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21–25장 · 예루살렘에서

무거운 짐과 품으시는 날개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의 가장 날카로운 책망이 담긴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늘의 나라 문을 닫아 사람들 앞을 가로막는다」고 하십니다. 눈먼 길잡이라고 부르시고,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까지 하십니다.

그런데 이 장을 끝까지 읽으면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엄중하게 책망하시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암탉이 자기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하고 탄식하십니다. 앞에서는 분노하시는 예수님께서 계시고, 마지막에는 자기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으려는 암탉의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 두 모습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그 실마리는 장의 앞부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무겁고 지기 어려운 짐을 묶어 어깨에 지우면서,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 자신은 사람들을 날개 아래 모으려 하십니다.

한쪽은 사람들의 어깨에 짐을 얹고, 다른 한쪽은 사람들을 자기 날개 아래 품으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잘못된 교리를 몇 가지 가르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존경받는 자리를 좋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세밀한 규정에는 열심이었지만 그 율법이 요구하는 판결과 자비와 믿음은 버렸습니다. 예언자들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들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모순을 드러내시고, 이 장의 마지막에서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다른 분이신지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와서 존경을 표시하기를 기다리시는 지도자가 아니십니다. 사람들을 모으려고 먼저 손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장의 비극은 그 사실에 있습니다.

읽는 시간 44분소단락 923장 본문 읽기 →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 — 왜 그들의 말은 지키고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을까?

마태복음 23:1–4 본문 →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종교 집단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되는지 물으셨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대상을 바꾸십니다.

앞에서는 종교 지도자들과 직접 논쟁하셨지만, 이제는 「무리와 자기 제자들에게」 그 지도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첫 말씀부터 뜻밖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는 마라. 그들은 말은 하고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3:2–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강하게 책망하시면서도, 먼저 그들의 가르침을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모세의 자리란 무엇인가?

「모세의 자리」는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권위와 관계된 표현입니다. 고대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앉던 특별한 자리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 의자의 생김새보다 모세의 율법을 가르칠 권위가 누구에게 있다고 여겨졌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었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에 충실한 삶을 중요하게 여기던 유대교 집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모세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위치에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그 위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두 명령이 이어집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행하고 지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행동은 본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르치는 모든 규정을 예외 없이 따르라고 하신 것일까요? 마태복음 15:3–6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행동을 비판하셨습니다. 16:12에서는 제자들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의 가르침을 조심해야 한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23:3을 그들이 가르치는 모든 내용에 대한 무조건적인 승인으로 읽으면 이 말씀들과 긴장이 생깁니다.

이 구절의 읽기는 갈립니다.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한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으로 읽기도 하고, 그들의 가르치는 지위를 폭넓게 인정하시면서 삶과 가르침 사이의 모순을 극적으로 부각하신 말씀으로 읽기도 하며, 서기관들의 해석 권위보다 제자들이 모세의 계명을 배워 행해야 한다는 점에 무게를 둔 말씀으로 읽기도 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느냐에 따라 「모세의 자리」의 권위를 어디까지 인정하는지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 해석상의 갈림을 인정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직접 지적하시는 잘못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의 삶에서는 그 뜻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어깨 위에 놓인 짐

예수님께서는 그 모순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 주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지기 어려운 짐을 묶어서 사람들의 어깨에 지운다. 그런데 자기들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마태복음 23:4 · 본디새김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지도자들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지우고, 그것을 감당하도록 돕지 않습니다. 이 짐은 모세의 율법 자체와 완전히 동일시할 필요는 없고, 율법에 덧붙인 여러 해석과 요구, 그리고 그것을 집행하는 방식까지 포함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태복음 11:28–30과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자신에게 오라고 부르시고, 자신의 멍에는 편하고 자신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아무런 책임도 요구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24).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시는 희생을 요구하며 높은 곳에 앉아 계시지 않습니다.

참된 영적 권위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가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어떻게 돕고, 자신도 그 뜻에 어떻게 순종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실제로 고대 회당 유적에서는 권위 있는 좌석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다만 남아 있는 고고학적 사례들이 반드시 예수님 시대의 회당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23:3의 첫째 읽기는 「모세의 자리」라는 표현이 가르침의 기준을 규정한다고 봅니다. 둘째 읽기에서도 마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 자신의 율법 해석이 최종적인 기준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지킴 갑을 넓히고 옷단 술을 크게 한 것이 왜 문제였을까?

마태복음 23:5–12 본문 →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들의 모든 일을 행한다. 실제로 그들은 몸에 매는 지킴 갑을 넓게 하고 옷단 술을 크게 한다.」마태복음 23:5 · 본디새김

지킴 갑은 흔히 테필린이라고 불리는 경건 관습과 관련됩니다. 신명기 6:8과 11:18, 출애굽기 13:9, 16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매고 이마에 두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후대 유대교에서는 관련 성경 구절들을 작은 상자에 넣어 팔과 머리에 매는 관습이 확립되었습니다.

옷단 술은 민수기 15:37–41과 신명기 22:12에 배경이 있습니다. 특히 민수기 15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옷단에 술을 달아 그것을 보고 여호와야훼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지킴 갑과 옷단 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려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그런 물건을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를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목적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라는 표현이 5절 전체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라는 표지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경받기 위한 장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기 위한 것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경건한지를 보여 주는 물건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셨던 문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거나 기도하거나 금식하는 일을 책망하셨습니다(6:1–18). 그 행동들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야 할 행동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얻기 위한 행동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물건이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다

지킴 갑과 옷단 술은 원래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기억하도록 주어진 표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의 백성이며, 그분의 계명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표지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적 우월함을 보여 주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정작 그 표지가 가리키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 지닌 것이 자신을 높이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나열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장터에서 인사받기와 사람들에게서 『랍비』라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복음 23:6–7 · 본디새김

여기서 반복되는 것은 높은 자리와 존경받는 호칭입니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윗자리, 장터의 인사와 랍비라는 호칭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중요성과 권위를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편안한 의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신 뒤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불리지 마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고 너희는 다 형제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3: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형제입니다. 공동체 안에 서로 다른 역할이나 책임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차이가 어떤 사람에게 다른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높은 영적 신분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정말로 누구도 선생이나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될까?

「그리고 땅 위의 누구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의 아버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3:9 · 본디새김
「『이끄는 이』라 불리지도 마라. 너희를 이끄는 이는 그리스도 한 분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3:10 · 본디새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다른 사람을 선생이라고 부르는 일을 모두 금지한다고 읽어야 할까요? 그렇게 읽으면 마태복음의 다른 말씀과 충돌합니다. 예수님 자신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가르치셨고(15:4; 19:19), 28:19–20에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초점은 모든 관계 명칭을 일상 언어에서 없애라는 데 있기보다, 특정한 영적 호칭을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권위를 자신이 차지하려는 태도를 거부하라는 데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내면적으로 교만하지 않으면 어떤 호칭도 문제없다는 식으로 말씀의 힘을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불리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제자들의 공동체가 사람들의 지위와 호칭을 통해 서열화되는 일을 심각하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세 표현의 근거를 보면, 너희의 선생은 한 분이고,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의 아버지 한 분이시며, 너희를 이끄는 이는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로 돌리십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너희 가운데 가장 큰 이는 너희를 섬기는 이가 될 것이다.」마태복음 23:11 · 본디새김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0:26–28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섬김은 단순한 겸손의 처세술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걸어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마태복음 23:12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뒤이어 나올 엄중한 책망을 이해하는 기준이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을 높이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바로 그런 행동이 자신을 낮아지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는 길은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그들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높이는 종교적 권위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를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하늘의 나라 문을 닫는 사람들

마태복음 23:13–15 본문 →

13절부터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거세집니다.

「그런데 너희에게 화가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가 하늘의 나라 문을 닫아 사람들 앞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너희는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도 들어가게 두지 않는다.」마태복음 23:13 · 본디새김

본문에는 일곱 차례의 「화가 있다」는 선언이 나옵니다. 그 내용은 하늘의 나라를 가로막는 일, 개종자를 잘못 이끄는 일, 맹세의 기준을 왜곡하는 일, 율법의 중요한 요구를 버리는 일, 겉과 속이 다른 삶, 그리고 예언자들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거절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이 불의한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때 사용하던 언어와 닮았습니다. 이사야 5장에서도 반복되는 「화가 있다」는 선언이 등장하며, 특히 5:20에서는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민족이나 모든 바리새파 사람이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이시며,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도 이스라엘의 성경입니다. 이 장의 논쟁은 유대교 밖에서 유대교 전체를 공격하는 장면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유대교 내부의 첨예한 갈등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구절들이 역사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는 문제를 고려하여, 본래의 종교적·사회적 논쟁과 후대의 집단적 비난을 구별해야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첫 번째 선언에는 두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그들 자신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까지 막습니다.

지도자의 잘못은 자기 개인의 신앙생활이 잘못되었다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야 하지만, 그 말씀이 잘못 사용되면 오히려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늘의 나라를 가르친다는 사람이 정작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막는 것입니다.

앞에서 그들은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들어가려는 문까지 가로막습니다. 그들은 길을 안내해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실제로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열심히 사람을 찾아다녔는데 왜 책망받았을까?

두 번째 화 선언은 더욱 뜻밖입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가 개종자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뭍을 두루 다니고, 그가 개종자가 되고 나면 그를 너희보다 갑절이나 더한 게헨나의 아들로 만들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3:1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심 자체보다 그 열심이 만들어 내는 결과를 문제 삼으십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얻기 위해 바다와 뭍을 두루 다니지만, 그 사람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전보다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 집단의 일원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사람을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지게 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게헨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인 혈통 관계를 뜻하지 않고, 게헨나의 심판에 속하게 된 사람이라는 강한 경고의 표현입니다. 「갑절이나 더한」 역시 심판의 양을 수치로 계산하라는 말이 아니라, 지도자의 잘못이 제자에게 전해져 더 심각한 결과를 낳는 상황을 강조합니다.

종교적 열심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는가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눈먼 길잡이」라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길잡이가 눈이 멀었다면 따라오는 사람도 위험에 빠집니다. 종교 지도자는 단순히 자기 혼자 길을 잘못 가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23:14가 없는 것은 절 번호의 오류가 아닙니다. 일부 후대 사본에는 과부의 집을 삼키면서 겉으로는 길게 기도한다는 책망이 들어 있지만, 중요한 초기 사본들에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12:40과 누가복음 20:47에 있는 병행 표현이 마태복음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아 현대 비평본문에서는 대체로 제외합니다. 15절을 역사적으로 읽을 때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1세기의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방인을 개종시키기 위해 조직적인 선교 활동을 벌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바다와 뭍을 두루 다닌다」는 표현은 극도의 노력을 나타내는 과장법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종이 이방인의 유대교 입문을 가리키는지, 특정한 유대교적 해석과 생활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까지 포함하는지도 논의되며, 이 한 구절을 근거로 당시 바리새파 전체의 조직적인 개종 활동을 확정하기 어렵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성소의 금이 성소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람들

마태복음 23:16–22 본문 →

세 번째 화 선언에서는 구체적인 율법 해석 문제가 등장합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눈먼 길잡이들아. 너희는 『누구든지 성소를 두고 맹세하면 그 맹세는 아무 효력이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성소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그 맹세에 매인다』 하고 말한다.」마태복음 23:16 · 본디새김

그들은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효력이 없지만, 제단 위의 예물을 두고 맹세하면 그 맹세에 매인다고도 말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매우 낯선 논쟁입니다. 왜 성소 자체를 두고 한 맹세보다 성소의 금을 두고 한 맹세가 더 강한 효력을 가진다고 생각했을까요?

고대 유대교에서는 맹세와 서원의 효력, 어떤 표현이 법적인 의무를 발생시키는지에 관한 세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성소나 제단 같은 거룩한 대상을 언급하는 맹세도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문제 삼으실까요?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크냐?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한 성소냐?」마태복음 23:17 · 본디새김

성소의 금이 중요한 이유는 그 금이 성소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가 금에 의해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소가 금을 거룩하게 합니다.

제단과 예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크냐?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복음 23:19 · 본디새김

예물이 거룩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제단 위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 관계를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거룩함의 근원을 잊어버리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성소를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성소와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복음 23:21 · 본디새김

이제 성소 자체보다 더 중요한 분이 등장합니다. 성소 안에 사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왕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복음 23:22 · 본디새김

여기에는 단계적인 전개가 있습니다.

금에서 성소로.

예물에서 제단으로.

성소에서 그 안에 사시는 분으로.

하늘에서 하나님의 왕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으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물건에만 주의를 기울이던 사람들의 시선을, 그 거룩함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리십니다.

그들은 어떤 표현으로 맹세하면 의무가 생기고, 어떤 표현으로 맹세하면 의무가 생기지 않는지 구별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구별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성소가 중요한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하늘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왕좌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잊고 물건들 사이의 우열이나 맹세의 법적 효력만 따진다면, 거룩한 것들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거룩함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5:33–37과도 연결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고, 그렇다고 할 때에는 그렇다고 하고 아니라고 할 때에는 아니라고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거기서는 진실성을 특정한 맹세의 형식에 의존시키지 말라고 하셨고, 23장에서는 맹세의 표현을 세밀하게 구별하여 의무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책망하십니다. 두 말씀은 서로 다른 상황을 다루지만, 사람의 말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한다는 방향에서는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계속 「눈먼」 사람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세부 사항을 구별할 정도로 정교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차이는 자세히 보면서 정작 그 차이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화 선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를 더욱 선명한 이미지로 드러내십니다.

조금 더 깊이

23:16–22의 세부 규정이 당시 바리새파 전체가 실제로 따르던 공식적인 규칙이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구절은 구체적인 율법 논쟁을 반영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상대방의 해석을 비판하기 위해 그 논리를 강하게 부각하시는 논쟁적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모기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삼킨다는 말의 의미

마태복음 23:23–24 본문 →

「너희에게 화가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가 박하와 딜과 커민은 열에 하나를 바치면서 율법의 더 무거운 것들, 곧 판결과 자비와 믿음은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마태복음 23:23 · 본디새김

박하와 딜과 커민은 음식에 향을 더하는 식물들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등 소출의 일부를 바치라는 규정이 있는데(레위기 27:30; 신명기 14:22–29), 그들은 이런 작은 향신료까지 세밀하게 계산하여 열에 하나를 바쳤습니다. 율법의 의무를 매우 세심하게 지키려는 태도이며, 그들의 행동에는 종교적 열심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의 더 무거운 것들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더 무거운 것들

「판결」은 문맥에 따라 심판이나 판결을 뜻하며, 여기서는 사람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정의롭게 대하는 행동과 관계됩니다. 「자비」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긍휼을 베푸는 태도입니다.

「믿음」으로 옮긴 그리스어 피스티스(πίστις)는 믿음뿐 아니라 신실함과 충실함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정의로운 판결과 자비라는 행동의 덕목과 나란히 놓여 있으므로 「신실함」이나 「충실함」에 무게를 두어 이해하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으며, 두 의미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해석상 논의가 있습니다.

사람을 정의롭게 판단하는 일.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일.

이 말씀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강조하던 가르침과 깊이 연결됩니다. 미가 6:8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정의를 행하고 인애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호세아 6:6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제사보다 자비를,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이미 마태복음 9:13과 12:7에서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23:23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세밀한 규정들 대신 전혀 새로운 도덕 체계를 제시하시는 장면이 아닙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에 이미 담겨 있는 중심을 다시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23절의 마지막 문장, 「이것들은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에서 예수님께서는 열에 하나를 바치는 일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종교적 형식과 도덕적 실천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그 중심을 따라야 하는지를 바로잡으라는 말씀입니다.

더 무거운 것을 버리고 더 가벼운 것만 붙들다

「눈먼 길잡이들아, 모기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아.」마태복음 23:24 · 본디새김

마실 것에 모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걸러 내는 사람이, 정작 낙타 한 마리를 통째로 삼켜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과장된 이미지를 사용하십니다. 모기와 낙타는 모두 레위기 11장의 정결 규정에서 먹지 말아야 할 동물에 속하므로, 모기를 피하는 행동이 정결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라면 낙타를 삼킨다는 것은 훨씬 더 큰 불일치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작은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작은 것을 지나치게 세심하게 다루면서 훨씬 중요한 것을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성소의 금과 제단 위의 예물을 세밀하게 구별하던 사람들이, 이제 박하와 딜과 커민까지 세밀하게 계산합니다. 그들은 작은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이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놓쳤습니다.

사람은 아주 많은 종교적 의무를 정확하게 이행하면서도, 자신이 정의롭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하며 신실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측정하기 쉬운 행동은 자신의 경건함을 확인할 근거가 될 수 있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은 실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태도를 끊임없이 돌아보게 만듭니다.

열에 하나를 정확히 계산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일이나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후자를 율법의 더 무거운 것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얼마나 세밀하게 수행했는지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얼마나 자비롭고 신실하게 살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이런 삶의 중심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리 많은 종교적 규정을 지켜도 길잡이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그런 모순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다음 두 화 선언에서 그 원인을 더 깊은 곳에서 찾으십니다.

잔의 속과 회칠한 무덤 — 겉으로 보이는 경건함의 한계

마태복음 23:25–28 본문 →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속은 강탈과 무절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3:25 · 본디새김

이제 예수님께서는 어떤 규정을 잘못 해석했다거나 중요한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수준을 넘어, 사람의 내면과 실제 행동을 문제 삼으십니다. 잔과 접시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므로, 이 대조를 형식적인 예식과 내면의 진정성이라는 추상적인 대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강탈은 다른 사람의 것을 부당하게 차지하는 행동과 관계되고, 무절제는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겉으로는 깨끗하고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의 욕망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위선자」(ὑποκριτής)로 옮긴 말은 원래 배우나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는 말로,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른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위선은 단순한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가르치면서 행하지 않는 일.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경건한 행동을 하는 일.

작은 규정은 철저히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를 버리는 일.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탈과 무절제가 가득한 삶.

먼저 어디를 깨끗하게 해야 하는가?

「눈먼 바리새파 사람아, 먼저 잔의 속을 깨끗하게 하여 겉도 깨끗해지도록 하여라.」마태복음 23:2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잔의 겉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속을 깨끗하게 하고, 그 결과 겉도 깨끗해지게 하라고 하십니다. 내면이 중요하니 외적인 행동은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속의 실제 상태가 서로 일치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더욱 충격적인 이미지로 이어 가십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가 회칠한 무덤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 무덤들은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복음 23:27 · 본디새김

아름다운 무덤 안에 무엇이 있는가?

고대 이스라엘의 정결 규정에서 시체와 접촉하는 일은 부정하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였고(민수기 19:11–16), 무덤은 죽음과 부정함을 나타내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무덤을 비유로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이 겉모습을 보고 실제로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 눈에 의롭게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복음 23:28 · 본디새김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경건한 행동을 하며,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실제 상태가 그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경건한 행동을 한다는 5절에서는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완전히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사람들의 실제 상태를 아시는 분으로 말씀하시지만,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 어떤 사람의 숨겨진 동기와 내면을 우리가 확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더 깊은 문제를 드러내십니다. 과거의 예언자들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위선의 문제가 역사와 공동체 전체의 책임으로 확대됩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왜 그들의 길은 따르지 않았을까?

마태복음 23:29–36 본문 →

마지막 화 선언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짓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고」마태복음 23:29 · 본디새김

앞에서는 겉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무덤 속에 죽음과 더러움이 가득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실제로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예언자들을 존경합니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그들의 동반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복음 23:30 · 본디새김

이 말은 얼핏 올바르게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말을 문제 삼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의 잘못은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잘못을 비교적 쉽게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은 잘못되었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죄이므로, 자신들은 그때 살았더라면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예언자는 이미 그의 말씀이 옳았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된 뒤에 존경받고, 그를 기리는 무덤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그 사람의 말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켜 온 질서와 권위를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예언자를 존경하는 일과 현재의 예언자에게 순종하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비판하지만, 앞에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21:46). 과거의 예언자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자기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죽은 예언자를 존경하는 것은 살아 있는 예언자의 말을 듣는 것보다 쉬울 수 있습니다. 무덤을 꾸미는 일에는 자신의 삶을 바꿀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예언자의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바꾸어야 할 수 있습니다.

왜 조상들의 죄가 이들에게 돌아오는가?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이들의 아들임을 너희 자신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것이다.」마태복음 23:31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조상의 죄가 자손에게 자동으로 유전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도 에스겔 18장은 자녀가 부모의 죄를 단순히 혈통 때문에 떠맡는다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각 사람은 자기 행동에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예언자들을 죽인 사람들의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들이 조상들의 행동을 실제로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금 보내신 분을 대하는 방식에서 그 조상들과 닮아 있습니다. 여기서 조상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조상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너희 조상들이 채우던 되를 마저 채워라.」마태복음 23:3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마치 죄를 더 지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처럼 들리지만, 문맥상 예수님께서 실제로 악행을 권장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걸어가고 있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드러내는 예언자적이고 반어적인 선언입니다. 「되」는 무언가를 재는 도구로, 여기서는 조상들이 행한 악의 분량을 담는 그릇처럼 사용됩니다. 그들이 조상들의 길을 계속 따라간다면 결국 그 악의 분량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이 장면의 긴장은 예수님께서 곧 어떤 일을 겪게 되실 것인지 독자가 알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고, 종교 지도자들의 적대감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거절하는 분이 누구인지가 분명해질수록, 그 거절의 책임도 더욱 심각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낸다」고 말씀하실까?

「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로운 이들과 서기관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들 가운데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고,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마태복음 23:3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를 보내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예레미야 7:25–26에서 여호와야훼는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날부터 계속해서 자신의 종들인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나 백성이 듣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역대기하 36:15–16에서도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거듭 사자들을 보내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보내는 일을 자신이 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한 구절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수많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만 자신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앞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보내실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도 알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박해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하고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며, 한 도시에서 박해받으면 다른 도시로 피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17–23).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사람들에는 「서기관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비판을 서기관이라는 직분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서기관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가며, 누구의 뜻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실 사람들 역시 거절당하고 박해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거절하는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벨에서 스가랴까지 — 누구의 피인가?

「의로운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기야의 아들 스가랴의 피까지, 땅에 쏟아진 모든 의로운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마태복음 23:35 · 본디새김

아벨은 창세기 4:8에서 자기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으로 묘사됩니다(창세기 4:10).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살인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에 언급되는 스가랴는 누구일까요? 역대기하 24:20–22에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백성의 불순종을 책망하다가, 요아스 왕의 명령으로 여호와야훼의 집 뜰에서 돌에 맞아 죽습니다. 죽으면서 여호와야훼께서 그 일을 보시고 책임을 물으시기를 구합니다.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된 스가랴라는 설명은 이 사건과 매우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역대기의 스가랴는 여호야다의 아들이고, 마태복음은 「바라기야의 아들 스가랴」라고 합니다. 스가랴 1:1의 예언자 스가랴는 바라기야의 아들이지만, 그가 성전에서 살해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 두 인물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고, 많은 해석은 이 인물의 정체가 해결되지 않은 문제임을 인정합니다. 이 역사적 문제를 억지로 해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벨과 스가랴가 함께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중요한 설명이 가능합니다. 전통적인 히브리어 성경 배열에서 창세기는 처음에 놓이며, 역대기는 마지막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아벨과 역대기의 스가랴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의로운 피에서 마지막에 기록된 의로운 피까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 모든 피의 책임이 지금의 세대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앞에서 본 것처럼 과거의 죄가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이전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도 하나님이 지금 보내시는 사람들을 거절하고,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보내질 사람들에 대한 박해까지 예고하십니다.

그들이 조상들의 길을 계속 따른다면, 그들은 단순히 과거의 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죄의 역사에 새롭게 참여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 닥칠 것이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 닥칠 것이다.」마태복음 23:36 · 본디새김

마태복음에서 「이 세대」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동시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임박한 심판의 경고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의 경고는 먼 과거의 이야기나 먼 미래의 추상적인 심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엄중한 심판을 선언하신 직후, 예수님의 말투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거듭 「화가 있다」고 외치지 않으십니다. 도시 전체를 부르십니다.

조금 더 깊이

32절의 「되」는 7:2에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재는 척도로 자신들도 재어질 것이라고 하실 때 쓰인 그리스어와 같은 말입니다. 다만 7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여기서는 반복되는 악행이 심판에 이를 만큼 쌓여 가는 모습이 문제입니다. 34절은 누가복음 11:49의 병행 본문과 비교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낸다고 말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내가」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차이 때문에 마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시는 분,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지혜와 특별한 관계를 지니신 분으로 묘사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35절의 스가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이 두 스가랴를 혼동했을 가능성, 필사 과정에서 이름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견해가 있고, 다른 역사적 인물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 역시 확실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1:51의 병행 본문에는 「바라기야의 아들」이라는 설명이 없다는 사실도 이 논의에서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배열이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언제나 같았던 것은 아니므로, 아벨과 스가랴에 관한 설명 역시 유력한 문학적 해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36절을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특히 서기 70년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하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마태복음 24장에서 성전에 관한 심판 예고가 곧바로 이어진다는 사실도 그런 연결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포함되는 사건의 정확한 범위를 이 한 구절만으로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을 새끼들을 모으려는 암탉에 비유하셨을까?

마태복음 23:37–39 본문 →

이 장의 마지막 말씀은 앞에서 이어진 책망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내진 이들을 돌로 치는 이여. 암탉이 자기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런데 너희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마태복음 23:37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 번 부르십니다. 그 도시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신에게 보내진 사람들을 돌로 치는 도시로 묘사되어, 앞에서 이어진 예언자들의 피에 관한 책망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자신이 그 도시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려 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왜 하필 암탉일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독수리나 사자와 같은 강력한 동물로 비유하지 않으십니다.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는 암탉의 모습으로 말씀하십니다. 위협 앞에 놓인 새끼들은 스스로를 충분히 보호할 수 없어, 어미의 날개 아래로 모여들어 보호받습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날개 아래 보호하신다는 이미지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신명기 32:11에서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들 위를 맴돌고 날개를 펼쳐 그들을 받는 모습으로 여호와야훼의 돌보심을 묘사합니다. 시편 91:4와 36:7에서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피난처를 얻습니다. 특히 이사야 31:5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새들이 날개를 펼쳐 보호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그 보호를 베푸시려는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34절에서 예언자들과 지혜로운 이들과 서기관들을 「내가」 보낸다고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내가」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모으려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고 보호하시는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과 뜻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고 계십니다.

「내가 원했다」와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37절의 마지막 문장에는 두 뜻이 맞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으려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두 문장에 같은 동사, 곧 「원하다」(θέλω)가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을 능력이 없어서 실패하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은 모으려 하셨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뜻과 예루살렘의 거절이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인간의 응답을 둘러싼 논의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한쪽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구원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이 그것을 거절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른 쪽은 이 말씀의 직접적인 대상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와 그 지도자들이며, 예수님께서 그 도시의 자녀들을 모으려 하셨다는 사실과 지도자들의 거절을 구별하여 이해합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을 의인화하여 말씀하고 있으므로, 도시와 그 안의 사람들 및 지도자들의 관계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모든 문제를 판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면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더 직접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버리기 원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모으려 하셨다고 말씀하시며, 그 뜻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어진 무서운 책망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의 심판 선언은 단순히 자신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쏟아 내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을 모으려 하셨으나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엄중함과 예수님의 긍휼은 서로 반대되는 성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모으려 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지도자들을 엄중하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절하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계시기 때문에 심판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집이 텅 빈 채로 남겨진다」

「보아라, 너희 집이 텅 빈 채로 너희에게 남겨진다.」마태복음 23:38 · 본디새김

여기서 「너희 집」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한 가지 유력한 읽기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장면은 성전에서 이어진 논쟁의 마지막에 놓여 있고, 다음 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실 때 그 건물들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24:1–2). 앞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가리켜 「내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셨는데(21:13), 이제는 「너희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집이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텅 빈 채로 남겨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너희 집」을 성전만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그 백성의 공동체적 삶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구절에서 「성전」이라는 명사를 직접 사용하지 않으므로, 그 범위를 지나치게 좁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전으로 읽든 예루살렘의 삶 전체로 읽든 중심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들에게는 성전도 있고, 종교적 제도도 있고,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집이 남아 있지만 텅 비어 있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삶과도 닮았습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속에는 강탈과 무절제가 가득하고,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안에는 죽음과 더러움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집 자체가 남아 있지만 그 집을 참으로 의미 있게 하시는 분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다시 들려오는 시편 118편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다』 할 때까지 너희는 나를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23:39 · 본디새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다」는 시편 118:26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1:9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무리들이 이미 외쳤던 말입니다.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미 그 말씀을 외친 사람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환영한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과 예루살렘 전체가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기도 했지만,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도시로도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39절은 앞으로 예루살렘이 반드시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일까요? 여기서 해석이 갈립니다. 예수님의 장차 나타나심과 그때 이루어질 인정으로 읽는 견해,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엄중한 경고로 읽는 견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장차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에 주목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39절이 미래의 약속인지 경고인지가 달라지지만, 본문은 그 미래의 구체적인 시점과 방식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이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든 예수님의 정체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31:5의 본래 문맥에서는 예루살렘이 외부의 군사적 위협 앞에서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가 문제이며,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은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예루살렘과 새의 날개 아래 보호받는다는 이미지 사이에는 뚜렷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텅 빈 집」은 에스겔 10–11장에서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본래 문맥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불의에 대한 심판이며, 동시에 이후 회복의 약속과 연결됩니다. 마태복음은 에스겔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의미 있는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39절을 장차 나타나심과 연결하는 견해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다」는 고백이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과 연결되고, 경고로 읽는 견해에서는 「할 때까지」라는 표현이 반드시 미래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다는 보증은 아니라고 봅니다.

텅 빈 집과 펼쳐진 날개

마태복음 23:1–39 본문 →

마태복음 23장은 높은 자리에서 시작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존경받는 호칭으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만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서 자신이 중심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자신이 하려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대신 그들을 자신에게 부르시고, 사람들을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삼는 대신 그들을 보호하려 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에는 엄중한 심판이 있지만, 그 엄중함은 사람들을 향한 무관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장의 말씀을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종교 집단이나 과거의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데에만 사용하면,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로 그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위선을 정확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같은 모순이 나타나는 것은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더 이상 모세의 자리도, 회당의 윗자리도, 성소의 금도, 제단 위의 예물도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신에게 보내진 사람들을 돌로 쳤던 도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를 부르시며, 날개를 펼쳐 새끼들을 모으려는 암탉처럼 그 자녀들을 모으려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날개 아래 모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성소와 제단에 관한 규정을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자기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분의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이 텅 빈 채로 너희에게 남겨진다」고 선언하십니다.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텅 비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눈물을 흘���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9:41에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장면이 있지만, 여기서 마태가 남긴 것은 두 번 불린 도시의 이름과, 모으려 하셨던 예수님의 뜻과, 그 뜻을 거절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뒤에는 그들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암탉이 자기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했던가. 그런데 너희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개 아래 모이지 않은 도시 앞에, 텅 빈 집이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