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마태복음 18장은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복음 18:1 · 두루새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돌이켜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지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부터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전제를 뒤집으신 것입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묻던 제자들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용서받고도 자기 동료를 용서하지 않는 노예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에서 시작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끝나는 이 두 장면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마태복음 18장은 서로 다른 교훈들을 모아 놓은 장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공동체가 어떤 가치관 위에 세워져야 하는지를 차례로 보여 주십니다. 누가 중요한 사람인지, 죄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못한 형제를 어디까지 찾아가야 하는지, 용서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규정하는 것은 결국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입니다.
가장 큰 사람을 묻자 가장 작은 사람을 세우시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 나라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면서도, 그 나라의 질서는 여전히 자신들이 익숙한 세상의 질서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옵니다. 누군가는 앞에 서고, 누군가는 뒤에 서며, 누군가는 더 큰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이를 순수함이나 천진난만함의 상징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믿음을 가지라는 교훈으로 읽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강조하시는 것은 아이의 순수함이 아닙니다.
당시에도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지위나 공적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며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8:3 · 두루새김
「돌이켜」는 마음가짐을 조금 고치는 정도의 변화가 아닙니다. 나아가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방향 자체를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복음 18:4 · 두루새김
아이가 어떤 특별한 도덕적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추구하던 높음과 반대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본보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이와 같은 처지에 놓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를 요구하지 않고, 자기의 중요성을 내세워 대접받으려 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맞아들이면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마태복음 18:5 · 두루새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이처럼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런 아이를 맞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앞의 말씀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것이고, 뒤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겸손을 개인적인 덕목으로 생각하면서, 공동체 안에서는 여전히 영향력 있는 사람만 존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능성을 차단하십니다.
작은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은 단순히 착한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누구를 중요한 사람으로 대하는지는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제자들이 물었던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제 공동체 안에서 누가 존중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무서운 경고가 이어집니다.
작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이 왜 그토록 심각한가?
예수님께서는 방금 아이를 맞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에 빠지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가라앉는 편이 낫다.」마태복음 18:6 · 두루새김
말씀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아이를 가운데 세우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바다에 가라앉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한 표현을 사용하실까요?
3–5절에서는 실제 아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6절에는 「나를 믿는」이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이제 관심은 실제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서 공동체 안에서 작고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넓어집니다. 어린아이를 제외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어린아이에게만 한정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들을 「죄에 빠지게」 하는 일입니다. 이 말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뜻으로,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도록 만드는 심각한 해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승의 힘으로 돌릴 만큼 큰 맷돌을 목에 달고 가라앉는 장면으로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큰지를 묻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 작은 사람을 죄에 빠뜨리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와 판단이 중요해질수록, 그로 인해 상처받거나 믿음에서 멀어지는 작은 사람들의 사정은 가볍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7절에서는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곧바로 그런 일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악이 현실에서 피할 수 없이 나타난다고 해서, 악을 행하는 개인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손과 발을 잘라 버리거나 눈을 빼서 던져 버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실제로 몸을 훼손하라는 명령으로 읽기보다, 죄를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철저해야 하는지를 표현하는 강렬한 비유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말씀은 앞의 경고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죄에 빠뜨리지 말라는 경고 다음에, 자기 자신을 죄에 빠뜨리는 원인을 없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서 그 해악을 만들어 내는 원인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손과 발과 눈은 행동하고, 움직이고, 바라보는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어떤 부분도 죄를 내버려 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일은 다른 사람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다른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은 사람이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짐승의 힘으로 돌릴 만큼 큰 맷돌입니다. 손과 발과 눈을 버리라는 같은 방식의 표현은 이미 마태복음 5:29–30에도 등장합니다.
아흔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가 더 중요한가?
예수님께서는 다시 「이 작은 사람들」로 돌아오십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뵙고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8:10 · 두루새김
고대 왕궁에서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왕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별한 지위를 나타내는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천사들이라는 모습은 하늘에서 그 작은 사람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땅에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이 하늘에서는 결코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은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비유의 강조점은 남아 있는 양들의 가치가 아니라, 길 잃은 한 마리를 대하는 목자의 행동에 있습니다. 숫자만으로 보면 아직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으니, 대부분을 지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렇게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 사람은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기뻐하는 것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복음 18:13 · 두루새김
「찾게 되면」이라는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을 찾는 일이 언제나 손쉽게 성공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찾는 수고와 발견의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기뻐하는 이유는 잃은 양이 다른 양들보다 특별히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을 바라보는 기쁨과 다릅니다. 잃어버릴 뻔한 사람을 되찾는 기쁨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마태복음 18:14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결과를 선언하는 문장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작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밝히는 문장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누가 중요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고, 누가 큰 사람인지 경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가장 작아 보이는 사람 하나라도 잃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 누군가 잘못하고, 길을 잃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다음 단락이 그 문제를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은 사람마다 수호천사가 한 명씩 지정되어 있다는 견해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본문은 천사와 사람의 수가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밝히지 않으며 천사들의 구체적인 역할에 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모습에는 에스겔 34장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만 돌본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시고, 자신이 직접 양들을 찾아 나서고 흩어진 양들을 모으고 상한 양을 싸매겠다고 선언하십니다(에스겔 34:1–16). 마태복음 18장이 그 본문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주제는 분명하게 이어집니다. 또 본문에 18:11이 없는 것은 절 번호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일부 사본에는 누가복음 19:10과 비슷한 문장이 들어 있지만,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 등 중요한 초기 사본에는 없어 현대 비평본문은 대체로 이를 본문에서 제외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지으면, 찾아가서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의 잘못을 짚어 주어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네 형제를 되찾은 것이다.」마태복음 18:15 · 두루새김
흔히 이 구절은 교회 안에서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징계해야 하는지에 관한 절차로 읽힙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잃은 양 비유와 연결해서 읽으면, 이 절차가 향하는 목적이 더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부터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형제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잘못을 짚어 주라고 하십니다. 공동체에 곧바로 알리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방식이 아닙니다. 당사자 사이에서 먼저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근거로 두세 증인의 말을 말씀하시며, 형제의 잘못을 다룰 때 개인의 주장만으로 판단을 확정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여기에는 두 방향의 보호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자기 입장을 밝히고 돌이킬 기회를 줍니다. 동시에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문제 제기가 무시되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곧 모인 공동체에 말해야 합니다.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복음 18:17 · 두루새김
한 가지 읽기는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계속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방 사람과 세리는 종교적·사회적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사례였으므로, 공동체의 교제와 책임에 실제적인 경계를 세우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안에서 이 표현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 자신은 세리와 함께 식사하셨고(마태복음 9:10–13), 마태복음은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전합니다(9:9). 그러므로 「이방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를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거나 돌볼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말씀이 분명히 요구하는 것은 있습니다. 계속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전과 똑같은 신뢰와 공동체 안에서의 지위를 무조건 유지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잃은 사람을 찾는 일과 죄를 눈감아 주는 일은 다릅니다.
이 원칙을 오늘날 적용할 때는 피해자의 안전과 권리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공동체가 죄를 다루라는 것이지, 피해자가 위험한 사람을 반드시 혼자 만나야 한다거나 피해를 감수하면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공동체의 목적은 잘못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감추는 것도 아니고, 그를 벌하기 위해 진실을 이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정확하게 다루면서 사람을 되찾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세 증인의 원칙은 신명기 19:15에서 온 것입니다. 원래 신명기의 규정은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범죄나 잘못을 확정하지 못하게 하여 부당한 판결을 막으려는 법적 장치였습니다. 「교회」(ἐκκλησία)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복음서에서 마태복음 16:18과 여기에만 나옵니다. 1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이제 18장에서는 그 공동체가 실제 갈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말씀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를 다루는 절차를 말씀하신 뒤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땅에서 무엇을 묶든지 그것은 하늘에서 묶여 있을 것이고, 너희가 땅에서 무엇을 풀든지 그것은 하늘에서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18:1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마태복음 16:19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16장에서는 베드로 한 사람에게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너희」라는 복수형으로 공동체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공동체가 죄와 회복을 다루는 판단에는 하늘과 관계된 책임이 따릅니다.
「묶든지」와 「풀든지」는 문맥에 따라 금지와 허용, 의무를 지우거나 풀어 주는 것 같은 판단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여기서는 형제의 잘못을 다루고 공동체의 관계를 판단하는 문맥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공동체가 무엇이든 결정하면 하나님이 그대로 따라 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공동체에 권한을 주는 동시에, 그 권한이 하늘의 뜻과 분리될 수 없음을 일깨웁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구하는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19–20절은 앞의 공동체의 판단과 직접 연결해서 읽을 수도 있고, 함께 드리는 기도에 관한 더 일반적인 약속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19절이 「무엇이든」이라고 넓게 표현하기 때문에 두 읽기 모두 고려할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중요한 것은 20절의 근거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8:20 · 두루새김
18:2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18:20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 「가운데」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작은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모인 제자들 가운데 직접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공동체의 한가운데에 누가 있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동체의 중심에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제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의 권위는 독립적인 권력이 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가 작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잘못한 형제를 다루는 방식은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뜻에 비추어져야 합니다.
이 약속은 모인 사람이 적어도 예배가 성립한다는 위로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갈등을 해결하고, 잘못을 판단하고, 함께 기도하는 작은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을 들은 뒤 베드로가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일곱 번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 물었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마태복음 18:21 · 두루새김
베드로의 질문은 앞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질문입니다. 잘못한 형제를 찾아가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언제까지 용서해야 할까요?
일곱이라는 수는 성경에서 충만함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상당히 너그러운 한도를 제시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한다.」마태복음 18:22 · 두루새김
이 숫자는 「일흔일곱 번」으로도,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도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숫자의 정확한 계산보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 4:24와의 대조입니다. 그곳에서 가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이 당한 상처에 대해, 가인을 위한 복수가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복수는 일흔일곱 배라고 선언합니다. 칠십인역 창세기 4:24와 마태복음 18:22는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창세기에서는 복수가 커집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용서가 커집니다.
라멕은 자신이 입은 상처를 이유로 보복의 한도를 끝없이 넓히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저지른 죄 앞에서 용서의 한도를 계산하려는 베드로에게 그 계산을 넘어서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방의 모든 행동을 받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의 잘못을 짚어 주고, 증인을 세우고, 필요하다면 공동체 안의 관계에 경계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용서하라는 말씀은 죄를 없었던 일로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죄를 판단하는 문제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마음이 언제 보복하려는 마음으로 변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다음 비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헵도메콘타키스(ἑβδομηκοντάκις) 헵타(ἑπτά)는 「일흔일곱 번」으로도, 「일흔 번씩 일곱 번」, 곧 사백아흔 번으로도 이해되어 왔습니다. 두루새김은 창세기 4:24라는 배경을 따라 「일흔일곱 번」으로 옮겼습니다. 다만 칠십인역 창세기 4:24와 마태복음 18:22에 함께 쓰인 이 표현이 가리키는 숫자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만 탈란톤을 탕감받은 사람은 왜 백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나라를 한 왕의 이야기에 견주십니다. 왕이 자기 노예들과 돈 계산을 하려는데, 만 탈란톤을 빚진 노예가 끌려옵니다.
만 탈란톤은 동료 노예의 빚 백 데나리온의 60만 배에 이르는 돈입니다. 데나리온 하나가 하루 일당이라는 기준으로 보면(마태복음 20:2), 한 노동자가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 금액의 핵심은 오늘날 돈으로 정확히 얼마인가에 있지 않고,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데 있습니다.
왕은 그와 그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팔아서 그 값으로 빚을 받아 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노예가 엎드려 간청합니다.
「그러자 그 노예가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모두 갚아 드리겠습니다.』」마태복음 18:26 · 두루새김
이 말에는 묘한 어긋남이 있습니다. 앞서 제시된 금액을 생각하면, 그의 약속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노예는 이 일을 시간이 부족한 문제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시간이 주어져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왕의 반응은 예상 밖입니다.
「주인은 그 노예를 불쌍히 여겨 놓아주고 빚도 없애 주었다.」마태복음 18:27 · 두루새김
노예는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왕은 빚 자체를 없애 줍니다. 그가 자유롭게 된 것은 돈을 갚을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왕이 그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왕은 빚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장부를 잘못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를 빌려 갔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 빚을 없애 주기로 결정합니다. 용서는 잘못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빚을 더 이상 상대방에게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기로 하는 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노예가 왕 앞에서 나가자마자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노예를 만나, 그의 목을 조르며 「내게 빚진 돈을 갚아라!」라고 말합니다(28절).
왕 앞에서 엎드렸던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의 목을 조릅니다.
이 장면은 큰돈을 용서받고 작은돈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금액의 대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동료 노예가 거의 같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동료 노예가 엎드려 간청했다. 『참고 기다려 줘. 갚을게.』」마태복음 18:29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26절에서 첫 번째 노예가 했던 말에서 「모두」(πᾶς)에 해당하는 한 단어만 빠졌습니다. 첫 번째 노예는 자신이 이 말을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는 용서가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용서받는 경험을 실제로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받은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 사람의 마음속 동기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탐욕스러웠는지, 원한이 깊었는지,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려 했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그가 왕이 자신에게 베푼 자비를 자기 동료에게 베풀어야 할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자기가 왕 앞에 섰을 때는 왕의 자비가 절실했습니다. 그러나 동료가 자기 앞에 서자 그 자비는 사라졌습니다.
그가 받은 용서는 그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동료 노예들이 슬퍼한 이유
「다른 동료 노예들은 이 일을 보고 몹시 슬퍼했다. 그들은 주인에게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알렸다.」마태복음 18:31 · 두루새김
동료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닙니다. 이 장면은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불의가 피해 당사자 두 사람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한 사람의 잔인함은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줍니다.
그 동료들의 행동은 앞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공동체의 책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죄를 모른 체하거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지 않고, 그 일을 책임 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은 노예를 다시 불러 「악한 노예야, 네가 간청하기에 나는 네 빚을 모두 없애 주었다」라고 말하고,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하지 않느냐?』」마태복음 18:33 · 두루새김
왕은 단순히 너도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비의 근거는 노예 안에 있지 않습니다. 왕이 먼저 그에게 베푼 자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왕이 베푼 용서는 취소된 것일까?
왕은 화가 나서 그 노예를 고문하는 사람들에게 넘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너희도 저마다 자기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복음 18:35 · 두루새김
왕은 분명히 앞서 빚을 없애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다시 그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형벌을 받도록 합니다. 비유의 세계에서는 처음 주어진 탕감이 끝까지 유지되지 않은 것입니다.
한 가지 읽기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용서를 끝까지 유지하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엄중한 조건으로 이해합니다. 이 읽기는 비유 마지막에 나오는 왕의 행동과 예수님의 경고를 근거로 삼습니다.
다른 읽기는 용서하지 않는 행동 자체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참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원리로 삼았는지를 드러낸다고 이해합니다. 이 읽기는 왕이 먼저 아무런 대가 없이 자비를 베풀었다는 사실과, 노예가 그 자비에 전혀 합당하지 않게 행동했다는 대조를 근거로 삼습니다.
두 견해 모두 본문에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비유 하나만으로 용서와 구원의 모든 관계를 완결된 신학 체계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받은 자비와 다른 사람을 향한 무자비함을 서로 아무 관계없는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한 가지 구별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죄의 책임을 묻지 말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을 용서한다고 해서 그가 다시 해를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판단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면서도, 복수와 증오가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구별할 수 있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만 탈란톤은 1탈란톤을 6,000데나리온으로 보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계산하면 6천만 데나리온이고, 백 데나리온의 60만 배입니다. 또 베드로가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물을 때 사용된 동사와 왕이 노예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줄 때 사용된 동사는 모두 아피에미(ἀφίημι)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이 동사는 문맥에 따라 보내 주다, 놓아주다, 용서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왕에게 용서받은 노예가 자신의 동료는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이것은 처음 등장하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이미 용서를 가르치셨고(마태복음 6:12), 곧이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과 하늘 아버지의 용서를 연결하셨습니다(6:14–15). 18장의 비유는 그 가르침을 구체적인 이야기로 보여 줍니다.
탕감받은 사람의 손
제자들은 사람들의 크기를 비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비교하는 순간 작게 보이게 되는 사람들을 주목하십니다. 어린아이 하나, 죄에 빠질 위험에 처한 작은 사람 하나, 길을 잃은 양 한 마리, 공동체에서 멀어질 위험에 놓인 형제 하나, 용서를 구하며 엎드린 동료 노예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사람을 해치는 죄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그토록 엄격하게 다루시는 것은 하나님이 작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잃은 사람을 찾기 바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 그것이 이 장에서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은 마지막까지 독자를 편안하게 해 주지 않습니다.
탕감받은 노예의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의 과거를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방금 무슨 일을 겪었는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조금 전까지 그는 빚을 없애 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은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이제 그 앞에 다른 사람이 엎드려 똑같이 기다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왕에게서 놓임을 받은 사람이 자기 동료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이냐는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왕 앞에서 자비를 구하던 노예가, 자기 앞에서 자비를 구하는 동료의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던 왕의 질문이 들려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하지 않느냐?」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