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8장
이 장의 자리 · 26–28장 · 죽음과 부활
죽은 사람처럼 된 경비병들, 살아나신 예수님
마태복음 28장은 뜻밖의 역전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에는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죽은 사람의 몸이 무덤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천사가 나타나자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됩니다.
죽은 사람을 지키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처럼 되고, 죽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만나시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던 열한 제자가 아닙니다. 무덤을 보러 온 두 여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후 열한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절하지만, 어떤 이들은 망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받으셨다고 선언하시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먼저 심판하거나 그들의 자격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망설임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시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자신의 권위를 밝히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나는 시대의 끝맺음까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있다.」
마태복음 28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맺으시는 관계가 어떻게 새로워지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온 세상의 이야기가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이 죽은 사람처럼 되다
두 여자가 무덤을 보러 가다
마태는 부활의 아침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밝아 올 때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살펴보러 갔다.마태복음 28:1 · 본디새김
이 두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멀찍이서 바라보았던 여자들 가운데 있었고(27:55–56),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무덤에 안치했을 때에도 그 맞은편에 앉아 있었습니다(27:61).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을 보았고, 어디에 묻히셨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무덤을 다시 찾아갑니다.
여자들은 무덤을 「살펴보러」 갑니다. 마가복음 16:1에서는 여자들이 예수님의 몸에 바르기 위해 향료를 구입했다고 기록하지만, 마태는 향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마태가 명시하는 목적은 무덤을 보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무덤은 큰 돌로 막혔고, 경비병들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부활을 확인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갔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합니다.
27장의 마지막에서 무덤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예고를 기억하며 무덤을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 28장의 시작에서 무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두 여자입니다. 한쪽은 예수님의 몸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려 했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의 몸이 놓인 자리를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도 무덤에서 실제로 무엇을 보게 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돌 위에 앉은 천사
보아라, 큰 지진이 일어났다.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다가가 돌을 굴려 치우고 그 돌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마태복음 28:2 · 본디새김
천사는 그 돌 위에 앉습니다.
사람들은 그 돌로 무덤을 닫아 두었습니다.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까지 세웠습니다. 무덤의 입구를 막아 두었던 그 돌이 이제 천사가 앉는 자리가 됩니다. 무덤을 봉쇄하려던 인간의 조치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돌을 굴려 치웠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마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시는 순간이나 무덤 밖으로 나오시는 과정은 묘사하지 않고, 천사의 말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오히려 돌이 치워진 뒤 일어나는 일은 여자들이 예수님께서 누워 계셨던 자리를 확인하도록 초대받는 것입니다(「이리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자리를 보아라」, 28:6). 이 흐름을 따라 읽으면 돌을 굴려 치운 일은 예수님을 위한 출구를 마련하는 일보다, 사람들이 무덤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일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마태는 그 목적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무덤을 열었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마태는 같은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부활 자체는 독자에게 직접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는 부활이 일어난 뒤 달라진 무덤의 모습과 그것을 알리는 천사의 말을 보게 됩니다.
땅은 흔들리고 경비병들도 떨다
천사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같이 희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의 변화산에서도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여기서 빛나는 존재는 예수님이 아니라 천사이지만, 하늘의 영광이 인간에게 드러날 때 빛과 흰옷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두 장면은 연결됩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떨었고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마태복음 28:4 · 본디새김
땅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경비병들도 흔들렸습니다.
「죽은 사람처럼」의 ‘죽은 사람들’이라는 말은 바로 뒤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할 때 되풀이됩니다(28:7). 같은 낱말이 서로 반대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경비병들은 살아 있었지만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앞 장에서 사람들은 무덤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세우면 예수님의 몸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지키던 무덤은 열렸고, 그것을 지키던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사람이 죽음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조치가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 앞에서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제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그 첫마디부터 경비병들과 여자들의 운명이 갈립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지진」(세이스모스)과 4절의 「떨었고」(에세이스테산)는 그리스어에서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태는 땅이 흔들리는 사건과 경비병들이 떨리는 사건을 언어적으로 연결합니다. 또 「죽은 사람처럼」에 쓰인 말은 네크로이, 곧 ‘죽은 사람들(νεκρός)’이며, 28:7의 「죽은 이들 가운데서」에서 같은 낱말이 되풀이됩니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 빈 무덤이 전하는 소식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천사가 대답하여 여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고 있는 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8:5 · 본디새김
그리스어 원문은 명령형 동사에 이미 2인칭 복수의 의미가 있는데도 「너희는」(σύ)이라는 대명사를 따로 사용합니다.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경비병들은 천사를 두려워하여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여자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합니다. 두 집단 모두 놀라운 사건 앞에 있지만, 여자들은 그 사건의 의미를 듣도록 초대받습니다.
천사는 부활의 소식을 전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전혀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고 말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바로 그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비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이리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자리를 보아라.」마태복음 28:6 · 본디새김
천사는 먼저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밝힌 다음에야 누워 계셨던 자리를 보라고 합니다. 이 순서는 중요합니다. 무덤에 시신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 옮겼을 가능성을 비롯하여 여러 설명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바로 다음 단락에서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는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가 전하는 부활의 소식은 단순히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진술이 아닙니다. 천사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하고, 그 선언을 예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과 연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습니다(16:21; 17:23; 20:19).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천사는 예수님의 말을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예수님께서 누워 계셨던 자리를 보여 주면서, 그 자리를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이해하도록 합니다. 마태는 부활의 신앙을 무덤의 상태만을 관찰해서 얻는 결론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셨고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함께 기억하게 합니다.
무덤에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어서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여라.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보아라, 그가 너희보다 앞서 갈릴리로 가신다. 거기서 너희가 그를 볼 것이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일러 주었다.」마태복음 28:7 · 본디새김
여자들은 단순한 목격자에 머물지 않고 소식을 전달하도록 명령받습니다. 누구에게 전해야 할까요? 「그의 제자들」에게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달아났습니다(26:56).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들을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부르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먼저 가신다는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일입니다. 겟세마네로 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두 걸려 넘어질 것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다시 살아나시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6:32). 당시 제자들은 그 말씀보다 자신들이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더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만나시겠다는 말씀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신 곳입니다(4:12–22).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신다는 약속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시작했던 자리로 다시 부름받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고 마태가 이 만남을 제자들의 과거를 지우는 사건이라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실패한 역사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실패 이후에도 그들과 만나실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이 함께 있다
여자들은 두려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무덤에서 서둘러 떠나 예수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려갔다.마태복음 28:8 · 본디새김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여자들은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동시에 크게 기뻐합니다. 그들은 죽으셨다고 알고 있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눈부신 천사를 보았고, 열린 무덤 앞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과 기쁨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완전히 정리된 뒤에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마태는 두려움을 숨기지 않으면서, 부활의 소식이 전달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달려가는 길에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6:8의 짧은 결말과 비교하면 마태의 강조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마가의 그 장면에서는 여자들이 두려워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기록됩니다. 반면 마태는 그들이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서둘러 달려갔다고 말합니다.
「안녕하냐?」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마주 나오시다
가장 놀라운 순간에 들리는 평범한 인사
보아라, 예수가 그들을 맞으러 나와 말했다. 「안녕하냐?」 그들은 다가가 그의 발을 붙잡고 그 앞에 엎드려 절했다.마태복음 28:9 · 본디새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선언했고, 여자들은 두려움과 기쁨 속에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건네시는 첫마디는 특별한 신학적 선언이 아니라 일상적인 인사입니다. 그 평범함이 장면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이 인사는 앞 장면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던 밤에 유다는 예수님께 다가와 「안녕하십니까, 랍비」라고 인사했습니다(26:49). 거기서도 같은 동사의 인사말이 사용되었지만, 유다의 입맞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호였습니다.
한쪽에서는 친밀한 인사가 배반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친밀한 인사로 사람들을 맞이하십니다.
마태는 여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발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맞으러 나와」 만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이 갈릴리까지 가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그들이 가는 길에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의 발을 붙잡은 여자들
여자들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기만 하지 않습니다. 다가가 발을 붙잡습니다. 마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이 장면에서 물리적인 접촉을 분명히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여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깨달음이나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기억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동방에서 온 이들은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절했고(2:11),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뒤 배에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께 절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14:33). 조금 뒤에는 열한 제자들도 예수님을 보고 절합니다(28:17).
마태는 예수님께서 경배의 대상이 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행동을 꾸짖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여자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내 형제들에게 전하여라」
그때에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마태복음 28:10 · 본디새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갈릴리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도 천사의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그의 제자들」이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는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49–50). 또 가장 작은 자기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행한 일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받아들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5:40).
이 말을 듣는 순간 독자는 제자들이 가장 최근에 무엇을 했는지 기억합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들의 실패를 해결하신 뒤 형제라고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다시 충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이지 않으십니다. 마태는 그들의 배반과 부인을 매우 심각하게 기록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 실패가 그들과의 관계를 끝내는 마지막 말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렸던 과거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부르시는 말씀이 이제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소식을 여자들에게 맡기십니다. 마태가 기록한 부활의 첫 증언을 제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은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지켜보았던 여자들입니다. 그들은 천사의 말을 들었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안녕하냐?」의 원문 카이레테는 문자적으로는 기뻐하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일상적인 만남에서 사용하는 인사말이기도 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 여자들이 「크게 기뻐하며」 달려갔다고 할 때의 ‘기쁨’(카라)과 같은 어근이어서, 그리스어 본문에는 기쁨이라는 말 직후에 그 말에서 발전한 인사말이 등장하는 언어적 연결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인사말을 반드시 「기뻐하여라」라는 새로운 명령으로 옮겨야 하는 것은 아니며, 예수님께서 평범하게 인사하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절했다」에 해당하는 동사 프로스퀴네오는 존경의 표시로 엎드리는 행동을 가리키기도 하고 신에게 드리는 경배를 나타내기도 하므로, 낱말 하나만으로 언제나 신적 예배를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신학적 의미는 마태복음에서 이 행동이 쓰이는 흐름에서 드러납니다.
같은 아침, 다른 소식 — 경비병들이 퍼뜨린 이야기
무덤에서 두 방향으로 떠나는 사람들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는 동안, 경비병 가운데 몇 사람이 도시로 가서 대제사장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립니다. 두 집단은 같은 무덤에서 떠나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여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반면 대제사장들은 경비병들의 보고를 듣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그를 훔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마태는 독자에게 직접 보여 줍니다. 마태는 부활에 관한 서로 다른 설명이 왜 존재하는지를 자신의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등장한 은전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뒤에 병사들에게 은전을 넉넉히 주었다.마태복음 28:12 · 본디새김
대제사장들은 유다에게 은전 서른 닢을 주고 예수님을 넘기게 했습니다(26:15). 유다가 그 돈을 돌려주자, 지도자들은 그것을 핏값이라고 부르면서 성전 금고에 넣지 않았습니다(27:6).
첫 번째 돈은 예수님을 붙잡게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두 번째 돈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에 맞서는 이야기를 퍼뜨리는 데 사용됩니다.
그들은 두 번 모두 함께 의논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했고, 이제 예수님의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지 의논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들의 계획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잠든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면서 말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그를 훔쳐 갔다』라고 말하여라.」마태복음 28:13 · 본디새김
그들이 정말 잠들어 있었다면, 누가 와서 시신을 가져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마태는 이 모순을 직접 지적하지 않지만, 독자는 그 말의 불안정함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잠들었다는 이야기는 경비병들에게 불리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무덤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이 이야기가 총독에게 알려지면 자신들이 설득하여 걱정할 일이 없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돈뿐 아니라 안전까지 보장합니다.
경비병들은 은전을 받고 시킨 대로 행동하고, 마태는 그 이야기가 유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자신이 글을 쓰는 때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오늘날까지」는 마태의 저술 시점을 가리키는 서술 표현입니다.
또한 이 대목이 모든 유대인이 부활을 부인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과 부활을 전한 공동체 자체가 유대인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마태의 이야기 안에서 이 장면이 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독자가 빈 무덤에 관한 소문만 듣도록 하지 않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는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오늘날까지」는 그 이야기가 현재까지 동일한 형태로 널리 퍼져 있음을 입증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 반대 주장이 실제 역사에서 언제, 어떤 경로로 형성되었는지와 경비병들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얼마나 확인되는지는 이 본문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마태의 경비병 이야기를 당시의 논쟁을 반영한 서술로 읽을 수 있다는 점과, 그 서술의 개별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갈릴리의 산 — 절하면서도 망설이는 제자들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인가?
열한 제자는 예수가 그들에게 가라고 일러 둔 갈릴리의 산으로 갔다.마태복음 28:16 · 본디새김
「열한 제자」입니다.
유다가 사라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부르셨지만,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기 시작하셨고(4:17),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으며(4:18–22),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다니며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셨습니다(4:23). 그 사역의 출발점으로 돌아온 제자들에게 이제 새로운 사명이 주어집니다.
마태는 만남의 장소를 「산」이라고 기록합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 앉아 제자들을 가르치셨고(5:1–2), 변화산에서는 세 제자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17:1–8). 이 산이 그 가운데 어느 산인지, 다른 산인지 마태는 밝히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산에서 제자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듣습니다.
절했지만 망설였다
그들은 그를 보고 절했으나, 어떤 이들은 망설였다.마태복음 28:17 · 본디새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제자들 가운데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문장에는 두 가지 해석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누가 망설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호이 데는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구별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절했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망설였다는 뜻이며, 본디새김 번역은 이 읽기를 따릅니다.
그러나 같은 표현을 앞선 주어 전체로 받아들여, 제자들이 절하면서도 동시에 망설였다고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해석은 마태복음에서 믿음과 망설임, 두려움과 기쁨이 한 사람 또는 한 집단 안에 함께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두 읽기 모두 문법과 문맥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으며, 그리스어만으로 논쟁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망설였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동사는 마태복음에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에 빠져 가던 때,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며 왜 망설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14:28–31). 이 장면을 기억하면, 망설임은 부활 자체를 지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만이 아니라 믿음과 두려움이 얽혀 있는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태는 제자들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망설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낯설어서였는지,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믿기 어려워서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동입니다. 「예수가 다가와 그들에게 말했다.」(28:18) 예수님께서는 망설이는 제자들을 멀리서 꾸짖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다가오십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망설임을 완전히 없애 주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망설임이 사라졌다는 설명 없이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하실 말씀의 근거는 제자들의 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의 권위입니다.
「하늘과 땅에 미치는 모든 권위」 —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언
누구의 권위로 제자들을 보내시는가?
예수가 다가와 그들에게 말했다. 「하늘과 땅에 미치는 모든 권위가 나에게 주어졌다.」마태복음 28:1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먼저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에게 어떤 권위가 주어졌는지 말씀하십니다.
「주어졌다」는 수동형이어서 누가 그 권위를 주었는지는 문장에 직접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전체 문맥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권위를 주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넘겨주셨다고 말씀하셨고(11:27), 대제사장 앞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을 지니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64).
이 선언은 다니엘 7:13–14와 강하게 연결됩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옛적부터 계신 분 앞으로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습니다. 그 권세는 모든 민족과 백성을 포괄하며, 그의 나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보편적인 권위를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선언하십니다.
마태복음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또 하나의 대조가 보입니다. 광야에서 시험하는 자는 높은 산에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자신에게 절하면 그것을 주겠다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제안을 거부하셨습니다(4:8–9). 마지막 산에서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절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받으신 권위를 선언하십니다.
마태가 두 산을 의도적으로 대응시켰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란히 읽으면 권위를 얻는 방식의 차이가 보입니다. 광야에서는 잘못된 대상에게 절하여 권력을 얻으라는 유혹이 있었고, 마지막 산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지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받으신 권위를 선언하십니다. 이 권위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가 가리키는 것
19절은 「그러므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받으셨기 때문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충분히 강해졌기 때문에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마침내 완벽한 믿음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열한 명이고, 그 가운데에는 망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 권위를 세우려고 세상에 나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권위를 받으신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시는 일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내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그분이신지 물었고(11:3),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16:16). 대제사장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심문했고(26:63),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신지 물었으며(27:11),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조롱했습니다(27:4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그 질문들을 다시 논쟁하지 않으시고, 자신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가 주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 마지막 명령의 중심
명령은 네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흔히 전도하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는 본문으로 읽힙니다. 그런데 그리스어 문장을 자세히 보면 특별한 구조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한 영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면서 말이다. 그리고 보아라, 나는 시대의 끝맺음까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있다.」마태복음 28:19–20 · 본디새김
문장의 중심이 되는 명령형 동사는 「제자로 삼아라」(μαθητεύω) 하나입니다.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면서」는 모두 분사 형태로, 이 중심 명령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다만 분사라는 이유만으로 ‘가라’는 요청에 명령의 힘이 없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앞에 놓인 「가서」는 문법적으로 중심 명령의 힘을 함께 받는 것으로 널리 이해됩니다. 뒤따르는 두 분사는 제자로 삼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할 것인지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많은 사람에게 어떤 소식을 알리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때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다투었고, 위험이 다가오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은 새로운 종교적 소속을 가진 사람의 수를 늘리는 일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주고, 지키도록 가르치다
세례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드러내는 중요한 행동으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십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한 영의 이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한 영이 함께 언급되지만, 「이름」이라는 말은 단수로 사용됩니다. 세 분의 이름이 하나의 세례 행위 안에서 함께 놓여 있습니다. 다만 단수 명사 하나만으로 후대의 삼위일체 교리가 다루는 존재와 위격의 모든 관계를 직접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이 자리에서 신학적 정의를 제시하기보다, 세례를 어떤 이름으로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따라 읽어 온 독자에게 이 세 이름은 낯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왔고, 하늘에서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음성이 들렸습니다(3:16–17). 처음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독자가 보았던 관계가 마지막에는 새로운 제자들의 세례와 연결됩니다.
세례에 이어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명하신 모든 것을 단순히 알도록 가르치라고 하지 않으시고,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제자의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할까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5:44), 남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말라는 말씀(6:1),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6:33),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7:12),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16:24),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18:21–22),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22:37–40)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이제 그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대신 차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권위 아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모든 민족으로
그런데 이 명령에는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가 있습니다. 「모든 민족」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이방 사람들의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5–6). 가나안 여자에게는 자신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냄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15:24). 그렇다면 마지막 명령은 앞선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일까요?
마태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소개합니다(1:1). 그러나 그 약속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경계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등장하고(2:1–12),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동쪽과 서쪽에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8:10–12), 가나안 여자의 믿음도 칭찬하십니다(15:28).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도록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24:14).
이런 흐름에서 마지막 명령은 뜻밖의 새로운 생각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조금씩 드러났던 모든 민족을 향한 전망이 명확한 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약속을 토대로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메시아의 권위는 한 민족의 경계에 갇히지 않습니다. 다니엘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모든 민족과 백성이 섬기는 권세를 받듯, 그 권위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권위의 범위와 제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의 범위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이미 말씀하셨고(7:21), 말씀을 듣고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가르치셨습니다(7:24–27). 마지막 명령의 「제자로 삼아라」와 「지키도록 가르치면서」는 산상설교의 결말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을 지식을 전달하는 일로 축소할 수 없고, 세례만 주면 제자를 삼는 일이 완성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명령에서는 세례와 가르침이 함께 제자로 삼는 일을 이룹니다. 그리고 가르침은 끝없이 새로운 규정을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명하신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지키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은 제자들에게 너무 큰 짐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스승을 버리고 달아났고 지금도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는 열한 명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근거가 제자들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근거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또 하나의 약속을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중심 명령 「제자로 삼아라」는 마테튜사테이며, 「가서」(포류텐테스), 「세례를 주면서」(밥티존테스), 「가르치면서」(디다스콘테스)는 분사입니다. 「이름」에 해당하는 오노마(ὄνομα)는 단수형입니다. 이 세례의 표현은 초기 기독교 문헌인 《디다케》 7장에서도 발견됩니다. 《디다케》는 아버지와 아들과 거룩한 영의 이름으로 세례를 행하는 방식을 안내하므로, 이 표현이 초기 기독교의 세례 실천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본문 밖의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
명령 뒤에 이어지는 약속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한 문장이 더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면서 말이다. 그리고 보아라, 나는 시대의 끝맺음까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있다.」마태복음 28:20 · 본디새김
「나는 … 함께 있다」는 현재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 훗날 다시 함께하시겠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지금 함께 계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함께함이 「시대의 끝맺음까지 날마다」, 곧 모든 날들 동안 이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특별한 날에만, 제자들이 성공한 날에만 함께하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다만 이 약속을 제자들에게 더 이상 고난이나 실패가 없을 것이라는 보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16–23; 24:9–13). 함께 계신다는 말씀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의 임재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처음에 주어진 이름, 마지막에 들리는 목소리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면서 이사야 7:14의 말씀이 인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1:23) 마태는 그 이름의 뜻도 풀어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였습니다.
마지막에는 「나는 … 너희와 함께 있다」입니다.
이 두 문장은 마태복음 전체를 감싸는 관계를 이룹니다. 이 구조를 전제하면서, 그 함께함이 마지막 심판까지 이어진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은 아기의 탄생과 연결되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처음의 임마누엘 약속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함께 계시는가?
이 질문에 마태복음 28장이 제공하는 답은 절제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실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성령의 내주나 교회 안에서의 임재를 다른 신약 본문처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설명은 다른 성경 본문들과 함께 신학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지만, 마태복음 28장 자체가 제공하는 내용과 구별해야 합니다.
마태가 분명하게 기록하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에 계속 머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시면서 그들이 어디로 가든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권위와 임재는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약속의 수신자는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 직접적인 대화 상대는 열한 제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치라고 하시며, 그 함께하심이 시대의 끝맺음까지 이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명령과 약속을 열한 제자 개인의 생애에만 제한하기는 어렵고, 그 공동체를 통해 계속되는 사명까지 포함하는 전망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본문이 후대의 모든 신자 개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 약속이 적용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약속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제자 삼는 사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은 왜 이 장면에서 끝나는가?
마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승천에 관한 서술이 있지만, 마태복음은 갈릴리의 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제자들이 그 일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어디로 갔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명령과 약속을 남겨 놓고 끝납니다.
그 사명의 내용도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사람을 자신들의 뜻에 복종시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따르라는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그런 삶을 가르치는 사람이 예수님의 권위를 자기 권력으로 바꾸어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면, 마지막 명령의 중심을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예수님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마태는 이 장의 어느 장면에서도 사람들이 얼마나 완벽하게 반응했는지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시고, 실패한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망설이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들의 사명은 자신들의 완전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 사명의 근거는 예수님께 주어진 권위이며, 그 사명을 이어 가게 하는 약속은 예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마태는 제자들이 그 뒤에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했는지도, 산에서 내려가는 모습도 보여 주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에 남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열한 제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절했지만, 어떤 이들은 망설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셨고, 모든 민족을 향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남기십니다. 「나는 시대의 끝맺음까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보여 주지 않은 채 끝납니다.
다만 그들이 어디로 가든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갈릴리의 산 위에 남겨 둡니다.
조금 더 깊이
「나는 … 함께 있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형 에이미(εἰμί)이고, 「날마다」의 원문은 파사스 타스 헤메라스, 곧 ‘모든 날들’이라는 뜻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