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마지막 사람을 먼저 부르시는 분
하루 종일 포도밭에서 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해 힘들게 일하며 뜨거운 햇볕을 견뎠습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그들은 약속한 품삯을 정확히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자신들이 적게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 사람들은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어요」라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항의는 쉽게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돈을 받는다면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인은 뜻밖의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너그럽게 베푼다고 해서 시기하는 건가요?」 그는 일의 양이나 품삯을 계산하는 방법을 더 이상 설명하지 않습니다. 일꾼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문제 삼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은 눈에 관한 이야기로 끝납니다. 여리고를 떠나는 길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주님, 저희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손을 대어 보게 하십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의 다툼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먼저 일한 사람들은 다른 일꾼들의 품삯을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나라에서 차지할 높은 자리를 바라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십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눈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시는 분을 바라보는 눈으로 이끄십니다.
왜 주인은 하루에 다섯 번이나 일꾼을 구하러 나갔을까?
마태복음 20장은 앞 장의 마지막 말씀, 곧 첫째인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인 사람들이 첫째가 될 것이라는 말씀(19:30)에 이어집니다. 앞 장에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자신들에게 무엇이 돌아오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나라는」이라는 말로, 품삯을 받는 일꾼들의 이야기로 그 질문을 다루십니다.
이야기는 이른 아침에 시작됩니다.
집주인은 포도밭에서 일할 사람들을 구하러 나갑니다. 첫 번째 일꾼들과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합니다. 그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얼마를 받을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다시 장터로 나갑니다.
아침 아홉 시쯤에 나갔고, 낮 열두 시쯤과 오후 세 시쯤에도,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갔습니다. 원문의 셋째 시, 여섯째 시, 아홉째 시, 열한째 시를 두루새김은 당시의 일반적인 낮 시간 계산에 따라 이렇게 옮겼습니다. 마지막 일꾼들이 하루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뽑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주인이 계속해서 장터로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포도밭에 일꾼이 더 필요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일손이 부족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주인이 여러 차례 나가서 아직 일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세요. 알맞은 품삯을 줄게요.』」마태복음 20:4 · 두루새김
처음 일꾼들은 한 데나리온이라는 구체적인 금액을 약속받았습니다. 나중에 뽑힌 사람들은 정확히 얼마를 받게 될지 모른 채 포도밭으로 갑니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 주인은 또 다른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 주인이 그들에게 물었다. 『왜 하루 종일 여기서 일하지 않고 서 있어요?』」마태복음 20:6 · 두루새김
우리는 쉽게 그들이 게으른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찍 뽑힌 사람들은 부지런했고, 늦게 뽑힌 사람들은 늦잠을 자거나 놀고 있었던 것처럼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다릅니다.
「그들이 대답했다. 『아무도 우리를 일꾼으로 쓰지 않았어요.』 주인이 말했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세요.』」마태복음 20:7 · 두루새김
일하지 않은 사람과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이 왜 뽑히지 않았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게으른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주인도 더 캐묻지 않고 그저 포도밭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처음 일꾼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고, 그다음 일꾼들에게는 알맞은 품삯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사람들에게는 품삯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품삯에 관한 설명은 줄어들고, 주인이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내는 행동이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주인은 품삯을 주는 순서에서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주인은 왜 마지막 사람부터 품삯을 주었을까?
「저녁이 되자 포도밭 주인은 일을 맡아보는 사람에게 말했다. 『일꾼들을 불러서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맨 처음에 온 사람까지 차례로 품삯을 주어라.』」마태복음 20:8 · 두루새김
하루가 끝났을 때 품삯을 주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율법과도 잘 맞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마지막 사람들부터 먼저 주라는 특이한 지시를 내립니다.
그 효과는 분명합니다. 마지막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모습을 처음 온 사람들이 보게 됩니다. 주인이 처음 온 사람들에게 먼저 주고 돌려보냈다면, 그들은 약속한 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처음에 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더 많이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마태복음 20:10 · 두루새김
처음 온 일꾼들은 아침에 그 금액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는 똑같은 한 데나리온을 받고도 불만을 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 달라진 것도, 약속한 금액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사실입니다.
「『저 사람들은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며 더위를 견뎠어요. 그런데 저 사람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돈을 주셨어요.』」마태복음 20:12 · 두루새김
그들은 약속한 금액보다 적게 받았다고 항의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처음 온 사람들은 실제로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일한 양의 차이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주장이나, 현실 사회의 경제 제도를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의 수고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자격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은 불공정한 사람인가?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대답했다. 『이보세요. 나는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없어요. 나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마태복음 20:13 · 두루새김
「『당신 몫을 가지고 가세요. 나는 마지막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 주고 싶어요.』」마태복음 20:14 · 두루새김
주인은 처음 일꾼에게 돌아갈 몫을 빼앗아 마지막 일꾼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처음 일꾼에게는 약속에 맞게 정당한 품삯을 주었고, 마지막 일꾼에게는 예상 밖으로 후한 품삯을 준 것입니다.
그는 약속을 지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선하게 대하고 싶은 사람에게 더 베풉니다. 두 가지 행동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처음 일꾼들은 두 번째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 것을 내 뜻대로 쓸 수 없나요? 내가 너그럽게 베푼다고 해서 시기하는 건가요?』」마태복음 20:15 · 두루새김
선한 주인을 바라보는 악한 눈
「시기하는 건가요」의 원문은 호 옵탈모스 수 포네로스, 곧 「네 눈이 악하다」는 표현입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얻거나 후하게 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를 가리키며, 두루새김은 이 뜻을 「시기하는 건가요」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은 듣기에 좋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선함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후하게 베풀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에도 그것을 선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처음 일꾼들은 주인이 자기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기를 원했지만, 마지막 일꾼들에게도 선하게 대해 주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선함을 자신들이 받은 몫으로만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묻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도 너그럽게 베풀기 때문에 네가 불행해져야 하느냐고.
마지막 사람이 첫째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꼴찌인 사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인 사람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복음 20:16 · 두루새김
마지막 사람은 먼저 품삯을 받았고, 처음 사람은 나중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이 더 많이 받은 것도, 처음 사람이 약속보다 적게 받은 것도 아닙니다.
순서가 뒤집혔지만 금액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첫째와 꼴찌의 뒤바뀜은 보상 순위가 거꾸로 바뀐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누가 먼저 인정받을 자격이 있는가, 누가 더 많이 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기존의 기준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비유는 먼저 부름받은 이스라엘과 나중에 부름받은 이방인, 혹은 일찍 믿은 사람과 뒤늦게 믿은 사람의 관계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런 읽기는 후대의 신학적 적용으로 가능하지만, 비유 자체가 각각의 일꾼이 어느 집단을 상징한다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앞 문맥인 베드로의 질문을 기억하면, 예수님을 오랫동안 따랐다는 사실이 늦게 부름받은 사람보다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초점이 분명해집니다.
처음 일꾼들도 마지막 일꾼들도 하루 품삯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선함을 보고 기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4:14–15는 가난한 일꾼을 억누르지 말고 그날의 품삯을 해가 지기 전에 주라고 명령합니다. 그 사람이 가난하여 그 품삯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눈」과 비슷한 표현은 신명기 15:9에도 나옵니다. 빚을 면제해 주는 해가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가난한 형제를 인색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는 마음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상황을 다루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선함을 인색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또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선한 일을 묻는 젊은이에게 선한 분은 한 분뿐이라고 말씀하셨는데(19:17), 원문에서는 그 장면과 20:15에 같은 형용사 「선한」이 등장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비유에서 주인의 선함을 「너그럽게 베푼다고」라는 말로 풀어 옮겼습니다. 앞에서는 선함이 누구에게서 나오는지가 문제였다면, 여기서는 선함을 마주하는 사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높은 자리를 말씀하시기 전에 십자가를 예고하셨을까?
포도밭 비유가 끝나자 장면이 갑자기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서 자신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마태복음 20:18 · 두루새김
그리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져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며,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과 부활의 예고는 이미 16:21과 17:22–23에 나왔지만, 이번에는 사건이 어떻게 이어질지 훨씬 구체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그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계신지, 그곳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되실지 알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십니다.
포도밭 비유에서는 주인이 마지막 사람들에게까지 후하게 베푸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유에서는 주인이 자기 돈을 내어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실 길로 가십니다.
두 장면이 같은 사건의 상징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선함이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푸는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선함을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왕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청한 사람들
그때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절하며 무엇인가를 청합니다.
예수께서 그 어머니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바라느냐?」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제 두 아들 가운데 하나는 주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태복음 20:21 · 두루새김
그녀는 예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게 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앞 장에서 인자가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때 제자들도 열두 왕좌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28). 높은 자리에 관한 기대가 근거 없는 상상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나라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머니와 아들들이 관심을 두는 것은 그 이후에 자신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20:22 · 두루새김
「너희」는 여러 사람을 가리킵니다. 어머니가 요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에게 대답하시고 그들이 직접 대답합니다. 그 잔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잔은 때로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고난이나 심판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그 뜻은 점차 분명해지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 잔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십니다(26:39).
예수께서 두 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주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내 아버지께서 그 자리를 마련해 주신 사람들이 거기에 앉게 된다.」마태복음 20:2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대답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도 고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청받은 자리를 마음대로 약속하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자리를 정하는 일이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시는 데 달려 있다는 강조입니다.
영광의 자리는 제자들이 먼저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열 제자가 그 일을 듣고 화가 납니다. 두 형제가 높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요청을 부당하게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방금 들은 열두 제자 사이에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로 갈등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10:35–37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요청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어머니가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이 「너희」를 향하므로 아들들이 그 요청의 책임에서 빠지지는 않습니다. 잔의 구약 배경으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잔이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는 시편 75:8,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신 것으로 그려지는 이사야 51:17이 있습니다. 다만 20:22만으로 그 잔의 모든 의미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또 제자들의 고난이 예수님의 죽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별은 28절의 「몸값」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크고 싶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세상의 권력 구조에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억누르며 다스리고, 높은 사람들은 백성에게 권력을 휘두른다.」마태복음 20:25 · 두루새김
그 세계에서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행사되었습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이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구한 것도 이런 구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사이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 큰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복음 20:26 · 두루새김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너희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마태복음 20:27 · 두루새김
「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고, 「노예」는 자유로운 신분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매인 사람입니다. 두 표현은 같은 뜻의 반복이 아니라 한층 강해집니다. 높은 자리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를 가리키십니다.
이것은 겸손하게 행동하면 나중에 더 높은 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처세술이 아닙니다. 그렇게 읽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에 불과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에 두고 이용하는 방식으로 큰 사람이 되려는 생각 자체를 바꾸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얼마나 많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 자신을 얼마나 내어놓는가로 정해집니다. 공동체 안에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권력을 휘두르는 권리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책임을 지는 자리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권력자에게 봉사를 요구하는 말씀이지, 약한 사람에게 부당한 지배를 참으라고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자는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내주러 왔다.」마태복음 20:28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람이 되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섬김의 근거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다니엘 7:13–14와 연결됩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고, 모든 민족이 그를 섬깁니다.
그런데 그 인자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영광의 왕좌에 앉으실 인자가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러 오셨다는 역설입니다. 그 섬김은 시간이나 재산을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주시는 데까지 이릅니다.
몸값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
「몸값」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뤼트론(λύτρον)입니다. 매여 있는 사람을 풀어 주거나 포로를 놓아주기 위해 치르는 값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20:28에서 그 값은 예수님 자신의 생명이며, 그 생명은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주어집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대속, 곧 대신 값을 치러 구원하는 일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 몸값이 누구에게 지급되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이 문장의 직접적인 강조점은 예수님 한 사람의 생명이 많은 사람을 위해 주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준다는 표현은 이사야 53:10–12와 주제상 강하게 연결됩니다. 마태는 다니엘 7장의 영광스러운 인자와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예수님께서는 왕권을 권력을 휘두르는 방식이 아니라 생명을 내주시는 방식으로 사용하시고, 그분 자신이 먼저 그 길을 걸으시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잔과 예수님의 몸값
예수님께서는 두 형제에게 자신의 잔을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많은 사람의 몸값이 되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몸값이 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섬김은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몸값으로 내주시는 일은 제자들의 선행으로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섬김은 우리에게 모범이 되면서 동시에 우리를 위한 구원의 행동이 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 나라의 지위를 얻으려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하신 일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뤼트론은 사람을 풀어 주기 위해 지급하는 값을 가리킵니다. 출애굽기 21:30에는 생명을 대신하여 치르는 돈의 개념이, 레위기 25:47–55에는 가난 때문에 종이 된 사람을 값을 치르고 풀어 주는 규정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의 「대신하여」는 문맥상 대신함이나 교환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많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특정한 구원받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을 아우르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하나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며, 그 종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해석의 중요한 쟁점입니다. 마태복음은 여기서 이사야 53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질문에 전혀 다른 대답을 한 사람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많은 무리가 그분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길가에 앞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마태복음 20:30 · 두루새김
「다윗의 자손」은 다윗 왕의 계보와 연결되는 메시아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을 왕의 권위를 지닌 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그 왕에게 구하는 것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무리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지만 두 사람은 더욱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마태복음 20:31 · 두루새김
무리가 왜 꾸짖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막으려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멈추어 서서 두 사람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태복음 20:32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겪으실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을 가시다가, 무리가 막으려던 외침을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십니다.
이 질문은 조금 전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에게 하신 「무엇을 바라느냐?」(20:21)를 떠올리게 합니다. 두 질문에는 「바라다」(θέλω)를 뜻하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쓰입니다. 그런데 대답은 크게 다릅니다.
앞에서는 자신들에게 주어질 영광을 구했습니다. 여기서는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자신들의 높은 지위와 연결했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왕권을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실 수 있는 능력과 연결했습니다.
두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태복음 20:33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셔서 물으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질문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하고 예수님께서 응답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눈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랐습니다.마태복음 20:34 · 두루새김
「불쌍히 여겨」는 깊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쌍히 여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마음은 감정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분은 멈추어 서셨고, 그들을 부르셨고, 요청을 들으셨고, 눈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야기는 그들이 시력을 되찾았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로 끝납니다.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 못지않게, 이제 누구를 따라가는지가 중요합니다.
눈이 보이는데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포도밭에서 먼저 일한 사람들은 다른 일꾼들의 품삯을 보았지만, 주인의 너그러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원문에서 그들은 눈이 악하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지만, 그분이 생명을 내주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말씀을 듣고도 높은 자리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볼 수 없었지만,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제자들이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모습과 대비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마태가 제자들을 직접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므로, 이 대조는 이야기의 배치와 주제에서 발견되는 문학적 해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멈춰 서신 다윗의 자손
마태복음 20장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기준은 뒤집히지만 없어지지 않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약속을 지켰고, 일꾼들은 정당한 품삯을 받았으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자리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의나 권위나 보상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새롭게 밝히십니다. 하나님의 선함은 인간이 정해 놓은 자격의 순서에 갇히지 않으면서,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왕이 무엇을 하시는 모습으로 이 장을 끝냅니까?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길가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무리는 그들을 조용히 시키려 하지만, 그들은 더 크게 외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멈추어 서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분이, 길가에 앉은 두 사람의 외침 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조금 전 두 제자에게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제 앞을 보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는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이신지 증명하기 위해 먼저 높은 왕좌에 앉지 않으십니다. 길가에 멈추어 서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 손을 대십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들이 보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는 더 이상 누가 첫째인지 묻는 질문이 없습니다. 누가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지 다투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던 두 사람이 눈을 뜨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분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들 앞에는 방금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내주러 가신다고 말씀하신 분이 걸어가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0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왕좌를 향한 다툼이 아니라, 눈을 뜬 사람들이 섬기러 오신 왕을 따라가는 모습으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