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들 것인가
마태복음 19장에는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이유를 묻는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아내와의 관계를 끝낼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에게 데려온 아이들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요구하거나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려 하지만, 제자들이 그 길을 막습니다.
세 번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젊은이입니다. 그는 계명도 지켰고 많은 재산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시자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하는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무엇을 버릴 수 있는지 묻고, 젊은이는 무엇을 해야 얻을 수 있는지 묻고, 베드로는 버린 대가로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어느 누구에게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혼인 관계를 쉽게 버리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혼인하지 않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사람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지만, 계명을 지켰다는 사람에게는 재산을 내려놓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시면서도, 첫째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단순히 얼마나 많이 버릴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따라, 어떤 마음으로 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혼을 명령했을까?
마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편 유대 지역으로 가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이 말을 마쳤을 때에」라는 첫 문장은 마태가 예수님의 긴 가르침을 마무리할 때 쓰는 정형적인 표현으로, 7:28, 11:1, 13:53에 이어 네 번째로 등장합니다.
이제 이야기는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정으로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큰 무리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 질문을 던집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그를 떠보며 말했다. 「무슨 까닭으로든 남자가 자기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복음 19:3 · 본디새김
핵심은 「무슨 까닭으로든」이라는 표현입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신명기 24:1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습니다. 신명기에는 남자가 아내에게서 어떤 부적절한 일을 발견하여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내보내는 상황이 등장하는데, 어떤 사유가 이혼을 정당화할 만큼 심각한지는 해석이 갈렸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은 이런 논쟁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까지 허용됩니까? 어디에 경계선을 그어야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제시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십니다.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너희는 처음부터 지으신 이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마태복음 19:4 · 본디새김
「『이 때문에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에게 붙을 것이다. 그리고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태복음 19:5 · 본디새김
여기에는 창세기 1:27과 2:24가 함께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창세기 2장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관계를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본문을 연결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혼인을 어떻게 끝낼 수 있는지 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하신 일
「그래서 이제 더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복음 19:6 · 본디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서는 남자가 주어입니다. 남자가 아내를 버릴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에서는 하나님이 주어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혼인을 남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의 문제로 바라보던 질문을, 하나님이 이루신 관계에 대해 사람이 어떤 책임을 지는가라는 문제로 바꾸신 것입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은 부부의 성적인 결합만을 가리키는 말로 축소하기 어렵습니다. 창세기 2:24에서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부모와의 기존 관계를 떠나 새로운 결합을 이루는 삶의 변화를 함께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필요에 따라 유지하거나 해지하는 계약처럼 취급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갈라섬 증서를 주고 그 아내를 버리라고 명했습니까?」마태복음 19:7 · 본디새김
이 질문에는 예수님의 입장과 모세의 율법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들어 있는 전제를 바로잡으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모세는 너희 마음이 굳은 탓에 너희에게 아내를 버리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았다.」마태복음 19:8 · 본디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가 명령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허락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명령과 허락은 전혀 다릅니다.
실제로 신명기 24:1–4의 중심은 남자에게 이혼하라고 명령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남자가 아내를 내보낸 뒤 그 여자가 다른 사람과 혼인하고, 그 두 번째 혼인도 끝났을 때 첫 번째 남편이 그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다는 규정입니다. 본문은 이미 존재하는 이혼과 재혼의 현실을 전제하고, 그 안에서 특정한 행위를 금지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마음이 굳은 탓」이라는 말로 겨냥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셨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완고함입니다. 그렇기에 법이 어떤 상황을 허용하거나 규제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신 가장 좋은 모습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 그리고 그 규정이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음행 때문이 아닌데」라는 단서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예외를 언급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 때문이 아닌데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간음하는 것이다.」마태복음 19:9 · 본디새김
「음행」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견해가 갈립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읽기는 배우자의 성적 부정을 가리킨다는 것이고, 다른 읽기는 율법상 허용되지 않는 혼인 관계나 약혼 중의 성적 부정 같은 더 제한된 상황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 한 절로 이혼과 재혼에 관한 모든 상황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적인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가 아내를 내보낼 수 있는 사유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려는 시도를 거부하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혼의 권한을 하나님이 맺어 주신 관계에 대한 책임 앞에 세우십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의 폭력적이거나 위험한 혼인 관계에 적용할 때에도 그 방향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모든 형태의 학대와 강압에 대한 구체적인 대처 절차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혼인을 소중히 여기셨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위험을 감수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출발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쉽게 버릴 수 있는 권리를 강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함부로 버릴 수 없다는 책임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후대에 편집된 유대교 문헌인 미슈나 《기틴》 9:10은 서로 다른 입장을 전합니다. 샴마이 학파는 성적으로 중대한 잘못을 이혼 사유로 보았고, 힐렐 학파는 아내가 음식을 태운 것과 같은 사소한 일까지 허용하는 넓은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다만 이 문헌이 후대에 편집되었으므로, 기록된 논쟁의 모든 세부 사항이 예수님 당시에도 정확히 같은 형태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음행」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는 성적으로 부정한 행위를 넓게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외가 이혼 자체를 허용하는 것인지, 재혼까지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관해서도 견해가 갈리며, 이 문제는 마태복음 5:32와 마가복음 10:11–12를 함께 읽을 때 더욱 중요해집니다.
그렇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형편이 그러하다면 혼인하는 것이 이롭지 않습니다.」마태복음 19:10 · 본디새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제자들의 반응이 오히려 더 솔직해 보입니다. 혼인이라는 관계에 들어가면 나중에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 관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면 혼인은 부담스러운 선택이 됩니다. 제자들은 혼인의 가치를 묻기보다, 혼인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따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에 곧바로 동의하거나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가 이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주어진 이들만 받아들인다.」마태복음 19:11 · 본디새김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조금 모호합니다. 바로 앞에서 제자들이 말한 혼인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판단으로 볼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엄격한 혼인 관계의 가르침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12절이 혼인하지 않는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문맥상 독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그렇게 태어난 고자들이 있고, 사람들에게 고자로 만들어진 고자들이 있고, 하늘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고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복음 19:12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오늘날 독자에게 낯설고 거칠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당시 고자라는 말은 신체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면서, 여러 사회적 역할 및 혼인과 출산의 가능성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부류는 대체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혼인을 포기하는 독신의 삶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실제 신체 훼손을 명령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습니다. 독신과 금욕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해석 외에, 당시 고자에게 따르던 사회적 낙인이나 지위의 상실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을 하나님이 맺어 주시는 소중한 관계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혼인하지 않는 삶도 말씀하십니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혼인이 소중하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이 반드시 혼인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혼인하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혼인이 덜 거룩한 삶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혼인을 자신의 유익에 따라 판단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이든 독신이든 하나님 나라 앞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문제로 그 시선을 옮기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혼인과 출산을 둘러싼 논의는 실제 아이들의 등장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6:3–5는 이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만합니다. 거기서 여호와야훼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고자라도 자신의 언약을 지키는 사람에게 자녀보다 나은 이름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사야의 본래 관심은 하나님 백성 안에서 배제되기 쉬운 이들에게도 언약의 미래가 열려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혼인과 출산의 여부가 하나님 나라에서 한 사람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제자들이 막은 아이들을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이십니다
그때에 아이들이 그에게 이끌려 왔다. 그가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기를 바라서였다.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마태복음 19: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어른들이 혼인 관계를 두고 논쟁했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막습니다.
본문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예수님의 시간을 빼앗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들에게 우선권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보려고 다가왔고, 사람들은 안수와 기도를 바라며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막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예수가 말했다. 「아이들을 그냥 두어라.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하늘의 나라는 이런 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9:14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들었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떤 특별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에 관한 어려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와야 하고, 제자들이 길을 막으면 스스로 그 장벽을 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나라가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손을 얹은 뒤 거기서 떠났다.마태복음 19:15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긴 설명으로 이 일을 끝내지 않으십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손을 얹으십니다.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이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 바로 뒤에, 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다가옵니다. 이번에는 스스로 걸어와 질문하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예수님에게 다가와 그분의 손길을 받습니다. 젊은이는 예수님에게 다가왔다가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할까?
보아라,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가지기 위하여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복음 19:16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진지합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가 그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것을 묻느냐? 선한 이는 한 분뿐이다. 그런데 생명에 들어가고 싶거든 계명을 지켜라.」마태복음 19:17 · 본디새김
「선한 이는 한 분뿐이다」라는 문장은 그 한 분이 누구인지 직접 이름 대지 않지만, 문맥상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함의 기준을 인간이 행하는 개별적인 행동에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리십니다. 그런 다음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어느 계명들입니까?」 예수가 말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마태복음 19:18 · 본디새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여라.』」마태복음 19:19 · 본디새김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직접 다루는 계명들보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계명들을 제시하시고, 마지막에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을 덧붙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묻는 사람 앞에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놓으신 것입니다.
그 젊은이가 그에게 말했다. 「이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내게 아직 무엇이 모자랍니까?」마태복음 19:20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 주장이 거짓이라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본문도 그가 실제로 어떤 죄를 감추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거든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 보물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복음 19:21 · 본디새김
계명을 더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온전한」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5:48에서도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하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온전함은 계명 몇 가지를 빠짐없이 지키는 상태를 넘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의 결론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계명의 마지막이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이 그의 재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물으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일은 선행 목록에 새 항목을 하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던 재산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그가 찾고 있던 것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것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대화의 중심이 선한 행위의 목록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관계로 옮겨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잘 해석해 주는 선생으로 머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던 사람은 이제 예수님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가 슬퍼한 이유
그 젊은이는 그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9:22 · 본디새김
마태는 그가 화를 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부당하다고 항의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슬퍼합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재산은 그의 삶에서 실제로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이 말씀을 부자만 재산을 포기하면 된다는 단순한 규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되고, 반대로 마음속에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이 사람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셨고, 그 명령은 그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요청이었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은 마태복음 6:19–21에서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가르침이 이제 한 사람의 삶에서 구체적인 선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0:17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단순히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해야 할 「선한 일」을 묻습니다. 마태복음의 서술에서는 선함이라는 문제가 예수님에 대한 호칭보다 사람이 행해야 할 일에 집중됩니다. 「온전한」은 그리스어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로, 마태복음 5:48과 같은 낱말입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가 자기 제자들에게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부유한 사람은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마태복음 19:23 · 본디새김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부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태복음 19:2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큰 동물인 낙타와, 바늘에 난 극히 작은 구멍을 대조하십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낙타가 짐을 내려놓으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다는 정도로 완화해서 이해하지 않는 편이 본문의 흐름에 맞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마태복음 19:25 · 본디새김
조금 전 젊은이의 질문은 자신의 행동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구원 자체의 가능성으로 옮겨갑니다. 부유한 사람에게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그토록 어렵다면, 도대체 누가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사람으로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복음 19:2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충분히 겸손해지고 재산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부유한 사람이 더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능력 자체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계명을 지키라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하셨을까요? 그 명령이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요청은 그 젊은이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 드러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많은 선행을 했다는 사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부유한 사람도 결국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보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유한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선언도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가능성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실제적인 순종을 요구하셨지만, 구원의 근원을 인간의 능력으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자신의 선행과 재산과 성취를 모두 합산하여 얻어 낼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예루살렘 성벽에 「바늘구멍」이라는 작은 문이 있었고, 낙타가 짐을 내려놓고 몸을 낮추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는 오래된 해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실제 지리적 사실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받습니까?
그때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돌아오겠습니까?」마태복음 19:27 · 본디새김
베드로의 말에는 실제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4:18–22에서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떠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젊은이가 하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마가복음 10:28의 병행 장면에서는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말하는 데 그치지만, 마태는 그 뒤에 보상을 묻는 질문을 덧붙입니다.
이 질문을 무조건 탐욕스럽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많은 것을 포기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자신이 한 일을 근거로 어떤 보상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계산을 어떻게 다루실까요?
다시 태어남의 때에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따라온 너희는 다시 태어남의 때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며 너희도 열두 왕좌에 앉을 것이다.」마태복음 19:28 · 본디새김
「다시 태어남의 때」는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의 왕좌에 앉으시는 때와 연결되어, 개인적인 영적 거듭남보다는 장차 이루어질 새로운 질서나 세계의 갱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새로워지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열두 왕좌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서로 대응합니다. 이는 제자들이 이스라엘 전체와 관계된 권위와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은 판결과 통치의 의미를 함께 가질 수 있지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이 구절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생업을 버리고 불확실한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하게 될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약속에서 중심이 되는 분은 제자들이 아니라 영광의 왕좌에 앉으시는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제자들의 영광은 그분의 영광에서 비롯됩니다.
백 배를 받는다는 약속
「그리고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녀나 밭을 버린 이는 누구나 백 배를 받고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다.」마태복음 19:29 · 본디새김
열두 왕좌에 관한 약속은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에게 주어졌지만, 이 약속은 「누구나」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붙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버렸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불편한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장 앞부분에서 하나님이 맺어 주신 혼인 관계를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족을 떠나는 사람에게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두 장면이 다루는 문제가 다릅니다. 앞에서는 남자가 자기 권리를 행사하여 아내를 버리는 일을, 여기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집과 가족 관계와 생업을 포기하게 되는 일을 다룹니다. 이 말씀을 배우자나 자녀에 대한 책임을 마음대로 버려도 된다는 허가로 읽는 것은 앞의 가르침과 충돌합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를 따르는 길이 때로는 가장 가까운 관계와 생업의 기반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요구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도 예수님께서는 숨기지 않으십니다.
본문은 무엇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백 배가 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현세에서 재산이 백 배로 증가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포기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 헛되지 않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또한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속은 본래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근거합니다. 이 표현 하나만으로 순종과 보상의 관계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생명이 인간의 성취를 계산하여 지급하는 보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런데 첫째인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인 이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마태복음 19:30 · 본디새김
약속이 새로운 서열 경쟁의 근거가 되지 않도록 마지막에 이 말씀을 두십니다.
누가 먼저 왔습니까.
누가 더 많이 버렸습니까.
누가 더 큰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헌신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는 일은 경계하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음 장에서 이어지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지만, 우선 19장 안에서는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렸는지 계산하는 제자들 앞에 놓인 경고이자,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시 태어남」은 그리스어 팔링게네시아(παλιγγενεσία)로, 다시 새로워짐이나 새롭게 태어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여기 한 번 등장하며, 신약 전체에서는 디도서 3:5에도 쓰입니다. 디도서에서는 구원받는 사람의 새로워짐과 연결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의 왕좌에 앉으시는 때와 연결됩니다. 이 장면의 배경에는 다니엘 7:9–14의 환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왕좌들이 놓이고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면과,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께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환상은 억압받던 하나님의 백성이 짐승 같은 제국들의 지배 아래 영원히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담고 있으며,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환상의 언어를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과 모든 것을 버린 사람
이 장의 마지막을 다시 읽으면, 두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각 장면을 이끄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관한 정답을 알려 주시는 교사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창조의 처음을 밝히시고, 하나님 나라가 누구의 것인지 선언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혼인을 지키는 일에서도, 혼인하지 않는 삶에서도, 재산을 나누는 일에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일에서도 삶의 중심은 결국 예수님 자신에게로 모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을 원했고, 진지하게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젊은이가 내려놓지 못한 것을 실제로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도 「우리에게 무엇이 돌아오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이 행한 일의 대가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을 똑같이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주신 약속도 계산을 끝내 주지는 않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버렸다고 해서 그 나라에서 자신의 자리를 미리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자신이 가진 것을 의지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자신이 버린 것을 새로운 자랑으로 삼는 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대답은 인간의 순종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이나 행한 일로 하나님 나라의 자격을 확보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 그 나라를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따라, 어떤 마음으로 버리는가 하는 물음에 이 장은 그렇게 답합니다.
마태복음 19장에는 두 사람의 움직임이 남아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젊은이는 슬퍼하며 예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모든 것을 버린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서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는 젊은이를 쫓아가 조건을 낮추지도 않으시고,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는 이유로 그에게 첫째 자리를 확정해 주지도 않으십니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하신 뒤, 마지막으로 「첫째인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인 이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는 베드로 앞에, 이제 그가 아직 다 헤아리지 못한 하나님 나라가 펼쳐져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