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21–25장 ·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동안 드러나는 것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주인의 재산을 맡은 세 노예, 그리고 영광의 왕좌 앞에 모인 모든 민족입니다.

그런데 세 이야기를 자세히 읽으면 뜻밖의 장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열 처녀는 모두 신랑을 기다렸고, 모두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명만 결혼 잔치에 들어갑니다. 세 노예 가운데 한 사람은 주인의 돈을 잃어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칭찬은커녕 바깥 어둠으로 쫓겨납니다.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언제 왕을 만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왕은 그들이 자신을 돌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 이야기 모두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판결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 판결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아니라,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드러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일과 시대의 끝맺음을 알리는 표징을 물었습니다(24:3).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각을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24:36). 이제 25장에서 질문은 달라집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면,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기다림이 무엇인지, 맡겨진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기다림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차례로 보여 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 자신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늦게 도착하시는 신랑으로, 다음에는 돌아오셔서 셈을 맞추시는 주인으로, 마지막에는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왕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분은 자신을 가장 작고 연약한 사람들과 연결하십니다.

이 역설이 마태복음 25장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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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처녀 — 모두 잠들었지만, 모두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 25:1–13 본문 →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나라를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견주십니다.

열 처녀에게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모두 신랑을 기다리고, 모두 횃불을 가지고 있으며,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잠이 듭니다. 처음부터 누군가가 신랑을 맞이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차이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다섯 명은 횃불만 가져왔고, 나머지 다섯 명은 기름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무엇을 들고 있었든 이야기의 핵심은 같습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불빛이 있고, 그 불빛을 유지하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다섯 명이 악의를 품었거나 신랑을 싫어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 역시 신랑을 만나려고 그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신랑이 늦어질 가능성까지 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랑을 기다린다는 사실과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모두 잠들었다는 사실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마태복음 25:5 · 두루새김

이 「모두」에는 지혜로운 다섯 명도 들어갑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과 잠든 사람을 대조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잠든 사실 자체는 두 집단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13절의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는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문자 그대로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잠든 사람 가운데 다섯 명은 결혼 잔치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깨어 있다는 것은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도 신랑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뜻합니다.

기다림은 도착할 시간을 계속 계산하거나 일상의 활동을 멈추고 하늘만 바라보는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처음의 기다림을 헛되게 하지 않을 준비를 지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의 종 비유에서도 주인이 늦어지는 상황이 등장합니다(24:48). 그 종은 주인이 늦게 온다는 사실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방탕함이 아니라 준비의 부족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인이 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고, 어떤 사람은 주인이 반드시 자신이 예상한 때에 올 것처럼 행동합니다.

두 경우 모두 주인의 시간을 자기 생각에 맞추려 한다는 점에서는 닮았습니다.

나눠 줄 수 없는 기름

한밤중에 갑자기 신랑이 왔다는 외침이 들립니다. 열 처녀는 모두 일어나 횃불을 손질합니다. 그때 준비하지 못한 다섯 명이 기름을 나눠 달라고 요청하지만, 지혜로운 다섯 명은 모두에게 모자랄 수 있다며 거절합니다.

이 장면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는 일을 강조하시는데, 왜 처음 비유에서는 나눔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등장할까요?

여기서 기름을 나누지 않는 행동은 이웃을 돕지 않아도 된다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신랑이 도착한 순간에 비로소 드러나는 준비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그동안 각자가 어떻게 준비했는지는 마지막 순간에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준비된 사람들이 결혼 잔치에 들어갔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를 갖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갔고, 문이 닫혔다.」마태복음 25:10 · 두루새김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도 와서 말했다. 『주님, 주님, 저희에게 문을 열어 주십시오!』」마태복음 25:11 · 두루새김

이 외침은 마태복음의 독자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 「주님,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모두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7:21–23). 그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고, 여기서도 신랑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랑이 대답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마태복음 25:12 · 두루새김

신랑이 늦게 온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결혼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자신에게 속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같지 않다고 경고하십니다.

닫힌 문은 그 경고를 눈에 보이는 장면으로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지중해 세계의 결혼에서는 신랑을 맞이하고 결혼 잔치에 동행하는 행렬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 비유도 그런 결혼 행렬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시의 결혼 관습이 모든 지역에서 똑같았다고 볼 수는 없으며, 본문도 신랑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문의 낱말은 손에 들고 다니는 불빛을 가리키며 기름을 쓰는 등이나 횃불을 나타낼 수 있는데, 두루새김은 당시 결혼 행렬과 고대 시각 자료를 근거로 작은 토기 등잔보다 횃불로 보는 해석을 따라 「횃불」로 옮겼습니다. 이 번역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기름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령이나 믿음, 선행으로 이해하는 전통이 있지만, 하나의 의미로 확정하려면 비유 밖에서 근거를 가져와야 합니다.

탈란톤 — 주인은 무엇을 기대하고 떠났는가?

마태복음 25:14–30 본문 →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제 세 노예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기다리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인은 떠나기 전에 한 사람에게 다섯 탈란톤, 다른 사람에게 두 탈란톤, 마지막 사람에게 하나를 맡깁니다. 오늘날 ‘탤런트’라는 말이 재능을 뜻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재능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 탈란톤(τάλαντον)은 여기서 재능이 아니라 무게나 금액의 단위입니다. 한 탈란톤은 일꾼의 약 20년분 품삯에 해당하는 큰 액수여서, 한 탈란톤을 받은 사람도 보잘것없는 금액을 맡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맡겼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주인은 사람마다 다른 양을 맡기지만, 적게 받은 사람에게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의 관심은 누가 처음부터 더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각 사람이 맡은 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있습니다.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선택

첫 번째 노예는 곧바로 가서 맡겨진 돈으로 장사합니다. 두 번째 노예도 같은 일을 합니다. 두 사람은 각각 다섯 탈란톤과 두 탈란톤을 더 법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의 행동은 다릅니다.

「그러나 한 탈란톤을 받은 노예는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겨 두었다.」마태복음 25:18 · 두루새김

귀중품을 땅에 감추는 것은 당시 도난이나 손실의 위험을 피하려는 방법일 수 있었습니다. 돈을 숨긴 사람은 재산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 소유로 삼지도 않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대로 돌려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맡았지만, 맡은 사람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나쁜 일에 돈을 사용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문제로 드러납니다.

같은 칭찬을 받는 두 사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주인이 돌아와 셈을 맞춥니다. 다섯 탈란톤을 받은 사람이 다섯을 더 가져오자 주인이 말합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했다. 『잘했다, 선하고 믿음직한 노예야. 적은 것을 맡아 믿음직했으니 많은 것을 맡기겠다.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마태복음 25:21 · 두루새김

이어서 두 탈란톤을 받은 사람이 둘을 더 가져옵니다. 그에게 주인이 하는 말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습니다(25:23).

실제 액수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처음 맡은 금액만큼을 더 벌었습니다. 주인은 더 많은 돈을 가져온 사람에게 더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고, 두 사람을 똑같이 「선하고 믿음직한 노예」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바로 앞 장에서 주인이 맡긴 집안사람들을 돌보는 믿음직하고 지혜로운 노예와도 이어집니다(24:45). 두 이야기 모두 주인이 없는 동안에도 주인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그립니다.

그토록 큰 재산을 맡기고도 주인은 그것을 「적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맡은 일이 결코 하찮지는 않지만, 주인이 준비한 미래에 비추어 보면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가리키는 말은 더 많은 돈이 아닙니다.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라는 말은 첫 번째 비유에서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들어가는 장면과 나란히 놓입니다. 두 비유의 보상은 위험을 피하거나 재산을 늘리는 데 머물지 않고, 주인과 함께하는 기쁨으로 표현됩니다.

셋째 노예는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이제 마지막 노예가 등장합니다. 그도 「보십시오」라고 말하지만, 보여 주려는 것은 더 번 돈이 아니라 원래 받았던 한 탈란톤입니다. 그보다 먼저 그는 주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설명합니다.

「한 탈란톤을 받은 노예도 다가와 말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모진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씨를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흩어 놓지 않은 곳에서 모으시는 분이십니다.』」마태복음 25:24 · 두루새김

앞선 두 노예는 자신이 무엇을 맡았고 무엇을 벌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셋째 노예는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말하고, 두려워서 돈을 숨겼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행동은 주인을 바라보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패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하며 손실의 가능성을 피하는 데 집중합니다. 재산을 돌려줄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본문이 직접 설명하는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서 가능한 추론입니다.

「주인이 그에게 대답했다. 『악하고 게으른 노예야! 내가 씨를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흩어 놓지 않은 곳에서 모은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마태복음 25:26 · 두루새김

주인은 셋째 노예가 자신을 묘사한 말을 되풀이합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실제로 남이 뿌린 데서 거두며 다른 사람의 수고를 빼앗는 사람일까요?

전통적인 해석은 주인이 노예의 주장을 받아서 그 안의 모순을 드러낸다고 봅니다. 네가 정말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알았다면 적어도 은행가들에게 맡겨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반박이며, 마태복음 24–25장에 이어지는 주인의 돌아옴과 믿음직한 노예의 주제, 첫 두 노예에게 주어지는 칭찬을 근거로 삼습니다. 다른 해석은 이 비유를 고대 경제에서 다른 사람의 수고를 빼앗는 일이 벌어지던 상황과 연결해, 셋째 노예가 부당한 이익 추구를 거부한 인물일 가능성을 살핍니다. 이 해석은 고대의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 관계, 노예 자신의 직접적인 묘사에 주목하고, 누가복음 19:11–27의 비슷한 비유와 비교합니다.

다만 비유 속 주인의 모든 경제적 행동이 곧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며, 은행에 돈을 맡기라는 말이 특정한 금융 행위를 옳은 일로 권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한 사람에게 재산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신뢰하고, 자신이 없는 동안 책임 있게 사용하도록 권한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셋째 노예는 맡겨진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 그쳤고,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을 주인에게 되돌려 놓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중립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피하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가진 사람에게 더 주어진다는 말

마지막에는 셋째 노예의 한 탈란톤을 빼앗아 열 탈란톤을 가진 사람에게 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가진 사람은 누구나 더 받아 넘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없는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복음 25:29 · 두루새김

이 말씀을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으로 읽으면 비유의 방향을 놓치게 됩니다. 셋째 노예도 분명히 한 탈란톤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유는 그가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는 돈을 가지고 있었지만, 맡은 재산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받은 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맡은 사람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이 결혼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두 번째 비유에서는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주인의 기쁨을 함께 누리지 못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주인이 돌아오는 때가 기다리던 사람들의 삶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은을 기준으로 한 탈란톤을 약 6,000데나리온으로 계산하는 방식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 한 해 약 300일 노동으로 가정하면 약 20년분이 되지만, 실제 가치와 노동 조건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지므로 대략적인 계산입니다. 29절과 같은 원리는 마태복음 13:12에서도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아듣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는 문맥에 나옵니다. 이 연결을 근거로 탈란톤이 물질이나 개인의 재능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이해와 책임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본문은 탈란톤 하나하나에 특정한 영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인자 — 모든 민족 앞에 나타나시는 왕

마태복음 25:31–33 본문 →

예수님께서 자신을 왕좌에 앉히십니다

세 번째 장면은 앞선 두 이야기와 시작부터 다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을 지니고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그때 자기의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을 것이다.」마태복음 25:31 · 두루새김

이제는 비유의 주인공을 따로 소개하지 않고, 인자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양과 새끼 염소를 갈라놓는다는 비유적 표현은 등장하지만, 전체 장면은 예수님께서 직접 미래의 심판을 묘사하시는 말씀입니다.

인자가 영광 가운데 왕좌에 앉으시는 모습은 다니엘 7장과 깊이 연결됩니다. 다니엘 7:13–14에서 하늘 구름과 함께 오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옛적부터 계신 분 앞에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고, 모든 민족과 백성이 그를 섬기며, 그의 나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짐승으로 상징되는 포악한 제국들과 대조되는 영원한 통치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자가 왕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왕의 권위를 자신에게 돌리십니다.

그리고 그 왕은 목자처럼 사람들을 구별하십니다.

목자는 왜 양과 새끼 염소를 갈라놓는가?

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은 양 떼보다 자기 자신을 돌본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꾸짖으시고(34:2–6), 자신이 직접 양 떼를 찾고 돌보겠다고 선언하십니다(34:11–16). 그런데 하나님은 양들 사이에서도 판단하십니다. 어떤 양은 좋은 풀을 먹고 남은 풀을 짓밟고, 맑은 물을 마신 뒤 남은 물을 더럽히며, 강한 양은 약한 양을 밀어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판단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34:17–22).

두 본문을 같은 이야기로 볼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의 양과 염소는 이스라엘 내부의 불의와 관련되고, 마태복음의 장면은 인자가 행사하시는 최종 심판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에서 목자의 역할에는 연약한 자를 돌보는 일뿐 아니라 그들을 해치는 불의를 바로잡는 일도 포함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목자의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왕 앞에 서다

32절은 모든 민족이 인자 앞에 모인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24:14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는 말씀에, 28:19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에도 쓰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하나는 모든 인류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 민족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판단받는 장면이라는 견해로, 뒤이어 나오는 「내 형제들」을 제자들로 이해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다만 인자는 모인 민족들 가운데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으시므로, 각 국가가 하나의 집단으로 심판받는다는 뜻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날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이제 그날에 왕이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 기준은 뜻밖에도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장 작은 형제들 — 왕은 어디에 계셨는가?

마태복음 25:34–40 본문 →

왕이 기억하시는 여섯 가지 일

「그때 왕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오너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물려받아라.』」마태복음 25:34 · 두루새김

먼저 들리는 것은 초대입니다. 그들이 이제 막 나라를 만들어 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이 그들에게 준비된 나라를 물려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판결의 이유가 나옵니다. 왕이 굶주리셨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르셨을 때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나그네이셨을 때 맞아들였고, 헐벗으셨을 때 옷을 입혔습니다. 병드셨을 때 돌보았고, 감옥에 갇히셨을 때 찾아왔습니다.

이 여섯 가지 행동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종교 의식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위대한 업적도 아닙니다. 그 일을 당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자신의 것을 내어 주거나 자기 시간을 쓰거나 때로는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과 감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멀리서 보내는 호의가 아니라, 누군가 자신에게 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동들의 의미는 다음 대화에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의인들이 놀라는 이유

「그때 의로운 사람들이 왕에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굶주리신 주님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주님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마태복음 25:37 · 두루새김

이 반응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 이상입니다. 그들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대했던 사람이 바로 왕이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왕이 그들에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복음 25:40 · 두루새김

이 장면이 마태복음 25장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그들이 돌보았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왕 자신의 형제였고, 왕은 그 형제에게 한 일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칭찬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연약한 사람들 사이에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깊은 관계를 드러내십니다.

‘내 형제들’은 누구인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한 견해는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고난과 박해를 겪으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봅니다. 마태복음 12:49–50과 10:40–42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고, 제자를 맞아들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견해는 고통받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전체로 봅니다. 여섯 가지 행동이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돌보는 일이고, 마태복음이 자비를 거듭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두 견해 모두 본문에 근거가 있고,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제자 공동체와 얼마나 엄격하게 연결해야 하는지가 핵심 쟁점입니다. 본문은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으므로 범위를 확정하는 데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취하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을 향한 태도를 자신을 향한 태도와 연결하시고, 그 연결을 가장 작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모습에서 보여 주십니다. 이는 도덕적 교훈을 넘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선언입니다.

왕의 영광과 작은 사람의 연약함이 같은 장면에 놓이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견해의 근거로, 10장에서는 작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물 한 잔을 주는 행동도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며, 제자들이 박해받고 쫓겨날 가능성도 말씀하십니다(10:16–23). 이런 상황에서는 굶주림, 나그네 됨, 감옥에 갇힘이 어려움 속의 제자들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둘째 견해의 근거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강조하시고(9:13; 12:7) 자비로운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5:7). 또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무리를 먹이시며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하셨고, 제자들에게 작은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18:10–14).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뒤 바로 26장에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가 시작됩니다.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분은 고난과 무관한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고난을 겪으실 분입니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심판

마태복음 25:41–46 본문 →

오른쪽과 왼쪽의 놀라운 대칭

「그때 왕은 자기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사람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로 가라.』」마태복음 25:41 · 두루새김

오른쪽 사람들에게는 「오너라」라고 하셨지만, 왼쪽 사람들에게는 「내게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두 선언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라는 「너희를 위해 준비된」 것이지만, 불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이 차이가 모든 사람의 최종 운명에 관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은 두 목적지가 똑같은 방식으로 인간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를 맞아들이지 않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지 않았으며, 아픈 사람과 감옥에 있는 사람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직접 다른 사람을 해쳤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심판의 이 장면에서는 악행뿐 아니라 행하지 않은 선도 문제로 드러납니다.

본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모든 필요를 전부 해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책임의 범위를 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는 일을 도덕적으로 무의미한 일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두 집단 모두 왕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 그들도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이시거나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도 섬기지 않았습니까?』」마태복음 25:44 · 두루새김

오른쪽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을 돌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고, 왼쪽 사람들은 자신들이 왕을 외면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집단의 차이는 왕이 눈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느냐가 아닙니다.

왕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을 때, 그들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했느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그 표징이 무엇일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언제 만났는지 몰랐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왕이 오시는 날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그날을 기다리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가장 평범한 만남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선행의 양을 계산하여 사람들을 구별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왕은 자신의 형제들을 향한 구체적인 행동을 자신과의 관계로 연결하십니다. 마태복음은 이미 산상설교에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종교적 행위와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을 구별했습니다(6:1–18; 7:21–27).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릴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말과 기대가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를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영원한 벌과 영원한 생명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벌을 받으러 떠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러 갈 것이다.」마태복음 25:46 · 두루새김

여기서 「영원한」은 두 경우 모두 같은 그리스어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입니다. 이 단어는 영원함과 관련되며, 문맥에 따라 앞으로 올 시대에 속한다는 의미도 논의됩니다. 따라서 이 한 단어만으로 벌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지속 방식에 관한 모든 신학적 논쟁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두 집단의 최종적인 운명을 매우 엄중하게 대조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24–25장의 긴 가르침은 거짓된 가르침과 환난, 시대의 끝, 인자의 오심을 지나 이 자리에 도달합니다. 마지막에 남기시는 장면은 날짜나 표징에 관한 계산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 장면이 함께 보여 주는 예수님의 모습

마태복음 25:1–46 본문 →

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늦게 오시는 신랑이시고, 돌아와 셈을 맞추시는 주인이시며,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러니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장에서 기다림은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공백이 아닙니다. 그 시간에 사람은 준비하고, 맡겨진 것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열 처녀는 신랑이 오는 순간을, 세 노예는 주인이 돌아오는 날을, 의로운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왕을 만났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했는가였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영광의 왕좌에서 끝납니다.

모든 민족이 그 앞에 모이고, 왕은 사람들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놓으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왕을 만났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영광의 왕좌에 앉으신 분은 그들이 지나온 평범한 삶을 가리키십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던 순간, 낯선 사람을 맞아들였던 순간, 아픈 사람과 갇힌 사람을 찾아갔던 순간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계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