드로가 한 저주의 구체적인 대상이나 문구는 본문에 나오지 않으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직접 저주했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마가복음 14장이 드러내는 예수님의 길
예수님의 죽음이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죽음의 의미는 사람들이 이미 충성을 완벽하게 증명했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다는 사실이 이 장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은 여자의 아름다운 행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대제사장의 뜰입니다.
베드로는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따뜻함을 얻으려 했던 곳에서,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는 세 번 부인합니다.
그리고 닭이 웁니다.
그 소리는 베드로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까지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사람이라는 사실 앞에 서 있습니다.
마가는 그가 어떤 설명을 덧붙였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자신을 정당화하려 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기록합니다.
한밤중에 가장 확실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말이 무너지고,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예수님의 말씀이 남습니다.
그 뜰에는 여전히 불이 타고 있습니다.
닭은 두 번째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울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