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8장

이 장의 자리 · 26–28장 · 죽음과 부활

죽은 사람처럼 된 경비병들, 살아나신 예수님

마태복음 28장은 뜻밖의 역전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에는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죽은 사람의 몸이 무덤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자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됩니다.

죽은 사람을 지키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처럼 되고, 죽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만나시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던 열한 제자가 아닙니다. 무덤을 보러 온 두 여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후 열한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절하지만, 몇몇은 망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다고 선언하시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먼저 심판하거나 그들의 자격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망설임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시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자신의 권한을 밝히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보아라, 나는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있다.」

마태복음 28장은 부활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맺으시는 관계가 어떻게 새로워지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온 세상의 이야기가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928장 본문 읽기 →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이 죽은 사람처럼 되다

마태복음 28:1–4 본문 →

두 여자가 무덤을 보러 가다

마태는 부활의 아침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한 주의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살펴보러 갔습니다.마태복음 28:1 · 두루새김

두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멀찍이서 바라보았던 여자들 가운데 있었고(27:55–56),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무덤에 모셨을 때에도 그 맞은편에 앉아 있었습니다(27:61).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을 보았고, 어디에 묻히셨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무덤을 다시 찾아갑니다.

여자들은 무덤을 「살펴보러」 갑니다. 마가복음 16:1에서는 여자들이 예수님의 몸에 바르기 위해 향료를 샀다고 기록하지만, 마태는 향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덤을 열려고 준비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앞 장에서 무덤은 큰 돌로 막혔고, 경비병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여자들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는지, 실제로 들어갈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부활을 확인하려는 기대를 품고 갔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합니다.

27장의 마지막에서 무덤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예고를 기억하며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 28장의 시작에서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두 여자입니다.

한쪽은 예수님의 몸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려 했습니다. 다른 한쪽은 예수님의 몸이 놓인 자리를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도 무덤에서 실제로 무엇을 보게 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돌 위에 앉은 천사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에 갑자기 하늘의 개입이 등장합니다.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굴려 치우고 그 위에 앉았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28:2 · 두루새김

천사는 그 돌 위에 앉습니다.

사람들은 그 돌로 무덤을 닫고, 봉인하고, 경비병까지 세웠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입구를 막아 두었던 돌이 이제 천사가 앉는 자리가 됩니다. 무덤을 막아 두려던 사람들의 조치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돌을 굴려 치웠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마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는 순간이나 무덤 밖으로 나오시는 과정은 묘사하지 않고, 천사가 나중에 하는 말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오히려 돌이 치워진 뒤 일어나는 일은 여자들이 「와서 그가 누워 있던 자리를 보아라」라는 초대를 받는 것입니다(28:6). 이 흐름을 따라 읽으면 돌을 굴려 치운 일은 예수님을 위한 출구보다, 사람들이 무덤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일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마태는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태가 무덤이 열린 일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을 같은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부활 자체는 독자에게 직접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는 부활이 일어난 뒤 달라진 무덤의 모습과 그것을 알리는 천사의 말을 보게 됩니다.

땅은 흔들리고 경비병들도 떨다

천사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의 변화산에서도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여기서 빛나는 존재는 예수님이 아니라 천사이지만, 하늘의 영광이 사람에게 드러날 때 빛과 흰옷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두 장면은 연결됩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마태복음 28:4 · 두루새김

땅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경비병들도 흔들렸습니다.

「죽은 사람처럼」의 「죽은 사람」(νεκρός)은 바로 뒤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할 때 같은 낱말로 되풀이됩니다(28:7). 같은 낱말이 서로 반대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경비병들은 살아 있었지만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지키던 무덤은 열렸고, 그것을 지키던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앞 장에서 사람들은 무덤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세우면 예수님의 몸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사람이 죽음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조치가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 앞에서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제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그 첫마디부터 경비병들과 여자들의 운명이 갈립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지진」과 4절의 「떨다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마태는 땅이 흔들리는 사건과 경비병들이 떨리는 사건을 언어적으로 연결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앞에 그들이 통제하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가 말한 대로」 — 빈 무덤이 전하는 소식

마태복음 28:5–8 본문 →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찾고 있는 줄 안다.」마태복음 28:5 · 두루새김

그리스어 원문은 명령형 동사에 이미 ‘너희’라는 뜻이 있는데도 「너희는」(σύ)이라는 대명사를 따로 써서 강조합니다. 경비병들은 천사를 두려워하여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같은 사건 앞에서 그 의미를 듣도록 초대받습니다.

천사는 부활의 소식을 전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별개의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 사건이 아닙니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비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는 여기 없다. 그가 말한 대로 다시 살아났다. 와서 그가 누워 있던 자리를 보아라.」마태복음 28:6 · 두루새김

천사는 먼저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밝힌 다음에야 누워 계셨던 자리를 보라고 합니다. 무덤에 시신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 옮겼을 가능성을 비롯하여 여러 설명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바로 다음 단락에서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는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는 단순히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하며 그 선언을 「그가 말한 대로」, 곧 예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과 연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습니다(16:21; 17:23; 20:19).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천사는 예수님의 말을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천사는 예수님께서 누워 계셨던 자리를 보여 주면서, 그 자리를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이해하도록 합니다. 마태는 부활의 신앙을 무덤의 상태만을 살펴보아서 얻는 결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누구셨고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함께 기억하게 합니다.

무덤에서 제자들에게

「어서 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해라. 『예수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고, 너희보다 앞서 갈릴리로 간다. 너희는 거기서 예수를 볼 것이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었다.」마태복음 28:7 · 두루새김

여자들은 목격자에 머물지 않고 소식을 전달하도록 명령받습니다. 누구에게 전해야 할까요? 「제자들에게」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달아났습니다(26:56).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들을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겟세마네로 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두 걸려 넘어질 것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다시 살아나시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6:32). 당시 제자들은 그 말씀보다 자신들이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더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만나시겠다는 말씀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신 곳입니다(4:12–22). 그러니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신다는 약속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던 자리로 다시 부름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실패한 역사가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실패 이후에도 그들과 만나실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이 함께 있다

여자들은 두려우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려갔습니다.마태복음 28:8 · 두루새김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여자들은 여전히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크게 기뻐합니다. 죽으셨다고 알고 있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눈부신 천사를 보았고, 무덤은 열려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기뻐하며 달려갑니다. 마태는 그들의 두려움을 숨기지 않으면서, 부활의 소식이 전달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달려가는 길에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6:8의 짧은 결말과 비교하면 마태의 강조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마가의 그 장면에서는 여자들이 두려워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기록됩니다. 반면 마태는 그들이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서둘러 달려갔다고 말합니다.

「반갑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마주 나오시다

마태복음 28:9–10 본문 →

가장 놀라운 순간에 들리는 평범한 인사

그때 예수께서 여자들을 만나 말씀하셨습니다. 「반갑다.」 여자들은 다가가 예수의 발을 붙잡고 엎드려 절했습니다.마태복음 28:9 · 두루새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천사가 부활을 선언했고, 여자들은 두려움과 기쁨 속에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건네시는 첫마디는 일상적인 인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평범함이 장면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원문의 카이레테(χαίρω)는 글자 그대로는 기뻐하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일상적인 만남에서 쓰는 인사말이기도 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 여자들이 「크게 기뻐하며」 달려갔다고 할 때의 ‘기쁨’과 같은 어근이어서 언어적 연결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 인사를 반드시 「기뻐하여라」라는 새로운 명령으로 옮길 필요는 없기에, 두루새김은 일상적인 인사말인 「반갑다」로 옮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던 밤에 유다도 예수님께 다가와 같은 동사의 인사말을 건넸습니다(26:49). 그러나 유다의 입맞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호였습니다. 한쪽에서는 친밀한 인사가 배반의 수단이 되었고, 다른 쪽에서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친밀한 인사로 사람들을 맞이하십니다.

더욱이 마태는 여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발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원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맞으러 나오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이 갈릴리까지 가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그들이 가는 길에 먼저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의 발을 붙잡은 여자들

여자들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지 않습니다. 다가가서 발을 붙잡습니다. 마태는 이 장면에서 몸에 직접 닿는 행동을 분명히 기록합니다. 부활이 여자들의 마음속 깨달음이나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기억으로만 묘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동방에서 온 이들은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절했고(2:11),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뒤 배에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께 절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14:33). 조금 뒤에는 열한 제자들도 예수님을 보고 절합니다(28:17).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을 다시 살아 움직이시게 된 사건으로만 그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경배의 대상이 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행동을 꾸짖거나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여자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해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해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마태복음 28:10 · 두루새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갈릴리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도 천사의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내 형제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49–50). 또 마지막 심판을 설명하시면서 가장 작은 자기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행한 일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받아들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5:40).

이 말을 듣는 순간 독자는 제자들이 가장 최근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합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으며,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들의 실패를 해결하신 뒤 형제라고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충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이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면서 만나러 오라고 하십니다.

물론 마태는 그들의 배반과 부인을 매우 심각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그들과의 관계를 끝내는 마지막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렸던 과거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부르시는 말씀이 이제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은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지켜보았던 여자들입니다. 그들은 천사의 말을 들었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제자들을 향한 자신의 말씀을 맡기십니다.

조금 더 깊이

「절했습니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존경의 표시로 엎드리는 행동을 가리키기도 하고, 신에게 드리는 경배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낱말 하나만으로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마태복음에서 이 행동이 쓰이는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같은 아침, 다른 소식 — 경비병들이 퍼뜨린 이야기

마태복음 28:11–15 본문 →

무덤에서 두 방향으로 떠나는 사람들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는 동안, 경비병 가운데 몇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 대제사장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립니다. 두 집단은 같은 무덤에서 떠나 서로 다른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여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대제사장들은 경비병들의 보고를 듣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해라.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신을 훔쳐 갔어요.』」마태복음 28:13 · 두루새김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두 번째 이야기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의논과 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독자에게 직접 보여 주며, 부활에 관한 서로 다른 설명이 왜 존재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다시 등장한 은전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모여 의논한 뒤 군인들에게 은화를 많이 주었습니다.마태복음 28:12 · 두루새김

대제사장들은 유다에게 은화 서른 닢을 주고 예수님을 넘기게 했습니다(26:15). 유다가 그 돈을 돌려주자, 지도자들은 그것을 핏값이라고 부르며 성전 금고에 넣지 않았습니다(27:6).

첫 번째 돈은 예수님을 붙잡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두 번째 돈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에 맞서는 이야기를 퍼뜨리는 데 사용됩니다.

그들은 두 번 모두 함께 의논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했고, 이제 예수님의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지 의논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들의 계획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잠든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들이 정말 「잠든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면, 누가 와서 시신을 가져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마태는 이 모순을 직접 지적하지 않지만, 독자는 그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잠들었다는 이야기는 경비 임무를 맡은 사람들에게 불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이 말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면 자신들이 총독을 설득하여 걱정할 일이 없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돈뿐 아니라 안전까지 보장한 것입니다. 군인들은 은화를 받고 시킨 대로 했고, 그 이야기는 유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마태가 글을 쓰던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대목이 모든 유대인이 부활을 부인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과 부활을 전한 공동체 자체가 유대인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마태의 이야기 안에서 이 장면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빈 무덤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독자가 빈 무덤에 관한 소문만 듣도록 하지 않습니다. 무덤에서는 천사가 부활을 알렸고, 여자들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열한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오늘날까지」는 마태가 글을 쓰던 때를 가리키는 표현이지, 그 이야기가 현재까지 같은 형태로 퍼져 있음을 입증하는 말은 아닙니다. 또 그 반대 주장이 실제 역사에서 언제, 어떤 경로로 생겨났는지와 경비병 이야기가 다른 자료로 얼마나 확인되는지는 이 본문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당시의 논쟁을 반영한 글로 읽을 수 있다는 점과, 그 개별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갈릴리의 산 — 절하면서도 망설이는 제자들

마태복음 28:16–17 본문 →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인가?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가라고 일러 두신 갈릴리의 산으로 갔습니다.마태복음 28:16 · 두루새김

유다가 사라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부르셨지만, 제자 공동체에는 여전히 열둘 가운데 하나가 없는 현실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기 시작하셨고(4:17),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으며(4:18–22),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셨습니다(4:23). 그 사역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제자들에게 이제 새로운 사명이 주어집니다.

마태는 만남의 장소를 「산」이라고 기록합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 앉아 제자들을 가르치셨고(5:1–2), 변화산에서는 세 제자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17:1–8). 이 산이 그 가운데 어느 산인지 마태는 밝히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산에서 제자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듣습니다.

절했지만 망설였다

그들은 예수를 보고 절했습니다. 그러나 몇몇은 망설였습니다.마태복음 28:17 · 두루새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제자들 가운데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망설였는지는 읽기가 갈립니다. 한 읽기는 그리스어 표현을 앞의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구별하는 말로 보아, 모두 절했지만 그 가운데 몇몇이 망설였다고 읽습니다. 두루새김의 「몇몇은」이 이 읽기를 따릅니다. 다른 읽기는 같은 표현을 앞선 주어 전체로 받아, 제자들이 절하면서도 동시에 망설였다고 읽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믿음과 망설임, 두려움과 기쁨이 한 사람이나 한 집단 안에 함께 나타난다는 점이 근거입니다. 두 읽기 모두 문법과 문맥의 근거가 있어, 그리스어만으로 논쟁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습니다.

「망설였습니다」의 동사 디스타조(διστάζω)는 마태복음에 한 번 더 나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 빠져 갈 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며 왜 망설였느냐고 물으신 장면입니다(14:28–31). 그렇게 보면 이 망설임은 부활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만이 아니라, 믿음과 두려움이 얽혀 있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망설였는지 마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망설임의 이유보다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28:18). 예수님께서는 망설이는 제자들을 멀리서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다가오십니다.

마태는 망설임이 사라졌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제 하실 말씀의 근거는 제자들의 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의 권한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 —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언

마태복음 28:18 본문 →

누구의 권한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는가?

예수께서 다가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이 내게 주어졌다.」마태복음 28:1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먼저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에게 어떤 권한이 주어졌는지 말씀하십니다. 「주어졌다」는 수동형이라 누가 주었는지는 문장에 나타나지 않지만, 마태복음의 문맥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넘겨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11:27).

대제사장 앞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을 지니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64). 이 선언은 다니엘 7:13–14와 강하게 연결됩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옛적부터 계신 분 앞에서 모든 민족과 백성을 아우르는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고, 그의 나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시험하는 자는 높은 산에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자신에게 절하면 그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4:8–9). 예수님께서는 그 제안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갈릴리의 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절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가 두 산을 의도적으로 대응시켰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란히 읽으면 차이가 보입니다. 광야에서는 잘못된 대상에게 절하여 권력을 얻으라는 유혹이 있었고, 마지막 산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지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받으신 권한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권한으로 하시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가 가리키는 것

19절은 「그러므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기 때문에 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충분히 강해졌거나 완벽한 믿음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열한 명이고, 그 가운데에는 망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자기 권한을 세우려고 세상에 나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권한을 받으신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시는 일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 마지막 명령의 중심

마태복음 28:19 본문 →

명령은 네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복음 28:19 · 두루새김

원문에서 문장의 중심이 되는 명령형 동사는 하나, 「제자로 삼아라」(μαθητεύω)입니다. 「가서」(πορεύομαι), 「세례를 주고」(βαπτίζω), 「가르쳐라」(διδάσκω)에 해당하는 말은 모두 분사로, 이 중심 명령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어떤 소식을 알리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었지만, 때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높은 자리를 두고 다투었고,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께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은 새로운 종교에 속한 사람의 수를 늘리는 일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주고, 지키도록 가르치다

세례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그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줍니다. 세 분이 함께 언급되지만 「이름」이라는 말은 단수로 쓰여, 세 분의 이름이 하나의 세례 행위 안에서 함께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단수 명사 하나만으로 후대의 삼위일체 교리가 다루는 존재와 위격의 모든 관계를 직접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이 자리에서 신학적 정의를 제시하기보다, 세례를 어떤 이름으로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따라 읽어 온 독자에게 이 세 이름은 낯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왔고, 하늘에서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음성이 들렸습니다(3:16–17). 처음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보았던 관계가 마지막에는 새로운 제자들의 세례와 연결됩니다.

세례에 이어 가르침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명령하신 것을 알도록이 아니라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제자의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할까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5:44), 남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말라는 말씀(6:1),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6:33),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7:12),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16:24),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18:21–22),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22:37–40)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몇 가지 종교 의식에 한정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삶 전체와 관련됩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배웠고, 이제 그 제자들이 배운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이 가르칠 것은 자신들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모든 민족으로

그런데 이 명령에는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가 있습니다. 「모든 민족」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이방 사람들의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5–6). 가나안 여자와의 대화에서도 자신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냄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15:24). 그렇다면 마지막 명령은 앞선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일까요?

마태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1:1),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경계 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등장하고(2:1–12),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동쪽과 서쪽에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시고(8:10–12), 가나안 여자의 믿음도 칭찬하십니다(15:28). 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도록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14).

마지막 명령은 지금까지 조금씩 드러났던 모든 민족을 향한 전망이 명확한 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약속을 토대로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다만 그 메시아의 권한은 한 민족의 경계에 갇히지 않습니다.

다니엘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모든 민족과 백성이 섬기는 권세를 받습니다. 이제 그 권한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권한의 범위와 제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의 범위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을 「주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셨고(7:21), 말씀을 듣고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가르치셨습니다(7:24–27). 마지막 명령의 「제자로 삼아라」와 「지키도록 가르쳐라」는 이 산상설교의 결말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니 교회의 사명을 지식을 전달하는 일로 축소할 수 없고, 세례만 주면 제자를 삼는 일이 완성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세례와 가르침이 함께 제자로 삼는 일을 이룹니다. 가르침은 끝없이 새로운 규정을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명령하신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지키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은 너무 큰 짐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스승을 버리고 달아났고, 지금도 그 가운데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는 열한 명에게 모든 민족을 맡기시기 때문입니다. 근거가 제자들 자신에게 있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근거,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또 하나의 약속을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세 분사 가운데 앞에 놓인 「가서」는 분사이지만, 문법적으로 중심 명령의 힘을 함께 받는 것으로 널리 이해됩니다. 그래서 분사라는 이유만으로 ‘가라’는 요청에 명령의 힘이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뒤따르는 두 분사, 곧 「세례를 주면서」와 「가르치면서」는 제자로 삼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설명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표현은 초기 기독교 문헌인 《디다케》 7장에서도 발견되어, 이 표현이 초기 기독교의 세례 실천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본문 밖의 자료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 너희와 함께 있다」 —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

마태복음 28:20 본문 →

명령 뒤에 이어지는 약속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한 문장이 더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보아라, 나는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있다.」마태복음 28:20 · 두루새김

「함께 있다」는 현재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 훗날 다시 함께하시겠다고만 말씀하지 않고, 지금 함께 계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날마다」(ἡμέρα)는 원문에서 ‘모든 날들’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날이나 제자들이 성공한 날에만 함께하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 약속을 더 이상 고난이나 실패가 없을 것이라는 보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16–23; 24:9–13). 함께 계신다는 말씀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의 함께하심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처음에 주어진 이름, 마지막에 들리는 목소리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며 이사야 7:14를 인용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1:23) 그리고 그 뜻을 풀어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였습니다.

마지막에는 「나는 … 너희와 함께 있다」입니다.

이 두 문장은 마태복음 전체를 감싸는 관계를 이룹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되었고, 마지막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그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이 구조를 전제하면서, 그 함께함이 마지막 심판까지 이어진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처음의 약속은 아기의 탄생과 연결되었습니다. 그 아기는 자라서 가르치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러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말씀은 처음의 임마누엘 약속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함께 계시는가?

마태는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실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사람 안에 머무르시는 일이나 교회 안에 함께 계시는 일을 다른 신약 본문처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설명은 다른 성경 본문들과 함께 신학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지만, 마태복음 28장 자체가 제공하는 내용과 구별해야 합니다.

마태가 분명하게 기록하는 것은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에 머물라고 하지 않으시고 모든 민족에게 가라고 하시며, 그들이 어디로 가든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가 함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권한과 함께 계심이 한 지역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약속의 수신자는 누구인가?

「너희」의 직접적인 대화 상대는 열한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렇게 제자가 된 사람들도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하심은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명령과 약속을 열한 제자 개인의 생애에만 제한하기는 어렵고, 그 공동체를 통해 계속되는 사명까지 포함하는 전망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본문이 후대의 모든 신자 개인에게 이 약속이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약속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제자 삼는 사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은 왜 이 장면에서 끝나는가

마태복음 28:1–20 본문 →

마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승천에 관한 서술이 있지만, 마태복음은 갈릴리의 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로 갔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명령과 약속을 남겨 놓고 끝납니다.

복음서 내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베드로의 고백(16:16), 대제사장의 심문(26:63), 빌라도의 물음(27:11), 십자가 아래의 조롱(27:40)이 그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들을 다시 논쟁하지 않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죽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 권한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을 자신들의 뜻에 복종시키라고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자신을 부인하고 따르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가르치는 사람이 예수님의 권한을 자기 권력으로 바꾸어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면, 마지막 명령의 중심을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예수님의 권한 아래 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죽은 사람처럼 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태는 이 장 내내 사람들이 얼마나 완벽하게 반응했는지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시고, 실패한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망설이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사명은 자신들의 완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 주어진 권한에 근거하고, 예수님의 함께하심으로 이어집니다.

마태는 제자들이 그 뒤에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시 충성을 맹세했는지도, 산에서 내려가는 모습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남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열한 제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절했지만, 몇몇은 망설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모든 민족을 향해 가라고 말씀하시고,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남기십니다. 「보아라, 나는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보여 주지 않은 채 끝납니다.

다만 그들이 어디로 가든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갈릴리의 산 위에 남겨 둡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