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21–25장 ·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동안 드러나는 것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주인의 재산을 맡은 세 노예, 그리고 영광의 왕좌 앞에 모인 모든 민족입니다.

그런데 세 이야기를 자세히 읽으면 뜻밖의 장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열 처녀는 모두 신랑을 기다렸고, 모두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명만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세 노예 가운데 한 사람은 주인의 돈을 잃어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칭찬은커녕 바깥 어둠으로 쫓겨납니다.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언제 왕을 만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왕은 그들이 자신을 돌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 이야기 모두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판결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 판결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아니라,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드러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일과 시대의 끝맺음을 알리는 표징을 물었습니다(24:3).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각을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24:36). 이제 25장에서 질문은 달라집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면,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답을 세 번 되풀이하지 않으십니다. 기다림이 무엇인지, 맡겨진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기다림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차례로 보여 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 자신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늦게 도착하시는 신랑으로, 다음에는 돌아오셔서 셈을 맞추시는 주인으로, 마지막에는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왕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분은 자신을 가장 작고 연약한 사람들과 동일시하십니다.

이 역설이 마태복음 25장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625장 본문 읽기 →

열 처녀 — 모두 잠들었지만, 모두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 25:1–13 본문 →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나라를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견주십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혼인에서는 신랑을 맞이하고 혼인 잔치에 동행하는 행렬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비유도 그런 혼인 행렬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 처녀에게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모두 신랑을 기다리고, 모두 횃불을 가지고 있으며,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잠이 듭니다. 처음부터 누군가가 신랑을 맞이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차이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다섯 명은 횃불만 가져왔고, 나머지 다섯 명은 기름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이 번역은 「등불」 대신 「횃불」로 옮겼지만, 무엇을 들고 있었든 이야기의 핵심은 같습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불빛이 있고, 그 불빛을 유지하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한 다섯 명을 지혜롭다고 부르십니다. 어리석은 다섯 명이 악의를 품었거나 신랑을 싫어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 역시 신랑을 만나려고 그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신랑이 늦어질 가능성까지 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랑을 기다린다는 사실과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모두 잠들었다는 사실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졸았고 잠을 자고 있었다.」마태복음 25:5 · 본디새김

지혜로운 다섯 명도 잠들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과 잠든 사람을 대조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잠든 사실 자체는 두 집단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잠들고 어리석은 사람도 잠듭니다.

그렇다면 13절의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는 명령은 문자 그대로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일 수 없습니다. 잠든 사람 가운데 다섯 명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깨어 있다는 것은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도 신랑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뜻합니다.

기다림은 도착할 시간을 계속 계산하거나 일상의 활동을 멈추고 하늘만 바라보는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처음의 기다림을 헛되게 하지 않을 준비를 지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의 종 비유에서도 주인이 늦어지는 상황이 등장합니다(24:48). 그 종은 주인이 늦게 온다는 사실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방탕함이 아니라 준비의 부족입니다.

주인의 부재는 사람에게 서로 다른 위험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인이 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고, 어떤 사람은 주인이 반드시 자신이 예상한 때에 올 것처럼 행동합니다.

두 경우 모두 주인의 시간을 자기 생각에 맞추려 한다는 점에서는 닮았습니다.

나눠 줄 수 없는 기름

한밤중에 갑자기 신랑이 왔다는 외침이 들립니다. 열 처녀는 모두 일어나 횃불을 손질합니다. 그때 준비하지 못한 다섯 명이 다른 다섯 명에게 기름을 나눠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름을 나누면 모두에게 부족할 수 있다며 거절합니다.

이 장면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이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는 일을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기름을 나누지 않는 행동은 이웃을 돕지 않아도 된다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신랑이 도착한 순간에 비로소 드러나는 준비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그동안 각자가 어떻게 준비했는지는 마지막 순간에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준비된 사람들이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그리고 채비를 갖춘 이들이 그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이 닫혔다.」마태복음 25:10 · 본디새김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며 외칩니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도 와서 말했다. 『주님, 주님,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십시오.』」마태복음 25:11 · 본디새김

이 외침은 마태복음의 독자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 「주님,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모두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7:21–23). 7장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듯, 여기서도 신랑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태복음 25:12 · 본디새김

문제는 신랑이 늦게 온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유의 신랑은 혼인 잔치의 주인이라는 역할을 넘어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심판의 권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자신에게 속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같지 않다고 경고하십니다.

닫힌 문은 그 경고를 눈에 보이는 장면으로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의 혼인 관습이 모든 지역에서 똑같았다고 볼 수는 없으며, 본문 역시 신랑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문의 람파스(λαμπάς)는 손에 들고 다니는 불빛을 가리키며, 기름을 사용하는 등이나 횃불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당시 혼인 행렬과 고대 시각 자료를 근거로 이 물건을 작은 토기 등잔보다 횃불로 이해해야 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이 번역 문제에 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기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령이나 믿음, 선행으로 이해하는 전통이 있지만, 하나의 의미로 확정하려면 비유 밖에서 근거를 가져와야 합니다. 본문이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은 준비의 필요성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탈란톤 — 주인은 무엇을 기대하고 떠났는가?

마태복음 25:14–30 본문 →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제 세 노예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기다리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인은 떠나기 전에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맡깁니다. 한 사람에게 다섯 탈란톤, 다른 사람에게 두 탈란톤, 마지막 사람에게 하나를 줍니다.

오늘날 ‘탤런트’라는 말이 재능을 뜻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재능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탈란톤은 여기서 재능이 아니라 무게나 금액의 단위이며, 고대의 탈란톤은 매우 큰 액수였습니다. 한 탈란톤을 받은 사람도 보잘것없는 금액을 맡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돈을 나누어 주는 장면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맡겼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모두에게 같은 양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맡기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양을 맡깁니다. 그렇다고 적게 받은 사람에게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의 관심은 누가 처음부터 더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각 사람이 맡은 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있습니다.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선택

첫 번째 노예는 곧 가서 맡겨진 돈으로 일합니다. 두 번째 노예도 같은 일을 합니다. 두 사람은 각각 다섯 탈란톤과 두 탈란톤을 더 얻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의 행동은 다릅니다.

「그런데 한 탈란톤을 받은 이는 가서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돈을 숨겼다.」마태복음 25:18 · 본디새김

주인의 돈을 땅에 묻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아닙니다. 귀중품을 땅에 감추는 것은 도난이나 손실의 위험을 피하려는 방법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 행동을 앞선 두 사람의 활동과 대조합니다. 두 노예는 맡겨진 재산을 사용했고, 세 번째 노예는 그것을 숨겼습니다.

돈을 숨긴 사람은 재산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자기 소유로 삼지도 않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대로 돌려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맡았지만, 맡은 사람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나쁜 일에 돈을 사용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문제로 드러납니다.

같은 칭찬을 받는 두 사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주인이 돌아와 셈을 맞춥니다. 다섯 탈란톤을 받은 사람은 다섯을 더 가져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했다. 『잘했다, 선하고 믿음직한 노예야. 적은 것을 맡아 믿음직했으니 많은 것을 맡도록 너를 세우겠다.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21 · 본디새김

이어서 두 탈란톤을 받은 사람이 둘을 더 가져옵니다. 주인의 칭찬은 완전히 같습니다. 마태가 같은 문장을 두 번 쓴 것은 독자가 알아차려야 할 대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액수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처음 맡은 금액만큼을 더 얻었습니다. 주인은 더 많은 돈을 가져온 사람에게 더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고, 두 사람을 똑같이 「선하고 믿음직한 노예」라고 부릅니다.

믿음직하다는 말은 문맥에 따라 충실하다, 신뢰할 만하다는 뜻도 갖습니다. 이 표현은 바로 앞 장의 「믿음직하고 지혜로운 노예」와도 이어집니다(24:45). 그 노예가 주인이 맡긴 집안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제대로 했다면, 이 두 사람은 맡은 재산에 충실했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주인이 부재한 동안에도 주인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그립니다.

주인의 칭찬에는 또 하나의 뜻밖의 말이 있습니다. 그토록 큰 재산을 맡기고도 주인은 그것을 「적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유 안에서 이것은 현재 맡은 일과 장차 맡게 될 더 큰 일 사이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지금 맡은 일이 결코 하찮지는 않지만, 주인이 준비한 미래에 비추어 보면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가리키는 말은 더 많은 돈이 아닙니다.

주인은 노예를 자신이 누리는 기쁨 안으로 초대합니다. 이 표현은 첫 번째 비유에서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장면과 나란히 놓입니다. 두 비유의 보상은 위험을 피하거나 재산을 늘리는 데 머물지 않고, 주인과 함께하는 기쁨으로 표현됩니다.

셋째 노예는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이제 마지막 노예가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두 사람처럼 「보십시오」라고 말하지만, 보여 주려는 것은 이익이 아니라 원래 받았던 한 탈란톤입니다. 그보다 먼저 그는 주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설명합니다.

「한 탈란톤을 받은 이도 다가와 말했다. 『주님, 나는 당신이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흩지 않은 데서 모으는 모진 사람임을 알았습니다.』」마태복음 25:24 · 본디새김

여기서 처음으로 주인의 성품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가 등장합니다. 앞선 두 노예는 자신이 무엇을 맡았고 무엇을 얻었는지 이야기했지만, 셋째 노예는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말합니다. 그러고는 두려워서 돈을 숨겼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행동은 주인을 바라보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주인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느끼고, 실패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손실의 가능성을 피하는 데 집중합니다.

주인에게 재산을 돌려줄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본문이 직접 설명하는 심리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서 가능한 추론입니다.

주인은 그를 이렇게 꾸짖습니다.

「그의 주인이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악하고 게으른 노예야, 내가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흩지 않은 데서 모으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마태복음 25:26 · 본디새김

주인은 셋째 노예가 자신을 묘사한 말을 되풀이합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실제로 남이 뿌린 데서 거두는 착취적인 사람일까요? 여기서 해석이 크게 갈립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대체로 주인이 셋째 노예의 주장을 받아서 그 주장의 모순을 드러낸다고 이해합니다. 네가 정말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알았다면, 적어도 은행가들에게 돈을 맡겨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입니다. 이 경우 주인의 말은 자신의 성품에 대한 인정이라기보다 노예의 변명이 정당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반박이며, 이 해석은 마태복음 24–25장에서 이어지는 주인의 귀환과 믿음직한 노예의 주제, 첫 두 노예에게 주어지는 긍정적인 평가를 근거로 삼습니다.

다른 해석은 비유를 고대 경제적 착취의 맥락에서 읽으면서, 셋째 노예가 부당한 이익 추구를 거부한 인물일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이 해석은 고대의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 관계, 주인에 대한 노예 자신의 직접적인 묘사에 주목하고, 누가복음 19:11–27의 유사한 비유와 비교하면서 주인의 성격을 새롭게 평가합니다.

다만 비유 속 주인의 모든 경제적 행동이 곧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은행에 돈을 맡기라는 말이 예수님께서 특정한 금융 행위를 윤리적으로 권장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인의 마지막 요구가 드러내는 것은 관계입니다. 한 사람에게 재산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신뢰하고, 자신이 없는 동안 그 재산을 책임 있게 사용하도록 권한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셋째 노예는 맡겨진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 그쳤고,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을 주인에게 되돌려 놓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중립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가진 사람에게 더 주어진다는 말

마지막에는 셋째 노예가 가진 한 탈란톤을 빼앗아 열 탈란톤을 가진 사람에게 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이어서 주인은 말합니다.

「『가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고 넘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그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복음 25:29 · 본디새김

이 말씀을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으로 읽으면 비유의 방향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 가진다는 것은 돈을 소유한다는 뜻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셋째 노예도 분명히 한 탈란톤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유는 그가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는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맡은 재산이 그에게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받은 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맡은 사람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두 번째 비유에서는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주인의 귀환이 기다리던 사람들의 삶을 드러내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은을 기준으로 한 탈란톤을 약 6,000데나리온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가정하면 약 6,000일분, 해마다 약 300일을 일한다고 가정할 때 20년분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실제 가치와 노동 조건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지므로 이것은 규모를 이해하기 위한 근사치입니다. 또 29절의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원리는 마태복음 13:12에도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아듣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이 연결을 근거로 탈란톤이 물질이나 개인의 재능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이해와 책임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탈란톤 하나하나에 특정한 영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 — 모든 민족 앞에 나타나시는 왕

마태복음 25:31–33 본문 →

예수님께서 자신을 왕좌에 앉히십니다

세 번째 장면은 앞선 두 이야기와 시작부터 다릅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영광 가운데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그는 자기 영광의 왕좌에 앉을 것이다.」마태복음 25:31 · 본디새김

앞에서는 혼인 잔치와 여행을 떠난 주인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비유의 주인공을 따로 소개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는다는 비유적 표현은 등장하지만, 전체 장면은 양과 염소에 관한 우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미래의 심판을 묘사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 가운데 왕좌에 앉으시는 모습은 다니엘 7장과 깊이 연결됩니다. 다니엘 7:13–14에는 하늘 구름과 함께 오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등장합니다. 그는 옛적부터 계신 분 앞으로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고, 모든 민족과 백성이 섬기는 권세가 그에게 주어지며, 그의 나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는 짐승으로 상징되는 포악한 제국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들과 대조되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영원한 통치권이 주어지며, 이 환상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 나라를 받는다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다니엘 7:18, 27).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자신의 오심과 연결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의 아들이 왕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장래에 높임을 받으실 사람으로만 소개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왕의 권위를 자신에게 돌리십니다.

그리고 그 왕은 목자처럼 사람들을 구별하십니다.

목자는 왜 양과 염소를 갈라놓는가?

에스겔 34장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양 떼를 돌보기보다 자기 자신을 돌보았고, 약한 양을 강하게 하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양을 찾지 않았습니다(34:2–6). 그래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이 직접 양 떼를 찾고 돌보겠다고 선언하십니다(34:11–16).

하나님은 양 떼를 괴롭힌 목자들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양들 사이에서도 판단하십니다.

어떤 양은 좋은 풀을 먹고 남은 풀을 짓밟습니다. 맑은 물을 마신 뒤에는 남은 물을 더럽힙니다. 강한 양은 약한 양을 밀어냅니다. 그래서 여호와야훼는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판단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34:17–22).

원래 에스겔의 관심은 이스라엘 안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해치는 불의와, 이를 바로잡으려는 여호와야훼의 목자 역할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심판의 이미지를 사람의 아들 앞에 모인 모든 민족의 장면으로 확장합니다. 두 본문을 동일한 이야기로 볼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의 양과 염소는 이스라엘 내부의 불의와 관련되고, 마태복음의 장면은 사람의 아들이 행사하시는 최종 심판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두 본문은 하나님의 목자 역할에 연약한 자를 돌보는 일뿐 아니라, 그들을 해치는 불의를 바로잡는 일도 포함된다는 주제로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목자의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왕 앞에 서다

32절은 모든 민족이 사람의 아들 앞에 모인다고 말합니다. 「모든 민족」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24:14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는 말씀에, 28:19에서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모이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를 두고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는 모든 인류가 심판의 대상이라고 이해하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히 이방 민족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판단받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후자의 해석은 뒤이어 등장하는 「내 형제들」을 예수님의 제자들로 이해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본문은 모든 민족이 모인다고 말하지만, 사람의 아들은 그들 가운데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으십니다. 따라서 이를 각 국가가 하나의 집단으로 심판받는다는 뜻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날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이제 그날에 왕이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 기준은 뜻밖에도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장 작은 형제들 — 왕은 어디에 계셨는가?

마태복음 25:34–40 본문 →

왕이 기억하시는 여섯 가지 일

왕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오너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세상의 터가 놓인 때부터 너희를 위해 마련된 나라를 물려받아라.』」마태복음 25:34 · 본디새김

이 말씀에서 먼저 들리는 것은 초대입니다.

이어서 그들이 왜 그런 판결을 받는지 설명됩니다. 왕이 굶주리셨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르셨을 때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나그네이셨을 때 맞아들였고, 헐벗으셨을 때 옷을 입혔습니다. 앓으셨을 때 돌보았고, 감옥에 계셨을 때 찾아왔습니다.

이 여섯 가지 행동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종교 의식도 아니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위대한 업적도 아닙니다. 음식을 주고, 물을 건네고, 머물 곳을 제공하고, 옷을 입히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갇힌 사람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여섯 가지 상황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일을 당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자신의 것을 내어 주거나, 자기 시간을 사용하거나, 때로는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과 감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멀리서 보내는 호의가 아닙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와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돌봄은 생각이나 감정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행동들의 의미는 다음 대화에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의인들이 놀라는 이유

왕에게 칭찬받은 사람들은 뜻밖에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묻습니다.

「그때에 의인들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당신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여 드렸습니까? 아니면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마태복음 25:37 · 본디새김

이 반응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 이상입니다. 그들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를 맞아들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대했던 사람이 바로 왕이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왕을 섬기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행동을 보고하지 않고, 오히려 왕을 언제 만났는지 묻습니다.

「그러면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할 것이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장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마태복음 25:40 · 본디새김

왕은 자신이 굶주리셨을 때 그들이 먹을 것을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들이 돌보았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왕 자신의 형제였고, 왕은 그 형제에게 행한 일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칭찬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 행동을 자신에게 한 행동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가장 작은 내 형제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내 형제들’은 누구인가?

이 표현은 마태복음 25장의 중요한 해석 쟁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첫 번째 견해는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고난과 박해를 겪으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마태복음 12:49–50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0:40–42에서는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작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물 한 잔을 주는 행동도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10장은 제자들이 박해받고 쫓겨날 가능성도 말씀합니다(10:16–23).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굶주림, 나그네 됨, 투옥 등의 모습이 어려움 속에 있는 제자들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가장 작은 내 형제들」을 고통받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전체로 이해합니다. 이 해석은 여섯 가지 행동이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돌보는 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강조하시고(9:13; 12:7), 자비로운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5:7),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십니다.

두 견해 모두 성경 본문에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마태복음의 제자 공동체와 얼마나 엄격하게 연결해야 하는지가 핵심 쟁점이며, 본문은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별도의 설명을 제공하지 않으므로 범위를 확정하는 데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로 읽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전체로 읽든, 예수님께서 드러내시는 중요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을 향한 태도를 자신을 향한 태도와 연결하시고, 그 연결을 가장 작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모습에서 보여 주십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넘어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선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영광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가장 작은 사람을 자신과 연결하십니다.

왕의 영광과 작은 사람의 연약함이 같은 장면에 놓이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걸어오신 길과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을 고치셨고,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셨으며, 사회에서 멀리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작은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18:10–14).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연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자기 형제들을 향한 사람들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또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곧 고난과 죽음의 길로 들어가십니다. 바로 다음 장인 마태복음 26장에서는 그분을 죽이려는 모의가 시작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말씀하십니다.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분은 고난과 무관한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연약함 속으로 들어오셨고 스스로 고난을 겪으실 분입니다. 그분의 영광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영광이 아닙니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심판

마태복음 25:41–46 본문 →

오른쪽과 왼쪽의 놀라운 대칭

이제 왕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그가 왼쪽에 있는 이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이들아, 나에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마련된 영원한 불로 가라.』」마태복음 25:41 · 본디새김

앞선 초대와 정반대입니다. 오른쪽 사람들에게는 「오너라」라고 하시며 나라를 물려받으라고 하셨지만, 왼쪽 사람들에게는 「떠나」라고 하시며 영원한 불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두 선언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오른쪽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나라는 「너희를 위해 마련된 나라」이지만, 왼쪽 사람들에게 선고되는 불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본문은 두 목적지가 똑같은 방식으로 인간을 위해 마련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가 모든 사람의 최종 운명에 관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와 심판의 선고를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심판받는 이유가 설명됩니다. 그들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를 맞아들이지 않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아픈 사람과 감옥에 있는 사람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직접 다른 사람을 해쳤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제시되는 잘못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이 장면에서는 악행뿐 아니라 행하지 않은 선도 문제로 드러납니다.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의 모든 필요를 한 사람이 전부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런 책임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행동을 도덕적으로 무의미한 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두 집단 모두 왕을 알아보지 못했다

왼쪽 사람들도 오른쪽 사람들과 거의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때에 그들도 대답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당신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이시거나 헐벗으시거나 앓으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당신을 섬기지 않았습니까?』」마태복음 25:44 · 본디새김

두 집단 모두 왕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른쪽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을 돌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왼쪽 사람들도 자신들이 왕을 외면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집단의 차이는 왕이 눈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느냐가 아닙니다.

왕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을 때, 그들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했느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그 오심을 알리는 표징이 무엇일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언제 만났는지 몰랐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왕이 오시는 날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말씀에 따라 살았는지는 가장 평범한 만남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선행의 양을 계산하여 사람들을 구별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왕은 자신의 형제들을 향한 구체적인 행동을 자신과의 관계로 연결하십니다.

마태복음은 이미 산상설교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강조했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적 행위와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을 구별했습니다(6:1–18; 7:21–27). 사람은 자신이 어떤 신앙인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고,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말과 기대가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를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영원한 벌과 영원한 생명

마지막 절은 두 집단의 운명을 분명하게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영원한 벌로 떠나갈 것이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갈 것이다.」마태복음 25:46 · 본디새김

벌과 생명 모두에 같은 말 「영원한」이 붙고, 본문은 두 집단의 최종적인 운명을 매우 엄중하게 대조합니다. 마태복음은 여기서 더 자세한 설명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의 판결을 마지막 말씀으로 남기십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4–25장의 긴 가르침이 도달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된 가르침과 환난, 시대의 끝, 사람의 아들의 오심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기시는 장면은 날짜나 표징에 관한 계산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 경우의 「영원한」은 모두 같은 그리스어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입니다. 이 단어는 영원함과 관련되며, 문맥에 따라 장차 올 시대에 속한다는 의미도 논의됩니다. 따라서 이 한 단어만으로 벌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지속 방식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세 장면이 함께 보여 주는 예수님의 모습

마태복음 25:1–46 본문 →

세 이야기를 차례로 놓으면 예수님의 모습이 점점 드러납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신랑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고, 두 번째 이야기에서 주인은 먼 곳으로 떠납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왕은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는데, 처음에는 오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던 그분이 자신이 이미 가장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를 대하는 그들의 행동과 관련되어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세 이야기는 서로 다른 세 가지 덕목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 사람에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점차 깊이 드러냅니다. 이 장에서 기다림은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공백이 아닙니다. 그 시간에 사람은 준비하고, 맡겨진 것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할 심판자이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사람을 맞이하시는 신랑이시고, 믿음직한 사람을 자신의 기쁨으로 부르시는 주인이시며, 작은 사람에게 건네진 물 한 잔의 의미를 아시는 왕이십니다. 그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지 미래의 어느 순간을 대비하는 일이 아니라,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의 뜻에 따라 지금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열 처녀는 신랑이 오는 순간을 알지 못했습니다. 세 노예는 주인이 돌아오는 날을 알지 못했습니다. 왕 앞에 선 의인들은 자신들이 언제 왕을 만났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했는가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영광의 왕좌에서 끝납니다.

모든 민족이 그 앞에 모이고, 왕은 사람들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놓으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왕을 만났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영광의 왕좌에 앉으신 분은 그들이 지나온 평범한 삶을 가리키십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던 순간, 낯선 사람을 맞아들였던 순간, 아픈 사람과 갇힌 사람을 찾아갔던 순간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계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가장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