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21–25장 · 예루살렘에서
왕의 초대와 사람의 마음
한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마련했습니다.
잔칫상이 차려졌고, 황소들과 살진 짐승들이 잡혔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러 갑니다. 심지어 왕이 보낸 사람들을 죽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왕은 그들을 심판하고, 이제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불러 모읍니다. 마침내 잔칫자리가 가득 찹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왕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발견하고 그를 바깥 어둠으로 내쫓으라고 명령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나 오라고 했는데, 마지막에는 한 사람을 내쫓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마태복음 22장은 이처럼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들을 던집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도 되는지, 부활 때에는 여러 남편과 혼인했던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는지,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들에 모두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예수님 자신이 질문하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 사이에서 하나의 문제가 점점 선명해집니다.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일까요? 율법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일까요? 옳은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어떻게 응답하는지, 하나님께 무엇을 돌려드리는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누구로 이해하는지를 물으십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논쟁에서 언제나 이기시는 지혜로운 교사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마련하신 왕의 뜻을 밝히시고, 하나님의 권위를 지키시며, 죽음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마침내 자신이 누구이신지 묻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왕은 왜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에게 거듭 사람을 보냈을까?
마태복음 22장은 앞 장에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소작인들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번에도 왕의 아들이 등장합니다. 다만 앞의 비유에서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 죽임을 당했고, 이번에는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풉니다.
「하늘의 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왕에게 견주어졌다.」마태복음 22:2 · 본디새김
잔치는 왕이 마련하지만, 그 잔치는 왕의 아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비유 속 왕은 하나님을,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로 앞의 소작인 비유에서도 주인의 아들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반드시 어떤 역사적 인물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암호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잔치는 때로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25:6–9에서 여호와야훼는 모든 민족을 위해 기름진 음식과 잘 익은 포도주가 있는 잔치를 마련하시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고 자기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마태복음이 이사야 25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잔치라는 이미지는 이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앞서 마태복음 8:11에서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의 나라에 기대어 누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런 잔치를 왕의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로 묘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엄격한 명령과 심판으로만 설명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왕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잔칫상을 차려 놓은 나라입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왜 거절했을까?
왕은 노예들을 보내 이미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잔치에 오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려 하지 않습니다. 왕은 다른 노예들을 다시 보냅니다.
「그는 다시 다른 노예들을 보내며 말했다. 『부름받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보아라, 내 잔칫상을 차려 놓았다. 내 황소들과 살진 짐승들이 잡혀 있고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다. 혼인 잔치에 오너라.」』」마태복음 22:4 · 본디새김
왕은 손님들에게 무엇인가를 준비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잔치에 참석할 자격을 증명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준비한 것을 설명합니다.
남은 것은 오라는 초대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가 버렸다. 어떤 이는 자기 밭으로, 어떤 이는 자기 장사를 하러 갔다.」마태복음 22:5 · 본디새김
밭을 돌보는 일도, 장사하는 일도 일상적인 생업입니다. 문제는 밭과 장사 자체가 아니라, 왕의 초대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노동이나 경제활동을 비난하는 말씀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은 사람의 삶에서 무엇이 우선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에게 왕의 초대는 자기 계획을 변경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의 행동은 더욱 심각합니다. 그들은 왕의 노예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입니다. 단순한 무관심이 폭력적인 거절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앞 장의 소작인 비유가 떠오릅니다. 포도원 주인은 열매를 받으려고 노예들을 보냈고, 소작인들은 그들을 매질하고 죽였습니다. 이번에는 왕이 사람들을 잔치에 부르려고 노예들을 보내지만, 초대받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그들을 죽입니다. 두 경우 모두 보내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보내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응답해 왔는지를 거듭 드러내고 계십니다.
왕이 도시를 불태우는 장면
7절에서는 이야기의 분위기가 급격히 바뀝니다.
「왕은 성이 났다. 그리고 자기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랐다.」마태복음 22:7 · 본디새김
혼인 잔치 이야기 한가운데에 전쟁과 도시의 파괴가 등장합니다. 이 장면을 지나치게 부드럽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비유는 거절과 폭력에 대한 심판을 강렬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나 비유 속 왕의 군사적 행동을 오늘날 인간 통치자가 그대로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 정치 지도자들에게 도시를 불태우라고 지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폭력적으로 거절하는 일의 심각성을 왕의 심판이라는 이미지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도시가 파괴되고 나서도 잔치는 여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다음 장면의 출발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도시가 불타는 장면은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최종 형성과 초기 독자들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한 읽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서기 70년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도시를 불태우는 심판의 이미지는 구약에도 등장하며, 특히 예레미야 52:13은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이 불태워진 일을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예루살렘 멸망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으나, 그 역사적 대응을 유일한 의미로 단정하지 않는 편이 정확합니다.
악한 사람까지 초대했는데, 왜 예복이 없는 사람은 내쫓았을까?
왕은 노예들에게 말합니다.
「그때에 그가 자기 노예들에게 말했다. 『혼인 잔치는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부름받은 이들은 그 부름에 걸맞지 않았다.』」마태복음 22:8 · 본디새김
「걸맞지 않았다」는 말은 그들이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도덕적인 자격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 속에서 그들은 왕의 초대를 거절했고, 일부는 왕의 노예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왕의 부름에 걸맞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들의 응답 때문입니다.
그러자 왕은 새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길이 트이는 어귀로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혼인 잔치로 불러라.』」마태복음 22:9 · 본디새김
이전에는 특정한 사람들이 초대받았습니다. 이제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부릅니다.
「그 노예들은 길로 나가 만난 사람을 악한 이든 선한 이든 다 모아들였다. 그래서 혼인 잔치가 식사 자리에 기대어 누운 이들로 가득 찼다.」마태복음 22:10 · 본디새김
선한 사람만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들도 함께 데려왔습니다. 왕은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잔치를 취소하지 않고, 이전에는 초대 대상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까지 잔치를 엽니다.
노예들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먼저 가려내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 13:47–50의 후릿그물 비유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 비유에서 그물은 온갖 것을 모아들이고, 모아들인 것들을 가르는 일은 그다음에 이루어집니다. 혼인 잔치에서도 사람들을 먼저 모아들인 뒤, 잔치가 가득 차자 왕이 들어와 사람들을 살펴봅니다.
잔치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할까?
왕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친구여, 혼인 예복을 지니지도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느냐?』 그는 말문이 막혔다.」마태복음 22:12 · 본디새김
그리고 왕은 그를 바깥 어둠으로 내쫓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독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혼인 예복이 없다는 이유로 심판을 내리는 것이 지나치지 않을까요?
자주 등장하는 설명은 당시 왕이 모든 손님에게 혼인 예복을 직접 제공했고, 이 사람은 그 예복을 일부러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왕이 예복을 제공했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런 관습을 이 구절의 확정적인 역사적 배경으로 삼기도 어렵습니다. 본문이 실제로 알려 주는 것은 그에게 혼인 예복이 없었다는 사실, 왕이 그 이유를 물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대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복은 무엇을 뜻할까요?
한쪽은 예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움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새로운 신분의 상징으로 봅니다. 이 읽기는 구원이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사야 61:10의 구원의 옷이라는 이미지와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쪽은 예복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실제적인 삶, 곧 믿음에서 비롯되는 의로움과 순종의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이 읽기는 마태복음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과 열매 맺는 삶이 반복해서 강조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두 읽기가 반드시 완전히 배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유는 예복이 정확히 어떤 신학적 개념을 가리키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한쪽을 유일한 의미로 확정하기보다 이야기의 흐름에서 분명한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초대는 사람의 이전 자격에 의해 제한되지 않지만, 초대에 응답한 삶이 어떤 모습인지는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이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7:21). 혼인 예복이 없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였는지 본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초대받은 사람들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과 왕이 요구하는 모습에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 사이에 심각한 불일치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부름받은 이들은 많고 뽑힌 이들은 적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이렇게 끝내십니다.
「부름받은 이들은 많고 뽑힌 이들은 적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2:14 · 본디새김
「부름받은」(κλητός)은 이 비유에서 반복된 부르다는 동사와 같은 어근의 말이고, 「뽑힌」(ἐκλεκτός)은 선택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름의 범위와 최종적인 선택이 동일하다고 단순히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구원받을 사람의 비율이 실제로 아주 낮을 것이라는 통계적 예고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14절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사이의 모든 관계를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이 비유의 결론에 놓인 이유는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초대는 실제적이고 넓지만, 그 초대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은 왕의 부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나중에 들어온 한 사람은 잔치에 합당한 예복 없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왕의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고 기록됩니다. 같은 동사가 조금 뒤 34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으셨다고 기록됩니다. 잔치에 들어온 사람도, 성경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권위 앞에서 말을 잃습니다.
이제 비유가 끝나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대신, 이번에는 말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부름받은」은 그리스어 클레토스, 「뽑힌」은 에클렉토스입니다. 12절과 34절에서 「말문이 막히다」로 옮긴 동사는 피모오로, 입을 막거나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는 왕의 잔치와 성전의 논쟁을 서로 다른 사건으로 서술하면서도 이 동사로 권위 앞에서 더 이상 대답할 수 없게 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동전에 새겨진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바리새파 사람들은 의논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직접 붙잡으려 하지 않고, 「말로 그를 덫에 걸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자들을 헤롯당 사람들과 함께 보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과 유대인의 종교적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헤롯당 사람들은 그 정체와 조직을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헤롯 왕조와 관계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로 이해됩니다. 헤롯 왕조는 로마 제국의 권력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이 두 집단이 함께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은 종교적 토론 이상의 정치적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다만 당시 헤롯당의 구체적인 정치적 입장을 모든 구성원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제자들을 헤롯당 사람들과 함께 그에게 보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진실하고 하나님의 길을 진리대로 가르치며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는 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보아 가며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22:16 · 본디새김
표면적으로는 칭찬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미 그들이 예수님을 덫에 걸리게 하려고 왔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시면 곤란해지실지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 생각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해 주십시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도 됩니까, 안 됩니까?」마태복음 22:17 · 본디새김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위험한 질문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 사람들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은 로마의 지배권 아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는 정치적·종교적 긴장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신다면 로마의 통치에 저항하도록 선동하신다는 혐의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금을 내라고 하신다면 로마의 지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판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의를 알아차리시고 「어찌하여 나를 떠보느냐, 위선자들아?」 하십니다. 그리고 세금으로 내는 동전을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 초상과 새겨진 글은 누구의 것이냐?」마태복음 22:2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관한 긴 논증부터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가져온 동전을 보게 하십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때에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주어라.」마태복음 22:21 · 본디새김
이 대답은 그들이 마련한 선택지를 무너뜨립니다.
「돌려주어라」는 갚다, 마땅한 것을 지급하다는 뜻을 가질 수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르에게 그에게 돌아갈 것을 돌려주라고 하시고, 같은 동사를 하나님에 대해서도 쓰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어떤 재산이 카이사르의 것이고 어떤 재산이 하나님의 것인지 일일이 구분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 때문에 이 말씀을 현대적인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국가의 모든 요구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카이사르에게 마땅히 돌려줄 것이 있다는 사실과, 그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전에는 카이사르의 형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창세기 1:26–27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연결하면, 동전을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해석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22장은 창세기를 직접 인용하지 않으므로, 형상의 대조는 가능한 정경적·신학적 읽기이지 예수님께서 명시적으로 설명하신 의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연결은 본문이 던지는 질문을 잘 드러냅니다. 로마 황제가 자기 초상을 동전에 새겼다고 해서, 그 황제가 인간의 삶 전체를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카이사르의 권위를 인정하실 것인지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드십니다.
그들은 이 대답을 듣고 놀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두고 떠나갑니다.
동전을 가지고 돌아가는 그들에게 남겨진 질문은 돈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무엇이며,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있었을까요?
조금 더 깊이
예수님 당시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였으므로, 그 동전은 티베리우스의 초상과 명문이 새겨진 은화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잘 알려진 티베리우스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초상과 함께 그가 신격화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는 뜻의 글이, 뒷면에는 최고 제사장이라는 칭호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동전의 문구를 기록하지 않으며, 실제로 제시된 데나리온이 어느 발행 유형이었는지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돌려주어라」(ἀποδίδωμι)의 그리스어 아포디도미는 마태복음 21:41에서 포도원 주인에게 마땅한 열매를 「치러 줄」 소작인들이라고 할 때도 쓰였습니다. 두 장면의 상황은 다르지만, 무엇이 누구에게 속하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죽은 사람들은 부활 때에 누구의 배우자가 될까?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이 끝나자 이번에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날에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마태복음 22:23 · 본디새김
이들은 부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활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얼마나 이상한 문제가 생기는지 보여 주려 합니다.
그들이 꺼내는 것은 일곱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첫째가 혼인했지만 자녀 없이 죽었고, 그의 아내는 둘째와 혼인했지만 둘째도 자녀 없이 죽습니다. 그런 일이 일곱째까지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여자도 죽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때에 그 여자는 일곱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가졌으니 말입니다.」마태복음 22:28 · 본디새김
이 이야기는 부활이라는 믿음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극단적인 사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근거로 사용하는 법은 실제로 모세의 율법, 신명기 25:5–10에 있습니다.
형제가 자녀 없이 죽었을 때 살아남은 형제가 그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여 죽은 형제의 이름과 가문이 이어지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모세가 규정한 혼인이 부활 후에도 계속된다면, 일곱 사람이 모두 그 여자에게 배우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부활을 믿으면 모세의 율법을 일관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예수님을 몰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부활한 뒤에도 지금의 혼인 관계가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전제를 문제 삼으십니다.
부활은 지금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일까?
예수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서 생각이 어긋나 있다.」마태복음 22:29 · 본디새김
사두개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의 문장을 전혀 읽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들지도 시집가지도 않고 도리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2:30 · 본디새김
부활 때에는 장가들거나 시집가는 일이 없으므로, 일곱 형제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은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사람들이 천사가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천사들과 같다고 말씀하시며, 그 비유의 직접적인 문맥은 혼인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한 사람들은 더 이상 육체를 갖지 않는다거나, 성별이나 모든 인간적 관계가 사라진다고 이 한 구절에서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현재 세상의 조건을 그대로 부활 이후에 옮겨 놓고, 그 조건 아래에서 모순이 생기면 부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상상력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부활은 현재의 삶을 아무 변화 없이 되풀이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출애굽기를 인용하셨을까?
예수님의 대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읽지 않았느냐?」 하시며 출애굽기 3:6을 인용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나님이다.」마태복음 22:32 · 본디새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뜻할까요? 「이다」라는 현재형 때문에 족장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설명이 자주 소개되지만, 동사의 시제만으로 부활을 증명했다고 설명하면 중요한 신학적 연결이 빠집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여호와야훼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십니다. 그때 족장들은 이미 죽은 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과 맺으신 관계를 끝난 과거의 일로 다루지 않으시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출애굽기 3:7–10). 이어지는 출애굽기 6:2–8에서는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논증을 이해하는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족장들과 여전히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계시며 그 관계가 죽음으로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다는 데 초점을 맞추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관계에 포함된 언약의 약속에 초점을 맞추어, 죽음조차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로 만들 수 없으므로 부활이 그 약속의 성취와 연결된다고 보는 읽기입니다. 두 읽기는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강조점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있는 이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을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죽은 몸이 어떤 물리적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설명하십니다. 죽음이 그분의 약속을 끝장낼 수 없습니다.
성경의 문장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만으로 그 문장의 의미를 모두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사용하여 부활을 부정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부활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의 출발점은 같았습니다.
그러나 도달한 결론은 정반대였습니다.
무리는 이 말을 듣고 그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율법 전체의 중심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5장의 계대결혼 규정은 죽은 형제의 이름과 가계가 이스라엘 가운데 사라지지 않도록 하고 상속과 재산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것이었으며, 남편을 잃은 여성이 친족과 재산 관계 안에서 처하는 상황과도 관련됩니다. 신명기 25장은 이 제도를 예외 없이 강제하지 않고, 형제가 의무를 거절할 때의 처리도 규정합니다. 출애굽기 3:6의 히브리어에는 「이다」에 직접 대응하는 동사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번역은 현재형으로 표현하지만, 히브리어 문장 구조는 현재형 동사 하나에 논증 전체를 걸기 어렵게 합니다. 또 족장들이 죽은 뒤에도 어떤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장차 몸의 부활이 일어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현재형 동사보다 하나님과 족장들 사이의 지속적인 언약 관계를 중요하게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사두개파 사람들이 말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시 모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에 밝은 사람 하나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마태복음 22:36 · 본디새김
율법의 여러 계명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당시 유대교에서 충분히 논의할 만한 주제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예배부터 이웃과의 관계, 재산과 재판, 절기와 제사, 음식과 정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그 모든 명령을 관통하는 중심은 무엇일까요?
그가 그에게 말했다. 「『주, 곧 너의 하나님을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사랑하여라.』」마태복음 22:3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신명기 6:5에서 왔습니다. 바로 앞인 신명기 6:4에는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하는, 쉐마라고 알려진 선언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이 섬겨야 할 여호와야훼가 누구이신지를 선언하고, 이어서 온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누구신지를 아는 것과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생각을 모두 다하라는 뜻
신명기에는 마음, 목숨, 힘이, 마태복음에는 마음, 목숨, 생각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세 부분으로 정확하게 나누어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에서 마음은 생각과 판단과 의지가 이루어지는 중심을 나타낼 수 있고, 목숨은 인간의 생명과 존재를 가리킵니다.
자신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감정으로만, 지식으로만, 특별한 종교적 행동을 할 때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크고 첫째인 계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마태복음 22:39 · 본디새김
왜 둘째 계명도 첫째와 같다고 하셨을까?
이 말씀은 레위기 19:18에서 왔습니다. 「같다」는 말이 두 계명의 대상이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둘을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도록 나란히 세우십니다.
레위기 19장은 도둑질과 거짓말, 부당한 대우를 금지하고, 가난한 사람과 장애가 있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재판에서 불의를 행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지 말라고 가르친 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레위기 19:9–18). 뒤에서는 함께 사는 이방 사람을 본토인처럼 대하고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19:33–34).
따라서 이웃 사랑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웃의 생명과 권리와 존엄을 존중하며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 사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에 관한 질문을 잘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에는 거절과 적대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을 사용하여 율법 전체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다시 밝히십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달려 있다.」마태복음 22:40 · 본디새김
「달려 있다」는 무엇인가에 매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수백 개의 계명을 두 개로 줄여 버리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폐기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5:17에서 율법과 예언자들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율법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구실이 아닙니다. 율법이 무엇을 이루려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중심입니다. 율법에 관한 지식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면 율법이 가리키는 방향을 놓칠 수 있고, 반대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이 끝나자, 이제 대화의 방향이 바뀝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대상은 율법의 어떤 계명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2:30의 병행 본문에는 마음, 목숨, 생각, 힘이라는 네 항목이 나옵니다. 마태는 마가에 있는 「힘」을 적지 않고 「생각」을 포함한 세 항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신명기 6:5에서 「힘」으로 흔히 번역되는 히브리어 메오드는 「매우」라는 부사로도 쓰이는 말로, 그 정확한 의미와 범위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신약에서 「생각」과 「힘」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 역시 그런 의미상의 폭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40절의 「달려 있다」는 그리스어 크레마마이에서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이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될 수 있을까?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에 이제 예수님께서 질문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에 대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마태복음 22:42 · 본디새김
이 대답은 틀리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윗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왕위가 이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사야 11:1–10에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새로운 싹이 나오고, 예레미야 23:5–6에서는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겠다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1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하고, 바로 앞 장에서는 무리가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21:9).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답이 충분한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왜 자기 후손을 「주」라고 불렀을까?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다윗이 영으로 그를 『주』라 부르며 이렇게 말하느냐?」마태복음 22:43 · 본디새김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마태복음 22:44 · 본디새김
시편 110:1의 히브리어 원문에서 첫 번째 「주」(κύριος)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훼」이고, 두 번째 「내 주」는 「나의 주인」을 뜻하는 다른 말입니다. 원문의 구조는 여호와야훼께서 시편 화자가 「내 주」라고 부르는 대상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어에서는 두 표현이 모두 「주」로 나타나며, 마태복음의 인용도 그 형태를 따릅니다.
이 시편은 여호와야훼께서 한 왕적 인물에게 자신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굴복시키실 것을 선언하는 왕권 시편입니다. 시편 자체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논의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그 시편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영으로 이 말씀을 전했다는 전제에서 질문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른다면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냐?」마태복음 22:45 · 본디새김
자손이 조상보다 높을 수 있는가?
고대의 혈통과 가계 질서에서 조상은 후손보다 앞선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조의 위대한 조상 다윗이 자신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부른다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는 후손 이상의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그러나 다윗이 「내 주」라고 부를 만큼 그보다 높은 권위를 지니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계보 안에서 태어나셨지만, 옛 왕국을 다시 세우는 왕위 계승자로만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권위를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장차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시는 분이라는 비유를 통해 자신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도 드러내십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을 설명하는 데 참되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곧바로 삼위일체 교리 전체에 대한 완결된 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내 주」라는 호칭은 높은 지위를 지닌 인간에게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논증은 「주」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하므로 그리스도가 곧 여호와야훼와 동일하다는 방식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기대되던 그리스도가 다윗 자신에게서도 주로 불릴 만큼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의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질문하고 계신 자리에서 멈춥니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으로만 생각한다면, 다윗이 그를 자기의 주라고 부르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마지막에는 누가 질문을 멈추었는가?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아무도 감히 그에게 더는 묻지 못했다.마태복음 22:46 · 본디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은 세금을,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율법에 밝은 사람은 가장 큰 계명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해 물으시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율법의 문제에서 그 율법이 가리키는 분으로 관심이 옮겨갑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10:1의 첫 번째 「주」는 「여호와야훼」, 두 번째 「내 주」는 히브리어 아도니이며, 그리스어에서는 두 표현이 모두 퀴리오스로 나타납니다. 이 시편이 본래 어떤 역사적 왕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는지, 표제의 「다윗」이 저자나 헌정 대상 가운데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논의가 있습니다. 다윗 자신이 장차 올 왕을 예언한 시편이라고 읽는 전통이 있는 반면, 본래는 다윗 왕조에 속한 왕의 즉위나 왕권을 기념하는 시편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후대 신약성경은 이 시편을 예수님의 부활과 높아지심에 연결하여 더욱 발전시킵니다. 사도행전 2:34–36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주권과 연결하고, 히브리서 1:13도 예수님의 지위와 연결합니다. 이것은 시편 110편을 그리스도 안에서 읽는 신약의 신학적 발전입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마지막 질문
마태복음 22장의 질문들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지만, 모두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드러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왕의 초대에서 시작하지만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응답이 완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세금 질문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부활 질문은 하나님이 죽음 앞에서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삶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가르침을 전하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묻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일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관한 질문을 만들 수 있었고, 모세의 말씀으로 논증할 수 있었으며, 다윗의 자손에 관한 전통적인 대답도 알고 있었습니다. 혼인 잔치에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도 왕의 초대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지 않았습니다.
이 장의 문제는 정보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실제로 응답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을 연구하거나 어려운 신학적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모세의 말씀과 시편을 깊이 해석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질문이 진실을 찾기 위한 것인지, 이미 정해 놓은 입장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 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으로 자신의 생각을 입증하는 일에만 몰두하면, 자신이 성경 앞에서 바뀌어야 할 가능성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도구로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은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해 마련한 혼인 잔치로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왕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 장의 마지막으로 오면 또 하나의 침묵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들을 던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예수님께서는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는 시편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른다면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침묵을 틈타 자신의 정당성을 길게 변론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의 말씀을 그들 앞에 놓으시고,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에 아직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오래 기다려 온 왕이 실제로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는 그들의 생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도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고, 그날부터 아무도 감히 예수님께 더는 묻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성전에서 이어지던 논쟁이 멈췄습니다.
그들 앞에는 여전히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 질문을 가지고 계신 분은 그들이 아닙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