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6장
이 장의 자리 · 26–28장 · 죽음과 부활
예수님을 넘기는 밤, 자신을 내어 주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26장은 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말을 마치신 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1 · 두루새김
마태복음에서 이 표현은 익숙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마치셨을 때(7:28), 열두 제자에게 가르침을 마치셨을 때(11:1), 비유들을 마치셨을 때(13:53), 그리고 공동체에 관한 말씀을 마치셨을 때(19:1)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실 긴 가르침은 끝났습니다. 마태복음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보여 주었다면, 이제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 줍니다. 그 첫머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틀 뒤면 유월절이고, 인자는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진다.」마태복음 26:2 · 두루새김
이어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면서도 명절에는 실행하지 말자고 합니다. 백성이 소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자신이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명절을 피하려 합니다.
누가 이 사건의 시간을 결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26장 전체를 읽는 실마리가 됩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습니다. 제자들은 죽음까지 함께하겠다고 장담하고, 무기를 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며, 의회는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시며, 그 죽음의 의미를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 장에는 「넘겨진다」와 「넘겨줄」 같은 말이 거듭 등장합니다. 인자가 넘겨지실 것이고,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려 하며, 마침내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십니다. 그리스어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는 문맥에 따라 넘겨주다, 인도하다, 배반하여 넘기다는 뜻을 가지며, 마태는 이 낱말을 반복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하는 일을 겪기만 하지 않으십니다. 빵과 잔을 내어 주시며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시고, 겟세마네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시며, 자신을 지키려는 칼까지 거두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뜻대로 넘겨주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 한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선택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두 무리
예수님의 시간과 지도자들의 시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가야바의 집 안뜰에 모여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합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속임수」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백성이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염려했다고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셨지만, 그때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마태는 가야바의 이름을 밝힙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던 바로 그 대제사장에게 예수님께서 나중에 끌려가 심문받으십니다(26:57). 처음에는 예수님 없이 모여 예수님의 죽음을 의논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자신들 앞에 세우고 죽어 마땅하다고 판결하는 것입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왜 죽으시는지 말씀하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내리는 결정만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통해 밝혀집니다.
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장면이 베다니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실 때, 한 여자가 설화석고라는 돌로 만든 병에 아주 값비싼 향유를 담아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에 기대어 누워 식사하시던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고대에는 식사 자리에서 몸을 비스듬히 눕히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그 자세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특별한 것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여자의 행동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동은 성경에서 왕이나 제사장을 세우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므로(사무엘상 10:1; 16:13; 출애굽기 29:7), 왕의 기름부음과 연결해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다만 마태는 여자의 의도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며, 예수님께서 이 행동에 부여하시는 의미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먼저 반응합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야?」마태복음 26:8 · 두루새김
그들은 향유를 비싸게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제자들의 말에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나누어 주는 일과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강조하셨습니다(6:2–4; 19:2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께서 이를 알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마태복음 26:10 · 두루새김
제자들은 향유의 가격과 그것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 때문에 이 행동에는 제자들이 보지 못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지만, 내가 언제나 너희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다.」마태복음 26:11 · 두루새김
이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 예수님께 드리는 헌신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하면 이 표현이 떠올리게 하는 구약의 문맥을 놓치게 됩니다.
신명기 1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난한 형제를 향해 마음을 굳게 하거나 손을 닫아서는 안 되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빌려주어야 합니다(신명기 15:7–10). 그리고 11절은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가난한 형제와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넓게 펴라고 명령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돕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가 아니라, 계속해서 도와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이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여자에게만 가능한 특별한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마태복음 26:12 · 두루새김
여자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장례와 연결하십니다. 여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의도적으로 장례를 준비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장례를 위한 행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이 낭비라고 여겼던 향유가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이 여자를 기억하도록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질 것이다.」마태복음 26:13 · 두루새김
마태는 이 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여자의 행동이, 제자들에게는 낭비였던 그 일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억될 것입니다.
여자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행동의 의미를 밝혀 주십니다.
향유를 내어 준 여자와 예수님을 넘기는 유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유다가 등장합니다.
유다가 말했습니다.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겠습니다.」 그들은 유다에게 은화 서른 개를 저울에 달아 주었습니다.마태복음 26:15 · 두루새김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선명한 대조가 보입니다. 여자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내어 드렸고,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여자는 제자들에게 비난받았지만 예수님께 칭찬받았고, 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유다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결심했는지 마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돈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행동의 동기를 탐욕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귀한 것을 예수님께 쏟아 붓고,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넘겨줄 대가를 받는 장면이 이 순서로 나란히 놓입니다.
그 대가는 은화 서른 개입니다.
이 숫자는 스가랴 11:12–13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목자 역할을 하던 예언자는 양 떼와의 관계가 무너진 뒤 품삯을 요구하고, 은 서른을 받습니다. 이 금액에는 목자의 가치를 모욕적으로 평가하는 문맥이 있어, 마태가 유다의 대가를 은화 서른 개로 기록한 것은 스가랴의 배척받은 목자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그때부터 「알맞은 기회」를 찾기 시작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소동 없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고,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습니다.
그들이 움직이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복음 12:1–8의 유사한 장면은 마리아라는 여성을 소개하지만, 두 복음서의 세부 사항을 비교하여 인물과 사건을 어떻게 일치시킬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27:9–10에서는 은화 서른 개와 관련된 구약의 말씀이 직접 인용되는데,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소개되고 스가랴의 표현과 결합되어 있어 인용 방식 자체에도 별도의 해석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은 서른을 당시 노예 한 사람의 일반적인 시장가격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1:32에 은 서른 세겔의 배상 규정이 나오지만, 이를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노예 가격으로 볼 수 있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마지막 식탁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시는가?
「내 때가 가까이 왔다」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어디서 준비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 안에 있는 아무개에게 가서 선생님이 이렇게 말한다고 전해라. 『내 때가 가까이 왔다. 내가 네 집에서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내겠다.』」마태복음 26:18 · 두루새김
대제사장들과 유다는 예수님을 붙잡기에 알맞은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자기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는 단순히 붙잡히시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향한 결정적인 시간이 다가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 죽음은 유월절과 연결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이스라엘은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 양옆의 기둥과 위쪽 가로대에 바르며, 급히 떠날 준비를 하고 음식을 먹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세대마다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식사에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같은 그릇에 손을 담그는 사람
그들이 먹고 있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넘겨줄 것이다.」마태복음 26:21 · 두루새김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며 한 사람씩 예수께 묻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설마 저입니까?」마태복음 26:22 · 두루새김
제자들은 서로 누가 배반할 것인지 지목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일 가능성을 부정해 달라는 듯이 묻습니다. 「설마 저입니까?」라는 물음에는 그 불안과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물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함께 그릇에 손을 담근 사람이 자신을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식사에서는 공동의 그릇에 음식을 찍어 먹을 수 있었으므로, 이 표현만으로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동작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말의 무게는 예수님을 넘겨주는 사람이 낯선 외부인이 아니라, 같은 식탁에 앉아 함께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배반은 더욱 아프게 드러납니다.
「인자는 자신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을 간다. 그러나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복음 26:2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성경의 말씀과 연결된 길임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다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인간의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함께 서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성경에 기록된 길이라는 사실이 유다의 배반을 선한 행동으로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어서 유다도 묻습니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가 물었습니다. 「랍비, 설마 저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했다.」마태복음 26:25 · 두루새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유다는 「랍비」라고 부릅니다. 랍비라는 부름 자체가 적대적이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어서, 부르는 말 하나만으로 유다의 속마음을 완전히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는 장면에서도 다시 「랍비」라고 부릅니다(26:49). 첫 번째 부름은 식탁에서, 두 번째 부름은 배반의 입맞춤과 함께 나옵니다.
예수님의 대답 「네가 말했다」는 나중에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정체를 물을 때 다시 등장합니다(26:64). 유다에게 던져진 대답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자리에서도 반복되는 것입니다.
배반을 예고한 식탁에서 빵을 나누시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의 기도를 하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태복음 26:26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이미 한 제자가 자신을 넘겨줄 것을 아십니다. 또한 곧 모든 제자가 자신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계속하십니다.
제자들의 충성심이 입증된 뒤에 빵을 나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아시는 가운데 빵을 떼어 주십니다.
이 행동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먹이실 때 빵을 들고 축복하신 뒤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14:19; 15:36). 그러나 이번에는 떼어 주시는 빵을 자신의 몸과 연결하십니다. 아직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먼저 빵을 떼어 주시며 자신의 몸을 말씀하십니다.
그 죽음이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가하는 폭력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과 함께하는 식사의 중심에 놓으셨습니다. 그 의미는 이어지는 잔의 말씀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내 피, 곧 언약의 피」
또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하고 제자들에게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모두 이 잔으로 마셔라.」 「이것은 많은 사람의 죄가 용서되도록 그들을 위해 쏟아지는 내 피, 곧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6:27–28 · 두루새김
이 말씀에는 세 가지 표현이 모여 있습니다. 피, 언약, 죄의 용서입니다.
먼저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4:8을 직접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모세는 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언약의 피라고 선언합니다. 그때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세워진 언약을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기 피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제물의 피를 가지고 언약을 선포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단순히 새로운 가르침을 전달하는 선생으로 소개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의미는 「죄가 용서되도록」이라는 말씀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마태복음 첫 장에서 천사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했지만(1:21), 그 일을 어떻게 이루실지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피가 많은 사람을 위해 쏟아지며 그 목적이 죄의 용서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의 시작에서 주어졌던 약속이, 죽음을 앞둔 식탁에서 새로운 깊이를 갖게 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의 죄가 용서되도록 그들을 위해 쏟아지는」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종은 다른 사람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죄인들을 위해 중재합니다(53:11–12).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신 마태복음 20:28도 이제 구체적인 사건을 향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곧 자신들의 약함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피가 이루는 죄의 용서입니다.
마지막 잔과 다시 마실 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나는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실 그날까지 포도주를 결코 마시지 않겠다.」마태복음 26:2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곧 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끝낼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시 함께 마실 날을 말씀하십니다. 그 죽음 너머에 아버지의 나라에서 제자들과 함께할 미래가 있음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들은 제자들은 잠시 뒤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마태는 이 대조를 숨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실패를 이미 아시는 가운데 그들에게 미래의 식탁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식사는 찬송으로 끝나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올리브산으로 나갑니다.
방금 자신이 흘리실 피를 설명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그 피를 흘리시게 될 사건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수난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비교할 때 마지막 식사가 유월절 달력상 정확히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더라도 마태가 예수님의 죽음을 출애굽의 구원 사건과 함께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제자들의 물음에 쓰인 그리스어 낱말은 보통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물음에 쓰여서, 「설마」라는 말에 그 느낌이 담겼습니다. 「네가 말했다」는 직역이며, 두루새김도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렇다고 인정하는 관용적인 대답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상대의 표현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말로 읽을 여지도 있어 어느 한쪽으로 뜻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성찬에서 빵과 그리스도의 몸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되는지는 기독교 전통마다 다르게 설명해 왔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 식탁에서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으시지만, 자신의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한 죽음으로 설명하신다는 점에서 이사야 53장과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이사야 본문은 포로와 회복이라는 문맥 속에서 종의 고난과 그 결과를 말합니다.
모두 버릴 것이라는 예고와 모두 함께하겠다는 약속
목자가 맞으면 양들은 흩어진다
올리브산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너희는 모두 나 때문에 믿음에서 걸려 넘어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겠다.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6:3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두 실패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스가랴 13:7을 인용하십니다. 스가랴 13장에서 목자를 치는 칼과 흩어지는 양 떼에 관한 말씀 뒤에는, 심판과 정련을 거쳐 남은 백성이 다시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부르게 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13:8–9).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자신의 죽음과 제자들의 흩어짐에 적용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는 행동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흩어짐을 이야기의 끝으로 놓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마태복음 26:32 · 두루새김
아직 배반과 도망은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 이후를 말씀하십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따르기 시작한 지역이며,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던 장소로 다시 가겠다는 약속이 제자들의 실패를 예고하는 말씀 바로 뒤에 놓입니다.
그들의 실패가 얼마나 심각한지 밝히면서도,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래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의 「저는 결코」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주님 때문에 믿음에서 걸려 넘어져도 저는 결코 그러지 않겠습니다.」마태복음 26:33 · 두루새김
베드로의 말에서 가장 무게가 실린 표현은 「저는」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실패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아는 것과,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아는 것이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말한다. 바로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복음 26:34 · 두루새김
베드로는 더욱 강하게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해도 저는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똑같이 말했습니다.마태복음 26:35 · 두루새김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때, 그것은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가 자신 있게 약속했지만 모두가 실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충성심을 실제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실패를 정확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실패를 아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과의 미래를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이야기는 겟세마네로 이동합니다.
겟세마네 —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구하시다
영광을 보았던 세 사람이 슬픔을 보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 도착하신 뒤 제자들에게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조금 더 나아가십니다. 이 세 사람은 마태복음 17장의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희어지는 모습을 보았던 제자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같은 세 사람이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37 · 두루새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죽을 만큼 몹시 슬프다. 여기 머물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복음 26:3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 앞에 영광 가운데 오실 인자이시면서, 동시에 죽음을 앞두고 깊이 슬퍼하고 괴로워하시는 분입니다. 마태는 이 두 모습을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 영웅처럼, 두려움과 슬픔을 넘어선 듯 침착하게 죽음을 기다리시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그 말씀의 끝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자신과 함께 있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늘 제자들을 가르치고 돌보시던 분이, 이제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깨어 있어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첫 번째 기도 — 「가능하다면」
조금 더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가능하다면 이 잔이 제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 주십시오.」마태복음 26:39 · 두루새김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잔은 기쁨과 축복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고난과 심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25:15–29와 이사야 51:17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마셔야 하는 잔의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이 배경은 예수님께서 마셔야 할 잔을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고난으로 이해하는 데 근거를 제공합니다.
마태복음 20:22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 자신이 마시려는 잔을 그들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두 사람이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그 잔 앞에서 얼마나 깊이 괴로워하시는지 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쉽게 대답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잔을 앞에 두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시기 때문에 순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을 아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구하십니다.
첫 번째 청원은 「가능하다면」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잔이 자신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시고, 즉시 「제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라고 덧붙이십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는 자신의 뜻이 전혀 없으셨다는 의미로 읽으면, 본문이 보여 주는 기도의 긴장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바람을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그 바람을 아버지의 뜻 아래에 놓으십니다.
순종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 장면에서 순종은 자신의 뜻을 감추지 않고 아버지께 아뢰면서도, 최종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기도로 나타납니다.
잠든 제자들과 깨어 계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오시자 그들은 잠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었느냐?」마태복음 26:40 · 두루새김
말씀은 베드로에게 향하지만 「너희」라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 세 사람 모두의 실패를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잠들었다고 꾸짖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깨어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조금 전에 부탁하셨던 그 말이 되돌아옵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라. 마음은 기꺼이 하려 하지만 몸은 약하다.」마태복음 26:41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제자들의 실패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들에게 의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장담했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원하는 일과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일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강한 의지를 가지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깨어 기도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자기 결심을 더욱 확신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청원이 있습니다(6:13).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기도를 자신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기도해야 할 제자들은 잠들었고, 예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기도 —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다시 가서 두 번째로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제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지나갈 수 없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마태복음 26:42 · 두루새김
첫 번째 기도에서는 「가능하다면」 이 잔이 지나가기를 구하셨습니다. 두 번째 기도에서는 「제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지나갈 수 없다면」이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십니다. 본문은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 어떤 대답을 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지만, 두 기도의 표현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기도는 마태복음 6:10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와 연결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그 기도를 가르치신 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바로 그 뜻을 구하고 계십니다.
주기도문은 더 이상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문장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기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따르지 않으실 길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자신의 뜻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을 구하십니다.
세 번째 기도와 가까워진 때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오시지만 그들은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십니다. 기도의 내용은 더 길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으십니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돌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가까이 왔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겨진다.」마태복음 26:45 · 두루새김
「이제는 자고 쉬어라」는 이제 쉬라는 허락으로도, 아직도 자고 있느냐는 책망으로도 읽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무게는 이어지는 말씀에 있습니다. 1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때가 실제로 눈앞에 왔습니다.
「일어나라.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사람이 가까이 왔다.」마태복음 26:46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도망가자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넘겨줄 사람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일어나 움직이십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버지께 자신의 뜻을 아뢰고 그 뜻을 따르기로 하셨습니다.
마태는 그 결단을 긴 설명으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짧은 말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26장은 잔의 모든 의미를 별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잔을 고난의 특정한 부분만을 가리킨다고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잠든 제자들의 장면은 열 처녀 비유에서 지혜로운 처녀들도 잠들었다는 사실과는 다른 상황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고통 가운데 함께 깨어 있어 달라고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41절의 원문은 영과 육신을 말하며, 두루새김은 이를 「마음」과 「몸」으로 옮겼습니다. 이를 선한 영혼과 악한 육체라는 두 실체의 대립으로 읽는 것은 본문의 초점과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진실한 의지와 인간적인 약함 사이의 긴장을 말씀하십니다. 45절의 그리스어 동사 형태는 문맥에 따라 명령으로도, 질문이나 현재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말을 명령으로 옮겼고, 이 읽기를 따르면 제자들이 함께 깨어 있어야 했던 시간은 지나가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일어나라.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잠을 더 자라는 명령으로만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입맞춤과 칼 —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을 지키지 않으시는가?
가장 친밀한 행동이 배반의 표가 되다
예수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다가 나타납니다.
마태는 유다를 다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고 소개합니다.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일부러 되풀이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는 사람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다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무장한 무리에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신호를 정해 줍니다.
그 신호는 입맞춤입니다.
유다는 곧바로 예수께 다가가 「랍비, 안녕하십니까?」 하고 말하며 입을 맞추었습니다.마태복음 26:49 · 두루새김
마지막 식탁에서 「랍비, 설마 저입니까?」라고 물었던 사람이 이제 다시 같은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유다의 입맞춤은 겉으로는 친밀한 인사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호입니다.
친밀함을 표현하는 행동이 배반을 완성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해라.」 그러자 사람들이 다가와 예수께 손을 대어 붙잡았습니다.마태복음 26:50 · 두루새김
「친구야」라는 말은 조건 없는 애정 표현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부름말은 관계가 어긋난 사람을 향해서도 쓰여, 친밀한 호칭의 형태와 상대를 마주 세우는 상황 사이의 긴장이 있습니다. 「네가 하러 온 일을 해라」도 무엇 하러 왔느냐는 질문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러 온 일을 하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예수님께서는 입맞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시며, 유다에게 맞서 도망치거나 저항하지 않으십니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
그 순간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 하나가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노예를 내리치고 귀를 잘라 냅니다. 마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제자리에 도로 넣어라. 칼을 드는 사람은 모두 칼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마태복음 26:52 · 두루새김
「내가 내 아버지께 간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간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당장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보내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26:5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저항하지 않으시는 것은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장한 무리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지만, 예수님께서는 압도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강한 무력을 불러오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복음 26:5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계시며,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체포를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이 예수님을 붙잡는 사람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의 속임수와 유다의 배반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예수님께서 그 사건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는 사실을 동시에 말합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권위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더 강한 폭력으로 제압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지킬 힘이 없어서 붙잡히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겟세마네의 기도가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던 사람
그때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강도를 잡으러 나오듯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마태복음 26:55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숨어서 무장 반란을 준비하던 사람이 아니십니다.
날마다 성전에 앉아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앉아」라는 표현은 산에 올라 앉으셨던 산상설교(5:1)와 배에 앉아 비유를 말씀하시던 장면(13:2)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이 대조는 예수님의 무죄를 보여 주는 동시에, 예수님을 붙잡는 사람들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태복음 26:56 · 두루새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스가랴의 말씀을 인용하며 양 떼가 흩어질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붙잡히시고, 제자들은 사라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의논했던 사람들 앞에 홀로 서게 되십니다.
가야바의 뜰 — 누구에게 심판할 권위가 있는가?
거짓 증언으로 시작되는 심문
예수님을 붙잡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고 갑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던 바로 그 인물이며,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그곳에 모여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의회 전체는 예수를 죽이려고 그분께 불리한 거짓 증언을 찾고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6:59 · 두루새김
의회는 먼저 증언을 듣고 그 결과에 따라 죄를 판단하려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는 목적을 가지고 거기에 맞는 증언을 찾고 있습니다. 많은 거짓 증인이 나섰지만 찾지 못하고, 마지막에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소를 무너뜨리고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독자는 예수님께서 앞서 성전 건물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24:2).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직접 성소를 무너뜨리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말씀과 같지 않고, 마태복음의 앞선 본문에는 증인들이 인용한 문장이 그대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는 것과 자신이 성소를 파괴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제 관심은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직접 던지는 질문으로 옮겨갑니다.
예수님의 침묵
대제사장은 일어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고, 그 죽음이 언약과 죄의 용서를 위해 쏟아지는 피라는 사실도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증언으로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이 모습은 억눌리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이사야 53:7의 고난받는 종과 주제 면에서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인지」
예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고 네게 맹세를 요구한다. 네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인지 우리에게 말해라.」마태복음 26:63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던 마태복음 16장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16:16). 대제사장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고 맹세를 요구하면서, 베드로의 고백에 있던 중요한 낱말들이 이 질문에 다시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정체를 고백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정체를 심문하고 있습니다.
같은 칭호를 말한다고 해서 같은 태도로 예수님을 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인자가 권능을 지니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26:64 · 두루새김
첫마디 「네가 말했다」는 식탁에서 유다에게 하셨던 대답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뒤의 말씀은 대제사장의 질문보다 훨씬 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피고가 심판자의 자리를 말씀하시다
예수님께서는 두 구약 본문의 이미지를 결합하십니다. 하나는 시편 110:1로, 하나님께서 시편의 화자가 자신의 주라고 부르는 인물에게 자신의 오른편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며 원수들을 굴복시키는 왕의 권위를 주십니다. 다른 하나는 다니엘 7:13–14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 구름과 함께 나타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고, 모든 민족이 그를 섬기며 그의 통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붙잡혀 오신 사람이십니다. 대제사장과 의회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곧 죽어 마땅하다고 선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권위를 지니게 될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야기의 관점이 뒤집힙니다.
바로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자기 영광의 왕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31–32). 이제 그 말씀을 하신 분이 다른 사람들의 재판을 받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최종적으로 판단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시는 셈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은 그 말씀을 하나님을 모독한 말로 판단합니다.
「그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이자가 하나님을 모독했다. 우리에게 증인이 더 필요하겠느냐? 방금 너희가 그 모독을 들었다.」마태복음 26:65 · 두루새김
앞서 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거짓 증언을 찾고 있었지만, 이제 대제사장은 예수님 자신의 말을 근거로 더 이상의 증언이 필요 없다고 선언합니다. 의회는 예수님께서 죽어 마땅하시다고 판단합니다. 마태는 그들의 판단을 그대로 기록하지만, 그것을 올바른 판단이라고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독자는 이미 예수님의 세례 때(3:17)와 변화산에서(17: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음성을 들었고, 베드로의 고백도 들었습니다(16:16). 마태가 보여 주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가 거짓으로 밝혀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사람들이 자신들 앞에 서 계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과정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판단은 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리며 조롱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예언해 보아라!」마태복음 26:68 · 두루새김
그러나 독자는 예수님께서 유다가 자신을 넘겨줄 것을, 모든 제자가 달아날 것을,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이미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언 능력을 조롱하고 있지만, 마태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61절에서 「성소」로 옮긴 원어는 성전 건물 전체나 그 안의 공간을 가리키는 낱말과 구별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침묵에서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지 않으므로, 그 장면과의 연결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고난받는 종의 모습과 예수님의 침묵 사이의 닮은 점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64절의 「이제부터」라는 표현이 부활과 높임받으심 이후의 권위가 드러나는 일을 강조하는지, 앞으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일을 가리키는지, 또는 그 두 전망을 함께 포함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바깥뜰 —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한 건물 안의 두 이야기
마태는 예수님의 심문 장면과 베드로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 줍니다. 5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야바에게 끌려가시고, 58절에서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갔습니다. 그는 일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려고 뜰 안으로 들어가 경비를 맡은 사람들과 함께 앉았습니다.마태복음 26:58 · 두루새김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완전히 멀리 도망치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안에서 심문받으시고, 베드로는 집 밖의 뜰에 앉아 있습니다.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는 요구를 받으시고, 밖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지 질문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합니다.
첫 번째 부인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베드로는 집 밖의 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자 종 한 사람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마태복음 26:69 · 두루새김
여자 종은 베드로를 위험한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관계를 알아봅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마태복음 26:70 · 두루새김
여기서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을 직접 부인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를 피하는 방식으로,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넘기려 합니다. 하지만 여자 종의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부인 —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베드로가 문간으로 나가자 다른 여자 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마태복음 26:71 · 두루새김
첫 번째 여자 종은 「갈릴리 사람 예수」라고, 두 번째 여자 종은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부릅니다. 같은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지명으로 구별하여 부르는 방식이 달라졌고, 베드로의 대답도 달라집니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며 다시 부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마태복음 26:72 · 두루새김
첫 번째 부인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모르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맹세까지 하며 예수님이라는 사람 자체를 모른다고 말합니다.
부인이 한 단계 깊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고, 함께 길을 걸으셨고,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그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세 번째 부인 — 말씨가 그를 드러내다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당신도 분명히 그들 가운데 하나예요. 말씨만 들어도 알 수 있어요.」마태복음 26:73 · 두루새김
갈릴리 출신인 베드로의 말투가 그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단서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말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 내려고 하지만, 바로 그 말이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저주까지 하며 맹세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바로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마태복음 26:74 · 두루새김
「저주까지 하며 맹세했다」는 표현은 누군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자기 말이 거짓이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겠다는 방식으로 맹세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질문을 피하고, 두 번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세 번째는 자신에게 저주까지 걸며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장담했던 사람이 이제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려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에게 돌아오다
마태는 닭 울음에 특별한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압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바로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해도 그러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셨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마태복음 26:75 · 두루새김
여기서 베드로가 처음으로 자기 행동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되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 위해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베드로에게 돌아옵니다.
그 말씀 앞에서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맹세를 하지도, 자신은 정말 충성스러운 제자였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마태는 이 자리에서 베드로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받아들이시는 장면도 아직 보여 주지 않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있는 것은 회복의 설명이 아니라 베드로의 울음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밤에
마태복음 26장에는 서로 다른 뜻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소동을 피해 예수님을 없애려 하고,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대가를 묻고, 제자들은 함께 죽겠다고 장담했다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며, 의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으로 판결합니다. 모두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넘겨지십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넘겨지시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고, 그 죽음의 의미를 이미 식탁에서 「많은 사람의 죄가 용서되도록 그들을 위해 쏟아지는 내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밝혀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다의 배반이나 의회의 판결을 선한 일로 바꾸지 않지만, 그들의 행동이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마지막 설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명절을 피하려던 사람들이 아니라 「내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 사건 한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기꺼이 하려 하지만 몸은 약하다」는 겟세마네의 말씀처럼,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연약함을 알고 계셨고, 그들이 실패하기도 전에 다시 살아나신 뒤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가야바의 뜰 안에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집 밖의 뜰에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그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맹세했지만, 이제 그가 기억하는 것은 자신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슬피 울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