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마지막 사람을 먼저 부르시는 분
하루 종일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해 무거운 짐을 지고 뜨거운 햇볕을 견뎠습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그들은 약속한 품삯을 정확히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이유는 자신들이 적게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사람들은 한 시간 일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들을 하루의 짐을 지고 타는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셨습니다.」(20:12) 이 항의는 쉽게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뜻밖의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선하다고 해서 네 눈이 악한 것이냐?」(20:15) 그는 일의 양이나 임금의 계산법을 더 이상 설명하지 않습니다. 일꾼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문제 삼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은 눈에 관한 이야기로 끝납니다.
여리고를 떠나는 길에서 눈먼 사람 둘이 「주님, 우리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20:33) 하고 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손을 대어 보게 하십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의 다툼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먼저 일한 사람들은 다른 일꾼들의 품삯을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나라에서 차지할 높은 자리를 바라봅니다. 눈먼 사람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십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눈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시는 분을 바라보는 눈으로 이끄십니다.
왜 주인은 하루에 다섯 번이나 일꾼을 구하러 나갔을까?
마태복음 20장은 앞 장의 마지막 말씀에 이어집니다.
「그런데 첫째인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인 이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19:30) 바로 다음 문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나라는」이라는 말로 포도원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앞 장에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자신들에게 무엇이 돌아오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품삯을 받는 일꾼들의 이야기로 그 질문을 다루십니다.
이야기는 이른 아침에 시작됩니다.
집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구하러 나가, 첫 번째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합니다. 첫 번째 일꾼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얼마를 받을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오전에 다시 장터로 나갑니다.
셋째 시쯤에 나갔고, 여섯째 시와 아홉째 시에도, 열한째 시에도 나갔습니다. 마지막 일꾼들은 하루 노동이 거의 끝날 무렵에 고용된 것입니다. 포도원에 일꾼이 더 필요했기 때문일 수 있지만, 비유는 노동력 부족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이 여러 차례 나가서 아직 일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포도원으로 가라. 그러면 옳은 액수를 너희에게 주겠다.』」마태복음 20:4 · 본디새김
처음 고용된 사람들은 한 데나리온이라는 구체적인 금액에 합의했습니다. 나중에 고용된 사람들에게는 「옳은 액수」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정확히 얼마를 받게 될지 모른 채 포도원으로 갑니다.
그리고 열한째 시에 주인은 또 다른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열한째 시쯤에 나가서는 서 있는 다른 이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여기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서 있느냐?』」마태복음 20:6 · 본디새김
「하는 일 없이」라는 말 때문에 그들을 게으른 사람들로 읽기 쉽습니다. 일찍 고용된 사람들은 부지런했고, 늦게 고용된 사람들은 늦잠을 자거나 놀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다릅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아무도 삯을 주고 우리를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포도원으로 가라.』」마태복음 20:7 · 본디새김
일하지 않은 사람과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이 왜 고용되지 않았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게으른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으시고, 주인도 그 대답을 듣고 더 캐묻지 않습니다. 그저 「너희도 포도원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처음 일꾼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습니다.
그다음 일꾼들에게는 옳은 액수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사람들에게는 품삯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임금에 관한 설명은 줄어들고, 주인이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보내는 행동이 두드러집니다. 모두 포도원에 들어갔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품삯을 지급하는 순서에서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의 일반적인 낮 시간 계산을 적용하면 셋째 시는 대략 오전 9시, 여섯째 시는 정오, 아홉째 시는 오후 3시, 열한째 시는 오후 5시에 해당합니다. 정확한 시각은 계절과 당시의 시간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인은 왜 마지막 사람부터 품삯을 주었을까?
「저녁이 되자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을 맡아보는 이에게 말했다. 『일꾼들을 불러 마지막 사람들부터 첫 사람들까지 삯을 치러 주어라.』」마태복음 20:8 · 본디새김
하루가 끝났을 때 품삯을 지급하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율법적 배경과도 잘 맞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마지막 사람들부터 먼저 지급하라는 특이한 지시를 내립니다. 그래서 처음 온 사람들은 한 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인이 처음 온 사람들에게 먼저 지급하고 돌려보냈다면, 그들은 약속한 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대를 바꿉니다.
「처음 고용된 사람들이 와서 더 받으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마태복음 20:10 · 본디새김
처음 온 일꾼들은 아침에 한 데나리온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는 똑같은 한 데나리온을 받고도 불만을 품습니다. 그사이에 그들의 노동이 달라진 것도, 합의한 금액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마지막 사람들은 한 시간 일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들을 하루의 짐을 지고 타는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0:12 · 본디새김
그들은 주인이 약속한 금액보다 적게 주었다고 항의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마지막 사람들과 같게 대우했다고 항의합니다. 문제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처음 온 사람들은 실제로 더 많은 노동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노동의 차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주장이나, 노동 시간과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경제 제도의 가르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의 수고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자격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은 불공정한 사람인가?
「그가 그들 가운데 하나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친구여,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한 데나리온에 합의하지 않았느냐?』」마태복음 20:13 · 본디새김
주인은 먼저 자신이 불의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처음 일꾼들과 약속했던 품삯을 그대로 지급했습니다.
「『네 몫을 가지고 가라. 그런데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만큼 주고 싶다.』」마태복음 20:14 · 본디새김
주인은 처음 일꾼에게 돌아갈 몫을 빼앗아 마지막 일꾼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처음 일꾼에게는 합의에 따른 정당한 지급이, 마지막 일꾼에게는 예상 밖의 후한 지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면서, 자신이 선하게 대하고 싶은 사람에게 더 베풉니다.
두 가지 행동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처음 일꾼들은 두 번째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주인은 마지막 질문으로 그 문제를 드러냅니다.
「『내 것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권한이 없느냐? 아니면 내가 선하다고 해서 네 눈이 악한 것이냐?』」마태복음 20:15 · 본디새김
선한 주인을 바라보는 악한 눈
「네 눈이 악하다」는 말은 시력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얻는 모습을 시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후하게 베푸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선한 일을 묻는 젊은이에게 「선한 이는 한 분뿐이다」(19: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장면에는 「선한」(ἀγαθός)이라는 같은 그리스어 형용사가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선함의 근원이 누구인지가 문제였고, 여기서는 선함을 마주하는 사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은 듣기에 좋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선함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후하게 베풀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에도 그것을 선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처음 일꾼들은 주인이 자기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기를 원했지만, 마지막 일꾼들에게도 선하게 대해 주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선함을 자신들이 받은 몫으로만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도 선하기 때문에 네가 불행해져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마지막 사람이 첫째가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마지막인 사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인 사람들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마태복음 20:1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앞 장의 마지막과 서로 맞물립니다. 비유에서 마지막 사람은 먼저, 처음 사람은 나중에 품삯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받은 것도, 처음 사람이 약속된 품삯보다 적게 받은 것도 아닙니다.
순서가 뒤집혔지만 금액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첫째와 마지막의 역전은 보상 순위가 거꾸로 바뀐다는 뜻으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누가 먼저 인정받을 자격이 있는가, 누가 더 많이 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기존의 기준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비유는 먼저 부름받은 이스라엘과 나중에 부름받은 이방인, 혹은 생애의 이른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과 뒤늦게 믿음을 얻은 사람의 관계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런 읽기는 가능한 후대의 신학적 적용이지만, 비유 자체가 각각의 일꾼이 어느 집단을 상징한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직접적인 문맥은 베드로가 자신들이 버린 것에 대한 보상을 물었던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오랫동안 따랐다는 사실이, 늦게 부름받은 사람보다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4:14–15는 가난한 품꾼을 억압하지 말고, 그날의 품삯을 해가 지기 전에 지급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사람이 가난하여 그 품삯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네 눈이 악하다」의 그리스어는 호 옵탈모스 수 포네로스입니다. 구약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신명기 15:9는 빚을 면제해 주는 해가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가난한 형제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는 인색한 눈을 경계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상황을 다루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선함을 인색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19:17과 20:15에 함께 쓰인 「선한」은 아가토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높은 자리를 말씀하시기 전에 십자가를 예고하셨을까?
포도원 비유가 끝나자 장면이 갑자기 바뀝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따로 데려가, 이제 자신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마태복음 20:18 · 본디새김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져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고난과 부활에 관한 주요 예고는 이미 16:21과 17:22–23에 등장했지만, 이번에는 사건의 전개가 훨씬 구체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불행이나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계신지, 그곳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되실지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아직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십니다.
이 예고는 포도원 비유 바로 뒤에 놓여 있습니다. 비유에서는 주인이 자기 돈을 내어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실 길로 가십니다.
물론 두 장면을 똑같은 사건의 상징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포도원 비유는 품삯에 관한 이야기이고, 수난 예고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관한 직접적인 선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선함은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푸는 행동으로 나타나고, 예수님께서는 그 선함을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죽음의 예고 다음에, 제자들의 어머니가 높은 자리를 요청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왕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청한 사람들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에게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절하며 청합니다.
그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무엇을 바라느냐?」 그 여자가 그에게 말했다. 「내 이 두 아들이 당신의 나라에서 하나는 당신의 오른쪽에, 하나는 당신의 왼쪽에 앉도록 말씀해 주십시오.」마태복음 20:21 · 본디새김
그녀의 요청은 예수님의 나라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때 제자들도 열두 왕좌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28). 그러므로 높은 자리에 관한 기대가 완전히 근거 없는 상상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나라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들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그 이후에 자신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입니다.
마가복음 10:35–37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요청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어머니가 요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어머니에게만 향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말했다. 「너희는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20:22 · 본디새김
「너희」는 복수형입니다. 어머니가 요청했지만, 그 요청의 책임에서 아들들이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 잔이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 있게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자리를 요청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 이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시려 하시는 잔
성경에서 잔은 때로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나 고난을 나타냅니다. 20:22만으로 그 잔의 모든 의미가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마태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그 뜻은 점차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 잔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십니다(26:39). 이 잔은 곧 닥쳐올 고난과 죽음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 잔은 너희가 마실 것이다. 그런데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자리를 주는 일은 내 몫이 아니다. 그 자리는 내 아버지가 마련해 두신 이들에게 돌아갈 몫이다.」마태복음 20:23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대답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도 고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고난이 예수님의 죽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은 조금 뒤 28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청받은 자리를 임의로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권능이 부족하다는 진술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자리를 정하는 일이 아버지의 마련하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영광의 자리는 제자들이 먼저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두 형제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열 제자가 그 일을 듣고 노여워합니다. 본문은 그들의 속마음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형제가 자기들보다 높은 자리를 선점하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요청을 부당하게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방금 들은 열두 제자 사이에서, 누가 예수님 곁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십니다.
크고 싶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세상의 권력 구조에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예수가 그들을 불러 말했다. 「너희가 알고 있듯이 이방 사람들을 다스리는 이들은 그들 위에 주인 노릇을 하고, 큰 이들은 그들에게 권세를 부린다.」마태복음 20:25 · 본디새김
제자들이 살던 세계에서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행사되는 것이었습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이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구한 것도 이런 권력의 구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너희 사이에서 크게 되려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이가 될 것이다.」마태복음 20:26 · 본디새김
세상은 그렇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너희 사이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너희의 노예가 될 것이다.」마태복음 20:27 · 본디새김
「섬기는 이」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거나 필요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고, 「노예」는 자유로운 신분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 사람을 나타냅니다. 두 표현은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이 한층 강해집니다. 높은 자리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를 가리키십니다.
이것은 지금 겸손하게 행동하면 나중에 더 높은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처세술이 아닙니다. 그렇게 읽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에 불과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에 두고 그들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큰 사람이 되려는 생각 자체를 바꾸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자신을 얼마나 내어놓는가로 규정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공동체 안에 아무런 권위나 책임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단순화할 수도 없습니다.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리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책임을 지는 자리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권력자에게 봉사를 요구하는 말씀이지, 약한 사람에게 부당한 지배를 참으라고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설명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이는 사람의 아들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또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온 것과 같다.」마태복음 20:28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밝히시며, 섬김의 근거가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다니엘 7:13–14와 연결되는 왕권과 영광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고, 모든 민족이 그를 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사람의 아들이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섬김은 자신의 시간이나 재산을 나누어 주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주시는 데까지 이릅니다.
대속물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
「대속물」은 속박된 사람을 풀어 주거나 포로를 해방하기 위해 치르는 값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누군가를 풀어 주기 위해 치르는 값입니다. 28절에서 그 값은 예수님 자신의 목숨이며, 그 목숨은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해방의 값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대속의 모든 신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 대속물이 정확히 누구에게 지급되는지 본문은 명시하지 않습니다. 「많은」이라는 표현도 특정한 구원받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견해와 수많은 사람들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견해로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이 문장의 직접적인 강조점은 예수님 한 사람의 목숨이 많은 사람을 위해 주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짊어지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며, 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합니다. 마태복음은 여기서 이사야 53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준다는 표현은 이사야 53:10–12와 강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마태는 다니엘 7장의 영광스러운 사람의 아들과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왕권을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명을 이루십니다. 그분 자신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시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잔과 예수님의 대속물
예수님께서는 두 형제에게 자신의 잔을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속물이 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섬김은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는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는 일은 제자들의 선행으로 대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분인 동시에,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밝히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 나라의 지위를 얻으려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하신 일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다음에, 높은 자리를 요구했던 제자들의 이야기 다음에, 마태는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향해 소리치는 장면을 배치합니다. 이들은 어떤 자리를 구할까요?
조금 더 깊이
「대속물」의 그리스어는 뤼트론입니다.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속량이나 해방을 위해 지급하는 값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1:30에는 생명을 대신하여 치르는 속전의 개념이 등장하며, 레위기 25:47–55에는 가난 때문에 종이 된 사람을 속량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의 그리스어 표현은 뤼트론 안티 폴론이며, 여기서 안티는 문맥상 대신함이나 교환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사야의 본래 문맥은 고난받는 종을 통해 여호와야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그리며, 그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본문 해석의 중요한 쟁점입니다. 20:26–27의 「섬기는 이」는 디아코노스, 「노예」는 둘로스입니다.
같은 질문에 전혀 다른 대답을 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큰 무리가 그분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길가에 눈먼 사람 둘이 앉아 있습니다.
보아라, 눈먼 사람 둘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외쳤다. 「주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시오.」마태복음 20:30 · 본디새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다윗 왕의 계보와 연결되는 메시아적 인물이심을 나타냅니다. 눈먼 두 사람은 예수님을 왕적 권위를 지닌 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왕에게 높은 자리가 아니라,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합니다.
9:27에서도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20장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앉아 있고, 무리가 그들의 외침을 막으며, 고침을 받은 뒤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사람들은 왜 그들을 조용히 시켰을까?
무리는 그들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었다.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주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시오.」마태복음 20:31 · 본디새김
무리가 왜 꾸짖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리가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려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막으려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가 멈춰 서서 그들을 불러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태복음 20:32 · 본디새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겪으실지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분이, 길가에서 도움을 구하는 두 사람의 외침을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십니다. 무리는 그들의 소리를 막으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십니다.
이 질문은 조금 전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에게 하셨던 「무엇을 바라느냐?」(20:21)를 떠올리게 합니다. 두 질문에는 공통으로 「바라다」(θέλω)를 뜻하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대답은 극명하게 다릅니다. 앞에서는 두 형제가 예수님 곁에서 차지할 자리와 영광을 구했고, 여기서는 두 눈먼 사람이 자비를 구합니다.
두 장면은 단순히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의 대조를 넘어, 예수님의 왕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자신들의 높은 지위와 연결했고, 눈먼 사람들은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실 수 있는 능력과 연결했습니다.
눈먼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원했던 것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주님, 우리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마태복음 20:33 · 본디새김
본문은 예수님께서 왜 질문하셨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눈먼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직접 말하고,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그 요청을 듣고 응답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는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겨 그들의 눈에 손을 댔다. 그러자 곧 그들이 다시 보게 되었고 그를 따라갔다.마태복음 20:34 · 본디새김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겨」는 깊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쌍히 여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마음속의 감정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분은 멈춰 서셨고,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의 요청을 들으셨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야기는 눈먼 사람들이 시력을 회복했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고,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말로 끝납니다.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 못지않게, 이제 누구를 따라가는지가 중요합니다.
멈춰 서신 다윗의 자손
마태복음 20장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것이라는 약속을 듣고 그분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왕이 무엇을 하시는 모습으로 이 장을 끝냅니까?
이 장의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습니다. 포도원에서 먼저 일한 사람들은 다른 일꾼들의 품삯을 보았지만, 주인의 선함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지만, 그분이 목숨을 내어 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말씀을 듣고도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던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예수님에게서 긍휼을 구했습니다.
이 장면을 제자들의 영적인 눈멂과 대비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마태가 제자들을 직접 눈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므로, 이 대조는 이야기의 배치와 주제에서 발견되는 문학적 해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역전은 모든 질서가 무너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포도원 주인은 약속을 지켰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마련하신 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의나 권위나 보상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새롭게 밝히십니다. 정당한 대가나 자신의 권리를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뜻도, 고난 자체가 선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권리를 사용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돌보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사용하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무리가 길가의 눈먼 사람 둘을 조용히 시키려 하지만, 그들은 더 크게 외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멈춰 서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분이, 길가에 앉은 눈먼 사람 둘의 외침 때문에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이신지 증명하기 위해 먼저 높은 왕좌에 앉지 않으십니다. 길가에 멈춰 서서 그들을 부르시고, 눈먼 사람들의 눈에 손을 대십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는 더 이상 누가 첫째인지 묻는 질문이 없습니다. 누가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지 다투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의 손길로 눈을 뜨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분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들 앞에는 방금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가신다고 말씀하신 사람이 걸어가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0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왕좌를 향한 다툼이 아니라, 눈을 뜬 사람들이 섬기러 오신 왕을 따라가는 모습으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