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들 것인가

마태복음 19장에는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이유를 묻는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아내와의 관계를 끝낼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에게 데려온 아이들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요구하거나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려 하지만, 제자들이 그 길을 막습니다.

세 번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젊은이입니다. 그는 계명도 지켰고 많은 재산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시자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이 맺어 주신 관계를 쉽게 끝낼 수 있는 이유를 찾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가로막힙니다. 또 누군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을 놓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이유를 묻고, 젊은이는 무엇을 해야 얻을 수 있는지 묻고, 베드로는 버린 대가로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 질문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사람이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어느 누구에게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결혼 관계를 쉽게 끝내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사람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지만, 계명을 지켰다는 사람에게는 재산을 내려놓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에게 놀라운 보상을 약속하시면서도,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단순히 얼마나 많이 버릴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따라, 어떤 마음으로 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719장 본문 읽기 →

모세는 이혼을 명령했을까?

마태복음 19:1–9 본문 →

마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편 유대 지역으로 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을 마치신 뒤」라는 첫 문장의 표현은 마태가 예수님의 긴 가르침을 마무리할 때 사용하는 일정한 표현으로, 7:28, 11:1, 13:53에 이어 네 번째로 등장합니다.

이제 이야기는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정으로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많은 무리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 질문을 던집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다가와 물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남편이 아내와 이혼해도 됩니까?」마태복음 19:3 · 두루새김

「어떤 이유로든」이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신명기 24:1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습니다. 신명기에는 남자가 아내에게서 어떤 부적절한 일을 발견하여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내보내는 상황이 등장하는데, 어떤 이유가 이혼을 정당화할 만큼 심각한 것인지는 해석이 갈렸습니다.

후대에 편집된 유대교 문헌인 미슈나 《기틴》 9:10은 서로 다른 입장을 전합니다. 샴마이 학파는 성적으로 중대한 잘못을 이혼 사유로 보았고, 힐렐 학파는 아내가 음식을 태운 것과 같은 사소한 일까지 허용하는 넓은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은 이런 논쟁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까지 허용됩니까? 어디에 경계선을 그어야 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제시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읽어 보지 못했느냐? 처음에 사람을 지으신 분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마태복음 19:4 · 두루새김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고, 둘은 한 몸이 될 것이다.』」마태복음 19:5 · 두루새김

여기에는 창세기 1:27과 2:24가 함께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창세기 2장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관계를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본문을 연결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결혼을 어떻게 끝낼 수 있는지 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하신 일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복음 19:6 · 두루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서는 남편이 주어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이혼해도 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에서는 하나님이 주어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결혼을 남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의 문제로 바라보던 질문을, 하나님이 이루신 관계에 대해 사람이 어떤 책임을 지는가라는 문제로 바꾸신 것입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은 부부의 성적인 결합만을 가리키는 말로 좁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창세기 2:24에서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부모와의 기존 관계를 떠나 새로운 결합을 이루는 삶의 변화를 함께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단순히 필요에 따라 유지하거나 끝내는 계약처럼 취급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왜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고 아내와 이혼하라고 명령했습니까?」마태복음 19:7 · 두루새김

이 질문에는 예수님의 입장과 모세의 율법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세는 너희 마음이 굳었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마태복음 19:8 · 두루새김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가 명령했다고 말했고,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허락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명령과 허락은 전혀 다릅니다.

실제로 신명기 24:1–4를 읽어 보면, 그 규정의 중심은 남자에게 이혼하라고 명령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남자가 아내를 내보낸 뒤 그 여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그 두 번째 결혼도 끝났을 때 첫 번째 남편이 그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다는 규정입니다. 본문은 이미 존재하는 이혼과 재혼의 현실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특정한 행위를 금지할 뿐, 모든 남자에게 이혼을 명령하는 말씀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너희 마음이 굳었기 때문에」라고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겨냥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셨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집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법이 어떤 상황을 허용하거나 제한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바라신 가장 좋은 모습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 그리고 그 규정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바라신 뜻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음행 때문이 아닌데도」라는 단서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예외를 언급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 때문이 아닌데도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마태복음 19:9 · 두루새김

「음행」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는 성적으로 부정한 행위를 넓게 가리키는 말이어서, 여기서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견해가 갈립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읽기는 배우자의 성적 부정을 가리킨다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정당한 성적 부정의 사유 없이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하는 행위를 간음이라고 규정하십니다. 다른 읽기는 이 표현을 율법상 허용되지 않는 결혼 관계나 약혼 중의 성적 부정 같은 더 제한된 상황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 한 절로 이혼과 재혼에 관한 모든 상황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적인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이유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려는 시도를 거부하십니다. 당시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이혼의 권한을, 하나님이 맺어 주신 관계에 대한 책임 앞에 세우십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의 폭력적이거나 위험한 결혼 관계에 적용할 때에도 그 방향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모든 형태의 학대와 강압에 대한 구체적인 대처 절차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결혼을 소중히 여기셨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위험을 감수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출발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쉽게 버릴 수 있는 권리를 강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함부로 버릴 수 없다는 책임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미슈나는 후대에 편집된 문헌이므로, 기록된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의 논쟁의 모든 세부 사항이 예수님 당시에도 정확히 같은 형태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9절의 예외가 이혼 자체를 허용하는 것인지, 재혼까지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관해서도 견해가 갈립니다. 이 문제는 마태복음 5:32와 마가복음 10:11–12를 함께 읽을 때 더욱 중요해집니다.

그렇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마태복음 19:10–12 본문 →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제자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렇다면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마태복음 19:10 · 두루새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제자들의 반응이 오히려 더 솔직해 보입니다. 결혼이라는 관계에 들어가면 나중에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 관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면 결혼은 부담스러운 선택이 됩니다. 제자들은 결혼의 가치를 묻기보다, 결혼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따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에 곧바로 동의하거나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두가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받은 사람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마태복음 19:11 · 두루새김

여기서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조금 모호합니다. 바로 앞에서 제자들이 말한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판단으로 볼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엄격한 결혼 관계의 가르침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12절이 결혼하지 않는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문맥상 독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종류의 고자를 말씀하십니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이 고자로 만든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하늘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복음 19:12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오늘날 독자에게 낯설고 거칠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당시 고자라는 말은 신체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면서, 여러 사회적 역할 및 결혼과 출산의 가능성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부류는 대체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독신의 삶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몸을 훼손하라고 명령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을 절대적인 의무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바로 앞에서 결혼을 하나님이 맺어 주시는 소중한 관계로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는 삶도 말씀하십니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결혼이 소중하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결혼하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결혼이 덜 거룩한 삶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결혼을 자신의 유익에 따라 판단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이든 독신이든 하나님 나라 앞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문제로 그 시선을 옮기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결혼과 출산을 둘러싼 논의는 실제 아이들의 등장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독신과 금욕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해석 외에, 당시 고자에게 따르던 사회적 낙인이나 지위의 상실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도 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56:3–5는 이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만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자녀를 낳지 못하는 고자라도 자신의 언약을 지키는 사람에게 자녀보다 나은 이름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사야의 본래 관심은 하나님 백성 안에서 배제되기 쉬운 이들에게도 언약의 미래가 열려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결혼과 출산의 여부가 하나님 나라에서 한 사람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제자들이 막은 아이들을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이십니다

마태복음 19:13–15 본문 →

그때 사람들이 예수께서 아이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며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마태복음 19:13 · 두루새김

앞에서는 어른들이 결혼 관계를 두고 논쟁했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옵니다.

왜 제자들은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었을까요? 본문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예수님의 시간을 빼앗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들에게 우선권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어 아이들이 오는 일을 막았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은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막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이 내게 오게 두어라. 막지 마라. 하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9:14 · 두루새김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이번에는 실제로 찾아온 아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오지 못하도록 제자들이 막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들었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입니다.

하늘의 나라가 「이런 사람들의 것」인 것은 아이들이 어떤 특별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도, 율법에 관한 어려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와야 하고, 제자들이 길을 막으면 스스로 그 장벽을 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가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장면은 「아이들에게 손을 얹은 뒤 그곳을 떠나셨습니다」로 끝납니다.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이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긴 설명으로 이 일을 끝내지 않으시고, 실제로 아이들에게 손을 얹으십니다.

그런데 이 장면 바로 뒤에, 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다가옵니다.

이번에는 스스로 걸어와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이들과 달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계명을 알고 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예수님에게 다가와 그분의 손길을 받습니다. 젊은이는 예수님에게 다가왔다가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할까?

마태복음 19:16–22 본문 →

어떤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복음 19:16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진지합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왜 나에게 선한 것에 관해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다. 생명에 들어가고 싶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복음 19:17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먼저 「선한」이라는 말을 받아 말씀하십니다. 그 한 분이 누구인지 이 문장에서는 직접 이름 대지 않지만, 문맥상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함의 기준을 인간이 행하는 개별적인 행동에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리시고, 그런 다음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어떤 계명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훔치지 마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마라.』」마태복음 19:18 · 두루새김

그는 선한 일을 물었고, 이제는 어떤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지 묻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을 금지하는 계명과 부모 공경의 계명을 말씀하시고, 레위기 19:18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마태복음 19:1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직접 다루는 계명들보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계명들을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묻는 사람 앞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놓으십니다.

그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제게 아직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복음 19:20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 주장이 거짓이라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본문도 그가 실제로 어떤 죄를 감추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그가 위선자였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 보물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복음 19:21 · 두루새김

계명을 더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온전한」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5:48에서도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하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온전함은 단순히 계명 몇 가지를 빠짐없이 지키는 상태를 넘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의 결론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을 이 젊은이에게 사용하십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계명의 마지막은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사랑이 그의 재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물으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일은 단순히 선행 목록에 새로운 항목을 하나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던 재산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놓는 일입니다. 여기서 그가 계명을 지켜 온 일과 실제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와서 나를 따라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마지막 초대입니다.

그가 찾고 있던 것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것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대화의 중심이 선한 행위의 목록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관계로 옮겨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율법을 잘 해석해 주는 선생님으로 머물지 않으시고, 자신을 따르라는 요청을 영원한 생명에 관한 대답의 중심에 놓으십니다.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던 사람은 이제 예수님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가 슬퍼한 이유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났습니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9:22 · 두루새김

마태는 그가 화를 냈다고도, 예수님의 말씀이 부당하다고 항의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슬퍼합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도,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재산은 단순히 그가 소유한 물건들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실제로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는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가난한 사람은 재산을 포기할 필요가 없고 부자만 포기해야 한다는 단순한 규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모든 재산을 버리라는 요구를 단지 마음속에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이 사람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셨고, 그 명령은 그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요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에 보물」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태복음 6:19–21에서 예수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이 이제 한 사람의 삶에서 구체적인 선택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이 가진 많은 재산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아직 가지지 못한 하늘의 보물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0:17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단순히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해야 할 「선한 일」을 묻습니다. 마태복음의 서술에서는 선함이라는 문제가 예수님에 대한 호칭보다 사람이 행해야 할 일에 집중되고,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 질문을 받아 말씀하십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마태복음 19:23–26 본문 →

젊은이가 떠나간 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는 하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십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마태복음 19:2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큰 동물인 낙타와, 바늘에 난 극히 작은 구멍을 대조하십니다. 낙타가 짐을 내려놓으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다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마태복음 19:25 · 두루새김

여기서 질문이 달라졌습니다.

조금 전 젊은이는 자신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젊은이의 질문은 자신의 행동에 초점이 있었고, 제자들의 질문은 구원 자체의 가능성으로 옮겨갑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에게 하신 말씀이 단순히 부자를 위한 특별한 규칙이었다면, 제자들이 이렇게까지 놀랄 이유가 적습니다. 부자에게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그토록 어렵다면, 도대체 누가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마태복음 19:26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충분히 겸손해지고 재산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단순히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능력 자체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계명을 지키라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셨을까요? 그 명령이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요청은 그 젊은이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 드러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선한 일과 지킨 계명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많은 재산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재산을 내려놓으라는 말씀 앞에서 그는 멈추었습니다.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많은 선행을 했다는 사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은 부자도 결국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보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자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선언도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가능성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실제적인 순종을 요구하셨지만, 그 순종의 문제를 다루시면서도 구원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인간의 능력으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자신의 선행과 재산과 성취를 모두 합산하여 얻어 낼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예루살렘 성벽에 「바늘구멍」이라는 작은 문이 있었고, 낙타가 짐을 내려놓고 몸을 낮추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는 오래된 해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실제 지리적 사실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낙타가 짐을 내려놓으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다는 정도로 완화해서 이해하지 않는 편이 본문의 흐름에 맞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받습니까?

마태복음 19:27–30 본문 →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복음 19:27 · 두루새김

베드로의 말에는 실제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앞의 젊은이는 재산을 내려놓지 못하고 떠났지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업과 삶의 기반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4:18–22에서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떠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젊은이가 하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신이 무엇을 버렸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버린 대가로 무엇을 받게 될 것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이 질문을 무조건 탐욕스럽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많은 것을 포기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십니다.

이제 문제는 부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자신이 한 일을 근거로 어떤 보상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계산을 어떻게 다루실까요?

세상이 새로워지는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세상이 새로워지는 때에 인자가 영광스러운 자기 왕좌에 앉을 것이다. 그때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복음 19:28 · 두루새김

「세상이 새로워지는 때」로 옮긴 그리스어 팔링게네시아(παλιγγενεσία)는 다시 새로워짐이나 새롭게 태어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인자가 영광스러운 자기 왕좌에 앉으시는 때와 연결되므로, 개인적인 영적 거듭남보다는 장차 이루어질 새로운 질서나 세상의 새로워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새로워지는지,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다니엘 7장의 환상이 중요한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다니엘 7:9–14에는 왕좌들이 놓이고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면과, 인자 같은 이가 하나님께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환상의 표현을 자신에게 적용하시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열두 왕좌에 앉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열두 왕좌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서로 대응하는 것은 제자들이 이스라엘 전체와 관계된 권위와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은 판결과 통치의 의미를 함께 가질 수 있지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이 구절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단순히 현재의 손해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생업을 버리고 불확실한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하게 될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에서 중심이 되는 분은 제자들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자기 왕좌에 앉으시는 인자이십니다.

제자들의 영광은 그분의 영광에서 비롯됩니다.

백 배를 받는다는 약속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만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녀나 밭을 버린 사람은 누구나 백 배를 받고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다.」마태복음 19:29 · 두루새김

열두 왕좌에 관한 약속은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에게 주어졌지만, 집과 가족과 밭을 버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누구나」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라는 표현이 붙어 있습니다. 모든 포기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은 아니며, 무엇인가를 버렸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 때문에 포기한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불편한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장 앞부분에서 하나님이 맺어 주신 결혼 관계를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가족을 떠나는 사람에게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이 둘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두 장면이 다루는 문제가 다릅니다. 앞에서는 남자가 자기 권리를 행사하여 아내와 이혼하는 일을 다루었고, 여기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집과 가족 관계와 생업을 포기하게 되는 일을 다룹니다. 이 말씀을 배우자나 자녀에 대한 책임을 마음대로 버려도 된다는 허가로 읽는 것은 앞의 가르침과 충돌합니다.

오히려 이 장 전체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관계를 자신의 편의에 따라 이용하거나 내버리는 태도를 바로잡으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따르는 길이 때로는 가장 가까운 관계와 생업의 기반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요구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시고, 그런 사람에게 백 배를 약속하십니다.

재산을 팔면 하나님이 정확히 백 배의 돈을 돌려주신다는 보장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무엇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백 배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포기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 헛되지 않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물려받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것과 다릅니다. 상속은 본래 상속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근거합니다.

이 표현 하나만으로 순종과 보상의 관계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생명이 단순히 인간의 성취를 계산하여 지급하는 보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첫째인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인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첫째가 될 것이다.」마태복음 19:30 · 두루새김

앞에서 약속하신 놀라운 보상이 새로운 서열 경쟁의 근거가 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이 말씀을 두십니다.

누가 먼저 왔습니까.

누가 더 많이 버렸습니까.

누가 더 큰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들은 얼마든지 다시 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헌신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크고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는 일은 경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금 첫째로 보이는 사람이 언제나 첫째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지막 말씀은 다음 장에서 이어지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됩니다. 그러나 우선 19장 안에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마지막 대답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렸는지 계산하는 제자들 앞에 놓인 경고이자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0:28의 같은 장면에서는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말하는 데 그칩니다. 마태는 그 뒤에 보상을 묻는 질문을 덧붙이고, 이 때문에 대화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세상이 새로워지는 때」로 옮긴 말은 마태복음에서 여기 한 번 등장하며, 신약 전체에서는 디도서 3:5에도 사용됩니다. 다만 디도서에서는 구원받는 사람의 새로워짐과 연결되어, 두 본문에서 가리키는 대상과 문맥이 다릅니다. 다니엘 7장의 환상은 당시 억압받던 하나님의 백성이 짐승 같은 제국들의 지배 아래 영원히 머물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궁극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과 모든 것을 버린 사람

마태복음 19:1–30 본문 →

이 장의 마지막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젊은이는 영원한 생명을 원해 진지하게 질문했지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는 말씀 앞에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젊은이가 내려놓지 못한 것을 실제로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질문 사이에는 묘한 닮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이 행한 일의 대가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똑같이 대하지 않으십니다. 젊은이에게는 재산을 내려놓으라고 하셨고, 베드로에게는 큰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주신 약속도 계산을 끝내 주지는 않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버렸다고 해서 그 나라에서 자신의 자리를 미리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자신이 가진 것을 의지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자신이 버린 것을 새로운 자랑으로 삼는 길도 아닙니다.

결혼 관계를 지키는 일에서도, 결혼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일에서도,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나누는 일에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일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삶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그분은 단순히 율법에 관한 정답을 알려 주시는 교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를 자신의 부르심과 연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중심은 결국 예수님 자신에게로 모입니다.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인간의 순종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고, 사람이 자신의 순종을 어떤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바꿉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나 행한 일을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의 자격을 확보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 그 나라를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마태복음 19장에는 두 사람의 움직임이 남아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젊은이는 슬퍼하며 예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모든 것을 버린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서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떠나는 젊은이를 쫓아가 조건을 낮추지도 않으시고,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는 이유로 그에게 첫째 자리를 확정해 주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하신 뒤, 마지막으로 「첫째인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인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는 베드로 앞에, 이제 그가 아직 다 헤아리지 못한 하나님 나라가 펼쳐져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