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비유와 갈릴리 활동

산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마태복음 17장에는 두 개의 산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신 높은 산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하얗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빛나는 구름 속에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말씀 속에서 가리키시는 산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고 말할 것이고, 산이 옮겨 갈 것이다」라고 하신 그 산입니다(17:20).

그런데 두 산 사이에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몹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넘어지고 물속에 빠집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산 위에서는 세 제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늘의 목소리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밝혀 주었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났고, 한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아이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합니다.

산 위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영광은 산 아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없는 영광이 아닙니다.

하늘의 목소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아이를 고치시고, 자신이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자리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서는 전혀 다른 사건이 등장합니다.

성전세를 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세금을 내라고 베드로에게 이르십니다.

마태복음 17장은 이처럼 한 가지 질문을 여러 방향에서 풀어 갑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은 자신의 권위를 어떻게 사용하시는 분입니까?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717장 본문 읽기 →

엿새 뒤, 높은 산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영광

마태복음 17:1–3 본문 →

왜 마태는 「엿새 뒤」라고 기록했을까요?

엿새 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마태복음 17:1 · 두루새김

마태는 복음서의 모든 사건에 정확한 시간 간격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분명하게 「엿새 뒤」라고 말합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밝히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막으려 했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어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21–28).

이제 엿새가 지난 뒤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 예수님의 영광을 봅니다. 시간 표현은 두 사건을 연결합니다. 고난을 예고하시고 앞으로 올 영광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엿새」라는 숫자에는 구약의 배경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24:15–18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자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산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었으며, 일곱째 날에 여호와야훼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높은 산, 엿새라는 시간, 하나님의 영광, 구름,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두 이야기에 함께 나타납니다.

마태가 출애굽기 24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고, 두 사건의 시간 계산이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들이 함께 나타나는 모습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의 계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의 얼굴도 빛났는데, 예수님의 빛은 무엇이 다릅니까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옷은 빛처럼 하얗게 되었습니다.마태복음 17:2 · 두루새김

「모습이 달라졌습니다」(μεταμορφόομαι)는 형태·모습과 관련된 동사로,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가 이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태는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여러 차례 밝혔고, 지금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제자들 앞에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출애굽기 34:29–35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여호와야훼와 말씀을 나누고 내려왔을 때 얼굴에 빛이 나타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얼굴을 두려워하자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차이도 보입니다. 모세는 여호와야훼와 말씀을 나누고 내려온 뒤 얼굴에 빛이 나타났지만, 마태는 예수님께서 다른 존재에게서 빛을 받으신 뒤 그 빛을 반사하셨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를 근거로 모세는 반사된 영광을 나타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내보이셨다고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마태가 그 빛이 물리적으로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더 분명한 것은 모세에게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영광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 이제 예수님에게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16장 마지막의 약속과도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자기 나라 안에서 오시는 것을 보기 전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셨고(16:28), 이제 세 제자가 예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면, 또는 앞으로 있을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해석에는 앞뒤 흐름에 강한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16:28의 인자의 오심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여전히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 예고를 들은 직후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임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참으로 누구신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왜 나타났을까요?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마태복음 17:3 · 두루새김

구약의 수많은 인물 가운데 왜 하필 이 두 사람일까요?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은 모세가 율법을, 엘리야가 예언자들을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인물이고,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자들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5:17).

그러나 이것만이 두 사람의 등장 이유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출애굽기 24장, 33–34장), 엘리야는 호렙산에서(열왕기상 19:8–18)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했습니다. 또 말라기 4:5–6은 여호와야훼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장면에는 율법과 예언자의 증언, 산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시, 앞으로 올 구원을 준비하는 역할이라는 여러 주제가 함께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 대화의 내용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9:31에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떠나심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설명이 있지만, 마태의 장면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분의 계시를 경험했던 두 사람이 이제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놀라운 장면을 보고 하나의 제안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전통적으로 다볼산이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진 장소로 알려져 왔고, 앞 장의 가이사랴 빌립보와 가까운 헤르몬산 일대를 후보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산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장소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 마태복음 13:43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인들이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환히 빛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원문에서는 17:2와 이 구절에 「빛나다」를 뜻하는 같은 어근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에 의인들에게 나타날 영광을 말씀하셨던 예수님에게서 이제 그 빛이 나타납니다.

초막 세 채를 짓겠다는 베드로와 구름 속의 목소리

마태복음 17:4–8 본문 →

베드로는 왜 초막을 지으려고 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 있으니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 초막 세 채를 짓겠습니다. 주님을 위해 하나, 모세를 위해 하나, 엘리야를 위해 하나를 짓겠습니다.」마태복음 17:4 · 두루새김

베드로의 말은 얼핏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을 보고 있고, 그곳에 계속 머물고 싶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초막일까요? 여기서 「초막」은 천막이나 초막, 머무는 곳을 뜻하는 말로, 이스라엘의 초막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레위기 23:39–43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초막절에 초막에 머물며 광야에서 조상들이 초막에 살았던 일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제안을 초막절과 연결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신다는 의미나 앞으로 올 구원이 완성되기를 기대하는 상징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 사건이 초막절에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고, 베드로가 절기 의식을 행하려 했다고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초막절과의 연결은 가능한 배경일 뿐 확정된 의도는 아닙니다.

베드로가 세 사람을 위해 각각 하나씩 초막을 짓겠다고 한 것을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같은 수준으로 여긴 잘못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가능성은 있지만, 베드로가 일부러 세 사람의 권위를 같게 만들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는 그의 말을 조심스럽게 기록합니다. 베드로는 「원하시면」 하고 예수님께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눈앞에 펼쳐진 영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자신이 생각한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동안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는 내게 기쁨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복음 17:5 · 두루새김

베드로의 말이 끝나기 전에 구름이 나타나고 목소리가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제안에 답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늘의 목소리가 그 장면의 의미를 밝힙니다.

구약에서 구름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24:15–18에서는 구름이 시내산을 덮고, 40:34–35에서는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합니다. 이곳의 빛나는 구름도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목소리의 앞의 두 문장은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셨을 때 들린 하늘의 말씀과 같습니다(마태복음 3:17). 그러나 여기에는 한 문장이 더 붙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빛나는 얼굴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떠올리게 하는 구름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들려온 명령은 그 광경을 더 오래 바라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신지 보여 주는 계시는, 결국 그 아들의 말씀을 듣게 하는 데로 향합니다.

여기에는 신명기 18:15의 배경이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세우실 것이며 백성은 그 예언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본래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점을 치거나 다른 민족의 종교 관행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예언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신명기 18:9–22). 모세가 등장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을 앞 장과 연결하면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당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선생님이시므로 강의를 잘 들으라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고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도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모습만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가실 길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구름 속의 목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고, 몹시 두려워합니다. 마태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하늘의 목소리 뒤에 놓아, 그 두려움을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과 직접 연결합니다.

예수께서 다가와 그들에게 손을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마라.」마태복음 17:7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손을 대십니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멀리서 명령만 내리지 않으십니다. 해처럼 빛나는 영광을 지니신 분이, 그 영광을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와 손을 대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제자들을 두려움 속에 버려두지 않고 일으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자 뜻밖의 광경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께서만 계시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마태복음 17:8 · 두루새김

모세도, 엘리야도, 빛나는 구름과 하늘의 목소리도 더 이상 묘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 남아 계십니다.

이것을 모세와 엘리야의 가르침이 모두 폐지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장면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에 제자들의 시선이 머무는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에게서 이어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반복하시는 또 한 사람의 예언자가 아니십니다.

산 위의 놀라운 광경은 예수님 자신에게로 모여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곳에 머물자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산에서 내려가시며 뜻밖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9:6에서는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이유로 두려움이 설명됩니다. 마태는 베드로의 말에 그런 설명을 붙이지 않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뒤 제자들이 엎드려 두려워했다고 기록합니다. 또 이 장면은 다니엘 10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은 영광스러운 존재를 보고 힘을 잃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고, 손이 그에게 닿아 그를 일으키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습니다(다니엘 10:8–12, 18–19). 마태가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두려워 엎드린 사람이 손길과 말씀으로 다시 일어나는 흐름이 닮아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 엘리야는 이미 왔는데 왜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마태복음 17:9–13 본문 →

왜 예수님께서는 이 광경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예수께서 그들에게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너희가 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복음 17:9 · 두루새김

이 명령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런 놀라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광경을 말할 수 있는 때를 정하십니다. 그 영광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아직 일어나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임당하셔야 하고, 다시 살아나셔야 합니다.

산 위에서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죽임당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보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함께 생각할 때 이 영광이 어떤 의미인지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영광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난의 길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길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말은 틀렸을까요?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왜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복음 17:10 · 두루새김

조금 전 그들은 산 위에서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에는 구약의 근거가 있습니다. 말라기 4:5–6에서 여호와야훼는 크고 두려운 자신의 날이 오기 전에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시고,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이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의 사명은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날이 오기 전에 백성이 돌이키도록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오는 것은 맞다. 그는 모든 것을 다시 바로잡을 것이다.」마태복음 17:11 · 두루새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자기들이 하고 싶은 짓을 다 했다. 인자도 그와 같이 그들에게 고통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17:12 · 두루새김

엘리야가 모든 것을 다시 바로잡을 것이라는 앞으로의 일과, 엘리야가 이미 왔다는 일어난 일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 긴장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한 해석은 예수님께서 먼저 말라기의 예언이 옳다고 인정하신 뒤 그 예언이 이미 세례자 요한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밝히신다고 보며, 「다시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미래 표현은 예언의 관점에서 그 약속을 다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요한을 통해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면서도, 미래 표현을 근거로 엘리야의 사명이 앞으로 더욱 완전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를 가리키시는지는 마태가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17:13).

요한은 헤롯에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지적했고, 그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목이 베였습니다(14:3–12). 사람들은 요한이 어떤 사명을 맡은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자기들이 하고 싶은 짓을 다 했습니다.

여기서 무서운 점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정작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문제는 엘리야가 언제 오는가 하는 시간표에만 있지 않고, 그가 왔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있습니다.

요한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님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12절 끝의 「인자도 그와 같이 그들에게 고통을 받을 것이다」에서 이야기는 엘리야에 관한 예언에서 다시 예수님의 고난으로 돌아옵니다. 요한과 예수님의 사명과 죽음의 의미는 구별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사람들의 거부와 폭력에 부딪힌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요한의 죽음과 자신의 고난입니다. 영광스러운 계시를 경험했다고 해서 제자들이 고난을 지나지 않는 구원의 길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길은 산 위에 머무는 길이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이미 누군가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는 아버지입니다.

고통받는 아이와 고치지 못한 제자들

마태복음 17:14–20 본문 →

산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는데, 산 아래에는 고통받는 아들이 있다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돌아오시자 한 사람이 다가와 무릎을 꿇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주님, 제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뇌전증을 앓아 몹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넘어지고 물속에 빠집니다.」마태복음 17:15 · 두루새김

산 위에서는 하늘의 목소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합니다. 두 아들을 하나씩 짝지은 비유로 볼 근거는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신지 드러나는 장면과 고통받는 인간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이어집니다.

그에게 아들의 상태는 계속 생명을 위협하는 실제적인 위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도움을 구해 보았습니다. 「아이를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지만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습니다」(17:16). 예수님께서 산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아이를 데려갔을 가능성이 자연스럽지만, 본문은 그때의 상황을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18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본문이 전하는 특별한 사건이며, 오늘날의 뇌전증이 귀신 때문에 발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발작 질환에 관한 일반적인 의학적 설명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강하게 책망하셨을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느냐?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 그 아이를 이리 내게 데려오너라.」마태복음 17:17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예상보다 강합니다.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일까요,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일까요?

본문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라고 부르므로, 특정한 한 사람에게만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제자들의 믿음 부족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20절에서 분명해지지만, 「세대」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 전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비뚤어진」은 지식이나 능력의 부족을 넘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태도가 어그러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를 지적하시지만 아이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자 귀신이 나갔고, 「아이는 바로 그때 나았습니다」(17:18).

제자들은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왜 귀신을 내쫓지 못했을까?

제자들은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희는 그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17:19). 마태복음 10:1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영들을 다스릴 권위를 주셨고, 그들은 귀신을 내쫓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패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고 말할 것이고, 산이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없을 것이다.」마태복음 17:20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는 정확한 방법을 몰랐다거나 의식이나 기도의 형식을 잘못 사용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적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권위를 받았다고 해서 그 권위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온 자신들의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

믿음이 적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하셨는데,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것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작은 믿음도 충분하다는 것입니까?

앞서 마태복음 13:31–32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자라나면 큰 식물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겨자씨를 믿음에 적용하십니다.

본문은 믿음이 일정한 수치에 도달하면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계산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것을 사용하여 믿음의 크기와 그 믿음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일 사이의 뜻밖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충분한 크기의 믿음을 쌓지 못했다는 뜻보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행하는 자리에서 그분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했다는 문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을 옮긴다는 모습은 불가능해 보이는 큰 일을 이루는 능력을 가리키는 과장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이 산의 위치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끝없는 물리적 능력의 약속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에서 문제는 제자들이 고통받는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는 사실이고,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 앞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만든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께 원하는 일을 반드시 실행하도록 만드는 기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는 분이고,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뒤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핵심을 자신의 뜻을 끝까지 이루어 내는 능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은 약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의지하는 분은 작지 않습니다.

산 위의 영광과 산 아래의 실패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다가와 손을 대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고통받는 아이를 데려오게 하시고 고치셨습니다. 두 장면 모두에서 결정적인 일을 행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신앙에는 영적인 체험과 실제적인 봉사가 모두 필요하다는 교훈으로만 정리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마태가 보여 주는 것은 제자들의 역할보다, 산 위에서도 산 아래에서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아들이며, 고통받는 사람을 회복시키시고,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계속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일을 경험한 뒤에도 또다시 어려운 말씀을 듣습니다.

조금 더 깊이

「뇌전증을 앓아」라고 옮긴 그리스어 셀레니아조마이는 본래 달과 관련된 표현으로, 고대에는 발작과 같은 증상을 달의 영향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고대의 질병 이름과 현대 의학의 진단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비뚤어진 세대」라는 표현은 신명기 32:5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의 노래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돌보셨지만 신실하지 못하고 어그러진 세대로 묘사되는데, 주제 면에서 연결될 수 있을 뿐 예수님께서 그 구절을 정확하게 인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또 17:20 다음에 곧바로 17:22가 나오는 것은 실수가 아닙니다. 일부 사본에는 17:21에 기도와 금식에 관한 말씀이 있지만,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 등 중요한 고대 사본에는 없으며 주요 비평 본문도 그 절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9:29의 평행 말씀에서 영향을 받아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널리 논의됩니다.

다시 들려온 죽음의 예고 — 제자들은 왜 몹시 슬퍼했을까

마태복음 17:22–23 본문 →

갈릴리에 함께 모여 있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복음 17:22 · 두루새김
「그들은 인자를 죽일 것이고, 인자는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제자들은 몹시 슬퍼했습니다.마태복음 17:23 · 두루새김

16장에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이 담고 있는 상황은 매우 무겁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로 선언되시고, 얼굴이 해처럼 빛나셨던 분이 인간에게 붙잡히고 죽임당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미리 밝히시고,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실 것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32는 제자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께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지만, 마태는 그들이 몹시 슬퍼했다고 서술합니다. 마태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님께서 죽임당하실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 슬퍼합니다. 산 위에서 영광을 보고 산 아래에서 아이가 회복되는 일도 경험한 그들에게, 이 말씀은 기대하던 영광의 모습과 쉽게 어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은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을수록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 더욱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에게 닥칠 고난과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도 들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며, 이 표현과 「사람들의 손」에 모두 「사람」이라는 같은 낱말이 사용됩니다. 그리스어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표현이 한 문장에 놓이지만, 두루새김은 앞의 표현을 「인자」로 옮겼으므로 이 반복이 번역 문면에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들들은 자유롭다 —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세금을 내도록 하셨을까

마태복음 17:24–27 본문 →

디드라크마는 어떤 돈인가

그들이 가버나움에 이르자 두 드라크마의 성전세를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여러분의 선생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세요?」마태복음 17:24 · 두루새김

「두 드라크마의 성전세」는 두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일반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위한 반 세겔의 납부금으로 이해됩니다. 출애굽기 30:11–16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셀 때 성소의 세겔을 기준으로 반 세겔을 내도록 명령하시고, 이 돈은 회막을 위한 봉사와 연결됩니다. 제2성전 시대에는 성전 예배와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위해 반 세겔에 해당하는 돈을 내는 관행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세금을 걷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직접 묻지 않고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내세요.」 베드로가 집에 들어가자, 예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습니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의 왕들은 물건에 매기는 세금이나 사람마다 내는 세금을 누구에게서 받느냐? 자기 아들들에게서냐, 다른 사람들에게서냐?」마태복음 17:25 · 두루새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시는 모습을 이전에 보았을 수도 있고, 당연히 내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는 그 근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지 않고 먼저 대답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집에 들어가자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베드로를 「시몬아」라고 부르셨을까?

앞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시며 베드로라는 이름과 교회에 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다시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질문하십니다. 이 사실만으로 특별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시몬에게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누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마태복음 17:26 · 두루새김

왕이 자기 아들들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집에 속한 아들들은 어떤 위치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아들 되심과 깊이 연결됩니다. 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드러났고, 가버나움에서는 그 아들로서의 지위가 어떤 자유를 뜻하는지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해석이 갈리는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 자신에게만 적용될까요, 제자들까지 포함할까요?

예수님의 특별한 아들 되심이 중심이라는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없다는 설명에 근거합니다.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자유를 읽는 해석은 예수님께서 단수 「아들」이 아니라 복수 「아들들」을 말씀하시고, 자신과 베드로의 세금을 한꺼번에 내도록 하신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본문은 그 자유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특별한 지위와 그분을 따르는 베드로가 그 일에 함께 관계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자유롭다면 왜 내는가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바다로 가서 낚싯바늘을 던져라. 맨 먼저 낚여 올라오는 물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찾을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의 세금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복음 17:27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아들들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밝히신 바로 뒤, 그 자유를 이번 상황에서 행사하지 않기로 하십니다. 자신에게 세금을 낼 의무가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자신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세금을 내게 하십니다.

의무가 있기 때문에 내는 것과, 의무가 없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내는 것은 같은 행동이어도 그 의미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지위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지위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자유롭게 판단하시고 그 자유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언제나 논쟁을 피하고 모든 사람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로 만드는 전통을 강하게 책망하셨고(15:3–9), 하나님의 뜻과 충돌하는 문제에서는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무조건적인 양보나 눈치를 보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를 판단하시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6:23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에게 걸림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사용된 낱말은 스칸달론(σκανδαλίζω)이고, 17:27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에는 같은 어근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앞 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막으려다가 그분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번 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고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예수님을 이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당한 권리조차 항상 끝까지 주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는 사실과 지금 그 권리를 반드시 행사해야 한다는 판단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고기 입에 있는 스타테르 한 닢

예수님께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시고, 그 물고기의 입을 열면 동전 하나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타테르(στατήρ)는 당시 널리 쓰이던 화폐로, 이 문맥에서는 일반적으로 네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은화로 이해됩니다. 동전 한 닢이면 예수님과 베드로 두 사람의 납부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베드로가 실제로 물고기를 잡고, 동전을 발견하고, 세금을 냈다는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신비한 동전이 나타나는 과정보다, 예수님께서 왜 그 돈을 내도록 하셨고 어떻게 마련하라고 명령하셨는지를 들려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본문을 성전세로 읽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마태복음이 기록된 당시의 로마 지배 상황을 고려하여 주후 70년 성전 파괴 이후의 유대인세(fiscus Judaicus) 문제까지 반영된 이야기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 시점에서 묻는 돈은 통상적인 성전 납부금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산에서 시작하여 바다에서 끝나는 이야기

마태복음 17:1–27 본문 →

17장은 세 제자와 함께 올라가신 높은 산에서 시작하여, 가버나움의 집 안에서 베드로에게 바다로 가라고 하시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장소는 산에서 집으로,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일상적인 납부금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분은 하늘의 목소리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선언한 바로 그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아들이시고, 고통받는 사람을 회복시키시는 분이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난의 길을 가실 분이고,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마태가 보여 주는 예수님의 위대함은 고난이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위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권위를 지니고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고난의 길을 가시며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장의 마지막에서 제자들이 들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바다에 낚싯바늘을 던지고, 자신과 예수님을 위한 세금을 내라는 구체적인 명령입니다.

높은 산에서 해처럼 빛나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가버나움의 집 안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으시는 길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그 길에 함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는 그 후의 일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바다로 가는 모습도,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보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7장은 빛나는 얼굴과 하늘의 목소리로 시작한 뒤, 「바다로 가서 낚싯바늘을 던져라」라는 베드로에게 건네진 하나의 명령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