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21–25장 · 예루살렘에서
그날을 기다리는 삶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한 건물들을 예수님께 보여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건물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헐릴 것이다.」 성전은 단순히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배의 중심이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약속과 관계된 장소였습니다.
그런 성전이 무너진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제자들은 「언제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어떤 징조가 나타나면 그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은 뜻밖입니다. 「아무도 너희를 홀리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날짜를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전쟁과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이지만 아직 끝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속일 것이며, 제자들이 박해받고 서로 미워하는 일도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에서 「그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날짜를 알려 주시지 않을 것이라면, 왜 그토록 길게 미래의 사건들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마태복음 24장의 마지막을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두 노예를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은 주인이 없는 동안에도 집안 사람들에게 때맞추어 먹을거리를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은 주인이 늦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료 노예들을 때리기 시작합니다.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주인이 언제 돌아오는가가 아닙니다.
주인이 없는 동안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그렇다고 이 장을 단순히 언제나 착하게 살라는 교훈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며, 박해와 전쟁과 황폐함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일도 선언하십니다.
이 장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일과 시대의 끝맺음이 함께 등장합니다. 모든 구절을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에 적용하는 읽기도 있고, 대부분을 미래의 마지막 환난에 관한 예언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으며, 예루살렘의 역사적 심판과 미래의 완성을 연결해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직접 말하는 사실과 해석자가 사건의 시점을 연결하는 판단을 구별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미래의 사건들에 관한 모든 수수께끼를 풀지는 못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분명히 알려 주려 하셨는지는 볼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나와 올리브 산에 앉으신 예수님
마태는 이야기를 아주 짧은 동작으로 시작합니다.
예수가 성전에서 나와 가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그에게 보여 주려고 다가왔다.마태복음 24: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시며 「너희 집이 텅 빈 채로 너희에게 남겨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38). 이제 실제로 성전에서 나오십니다. 마태가 이 동작을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에스겔 10–11장과 직접 연결한다고 밝히지는 않지만, 심판 선언 직후 성전을 떠나시는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제자들은 성전의 웅장한 모습에 시선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건물들이 영원히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을 보지 않느냐?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헐릴 것이다.」마태복음 24:2 · 본디새김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 대왕이 대규모로 확장하고 재건한 성전이었습니다. 공사는 오랫동안 이어졌으며, 성전은 예루살렘의 종교적·건축적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확인됩니다. 다만 서쪽 옹벽과 같은 성전 구역의 일부 구조물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라는 말씀은 성전 구역의 모든 석재가 문자 그대로 사라졌다는 뜻보다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성전 건물들의 철저한 파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러나 처음 들었던 제자들에게 이 사건은 아직 미래입니다. 그들은 올리브 산에 앉으신 예수님께 따로 찾아와 묻습니다.
그가 올리브 산에 앉아 있을 때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언제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당신께서 오시는 일과 시대의 끝맺음을 알리는 표징은 무엇입니까?」마태복음 24: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파괴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거기에 두 가지를 더해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일, 그리고 시대의 끝맺음입니다. 제자들이 이 세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마태는 그들의 생각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성전 파괴의 시점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일, 시대의 끝맺음에 관한 표징을 함께 물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에서는 이 사건들을 구별해서 읽어야 하는지, 서로 연결해서 읽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 24장 전체의 흐름이 보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미래의 재난에 현혹되지 않도록 가르치시고, 이어서 유대 지방에서 실제로 피해야 할 위기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다음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일을 우주적인 이미지로 묘사하시고, 마지막에는 시점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시며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미래를 정확히 계산하는 능력보다, 그 미래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오시는 일」로 번역된 그리스어 파루시아는 본래 도착, 임재, 방문 등을 나타내는 말로, 당시에는 통치자나 중요한 인물의 방문을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일을 가리키는 중요한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시대의 끝맺음」 역시 단순히 어떤 건물이 파괴되는 일을 뜻하는 말이 아니며, 마태복음 13:39–40, 49에서는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 세상의 현재 질서를 마무리하시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쟁과 지진은 끝이 왔다는 증거일까?
예수님께서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거짓 그리스도들을 경고하십니다.
「많은 이가 내 이름을 내세워 와서 『나는 그리스도다』 하며 많은 이를 홀릴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4:5 · 본디새김
왜 재난보다 사람들을 홀리는 문제가 먼저 등장할까요?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이때 그 재난의 의미를 설명해 주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생길 수 있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속지 않도록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전쟁과 전쟁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다. 놀라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런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마태복음 24:6 · 본디새김
전쟁과 전쟁 소문만으로 끝이 왔다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시는 기근과 지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 모든 일은 해산 진통의 시작이다.」마태복음 24:8 · 본디새김
왜 해산 진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해산 진통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고통 그 자체만을 나타내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사건을 향해 진행되는 고통입니다.
구약에서도 해산의 고통은 심판의 고통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 고통을 넘어 새로운 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4:8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시작」이라는 말을 강조하십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은 모든 일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시작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재난이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종말의 시점을 계산하는 길은 막으십니다.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든 자신들이 겪는 전쟁과 재해가 역사상 가장 특별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건들을 두고 「아직 끝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재난을 가볍게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재난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이용해 두려움을 조장하거나, 자신이 마지막 때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장에서 처음 등장한 위험은 전쟁 자체가 아닙니다. 전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속이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3:8에서는 바벨론에 닥칠 심판의 두려움을 해산하는 여자의 고통에 비유하고, 예레미야 4:31에서는 멸망의 위기에 놓인 시온의 고통을 해산하는 여자의 부르짖음에 견줍니다. 이사야 26:17–19에서는 고통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죽은 이들이 살아나는 소망이 가까운 문맥에 놓입니다.
가장 무서운 재난은 사랑이 식어 버리는 일일까?
예수님의 말씀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재난에서 제자들이 직접 겪을 고난으로 옮겨갑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 속으로 넘기고 너희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24:9 · 본디새김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실이 그들을 미움받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밖에서 오는 박해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때에 많은 이가 걸려 넘어질 것이다. 서로를 넘기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마태복음 24:10 · 본디새김
박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외부의 적대에 맞서 서로를 지켜 줄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의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외부의 위협이 공동체 내부의 배신과 증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제자들이 환난 속으로 넘겨지고, 10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넘깁니다. 두 자리에 같은 동사가 쓰였습니다. 박해의 고통이 공동체 내부로 스며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사랑이 식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불법이 넘치기 때문에 많은 이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마태복음 24:12 · 본디새김
사랑이 식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식다」는 차가워지거나 식어 간다는 뜻입니다. 뜨거웠던 것이 식어 갑니다. 살아 있던 관계가 차가워집니다.
「불법」은 단순히 사회의 법률을 어기는 모든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만 축소하기는 어렵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7:23에서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고, 23:28에서는 겉으로 의롭게 보이면서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며, 율법 전체가 사랑에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불법이 넘치면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율법의 중심을 이루는 사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상이 거칠어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박해와 거짓 가르침과 배신과 미움이 퍼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려고 다른 사람을 포기하거나,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결국 사랑을 잃어버리는 위험을 보여 줍니다. 전쟁과 지진만으로 끝이 왔다고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사랑이 식는 일에 대해서는 직접 경고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무엇을 견디는가?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 그가 구원받을 것이다.」마태복음 24:13 · 본디새김
「견디다」는 단순히 시간이 오래 흐르기를 참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으면서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넘길 때 휩쓸리지 않고, 거짓 예언자들이 홀릴 때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며, 사랑이 식어 갈 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구원받을 것이다」를 모든 제자가 박해 속에서 신체적으로 살아남는다는 보장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9절에서 죽임당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절의 구원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약속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미래의 보상만 바라보며 현재의 고통을 무조건 참으라는 명령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뒤 실제로 위험이 닥쳤을 때 산으로 달아나라고 명령하십니다. 견딘다는 것은 모든 위험한 상황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고난의 이야기 한가운데에 전망을 놓으십니다.
「그리고 나라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가 되도록 사람 사는 온 땅에 선포될 것이다. 그때에 끝이 올 것이다.」마태복음 24:14 · 본디새김
박해받는 공동체가 복음을 전한다
9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14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가 되도록 선포됩니다. 모든 민족에게 미움받는 사람들이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의 증언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박해가 복음의 선포를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실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28:19). 24장에서는 그 일이 환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고됩니다. 다만 본문은 선교 활동의 성취율을 계산하는 공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혼란과 박해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속지 않고, 견디며, 복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산으로 달아나야 할 만큼 심각한 위기로 말씀을 옮기십니다.
조금 더 깊이
9절과 10절의 「넘기다」는 그리스어 파라디도미로, 넘겨주다, 인도하다, 배신하여 넘기다라는 뜻을 가질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람 사는 온 땅」은 그리스어 오이쿠메네로,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를 가리키며 문맥에 따라 당시 알려진 세계나 로마 제국의 영역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을 현대적인 의미의 지구 전체와 모든 언어 집단이 몇 퍼센트 복음을 들었는가라는 통계로 곧바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선포 범위를 당시의 세계로 이해할 것인지, 모든 민족을 향해 계속 확장되는 보편적 증언으로 이해할 것인지는 종말의 시점에 관한 해석과 연결됩니다.
「읽는 이는 깨달아라」 — 다니엘의 경고와 예루살렘의 위기
「그러므로 예언자 다니엘을 통해 전해진 그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깨달아라 —」마태복음 24:1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데, 문장 한가운데 읽는 사람을 향한 말이 들어옵니다. 다니엘서를 읽는 사람이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마태복음을 읽는 독자를 향한 서술상의 주의 표시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마가복음 13:14에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어느 쪽이든 지금 말하는 내용을 가볍게 지나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은 무엇인가?
이 표현은 다니엘 9:27, 11:31, 12:11과 연결됩니다. 기원전 2세기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대인의 종교적 삶을 심각하게 억압했고, 기원전 167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이교적 제의로 더럽혀졌습니다. 다니엘 11:31은 성소를 더럽히고 정기적인 제사를 없애며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우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일반적 상징이 아니라 실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진 종교적·정치적 위기와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그 사건의 표현을 앞으로 닥칠 위기를 설명하는 데 적용하십니다. 따라서 다니엘서의 본래 역사적 배경과 예수님께서 예고하시는 사건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지에서 해석이 갈립니다. 서기 66–70년 유대 전쟁과 성전의 파괴로 보는 읽기, 그와 구별되는 마지막 시대의 성전 훼손이나 종말론적 반역으로 보는 읽기, 두 사건이 서로 대응하는 사건으로 함께 묘사된다는 읽기입니다. 역사적 예루살렘 파괴와 이 구절의 관계가 강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성취를 단 하나의 대상으로 확정할 수 있는지는 논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말씀하신 직후, 날짜를 계산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도망가라고 하십니다.
왜 집 안의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때에 유대 지방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마태복음 24:16 · 본디새김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 안의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밭에 있는 사람도 겉옷을 가지러 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집 안의 재산을 챙기는 시간조차 위험할 만큼 상황이 절박합니다. 이 구절을 세상 재산에 집착하지 말라는 일반적인 영적 교훈으로만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문맥은 급박한 위험에서 피신하는 일입니다.
「그날들에는 아이를 밴 이들과 젖 먹이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마태복음 24:19 · 본디새김
그들은 급히 피신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은 단순히 거대한 사건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 사건 때문에 고통받을 실제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겨울과 안식일을 피하라는 이유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에도 안식일에도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마태복음 24:20 · 본디새김
겨울에는 날씨와 이동 조건이 피난을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이동과 활동에 관한 여러 규정과 관습이 있었으므로, 그날 대규모로 피신하는 것은 종교적 갈등이나 실제 이동상의 어려움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난의 어려움까지 염두에 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난의 날들이 단축된다는 뜻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전례 없이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이전에 없었던 환난의 때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는 일을 말하는 다니엘 12:1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세상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라는 말은 역사상 사망자 수를 비교하는 통계가 아니라 위기의 극심함을 드러내는 예언자적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날들이 단축되지 않았다면 아무 육체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뽑힌 이들 때문에 그날들이 단축될 것이다.」마태복음 24:22 · 본디새김
「그날들이 단축될 것이다」는 행위자를 밝히지 않는 수동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환난을 제한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마태의 문장은 그분을 직접 주어로 적지는 않습니다. 이 표현이 강조하는 것은 환난이 아무 제한 없이 계속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난의 심각함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환난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처럼 묘사하지도 않으십니다. 그 한계는 「뽑힌 이들 때문에」 정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의 해석은 셋으로 갈립니다. 첫째, 유대 전쟁과 성전 파괴를 가리킨다는 견해는 누가복음 21:20의 병행 본문이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포위되는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이 왔음을 알라고 말한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둘째, 다니엘의 예언이 과거 역사 속에서 한 차례 나타났고 마지막 때에 더 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셋째, 서기 70년의 사건과 미래의 위기가 대응하는 사건으로 함께 묘사된다고 보는 읽기가 있습니다. 한편 마태가 마가복음 13:18과 달리 「안식일」을 포함한다는 점은 마태복음의 독자들이 여전히 유대교의 안식일 관습과 긴밀하게 연결된 환경에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요소로 읽히지만, 정확한 이유에 관해서는 당시 이동 제한과 사회적 마찰 등 여러 설명이 제시됩니다. 21절의 환난도 예루살렘 멸망을 강조하는 읽기와 마지막 시대의 환난을 강조하는 읽기가 다르게 이해합니다.
왜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는 말을 믿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여기 그리스도가 있다』 하거나 『여기 있다』 하거든 믿지 마라.」마태복음 24:23 · 본디새김
앞의 경고가 더욱 구체적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광야에 있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골방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실제로 오신다면 어디 계신지 알려 주는 사람들의 말을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 이유를 27절에서 밝히십니다.
「번개가 동쪽에서 나와 서쪽까지 비치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이 오는 일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4:27 · 본디새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일은 비밀스럽게 숨겨진 사건인가?
번개는 누군가가 위치를 알려 주어야만 알아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빛이 나타나면 먼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누군가의 안내를 따라 은밀한 장소로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광야는 넓고 사람이 드문 장소이고, 골방은 바깥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은밀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두 소문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특정한 장소에 계시며, 특별한 정보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주장을 거절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될 수만 있으면 뽑힌 이들까지 홀릴 만큼 큰 표징과 놀라운 일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4:24 · 본디새김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7:22–23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기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내쫓고 많은 놀라운 일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기적이나 특별한 체험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문제는 놀라운 일을 보여 주는 사람이 누구를 따르도록 요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마태복음 24:25 · 본디새김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비밀을 알려 주는 사람을 끊임없이 찾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주검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독수리들이 모여들 것이다.」마태복음 24:28 · 본디새김
이 수수께끼 같은 문장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일이 숨길 수 없는 사건이라는 뜻으로, 심판의 필연성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혹은 로마군의 독수리 군기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읽혀 왔습니다. 이 구절의 정확한 지시 대상을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번개와 주검 주위에 모이는 새들의 이미지는 모두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안내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사건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들만 아는 비밀 정보로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주장을 경계하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독수리」로 번역된 그리스어 아에토스는 일반적으로 독수리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주검 주위에 모이는 새들이라는 문맥 때문에 대머리수리 같은 사체를 먹는 맹금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첫째 읽기는 주검이 있는 곳에 새들이 모이는 일이 자연스럽고 눈에 띄듯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일도 숨길 수 없다고 보며, 바로 앞의 번개 비유와 연결합니다. 둘째 읽기는 심판의 대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심판이 닥친다는 뜻으로 봅니다. 셋째 읽기는 로마군이 독수리 형상의 군기를 사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만, 본문이 로마군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해석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리고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
「그날들의 환난 뒤에 곧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자기 빛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능력들이 흔들릴 것이다.」마태복음 24:2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이제 지상의 전쟁과 기근과 박해를 넘어, 하늘 전체가 흔들리는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실제 천문학적 재난의 예고일까요? 아니면 거대한 역사적 심판을 표현하는 상징적 언어일까요?
구약에서 하늘이 어두워질 때
이사야 13:10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이사야 34:4는 민족들 특히 에돔의 멸망을, 에스겔 32:7–8은 이집트의 파라오에 대한 심판을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역사 속의 국가와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할 때 하늘의 질서가 무너지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한 나라에 닥치는 심판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세상 전체가 무너지는 것 같은 사건이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29를 모두 현대 천문학적인 의미로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것이 반드시 상징일 뿐이고 실제 우주적인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구약의 묵시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석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을 결정적인 심판으로 묘사한 것이라는 읽기, 사람의 아들의 오심에 동반되는 실제적인 우주적 격변이라는 읽기, 역사적 심판의 언어가 최종적인 종말을 설명하는 데 쓰였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질서까지 흔들리는 이미지로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인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는 「그날들의 환난 뒤에 곧」이라는 시점 표현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환난과 이어지는 우주적 사건 사이에 매우 긴 시간이 흐른다고 직접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한 구절의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다른 구절의 긴장이 남을 수 있고, 본문이 설명하지 않은 긴 시간표를 그 안에 삽입하거나 모든 표현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무리하게 환원하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어디로 오시는가?
「그리고 그때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하늘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이 가슴을 칠 것이고,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24:30 · 본디새김
배경은 다니엘 7:13–14입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옛적부터 계신 분 앞으로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습니다. 본래 장면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왕권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에게 주어지는 나라는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폭력적인 제국들의 권력과 다른 영원한 통치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과 연결하십니다. 한 가지 읽기는 이 오심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이후 하나님께 높임받아 왕권을 행사하시는 일로 보고, 서기 70년 성전의 파괴를 그 권위가 역사 속에서 드러난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읽기는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두 읽기는 모두 다니엘 7장의 왕권 이미지에 주목하지만, 그것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관해 다른 판단을 내립니다.
확실한 중심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영광과 권세를 받으시는 사람의 아들로 나타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거절하고 제자들을 박해하더라도, 그 거절이 예수님의 마지막 지위를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의 판단에 근거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표징은 무엇인가?
표징이 하늘에 나타나는 특정한 현상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사람의 아들이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는 일 자체가 표징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모양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십자가 모양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가슴을 칠 것」에는 스가랴 12:10–14의 배경이 있습니다. 스가랴에서는 예루살렘과 다윗의 집에 속한 가족들이 깊이 애통하며,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애통해하는 일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모든 족속의 애통함이 곧 회개와 구원으로 이어진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누구신지가 더 이상 단순히 논쟁의 대상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납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시는 사람의 아들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낼 것이다. 그들이 사방에서, 곧 하늘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의 뽑힌 이들을 모을 것이다.」마태복음 24:31 · 본디새김
신명기 30:4, 이사야 11:12, 27:13은 흩어지고 포로가 된 이스라엘을 여호와야훼께서 다시 모으시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마태는 그런 모임의 이미지를 사람의 아들의 행동과 연결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을 모으시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내어 뽑힌 이들을 모으십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 모으려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장면의 시점과 모습은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모으시는 분이라는 공통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24장의 이 장면에는 거절당한 초대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민족에게 미움받고, 서로를 넘기는 상황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자신의 사람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니엘 7장의 인자 같은 인물이 본래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집단적 인물이라는 해석도 있고, 특정한 천상적 존재나 메시아적 인물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29절의 「곧」과 관련해, 15–22절을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 29–31절을 오랜 세월 뒤의 최후의 재림으로 구별하는 읽기는 이 「곧」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답해야 합니다. 반대로 모든 사건이 서기 70년에 이루어졌다는 읽기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일과 뽑힌 이들의 모임을 그 역사적 사건과 어떻게 연결하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30절의 「땅의 모든 족속」이 이스라엘 땅의 모든 지파를 가리키는지 온 세상의 모든 민족을 가리키는지는 그리스어 표현과 문맥에 따라 논의가 있으며, 그에 따라 애통함도 예수님을 거절했던 이들의 애통으로, 혹은 하나님의 심판을 마주한 모든 민족의 반응으로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이 세대가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 가장 어려운 시간의 문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이 비유를 배워라. 그 가지가 이미 연해지고 잎을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너희가 안다.」마태복음 24:32 · 본디새김
「너희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일을 보거든 가까이 있음을, 곧 문 앞에 있음을 알아라.」마태복음 24:33 · 본디새김
「이 모든 일」은 어디까지 포함할까요? 그리고 무엇이 가까이 있다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 이름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뜻으로도, 말씀하신 사건의 성취가 가까워졌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그리스어 표현 자체가 어느 한쪽을 명시적으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바로 다음 절에 있습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 이 세대가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24:3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세대 안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는 서기 70년 성전의 파괴와 함께 예수님께서 오시는 일, 시대의 끝맺음, 우주적인 격변이 등장합니다.
「이 세대」의 읽기는 셋으로 갈립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대라는 읽기, 마지막 사건들을 목격하는 세대라는 읽기, 예수님을 거절하는 불신앙의 성격을 지닌 사람들의 부류라는 읽기입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느냐에 따라 24장의 어느 사건이 이미 일어났고 어느 사건이 아직 남았는지가 달라집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대를 가리킨다는 읽기에는 마태복음의 언어 사용이라는 강한 근거가 있지만, 29–31절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따라 가리키는 범위가 달라집니다. 다른 두 읽기는 다른 본문과의 조화를 설명하려 하지만, 「이 세대」라는 표현 자체에 더 많은 해석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특정한 해석을 유일하게 가능한 정답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편이 정직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일들이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은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24:35 · 본디새김
하늘과 땅보다 오래 남는 예수님의 말씀
마태복음 5:18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지나가기까지 율법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의 말이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는 이사야 40:8의 영속성을 자신의 말씀에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성전 건물들은 무너질 것입니다.
하늘과 땅도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 한 분만 안다.」마태복음 24:36 · 본디새김
자신의 말이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분이, 그날과 그 시각은 자신도 모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도 모르신다는 말씀
이 구절을 읽을 때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의 강도를 줄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알리지 않는다」가 아니라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관한 후대의 기독론적 논의에서 중요한 본문이 되었지만, 마태가 이 구절에서 두 본성에 관한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강조하시는 것은 시점에 관한 지식이 아버지 한 분께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24장 앞부분에서 어떤 사건의 순서를 해석했다고 해서 최종적인 날과 시각까지 계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충돌합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표징들을 이해하는 것과 아버지만 아시는 시점을 알아내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우주적인 사건들을 묘사하지 않으십니다. 노아의 시대와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맷돌질을 하는 여자들의 일상으로 돌아오십니다.
미래의 가장 큰 사건을 말씀하신 뒤, 가장 평범한 하루를 보여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의 근거는 마태복음에서 「이 세대」가 11:16, 12:41–42, 23:36에서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이 읽기를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예수님께서 오시는 일을 예수님의 왕권과 심판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해 본문의 시간적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견해와, 「이 모든 일」을 예루살렘 멸망에 이르는 사건들로 제한하고 영광스러운 최후의 오심은 구별하는 견해가 갈립니다. 둘째 읽기는 마지막 사건들이 시작되면 한 세대 안에 완성된다는 뜻으로 보며 예수님의 오심을 미래의 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 세대」는 보통 지금 말하는 사람들의 동시대인을 가리키므로 추가 근거가 필요합니다. 셋째 읽기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신 일(12:39, 16:4)과 출애굽과 불신앙의 주제를 배경으로 「이 세대」를 질적인 범주로 이해하지만, 기본적인 시간적 의미를 약화하고 사건들이 실제로 언제 일어날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36절은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 「아들도」가 없지만 중요한 초기 사본들은 이 표현을 포함하며, 마가복음 13:32에도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지를 언급하는 표현이 신학적으로 어렵게 느껴져 삭제되었을 가능성과 마가복음에서 옮겨 들어왔을 가능성이 논의되어 왔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예수님의 참된 인성과 성육신 안에서 받아들이신 인간적 조건을 고려하여 이 말씀을 이해하려 했고, 다른 해석들은 이 표현이 지식 자체의 한계인지 알려 주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뜻인지 논의해 왔습니다.
노아의 시대 사람들은 무엇을 잘못했을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오시는 일을 노아의 시대에 견주십니다.
「노아 때와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일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4:37 · 본디새김
「그도 그럴 것이, 홍수 이전의 그날들에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간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보내고 있었고,」 「홍수가 와서 모두 쓸어 갈 때까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이 오는 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복음 24:38–39 · 본디새김
먹고 마시고 혼인하고 자녀를 혼인시키는 일 가운데 그 자체로 잘못된 행동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들을 언급하십니다.
홍수가 오기 전까지 그들은 평범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 땅에는 폭력이 가득했고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계획은 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폭력이나 악행을 열거하지 않으시고, 자신들에게 닥칠 일을 알지 못한 채 평소처럼 살아갔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들은 먹었습니다. 마셨습니다. 혼인했습니다.
그러다가 홍수가 왔습니다.
핵심은 일상의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결정적인 변화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닥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이 가까우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날이 닥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은 이끌려 가고 한 사람은 남겨진다
「그때에 둘이 밭에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이끌려 가고 한 사람은 남겨진다.」마태복음 24:40 · 본디새김
「여자 둘이 맷돌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이끌려 가고 한 사람은 남겨진다.」마태복음 24:41 · 본디새김
두 사람은 같은 밭에서 일하고, 두 여자는 같은 맷돌질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상황은 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이끌려 가고, 다른 사람은 남겨집니다.
이끌려 가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일까요, 심판받는 사람일까요? 한쪽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데려가신다는 의미로 읽고, 다른 쪽은 노아의 홍수에서 물에 쓸려 간 사람들이 심판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들어 이끌려 가는 것이 심판을, 남겨지는 것이 보호를 가리킬 수 있다고 봅니다. 두 해석 사이에는 논쟁이 있으며, 본문의 직접적인 목적은 구원받는 사람과 심판받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구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만으로 특정한 휴거의 시점이나 방식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누가 이끌고 가는지, 어디로 데려가는지, 남겨진 사람들이 무엇을 겪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최종적인 판단도 같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예배가 아니라 밭에서 일하고 맷돌질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가장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결정적인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39절에서 홍수가 사람들을 「쓸어 가다」라고 할 때의 그리스어 동사는 아이로이고, 40–41절의 「이끌려 가다」는 파랄람바노입니다. 두 단어가 다르므로 홍수가 사람들을 쓸어 갔다는 사실만으로 이끌려 가는 사람이 반드시 심판받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고, 반대로 언제나 구원받는 사람을 데려가는 일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동사의 마태복음 안에서의 사용과 노아 이야기의 구조를 근거로 이끌려 가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이라는 읽기를 옹호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집주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 주님이 어느 날에 오시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4:42 · 본디새김
그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홍수가 닥칠 때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런데 이것을 알아 두어라. 집주인이 도둑이 밤 어느 경에 오는지 알았다면 깨어 있었을 것이고 자기 집이 뚫리게 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마태복음 24:43 · 본디새김
집주인이 도둑이 올 시간을 정확히 안다면 그때만 대비하면 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알지 못한다면 특정한 한순간만 대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채비를 갖추고 있어라. 너희가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4:4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자신을 도둑에 견주신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비교의 초점은 뜻밖의 시각에 찾아오신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시점을 알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시점을 모르더라도 채비를 갖추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일까?
「깨어 있어라」를 단순히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라는 명령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 장면에서 주인이 없는 동안 집안 사람들에게 때맞추어 먹을거리를 주는 노예를 깨어 있는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여 주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종말의 표징들을 계산하면서 긴장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더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이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는지로 관심을 돌리십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이 복이 있을까?
「그렇다면 주인이 자기 집안 노예들에게 때맞추어 먹을거리를 주도록 그들의 책임자로 세운 믿음직하고 지혜로운 노예는 누구냐?」마태복음 24:45 · 본디새김
그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한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노예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가 책임자로 세워진 이유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돌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직하고 지혜로운 노예는 무엇을 하는가?
믿음직하다는 것은 맡겨진 책임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그 책임을 언제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는 먹을거리를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주는 것이 아니라 「때맞추어」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파악하고 적절한 때에 돌보는 능력입니다.
「자기 주인이 와서 볼 때 그렇게 하고 있는 그 노예는 복이 있다.」마태복음 24:46 · 본디새김
그는 주인이 돌아오기 직전에 급히 일을 시작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이 없는 동안 「그렇게 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이 자기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그를 세울 것이다.」마태복음 24:47 · 본디새김
보상은 안락한 생활이나 명예로운 자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더 큰 책임을 맡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래의 영광과 현재의 충실한 돌봄을 연결하십니다.
「내 주인이 더디 온다」
「그런데 그 악한 노예가 자기 마음속으로 『내 주인이 더디 온다』 하고,」마태복음 24:48 · 본디새김
문제는 주인의 귀환이 늦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지연을 노예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입니다. 그는 주인이 당장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을 바꿉니다.
「자기 동료 노예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술 취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마태복음 24:49 · 본디새김
그는 단순히 게으르게 지내거나 맡은 일을 잊어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도록 주어진 권위를, 다른 사람을 학대하는 데 사용합니다.
이 장의 끝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악은 종말의 날짜를 잘못 계산한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학대하는 일입니다.
주인이 늦게 온다는 생각이 왜 폭력을 낳았을까?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권한이 어디까지나 주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다른 노예들 역시 주인의 집에 속한 사람들인데, 주인이 보이지 않는 동안 그는 마치 자신이 그들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맡겨진 권한을 자신의 권력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바로 앞 장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악한 노예는 다른 노예들을 먹이고 돌볼 책임이 있으면서 그들을 때립니다. 두 장면은 다른 사람을 돌보도록 맡겨진 권한이 그들을 지배하고 해치는 권력으로 바뀌는 문제를 함께 드러냅니다.
악한 노예는 주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늦게 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 때문에 지금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판단이 당장 자신에게 닥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주인은 정말로 늦게 오는가?
예수님께서는 주인의 도착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악한 생각으로 취급하지는 않으십니다. 실제로 비유에서는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흐릅니다. 문제는 노예가 그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시간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돌아옵니다.
「그 노예의 주인이 노예가 예상하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올 것이다.」마태복음 24:50 · 본디새김
36절과 42–44절의 시간에 관한 무지가 이번에는 구체적인 행동의 문제로 나타납니다. 믿음직한 노예는 주인이 돌아오는 시각을 몰라도 자신의 일을 계속합니다. 악한 노예는 그 시각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을 학대합니다.
두 사람 모두 시각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한 반응은 완전히 다릅니다.
미래에 관한 정보가 달랐기 때문에 두 사람의 운명이 갈린 것이 아닙니다. 같은 불확실성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를 둘로 잘라」라는 엄중한 표현
「그리고 그를 둘로 잘라 위선자들과 같은 몫을 받게 할 것이다. 거기에 울부짖음과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24:51 · 본디새김
둘로 잘린 사람에게 다시 어떤 몫이 주어진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을 때 어색합니다. 그래서 매우 엄격한 형벌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끔찍한 형벌의 이미지를 사용해 심판의 엄중함을 드러낸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원문의 강렬함을 단순히 「꾸짖을 것이다」 정도로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유는 맡겨진 사람들을 학대하는 행동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왜 하필 위선자들일까요? 마태복음에서 위선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실제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한 노예는 주인의 집에서 책임을 맡은 사람이면서, 동료들에게 먹을거리를 나누어 주는 대신 그들을 때립니다. 그의 겉모습과 실제 행동이 서로 달랐습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참된 신자의 구원 상실이 가능한지, 혹은 그가 처음부터 참된 신자가 아니었는지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유의 직접적인 초점은 주인에게 책임을 맡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했는가와, 그 행동에 대한 심판입니다. 「울부짖음과 이를 가는 일」은 마태복음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 하나님 나라의 심판을 나타내는 엄중한 결말 표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믿음직하고」는 그리스어 피스토스로 믿을 만하고 충실한 사람을, 「지혜로운」은 프로니모스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실천적인 지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둘로 잘라」는 그리스어 디코토메오에서 나온 말로 말 그대로 둘로 가른다는 뜻이며, 신약에서 누가복음 12:46의 병행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본 것
마태복음 24장은 성전 건물에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성전 건물들이 무너지고,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며,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사람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십니다. 그런데 그 장엄한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집안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위험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는 전쟁과 지진을 보고, 거짓 그리스도의 소문을 믿으며 끝이 이미 왔다고 너무 쉽게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악한 노예처럼 끝이 아직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버리는 일입니다. 두 경우 모두 시점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시점을 아는 것처럼 행동해서도 안 되고, 시점을 모른다는 이유로 책임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미래에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오늘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삶을 더욱 중요하게 만듭니다.
그 일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때맞추어 먹을거리를 주는 일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시고,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고 선언하신 예수님께서(20:28), 자신을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기십니다. 끝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믿음직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는 더 이상 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의 능력이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의 집이 있습니다. 주인이 없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고 있고, 누군가는 그 사람들을 때리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께 물었던 것은 그날이 언제 오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여 주신 장면에는 날짜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서 일하던 노예를 봅니다. 그 노예는 여전히 다른 노예들에게 때맞추어 먹을거리를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자기 주인이 와서 볼 때 그렇게 하고 있는 그 노예는 복이 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