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6장

이 장의 자리 · 26–28장 · 죽음과 부활

예수님을 넘기는 밤, 자신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26장은 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이 모든 말을 마쳤을 때에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했다.마태복음 26:1 · 본디새김

마태복음에서 이 표현은 익숙합니다. 산상설교를 마치셨을 때(7:28), 열두 제자에게 가르침을 마치셨을 때(11:1), 비유들을 마치셨을 때(13:53), 공동체에 관한 말씀을 마치셨을 때(19:1)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실 긴 가르침은 끝났습니다. 마태복음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보여 주었다면, 이제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 줍니다. 그 첫머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틀 뒤에 유월절이 오고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마태복음 26:2 · 본디새김

이어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명절에는 실행하지 말자고 합니다. 백성 가운데 소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자신이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명절을 피하려 합니다.

누가 이 사건의 시간을 결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찾습니다. 제자들은 죽음까지 함께하겠다고 장담합니다. 무장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고, 공회는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시며, 그 죽음의 의미를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 장에는 「넘기다」라는 말이 거듭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넘겨지실 것이고, 유다가 예수님을 넘기려 하며, 마침내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십니다. 이 그리스어 낱말은 문맥에 따라 넘겨주다, 인도하다, 배반하여 넘기다는 뜻을 가집니다. 마태는 이 낱말을 반복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하는 일을 겪기만 하지 않으십니다. 빵과 잔을 내어 주시며 자신의 죽음을 해석하시고, 겟세마네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시며, 자신을 지키려는 칼까지 거두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뜻대로 넘기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 한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선택하십니다.

읽는 시간 37분소단락 826장 본문 읽기 →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두 무리

마태복음 26:1–16 본문 →

예수님의 시간과 지도자들의 시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가야바의 뜰에 모여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합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속임수」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백성 가운데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염려했다고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셨지만, 그때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마태는 가야바의 이름을 밝힙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던 바로 그 대제사장에게 예수님께서 끌려가 심문받으십니다(26:57). 처음에는 예수님 없이 모여 예수님의 죽음을 의논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자신들 앞에 세우고 죽어 마땅하다고 판결하는 것입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왜 죽으시는지 말씀하십니다. 지도자들이 내리는 결정만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통해 밝혀집니다.

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장면이 베다니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실 때, 한 여자가 값비싼 향유가 담긴 설화석고 병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상 앞에 비스듬히 누워 계실 때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동은 성경에서 왕이나 제사장을 세우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사무엘상 10:1; 16:13; 출애굽기 29:7). 따라서 이 장면을 왕의 기름부음과 연결해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다만 마태는 여자의 의도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이 행동에 부여하시는 의미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먼저 반응합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노여워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버리는 것인가?」마태복음 26:8 · 본디새김

그들은 향유를 비싸게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제자들의 말에는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나누어 주는 일과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강조하셨습니다(6:2–4; 19:2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 여자는 나를 위해 좋은 일을 했는데, 어찌하여 그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마태복음 26:10 · 본디새김

제자들은 향유의 가격과 다른 용도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 때문에 이 행동에는 제자들이 보지 못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6:1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 덜 중요하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하면 이 표현이 떠올리게 하는 구약의 문맥을 놓치게 됩니다.

신명기 1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난한 형제를 향해 마음을 굳게 하거나 손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을 넉넉히 빌려주고 손을 펴야 합니다(신명기 15:7–10). 그리고 11절은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가난한 형제와 궁핍한 사람에게 손을 넓게 펴라고 명령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돕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가 아니라, 계속해서 도와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지금 이 여자에게만 가능한 특별한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자가 이 향유를 내 몸에 부은 것은 나를 장사 지내기 위해서다.」마태복음 26:12 · 본디새김

여자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장례와 연결하십니다. 여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의도적으로 장례를 준비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녀의 행동을 자신의 장례를 위한 일로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셨고, 제자들은 그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장례를 위한 행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이 낭비라고 여겼던 향유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에서 이 복음이 선포되든 이 여자가 한 일도 이 여자를 기억하는 표로 이야기될 것이다.」마태복음 26:13 · 본디새김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여자의 행동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기억될 것입니다.

여자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행동의 의미를 밝혀 주십니다.

향유를 내어 준 여자와 예수님을 넘기는 유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유다가 등장합니다.

말했다.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그를 여러분에게 넘기겠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은전 서른 닢을 저울에 달아 주었다.마태복음 26:15 · 본디새김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여자는 제자들에게 비난받았지만 예수님께 칭찬받았고, 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유다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넘기기로 결심했는지 마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돈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동기를 탐욕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귀한 것을 예수님께 쏟아 붓고,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넘겨줄 대가를 받습니다.

그 대가는 은전 서른 닢입니다. 이 숫자는 스가랴 11:12–13에서 배척받은 목자에게 품삯으로 주어진 은 서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그때부터 「좋은 때」를 찾기 시작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소란 없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고,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찾습니다. 그들이 움직이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스가랴 11장에서 예언자는 여호와야훼의 명령에 따라 목자 역할을 수행하지만 양 떼와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고, 그에게 주어진 품삯 은 서른에는 목자의 가치를 모욕적으로 평가하는 문맥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9–10에서는 이 금액과 관련된 구약의 말씀이 명시적으로 인용되는데, 그곳의 인용은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소개되고 스가랴의 표현과 결합되어 있어 인용 방식 자체에도 별도의 해석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21:32에 은 서른 세겔의 배상 규정이 나오지만, 이를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노예 가격으로 볼 수 있는지는 논쟁이 있으므로 은 서른을 당시 노예의 보편적인 시장가격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한편 요한복음 12:1–8의 유사한 장면은 마리아라는 여성을 소개하지만, 두 복음서의 인물과 사건을 어떻게 일치시킬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26장만 읽을 때 이 여자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마지막 식탁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시는가?

마태복음 26:17–30 본문 →

「내 때가 가깝다」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어디서 준비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가 말했다. 「도시에 있는 아무개에게 가서 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선생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때가 가깝다. 내가 너의 집에서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낸다.」』」마태복음 26:18 · 본디새김

대제사장들과 유다는 예수님을 붙잡기에 적절한 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자기 때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는 단순히 체포당하시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향한 결정적인 시간으로 읽힙니다.

그 죽음은 유월절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이스라엘은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며, 급히 떠날 준비를 하고 음식을 먹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세대마다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식사에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식사가 시작되자 예수님께서는 먼저 불편한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같은 그릇에 손을 담그는 사람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그가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넘길 것이다.」마태복음 26:21 · 본디새김
그들은 몹시 슬퍼하며 저마다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주님, 설마 나입니까?」마태복음 26:22 · 본디새김

제자들은 서로 누가 배반할 것인지 지목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일 가능성을 부정해 달라는 듯이 묻습니다. 이 물음에 쓰인 그리스어는 보통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물음에 쓰이며, 「설마 나입니까?」(μήτι)라는 번역은 그 불안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물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함께 그릇에 손을 담그는 사람이 자신을 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식사에서는 공동의 그릇에 음식을 찍어 먹을 수 있었으므로, 이 표현만으로 유다가 특별한 동작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말의 무게는 다른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넘기는 사람은 낯선 외부인이 아니라, 같은 식탁에 앉아 함께 음식을 먹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대해 적힌 그대로 간다. 그런데 그 사람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넘겨지니,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자신에게 좋았을 것이다.」마태복음 26:2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성경의 말씀과 연결된 길임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다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인간의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함께 서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성경에 기록된 길이라는 사실이 유다의 배반을 선한 행동으로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어서 유다도 묻습니다.

그를 넘기는 유다가 대답하여 말했다. 「랍비, 설마 나입니까?」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그것은 네가 한 말이다.」마태복음 26:25 · 본디새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유다는 「랍비」라고 부릅니다. 랍비라는 호칭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므로 호칭 하나만으로 유다의 내면을 완전히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면서 부르는 말을 다르게 기록하고, 유다는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는 장면에서도 다시 「랍비」라고 부릅니다(26:49). 식탁에서의 부름과 배반의 입맞춤이 연결되도록 마태가 호칭을 보존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리스어로 쉬 에이파스, 직역하면 ‘네가 말했다’입니다. 긍정을 나타내는 관용적인 응답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상대의 표현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말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뜻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나중에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정체를 물을 때 다시 등장합니다(26:64).

배반을 예고한 식탁에서 빵을 나누시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는 빵을 들고 축복의 기도를 하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며 말했다. 「받아라,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태복음 26:2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이미 한 제자가 자신을 넘길 것을 아십니다. 곧 모든 제자가 자신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라고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계속하십니다.

제자들의 충성심이 입증된 뒤에 빵을 나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아시는 가운데 빵을 떼어 주십니다.

이 행동은 무리를 먹이실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14:19; 15:36). 그러나 이번에는 떼어 주시는 빵을 자신의 몸과 연결하십니다. 아직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먼저 빵을 떼어 주시며 자신의 몸을 말씀하십니다. 그 죽음이 다른 사람들이 가하는 폭력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성찬에서 빵과 그리스도의 몸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되는지는 기독교 전통마다 다르게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제자들과 함께하는 식사의 중심에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내 피, 곧 언약의 피」

그리고 잔을 들고 감사한 뒤 그들에게 주며 말했다. 「모두 이 잔에서 마셔라.」 「이것은 죄가 용서되도록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아지는 내 피, 곧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6:27–28 · 본디새김

이 말씀에는 피, 언약, 죄의 용서가 모여 있습니다.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4:8을 직접 떠올리게 합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그것이 여호와야훼께서 그들과 맺으신 언약의 피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기 피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의미는 「죄가 용서되도록」이라는 말씀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마태복음 첫 장에서 천사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21). 그때는 그 일을 어떻게 이루실지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피가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아지며 그 목적이 죄의 용서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라는 표현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종은 다른 사람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죄인들을 위해 중재합니다(53:11–12).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신 20:28과도 이어집니다.

제자들은 곧 자신들의 연약함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피가 이루는 죄의 용서입니다.

마지막 잔과 다시 마실 날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나는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그것을 새것으로 마실 그날까지, 이 포도나무 열매를 결코 마시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26:29 · 본디새김

죽음에 관한 말씀이 미래의 잔치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제자들과의 관계를 끝낼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시 함께 마실 날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들은 제자들은 잠시 뒤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마태는 이 대조를 숨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이미 아시는 가운데 그들에게 미래의 식탁을 약속하셨습니다.

식사는 찬미의 노래로 끝나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올리브 산으로 나갑니다.

방금 자신이 흘리실 피를 설명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그 피를 흘리시게 될 사건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의 서술에서 이 식사는 제자들이 준비한 유월절 음식으로 소개됩니다. 다만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수난 연대기를 비교할 때 최후의 식사가 유월절 달력상 정확히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더라도 마태가 예수님의 죽음을 출애굽의 구원 사건과 함께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또한 이사야 본문은 포로와 회복이라는 문맥 속에서 종의 고난과 그 결과를 말하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으십니다. 자신의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한 죽음으로 설명하신다는 점에서 주제적 연결이 있는 것입니다.

모두 버릴 것이라는 예고와 모두 함께하겠다는 약속

마태복음 26:31–35 본문 →

목자가 맞으면 양들은 흩어진다

올리브 산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모두 이 밤에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이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그 떼의 양들이 흩어질 것이다.』」마태복음 26:3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는 스가랴 13:7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목자를 치는 칼과 흩어지는 양 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그 뒤에는 심판과 정련을 거쳐 남은 백성이 다시 여호와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부르게 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13:8–9).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자신의 죽음과 제자들의 흩어짐에 적용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흩어짐을 이야기의 끝으로 놓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마태복음 26:32 · 본디새김

아직 배반과 도망은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 이후를 말씀하십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따르기 시작한 지역입니다. 사역이 시작되었던 장소로 다시 가겠다는 약속이, 제자들의 실패를 예고하는 말씀 바로 뒤에 놓입니다.

그들의 실패가 얼마나 심각한지 밝히면서도,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래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의 「나는 결코」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모두 당신 때문에 걸려 넘어질지라도 나는 결코 걸려 넘어지지 않겠습니다.」마태복음 26:33 · 본디새김

베드로의 말에서 가장 무게가 실린 표현은 「나는」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실패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아는 것과,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아는 것이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마태복음 26:34 · 본디새김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과 함께 죽어야 한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제자들도 모두 마찬가지로 말했다.마태복음 26:35 · 본디새김

마태는 「제자들도 모두 마찬가지로 말했다」는 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도망칠 때, 그것은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가 자신 있게 약속했지만 모두가 실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충성심을 과대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실패를 아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과의 미래를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이야기는 겟세마네로 이동합니다.

겟세마네 —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구하시다

마태복음 26:36–46 본문 →

영광을 보았던 세 사람이 슬픔을 보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 도착하신 뒤 제자들에게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조금 더 나아가십니다.

이 세 사람은 17장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희어지는 모습을 보았던 제자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제 같은 세 사람이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슬퍼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마태복음 26:37 · 본디새김
그때에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 마음이 죽을 만큼 몹시 슬프다.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복음 26:3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 앞에 영광 가운데 오실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동시에 죽음을 앞두고 깊이 슬퍼하고 괴로워하시는 분입니다. 마태는 이 두 모습을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과 슬픔을 초월한 영웅처럼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그 말씀의 끝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자신과 함께 있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늘 제자들을 가르치고 돌보시던 분이, 이제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깨어 있어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첫 번째 기도 — 「가능하다면」

그는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며 말했다. 「내 아버지, 가능하다면 이 잔이 나에게서 지나가기를 빕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빕니다.」마태복음 26:39 · 본디새김

성경에서 잔은 기쁨과 축복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고난과 심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25:15–29와 이사야 51:17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마셔야 하는 잔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안에서 직접 연결되는 장면도 있습니다. 20:22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 자신이 마시려는 잔을 그들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그 잔 앞에서 얼마나 깊이 괴로워하시는지 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쉽게 대답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잔을 앞에 두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시기 때문에 순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을 아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구하십니다.

첫 번째 청원은 「가능하다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는 자신의 뜻이 전혀 없으셨다는 의미로 읽으면, 기도의 긴장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바람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그 바람을 아버지의 뜻 아래에 놓으십니다.

순종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 장면에서 순종은 자신의 뜻을 감추지 않고 아버지께 아뢰면서도, 최종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기도로 나타납니다.

잠든 제자들과 깨어 계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오시자 그들은 잠들어 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이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베드로에게 말했다. 「너희가 이렇게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힘이 없었느냐?」마태복음 26:40 · 본디새김

말씀은 베드로에게 향하지만 「너희」라는 복수형으로 세 사람 모두의 실패를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잠들었다고 꾸짖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깨어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조금 전에 부탁하셨던 그 말이 되돌아옵니다.

「너희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여라. 영은 의욕이 있는데 육신은 약하다.」마태복음 26:41 · 본디새김

그들에게 의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장담했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영과 육신을 선한 영혼과 악한 육체라는 두 실체로 대립시키는 것은 본문의 초점과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진실한 의지와 인간적인 연약함 사이의 긴장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더 강한 의지를 가지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깨어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청원이 있습니다(6:13).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기도를 자신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기도해야 할 제자들은 잠들었고, 예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기도 —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는 다시 가서 두 번째로 기도하며 말했다. 「내 아버지, 내가 이것을 마시지 않고는 이것이 지나갈 수 없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마태복음 26:42 · 본디새김

첫 번째 기도에서는 「가능하다면」 이 잔이 지나가기를 구하셨습니다. 두 번째 기도에서는 「마시지 않고는 이것이 지나갈 수 없다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변화를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시를 받으셨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중간에 어떤 대답을 하셨다고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6:10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던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 기도를 가르치신 분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바로 그 뜻을 구하고 계십니다.

주기도문은 더 이상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문장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기도가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자신의 뜻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을 구하십니다.

세 번째 기도와 가까워진 때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오시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십니다. 기도의 내용은 더 길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으십니다.

그때에 그는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는 자고 쉬어라. 보아라, 그때가 가까이 왔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죄인들의 손에 넘겨진다.」마태복음 26:45 · 본디새김

「이제는 자고 쉬어라」는 이제 쉬라는 허락으로도, 아직도 자고 있느냐는 책망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이든 제자들이 함께 깨어 있어야 했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18절에서 「내 때가 가깝다」고 말씀하셨던 그때가 이제 실제로 눈앞에 왔습니다.

「일어나라. 가자. 보아라, 나를 넘기는 자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26:4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도망가자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버지께 자신의 뜻을 아뢰고 그 뜻을 따르기로 하셨습니다.

마태는 그 결단을 긴 설명으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짧은 말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제는 자고 쉬어라」는 번역상 논의가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스어의 동사 형태는 문맥에 따라 명령으로도, 질문이나 현재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명령으로 옮겨져 있으며, 이 읽기를 따르면 깨어 있어야 했던 시간이 지나가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일어나라.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잠을 더 자라는 명령으로만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잔의 의미에 관해서는,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배경이 이 잔을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고난으로 이해하는 데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6장은 이 잔의 모든 의미를 별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고난의 요소만을 가리킨다고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열 처녀 비유에서 지혜로운 처녀들도 잠들었던 것(25:5)과 달리,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고통 가운데 함께 깨어 있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입맞춤과 칼 —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을 지키지 않으시는가?

마태복음 26:47–56 본문 →

가장 친밀한 행동이 배반의 표가 되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유다가 나타납니다.

마태는 유다를 다시 「열둘 가운데 하나」라고 소개합니다. 독자가 이미 아는 사실을 일부러 되풀이하여,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는 사람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다시 보게 합니다. 유다가 무장한 무리에게 정해 준 표는 입맞춤입니다.

그리고 그는 곧 예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랍비.」 그리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마태복음 26:49 · 본디새김

식탁에서 「랍비, 설마 나입니까?」라고 물었던 사람이 이제 다시 같은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겉으로는 친밀한 인사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호입니다.

친밀함을 표현하는 행동이 배반을 완성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친구여,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 그때에 그들이 다가와 예수에게 손을 대어 그를 붙잡았다.마태복음 26:50 · 본디새김

「친구여」는 무조건적인 애정 표현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부름말은 관계가 어긋난 사람을 향해서도 쓰입니다(20:13; 22:12).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는 무엇 하러 왔느냐는 질문으로도, 하러 온 일을 하라는 말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예수님께서는 입맞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맞서 도망치거나 저항하지 않으십니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

그 순간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노예를 치고 귀를 잘라 냅니다. 마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때에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네 칼을 제자리로 되돌려라. 칼을 든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6:52 · 본디새김
「아니면 내가 내 아버지에게 간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간청하면 그가 지금 내 곁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를 세워 줄 것이다.」마태복음 26:5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는 이유를 완전히 다르게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저항하지 않으시는 것은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 군단은 로마 군대의 대규모 부대를 가리키는 말로, 예수님께서 압도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복음 26:5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계시며,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예수님을 붙잡는 사람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의 속임수와 유다의 배반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권위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더 강한 폭력으로 제압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지킬 힘이 없어서 붙잡히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겟세마네의 기도가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던 사람

그 시각에 예수가 무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강도를 잡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날마다 나는 성전에 앉아 가르쳤는데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마태복음 26:5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숨어서 무장 반란을 준비하던 사람이 아니십니다. 「앉아」라는 표현은 산에 앉아 가르치시고(5:1) 배에 앉아 비유를 말씀하신(13:2)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행하신 일은 가르치는 일이었는데, 이제 사람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습니다. 이 대조는 예수님의 무죄를 보여 주는 동시에, 예수님을 붙잡는 사람들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에 제자들이 모두 그를 버려두고 달아났다.마태복음 26:56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양 떼가 흩어질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시고, 제자들은 사라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했던 사람들 앞에 홀로 서게 되십니다.

가야바의 뜰 — 누구에게 심판할 권위가 있는가?

마태복음 26:57–68 본문 →

거짓 증언으로 시작되는 심문

예수님을 붙잡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고 갑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예수를 죽이려고 그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찾았다.마태복음 26:59 · 본디새김

공회는 먼저 증언을 듣고 그 결과에 따라 죄를 판단하려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는 목적을 가지고 거기에 맞는 증언을 찾고 있습니다.

많은 거짓 증인이 나섰지만 충분한 증언을 찾지 못합니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소를 헐고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성전 건물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하셨지만(24:2), 그것은 자신이 직접 성소를 헐고 다시 짓겠다는 말씀과 같지 않습니다.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는 것과 자신이 성소를 파괴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제 관심은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직접 던지는 질문으로 옮겨갑니다.

예수님의 침묵

대제사장이 일어나 그에게 말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느냐? 이 사람들이 너에게 불리하게 무슨 증언을 하는 것이냐?」마태복음 26:62 · 본디새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잠자코 계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여러 차례 예고하시고, 그 죽음이 언약과 죄의 용서를 위해 쏟아지는 피라고 직접 설명하셨던 분이, 거짓 증언 앞에서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모습은 이사야 53:7의 고난받는 종이 압제를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표현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바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인지」

예수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고 너에게 맹세를 요구한다. 네가 바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인지 우리에게 말하여라.」마태복음 26:63 · 본디새김

이 질문은 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16:16). 베드로가 고백했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낱말들이 이 질문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입에서 그 낱말들은 고백이 되었고, 대제사장의 입에서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그것은 네가 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을 지니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26:64 · 본디새김

첫마디 「그것은 네가 한 말이다」는 식탁에서 유다에게 하셨던 대답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질문보다 훨씬 큰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피고가 심판자의 자리를 말씀하시다

예수님께서는 두 구약 본문의 이미지를 결합하십니다. 시편 110:1에서 여호와야훼는 시편의 화자가 ‘내 주’라고 부르는 인물에게 자신의 오른편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며, 원수들을 굴복시키는 왕적 권위를 주십니다. 다니엘 7:13–14에서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 구름과 함께 나타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고, 모든 민족이 그를 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붙잡혀 오신 사람이십니다. 대제사장과 공회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곧 죽어 마땅하다고 선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권위를 지니게 될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관점이 뒤집힙니다.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 영광의 왕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31–32). 이제 그 말씀을 하신 분이 다른 사람들의 재판을 받고 계십니다.

「이제부터」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부활과 높임받으심 이후의 권위, 장래의 재림과 심판, 또는 그 두 전망을 함께 가리킨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최종적으로 판단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시는 셈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그 말씀을 모독으로 판단합니다.

「그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때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다. 「그가 모독하는 말을 했다. 우리가 왜 증인을 더 가질 필요가 있느냐? 보아라, 너희가 지금 그 모독을 들었다.」마태복음 26:65 · 본디새김

거짓 증언을 찾던 공회가, 이제 예수님 자신의 말을 근거로 더 이상의 증언이 필요 없다고 선언합니다. 공회는 예수님께서 죽어 마땅하시다고 판단합니다. 마태는 그들의 판단을 그대로 기록하지만, 그것을 올바른 판단이라고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독자는 세례 때 하늘의 음성(3:17), 변화산의 선언(17:5), 베드로의 고백(16:16)에서 예수님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태가 보여 주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가 거짓으로 밝혀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사람들이 자신들 앞에 서 계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예언해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마태복음 26:68 · 본디새김

독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여러 차례 정확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유다가 자신을 넘길 것을, 모든 제자가 달아날 것을,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알아맞혀 보라고 요구한 것은 누가 예수님을 때렸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독자가 곧 확인할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조금 더 깊이

증인들이 인용한 문장은 마태복음의 앞선 본문에 그대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서 「성소」에 해당하는 나오스는 성전 건물 전체나 경내를 가리키는 히에론과 구별됩니다. 2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 건물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증인들은 하나님의 성소를 헐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며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7과의 연결에 관해서는, 마태가 여기서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지 않으므로 직접 인용이 아니라 고난받는 종의 모습과 예수님의 침묵 사이의 유사성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바깥뜰 —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마태복음 26:69–75 본문 →

한 건물 안의 두 이야기

마태는 예수님의 심문 장면과 베드로의 이야기를 교차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그를 따라 대제사장의 뜰까지 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끝이 어떻게 되는지 보려는 것이었다.마태복음 26:58 · 본디새김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완전히 멀리 도망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따라갑니다.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는 요구를 받으시고, 밖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지 질문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합니다.

첫 번째 부인 —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하녀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6:69 · 본디새김

하녀는 베드로를 위험한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관계를 알아봅니다.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며 말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마태복음 26:70 · 본디새김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을 직접 부인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를 피해 넘기려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문간으로 옮겨 갔을 때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다시 말합니다.

두 번째 부인 —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가 문간으로 나갔을 때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마태복음 26:71 · 본디새김

첫 번째 하녀는 「갈릴리 사람 예수」라고, 두 번째 하녀는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도 달라집니다.

그는 맹세하며 다시 부인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마태복음 26:72 · 본디새김

이번에는 맹세까지 하고, 예수님이라는 사람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부인이 한 단계 깊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고, 함께 길을 걸으셨고,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그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세 번째 부인 — 말씨가 그를 드러내다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이들이 다가와 베드로에게 말했다. 「참으로 너도 그들 가운데 하나다. 네 말씨가 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6:73 · 본디새김

갈릴리 출신인 베드로의 말투가 그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단서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말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 내려고 하지만, 바로 그 말이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때에 그는 자신에게 저주를 걸며 맹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곧 닭이 울었다.마태복음 26:74 · 본디새김

이 표현은 누군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자기 말이 거짓이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겠다는 방식으로 맹세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질문을 회피했고, 두 번째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맹세했으며, 세 번째는 자신에게 저주까지 걸며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장담했던 사람이 이제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주 평범한 소리가 들립니다.

닭이 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에게 돌아오다

마태는 닭 울음에 특별한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압니다. 조금 전 예수님께서 「이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해도 그러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쓰디쓰게 울었다.마태복음 26:75 · 본디새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 위해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베드로에게 돌아옵니다. 그 말씀 앞에서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새로운 맹세를 하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밤에

마태복음 26:1–75 본문 →

이 밤에는 모두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소란 없이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고, 유다는 대가를 물었고, 제자들은 함께 죽겠다고 장담했다가 달아났으며, 공회는 예수님의 정체를 판단하려다 그분을 모독하는 사람으로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십니다.

지도자들은 명절을 피하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넘겨지실 것을 말씀하셨고 그 죽음의 의미를 이미 식탁에서 밝혀 주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죽을 만큼 슬퍼하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셨고, 천사들의 도움을 구할 수 있었지만 칼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넘겨지십니다. 그러나 넘겨지시는 동안에도 이 밤의 시간을 정하는 것은 그들의 모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따르시는 아버지의 뜻입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신의 의지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연약함을 알고 계셨고, 그들이 실패하기도 전에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 자리에서 베드로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받아들이시는 장면도 아직 보여 주지 않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있는 것은 회복의 설명이 아니라 베드로의 울음입니다.

조금 전까지 그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기억하는 것은 자신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쓰디쓰게 울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