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7장

이 장의 자리 · 26–28장 · 죽음과 부활

죄 없는 피와 십자가에 달리신 왕

마태복음 27장에는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넘긴 유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사형을 승인한 빌라도, 십자가형을 요구한 무리,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다는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을 넘겨주었다고 고백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유다에게서 받은 돈이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대가이므로 성전 금고에 넣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는지 묻고, 마침내 손을 씻으며 자신에게는 이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하지만, 누구도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립니다.

예수님을 지키던 로마의 백부장과 군인들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하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데 관여하면서도 책임을 외면했고, 뒤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인정합니다. 마태는 이 사이에 예수님의 죽음을 배치합니다.

그 죽음은 어떤 사람에게는 없애야 할 대상의 처형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할 골칫거리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조롱의 대상입니다. 이 장에서는 피를 가리키는 말과 「왕」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처음에는 죄 없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두고 사람들이 다투지만, 십자가에 이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그들이 조롱하던 왕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27장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였는지를 기록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죽인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읽는 시간 37분소단락 927장 본문 읽기 →

유다의 은전 — 죄를 인정하지만 책임질 사람은 없다

마태복음 27:1–10 본문 →

은전 서른 닢을 돌려주다

아침이 되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고, 예수님을 묶어 총독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받으실 십자가형은 로마의 처형 방식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뜻이 로마의 재판 권한을 거쳐 실행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시기 전에 유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를 넘겨준 유다는 예수께서 사형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쳤습니다. 그는 은화 서른 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가져갔습니다.마태복음 27:3 · 두루새김

유다가 진정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쳤는지를 「뉘우쳤습니다」라는 낱말 하나로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가 뉘우쳤을 뿐 아니라 돈을 돌려주고 자기 죄를 고백했다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유다가 말했습니다. 「제가 죄 없는 사람을 넘겨주어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 네가 알아서 해.」마태복음 27:4 · 두루새김

유다는 변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죄가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죄 없으시다는 사실과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차갑게 대답한 이들은 바로 유다가 예수님을 넘기도록 돈을 주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일에는 함께 참여했지만, 그 일이 죄라는 고백 앞에서는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그리고 유다는 은화를 성소 안으로 던지고 떠납니다. 마태는 그가 가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바로 앞 장의 마지막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뒤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습니다. 이번에는 유다가 자신의 죄를 고백한 뒤 떠나 죽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저버렸고 그 뒤에 자신의 행동을 마주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는 모습은 다릅니다.

그렇다고 마태가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비교하여 판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가 어떤 마음 상태에서 죽음을 선택했는지, 그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가능성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태가 보여 주는 것은 유다가 자신의 행동을 되돌리고 싶어 했다는 사실, 그 죄를 고백했다는 사실, 그러나 결국 생을 마쳤다는 사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죄를 고백하는 사람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곧이어 그가 돌려준 돈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합니다.

성소에 던져진 돈을 성전 금고에 넣을 수 없다

대제사장들이 은화를 주워 들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대가이니 성전 금고에 넣어서는 안 돼.」마태복음 27:6 · 두루새김

대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예수님을 넘기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다시 돌아오자, 피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성전 금고에 넣을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그 돈을 지불하여 무슨 일을 이루려 했는지는 다시 돌아보지 않습니다.

마태는 그들의 속마음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성전에 부정한 돈을 들여놓지 않으려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의 죽음을 추진하는 일에는 관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관련된 돈이 성소로 던져졌다는 사실은 이야기의 후반부와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바로 그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기 때문입니다(27:51). 처음에는 사람들이 성소에 넣어도 되는 돈과 넣어서는 안 되는 돈을 구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는 성소 자체에서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왜 토기장이의 밭인가?

대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을 묻는 곳으로 삼고, 그 밭은 「피의 밭」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마태는 그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한 뒤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때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진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은화 서른 개를 받았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어떤 이들이 그 사람에게 매긴 값이었다.」마태복음 27:9 · 두루새김

그런데 은화 서른 개와 값이 매겨진 목자의 이야기는 예레미야서가 아니라 스가랴 11:12–13에 나옵니다. 스가랴 11장에서 예언자는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역할을 하지만 그 관계는 깨져 버리고, 목자가 받은 품삯은 은화 서른 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돈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본문에서 은화 서른 개는 목자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드러내는 금액입니다.

왜 예레미야의 이름을 붙였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마태가 스가랴의 말씀에 예레미야서의 토기장이와 밭 이미지를 결합했다는 해석이 있고, 단순히 출처를 잘못 적은 것으로 보거나 당시의 성경 인용 관행으로 설명하려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 번역에서 예레미야를 스가랴로 고쳐 쓰면 안 됩니다. 마태는 분명히 예레미야라고 기록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넘길 값을 매겼고, 그 돈을 돌려받은 뒤에는 부정한 돈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은화가 치워진 뒤에도 죄 없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로마 총독이 그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뉘우쳤습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메타멜로마이의 분사형으로, 후회하다, 마음을 바꾸다, 뉘우치다는 뜻을 가집니다. 흔히 이 단어는 단순한 후회만 뜻하고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메타노에오라는 다른 동사로 표현된다고 설명하지만, 두 낱말의 차이를 그렇게 절대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21:29에서 처음에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꾸고 포도원에 들어간 아들에게도 같은 동사가 쓰이는데, 거기서는 생각이 달라진 것이 실제 행동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유다가 은화를 던진 「성소」는 성전 구역 전체를 가리킬 수 있는 말과 구별되는 낱말이지만, 마태가 유다가 성소의 어느 지점까지 접근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표현만으로 구체적인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에 관해서는, 예레미야 18장에 토기장이가, 19장에 토기장이의 그릇과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32장에 밭을 사는 장면이 나와 마태복음의 밭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태의 실제 인용 과정을 확정적으로 설명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인용의 중심 표현이 스가랴 11장에 있다는 점과 함께 예레미야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에 대한 논의는 남아 있습니다.

빌라도의 재판 — 두 예수 가운데 누구를 놓아줄 것인가?

마태복음 27:11–26 본문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는 총독 앞에 서셨습니다. 총독이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마태복음 27:11 · 두루새김

앞서 대제사장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물었습니다(26:63). 이번에는 로마 총독이 유대인의 왕이신지 묻습니다. 대제사장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종교적으로 어떤 권위를 주장하시는가 하는 문제였지만, 로마 총독에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는 정치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에서 누군가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한다면 로마의 통치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짧습니다. 바로 앞 장에서 대제사장에게 답하셨던 것과 같은 형태의 응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왕권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이해하는 정치적인 왕의 틀에 자신을 단순히 가두지도 않으십니다.

이후 고발이 이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총독은 몹시 놀랐습니다.마태복음 27:1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 묻는 질문에는 말씀하셨지만, 자신을 죽이기 위한 고발 앞에서는 침묵하십니다. 그런데 그 침묵 때문에 빌라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변호하지 않으셨다는 사실과, 빌라도가 죄 없는 사람에게 형벌을 내릴 권한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제 마태는 빌라도 앞에 뜻밖의 선택을 놓습니다.

예수 바라바와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

명절에 죄수 한 사람을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사람들이 모이자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 바라바냐, 아니면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냐?」마태복음 27:17 · 두루새김

한 사람은 예수 바라바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입니다. 둘의 이름은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말은 다릅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아람어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독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세례 때와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들으신 예수님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3:17; 17:5). 그 예수님께서 지금 죄수 한 사람과 나란히 놓여, 누구를 풀어 줄 것인지 선택받는 자리에 서 계십니다.

마태는 바라바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설명하지 않고, 16절에서 그를 「이름난 죄수」라고만 소개합니다. 그 대신 더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27:18).

빌라도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무리에게 선택을 맡기려 합니다.

꿈을 꾼 여자의 경고

빌라도가 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 의로운 사람의 일에는 끼어들지 마세요. 오늘 꿈에서 그 사람 때문에 몹시 시달렸어요.」마태복음 27:19 · 두루새김

이 장면은 마태복음에서만 기록됩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에 관한 종교적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았다는 설명도 없지만, 예수님을 「그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앞부분에서 꿈은 여러 차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요셉은 꿈을 통해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에 관한 지시를 받았고(1:20; 2:13, 19), 동방에서 온 이들도 꿈을 통해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2:12). 다만 이번에는 꿈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지 않고, 천사가 나타났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앞에서는 유다가 예수님께서 죄 없는 사람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님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두 증언 모두 예수님의 처형을 막지 못합니다.

손을 씻는 총독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설득하여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하고 예수님은 죽이라고 요구하게 합니다. 빌라도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모두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했느냐?」 그러나 무리는 더욱 거세게 외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마태복음 27:23 · 두루새김

이 물음에는 예수님의 유죄를 확인할 근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더욱 거세게 같은 말을 외칩니다.

빌라도는 자기 말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소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물을 가져다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 너희가 알아서 해라.」마태복음 27:24 · 두루새김

유다가 죄 없는 사람을 넘겨주었다고 고백했을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네가 알아서 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빌라도가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손을 씻는 행동은 신명기 21:6–9의 의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는 살인자를 알 수 없는 경우 장로들이 물로 손을 씻으며 자신들이 그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자신의 권한으로 예수님의 처형을 승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손으로는 책임을 씻어 내려고 하지만, 총독의 권한으로는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뒤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줍니다. 마태는 그가 책임을 벗었다고 판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선언했다고 기록할 뿐입니다.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지겠습니다」

모여 있던 백성이 모두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지겠습니다.」마태복음 27:2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각별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말씀은 유대 민족 전체가 예수님의 죽음에 영원한 책임을 진다는 주장에 이용되어 왔고,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그러한 역사적 사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빌라도 앞에 모인 무리입니다. 원문은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강한 표현을 쓰지만, 그것을 역사상 모든 유대인, 당시 살아 있던 모든 유대인, 또는 이후 세대의 모든 유대인에게 적용할 근거는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이셨고, 열두 제자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또한 이 장에서 실제 처형을 승인한 사람은 로마 총독 빌라도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로마 군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군중의 선언을 한 민족 전체의 영구적인 죄책으로 확대하는 것은 본문의 구체적인 사건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그렇다고 이 선언의 무게를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다만 본문은 그들이 실제로 어떤 처벌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 선언 자체가 미래 모든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독자는 이 말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가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쏟아진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26:28).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책임을 말하지만, 군중이 그 용서를 의도했다거나 이미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군중의 선언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이미 그 죽음의 의미를 밝혔기 때문입니다.

이제 빌라도는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넘깁니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풀려났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십자가를 향해 끌려가십니다.

조금 더 깊이

다른 복음서에도 비슷한 관례가 등장하지만, 유월절마다 총독이 군중의 요청에 따라 죄수 한 명을 풀어 주었다는 특정 관례는 복음서 밖의 독립적인 자료에서 직접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것을 로마 행정에서 널리 시행한 확립된 제도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16–17절의 「예수 바라바」는 번역의 바탕이 된 원문이 채택한 읽기이고, 단순히 「바라바」라고 기록한 사본들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원래 마태의 표현이었는지는 본문비평의 논쟁점이며, 「예수 바라바」를 지지하더라도 역사적 바라바의 실제 이름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이 당시 실제 이름으로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25절의 원문에는 동사가 없이 그의 피가 자신들과 자식들에게 있다는 표현만 있어서, 이를 바람으로 풀지 선언으로 풀지는 번역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두루새김은 군중의 말에서 피가 가리키는 뜻을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풀어, 선언으로 옮겼습니다.

병사들의 왕 — 조롱으로 준비된 즉위식

마태복음 27:27–37 본문 →

왕의 옷, 왕관, 지팡이

총독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총독이 머무는 건물로 데려가서 온 부대의 군인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옷을 벗기고 붉은 겉옷을 입힙니다.

가시로 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는 갈대를 쥐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조롱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아, 만세!」마태복음 27:29 · 두루새김

붉은 겉옷은 왕의 화려한 옷을 흉내 내고, 가시관은 왕관을 대신하며, 갈대는 통치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지팡이를 흉내 냅니다. 형식만 보면 왕을 맞이하는 의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왕에게 존경을 표하는 동작을 흉내 내면서 왕이라 불리는 사람의 힘없는 모습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군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왕으로 소개했습니다. 동방에서 온 이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을 찾았고(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왕에 관한 스가랴의 예언과 연결되셨으며(21:5), 자신이 영광 가운데 왕좌에 앉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31).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예수님에 관한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폭력이 덜 잔인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거듭 때립니다. 마태는 왕권의 역설을 드러내면서도 예수님께 가해진 모욕을 지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모욕당하고 계십니다.

강제로 십자가를 진 사람

군인들은 조롱을 마친 뒤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길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구레네는 오늘날 리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던 북아프리카의 도시로, 그곳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누군가 일정한 거리를 가도록 강제로 시키거든 그와 함께 두 배의 거리를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5:41).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로마 군인들에게 끌려가시고, 그 군인들은 길에서 만난 사람을 강제로 부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마태는 시몬을 용감한 제자의 본보기로 묘사하지 않고, 강제로 일을 맡게 된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고,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름만 소개된 한 사람에게 강제로 맡겨집니다.

골고다 — 왕의 죄목이 기록되다

사람들은 「해골터」라는 뜻의 골고다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주지만, 예수님께서는 맛을 보신 뒤 마시려 하지 않으십니다. 「쓸개즙」은 시편 69:21의 고난받는 시인이 음식과 음료에 관해 적대적인 대우를 받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마태는 십자가형의 신체적 과정이나 고통의 정도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군인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자신의 옷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뉘고 제비 뽑힌다고 탄식하는 시편 22:18의 고난받는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군인들은 거기 앉아 예수님을 지키고, 머리 위에 죄목을 적은 글을 붙입니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죄목을 적은 글을 붙였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 예수다.」마태복음 27:37 · 두루새김

그들은 예수님을 왕처럼 꾸며 조롱했습니다. 이제 십자가 위에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글이 붙습니다.

로마의 처형 장소에서 왕이라는 칭호는 죄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독자는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왕이 왜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 물음을 다음 장면에서 더욱 날카롭게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5:41의 「강제로 시키다」와 27:32의 「강제로」는 원문에서 같은 동사로, 공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람에게 운송이나 이동 등의 의무를 강제로 지우는 일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태가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연결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같은 동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강제 동원의 현실이 수난 장면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게 합니다. 본문은 시몬이 어떤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왔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쓸개즙과 옷 나눔 장면에서 마태는 시편을 직접 인용한다고 표시하지 않지만, 시편의 언어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예수님의 고난과 시인의 탄식을 연결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요구

마태복음 27:38–44 본문 →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사람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강도 두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는 자신의 두 아들이 예수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20:20–21). 20장에서는 왕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요청했고 여기서는 로마의 처형이 묘사되므로 두 자리가 정확히 같은 의미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나란히 읽으면 강한 대조가 생깁니다. 마태는 이제 왕이라 불리시는 예수님께서 두 처형당하는 사람 사이에 달려 계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왕의 자리가 그들이 기대했던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첫 번째 조롱 — 스스로를 구원하여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성소를 무너뜨리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 자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 자신을 구해 보아라!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복음 27:40 · 두루새김

성소를 무너뜨리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는 말은 이미 공회 앞에서 예수님께 불리한 증언으로 사용되었습니다(26:61). 이제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은 그 말을 조롱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은 광야의 시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시험하는 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만들거나 성전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4:3, 6). 두 장면은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질문이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고통을 피함으로써 증명되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십자가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앞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간청하시면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를 세워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26:53). 자신을 지킬 다른 길이 없어서 붙잡히신 것이 아니라고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은 예수님께 내려오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남들은 구했으면서 자기는 구할 수 없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도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남들은 구했으면서 자기는 구할 수 없군. 이스라엘의 왕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겠어.」마태복음 27:42 · 두루새김

남들을 구했다는 말은 독자가 이미 본 사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고, 귀신 들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으며, 굶주린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내려오지 않으시는 것을 내려오실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20:28; 26:28). 그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단순히 힘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내려오신다면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죽음의 길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하실 수 없다고 비웃지만, 독자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한 죽음의 길을 걷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신다면」

지도자들의 조롱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어.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신다면 지금 구해 주셔야지. 자기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했잖아.」마태복음 27:43 · 두루새김

이 말은 시편 22편과 매우 가깝습니다. 시편 22편에서 극심한 고난 속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을 두고,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니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 보시라고 조롱합니다(시편 22:7–8). 마태는 그와 비슷한 말을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입에 둡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뻐하신다면 반드시 지금 예수님을 구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두 차례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3:17; 17:5). 그 선언을 기억하는 독자는 지금 눈앞의 고난 때문에 그 관계가 무효가 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구해 내지 않으실까요?

마태는 그 질문에 즉시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데려갑니다.

어둠 속의 외침 —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태복음 27:45–50 본문 →

정오에 어둠이 내리다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내렸습니다.마태복음 27:45 · 두루새김

빛이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어둠이 내린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죽음을 평범한 처형 사건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어둠은 때때로 하나님의 심판과 개입을 나타냅니다. 아모스 8:9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의를 심판하시며 대낮에 해가 지게 하고 밝은 날에 땅을 어둡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둠이 계속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시편 22편의 첫 구절

오후 세 시쯤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마태복음 27:46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시편 22:1의 첫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나뉘는 장면은 시편 22:18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흔드는 장면은 22:7을, 하나님이 예수님을 기뻐하신다면 구해 주셔야 한다는 조롱은 22:8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마태는 십자가 처형의 여러 장면에 시편 22편의 언어를 배치했고, 이제 예수님께서 직접 그 시편의 첫 구절을 외치십니다. 이 말씀은 갑자기 나타난 고립된 문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버림받으셨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믿음의 고백인가, 실제 버림받음의 고통인가?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에는 서로 다른 강조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시편 22편 전체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시편 22편은 깊은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뒤로 갈수록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고백과 찬양으로 이어집니다(22:22–31). 그러므로 첫 구절을 부르신 것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해석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경험하신 버림받음의 고통을 강조합니다. 시편을 인용하셨다는 사실이 그 말의 고통스러운 의미를 약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실제 고통은 없었지만 성경 말씀을 암송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본문이 전하는 절규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두 강조점은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시편 22편 자체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듯한 고통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함께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 순간에 삼위일체 안에서 존재 자체가 어떻게 분리되는 경험을 하셨는지까지 이 한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그런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두 번이나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관계가 끝났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께 자신이 왜 버림받으셨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듯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이것이 시편 22편의 탄식이 지닌 긴장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 외침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들은 사람들은 「엘리 엘리」라는 소리를 엘리야의 이름과 연결해서 듣고,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정말 잘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조롱하려고 그런 말을 했는지 마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서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해 주셔야 한다고 조롱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엘리야가 예수님을 구하러 오는지 지켜보자고 말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신 뒤 숨을 거두셨습니다.마태복음 27:50 · 두루새김

마태는 예수님의 마지막 소리를 기록하면서 그 내용은 밝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다른 마지막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장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그 내용을 끌어와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야기는 십자가 주변에서 성소와 무덤들로 옮겨갑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은 45절의 시간을 「여섯째 시부터 아홉째 시까지」라고 말하는데, 당시 일반적인 낮 시간 계산으로 대략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에 해당하므로 두루새김은 그렇게 옮겼습니다. 마태는 이 어둠이 어떤 자연현상으로 발생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를 특정한 일식이나 기상현상으로 확정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섭니다. 「온 땅」이 지리적으로 정확히 어느 범위까지를 가리키는지도 본문에서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마태가 아모스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낮에 내리는 어둠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구약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찢어진 휘장과 열린 무덤 — 예수님의 죽음이 일으킨 변화

마태복음 27:51–54 본문 →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진 휘장

그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져 두 조각이 되었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습니다. 무덤들이 열리고, 죽었던 성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의 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마태복음 27:51–52 · 두루새김

독자의 시선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성소로 옮겨갑니다.

구약의 성막에는 지성소 앞의 안쪽 휘장과 입구의 가림막이 있었습니다(출애굽기 26:31–37). 이 휘장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람이 그분께 나아가는 일의 제한을 보여 주는 경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시자 그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집니다. 이 표현은 사람이 아래에서부터 찢는 장면과 대조되므로 하나님의 행동을 암시하는 것으로 흔히 이해되지만, 마태는 누가 직접 휘장을 찢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휘장이 찢어진 뜻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읽힙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해석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다고 설명하는 히브리서 9–10장과 연결됩니다. 다만 히브리서는 후대의 신학적 설명이며, 마태가 여기서 그 해석을 직접 풀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는 기존 성전 질서에 대한 심판을 뜻한다는 해석으로, 예수님께서 앞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셨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24:2).

두 견해는 반드시 배타적이지 않아 함께 읽는 것도 가능하지만, 어느 하나를 마태의 유일한 의도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실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26:65). 이제 그들이 모독자로 판단하여 죽인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집니다.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짝지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대제사장의 판결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 대조입니다.

앞서 사람들은 성전 금고에 넣을 수 있는 돈과 넣을 수 없는 돈을 구별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지키려 했던 성소의 휘장이 찢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람들이 통제할 수 있는 종교적 사건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무덤이 열리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죽음 뒤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기록하지만, 마태는 지진과 바위의 갈라짐, 무덤의 열림, 성도들의 부활까지 덧붙입니다. 그리고 살아난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뒤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27:53).

무덤이 열리고 성도들이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기록되지만, 그들이 도시로 들어간 일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일어난 것으로 서술됩니다. 이 장면은 실제로 일어난 특별한 부활 사건의 기록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오는 마지막 때의 변화를 묵시문학의 언어와 상징으로 표현한 장면으로, 또는 마태가 사건의 순서를 압축하거나 앞당겨 서술한 것으로 읽힙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이 시간 간격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본문에서 그들이 누구였는지, 얼마나 오래 죽어 있었는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의 부활한 몸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워서는 안 됩니다.

아직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라고 여겨지는 자리에서 생명의 사건이 등장하고, 독자는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장면에서 미리 보게 됩니다.

백부장의 고백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감시하던 사람들은 지진과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마태복음 27:5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문제로 심문받으셨고, 빌라도 앞에서는 유대인의 왕이신지 질문받으셨습니다. 군인들은 왕의 옷과 가시관을 씌워 조롱했고,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내려오시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고백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처음부터 따랐던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감시하던 로마의 백부장과 군인들입니다.

이 말이 기독교 신앙의 모든 내용을 이해한 완전한 고백이었는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의 이야기 안에서 이 고백이 갖는 의미는 선명합니다.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내려오시면 믿겠다고 했지만, 이 군인들은 예수님께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죽으신 뒤에 예수님의 정체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십자가를 피하시는 능력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마태는 51절을 독자의 주의를 끄는 「보아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두루새김은 예수님의 죽음에 이어 일어난 일을 「그때」로 연결했습니다. 52–53절의 시간 차이는 오래전부터 해석상의 어려움으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시간 간격을 마태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서로 연결하여 묘사한 결과로 이해하는 해석은 특히 에스겔 37장의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환상과 주제적으로 연결합니다.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은 본래 포로와 절망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새 생명과 회복을 약속하시는 것인데, 마태복음에서는 죽었던 성도들이 살아나는 장면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죽음의 지배를 깨뜨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성경 전체의 주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멀찍이 서 있던 여자들 — 누가 마지막까지 남았는가?

마태복음 27:55–61 본문 →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

그곳에는 멀리서 지켜보던 여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오며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마태복음 27:55 · 두루새김

앞에서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이 계속 들렸습니다. 이제 마태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이 여자들은 갑자기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구경꾼이 아닙니다.

마태는 그들의 이름도 기록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입니다.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는 앞서 예수님께 자기 아들들이 예수님의 나라에서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던 사람입니다(20:20–21). 그러나 이제 그녀가 보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모습이고,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제자들이 아니라 함께 처형된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마태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영광을 기대했던 사람이 이제 고난의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28). 이제 마태는 예수님을 섬기던 여자들을 십자가의 목격자로 소개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열두 제자만이 아니었습니다.

부유한 제자 요셉

저녁이 되자 아리마대 출신인 요셉이라는 부자가 왔습니다. 그도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마태복음 27:57 · 두루새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고, 마태가 이전에 이름을 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청하자, 빌라도는 시신을 내주라고 명령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 깨끗한 아마포로 감싸고, 바위를 깎아 마련해 둔 자기의 새 무덤에 놓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부유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19:16–22). 그는 예수님께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부유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등장하여, 자신에게 있는 것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사용합니다.

앞서 베다니의 여자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장례를 준비하는 의미로 향유를 부었다면, 이제 요셉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실제 장례를 치릅니다. 두 사람 모두 앞선 이야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인물은 아니었지만, 마태는 그들이 한 일을 기록합니다.

무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들

요셉은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고 떠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그곳에 남아 무덤 맞은편에 앉아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7:61 · 두루새김

앞서 여자들은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두 여자는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놓였는지 지켜보며 무덤 맞은편에 앉아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거기 있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마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공회의 심문도 끝났습니다.

군인들의 조롱도 끝났습니다.

십자가 아래 사람들의 외침도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

요셉은 장례를 마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두 여자는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무덤 안에 있고, 큰 돌이 무덤 입구를 막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그 앞에 앉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3:9에는 고난받는 종의 죽음과 무덤, 부유한 사람에 관한 표현이 등장하여, 요셉의 장례 이야기를 그 말씀과 연결해 읽는 전통이 있습니다. 다만 이사야 53:9의 원문 표현과 번역에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으며, 마태 역시 이 장면을 그 예언이 직접 이루어진 일이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고난받는 종의 죽음과 부유한 사람의 무덤이라는 모습은 주제적으로 연결해 읽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봉인된 무덤 — 예수님의 죽음 뒤에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계획

마태복음 27:62–66 본문 →

지도자들이 기억한 예수님의 말

27장이 여기서 끝났다면 예수님의 장례를 마친 뒤 조용히 마무리되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마지막에 한 장면을 더 기록합니다. 준비일 다음 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찾아갑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총독님, 사람들을 속이던 저자가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마태복음 27:63 · 두루새김

그들은 예수님을 여전히 「사람들을 속이던 저자」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모두 달아났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가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주장할 가능성을 걱정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참인지 살피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이 그 말씀을 믿게 될 가능성을 막는 데 있습니다.

돌을 봉인하다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경비대가 있다. 가서 너희가 아는 방법대로 단단히 지켜라.」마태복음 27:65 · 두루새김

원문에서 이 말은 문법적으로 두 방향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직설법으로 읽으면 너희에게 경비대가 있다는 뜻이고, 명령으로 읽으면 경비병을 데려가라는 뜻입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뜻으로 옮겼지만, 경비대가 종교 지도자들에게 속한 병력이었는지 빌라도가 로마의 경비병을 내주었는지는 이 한마디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경비대의 정확한 소속보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들은 가서 무덤 입구의 돌에 봉인을 하고 경비병들을 세워 무덤을 단단히 지켰습니다.마태복음 27:66 · 두루새김

지도자들은 단단히 지키라고 요청하고, 빌라도도 단단히 지키라고 말하며, 그들은 실제로 무덤을 단단히 지킵니다. 그뿐 아니라 돌에 봉인을 합니다. 봉인은 무덤의 입구가 함부로 열리지 않도록 하고 누군가 그것을 건드렸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조치로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형태였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27장 앞부분에서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고, 마침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도 그들은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그들을 움직이게 합니다.

마태는 여기서 그들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음 장에서 드러날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왕은 무엇을 보여 주시는가?

마태복음 27:1–66 본문 →

마태복음 27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하는 말은 서로 다릅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고 고백하고,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며, 무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군인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짧게 대답하시고, 고발 앞에서 침묵하시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으십니다.

그 침묵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가 죄의 용서를 위하여 많은 사람에게 쏟아진다고 말씀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 길을 가시겠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 예수다」라는 글은 로마의 죄목이었지만, 독자에게는 진실한 선언으로도 읽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적을 굴복시키시기보다,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하시는 왕이십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폭력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행동의 본보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는 인간의 부정의와 폭력이 예수님께 가해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악한 행동들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좌절시키지는 못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유다에게 알아서 하라고 말했고 빌라도는 손을 씻었지만, 자신의 무죄를 선언하는 말이 실제 책임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지만, 그들이 제거하려 했던 분의 정체는 그 죽음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왕이라고 조롱하던 군인들이,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고, 이제는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무덤은 돌로 막혀 있습니다.

그 돌에는 봉인이 되어 있습니다.

경비병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신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27장은 봉인된 무덤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