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1–13장 · 예루살렘에서
무너지는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마가복음 13장은 성경에서 가장 어렵고 논쟁이 많은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지진, 극심한 고난,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현상, 구름 속에서 오는 인자까지 등장합니다. 이 말씀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 모든 일은 언제 일어납니까?
그런데 마가복음 13장을 자세히 읽으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 질문을 제자들도 예수님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기대했을 법한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사건의 시기와 표징을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속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견디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래에 관한 예언이지만, 그 말씀의 중요한 목적은 미래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미래를 마주할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데 있습니다.
마가복음 13장은 성전에서 시작합니다.
앞 장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성전 헌금궤 앞에서 가난한 과부를 바라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오실 때, 제자 하나가 건물의 웅장함에 감탄하며 건물을 가리킵니다.
제자가 바라보는 것은 성전의 거대한 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은 그 돌들이 더 이상 서 있지 않을 날입니다.
거대한 돌들이 무너질 것이다 — 무엇이 영원한가
제자의 감탄과 예수님의 선언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돌들도 정말 굉장하고 건물들도 정말 굉장합니다!」마가복음 13:1 · 두루새김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한 예배당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 민족적 정체성이 모여 있는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성전은 헤롯 대왕이 시작한 대규모 확장과 재건 사업을 통해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성전 건물뿐 아니라 넓은 뜰과 그 기반을 이루는 거대한 돌 구조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제자의 감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큰 건물들이 보이느냐? 여기에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모두 무너질 것이다.」마가복음 13: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보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건물들이 얼마나 쉽게 영원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 아십니다.
성전의 파괴는 단순히 오래된 건물 하나가 없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삶을 지탱해 온 제사 체계와 종교적 질서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사건입니다. 성전은 실제로 기원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파괴를 선언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어야 하는데도 그 본래 목적을 잃었다고 비판하셨습니다(11:15-17). 또한 하나님의 권한을 맡은 사람들이 주인의 아들을 거절하는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12:1-12). 그런 다음 성전의 파괴를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히 건축물이 얼마나 오래갈지에 관한 예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장소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날 때, 그 장소가 지닌 종교적 위엄만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선언으로 읽힙니다.
다만 성전이 무너지는 이유를 예수님의 가르침이 거부되었다는 한 가지 원인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으로는 로마 지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과 로마군의 포위 공격이 성전 파괴에 이르는 직접적인 과정이었습니다. 복음서는 그 사건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보여 줍니다.
성전 맞은편에 앉으신 예수님
예수께서 성전 맞은편 올리브산에 앉아 계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그분께 따로 물었습니다.마가복음 13:3 · 두루새김
성전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성전 바깥에서 그 건물의 운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전의 웅장한 모습과 성전의 파괴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한 장면 안에 놓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는 마가복음 1:16-20에서 처음 부름받은 네 제자입니다. 복음서의 시작에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에서 가장 충격적인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날지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는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마가복음 13:4 · 두루새김
제자들이 직접 물은 사건은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의 파괴입니다. 본문은 제자들이 따로 세상 종말의 날짜를 질문했다고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성전의 파괴를 넘어 전쟁과 고난,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 인자의 나타나심에까지 이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전망 속에서 성전의 파괴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그 전망을 단순히 시간순으로 정리할 수 없도록 말씀하십니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끝이 온 것은 아니다 — 재난을 읽는 법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경고하신 것
제자들이 표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전쟁도 아니고, 지진도 아니고, 성전의 파괴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해라.」마가복음 13: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사건의 징조보다 먼저 거짓된 해석을 경고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와서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마가복음 13:6 · 두루새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주장을 담고 있는지는 다소 열려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포함할 수 있으며, 예수님의 권위를 내세워 자신을 특별한 구원자로 제시하는 행위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후 21-22절에서는 그들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오히려 거짓된 구원자의 말에 쉽게 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이 불안해질수록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설명하는 사람의 말이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분별력을 잃지 않도록 하십니다.
전쟁과 지진은 끝의 증거가 아니다
「전쟁 소식과 전쟁에 관한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마가복음 13:7 · 두루새김
전쟁과 지진과 굶주림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난이 일어난다는 사실만으로 종말의 시점을 확정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지만」이라는 말은 전쟁과 굶주림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앞날에 그러한 사건들이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민족이 민족에 맞서고 나라가 나라에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지진이 나고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아기를 낳는 고통의 시작이다.」마가복음 13:8 · 두루새김
고통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나타난다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는 고통이라는 표현을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다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는 정확한 시간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난의 횟수나 강도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시작」이라는 말은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경고를 강화합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그것을 특정한 종말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는 이 말씀의 방향과 어긋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하는 주장에 속지 말라고 먼저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재난에 머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아기를 낳는 고통」이라는 표현에는 구약의 예언적 언어가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이사야 26:17-19에서는 아기를 낳는 여인의 고통과 죽은 자들이 생명을 되찾으리라는 소망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사야 66:7-9에서는 아기를 낳는 모습이 시온의 회복을 나타냅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 — 박해의 자리가 증언의 자리가 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너희에게 일어날 일을 보아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라. 사람들이 너희를 지역 재판정에 넘기고, 너희는 회당에서 매를 맞을 것이다. 또 나 때문에 통치자들과 왕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증언하기 위해서다.」마가복음 13:9 · 두루새김
앞에서는 민족과 나라 사이의 전쟁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도 박해를 받고, 정치적 권력자들 앞에 끌려가게 됩니다.
「넘기고」라는 표현은 여기서 특별한 무게를 지닙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고 죽임당하실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9:31, 10:33).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제자들도 넘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에서 일어나는 거절과 적대까지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박해에는 뜻밖의 방향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제자들이 재판받는 사람들이고, 권력자들이 그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가 증언의 자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권력자들은 제자들을 심문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듣게 됩니다.
본문은 그 증언이 반드시 권력자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일로 이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을 침묵시키려는 상황이 오히려 복음이 전해지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성전보다 넓은 세계로 향한다
「그리고 먼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마가복음 13:10 · 두루새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선언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선언이 같은 말씀 안에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1:1).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1:14-15).
예루살렘 성전은 특정한 장소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느 한 장소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위기를 맞는다고 해서 중단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사명이 끝났는지 판단하는 기준이나 날짜를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시간표를 계산할 과제보다, 박해 속에서도 계속되어야 할 사명을 맡깁니다.
가장 두려운 자리에서 주어지는 말씀
「사람들이 너희를 끌고 가 넘겨줄 때, 무슨 말을 할지 미리 걱정하지 마라. 그때 너희에게 주어지는 말을 해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3:1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홀로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도움은 고난 자체를 없애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주어지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미리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을 평소에 성경을 연구하거나 신앙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문맥은 체포와 심문이라는 특정한 위기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상황을 미리 완벽하게 통제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다는 신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국가 권력의 박해보다 더 아픈 일을 말씀하십니다.
「형제는 형제를, 아버지는 자녀를 넘겨주어 죽게 할 것이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맞서 일어나 부모를 죽게 할 것이다.」마가복음 13:12 · 두루새김
8절에서는 민족이 민족에 맞서고 나라가 나라에 맞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12절에서는 형제가 형제를 넘겨주고, 자녀들이 부모에게 맞서 일어납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분열이 가정 안으로 들어온 듯한 배열입니다.
박해는 낯선 사람에게서만 오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신뢰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현실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가복음 13:13 · 두루새김
「끝까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문맥에 따라 박해의 끝이나 생애의 끝, 혹은 하나님이 이루실 마지막 구원을 향한 견딤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 기간을 날짜로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도 단순히 박해를 당해도 몸이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형제가 형제를 넘겨주어 죽게 하는 상황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을 당장의 생존만으로 좁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약속이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견딤은 고통을 사랑하거나 박해를 찾아 나서는 태도가 아닙니다. 거짓된 약속과 적대적인 압력 속에서도 예수님에게서 돌아서지 않는 신실함입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장면은 미가 7:6과 연결됩니다. 미가서는 공동체의 신뢰가 무너져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적대가 일어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마가는 그 이미지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닥칠 위기로 가져옵니다.
읽는 사람은 깨달으십시오 — 도망쳐야 할 때가 있다
갑자기 독자를 부르는 목소리
13장 한가운데서 아주 특별한 문장이 등장합니다.
「황폐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것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으십시오.) 「그때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쳐라.」마가복음 13:14 · 두루새김
앞뒤는 모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읽는 사람은 깨달으십시오」라는 말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이 복음서를 읽고 있는 독자를 향한 서술자의 당부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황폐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것」은 무엇입니까?
다니엘서의 오래된 기억
이 표현은 다니엘서 9:27, 11:31, 12:11에 등장하는 황폐하게 하는 것과 몹시 꺼리는 것에 관한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다니엘서 11:31에서는 성소가 더럽혀지고 정기적인 제사가 폐지되며 황폐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것이 세워지는 일이 묘사됩니다.
다니엘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기원전 2세기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의 예루살렘 성전 박해가 중요합니다. 당시 성전의 제사가 중단되고 성소가 이방 종교의 영향 아래 더럽혀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표현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오래전 성전이 더럽혀졌던 사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과거의 사건으로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나타날 위기로 경고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세 갈래로 읽힙니다. 기원후 70년 로마군의 예루살렘 공격과 성전 모독, 예루살렘 내부의 무장 세력에 의한 성전 훼손, 그리고 마지막 때 등장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나 모독적인 사건입니다. 이 해석들은 모두 다니엘서의 성전 모독이라는 배경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3:14만으로 그 대상이 역사 속 어느 특정 인물이나 시설이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 표현을 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싸우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성전을 끝까지 방어하라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도망치라고 하십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 성전이 위협받는다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건축물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일입니다.
뒤돌아보지 말아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에서 무엇을 챙기려고 내려가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밭에 있는 사람은 자기 겉옷을 가지러 돌아가지 마라.」마가복음 13:15–16 · 두루새김
이것은 막연한 종말의 상징이 아닙니다. 실제로 전쟁이나 재난을 피해 달아나야 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마주하는지 보여 주는 현실적인 지시입니다. 집에 돌아가 물건을 챙기거나 밭에서 겉옷을 가지러 돌아가는 잠깐의 지체가 생명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박해 가운데 끝까지 견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위험한 장소에서 빠르게 도망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명령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지켜야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실함입니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위험을 굳이 찾아가거나 생명을 불필요하게 내어놓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향한 시선
「아, 그날들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 먹이는 여자들은 얼마나 괴롭겠느냐!」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라.」마가복음 13:17–18 · 두루새김
민족이 일어나고 나라가 무너지며 성전이 파괴되는 이야기 속에서 개개인의 고통은 쉽게 잊힙니다. 임신한 여자들과 젖 먹이는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겨울의 궂은 날씨도 피난을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적 재난을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그 재난을 실제로 겪어야 하는 사람들의 몸과 삶을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기도는 재난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 고통을 줄여 달라고 간구하는 행동입니다.
고난이 끝없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날들에는 고난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고난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가복음 13:19 · 두루새김
이 표현은 다니엘서 12:1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서에서는 이전에 없던 고난의 때가 언급되며, 그때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극심한 고난을 말씀하시지만 그것을 끝없는 절망의 이야기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그 고난의 기간을 줄이기로 정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선택받은 이들, 곧 자신이 선택하신 사람들을 위해 그 기간을 줄이기로 정하셨다.」마가복음 13:20 · 두루새김
말씀의 핵심은 고난의 한계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을 받는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안전이 그들 자신의 힘에만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선택받은 사람은 어떤 고난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미움을 받고 넘겨져 죽게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고난을 전혀 겪지 않게 하는 약속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끝내 꺾지 못한다는 약속도 포함합니다.
눈에 보이는 놀라운 일이라고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처음의 경고로 돌아가십니다.
「그때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또는 『보아라, 저기 있다!』라고 말해도 믿지 마라.」마가복음 13:2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그런 주장들이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가능하다면 선택받은 사람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3:22 · 두루새김
놀라운 일이 반드시 참된 권위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사람들이 놀라운 현상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분별하려 할 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특히 위기가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확실한 표징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조심해라. 나는 너희에게 모든 일을 미리 말해 두었다.」마가복음 13:2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래의 모든 일을 세세하게 알려 주셨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뒤에서는 그날과 그 시각을 아무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미리 말해 두셨다는 것은 그들이 앞으로 만날 위험을 예상하고 분별하도록 준비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혐오스러운 것」에 관한 세 해석에는 각각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 해석에서는 로마군의 깃발이나 성전 점령과 관련된 행위가 역사적 후보로 논의되며, 실제 성전 파괴라는 문맥과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둘째 해석은 성전이 부당한 권력과 폭력에 의해 점령되는 상황이 다니엘서의 이미지를 다시 보여 준다고 봅니다. 셋째 해석에서는 다니엘서의 옛 사건이 장차 올 위기를 미리 보여 준 형태가 됩니다. 다니엘서에서 혐오스러운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 정확히 어떤 시설이나 의식을 뜻하는지에도 세부적인 논쟁이 있지만, 성전의 거룩함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맥락은 분명합니다. 또 20절에서 두루새김은 원문에 있는 육체를 가리키는 말을 「아무도」(σάρξ)로 옮겼습니다. 원문에서는 셈어적인 표현으로 사람 전체를 가리킵니다.
흔들리는 하늘과 구름 속에서 오시는 인자 — 누구의 권세가 남는가
성전의 파괴에서 하늘의 흔들림으로
「그러나 그날들에, 그 고난이 지나고 나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다.」마가복음 13:24–25 · 두루새김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갑자기 우주 전체로 넓어집니다.
구약에서 해와 달과 별들이 흔들리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의 교만한 권력과 질서를 심판하시는 일을 표현하는 예언의 언어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읽을 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실제 해와 달과 별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 것인가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미지가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 속 질서가 뒤집히는 일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이 단지 상징이므로 앞으로 실제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결정적인 개입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마가복음 13:24-27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묘사하는 상징적 언어로 읽는 해석이 있는 반면, 장차 있을 인자의 나타나심과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구약의 심판 언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지만, 그 언어가 가리키는 사건의 범위는 논쟁의 대상입니다.
사람들이 영원할 것처럼 여기는 질서도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서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인자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때 사람들은 인자가 큰 능력과 영광을 지니고 구름 속에서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가복음 13:26 · 두루새김
이 말씀의 배경은 다니엘서 7:13-14입니다.
다니엘서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구름과 함께 나타나지만, 그가 향하는 곳은 땅이 아니라 「옛적부터 계신 분」 앞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습니다. 즉, 다니엘서의 원래 환상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권세를 받는 장면입니다.
다니엘서 7장에는 네 짐승이 등장합니다. 그 짐승들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국의 권력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짐승들과 달리 사람의 모습 같은 이가 등장하여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다스릴 권한을 받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환상의 언어를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8:31, 9:31, 10:33-34).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큰 능력과 영광을 지닌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13:26의 「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관해서는 크게 두 방향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한쪽에서는 다니엘서의 본래 장면을 중요하게 보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권세를 받으시는 일과 예수님의 권위가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일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해석에서는 성전 파괴가 예수님의 말씀과 권위가 옳았음을 드러내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마가복음이 다니엘서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장차 예수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는 사건을 선포한다고 봅니다.
어느 경우든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죽임당하실 예수님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와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마지막 대답은 아닙니다.
흩어진 이들을 모으시는 인자
「그때 인자는 천사들을 보내고,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네 바람이 부는 사방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마가복음 13:27 · 두루새김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흩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전쟁 때문에 나라와 민족이 갈라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지역 재판정에 넘겨지고 통치자들과 왕들 앞에 서게 됩니다. 가족들마저 서로를 넘겨주어 죽게 합니다.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자 흩어짐과 반대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모으는 일입니다.
「네 바람이 부는 사방」과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라는 표현은 온 세상에 흩어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넓은 이미지입니다. 제자들이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에게 잊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중심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 뒤, 예수님께서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돌보심이 한 건물이 계속 남아 있는지에 매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24-25절의 언어는 구약 예언자들에게서 옵니다. 이사야 13:10에서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면서 하늘의 별들이 빛을 내지 않고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사야 34:4에서는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면서 하늘의 세력들이 무너지고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장면을 사용합니다. 요엘 2:10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날을 앞두고 해와 달이 어두워지며 별들이 빛을 거두는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다니엘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다스릴 권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과 연결된다고도 설명합니다(다니엘 7:18, 27). 그러므로 다니엘서 자체에서 그 인물을 한 개인으로만 이해할 것인지, 하나님 백성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습니다. 27절의 모으는 장면에는 신명기 30:3-4와 이사야 11:12의 배경이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땅끝까지 흩어지더라도 다시 모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사야에서는 흩어진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람들을 땅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무화과나무와 이 세대 —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없는가
잎을 보면 계절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복잡한 환상의 언어에서 일상적인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오십니다.
「무화과나무에서 비유를 배워라. 그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아나면, 너희는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마가복음 13:28 · 두루새김
이것은 특별한 계시를 받아야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연을 관찰하며 익힐 수 있는 분별력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그때가 바로 문 앞까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마가복음 13:29 · 두루새김
무엇이 문 앞에 가까이 왔다는 것일까요? 원문에는 가까이 있다는 표현이 있지만 주어가 직접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앞의 무화과나무 비유에서는 여름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므로, 두루새김처럼 어떤 결정적인 때가 가까워졌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말씀하셨으므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이해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원문이 주어를 직접 밝히지 않는 만큼 한쪽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일어나는 일을 아무 의미 없이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분별하는 일과 정확한 날짜를 계산하는 일은 다릅니다.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아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압니다. 그렇다고 그 잎이 돋아난 날로부터 며칠 뒤에 여름이 시작되는지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난다
이제 마가복음 13장에서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가 등장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세대가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마가복음 13:30 · 두루새김
마가복음에서 세대라는 말은 보통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8:12, 8:38, 9:19). 따라서 13:30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있는 세대를 가리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읽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성전의 파괴는 실제로 그 세대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24-27절의 우주적 현상과 인자의 나타나심까지 모두 그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해석은 세 갈래로 갈립니다. 「이 모든 일」이 주로 성전 파괴와 그에 이르는 사건들을 가리킨다는 읽기, 성전 파괴에 관한 예언과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일을 구별하는 읽기, 장차 이루어질 모든 종말 사건을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기대하고 있다는 읽기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13장이 어느 때까지를 다루는지가 달라집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본문이 가진 긴장을 없애기 위해 「이 세대」의 뜻을 아무런 설명 없이 먼 미래에 태어날 세대로 바꾸는 방식입니다. 마찬가지로 24-27절이 구약의 상징적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말씀의 모든 요소가 기원후 70년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자동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성전의 파괴와 하나님의 최종적인 개입을 매우 가까운 언어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두 사건의 시간적 관계를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 자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논쟁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져도 내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가복음 13:31 · 두루새김
처음에 제자는 성전의 큰 돌들을 보며 감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돌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성전뿐 아니라 사람이 세상의 가장 안정적인 바탕이라고 생각하는 하늘과 땅까지 사라질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세운 질서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40:8에서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대해 그와 같이 오래 남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제자들이 붙들어야 할 가장 확실한 것은 성전의 견고함도, 세상의 안정도, 자신의 미래 계산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들도 모르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그러나 그날이나 그 시각이 언제인지는 아버지만 아신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그 밖의 누구도 모른다.」마가복음 13:32 · 두루새김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씀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도 그날과 그 시각을 모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아들」은 문맥상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서는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이시라는 고백 안에서 이 구절을 이해하려 합니다. 특히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실제적인 지식의 한계를 경험하셨다는 설명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리적 설명은 마가복음 13:32에 직접 쓰인 말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도 모르신다고 기록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시지만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바꾸면 본문의 분명한 진술이 약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독립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날과 그 시각은 아버지만 아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복음서가 보여 주는 예수님의 권위에는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순종이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앞서 제자들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끝내 정확한 날과 시각을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더욱 열심히 연구하면 언젠가 알아낼 수 있는 비밀을 일부러 숨겨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르신다고 말씀하신 영역을 자신의 계산으로 채우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조금 더 깊이
30절의 세 해석에는 각각 근거가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24-27절도 구약의 상징적 심판 언어로 이해하거나, 예수님의 권위가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으로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 경우 「이 세대」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해석은 13:30을 주로 가까운 역사적 사건에 적용하고, 32절부터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는 마지막 날에 관한 가르침이 본격화된다고 이해합니다. 다만 24-27절이 30절 앞에 놓여 있다는 점을 설명해야 합니다. 세 번째 해석은 본문이 이른 시기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고 보며, 실제 역사와의 긴장을 인정합니다. 한편 마가복음 앞부분의 무화과나무 장면(11:12-25)에서는 잎이 있지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가 성전 장면과 연결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무화과나무가 계절의 변화를 알아보는 비유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도 반드시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집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 — 깨어 있다는 것의 의미
모른다는 사실이 삶을 마비시키지 않는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때가 언제인지 너희는 모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3:3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정확한 날짜를 모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미래를 알 수 있어야 현재를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미래의 날짜를 알지 못해도 충분히 준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준비는 특정한 날에 맞춰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주인이 돌아오더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지기가 맡은 일
「어떤 사람이 먼 곳으로 떠나는 것과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권한을 주고 저마다 할 일을 맡겼으며,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했다.」마가복음 13:34 · 두루새김
주인이 집을 떠났다고 해서 집안의 삶이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사람에게 맡겨진 일이 분명해집니다.
제자들은 박해 가운데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그들은 거짓된 주장에 속지 않아야 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그들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알지 못해도 지금 맡겨진 일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밤의 네 시간대와 닭이 울 때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저녁에 올지, 한밤중에 올지, 닭이 울 때 올지, 새벽에 올지 너희는 모르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3:35 · 두루새김
마가복음을 계속 읽을 독자에게 이 시간들은 특별한 울림을 갖게 됩니다.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저녁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십니다(14:17). 밤에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며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14:32-38). 그리고 닭이 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을 깨닫습니다(14:72). 아침이 되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깁니다(15:1).
그런데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은 잠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베드로는 계속 잠을 이기지 못합니다(14:37-38).
이렇게 보면 마가복음 13장의 마지막 명령은 먼 미래에 관한 조언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곧이어 제자들이 경험할 밤을 준비시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저녁, 한밤중, 닭이 울 때, 새벽으로 밤을 나누는 것은 당시 로마식으로 밤을 네 구간으로 나누던 방식과 잘 어울립니다. 이 네 시간대가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는 이야기의 각 장면에 대응하도록 배열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특히 닭이 울 때와 깨어 있으라는 명령이 뒤따르는 베드로의 이야기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마가복음 13:36 · 두루새김
그리고 말씀을 마치십니다.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마가복음 13:37 · 두루새김
처음에 예수님께 질문한 사람은 네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그 네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13장이 특정한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비밀스러운 종말 지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각 시대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전쟁과 재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태도는 같습니다. 거짓된 주장에 속지 않고,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으며, 맡겨진 사명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자기 손으로 장악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불안하게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마가복음 13장은 시대가 불안할수록 쉽게 오해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큰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이 장에서 그 사건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예언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 장이 오늘의 독자에게 가르치는 것은 불안한 사건들을 종말의 암호로 풀어내는 기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현재를 분별하고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마가복음 13장은 거대한 성전의 돌을 바라보는 제자의 감탄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장면은 거대한 건물이 아닙니다.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집입니다.
주인은 집을 떠났고, 저마다 맡은 일이 있습니다. 문지기는 자기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저녁일 수도 있고, 한밤중일 수도 있고, 닭이 울 때일 수도 있고, 새벽일 수도 있습니다.
문지기는 그 시간을 계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문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합니다.
「깨어 있어라.」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