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21–25장 · 예루살렘에서
왕의 초대와 사람의 마음
한 왕이 자기 아들의 결혼 잔치를 마련했습니다.
잔칫상이 차려졌고, 황소들과 살찌운 짐승들이 잡혔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러 갑니다. 심지어 왕이 보낸 사람들을 죽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왕은 그들을 심판하고, 이제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불러 모읍니다. 마침내 잔치 자리가 가득 찹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왕은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발견하고 그를 바깥 어둠으로 내쫓으라고 명령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나 오라고 했는데, 마지막에는 한 사람을 내쫓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마태복음 22장은 이처럼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어려운 질문들을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도 되는지, 부활 때에는 여러 남편과 결혼했던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는지,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들에 모두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예수님 자신이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 사이에서 하나의 문제가 점점 선명해집니다.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일까요? 율법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일까요? 옳은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어떻게 응답하는지, 하나님께 무엇을 돌려드리는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누구로 이해하는지를 물으십니다.
왕은 왜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에게 거듭 사람을 보냈을까?
마태복음 22장은 앞 장에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소작인들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번에도 왕의 아들이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엽니다.
「하늘의 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연 왕에 비길 수 있다.」마태복음 22:2 · 두루새김
잔치는 왕이 마련하지만, 그 잔치는 왕의 아들을 위한 것입니다. 바로 앞의 소작인 비유에서도 주인의 아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비유 속 왕은 하나님을,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어떤 역사적 인물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암호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잔치는 때로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25:6–9에서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위해 기름진 음식과 잘 익은 포도주가 있는 잔치를 마련하시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시고 자기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마태복음이 이 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잔치라는 이미지는 이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앞서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의 나라에 기대어 누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8:11).
하나님 나라는 단지 엄격한 명령과 심판으로만 설명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왕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잔칫상을 차려 놓은 나라입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왜 거절했을까?
왕은 노예들을 보내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잔치에 오라고 전합니다. 그들이 오려 하지 않자, 왕은 다른 노예들을 다시 보냅니다.
「왕은 다른 노예들을 보내며,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했다. 『보아라. 내가 잔칫상을 차렸다. 황소들과 살찌운 짐승들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결혼 잔치에 오너라.』」마태복음 22:4 · 두루새김
왕은 손님들에게 무엇인가를 준비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잔치에 참석할 자격을 증명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준비한 것을 설명합니다.
남은 것은 오라는 초대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가 버렸다.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어떤 사람은 자기 장사를 하러 갔다.」마태복음 22:5 · 두루새김
밭을 돌보는 일도, 장사하는 일도 일상적인 생업입니다. 문제는 밭과 장사 자체가 아니라, 왕의 초대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왕의 초대는 자기 계획을 바꿀 만큼 가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의 행동은 더욱 심각합니다.
그들은 왕의 노예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입니다. 단순한 무관심이 폭력적인 거절로 이어집니다. 앞 장의 소작인들도 열매를 받으러 온 노예들을 매질하고 죽였습니다. 한쪽에서는 주인의 요구를, 다른 쪽에서는 왕의 초대를 거절했지만, 두 경우 모두 보내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보내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응답해 왔는지를 거듭 드러내고 계십니다.
왕이 도시를 불태우는 장면
7절에서는 이야기의 분위기가 급격히 바뀝니다.
「왕은 화가 나서 군대를 보냈다.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태웠다.」마태복음 22:7 · 두루새김
결혼 잔치 이야기 한가운데에 전쟁과 도시의 파괴가 등장합니다. 이 장면을 지나치게 부드럽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비유는 거절과 폭력에 대한 심판을 강렬하게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비유 속 왕의 군사적 행동을 오늘날 인간 통치자가 그대로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 정치 지도자들에게 도시를 불태우라고 지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폭력적으로 거절하는 일의 심각성을 왕의 심판이라는 이미지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도시가 파괴되고 나서도 잔치는 여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다음 장면의 출발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도시가 불타는 장면은 서기 70년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와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완성된 과정과 초기 독자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할 만한 읽기입니다. 그러나 도시를 불태우는 심판의 이미지는 구약에도 등장하며(예레미야 52:13은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이 불태워진 일을 기록합니다), 이 구절이 서기 70년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역사적 사건과의 연결을 유일한 의미로 단정하지 않는 편이 정확합니다.
악한 사람까지 초대했는데, 왜 예복이 없는 사람은 내쫓았을까?
「그러고 나서 왕은 노예들에게 말했다. 『결혼 잔치는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올 자격이 없었다.』」마태복음 22:8 · 두루새김
「잔치에 올 자격이 없었다」는 말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도덕적 자격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왕의 초대를 거절했고, 일부는 왕의 노예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판단받은 것은 바로 그들의 응답 때문입니다.
「『그러니 길이 갈라지는 곳으로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결혼 잔치에 초대해라.』」마태복음 22:9 · 두루새김
이전에는 특정한 사람들이 초대받았습니다. 이제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초대합니다.
「노예들은 길로 나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만나는 사람을 모두 데려왔다. 잔치 자리는 기대어 누운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복음 22:10 · 두루새김
마태는 악한 사람을 먼저 적습니다. 왕은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잔치를 취소하지 않고, 이전에는 초대 대상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까지 잔치를 엽니다. 노예들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먼저 가려내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 13:47–50의 후릿그물 비유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물은 온갖 것을 모아들이고, 가르는 일은 그다음에 이루어집니다. 결혼 잔치에서도 사람들을 먼저 모아들인 뒤, 잔치 자리가 가득 차자 왕이 들어와 사람들을 살펴봅니다.
잔치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할까?
왕은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발견합니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친구야,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느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태복음 22:12 · 두루새김
그리고 왕은 그를 바깥 어둠으로 내쫓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독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복이 없다는 이유로 심판을 내리는 것이 지나치지 않을까요?
본문이 실제로 알려 주는 것은 그에게 결혼 예복이 없었다는 사실, 왕이 그 이유를 물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대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복은 무엇을 뜻할까요? 주요한 해석은 두 방향으로 나뉩니다. 한쪽은 예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움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새로운 신분의 상징으로 봅니다. 구원이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사야 61:10의 구원의 옷이라는 이미지와도 이어집니다. 다른 쪽은 예복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걸맞게 응답하는 실제 삶, 곧 믿음에서 비롯되는 의로움과 순종의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과 열매 맺는 삶이 반복해서 강조된다는 점이 근거입니다.
두 읽기가 반드시 서로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유는 예복이 정확히 어떤 신학적 개념을 가리키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야기의 흐름에서 분명한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초대는 사람의 이전 자격에 의해 제한되지 않지만, 초대에 응답한 삶이 어떤 모습인지는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앞서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7:21).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2:14 · 두루새김
원문에서 「초대받은」(κλητός)은 비유에서 반복된 「부르다」라는 동사와 같은 어근의 말이고, 「뽑힌」(ἐκλεκτός)은 선택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초대의 범위와 최종적인 선택이 같다고 단순히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구원받을 사람의 비율이 실제로 아주 낮을 것이라는 통계적 예고로 읽을 근거는 없고, 14절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응답 사이의 모든 관계를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왕의 초대는 실제로 주어졌고 그 범위도 넓습니다. 그런데 그 초대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은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나중에 들어온 한 사람은 잔치에 걸맞은 예복 없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비유가 끝나자 종교 지도자들은 돌이키는 대신, 이번에는 말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왕이 잔치에 오는 모든 손님에게 예복을 직접 제공했고, 이 사람은 그 예복을 일부러 거절했다는 설명이 자주 소개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왕이 예복을 제공했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런 관습을 이 구절의 확정적인 배경으로 삼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본문에 덧붙여서는 안 됩니다. 또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에 쓰인 동사는 입을 막는다는 뜻으로, 34절에서 예수님께서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으셨다」고 할 때 다시 쓰입니다. 마태는 잔치와 성전의 논쟁을 서로 다른 사건으로 서술하면서도, 권위 앞에서 더 이상 대답할 수 없게 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동전에 새겨진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바리새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꼬투리 잡을 방법을 의논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제자들을 헤롯당 사람들과 함께 보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과 유대인의 종교적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진 집단이었고, 헤롯당 사람들은 로마의 권력에 의존하던 헤롯 왕조와 관계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로 이해됩니다. 두 집단이 함께 접근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토론 이상의 정치적 긴장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께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신다는 것을 압니다. 또 사람의 겉모습이나 지위에 따라 대하지 않으시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십니다.」마태복음 22:16 · 두루새김
겉으로는 칭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진실하고 눈치 보지 않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시면 곤란해지실지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내도 됩니까, 안 됩니까?」마태복음 22:17 · 두루새김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위험한 질문
로마 지배 아래 있던 유대 사람들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은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에게 이 질문에는 정치적·종교적 긴장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시면 로마에 대한 저항을 선동한다는 혐의를 받으실 수 있고, 내라고 하시면 로마의 지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판받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아, 왜 나를 시험하느냐?」 하시고 세금으로 내는 동전을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옵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이 동전에 새겨진 얼굴과 글은 누구의 것이냐?」마태복음 22:20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관한 긴 설명부터 시작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가져온 동전을 보게 하십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마태복음 22:21 · 두루새김
이 대답은 그들이 마련한 선택지를 무너뜨립니다.
「돌려주고」로 옮긴 그리스어 아포디도미(ἀποδίδωμι)는 갚다, 마땅한 것을 지급하다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황제에게 돌아갈 것을 돌려주라고 하시고, 같은 동사를 하나님에 대해서도 쓰십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돌려드려라」로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어떤 재산이 황제의 것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것인지 목록으로 구분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현대적인 정교분리 원칙으로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고, 그렇다고 국가의 모든 요구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황제에게 마땅히 돌려줄 것이 있다는 사실과, 그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동전의 이미지는 더 깊은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것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1:26–27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동전에는 황제의 모습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전을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뜻과 잇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만 마태복음 22장은 창세기를 직접 인용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가능한 해석이지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신 의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 연결은 본문의 질문을 잘 드러냅니다. 황제가 자기 얼굴을 동전에 새겼다고 해서 인간의 삶 전체를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실 것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드십니다. 그들은 놀라서 예수님을 두고 떠나갑니다.
동전을 가지고 돌아가는 그들에게 남겨진 질문은 돈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무엇이며,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있었을까요?
조금 더 깊이
당시 황제는 티베리우스였으므로, 그 동전은 티베리우스의 얼굴과 글이 새겨진 은화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잘 알려진 티베리우스 데나리온에는 그가 신으로 높여진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는 뜻의 글이, 뒷면에는 최고 제사장이라는 칭호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새겨진 문장을 기록하지 않으며, 실제로 제시된 동전이 어느 종류였는지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또 헤롯당의 구체적인 정치적 입장을 모든 구성원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마태복음 21:41에서 사람들이 포도원 주인에게 마땅한 열매를 「치러 줄」 소작인들이 필요하다고 대답할 때도 같은 동사 아포디도미가 쓰입니다. 두 장면은 무엇이 누구에게 속하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죽은 사람들은 부활 때에 누구의 배우자가 될까?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이 끝나자 이번에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은 없다고 말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마태복음 22:23 · 두루새김
이들은 부활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묻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활이 있다고 가정하면 얼마나 이상한 문제가 생기는지 보여 주려 합니다.
그들은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첫째가 결혼했지만 자녀 없이 죽고, 그의 아내는 둘째와 결혼하지만 둘째도 자녀 없이 죽습니다. 그런 일이 일곱째까지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여자도 죽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 그 여자는 일곱 형제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 사람 모두 그 여자와 결혼했으니 말입니다.」마태복음 22:28 · 두루새김
이 이야기는 부활이라는 믿음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근거로 쓰는 법은 실제로 모세의 율법에 있습니다.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기 위한 혼인
신명기 25:5–10은 형제가 자녀 없이 죽었을 때 살아남은 형제가 그의 아내와 결혼하여 죽은 형제의 이름과 집안이 이어지도록 하는 제도를 규정합니다. 흔히 형사취수혼이라고 부릅니다. 본래 목적은 죽은 형제의 대가 이스라엘 가운데 사라지지 않게 하고 상속과 재산이 이어지게 하는 데 있었고, 남편을 잃은 여성이 친족과 재산 관계 안에서 처하게 되는 상황과도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 율법을 들어, 부활을 믿으면 모세의 율법을 일관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예수님을 몰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부활한 뒤에도 지금의 결혼 관계가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전제를 문제 삼으십니다.
부활은 지금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일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몰라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마태복음 22:29 · 두루새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성경의 문장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들지도 시집가지도 않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2:30 · 두루새김
부활 때에는 장가들거나 시집가는 일이 없으니,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은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사람들이 천사가 된다고 하지 않으시고 천사들과 같다고 하시며, 그 문맥은 결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에서 부활한 사람들이 몸을 갖지 않는다거나 모든 인간적 관계가 사라진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현재 세상의 조건을 그대로 부활 이후에 옮겨 놓고, 거기서 모순이 생기면 부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상상력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부활은 현재의 삶을 아무 변화 없이 되풀이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출애굽기를 인용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이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하시며 이제 성경 자체를 근거로 부활을 설명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마태복음 22:32 · 두루새김
이 말씀이 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뜻할까요?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십니다. 그때 세 조상은 이미 죽은 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과 맺으신 관계를 끝난 과거의 일로 다루지 않으시고, 그들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것을 보시고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출애굽기 3:7–10). 이어 출애굽기 6:2–8에서는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고 이루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논증을 이해하는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조상들과 여전히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계시므로 그 관계가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초점을 맞추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관계에 담긴 언약의 약속에 초점을 맞추어, 죽음조차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로 만들 수 없으므로 부활이 그 약속의 성취와 연결된다고 보는 읽기입니다. 두 읽기는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설명하십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으로 부활을 부정하려 했고, 예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활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의 출발점은 같았습니다. 그러나 도달한 결론은 정반대였습니다.
무리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그러나 질문은 끝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조상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해석이 자주 소개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6의 히브리어에는 현재형 「이다」에 직접 대응하는 동사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번역은 현재형으로 표현하지만, 동사 하나의 시제에 논증 전체를 걸기는 어렵습니다. 또 조상들이 죽은 뒤에도 어떤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과 장차 몸의 부활이 일어난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동사의 시제보다 하나님과 조상들 사이의 지속적인 언약 관계를 중요하게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한편 신명기 25장은 형사취수혼을 예외 없이 강제하지 않고, 형제가 그 의무를 거절할 때 어떻게 처리할지도 규정합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
사두개파 사람들이 말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시 모입니다. 그 가운데 율법 전문가 한 사람이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복음 22:36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당시 유대교에서 충분히 논의할 만한 주제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예배와 이웃 관계, 재산과 재판, 절기와 제사, 음식과 정결에 이르는 다양한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그 모든 명령을 관통하는 중심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해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해라.』」마태복음 22:37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신명기 6:5에서 왔습니다. 바로 앞인 6:4는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하는, 히브리어 첫 단어에서 이름을 딴 쉐마라고 알려진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이 섬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선언하고 나서 그분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과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생각을 모두 다하라는 뜻
이 말씀을 인간을 마음과 목숨과 생각이라는 세 부분으로 정확하게 나누어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에서 마음은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판단과 의지가 이루어지는 중심을, 목숨은 인간의 생명과 존재를 가리킵니다.
자신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감정으로만, 지식으로만, 특별한 종교적 행동을 할 때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으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라.』」마태복음 22:39 · 두루새김
왜 둘째 계명도 첫째와 같다고 하셨을까?
이 말씀은 레위기 19:18에서 왔습니다. 「같다」는 말이 두 계명의 대상이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둘을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도록 나란히 세우십니다.
레위기 19장은 도둑질과 거짓말, 부당한 대우를 금지하고, 가난한 사람과 장애가 있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며, 재판에서 불의를 행하지 말고 원한을 품지 말라고 가르친 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19:9–18). 함께 사는 이방 사람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19:33–34). 이웃 사랑은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이웃의 생명과 권리와 존엄을 존중하며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에 관한 질문을 잘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실제로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에는 거절과 적대가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으로 율법 전체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다시 밝히십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온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복음 22:40 · 두루새김
「달려 있다」는 무엇인가에 매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수백 개의 계명을 두 개로 줄여 버리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5:17).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율법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구실이 아니라, 율법이 무엇을 이루려는지 이해하게 하는 중심입니다.
율법에 관한 지식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면 율법이 가리키는 방향을 놓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이 끝나자, 대화의 방향이 바뀝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그 질문의 대상은 율법의 어떤 계명도 아닌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6:5의 히브리어에는 마음, 목숨, 힘의 세 표현이 나오는데, 마태복음에는 마음, 목숨, 생각이, 마가복음 12:30에는 마음, 목숨, 생각, 힘의 네 항목이 나옵니다. 「힘」으로 흔히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매우」라는 부사로도 쓰이는 말로, 그 정확한 의미와 범위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신약에서 「생각」과 「힘」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도 그런 의미의 폭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될 수 있을까?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마태복음 22:42 · 두루새김
이 대답은 틀리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왕위가 이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이사야 11:1–10과 예레미야 23:5–6도 다윗 집안에서 정의로 다스릴 왕이 나올 것을 약속합니다. 마태복음도 1:1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했고, 바로 앞 장에서 무리는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21:9).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답이 충분한지 물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왜 자기 후손을 「주님」이라고 불렀을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윗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느냐?」마태복음 22:43 · 두루새김
「다윗은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라고 하며 그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마태복음 22:44 · 두루새김
시편 110:1의 히브리어에서 첫 번째 「주님」은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고, 두 번째 「내 주님」은 「나의 주인」을 뜻하는 다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편의 화자가 「내 주」라고 부르는 왕적 인물에게 자신의 오른쪽에 앉으라고 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굴복시키실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어에서는 두 표현이 모두 「주」(κύριος)라는 한 낱말로 나타나고, 두루새김도 두 자리를 모두 「주님」으로 옮겼습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이 말씀을 전했다는 전제에서 질문하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냐?」마태복음 22:45 · 두루새김
자손이 조상보다 높을 수 있는가?
고대의 집안 질서에서 조상은 후손보다 앞선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조의 위대한 조상 다윗이 자기 후손인 그리스도를 「내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는 후손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그러나 다윗이 「내 주님」이라고 부를 만큼 그보다 높은 권위를 지니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는 권위를 가지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장차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시는 비유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도 드러내셨습니다. 이 모든 장면을 함께 읽으면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참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곧바로 삼위일체 교리 전체에 대한 완결된 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시편 110:1의 「내 주」라는 호칭은 높은 지위를 지닌 인간에게도 쓰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논증은 「주님」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므로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 기대되던 그리스도가 다윗 자신에게서도 주님으로 불릴 만큼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질문하고 계신 자리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누가 질문을 멈추었는가?
아무도 예수께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부터는 아무도 감히 예수께 더 묻지 못했습니다.마태복음 22:46 · 두루새김
그들은 세금을 낼 것인지, 부활 때의 결혼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물으십니다. 율법의 문제에서 그 율법이 가리키는 분으로 관심이 옮겨갑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10편은 왕권과 관련된 시편입니다. 다윗 자신이 장차 올 왕을 예언한 시편이라고 읽는 전통이 있는 반면, 본래 다윗 왕조에 속한 왕의 즉위나 왕권을 기념하는 시편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표제의 「다윗」이 저자를 가리키는지 헌정 대상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 관한 논의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그 시편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대 신약성경은 이 시편을 예수님의 부활과 높아지심에 연결하여 발전시킵니다. 사도행전 2:34–36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주권과, 히브리서 1:13은 예수님의 지위와 연결합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마지막 질문
마태복음 22장의 질문들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지만, 모두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율법을 잘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도 왕의 초대를 모르지 않았고, 종교 지도자들도 율법과 다윗의 자손에 관한 대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실제로 응답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일과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잔치는 왕의 아들을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을 가르치시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 누구신지 밝히시고, 온 율법이 무엇에 달려 있는지 해석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윗이 자기의 주님이라고 부른 그리스도에 관해 질문하십니다.
장의 처음에는 왕의 질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의 마지막에는 또 하나의 침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침묵을 틈타 자신이 옳다는 것을 길게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의 말씀을 그들 앞에 놓으시고,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에 아직 헤아리지 못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을 뿐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오래 기다려 온 왕이 실제로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도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무도 감히 예수님께 더 묻지 못했습니다.
성전에서 이어지던 논쟁이 멈췄습니다.
그들 앞에는 여전히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 질문을 가지고 계신 분은 그들이 아닙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