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21–25장 · 예루살렘에서
왕이 자기 집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나무에서 가지를 꺾어 그분이 지나가실 길을 마련합니다. 앞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를 외칩니다.
그런데 이 환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자 종교 지도자들이 분노합니다. 그분이 성전에서 행하신 일들을 문제 삼고, 무슨 권위로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따집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소작인들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종교 지도자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처음에는 왕을 맞이하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왕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마태복음 21장을 읽을 때 눈여겨볼 것은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환영하지만 그분이 누구인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눈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다가오고, 아이들은 그분을 찬양합니다. 반면 성전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고도 분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두 비유를 통해 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밝히십니다.
말로는 아버지에게 순종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가지 않는 아들.
포도원을 맡았으면서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그 유산을 차지하려는 소작인들.
그들이 보여 주는 문제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 몇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고, 성전에서 행동하시고, 사람들의 신앙을 판단하시며, 자신이 어떤 권위로 이 모든 일을 하시는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사람들이 예상하던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왕은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성전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거절하는 지도자들 앞에서 버림받은 돌이 머릿돌이 된다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습니다.
그들은 올리브 산 쪽 벳바게에 이릅니다.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산으로, 그곳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갈 수 있습니다. 스가랴 14:4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개입하시는 날,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동쪽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라는 예언이 등장합니다. 마태가 스가랴 14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으므로 두 장면을 곧바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걸음은 성경의 예언적 기대가 집중되는 지리적 배경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제자 둘을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그러면 곧 매여 있는 암나귀와 그 곁에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들을 풀어 나에게 끌고 오너라.」마태복음 21:2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우연히 길가에 있던 나귀를 발견해 타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동물이 있는지 말씀하시고,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주님께서 그것들을 필요로 하십니다」라고 대답하라고까지 일러 주십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입성이 의도적으로 준비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그것이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었다고 곧바로 설명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스가랴 9:9을 중심으로 하며, 첫머리에는 이사야 62:11과 연결되는 표현도 들어 있습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왕이 온유한 모습으로 나귀와 짐 지는 짐승의 아들인 나귀 새끼를 탄 채 너에게 온다.』」마태복음 21:5 · 본디새김
전쟁의 말을 타지 않는 왕
스가랴 9:9에서 시온을 향해 오는 왕은 의롭고 구원을 지닌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은 나귀를 타고 옵니다. 바로 다음 절인 스가랴 9:10에서는 전차와 군마와 전쟁의 활이 제거되고, 그 왕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는 모습이 이어집니다.
그러니 나귀를 탄 왕은 왕답지 않게 초라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귀는 왕권과 무관한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열왕기상 1:33–40에서 솔로몬은 다윗의 노새를 타고 왕으로 세워지는 장소로 향합니다. 다만 스가랴 9장의 왕은 특별합니다. 그의 통치에는 전쟁의 무기를 제거하고 평화를 선포하는 모습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이것은 그분의 왕권을 부정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왕이신지 보여 주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러 오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순례자처럼 조용히 들어오시지도 않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왕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시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1:2에는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등장하지만, 마태복음 21:2에는 암나귀와 그 곁의 나귀 새끼 두 마리가 등장하고 7절에서도 제자들이 두 마리를 끌고 옵니다. 스가랴 9:9의 히브리어 시문은 같은 대상을 두 표현으로 나타내는 병행법을 사용하므로, 「나귀」와 「나귀 새끼」는 기본적으로 별개의 두 동물이 아니라 왕이 타고 오는 동물을 나란한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이 때문에 마태가 병행법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나귀 두 마리를 기록했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병행법을 이해하면서도 실제로 두 동물이 함께 있었다고 서술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 7절 「예수는 그것들 위에 앉았다」의 「그것들」은 문법적으로 두 동물을 가리킬 수도, 그 위에 얹힌 겉옷들을 가리킬 수도 있어서, 예수님께서 두 나귀 위에 동시에 올라앉으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마태가 보여 주려는 것은 동물의 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가랴의 예언에 등장하는 바로 그 왕으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호산나」는 단순한 환호성이 아니었습니다
무리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고 나뭇가지를 꺾어 놓습니다. 예수님을 특별한 인물로 맞이하는 공개적인 환영입니다. 열왕기하 9:13에서도 예후가 왕으로 선포될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그의 아래에 펼쳐 놓습니다.
그를 앞서 가는 무리와 따라가는 무리가 소리쳐 말했다.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태복음 21:9 · 본디새김
호산나는 히브리어의 구원을 요청하는 표현에서 왔습니다. 시편 118:25의 「이제 구원하소서」에 해당하는 말이고, 이어지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다」는 시편 118:26에서 온 말입니다.
시편 118편은 고난과 위협 속에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여호와야훼께 감사하며 그분의 구원을 기뻐하는 시편으로, 후대에 절기와 순례의 찬양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 무리의 외침에는 구원을 요청하는 뜻과 구원의 기쁨을 선포하는 뜻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의 무리는 이 호산나를 「다윗의 자손」에게 외칩니다. 예수님을 다윗 왕조와 연결되는 왕적 인물로 환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이 기대하는 구원이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지 충분히 알고 있었느냐는 데 있습니다. 마태는 그들의 내면을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뒤이어 질문 하나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자 온 도시가 흔들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누구냐?」마태복음 21:10 · 본디새김
「흔들리며」(σείω)는 흔들거나 뒤흔들린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한 무리의 흥겨운 행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시 전체가 동요합니다.
마태복음 2:3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이에 관한 소식을 들은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불안해했습니다. 이제 그 아이가 성장하여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고, 도시는 다시 동요합니다. 두 장면을 직접 연결하는 명시적 설명은 없지만, 예수님의 왕권이 예루살렘에 불러일으키는 긴장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문학적 대응을 이룹니다.
무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예언자 예수다.」마태복음 21:11 · 본디새김
여기에 묘한 간격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는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를 외쳤는데, 도시의 질문 앞에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예언자」라고 소개합니다. 이 대답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예언자적 권위를 지닌 분으로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미 그분을 시온에 오시는 왕으로 소개했고, 무리의 대답만으로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장의 나머지 이야기는 바로 그 질문을 계속 파고듭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분은 무슨 권위로 행동하십니까?
성전을 뒤집으신 뒤 누구를 받아들이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파는 사람들과 사는 사람들을 내쫓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으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왕이 가장 먼저 성전에서 충돌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돈을 바꾸거나 제물로 사용할 동물을 파는 일 자체가 모두 불법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지역에서 찾아온 순례자들에게는 제사를 위한 동물과 성전에서 사용하는 화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상업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분노하셨다고 해석하면 이 장면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히게 됩니다. 본문도 상인들이 얼마나 부당한 이익을 취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두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적혀 있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마태복음 21:13 · 본디새김
앞의 말씀은 이사야 56:7에서, 뒤의 말씀은 예레미야 7:11에서 왔습니다.
기도의 집은 누구를 위한 집인가?
이사야 56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언약을 지키며 자신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고자들도 자신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시고, 그곳을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선언하십니다(이사야 56:3–8). 출신이나 신체적 조건 때문에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었던 사람들도 여호와야훼께 나아갈 수 있다는,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넓어지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마태의 인용에서는 이사야의 「모든 민족을 위한」이라는 표현이 직접 반복되지 않으며, 그 구절이 빠졌다는 사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이사야 56장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성전은 본래 하나님께 나아오는 기도의 장소여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곳이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강도의 소굴」은 단순히 장사를 많이 하는 곳일까?
예레미야는 성전 문에 서서, 백성이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책망합니다. 사람들은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 맹세를 하면서도 성전에 들어와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예레미야 7:8–10). 그리고 여호와야훼는 그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강도의 소굴은 도둑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장소라기보다, 범죄를 저지른 뒤 숨어 들어가는 은신처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자신들의 불의를 가려 주는 안전한 은신처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성전이 무엇을 위한 장소여야 하는지, 그곳의 예배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문제 삼으십니다. 이는 성전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선언과도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내 집」이라고 말씀하시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 집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성전 행동 직후, 다른 복음서의 병행 장면에는 없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성전에서 눈먼 이들과 다리를 저는 이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그가 그들을 낫게 했다.마태복음 21:14 · 본디새김
이 한 절이 성전 장면의 의미를 바꿔 놓습니다.
성전에서 내쫓긴 사람들과 받아들여진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파는 사람들과 사는 사람들을 내쫓으셨고, 바로 다음에 다가온 눈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마태는 이 두 행동을 나란히 배치합니다. 다만 본문은 두 부류의 도덕성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무엇을 바로잡으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소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마태복음 20장은 여리고에서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자비를 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겨 고쳐 주시는 장면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그 다윗의 자손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셔서 다시 눈먼 사람들을 고쳐 주십니다. 이번에는 다리를 저는 사람들도 함께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단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하는 힘이 아닙니다. 사람을 고치고 회복시키는 힘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이 분노한 자리에서 아이들이 찬양하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가 한 놀라운 일들과 성전에서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라고 소리치는 아이들을 보고 노여워했다.마태복음 21:15 · 본디새김
그들은 기적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찬양을 듣지 못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런데 노여워합니다.
앞 장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요청하자 나머지 열 제자가 노여워했는데(20:24), 두 장면에는 불쾌해하거나 노여워한다는 뜻의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두 집단이 분노한 이유가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행동이나 다른 사람의 위치를 자신들의 기대에 맞추려는 태도가 두 장면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이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습니까?」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렇다. 너희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당신이 찬양을 마련하셨습니다』라는 말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태복음 21:1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시편 8:2에서 왔습니다. 시편 8편에서 찬양받으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아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라고 외치고, 예수님께서는 그 찬양을 중단시키지 않으시고 시편의 말씀으로 정당화하십니다.
아이들이 귀여운 찬양을 했으니 내버려 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을 향한 아이들의 찬양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환영받으시는 왕이시고, 성전의 잘못을 바로잡으시며, 눈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아이들의 찬양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다고 선언하십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신분을 하나의 명칭으로 정리하기보다 그분의 행동과 말씀을 통해 드러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분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베다니로 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8:2의 히브리어 본문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하나님이 「힘」을 세우셨다고 말하고, 칠십인역은 이를 「찬양」을 마련하셨다고 옮깁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문면은 이 그리스어 번역과 일치합니다. 시편 8편의 본래 맥락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여호와야훼의 위엄, 그리고 그분이 작고 연약한 인간에게 부여하신 지위에 관한 찬양이며,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힘은 하나님의 대적들을 잠잠하게 하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셨을까?
다음 날 이른 아침, 예수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십니다.
마태는 그분이 배가 고프셨다고 기록합니다.
길가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고 그리로 갔다. 그 나무에서 잎 말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 나무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영원히 너에게서 열매가 나지 않기를.」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바로 말랐다.마태복음 21:19 · 본디새김
이 장면은 많은 독자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나무에 열매가 없었던 것은 나무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11:13의 병행 본문에는 무화과가 날 철이 아니었다는 설명까지 있지만, 마태는 그 설명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마태가 강조하는 것은 계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열매를 찾으셨지만 잎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셨고 그 나무가 곧바로 말랐다는 사실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 장면을 이해하는 열쇠는 앞뒤 문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셨고, 다음 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십니다. 이어서 성전 지도자들과 논쟁하시고, 두 비유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과 포도원의 열매를 돌려드리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21:43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나라의 열매를 내는 민족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열매 없는 나무는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 등장하는 열매 없는 신앙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8:13에서 여호와야훼는 심판의 말씀 가운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호세아 9:10, 16도 이스라엘을 나무와 열매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열매가 없는 나무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기대하신 열매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을 나타내는 예언자적 상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상징이 누구를 향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성전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보는 읽기, 이스라엘 전체의 불신앙에 대한 경고로 보는 읽기, 심판의 시기 자체에 주목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마태의 문맥에서는 예수님의 성전 행동과 뒤이어 나오는 열매의 비유들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장의 직접적인 갈등은 예수님과 특정한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므로, 무화과나무가 마른 일을 곧바로 모든 유대인의 영원한 버림받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제사가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지위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잎이 풍성하다고 반드시 열매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나무가 마른 속도만 물었을까?
제자들은 보고 놀랐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곧바로 말랐습니까?」마태복음 21:20 · 본디새김
그들은 나무가 왜 말랐는지보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말랐는지 묻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나무의 상징을 직접 해설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을 받아 믿음과 기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면,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것과 같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산에게 『들려 올라가서 바다에 던져져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복음 21:21 · 본디새김
「그리고 너희가 기도하며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21:22 · 본디새김
산을 옮긴다는 표현은 인간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강렬하게 나타냅니다. 마태복음 17:20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산을 옮기는 일을 연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22절은 믿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예외 없이 모두 얻는다는 약속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에는 기도의 가능성을 인간이 예상하는 범위 안에 가두지 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전체에서 믿음은 하나님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기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6:10), 겟세마네에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것과 아버지의 뜻을 구별하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니다(26:39).
따라서 21:22를 다른 말씀과 분리하여,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기도의 집이라고 말씀하셨고, 이제 성전 밖에서 제자들에게 기도와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성전이라는 장소의 의미가 즉시 폐지되었다는 선언은 아니지만, 성전의 외형이나 종교적 지위가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무화과나무의 상징을 두고, 한 견해는 성전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하고, 다른 견해는 이스라엘 전체의 불신앙에 대한 경고로 폭넓게 해석합니다. 또 무화과나무의 생태적 특성과 예수님께서 열매를 찾으신 시점에 주목하며 심판의 시기 자체를 중요한 문제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21절의 「이 산」이 정확히 어떤 산인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올리브 산 부근에 있다는 문맥 때문에 올리브 산으로 볼 수 있고, 예루살렘과 성전산에 대한 상징적 언급으로 읽는 견해도 있지만, 특정 산이 물리적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고 단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묻는 사람들은 왜 요한의 권위에 대답하지 못했을까?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가 성전에 들어가 가르칠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합니까?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 권위를 주었습니까?」마태복음 21:2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사람들을 내쫓고 탁자를 엎으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으며, 자신을 찬양하는 아이들을 옹호하셨습니다. 성전의 책임을 맡은 지도자들에게 이것은 신학적 호기심이 아니라, 성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권위」(ἐξουσία)는 행동할 권한이나 정당한 권위를 가리키는 말로,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반복해서 써 온 낱말입니다. 무리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것에 놀랐고(7:29),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며(9:6),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영들을 다스리는 권위를 주셨습니다(10:1). 이제 성전 지도자들은 바로 그 권위의 출처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세례는 어디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서로 의논했다. 「『하늘에서』라고 하면 그가 우리에게 『그러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다.」마태복음 21:25 · 본디새김
이 질문은 화제를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했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했습니다(마태복음 3:1–17).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라고 하면 우리는 무리가 두렵다. 모두가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1:26 · 본디새김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실제로 하나님에게서 왔는지를 따져 보지 않습니다. 어느 대답을 하면 어떤 곤란한 결과가 생길지 계산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에 대한 판단보다 자기들이 처하게 될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도 그들에게 말했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복음 21:27 · 본디새김
예수님께 권위의 출처를 밝히라고 요구할 만큼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확신하던 사람들이, 요한의 권위를 판단하라는 질문 앞에서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의 문제는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사실을 따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두 아들의 비유는 방금 지도자들이 보여 준 태도를 정면으로 드러냅니다.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아들은 왜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 생각은 어떠냐?」 그리고 아버지가 첫째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간단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갔다.」마태복음 21:29 · 본디새김
「그가 둘째에게 가서 같은 말을 했다. 둘째가 대답하여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버지.』 그러나 가지 않았다.」마태복음 21:30 · 본디새김
첫째는 말로 거절했지만 행동으로 순종했습니다.
둘째는 말로 순종했지만 행동으로 거절했습니다.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했느냐?」 그들이 말했다. 「첫째입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복음 21:31 · 본디새김
지도자들의 대답은 옳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비유를 현실에 적용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도덕적·종교적으로 비난받거나 주변으로 밀려나기 쉬운 사람들이었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율법과 성전의 질서를 책임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순서가 뒤집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까닭은 이렇다. 요한이 의의 길로 너희에게 왔는데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세리들과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나중에조차 뉘우치지 않아 그를 믿는 데 이르지 않았다.」마태복음 21:32 · 본디새김
세리와 창녀가 본래 의로운 사람들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요한을 믿었고, 지도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뉘우침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뉘우치다」는 앞선 행동이나 판단을 후회하고 마음을 바꾸는 일을 나타냅니다. 이 비유에서 그 마음의 변화는 실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첫째의 처음 말은 잘못되었지만 그의 마지막 행동을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둘째의 처음 말은 올바른 대답이었지만 실제 순종을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32절의 마지막 문장,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나중에조차 뉘우치지 않아」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세리들과 창녀들이 요한을 믿는 모습을 보았고, 자신의 판단을 다시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처음부터 올바르게 반응하지 못했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마음을 바꿀 기회가 있었는데도 바꾸지 않았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첫째는 처음에 거절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처음에 믿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믿는 모습을 보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먼저」 들어간다는 말씀은 앞서 들어간다는 뜻이지, 지도자들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직접 선언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아직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지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보장하지 않지만, 그 지위 때문에 회개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부르는 것만으로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7:21–27). 이제 그 가르침이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구체적인 이야기로 펼쳐집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버지」라고 말한 아들이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해야 할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곧바로 들려주시는 또 다른 포도원 이야기에는 주인의 포도원을 자기 것처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21:29–31은 사본에 따라 두 아들의 등장 순서가 달라지는 본문입니다. 일부 사본에서는 처음에 순종하겠다고 말한 아들이 먼저 등장하고, 다른 사본들에서는 처음에 거절했다가 뉘우친 아들이 첫째입니다. 비유의 대조, 곧 말과 행동의 불일치는 두 형태 모두에 남아 있습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자기 것이 될까?
예수님께서 다시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라. 어떤 집주인이 있었다. 그는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그 안에 포도즙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세놓고 멀리 떠났다.」마태복음 21:33 · 본디새김
앞 장인 마태복음 20장에서도 집주인이 포도원에 일할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때는 집주인이 일꾼들에게 얼마나 후하게 품삯을 주는지가 문제였고, 이번에는 소작인들이 집주인에게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열매를 내놓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사야의 포도원이 다시 등장하다
이 포도원의 배경에는 이사야 5:1–7이 놓여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포도원 주인은 기름진 땅을 마련하고,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세우고, 포도즙 짜는 시설을 만듭니다. 그러나 포도원은 좋지 않은 열매를 맺습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포도원이 이스라엘이며, 자신이 기대하셨던 열매는 정의와 의로움이었다고 밝히십니다.
「정의」를 기대하셨지만 피 흘림이 있었고, 「의로움」을 기대하셨지만 고통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이사야 5:7). 히브리어 본문은 이 대조를 비슷한 소리의 단어들로 더욱 강하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비유를 바꾸십니다. 이사야에서는 포도원 자체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열매를 맺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열매를 내놓지 않습니다. 문제가 포도원을 맡은 사람들의 행동에 집중됩니다.
주인은 왜 노예들을 계속 보냈을까?
열매를 거둘 때가 되자 주인은 자기 몫을 받아 오도록 노예들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그의 노예들을 붙잡아 한 사람을 매질하고 다른 사람을 죽이고 또 다른 사람을 돌로 쳤다.」마태복음 21:35 · 본디새김
주인은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노예들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행동합니다. 이미 심각한 범죄가 저질러졌는데도 주인은 거듭해서 사람들을 보냅니다.
마침내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나중에 그는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했다. 『그들이 내 아들은 어려워하겠지.』」마태복음 21:37 · 본디새김
이 대목이 비유의 전환점입니다. 노예들은 주인을 대신해 일을 처리하도록 보냄받은 사람들이지만, 아들은 주인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속자입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고 서로 말했다. 『이 사람이 상속자다. 자,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가지자.』」마태복음 21:38 · 본디새김
소작인들은 아들을 알아보지 못해서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상속자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실제 법률상 주인의 아들을 죽인다고 포도원의 소유권이 소작인들에게 이전되지는 않습니다. 이 비유는 상속 절차가 아니라 소작인들의 탐욕과 반역이 얼마나 극단적인지를 드러냅니다.
맡겨진 것을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그 맡겨진 것을 빼앗으려고 주인의 아들을 죽입니다.
포도원 밖으로 내쫓긴 아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붙잡아 포도원 밖으로 내쫓고 죽였다.」마태복음 21:3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겨지고 사형을 선고받으며,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0:18–19). 비유 속 아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사이에는 분명한 문학적 연결이 있습니다. 다만 마태는 여기서 아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할 뿐, 십자가나 처형 장소의 세부 사항을 비유에 직접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역대기하 36:15–16은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거듭 사자들을 보내셨지만, 백성이 그들을 조롱하고 말씀을 멸시했다고 기록합니다. 비유는 그런 이스라엘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노예들이 각각 어느 예언자를 상징하는지 암호처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반복된 거절과 폭력, 그리고 마지막에 아들을 죽이는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사자들을 거부하는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치는 앞서 보냄받은 노예들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주인의 아들이시고, 상속자이십니다.
그들은 왜 자기 입으로 자신을 심판했을까?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복음 21:40 · 본디새김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악한 자들을 비참하게 없애고, 수확 때마다 그에게 열매를 치러 줄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세놓을 것입니다.」마태복음 21:41 · 본디새김
마가복음 12:9의 병행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질문을 던지신 뒤 대답까지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판결을 내립니다. 그들은 비유 속 소작인들이 얼마나 악한지 판단할 수 있지만, 아직 자신들이 그 비유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잠시 뒤 자신들을 향하게 됩니다.
버려진 돌이 어떻게 머릿돌이 되었는가?
예수님께서 소작인들의 운명에 관한 대답을 들으신 뒤 갑자기 다른 이미지를 꺼내십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 그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께로부터 비롯된 일이고 우리 눈에 놀랍다.』」마태복음 21:4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시편 118:22–23에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무리가 외친 호산나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다」도 같은 시편 118:25–26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시편 118편으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시편 118편으로 자신을 거절하는 지도자들의 행동을 해석하십니다.
같은 시편이 환영과 거절을 함께 설명하다
시편 118편은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공동체와 함께 여호와야훼께 감사하는 시편으로,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였지만 여호와야훼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사람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은 하찮게 여겨지거나 배제되었던 존재가 하나님에 의해 결정적인 위치에 세워지는 역전을 나타냅니다.
그 돌이 본래 누구를 가리켰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회복이나 왕적 인물의 구원을 배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편의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버린 것이 여호와야훼의 행동으로 중요한 자리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아들을 거절하고, 집 짓는 사람들은 돌을 버립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절한 것이야말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머릿돌이 된다는 것은
누가 그 돌을 중요한 자리에 놓았습니까? 집 짓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께로부터 비롯된 일이고 우리 눈에 놀랍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된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향한 예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판단을 최종적인 판단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 뒤에 영광이 찾아온다는 일반적인 교훈만이 아닙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지 판단하던 종교 지도자들이 버리려는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머릿돌이시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서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내는 민족에게 주어질 것이다.」마태복음 21:43 · 본디새김
먼저 「너희」가 누구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1:23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았고, 21:45에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비유가 자신들을 두고 한 말씀임을 알아차립니다. 이 경고의 직접적인 대상은 당시 예수님을 거절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 구절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었다는 선언으로 확대하는 것은 본문의 인물 구분을 넘어섭니다.
역사적으로는 이 구절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교회로 완전히 대체하셨다는 주장의 근거로 읽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전체의 폐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진 책임을 저버린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새로운 공동체가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신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연결되는 중요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이 논쟁에 앞서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나라의 열매를 내는」 이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민족」으로 번역된 에트노스(ἔθνος)는 문맥에 따라 민족이나 백성의 집단을 나타낼 수 있으며, 반드시 비유대인들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민족의 이름을 다른 민족의 이름으로 바꿔 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기준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열매는 앞에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제로 행하는 일, 소작인들의 비유에서는 주인에게 마땅한 열매를 돌려드리는 일, 이사야 5장에서는 정의와 의로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특권과 책임은 실제적인 순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과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실패로만 읽는다면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질문을 피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공동체 역시 그 나라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버려진 돌은 심판의 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이 돌이 누구 위에 떨어지든지 그 사람을 부수어 흩을 것이다.」마태복음 21:44 · 본디새김
머릿돌이 된 돌이 이제 사람을 부수는 이미지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돌은 새로운 건축의 기초가 되지만, 그 돌을 거절하고 맞서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분 증명서를 제시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머릿돌을 버리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의 판단이 하나님의 뜻과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모퉁이의 머릿돌」은 그리스어 원문에서 케팔레 고니아스, 곧 모퉁이의 머리라는 표현입니다. 건물의 두 벽이 만나는 모퉁이에서 구조를 잡아 주는 돌로 이해하기도 하고, 건물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으뜸 돌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정확한 건축적 위치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지만, 버려졌던 돌이 건물 전체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은 분명합니다. 44절에는 이사야 8:14–15의 걸림돌 이미지와 다니엘 2:34–35의 돌이 왕국들을 무너뜨리는 환상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있지만, 마태가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앞의 시편 118편이며 이 구절의 다른 구약 배경은 가능한 주제적 연결로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21:44는 사본상의 차이가 있는 구절입니다. 이 문장을 포함하는 사본들이 많지만 일부 사본에서는 빠져 있으며, 누가복음 20:18의 병행 문장과 관련하여 본문에 들어온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이 해설은 이 문장을 포함하는 본문을 따릅니다.
비유를 알아들은 사람들이 왜 예수를 붙잡으려 했을까?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의 비유들을 듣고 그가 자기들을 두고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마태복음 21:45 · 본디새김
그들은 알아들었습니다.
비유가 너무 어려워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의 비유도, 악한 소작인들의 비유도 들었고, 예수님께서 자신들에 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무리를 두려워했다. 무리가 그를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1:46 · 본디새김
21:25–27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무리가 두려워 요한의 세례에 관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무리가 두려워 예수님을 붙잡지 못합니다. 같은 두려움이 두 장면을 묶습니다.
그들은 세리들과 창녀들이 요한을 믿는 것을 보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사실까지 알아차렸지만, 여전히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고도 뉘우치지 않았고, 알아듣고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무지해서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도 그것을 바로잡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더 어려운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소작인들이 상속자를 알아보고도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듯,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을 향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비유가 현실 속에서 되풀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
마태복음 21장의 여러 장면을 하나로 묶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에 관한 질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이고, 포도원은 주인의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곳에서 무엇이 허용되고 누가 먼저 들어갈지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 모든 판단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서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잘못된 것을 심판하며,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마침내 자신을 거절하는 세상의 판단을 뒤집는 하나님의 행동과 연결된 권위입니다.
이 장에서 반복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열매입니다. 무화과나무에는 잎만 있었고,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말했지만 가지 않았으며,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열매를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열매를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 내야 할 성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열매에 대한 요구보다 먼저 포도나무를 심고 울타리를 두르고 맡기시는 주인의 돌봄이 있습니다. 열매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에 무리들이 환영했던 왕을, 성전의 지도자들은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오해한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알아차리고도 예수님을 거절하려 했습니다. 환영과 거절 사이에 일어난 일은 이것입니다.
집 짓는 사람들은 돌을 살펴보고,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버립니다. 그러나 그 돌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마지막 판단은 그들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지만, 그분을 예언자로 여기는 무리가 두려워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들 앞에는 자신들이 버리려는 돌이 서 있습니다.
아직 그 돌이 어떻게 머릿돌이 될지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미 그 답을 시편의 말씀으로 들려주셨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 그것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께로부터 비롯된 일이고 우리 눈에 놀랍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