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마태복음 18장은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 시각에 제자들이 예수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렇다면 하늘의 나라에서 누가 더 큽니까?」마태복음 18:1 · 본디새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아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지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부터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 장의 마지막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묻던 제자들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용서받고도 자기 동료를 용서하지 않는 노예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에서 시작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끝나는 이 두 장면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마태복음 18장은 서로 다른 교훈들을 모아 놓은 장이 아닙니다. 그 공동체에서는 누가 중요한 사람인지, 넘어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못한 형제를 어디까지 찾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용서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작은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맞아들이는 일이라고 선언하시고, 자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18장 본문 읽기 →

가장 큰 사람을 묻자 가장 작은 사람을 세우시다

마태복음 18:1–5 본문 →

제자들의 질문에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누가」라는 말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면서도, 그 나라의 질서는 여전히 자신들이 익숙한 세상의 질서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옵니다. 누군가는 앞에 서고, 누군가는 뒤에 서며, 누군가는 더 큰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장면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믿음을 가지라는 교훈으로 읽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강조하시는 것은 아이의 순수함이 아닙니다. 당시에도 부모들은 자녀를 소중히 여겼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지위나 공적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며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말했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 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8:3 · 본디새김

「돌이켜」는 마음가짐을 조금 고치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나아가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방향 자체를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면, 그가 하늘의 나라에서 더 큰 사람이다.」마태복음 18:4 · 본디새김

아이가 어떤 특별한 도덕적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추구하던 높음과 반대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본보기가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를 요구하지 않고, 자기의 중요성을 내세워 대접받으려 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런 아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맞아들이면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마태복음 18:5 · 본디새김

아이처럼 되는 것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것이고, 아이를 맞아들이는 것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겸손을 개인적인 덕목으로 생각하면서, 공동체 안에서는 여전히 영향력 있는 사람만 존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능성을 차단하십니다.

작은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은 단순히 착한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누구를 중요한 사람으로 대하는지는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이냐는 질문이, 이제 공동체 안에서 누가 존중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무서운 경고가 이어집니다.

작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이 왜 그토록 심각한가?

마태복음 18:6–9 본문 →

예수님께서는 방금 아이를 맞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면, 연자 맷돌이 그의 목에 매달리고 그가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는 편이 그에게 낫다.」마태복음 18:6 · 본디새김

아이를 가운데 세우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바다에 가라앉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한 표현을 사용하실까요?

3–5절에서는 실제 아이가 등장하지만, 6절에는 「나를 믿는」이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따라서 관심은 실제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서 공동체 안에서 작고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넓어집니다. 어린아이를 제외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어린아이에게만 한정할 수도 없습니다.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말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도록 만드는 심각한 해악입니다. 연자 맷돌은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짐승의 힘으로 돌릴 만큼 큰 맷돌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충격적인 이미지로 약한 사람을 넘어뜨리는 죄가 얼마나 중대한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경고를 하시는 상대는 제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큰지를 묻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와 판단이 중요해질수록, 그로 인해 상처받거나 믿음에서 멀어지는 작은 사람들의 사정은 가볍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7절에서는 걸림돌이 세상에 올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곧바로 그 걸림돌이 거쳐 오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악이 현실에서 피할 수 없이 나타난다고 해서, 악을 행하는 개인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손과 발과 눈을 찍어 내거나 빼내어 버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실제로 신체를 훼손하라는 명령으로 읽기보다, 죄를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철저해야 하는지를 표현하는 강렬한 비유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같은 방식의 표현이 이미 마태복음 5:29–30에도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지 말라는 경고 다음에, 자기 자신을 넘어뜨리는 원인을 제거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행동하고, 움직이고, 바라보는 삶의 어떤 부분도 죄를 방치할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일은 다른 사람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아흔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가 더 중요한가?

마태복음 18:10–14 본문 →

예수님께서는 다시 「이 작은 이들」로 돌아오십니다.

「조심하여라.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도 업신여기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8:10 · 본디새김

고대 왕궁에서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왕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별한 지위를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천사들이라는 이미지는 하늘에서 그 작은 사람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땅에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이 하늘에서는 결코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헤매게 된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비유의 강조점은 남아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가치가 아니라, 헤매는 한 마리를 대하는 목자의 행동에 있습니다. 숫자만으로 보면 아직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고, 대부분을 지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렇게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게 되면,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헤매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기뻐하는 것보다 그 양을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복음 18:13 · 본디새김

「찾게 되면」이라는 말은 잃은 양을 찾는 일이 언제나 손쉽게 성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찾는 수고와 발견의 기쁨을 말합니다. 목자가 기뻐하는 이유는 그 양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라, 헤매던 양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을 바라보는 기쁨이 아니라, 잃어버릴 뻔한 사람을 되찾는 기쁨입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복음 18:1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결과를 선언하는 문장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작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밝히는 문장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인지 경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가장 작아 보이는 사람 하나라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 누군가 잘못하고, 길을 잃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다음 단락이 그 문제를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은 사람마다 수호천사가 한 명씩 지정되어 있다는 견해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본문은 천사와 사람의 수가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명시하지 않으며 천사들의 구체적인 역할에 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분명한 것은 작은 사람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로 그들과 관계된 천사들이 아버지 앞에 있다는 사실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목자의 모습에는 에스겔 34장의 배경이 있습니다. 거기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자신만 돌본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시고, 자신이 직접 양들을 찾아 나서고 흩어진 양들을 모으고 상한 양을 싸매겠다고 선언하십니다(에스겔 34:1–16). 마태복음 18장이 그 본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본문에 18:11이 없는 것은 절 번호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일부 사본에는 누가복음 19:10과 유사한 문장이 들어 있지만,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 등 중요한 초기 사본에는 없어 현대 비평본문은 대체로 이를 본문에서 제외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18:15–17 본문 →

「그런데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지으면, 가서 그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의 잘못을 짚어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복음 18:15 · 본디새김

흔히 이 구절은 교회 안에서 잘못한 사람을 징계하는 절차로 읽힙니다. 그런 내용이 들어 있지만, 바로 앞의 잃은 양 비유와 연결해서 읽으면 목적이 더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부터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형제를 어떻게 다시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잘못을 짚으라고 하십니다. 공동체에 곧바로 알리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당사자 사이에서 먼저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듣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야 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19:15의 증언 원칙을 활용한 것으로, 원래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잘못을 확정하지 못하게 하여 부당한 판결을 막으려는 법적 장치였습니다. 여기에는 두 방향의 보호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자기 입장을 밝히고 돌이킬 기회를 주고,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문제 제기는 무시되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곧 모인 공동체에 말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은 마태복음 16:18과 여기뿐입니다.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이제 그 공동체가 실제 갈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면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도 못 들은 체하면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복음 18:17 · 본디새김

한 가지 읽기는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계속 인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방 사람과 세리는 종교적·사회적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사례였으므로, 공동체의 교제와 책임에 실제적인 경계를 세우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안에서 예수님 자신은 세리와 함께 식사하셨고(마태복음 9:10–13), 세리 마태를 부르셨습니다(9:9). 그러므로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를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거나 돌볼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전과 똑같은 신뢰와 공동체적 지위를 무조건 유지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을 단순한 배제의 명령으로만 읽는 것은 앞의 잃은 양 비유를 놓치는 일입니다. 반대로 아무런 경계도 세워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절차의 엄중함을 놓치는 일입니다.

특히 이 원칙을 오늘날 적용할 때는 피해자의 안전과 권리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공동체가 죄를 다루라는 것이지, 피해자가 위험한 사람을 반드시 혼자 만나야 한다거나 피해를 감수하면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공동체의 목적은 잘못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감추는 것도 아니고, 그를 응징하기 위해 진실을 이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정확하게 다루면서 사람을 되찾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말씀

마태복음 18:18–20 본문 →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땅에서 무엇을 묶든지 그것은 하늘에서 묶여 있을 것이고, 너희가 땅에서 무엇을 풀든지 그것은 하늘에서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18:18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마태복음 16:19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매우 비슷하지만, 여기서는 「너희」라는 복수형으로 공동체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묶다」와 「풀다」는 금지와 허용, 의무의 부과와 해제 같은 판단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되어 왔고, 여기서는 형제의 잘못을 다루는 문맥 속에 놓여 있습니다. 공동체가 죄와 회복을 다루는 판단에는 하늘과 관계된 책임이 따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공동체가 무엇이든 결정하면 하나님이 그대로 따라 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공동체에 권한을 주는 동시에, 그 권한이 하늘의 뜻과 분리될 수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뜻을 맞추어 구하는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19–20절은 앞의 공동체적 판단과 직접 연결해서 읽을 수도 있고, 함께 드리는 기도에 관한 더 일반적인 약속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19절이 「무엇이든」이라고 넓게 표현하기 때문에 두 읽기 모두 고려할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그 근거는 20절에 있습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내가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8:20 · 본디새김

18:2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 하나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18:20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 「가운데」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작은 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모인 제자들 가운데 직접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동체의 중심에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제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의 권위는 독립적인 권력이 될 수 없습니다. 작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잘못한 형제를 다루는 방식은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뜻에 비추어져야 합니다. 이 약속은 모인 사람이 적어도 예배가 성립한다는 위로 이상으로, 갈등을 해결하고 잘못을 판단하고 함께 기도하는 작은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을 들은 뒤 베드로가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에서 「하늘에서 묶여 있을 것이다」는 완료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늘에서 유효한 판단과 땅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 일치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문법 자체만으로 하늘의 결정이 시간적으로 얼마나 먼저 내려졌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18:2와 18:20의 그리스어에는 같은 표현, 엔 메소 아우톤(그들 가운데)이 등장합니다.

일곱 번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마태복음 18:21–22 본문 →

그때에 베드로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을 때 몇 번까지 그를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마태복음 18:21 · 본디새김

앞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질문입니다. 잘못한 형제를 찾아가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알겠지만, 그 형제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언제까지 용서해야 할까요? 일곱이라는 수는 성경에서 충만함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으므로, 베드로는 상당히 너그러운 한도를 제시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고 말한다.」마태복음 18:22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일흔일곱 번」으로도,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도 이해되어 왔습니다. 이 글이 「일흔일곱 번」을 선택한 데에는 창세기 4:24라는 배경이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가인을 위한 복수가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복수는 일흔일곱 배라고 선언합니다.

숫자의 정확한 계산보다 중요한 것은 두 본문 사이의 대조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복수가 커집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용서가 커집니다.

라멕은 자신이 입은 상처를 이유로 보복의 한도를 끝없이 확대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한도를 계산하려는 베드로에게 그 계산을 넘어서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방의 모든 행동을 받아 주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를 꾸짖고, 증인을 세우고, 필요하다면 공동체적 관계에 경계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용서하라는 말씀은 죄를 없었던 일로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마음이 언제 보복하려는 마음으로 변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다음 비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헵도메콘타키스 헵타는 「일흔일곱 번」으로도, 「일흔 번씩 일곱 번」, 곧 사백아흔 번으로도 이해되어 왔습니다. 칠십인역 창세기 4:24와 마태복음 18:22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 표현의 수적 의미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만 탈란톤을 탕감받은 사람은 왜 백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했을까?

마태복음 18:23–35 본문 →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나라를 한 왕의 이야기에 견주십니다. 왕이 자기 노예들과 셈을 맞추려 하는데, 만 탈란톤을 빚진 사람이 끌려옵니다. 동료 노예의 빚 백 데나리온의 육십만 배에 이르는, 한 노동자가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빚입니다. 핵심은 정확한 현대적 환산 가치가 아니라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데 있습니다.

왕은 그와 그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 노예는 엎드려 그에게 절하며 말했다. 『저를 오래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마태복음 18:26 · 본디새김

그러나 그 금액을 생각하면 그의 약속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노예는 이 일을 시간이 부족한 문제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시간이 주어져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왕의 반응은 예상 밖입니다.

「그 노예의 주인은 속이 뒤틀리도록 가엾이 여겨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꾸어 준 돈을 탕감해 주었다.」마태복음 18:27 · 본디새김

노예는 시간을 요청했습니다. 왕은 빚 자체를 없애 줍니다. 그가 자유롭게 된 것은 갚을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왕이 그를 가엾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왕은 빚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장부를 잘못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를 빌려 갔는지 알면서도 탕감하기로 결정합니다. 용서는 잘못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빚을 더 이상 상대방에게 청구하지 않기로 하는 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노예가 왕 앞에서 나가자마자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 노예는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노예 하나를 만났다. 그리고 그를 붙잡아 숨을 막으며 말했다. 『빚진 것이 있으면 갚아라.』」마태복음 18:28 · 본디새김

왕 앞에서 엎드렸던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의 목을 조릅니다. 이 장면은 큰돈과 작은돈의 대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의 동료 노예는 엎드려 그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저를 오래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갚아 드리겠습니다.』」마태복음 18:29 · 본디새김

26절에서 첫 번째 노예가 했던 말과 거의 같습니다. 원문에서도 「다」라는 한 단어만 빠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말을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고,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거절하고, 동료를 감옥에 넣어 버립니다.

그는 용서가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용서받는 경험을 실제로 했던 사람입니다. 본문은 그가 탐욕스러웠는지, 원한이 깊었는지,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려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그가 왕이 베푼 자비를 자기 동료에게 베풀어야 할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가 받은 용서는 그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동료 노예들이 슬퍼한 이유

「그래서 그의 동료 노예들은 일어난 일을 보고 몹시 슬퍼했다. 그리고 가서 일어난 모든 일을 자기들의 주인에게 낱낱이 밝혔다.」마태복음 18:31 · 본디새김

동료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불의는 피해 당사자 두 사람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줍니다. 그들의 행동은 죄를 모른 체하지 않고 책임 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공동체의 책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왕은 노예를 다시 불러 「악한 노예야, 네가 나에게 간청했으므로 내가 그 빚을 다 용서해 주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 노예를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았느냐?』」마태복음 18:33 · 본디새김

왕은 너도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비의 근거는 노예 안에 있지 않고, 왕이 먼저 그에게 베푼 자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왕에게 놓임을 받은 노예가 자신의 동료는 놓아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이 베푼 용서는 취소된 것일까?

왕은 분노하여 그 노예를 고문하는 이들에게 넘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마음에서 우러나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도 너희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다.」마태복음 18:35 · 본디새김

왕은 분명히 앞서 빚을 탕감해 주었지만, 마지막에는 다시 그 빚을 전부 갚을 때까지 형벌을 받도록 합니다. 비유의 세계에서는 처음 주어진 탕감이 끝까지 유지되지 않은 것입니다.

한 가지 읽기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용서를 끝까지 유지하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엄중한 조건으로 이해합니다. 이 읽기는 비유 마지막에 나오는 왕의 행동과 예수님의 경고를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다른 읽기는 용서하지 않는 행동 자체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참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원리로 삼았는지를 드러낸다고 이해합니다. 이 읽기는 왕이 먼저 아무런 대가 없이 자비를 베풀었다는 사실과, 노예가 그 자비에 전혀 합당하지 않게 행동했다는 대조를 강조합니다.

두 견해 모두 중요한 본문적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비유 하나만으로 용서와 구원의 모든 관계를 완결된 신학 체계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받은 자비와 다른 사람을 향한 무자비함을 서로 아무 관계없는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죄의 책임을 묻지 말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용서와 신뢰 회복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방을 용서한다고 해서 그가 다시 해를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판단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면서도, 복수와 증오가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구별할 수 있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1탈란톤을 6,000데나리온으로 계산하면 만 탈란톤은 6천만 데나리온으로, 백 데나리온의 육십만 배입니다. 마태복음 20:2에서 데나리온 하나는 하루 일당으로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물을 때 사용된 동사와 왕이 빚을 탕감할 때 사용된 동사는 모두 아피에미(ἀφίημι)에서 나오며, 문맥에 따라 보내 주다, 놓아주다, 용서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또 용서와 하늘 아버지의 용서를 잇는 가르침은 마태복음에서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이미 용서를 가르치셨고(마태복음 6:12), 곧이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과 하늘 아버지의 용서를 연결하셨습니다(6:14–15). 18장의 비유는 그 가르침을 구체적인 이야기로 보여 줍니다.

탕감받은 사람의 손

마태복음 18:1–35 본문 →

마태복음 18장은 마지막까지 독자를 편안하게 해 주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크기를 비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비교하는 순간 작게 보이게 되는 사람들, 곧 어린아이 하나, 넘어질 위험에 처한 작은 사람 하나, 헤매는 양 한 마리, 공동체에서 멀어질 위험에 놓인 형제 하나, 용서를 구하며 엎드린 동료 노예 하나를 주목하십니다. 작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그를 해치는 일을 심각하게 다루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자비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행동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높아지려는 마음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위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이 마지막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는 노예의 과거를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방금 무슨 일을 겪었는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조금 전까지 그는 탕감해 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은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이제 그 앞에 다른 사람이 엎드려 똑같이 기다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왕에게서 놓임을 받은 사람이 자기 동료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이냐는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왕 앞에서 자비를 구하던 노예가, 자기 앞에서 자비를 구하는 동료의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던 왕의 질문이 들려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 노예를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았느냐?」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